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이 독을 먹고 난 지 고작 열네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소욱은 독을 쓴 범인을 잡아들였다. 봉구안도 그 범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희귀한 독약인 ‘혈분자’를 구했는지 궁금했다.연상이 소식을 알아왔다. “마마, 범인은 바로 이 미인이라는 자라 합니다! 정 귀인과 같은 시기에 입궁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그날 자녕궁에서 녕비마마의 생신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지 않았습니까? 이 미인이 그 자리에서 마마의 술에 몰래 독을 타 넣었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황제께서 어찌 그 사실을 알아내셨는지는 저도 알지 못했습니다. 범행이 드러난 후, 이 미인은 자결을 명 받았으며, 죽기 전 형벌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전신에 멀쩡한 피부 한 점 남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연상은 이야기를 하며 몸서리를 쳤다.밤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와 더욱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봉구안은 이 미인에 대해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이 궁 안에서 서로 해치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때로는 깊은 원한이 없어도, 단지 시기심 하나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곳이 이 궁이었다. 십여 년을 함께한 교먹도 자신을 배신했는데, 하물며 이 미인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로 악감정이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봉구안은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히 반응했다. “자, 그만 자거라.” 이 냉궁에서 그녀는 오히려 평온하게 잠들었다.연상은 봉구안이 이토록 무관심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마, 이 미인이 독을 넣어 마마를 죽일 뻔하였사온데, 인과응보를 받아 저리된 것을 보고 통쾌하지 않으세요?” 봉구안의 차가운 눈동자에 깊은 뜻이 서렸다. “이 일의 원인은 이 미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미인이 존재하지도 않는 황손을 해치려 했다는 걸 알았더라면 얼마나 후회했겠는가.다음 날 아침, 조정에서는 많은 대신들이 황후를 위해 간언을 올렸다. “황제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후마마께서는 현명하고 어질신 분이시옵니다. 그런 분을 폐위하시다니요… 그럴 수는 없사옵니
봉 대인은 냉궁에 이르러, 손수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는 봉구안을 보자 불같이 화를 냈다. ‘어찌 이리 안일하게 지내는 게냐!’‘가족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못된 것, 내 어쩌다 이런 매정한 딸을 두었단 말인가!’ 이를 본 연상이가 나아가며 고하였다. “대감 어르신!” 봉구안도 눈을 들어보니, 화가 나 얼굴이 붉어진 봉 대인의 모습이 보였다. …… 오늘따라 햇살이 따스해 많은 한기를 몰아내었으나, 냉궁의 내전에는 해가 들지 않아 음침하고 차가웠다. 연상이 간단히 불을 피워 방을 데웠고, 봉 대인은 체면도 잊고 불가에 앉아 얼어붙은 손을 녹였다. 봉구안은 멀찍이 서서 직접 등불을 밝혔다. 봉 대인이 목에 힘을 주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 내 확실히 명부를 바꾸었으나, 그건 다 널 위해서였다!” “며칠간 밖에서 분주히 발품을 팔며 고생하고 있는데, 너는 오히려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구나!” “어찌 황제 폐하께 나를 벌하라 일렀단 말이더냐!” “내가 죽으면 봉가는 끝이다! 너 또한 맘이 편할 줄 아느냐!” “좋다. 네게 아비인 나를 생각할 마음이 없다 해도, 어미는? 네 큰오라비는? 그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더냐!” 봉 대인이 쉴 새 없이 타이르며 말하였으나, 봉구안은 딱 한 마디만 내뱉었다. “제 명에 없는 것은 욕심낼 필요가 없다 생각합니다.” 봉 대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벌떡 일어섰다. “내 그 명부 따위 믿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현 상황을 떠올린 봉 대인은 다소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간청하였다. “황후, 제발 봉가와 네 어미를 위하여 황제께 청을 올려 다오. 황제가 너를 여전히 지켜주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내 들었느니라…” 봉구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황제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사옵니까?” 봉 대인은 황제가 한 말을 곧이 곧대로 옮겨 전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덧붙였다. “지금으로선 네가 아비와 봉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봉구안
