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 대인은 냉궁에 이르러, 손수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는 봉구안을 보자 불같이 화를 냈다. ‘어찌 이리 안일하게 지내는 게냐!’‘가족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못된 것, 내 어쩌다 이런 매정한 딸을 두었단 말인가!’ 이를 본 연상이가 나아가며 고하였다. “대감 어르신!” 봉구안도 눈을 들어보니, 화가 나 얼굴이 붉어진 봉 대인의 모습이 보였다. …… 오늘따라 햇살이 따스해 많은 한기를 몰아내었으나, 냉궁의 내전에는 해가 들지 않아 음침하고 차가웠다. 연상이 간단히 불을 피워 방을 데웠고, 봉 대인은 체면도 잊고 불가에 앉아 얼어붙은 손을 녹였다. 봉구안은 멀찍이 서서 직접 등불을 밝혔다. 봉 대인이 목에 힘을 주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 내 확실히 명부를 바꾸었으나, 그건 다 널 위해서였다!” “며칠간 밖에서 분주히 발품을 팔며 고생하고 있는데, 너는 오히려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구나!” “어찌 황제 폐하께 나를 벌하라 일렀단 말이더냐!” “내가 죽으면 봉가는 끝이다! 너 또한 맘이 편할 줄 아느냐!” “좋다. 네게 아비인 나를 생각할 마음이 없다 해도, 어미는? 네 큰오라비는? 그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더냐!” 봉 대인이 쉴 새 없이 타이르며 말하였으나, 봉구안은 딱 한 마디만 내뱉었다. “제 명에 없는 것은 욕심낼 필요가 없다 생각합니다.” 봉 대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벌떡 일어섰다. “내 그 명부 따위 믿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현 상황을 떠올린 봉 대인은 다소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간청하였다. “황후, 제발 봉가와 네 어미를 위하여 황제께 청을 올려 다오. 황제가 너를 여전히 지켜주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내 들었느니라…” 봉구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황제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사옵니까?” 봉 대인은 황제가 한 말을 곧이 곧대로 옮겨 전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덧붙였다. “지금으로선 네가 아비와 봉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봉구안
밤이 깊었다. 봉구안은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궁을 빠져나왔다. 냉궁은 영화궁과는 달라, 경비도 적고 방어가 느슨하여 누구도 황후의 이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궁 밖, 오백은 소장군의 신호 화살을 보고 곧장 허름한 절로 달려갔다. “소장군!” 그가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봉구안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예리한 눈빛만을 드러냈다. “조사는 어떻게 되었느냐?” “소인은 줄곧 교먹을 추적하였사온데, 엊그제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사옵니다.” “교먹의 저택 앞에 있는 채소 장수가 매우 수상하였습니다.” “소인은 잠시 더 지켜본 후 움직일 생각이옵니다.” 봉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심하는 것이 맞다.” 오백은 오히려 그녀의 상황을 염려하였다. “소장군, 듣기로는 태중에 아이가 있다고 하였는데, 또한 냉궁에 갇히셨다 들었사옵니다. 괜찮으시온지요?” 봉구안은 냉정하게 답했다. “무사하다.’“오늘 내가 궁을 나선 이유는 세 가지를 지시하기 위함이다.” “첫째, 교먹의 조력자를 찾아내거라.” “둘째, 북대영에 쓸 만한 인재가 있는지 알아보아라.” “셋째, 최근 성가신 일이 무엇인지, 면사 금패를 얻을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알아보거라.” 오백은 늘 충직하여, 무슨 일이든 맡기면 절대 태만히 하지 않았다. “예, 소인 반드시 신속히 처리하겠사옵니다!” 봉구안은 그에게 당부하였다. “무엇보다 조심하거라.” “예!” 오백이 떠나기 전,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소장군, 군기감이 교먹이 제공한 도면대로 새로운 죽화총을 만들어냈사옵니다.”“지금 교먹의 명성이 날로 커지고 있사온데, 자칫하면 소장군께서 통제하기 힘들어질까 염려되옵니다.” 봉구안은 태연히 말했다. “상관없다.” ……냉궁에서의 생활은 무미건조했으나, 한편으론 한가로웠다. 봉구안은 며칠을 지내며 오히려 영화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가빈과 강빈 두 사람이 그녀를 찾아왔다
