“아무것도 아니에요.”심지안은 말을 바꾸고 창백한 얼굴로 그를 향해 머리를 저었다. 고청민의 눈길은 그녀의 얼굴에 몇 초 동안 머물렀는데 왠지 불안했다. 도대체 무슨 녹음인지...성연신은 자신의 입으로 직접 심지안에게 과거의 진실을 알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며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는 가장 먼저 홍지윤을 떠올렸다. 이때 고청민의 핸드폰이 진동하며 문자 한 통이 왔다.[홍지윤이 죽었어요. 제 아버지가 죽였어요.]발신자는 송준이었다. 고청민은 화면을 터치하던 손을 멈칫하더니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 [그냥 추측하건대 성연신이 그녀를 출국시켰다가 마침 아버지의 해외에 있는 부하들한테 들킨 것같아요. 성연신이 그녀에게 그렇게 인자할 줄은 몰랐어요.]고청민은 핸드폰을 거두고 백미러를 통해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바라보며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어디 성연신의 선량함이겠는가. 심지안이 최면에 걸리기 전에 홍지윤에게 주었던 약속일 뿐이었다. 성수광의 입에서 나온 녹음은 아무래도 홍지윤이 남긴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심지안은 이미 모든 것을 알았을 텐데 여전히 그와 성씨 가문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은 성연신보다 그를 믿는 것임을 말해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청민은 강한 불안을 느꼈다. 성연신의 존재는 시한폭탄과도 같아 어쩌면 그가 따라 가게 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이미 고청민이 비밀 조직의 암살에 가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은 자신을 가리킬 증거가 없는 것은 확실하지만 일단 그가 결혼식에서 함부로 무슨 말이라도 하면...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가 일지 않겠지만 혹시 영향을 미칠까 봐 불안했다...“할아버지, 오늘 성씨네 가문에서 사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저와 지안 씨 결혼식에 전남편 가문이 나서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네요.”고청민은 성동철에게 말했다. “안돼. 공개적으로 사과를 받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우리 가문을 함부로 업신여김이나 당한다고 생각할 거야.”성동철은 질책하며 거절했다.
헤드라인에 성연신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전와이프가 결혼하여 원망이 너무 깊어 충격을 받아 귀신이 되었나?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성연신과 심지안에게 쏠려 마치 이들이 오늘의 주인공인 듯 머릿속으로 한차례의 연극을 환상하고 있었다. “나는 좀 멀리 떨어져 있어야겠네. 점쟁이가 내가 양기가 적다고 했는데.”“멀리 가긴, 이 대낮에 땅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못 봤어?”“성연신의 안색이 어두워 보이지 않아? 얼굴에 혈색도 없고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 세상에 귀신은 없어.”“저리 꺼져. 우리집 녀석은 큰 재난에도 죽지 않는데, 뭘 그렇게 함부로 지껄이나?”성수광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말을 듣고 그들은 즉시 입을 다물었지만 눈에 비친 공포는 거두지 못했다. 사실 그들이 그러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성연신은 줄곧 존귀하고 도도한 이미지였는데 지금은 피로 물든 양복을 입고 이마에는 찰과상을 입었고 병적인 상태에서는 한기가 느껴져 마치 지옥에서 나온 사자 같았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몇년전부터 많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진작 들었는데 오늘 보니 비록 휠체어에 앉아있기는 하지만 정신은 그 연세에 비해 괜찮은 편이었다. “약탈하러 왔어요?”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터져 올랐고 변혜영의 선하지 않은 눈빛이 심지안에게 떨어졌는데 그 뜻은 명백했다. “아니요. 공주님께서 헛소리를 하시네요. 명성이 한 여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여자로서 잘 알 텐데,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네요. “성연신은 얇은 입술로 담담히 해석했지만 그 위협적인 뜻은 알아듣기 어렵지 않았다. 심지안은 고개를 들어 성연신의 조각상 같은 옆모습을 바라보았는데 눈에는 설렘이 스쳐 지나갔다. 곧바로 감정을 누르며 이성이 우위를 점했다. 이런 화면을 초래한 것은 여전히 그 자신이 아닌가?능청스럽다. 변혜영은 천성적으로 당당하고 고귀하다. 누가 감히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난처