밤이 깊었다. 봉구안은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궁을 빠져나왔다. 냉궁은 영화궁과는 달라, 경비도 적고 방어가 느슨하여 누구도 황후의 이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궁 밖, 오백은 소장군의 신호 화살을 보고 곧장 허름한 절로 달려갔다. “소장군!” 그가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봉구안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예리한 눈빛만을 드러냈다. “조사는 어떻게 되었느냐?” “소인은 줄곧 교먹을 추적하였사온데, 엊그제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사옵니다.” “교먹의 저택 앞에 있는 채소 장수가 매우 수상하였습니다.” “소인은 잠시 더 지켜본 후 움직일 생각이옵니다.” 봉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심하는 것이 맞다.” 오백은 오히려 그녀의 상황을 염려하였다. “소장군, 듣기로는 태중에 아이가 있다고 하였는데, 또한 냉궁에 갇히셨다 들었사옵니다. 괜찮으시온지요?” 봉구안은 냉정하게 답했다. “무사하다.’“오늘 내가 궁을 나선 이유는 세 가지를 지시하기 위함이다.” “첫째, 교먹의 조력자를 찾아내거라.” “둘째, 북대영에 쓸 만한 인재가 있는지 알아보아라.” “셋째, 최근 성가신 일이 무엇인지, 면사 금패를 얻을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알아보거라.” 오백은 늘 충직하여, 무슨 일이든 맡기면 절대 태만히 하지 않았다. “예, 소인 반드시 신속히 처리하겠사옵니다!” 봉구안은 그에게 당부하였다. “무엇보다 조심하거라.” “예!” 오백이 떠나기 전,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소장군, 군기감이 교먹이 제공한 도면대로 새로운 죽화총을 만들어냈사옵니다.”“지금 교먹의 명성이 날로 커지고 있사온데, 자칫하면 소장군께서 통제하기 힘들어질까 염려되옵니다.” 봉구안은 태연히 말했다. “상관없다.” ……냉궁에서의 생활은 무미건조했으나, 한편으론 한가로웠다. 봉구안은 며칠을 지내며 오히려 영화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가빈과 강빈 두 사람이 그녀를 찾아왔다
“아, 뜨거워!” “으악! 너무 뜨거워!” 병사들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죽화총을 하나둘 내던졌다. 탄환이 그만 관중석 쪽으로 날아갔다. “폐하를 보호하라!” 어전 시위인 진길한이 재빨리 음식상을 들어 방패로 삼았다. 소욱은 태연히 앉아 있으면서도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새로 만든 이 죽화총이 완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대신들은 순식간에 몸을 피하며 혼란이 일었다. 마침내 탄환이 모두 떨어져 위험이 사라지자, 여러 관료들이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그때 교먹도 순간 멍해졌다. 어찌 된 일인가? 설계도에는 분명히 단열판이 있었는데! 다른 시령들도 설계도를 살펴보았고, 모두가 완벽하다고 했었다. 소욱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현장을 훑어보더니 교먹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 말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교먹은 곧바로 죄를 청했다. “폐하,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겠사옵니다. 원래 설계도대로만 만들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그녀는 무심코 책임을 회피하려 했고, 이를 본 군기감 사람들이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마치 설계도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책임을 전가하는 듯 보였다. 교먹은 곧 자신이 부적절한 말을 했음을 깨닫고 급히 정정했다. “아니, 혹시 제 설계도에… 설계도에 아직 미흡한 점이 있는 것 같사옵니다.” 황제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교먹의 재능을 생각하여 이번에는 그냥 넘기기로 했으나, 그는 자비로운 군주가 아니었다. “한 달만 더 주겠다.” “한 달 내에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여라.”그리 말하고 황제는 자리를 떠났다.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황제의 뒤를 따르는 자와 교먹을 위로하는 자로 나뉘었다. “맹 대인은 젊고 유능하니, 한 달이면 충분히 수습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맹 소장군께서는 좀처럼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셨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태황태후가 친히 냉궁에 오다니,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과연 봉구안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태황태후뿐만 아니라, 한 명의 궁녀도 따라왔다. 