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분이 벌레를 불러온다는 말은 봉구안의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모용선은 바로 사실을 털어놓았다.“마마, 모두 신첩의 잘못입이다. 신첩이 한 게 맞습니다.”유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상전을 바라보았다.귀인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감싸려 할 줄이야.유서는 바로 절을 올리며 절규했다.“마마,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일은 귀인과 무관합니다. 모두 소인이 한 짓이옵니다! 소인이 귀인을 대신해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귀인은 전혀 모르고 당한 것입니다!”정 귀인은 고개를 돌려 유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아니다, 유서야….”“소인이 했습니다! 황후마마, 벌을 하실 거면 소인을 벌하십시오!”참으로 충직한 시종이었다.봉구안은 묘한 눈으로 모용선의 표정을 주시했다.모용선이 울며 사정했다.“마마, 유서가 잘못을 했지만 이 아니는 신첩과 함께 자란 자매와 같은 아이입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신첩이 아랫사람을 잘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벌은 신첩이 받겠습니다!”“아니, 아니됩니다! 귀인, 모든 건 소인의 잘못입니다….”정 귀인의 마음에 깊이 감동한 유서는 귀인을 대신해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었다.봉구안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정 귀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차게 식었다.시종이 이런 짓을 저지를 때 상전이 정녕 아무것도 몰랐을 수가 없었다.봉구안은 궁중법도 대로 유서에게 벌을 내렸다.“곤장 30대를 치고 신형사에 보낸다.”유서가 끌려간 뒤, 모용선은 울며 말했다.“마마, 아랫것들이 허락도 없이 한 일이고 신첩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어서 하마터면 가빈을 해할 뻔하였습니다.”“그러니 신첩도 같이 벌하여 주십시오!”그리고 이때, 태후 신변의 계 상궁이 도착했다.“황후마마를 뵈옵니다.”계 상궁은 봉구안을 단독으로 불러 말을 전했다.“마마는 모르시겠지만 정 귀인은 태황태후의 조카손녀랍니다. 태황태후께서는 일찍이 태후께 정 귀인을 잘 부탁한다고 서신
봉구안이 말했다.“한번에 둘을 제거하려 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었을 것이다.”“그게 뭐죠?”연상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충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마마, 설마 그 배후의 범인은 황후의 자리를 노리는 걸까요?”봉장미는 어릴 때부터 황후로 길러진 귀한 몸이었다.능연이는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황후와 동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민간에는 황제가 그녀를 황후로 봉하려 한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나돌았다.그러니 틀림없었다.“마마, 배후의 인물이 정 귀인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만약 장미 아가씨와 능연이가 사라진다면 정 귀인의 외모와 가문의 힘으로 분명 황후의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을 거니깐요!”봉구안은 대답 대신 담담히 말했다.“서왕한테 가서 전하거라. 내가 한번 보자고 한다고.”“예, 마마.”고개를 든 연상은 황후가 들고 있는 비수를 보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어마장.두 사람은 우연을 가장해서 만났다.주변이 조용한 가운데 서왕이 말에서 내렸다.“황후마마를 뵈옵니다.”봉구안도 말에서 내렸다.“정 귀인과 아는 사이입니까.”서왕은 겸손한 태도로 답했다.“예. 이미 고인이 된 영비의 사촌동생입니다.”봉구안은 말고삐를 잡고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영비와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사이였으니 영비를 아끼는 마음으로 정 귀인을 지켜주려 했을 수도 있겠군요.”곧이어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바꾸었다.“만약 정 귀인이 더 많은 것을 바란다면 서왕은 뒤에서 도움을 주겠지요. 맞나요?”서왕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서글픔이 느껴지는 미소였다.“마마, 지금 저를 비웃으시는 겁니까? 저에게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돌아가신 영비는 황후가 되었을 겁니다.”“하물며 황후의 자리는 선제께서 이미 정해주신 것이니 제가 아니라 폐하마저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했다면….”“내가 죽었다면 가능해지겠지요.”봉구안의 말에 서왕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난