변혜영은 분노하며 말했고 눈에는 질투심으로 꽉 찼다.어머니와 오빠의 시선이 다 그년에게만 쏠려있어 그녀는 그들에게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임시연이 그녀의 사랑을 빼앗은 것이다.변요석은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런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그만해, 이런 일들은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오늘은 심지안의 결혼식이야. 분위기를 망치려 하지 마.”“내가 망치려 하지 않아도 어차피 성연신이 망쳐버릴 거잖아요.”“내가 성연신을 단속할 수는 없어도 너 하나는 단속할 수 있어.”변혜영은 내심 분개하며 애원에 찬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버지도 왜 그렇게 편애하세요. 다들 너무 싫어요. 송준처럼 날 이뻐해 주지도 않잖아요.”변요석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어 변혜영의 투정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그는 변혜영을 대충 몇 마디로 달래고 성연신을 찾으러 성씨 장원에 들어갔다.장원에서 결혼식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꽃을 든 어린이, 반지, 웨딩드레스, 정장, 그리고 결혼식 하객들의 축복까지 보탠 이 장면은 꿈처럼 아름다웠다.“신랑과 신부, 반지를 교환해 주세요.”목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쳐다보았다.고청민은 앞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고 준비한 반지를 부드럽게 심지안의 약지에 끼웠다.반지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고 그 다이아몬드에서 눈부시게 뿜어나오는 황홀한 빛이 심지안의 눈에 비추자 그녀의 시선이 갑자기 흐릿해졌다.심지안은 맞은편에서 빛을 막고 서 있는 고청민을 분간할 수 없어 손으로 눈을 반복적으로 비볐다. 그러나 고청민의 얼굴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처럼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심지안은 눈앞의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고 무척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마치 이 칠흑 같은 어둠이 그녀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속으로 빠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심지안은 이 흐리멍텅한 상황에서 문득 방언니를 떠
성연신의 냉기가 감도는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그에게 비친 빛 때문에 주변의 차가운 공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성연신 특유의 다가가기 어려워 보이던 분위기는 어느새 친근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안철수는 자기 몸에서 삐죽삐죽 돋아난 닭살을 훌훌 털어내며 사랑의 힘이 정말로 위대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만 년 동안 얼어붙었던 빙산도 사랑의 힘으로 따뜻한 햇빛으로 변신했으니까. 심지안은 성연신이 자기를 빤히 쳐다보자 어색하게 머리를 돌렸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저녁에 유전자 검사 결과를 보러 갈 거예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웨딩드레스의 치마를 움켜쥔 채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식장은 무척이나 떠들썩했고 손님들은 너도나도 신랑과 신부에게 축복과 선물을 전달했다. 성동철은 고청민과 심지안을 데리고 식장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술을 건넸다. 대다수 손님은 눈치껏 성씨 집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유독 송준만이 눈치도 없이 음침하게 웃으며 와인잔을 들고 주동적으로 다가와 술을 건넸다. “지안 씨 체면은 정말 대단하네요. 결혼식에 전남편까지 동원해서 경호하게 하다니, 진짜 기가 막히는 능력이군요.” 심지안은 그의 뒤에서 의기양양해하는 변혜영을 발견했고 그제야 눈앞의 사람이 변혜영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임시연이 정말로 임신한 걸까? 변석환이 이 정도로 오금이 쑤시는가... 임신 초기 3개월은 뱃속의 태아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성생활이 허락되지 않는다.성동철은 송준의 낯선 얼굴을 노려보다가 정색하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우리 성씨 가문에서 당신을 초대한 적이 없는 것 같거든요.”“성동철 씨, 안녕하세요. 이건 제 명함입니다. 저는 보잘것없이 작은 그룹의 이사장입니다. 우린 예전에 서로 만난 적이 없지만 제가 명망 높은 성동철 씨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기회만 된다면 귀사와 협력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변혜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럼 지금 나랑 돌아가서 우리 오빠에게 말해. 