그 궁녀는 검은색 나무 쟁반을 들고 있었고, 그 위에는 보자마자 오싹한 느낌이 드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흰 비단, 무언가 담긴 그릇, 그리고 단검이었다. 연상은 공포에 휩싸여 눈이 커졌다. 태황태후께서… 설마 황후마마께 사약을 내리시려는 것인가?!! 그녀는 급히 봉구안을 돌아보았다. 봉구안은 흰 옷을 입고 서서 예를 갖추었다. 그녀의 기품은 소박한 옷차림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 물건들을 보았으나,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듯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할마마마를 뵙사옵니다.” 태황태후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느긋하게 주위로 걸어가 앉았다. “이제 내가 친히 내명부를 다스리려 한다. 이렇게라도 황상의 걱정을 덜어줘야하지 않겠느냐?” “황후, 너도 알겠지만, 근래 전조가 너로 인해 어수선하구나.” 태황태후의 눈빛과 음성에는 꾸짖음이 담겨 있었다. 마치 봉구안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듯이 보았다. 봉구안은 입을 열었다. “첩은 냉궁에 머물고 있어 전조의 사정을 알지 못하옵니다.” 태황태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도 네가 억울한 것은 알지만, 봉가가 벌인 일이니 마무리도 봉가가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본래 너에게 기이한 병을 앓는다고 핑계를 대며 봉가의 체면을 지켜주려 했느니라.” “만약 황상을 기만한 진실이 드러난다면, 너희 봉가는 멸문지화를 피하지 못했겠지!” 봉구안은 태황태후의 엄격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예.”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손하고 순종적인 듯하면서도, 동시에 무심하게 들렸다. 태황태후는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아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도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전조가 너무 압박하여, 황후를 폐위해야
태황태후는 밖을 바라보며 눈동자가 커졌다. “황상? 황상이 어찌 이곳에?” 그녀는 본래 황후를 조용히 처리하려 했기에, 이 같은 사실을 소욱에게 알리지 않았다. 소욱은 빠른 걸음으로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그는 봉구안에게 손을 대려던 궁인을 내리차며 봉구안을 감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태황태후와 정면으로 맞섰다. “할마마마, 여쭙고 싶은 것은 소신이옵니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사옵니까?” 그는 자주빛 비단옷을 입고, 그 얼굴은 차갑고도 엄숙하여 마치 만년설 같은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봉구안은 조용히 손에 쥔 암기를 거두었다. 태황태후는 자리에서 추호의 미동도 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이니라.” “봉가네 여식은 궁에 들어와서는 아니 되고, 더구나 황후 자리에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 된다.” 황제는 늘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기에, 그가 이 일을 가지고 반기를 들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소욱의 눈동자는 깊고도 어두웠다. “황후는 제가 이미 냉궁에 가두었습니다. 할마마마께서 지나치게 몰아붙이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더구나 소신은 예전부터 그 명서의 예언 따위는 믿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사옵니다.” 탕! 태황태후는 찻상을 세게 내리쳤다. “황상! 어찌하여 이리도 어리석단 말이더냐!” “저… 저 아이는… 우리 남제의 재앙이니라!” “저 아이 때문에 이제는 네가 나에게 불경한 마음까지 품게 되었구나…” 소욱은 위엄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는 더는 말을 아끼고 직접 명을 내렸다. “할마마마를 어서 만수궁으로 모셔가거라!” “건방지다!” 태황태후는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크게 소리쳤다. “오늘 나는 이 재앙을 반드시 제거하고야 말겠느니라! 황상, 어서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소욱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비록 태황태후가 데리고 온 궁인들이라도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다.