비수가 땅에 떨어지고, 세 사람이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서왕은 입을 뗄 듯했지만, 봉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소욱에게 몸을 낮추어 예를 올렸다. "황상, 신첩이 숲에서 길을 잃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길을 찾기 위해 나무에 표시를 하려 했을 뿐입니다.""그런데 문득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궁중에 잠입한 자객이 아직 붙잡히지 않았다고 들어 자객인 줄 알고..." 서왕이 거들며 둘러댔다. "알고 보니, 중전마마께서 소신을 자객으로 오인하신 것이었군요. 그래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서왕은 비수를 집어들어 봉구안에게 공손히 건넸다. 소욱의 눈빛이 매서워지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황후의 말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서왕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친형제처럼 지내온 친구였다... "황상, 중전마마,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서왕이 말을 이끌고 떠나자, 봉구안의 시선은 여전히 그를 따라갔다. 소욱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라. 여긴 너 같은 여인이 머물 곳이 아니다." "예." 봉구안은 공손히 대답하며 물러났다. 몇 걸음 나아가던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황상, 신첩이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그녀의 눈빛은 더욱 진지했다. 소욱은 이미 말 위에 올라, 채찍을 손에 든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매엔 짜증이 엿보였다. "물어라." "선황께서, 모용가는 영원히 후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 적 있습니까?" 소욱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말씀을 하신 적 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애써 알아낸 것은 혹여 그가 황후를 교체할까 염려한 것인가, 은근히 경고하는 것인가. ……궁 밖. 연상은 불안에 떨다가, 마침내 중전마마가 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중전마마, 드디어 나오셨군요! 무사하십니까? 서왕께서는…" "영화궁으로 돌아가자." 봉구안이 날카롭게 말했다. 영화궁 안. 연상이 초조하게 말했
황제의 사람이 될 수 있다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바라 마지않을 일인가. 그러나 봉구안은 그 선택을 바로 지나쳤다. 소욱은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네가 나를 위해 힘쓰는 것을 마다하는 이유가, 다른 주인을 섬기기 때문인가?" 그녀가 내공을 써서 자신의 독을 풀어준 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자들이 궁중에 잠입했다가 목숨을 부지한 예는 없을 것이다. 이는 그녀에게 정식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고자 하는 뜻이었다. 그러나 봉구안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강호의 한가로운 나그네일 뿐, 따로 섬기는 이는 없습니다."소욱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선택지를 주겠다. 북대영에 가서 나라를 위해 힘쓰는 것이다." 봉구안은 천천히 대꾸했다. "듣기로는, 북대영에 여군이 있다 들었습니다."소욱은 턱을 약간 숙이며 답했다. "그렇다." 그녀가 여군에 관심이 있어 보이자,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그 여군은 맹성주가 조직한 군대다. 그는 성질이 포악하고 군중 규율 또한 엄격하여, 네가 여자인 것을 이유로 결코 느슨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한가롭게 지내는 자가 어찌 그 규율을 견딜 수 있을까? 그러나 그가 ‘성질이 포악하다’고 묘사한 그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는 그녀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 "중대한 일이니, 숙고할 시간을 주시옵소서." 숙고? 그런 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두 갈래 길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답을 애매하게 들은 소욱은 그 말이 진심인 줄 알았다. "빠른 답을 기다리마."소욱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에게서 한 알의 단약이 그녀에게 던져졌다. "이것은 대보단이니, 네가 내공을 빠르게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봉구안은 그것을 받아들며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감사하옵니다, 폐하.""진한길에게 매일 한 알씩 보내라 지시할 것이니, 네가 내공을 회복할 때까지 여기서
봉구안은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고 있음을 알아챘다. 예상치 못하게, 그 인물은 바로 서왕이었다. 설마 그녀가 남장하고 얼굴에 가면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녀를 알아볼 줄이야…봉구안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검을 들어 그를 골목 밖으로 몰아붙였다. 서왕 또한 밤 행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눈빛은 어딘가 따스함이 묻어나 마치 가득 찬 봄날의 연못 같았다.이 시각에는 이미 통금이 내려져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 발씩 물러서며 말했다. "의외군요. 마마께서 말솜씨가 뛰어난 것만이 아니라 경공까지 이리 능하실 줄이야.""형님께서 마마가 몰래 궁을 나선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봉구안은 목소리를 낮추며 음성을 바꿔 말했다. "누가 네 형수란 말이냐! 죽고 싶으냐!" 말을 마치고 발을 들어 그를 찼다. 서왕은 재빠르게 몸을 틀어 피했으나,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눈에는 은밀한 뜻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도망가는 건가? 하지만 날은 길어…’……봉구안은 서왕을 따돌리고 나서도 머릿속에서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서왕은 궁에서부터 그녀를 쫓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궁에서 야행복을 입고 있었던 걸까? 