“아, 뜨거워!” “으악! 너무 뜨거워!” 병사들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죽화총을 하나둘 내던졌다. 탄환이 그만 관중석 쪽으로 날아갔다. “폐하를 보호하라!” 어전 시위인 진길한이 재빨리 음식상을 들어 방패로 삼았다. 소욱은 태연히 앉아 있으면서도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새로 만든 이 죽화총이 완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대신들은 순식간에 몸을 피하며 혼란이 일었다. 마침내 탄환이 모두 떨어져 위험이 사라지자, 여러 관료들이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그때 교먹도 순간 멍해졌다. 어찌 된 일인가? 설계도에는 분명히 단열판이 있었는데! 다른 시령들도 설계도를 살펴보았고, 모두가 완벽하다고 했었다. 소욱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현장을 훑어보더니 교먹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 말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교먹은 곧바로 죄를 청했다. “폐하,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겠사옵니다. 원래 설계도대로만 만들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그녀는 무심코 책임을 회피하려 했고, 이를 본 군기감 사람들이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마치 설계도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책임을 전가하는 듯 보였다. 교먹은 곧 자신이 부적절한 말을 했음을 깨닫고 급히 정정했다. “아니, 혹시 제 설계도에… 설계도에 아직 미흡한 점이 있는 것 같사옵니다.” 황제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교먹의 재능을 생각하여 이번에는 그냥 넘기기로 했으나, 그는 자비로운 군주가 아니었다. “한 달만 더 주겠다.” “한 달 내에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여라.”그리 말하고 황제는 자리를 떠났다.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황제의 뒤를 따르는 자와 교먹을 위로하는 자로 나뉘었다. “맹 대인은 젊고 유능하니, 한 달이면 충분히 수습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맹 소장군께서는 좀처럼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셨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태황태후가 친히 냉궁에 오다니,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과연 봉구안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태황태후뿐만 아니라, 한 명의 궁녀도 따라왔다. 그 궁녀는 검은색 나무 쟁반을 들고 있었고, 그 위에는 보자마자 오싹한 느낌이 드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흰 비단, 무언가 담긴 그릇, 그리고 단검이었다. 연상은 공포에 휩싸여 눈이 커졌다. 태황태후께서… 설마 황후마마께 사약을 내리시려는 것인가?!! 그녀는 급히 봉구안을 돌아보았다. 봉구안은 흰 옷을 입고 서서 예를 갖추었다. 그녀의 기품은 소박한 옷차림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 물건들을 보았으나,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듯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할마마마를 뵙사옵니다.” 태황태후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느긋하게 주위로 걸어가 앉았다. “이제 내가 친히 내명부를 다스리려 한다. 이렇게라도 황상의 걱정을 덜어줘야하지 않겠느냐?” “황후, 너도 알겠지만, 근래 전조가 너로 인해 어수선하구나.” 태황태후의 눈빛과 음성에는 꾸짖음이 담겨 있었다. 마치 봉구안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듯이 보았다. 봉구안은 입을 열었다. “첩은 냉궁에 머물고 있어 전조의 사정을 알지 못하옵니다.” 태황태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도 네가 억울한 것은 알지만, 봉가가 벌인 일이니 마무리도 봉가가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본래 너에게 기이한 병을 앓는다고 핑계를 대며 봉가의 체면을 지켜주려 했느니라.” “만약 황상을 기만한 진실이 드러난다면, 너희 봉가는 멸문지화를 피하지 못했겠지!” 봉구안은 태황태후의 엄격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예.”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손하고 순종적인 듯하면서도, 동시에 무심하게 들렸다. 태황태후는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아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도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전조가 너무 압박하여, 황후를 폐위해야