냉궁에서, 봉구안은 날아든 화살을 받았다. 화살촉에는 작은 쪽지가 꽂혀 있었다. 쪽지에는 교먹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언니, 또 언니에게 목숨을 빚졌어.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을 쉽게 찾게 놔둘리가 없잖아? 다음번엔 좀 더 영리한 이를 보내도록 해.]봉구안은 이로써, 오백이 사고를 당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해가 지기 전, 궁을 나섰다. 오백은 북대영에서부터 황성까지 그녀를 따른 충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히 그녀의 심복이자 유능한 부하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소중한 벗이기도 했다. 교먹은 그녀를 해치기 위해 이미 여러 사람을 희생시켰다. 그녀는 오백만큼은 절대 잃을 수 없었다. 그 만큼은 반드시 찾으리라 다짐하였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아무런 단서도 없이 한 사람을 찾는 것은 모래사장 속에서 바늘을 찾는 일과 같았다. 이날, 봉구안은 수많은 장소를 헤맸다. 그녀가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오직 그 채소 장수뿐이었다. 주변 백성들의 증언을 통해 그녀는 그 채소 장수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황혼 무렵. 성 교외의 한 전당포에서, 직원이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은제 가면을 쓴 한 남자가 문틀을 붙잡으며 다친 손을 아랑곳하지 않고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을 찾고자 한다.” 직원은 깜짝 놀랐다. “나으리, 손은 괜찮으십니까?” 그는 재빨리 주인을 부르러 갔다. 이 전당포 주인은 백발의 노인으로,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을 가진 노련한 상인이었다. 그는 봉구안의 얼굴에 씌어진 가면을 보고 즉시 경외심을 품은 채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며 말했다. “부맹주께서 절 찾아오실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사옵니다…” 봉구안은 이러한 인사말을 무시하고, 그 채소 장수의 초상화를 꺼내어 단도직입적으로 명했다. “이자를 찾아라!” 주인은 초상화를 받아들고 장담했다. “부맹주님께서는 안심하셔도 되옵니다. 이자가 아직 황
오백은 중상을 입었으나 깨어나자마자 소장군을 보곤 자신이 구해졌음을 알았다. 그의 상반신은 거의 모두 붕대에 감겨 있었고,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소…” 문득 방 안에 다른 이가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말을 바꿨다. “주인님.” 봉구안은 반쪽의 은제 가면을 쓴 채 그를 돌아보았다. 어의가 그녀에게 환자의 치료와 주의 사항들을 설명하자, 봉구안은 이를 기억한 후 진료비를 지불하고 친히 어의를 배웅했다. 잠시 후 방으로 돌아오니, 오백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즉시 명했다. “움직이지 말거라!” 오백은 자신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가? 오백은 고분고분 다시 누웠으나, 이를 악물며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소인은 원래 피부가 두껍고 단단하지 않습니까? 큰 일도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물론 아무 일 아닐 리 없었다. 그는 그때 칼이 몇 번이나 찔릴 때의 고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님, 그 채소 장수는…” “이미 잡았다.” 봉구안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백이 다시 말하려는 찰나, 낯선 청년이 방으로 달려들어왔다. “부맹주님! 그 채소 장수가 방금 도망치려 해서 제가 기절시켰사옵니다! 직접 심문하시길 원하실 것 같아 죽지는 않게 했사옵니다!” 청년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고, 오백은 그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주인님, 저 자는 누구입니까?” ‘어찌하여 소장군을 ‘부맹주’라 부르는 것인가?’ 봉구안이 차가운 어투로 소개했다. “그는 평안전당포의 직원이다.” “소인 최백이라 하옵니다! 형님, 형님의 성함은 오백이라 들었사옵니다…”“이 아우는 최백이니, 성은 다르지만 이름은 같사옵니다!” 어디서 형님 아우 운운이란 말인가. 이 자는 어찌 이리 친근하게 구는가. 최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부맹주님, 소인이 창작한 검법이 있으니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목소리가 우렁차