임시연은 비밀 조직의 사람이니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장 폭로해.”송준의 입가에 눈에 띄지 않는 미묘한 교활함이 미소를 타고 번졌다.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변혜영에게 말했다. “혜영아, 임시연은 비밀 조직과 아무런 관련도 없어. 예전에 비밀 조직이 그녀를 성연신 곁에 보낸 건 사실이야. 하지만 지금 그녀가 변석환을 따르는 건 순전히 그를 좋아하는 마음에서야. 그녀가 이기적인 목적을 갖고 네 오빠에게 접근할 수는 있어. 근데 요즘 세상에 현실적이지 않은 여자가 어디에 있어? 결혼은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경제력이 따라줘야 해.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모아둔 돈도 있어야 앞으로 근심 걱정 없이 평범한 삶을 즐길 수 있지, 안 그래?” “게다가 네 오빠도 임시연을 진심으로 좋아하잖아.” 이 말에 변혜영은 반박할 수 없었다. 여자들이 돈과 권력을 탐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여자들은 기댈 곳을 찾게 된다. “임시연과 함께 심지안을 상대하기로 생각해 본 적은 있어?”변혜영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심지안도 우리 아버지의 딸이야!” “하지만 네 아버지는 그녀를 지나치게 편애하고 있잖아.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심지안이 네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이 온다면 두렵지 않겠어?” 송준은 유혹적인 말투로 목소리를 길게 내뺐고 변혜영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난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어. 단지 황궁에서의 네 자리가 심히 걱정될 뿐이야...”“그만해!” 변혜영이 큰 소리로 고함을 쳤고 그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을 거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녀를 그렇게 대할 수 없을 거야... 송준의 눈가에 목적을 달성한 희열이 반짝였지만 그는 이내 변혜영의 말대로 고분고분 입을 다물고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이 세상 누구도 널 원하지 않더라도 난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변석환이 제때 변
고청민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냉큼 선물을 받았다. “고마워.”하지만 심지안은 너무 창피해 구멍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었다. 그녀는 이 약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그때, 반대편에서 케이크를 먹으며 허기를 채우던 진유진이 심지안을 향해 소리쳤다.“지안아, 술 다 마셨어? 네게 할 얘기가 있어.”결혼식도 끝났으니 정욱에게서 들은 얘기를 심지안에게 전해줘야 했다.심지안은 마치 지푸라기도 잡은 듯 고청민의 손을 뿌리치고 진유진을 향해 대답했다. “알았어, 지금 갈게.”고청민은 그녀가 떠나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진유진에게 돌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카로운 표정을 지은 채 발걸음을 돌려 심지안을 따라가려 했다.그러자 민채린이 슬쩍 그를 막아 나섰다. “기다려봐, 네게 물어볼 게 있어.”“뭔데.” 고청민은 동작을 멈추지 않고 여전히 심지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심지안의 상태가 좀 이상하지 않아?” 이 말에 고청민은 멈칫하더니 시선을 심지안에게서 거두고 민채린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이상한데?”“전체적으로 정신상태가 몽롱해 보여... 간단한 화장으로는 음침한 얼굴색을 가릴 수 없어.”“요 며칠 동안 정말 많은 일이 발생하긴 했어.” 고청민은 무심코 심지안의 상태에 대해 해명했다. “그게 다야?”“그럼 뭐가 더 있어?”“지난번에 네가 나에게 최면을 걸어준 건 기억나?”고청민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기억나. 무슨 일이라도 있어?”“내가 최면을 받은 그 며칠 동안 지금의 심지안과 비슷한 상태였다고 생각해.”민채린은 물러서지 않고 그의 눈길을 받아들이며 뜸 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심지안에게 최면을 걸었지? 내 말이 틀려?”지난번 황궁에서 심지안과 성연신을 목격했을 때 그들의 관계는 여전히 애매해 보였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두고 경쟁하는 구도에서 심지안이 누구에게 호감을 더 느끼는지는 여자인 민채린이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고청민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그는 내심 평온한 목