태황태후는 밖을 바라보며 눈동자가 커졌다. “황상? 황상이 어찌 이곳에?” 그녀는 본래 황후를 조용히 처리하려 했기에, 이 같은 사실을 소욱에게 알리지 않았다. 소욱은 빠른 걸음으로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그는 봉구안에게 손을 대려던 궁인을 내리차며 봉구안을 감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태황태후와 정면으로 맞섰다. “할마마마, 여쭙고 싶은 것은 소신이옵니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사옵니까?” 그는 자주빛 비단옷을 입고, 그 얼굴은 차갑고도 엄숙하여 마치 만년설 같은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봉구안은 조용히 손에 쥔 암기를 거두었다. 태황태후는 자리에서 추호의 미동도 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이니라.” “봉가네 여식은 궁에 들어와서는 아니 되고, 더구나 황후 자리에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 된다.” 황제는 늘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기에, 그가 이 일을 가지고 반기를 들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소욱의 눈동자는 깊고도 어두웠다. “황후는 제가 이미 냉궁에 가두었습니다. 할마마마께서 지나치게 몰아붙이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더구나 소신은 예전부터 그 명서의 예언 따위는 믿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사옵니다.” 탕! 태황태후는 찻상을 세게 내리쳤다. “황상! 어찌하여 이리도 어리석단 말이더냐!” “저… 저 아이는… 우리 남제의 재앙이니라!” “저 아이 때문에 이제는 네가 나에게 불경한 마음까지 품게 되었구나…” 소욱은 위엄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는 더는 말을 아끼고 직접 명을 내렸다. “할마마마를 어서 만수궁으로 모셔가거라!” “건방지다!” 태황태후는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크게 소리쳤다. “오늘 나는 이 재앙을 반드시 제거하고야 말겠느니라! 황상, 어서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소욱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비록 태황태후가 데리고 온 궁인들이라도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다.
냉궁에서, 봉구안은 날아든 화살을 받았다. 화살촉에는 작은 쪽지가 꽂혀 있었다. 쪽지에는 교먹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언니, 또 언니에게 목숨을 빚졌어.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을 쉽게 찾게 놔둘리가 없잖아? 다음번엔 좀 더 영리한 이를 보내도록 해.]봉구안은 이로써, 오백이 사고를 당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해가 지기 전, 궁을 나섰다. 오백은 북대영에서부터 황성까지 그녀를 따른 충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히 그녀의 심복이자 유능한 부하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소중한 벗이기도 했다. 교먹은 그녀를 해치기 위해 이미 여러 사람을 희생시켰다. 그녀는 오백만큼은 절대 잃을 수 없었다. 그 만큼은 반드시 찾으리라 다짐하였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아무런 단서도 없이 한 사람을 찾는 것은 모래사장 속에서 바늘을 찾는 일과 같았다. 이날, 봉구안은 수많은 장소를 헤맸다. 그녀가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오직 그 채소 장수뿐이었다. 주변 백성들의 증언을 통해 그녀는 그 채소 장수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황혼 무렵. 성 교외의 한 전당포에서, 직원이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은제 가면을 쓴 한 남자가 문틀을 붙잡으며 다친 손을 아랑곳하지 않고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을 찾고자 한다.” 직원은 깜짝 놀랐다. “나으리, 손은 괜찮으십니까?” 그는 재빨리 주인을 부르러 갔다. 이 전당포 주인은 백발의 노인으로,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을 가진 노련한 상인이었다. 그는 봉구안의 얼굴에 씌어진 가면을 보고 즉시 경외심을 품은 채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며 말했다. “부맹주께서 절 찾아오실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사옵니다…” 봉구안은 이러한 인사말을 무시하고, 그 채소 장수의 초상화를 꺼내어 단도직입적으로 명했다. “이자를 찾아라!” 주인은 초상화를 받아들고 장담했다. “부맹주님께서는 안심하셔도 되옵니다. 이자가 아직 황