옥령산.양연삭은 어지럽게 얽힌 바위 틈에서 뛰쳐나왔다.병사들은 적을 만난 듯 경계태세에 들어갔다.동방세가 즉시 앞으로 나서며 혼자서 양연삭을 저지해, 그를 그냥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곧이어 산을 지키는 십이사명이 출동해 진을 결성하였고, 양연삭을 가두고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봉구안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격전은 바위를 산산조각 내며 이어졌다.병사들이 활과 화살로 공격했지만, 양연삭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제대로 맞히기 어려웠다.봉구안은 가면을 쓰지 않고 본래 얼굴을 드러냈다.그때 양연삭은 소욱을 알아보았고, 더불어 맹성주도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의 아들 양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였다.맹성주가 아니었다면, 양소도 그렇게 비참한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양연삭의 가면 속 두 눈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그는 즉시 십이사명의 포위를 뚫고 소욱과 봉구안을 향해 돌진했다.봉구안은 장검을 뽑아 정면에서 맞섰다.소욱과 동방세는 양쪽에서 협공했다.세 사람은 마치 화살처럼 날카로운 진형을 이루었다.진한길과 병사들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양연삭의 공격을 저지하며 방어 태세를 유지했다.양연삭의 목표는 분명했다. 먼저 소욱을 죽이고, 그다음 맹성주를 죽이는 것이었다.그는 전투 중 바위 파편에 의해 이미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마공은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해가 되는 한 사명을 붙잡아 그들의 내공을 전부 흡수했다.나머지 열한 사명이 분노하며 외쳤다.“마두야! 목숨을 내놔라!”동방세는 가장 먼저 봉구안의 이상함을 눈치챘다.그녀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무모했다. 예전 같지 않았다.양연삭의 함정에 빠진 봉구안이 공격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동방세가 다급히 외쳤다.“비켜! 소환!”양연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소환?동방세가 맹성주를 소환이라 불렀다?설마… 맹성주와 소환이 같은 사람인가!?양연삭은 순간 타오르는 분노에 휩싸였다.새로운 원한과 옛 원한이
단회욱은 죽었다.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기력이 다해 있었다.그동안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다섯 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이제, 그의 구안이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곁에는 친구와 연인이 있는 것을 본 이상, 자신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완전히 힘을 놓아버렸다.그는 이 생에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단정의 울부짖는 소리가 고요한 밤을 찢어발겼다.온 왕부가 암울한 그림자에 휩싸였다.소욱은 뜰에 서서, 창백한 달을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마음이 불안해졌다.만약 단회욱이 살아 있었다면, 과연 자신이 이길 수 있었을까?그들과 단 며칠 함께했을 뿐이고, 나눈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그는 왜 봉구안이 과거에 단회욱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토록 온화한 군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타인을 생각했다.소욱은 봉구안이 단회욱 때문에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뭐 하나 잡히지도 않고, 마음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남산왕은 왕부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불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단회욱을 위해 묻을 자리를 찾겠다고 나섰다.하지만 단정은 이를 거절했다.그는 형을 옥령산에 묻고 싶지 않았다.양연삭도 옥령산에서 죽었으니, 형이 죽어서까지 편히 쉬지 못하게 할 수 없었다.단정은 화장을 하고, 유골을 북방에 묻겠다고 했다.그곳은 형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곳이고, 형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형님께서는 살아 있을 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적어도 죽어서만큼은 북방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단정은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삼키며 봉구안에게 말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단회욱의 시신이 화장되던 날, 소욱도 자리에 있었다.그의 시선은 내내 봉구안을 향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줄곧 무표정이었다. 두 눈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마치 죽은 사람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어찌 이런 일이!”봉구안은 손이 떨려왔다.의사가 말하길, 단회욱은 이미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그녀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그가 이 순간 세상을 떠난다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말았다.