심지안은 큰 충격에 빠졌고 이내 깊은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왔다.고청민이 이 정도로 심지안을 잘 대해주는데 그녀는 그를 의심이나 하고 있었다...만약 그가 정말로 비밀 조직과 연합해 아이를 다치게 한 것이라면 왜 지금 도리어 아이를 받아들이려 하는 걸까?설마 고청민이 지금 그녀 앞에서 연기를 하는 걸까?연기를 하는 거라...심지안은 눈앞에 서 있는 해맑은 남자를 올려다보며 혼란스럽고 의심스러운 감정이 마음속에서 요동쳤다.바로 그때, 갑자기 뭔가가 번개처럼 번쩍이며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한순간의 일이라 미처 잡지 못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매우 익숙한 느낌이었고 지금 눈앞의 장면과 겹치면서 강렬한 데자뷔를 느꼈다...심지안은 이쁜 눈썹을 찡그리며 이 새로운 발견에 속수무책인 자신이 원망스러웠다.더군다나 그녀가 이런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지안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진유진이 타고난 사랑꾼처럼 말하는 고청민을 흘깃 쳐다보고는 심지안의 생각을 끊어버리고 입장을 물었다.그녀는 고청민이 심지안을 끔찍하게 대해주는 걸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고청민이 성우주의 존재를 완전히 신경 쓰지 않고 심지안과 함께 책임을 짊어지겠다는 태도는 그녀의 예상을 한참이나 빗나갔다. 이런 말이 있는 것 같다. 그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이 세상에 백기를 들고 그녀에게 완전히 투항한다고 공포한다고. 하지만 심지안은 고청민과 달리 우물쭈물하며 쉽게 진심을 내놓지 않았다. 외부인들에게는 심지안이 지나친 사랑을 받아 징징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안이 어떤 판단을 하든 무조건 심지안의 편을 들 생각이었다. 사랑은 이익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동등한 헌신만으로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심지안은 주먹을 꽉 쥐고 고청민의 사랑으로 가득 찬 눈길 속에서 천천히 머리를 들어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오늘밤 아이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기다릴
안철수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군말 없이 급히 민채린을 찾으러 갔다.성씨 가문의 장원은 규모가 엄청났다. 장원이라고 부를 뿐이지 사실 궁전과 별반 다른 점이 없다고 볼 수 있었다.결혼식 구역은 아름다운 동화 세계로 꾸며져 있었다. 휴식 공간, 체스실, 야외 마장, 수영장 파티... 심지어는 어린이 놀이터까지 마련되어 있었다.하지만 안철수는 이렇게 큰 규모의 장원에서 이내 민채린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그녀의 성격으로 추측해 보면 분명 수영장 파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안철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검은 비키니로 갈아입어 수영장 의자에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를 약간 구부려 섹시한 몸매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었다.여러 남자가 다가와 그녀에게 작업을 걸었지만 민채린의 기준과 거리가 멀어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말았다.안철수는 그녀를 흘깃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여자 탈의실 쪽으로 걸어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여시 같은 년...”만약 그런 약이 더 있다면 무조건 그녀의 옷이나 가방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그녀를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를 찾아도 주지 않을 테니까. 안철수는 우람진 체형 때문에 여자 탈의실에 들어갈 때 꽤 애를 먹었다. 잠입에 성공한 후 그는 금방 민채린의 가방을 찾아냈다.안철수는 가방 안의 물건들을 모두 빼내어 뒤적이다가 운이 좋게도 두 개의 알약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알약은 아주 작았고 크기가 참깨와 비슷했다.안철수는 이 알약들이 해독제가 맞는지 확인할 수 없어 손바닥에 놓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아마도 너무 집중해 살펴본 탓인지 그는 밖에서 들리는 가벼운 발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갑자기 탈의실의 문이 와락 열렸다.민채린과 안철수의 눈빛이 정면으로 부딪쳤고 그녀는 눈앞의 장면을 보고 순식간에 쌍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X발, 이 변태 새끼야. 여자 탈의실에 들어와 무슨 파렴치한 일을 하려고 하는 거야!”그녀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