오백은 중상을 입었으나 깨어나자마자 소장군을 보곤 자신이 구해졌음을 알았다. 그의 상반신은 거의 모두 붕대에 감겨 있었고,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소…” 문득 방 안에 다른 이가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말을 바꿨다. “주인님.” 봉구안은 반쪽의 은제 가면을 쓴 채 그를 돌아보았다. 어의가 그녀에게 환자의 치료와 주의 사항들을 설명하자, 봉구안은 이를 기억한 후 진료비를 지불하고 친히 어의를 배웅했다. 잠시 후 방으로 돌아오니, 오백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즉시 명했다. “움직이지 말거라!” 오백은 자신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가? 오백은 고분고분 다시 누웠으나, 이를 악물며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소인은 원래 피부가 두껍고 단단하지 않습니까? 큰 일도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물론 아무 일 아닐 리 없었다. 그는 그때 칼이 몇 번이나 찔릴 때의 고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님, 그 채소 장수는…” “이미 잡았다.” 봉구안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백이 다시 말하려는 찰나, 낯선 청년이 방으로 달려들어왔다. “부맹주님! 그 채소 장수가 방금 도망치려 해서 제가 기절시켰사옵니다! 직접 심문하시길 원하실 것 같아 죽지는 않게 했사옵니다!” 청년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고, 오백은 그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주인님, 저 자는 누구입니까?” ‘어찌하여 소장군을 ‘부맹주’라 부르는 것인가?’ 봉구안이 차가운 어투로 소개했다. “그는 평안전당포의 직원이다.” “소인 최백이라 하옵니다! 형님, 형님의 성함은 오백이라 들었사옵니다…”“이 아우는 최백이니, 성은 다르지만 이름은 같사옵니다!” 어디서 형님 아우 운운이란 말인가. 이 자는 어찌 이리 친근하게 구는가. 최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부맹주님, 소인이 창작한 검법이 있으니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목소리가 우렁차
“총… 세 명이었고, 그중 둘은 자주 보지 못했습니다.” 채소 장수는 피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자주 보지 못했다는 것은, 곧 보긴 봤다는 말이었다. 봉구안은 다시 물었다. “그 두 명의 특징이 무엇이냐.” “한 명은 얼굴에 큰 점이 있고, 다른 한 명은… 도박장을 좋아하는 상습 도둑입니다. 그놈은 입이 뾰족하고 얼굴이 여우같이 생겼지요… 대인,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제가 아는 것은 다 말했습니다!” 봉구안은 단검으로 그의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교먹의 명을 따르는 것이냐.” 채소 장수는 과다출혈로 기력이 쇠한 상태였다. “저희는… 저희는 모두 조정에 의해 수배당한 강호의 대도입니다. 그 분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관아에 넘겨진다고 했습니다.”“또한 그 분의 명을 따르면 저희에게 돈을 주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 분은 시시 때때로 저희에게 독약을 먹였습니다… 해독제 제때 주지 않으면 저희는 모두 죽은 목숨이었죠.” “대인, 제가 이제 그 분을 배신했으니 살아남을 길이 없사옵니다.” “부디… 절 한 번에 죽여 주십시오!” 봉구안은 차갑고도 냉철한 눈빛으로 대답했다.“좋다.” 그리하여 그녀는 단칼에 채소 장수의 목을 그어 버렸다. 그자는 원래 중대한 범죄자이니 죽어도 아깝지 않았다. 봉구안은 칼을 집어넣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달빛이 그녀의 몸에 내려앉아 차가우면서도 맑았다. 그녀는 금덩이 하나를 던지며 주인에게 말했다. “시체는 산기슭에 묻어 주도록 하여라. 그리고 추가로 사람 두 명을 더 찾아야겠다.” 주인은 죽을힘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말했다. “명령하시옵소서!” ……감찰위. 교먹은 밤을 새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 도안을 그려보았으나 모두 쓸모가 없었다. 문제는 그 단열판의 재료였다. 그녀는 여러 책을 들춰보며 눈이 충혈될 때까지 연구했고, 마침내 ‘현영석’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을 제련하면 현영이라는 물질이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