봉구안은 곧장 남산왕부로 돌아갔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단회욱은 침상에 누워 기운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준수한 얼굴엔 생기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단정은 침상 곁에 무릎 꿇고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형, 형님! 잠들지 마세요! 겨우 형님을 구해냈습니다… 형님!”봉구안은 한 걸음 한 걸음 굳은 몸으로 다가가, 단회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오라버니…”침대 시트는 이미 그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그는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마치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듯,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는 듯…“구안아, 난 괜찮아.”그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봉구안의 손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그녀는 그의 몸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심지어, 그에게는 숨을 쉴 때마다 마치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이 따랐다.그녀는 마음이 풀리며 조용히 침상 곁에 앉았다.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정이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천룡회도 이미 소탕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이제는 마음 편히 쉬세요.”단회욱은 봉구안을 향해 한없이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그 안에는 한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구안아, 아직도 가끔씩 머리가 아프니? 미안해. 더는 약을 만들어 주지 못하겠구나… 너와 혼례를 올리지 못해서, 너에게 행복한 삶을 주지 못해서…… 매일 밤 너를 기다릴 남편이 되어 주지 못해서…”“미안해… 정말로, 널 평생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어.”“나는 이미 오래전에 버티기 힘들었어. 하지만 혹시, 혹시라도 죽기 전에 널 다시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 하늘이 날 불쌍히 여긴 거야.”“정말 다행이야. 널 보고 갈 수 있
동방세가 웃으며 말했다.“좋소. 조금 고생하는 건 괜찮소만, 진짜 양연삭이 도망친다면 골치 아플 일이오.”한 시진 뒤, 봉구안은 남산왕부로 돌아왔다.그녀는 단회욱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그의 방으로 향했다.침상 옆에 있던 단정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오늘 황제 폐하께서 형님을 찾아오셨습니다. 폐하께서 다녀가신 이후, 형님이 피를 토하셨습니다.”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단회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정이의 허튼소리를 듣지 말거라. 내 상태와 폐하는 무관하니...”“그저 내 몸이 너무 약해서 그런 것이다. 구안아, 교주의 시신은 찾았느냐?”봉구안은 차분하게 답했다.“혹시라도 누군가 도망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병사들에게 지키게만 하고 시신을 파헤치지는 않았습니다. 오라버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저희의 눈을 피해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단회욱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나는 교주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야. 구안아, 반드시 조심하고, 방심하지 말거라.”“만약 정말 그가 도망쳤다면, 기억하거라… 만건성법은 너도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오발에… 쿨럭, 쿨럭!”단회욱은 너무 허약해 한 번에 말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몇 번 기침을 하더니 목에서 비릿한 기운을 느꼈다.그는 피를 토할 것 같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려 봉구안이 보는 걸 피하려 했다.“구안아, 조금 쉬고 싶구나… 이만 침소로 돌아가거라.”그러나 그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피가 샘처럼 목에서 솟구치며 터져 나왔고, 그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피는 손가락 틈새로 흘러나왔다.“오라버니!” 봉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그 장면을 보고는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형님!” 단정도 급히 반응해 침대 아래에서 숙련된 동작으로 대야를 꺼내 들고, 형의 상반신을 살짝 일으켜 피를 뱉도록 도왔다.봉구안도 손수건을 꺼내 단
소욱이 방문하자, 단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그는 병색이 짙은 얼굴로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단정을 나무랐다.“정아,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너는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구나.”단정은 형이 폭군과 단둘이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가 얼마나 잔혹한지 이미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소욱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거침없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너희 둘 중 누구든 들어도 상관없다. 내가 할 말은 숨길 것이 없으니...”단회욱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소욱은 자리에 앉아 기세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네 성을 보아하니 너는 단씨의 후손이구나.”“단씨 일족이 반역죄로 멸문당했지만, 너희 형제가 목숨을 건진 것은 하늘의 은혜다.”“봉구안, 그녀는 나의 황후다.”단정은 이 말을 듣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폐하, 형수님은 더 이상 폐하의 황후가 아니십니다! 두 분께서 이혼하신 사실은 천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소욱은 그를 차갑게 흘겨보았으나 더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황후를 생각해 너희 형제를 용서하려 한다. 이제부터는 천민 신분을 벗고 정식 신분을 되찾게 해 주도록 하마.”단정은 뜻밖의 선처에 어리둥절했다.폭군이 이렇게 관대한 이유는 그의 형에게 형수님을 포기하라는 암시를 주려는 것이 아닐까?병든 단회욱은 여전히 고운 품성을 유지한 채, 소욱에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일뿐 아니라, 지난번 구중탑에서 구해주신 은혜 또한...”그러나 소욱은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히 말했다.“나와 너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너를 구한 것은 오로지 황후 때문이다.”“나는 네가 황후와 다섯 해 약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내가 황후를 향한 감정도 결코 네 것보다 적지 않다.”“네가 빨리 몸을 회복해야 황후도 괴로움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단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가 쓸쓸하고 고통스러웠
봉구안은 추측했다.“남산왕 전하께서는 구중탑에 들어간 악인들이 봉맥을 양육하기 위해 희생된 줄 알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당시 태조께서는 옥석비의 살기를 평정하려고 생자를 희생시켜야 했습니다.”“그래서 그 악인들에게 왕공귀족의 의복을 입혀 황실 자손의 안전을 바꾼 것이죠.”하지만 왜 굳이 악인을 골랐던 것일까?곧 그녀는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첫째, 태조 황제가 아직 양심이 있어 이런 악인들은 어차피 십악불사, 어떻게 죽어도 그들에게는 큰 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둘째, 구중탑에 흉악범들을 가두면서 보물을 노리는 자들의 마음을 꺾고자 했으니, 누구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구안의 추측을 인정했다.“태조 황제는 남산왕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남산왕의 가문은 자신들이 봉맥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봉구안은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인간의 본능입니다.”“제왕으로서 자신이 단순히 돌덩이 하나를 두려워한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요.”이 말을 하며 그녀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회욱 오라버니께서 말하길, 양연삭이 진나라의 후손이라더군요. 그가 한 모든 일이 부국을 위해서였으며, 옥석비를 훔친 것 또한 전쟁에 사용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소욱의 눈썹이 찌푸려졌다.“오라버니?”그녀가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게 참 친근하게 들렸다.소욱은 내심 불쾌했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묻지 않았다.진나라.그가 다스리고 있는 이 강산은 남제 이전에는 진나라이었다.그러나 진나라는 이미 멸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부흥을 꿈꾸는 자들이 있다니.그는 본래 천룡회가 단지 강호의 마교로서, 고작해야 자신의 형제 중 누군가와 몰래 손잡고 권력을 빼앗으려는 정도일 줄 알았다.하지만 이제 진나라와 연관되었다면,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그런 비밀을 단회욱은 어떻게 알았지?”소욱의 말에는 의심이 묻어났다.
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왕에게 예를 갖추었다.두 왕은 소욱에게 절을 올렸다.노왕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봉구안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마마, 봉맥이 끊어진 것은 저도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마마께서 다시 황제 폐하께 시집을 가신다면…”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소욱도 그녀가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고려할 겨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괜히 이런 말을 꺼내면 그녀를 더 번거롭게 할 뿐이었다.그는 노왕의 말을 가로막았다.“본론부터 말하거라.”봉구안은 자신의 신분이 부적합하다고 느껴 물러나려 했다.하지만 소욱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나가지 않아도 된다.”“예.”남산왕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폐하, 신과 부친이 찾아온 것은 보물과 옥석비에 대해 상의드리기 위함입니다. 구중탑이 무너져 그것들이 전부 지하에 묻혔는데, 이를 다시 발굴해야 할지 청하러 왔습니다.”소욱은 차분히 물었다.“옥석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남산왕은 답 대신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이렇게 대단한 신물이 태조 황제가 억눌러두어야 할 물건이었다니.이전에 동방세가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구중탑으로 숨겨둔 물건이라면, 결코 다시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그러나 그의 기억 속 옥석비는 흉물이 아니었다.어쩌면 부친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봉구안 또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그러자 노왕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제가 아는 바로는, 옥석비는 가히 건국의 공신이라 칭할 만 하다는 것입니다.”“당시 태조 황제께서 전장에 옥석비를 들고 나갔을 때, 그 어떤 적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가장 전설적인 것은 양수 전투였는데, 태조 대군이 포위당하고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하룻밤이 지나자 적군이 싸우지 않고 물러났던 일도 있었습니다.”“사람들은 모두 그 옥석비의 전쟁신의 영혼이 현현했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남제 건국 이후, 그 옥석비에 붙어있던 영혼이
옆방.단회욱은 검은 피를 토해냈다.그는 단정의 어깨에 기대어 반쯤 누운 채, 마치 버드나무처럼 연약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한 쌍의 옥처럼 맑던 눈동자는 이제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를 보며 봉구안은 많은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가 뼛속까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병사들의 희롱과 조롱에도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늘 부드럽게 대했다.그는 군의관으로서 항상 인내심이 넘쳤다.그녀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가 지닌 고요한 세월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늘 마음이 차분해졌다.그래서 그가 천룡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그의 선량함과 자애로움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 것들은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그의 신분과 과거는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그녀는 한 사람을 좋아할 때 언제나 현재만을 바라보았다.그를 좋아했던 일에 대해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고, 원망도 없었다.봉구안은 둥근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한때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정말로 다시 보게 되자 수많은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그녀는 그에게 이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가 겪은 고통과 고난은 손수 적어낸 기록에 상세히 쓰여 있었다.“앞으로는...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쉰 듯 갈라졌다.단회욱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의 눈동자는 예전보다 한층 단단해진 냉엄함이 더해져 있었다.그녀의 옷은 흙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손가락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예전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하지만 지금은 욕심이 생겼다.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다.단정은 두 사람의 눈빛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단회욱을 눕혀놓고 말했다.“형님, 약을 좀 다려 올게요.”그가 있으면 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단회욱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였다.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봉구안의 마음이 순간 떨렸다.단회욱은 많이 수척해진 상태였다. 한쪽 팔은 부러졌으며,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잘생긴 얼굴은 생기 하나 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생기를 잃은 시체처럼 입술은 하얗게 메말라 있었다.“형님!”단정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드디어, 드디어 형님을 찾았어요!”단회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멀리 있는 봉구안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말했다.“오라버니…”단회욱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온화했다.“구안아…”“폐하!”진한길이 놀라 외쳤다.봉구안은 급히 뒤돌아보았고,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쪽으로 달려갔다.“폐하께서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그러나 소욱의 안전을 위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진한길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전 구역에 틈이 생겨 폐하께서 낙석에 팔을 맞으셨습니다!”그때 아래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과인은 괜찮다…”남산왕은 급히 외쳤다.“어서 사람을 구하라! 균형이 깨지면 안전 구역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만약 안전 구역이 무너지면, 그 이후의 위험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단정은 황제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형님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자 그를 업었다.그러다 형님 얼굴에 찍힌 뺨 자국을 보고 순간 몸을 굳혔다.“형님, 누가 형님을 때린 겁니까!”단회욱은 이전에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에게 뺨을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러나 그가 말했다.“누구든 상관없다…”그는 오로지 봉구안만 걱정하고 있었다.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머물렀다.잠시 후, 소욱이 드디어 구조되었다.남산왕은 중얼거렸다.“하늘이시여…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사고를 피했습니다.”그러나 소욱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의 팔은 옷과 살점이 뭉개져 엉망이었다.진한길은 마음이 아팠다.봉구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