며칠 전 영화궁에서 자신을 주시하던 자도 그였을까?급한 일이 우선이었다. 봉구안은 이 잡념들을 털어내고 암창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 달 만에 그녀는 다시금 황귀비를 만났다. 황귀비는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작은 방에 갇혀 있었고, 발목은 쇠사슬에 묶인 채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포주는 봉구안을 손님으로 보고, 그녀를 데리고 가면서 코앞에서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한 시진에 이백 문. 이건 최하 품질이오. 도련님, 정말로 이걸로 괜찮으시겠소? 다른 것도 보지 않겠소?" 포주는 봉구안을 몇 번 훑어보며 탐탁지 않아 했다. 외모는 궁핍해 보이지 않는데 어찌 이리도 인색한가 싶었던 것이다.봉구안은 냉정히 말했다. "나가보
황귀비는 미친 듯이 봉구안을 바라보며 외쳤다."너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어! 천한 것, 날 궁으로 데려가! 나는 황상을 뵈어야 해!"봉구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서 내보내 주는 것뿐이야.""나는 황상을 뵈어야 한다니까! 황귀비는 단호하게 말했다."네가 잘 알잖아, 그건 불가능해. 너를 황상께 보낸다면 내가 살아남을 길이 없지 않겠니?"황귀비는 막 나가겠다는 듯이 씩 웃었다."그렇다면 다 죽어버려! 다 죽어버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봉구안은 이미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시선을 차갑게 내리깎았다."네가 그렇게 황상을 사랑한다면, 정말 그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냐?"하지만 난 상관없어.""왜냐하면 난 황상에게 무정하니 그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거든.""내가 궁에 들어온 것은 복수를 위해서였어.""저 비밀스러운 자를 잡아내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바람이지.""그것을 위해서라면 거짓으로 순종하는 척하다 황상이라도 죽이겠어! 그러니 죽는 건 너희들이고, 나는 마지막까지 살아남겠지."말을 마치고, 봉구안은 떠날 듯한 태도를 보였다.황귀비는 깜짝 놀라 외쳤다."안 돼! 네가 감히 그럴 수 있어?"그렇다면 너는 그 두 통의 편지가 필요 없단 말이야?"봉구안은 어둠 속에서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그 편지란 것은 그저 내 기대에 불과했을 뿐이야. 그 안에 무슨 단서라도 있을 거라 여겼지.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자에게 순응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가 나타날 것이니 굳이 네 손에 있는 두 통에 연연할 필요가 없겠구나.""네가 황상을 죽이다니! 천한 것, 미친 거야!" 황귀비는 진심으로 믿으며 외쳤다.봉구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황상만 죽이는 게 아니야. 온 세상에, 한때 황상의 총애를 받던 황귀비가 온전한 여인이 아니었으며, 그 모든 총애가 거짓이었음을 알리겠어."황귀비는 절망에 빠져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질렀다."아아아! 천한 것! 내가 널 죽여
강림은 농담이 아니라 꽤나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반숙께서 전해주신 소식이 있소. 보름 전, 대장군께서 무림대 사람들을 찾으셨고, 그들에게 북쪽으로 향하라는 명을 내리셨소. 다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맡기신 것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더이다.”“이 왕래에 적어도 한 달 이상 걸릴 일인데, 대장군께서 이미 임무를 마치신 건가, 아니면 도중에 돌아오신 것인가?” 봉구안은 깊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황궁에서 있었던 일은 강림과 송려는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들에게까지 알릴 필요는 없었다. 괜히 말썽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궁으로 돌아가기 전, 봉구안은 오백을 만나러 갔다. 오백은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랐다. “소장군, 분명히 대장군께서는 황궁에만 계셨으며, 신하 한 명 외에는 곁에 둔 자가 없었사옵니다. 무림대에 사람을 보낼 분이 없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누군가 대장군을 사칭한 자일 것입니다!” 봉구안은 단호하게 명했다. “철저히 조사하라.” “예!” ……궁으로 돌아온 뒤, 봉구안은 대보단을 복용하고 내공 심법을 수련하였다. 내력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능소전으로 향하여 황귀비가 언급했던 은밀한 격자를 찾았다. 그 격자는 화장대에 숨겨져 있었다. 예전에 조검의 수기를 찾으려고 능소전을 뒤졌을 때, 조검이 황귀비의 화장대에 접근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이곳을 수색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곳에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격자의 위치는 매우 은밀했다. 다섯 개의 격판을 제거하고 나서야 세 개의 자물쇠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물쇠는 각각 해와 별, 달의 세 가지 문양으로 된 회전식 잠금장치로, 각 문양을 맞춰야 격자가 열린다. 하나라도 잘못 맞추면 잠금장치가 걸려 열 수 없게 된다. 황귀비가 알려준 방법이 아니었으면 이 격자를 찾아도 열 수 없었을 것이다. 봉구안은 차례로 별, 달, 달 순서로 맞췄고,
서왕이 찾아오자, 소욱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대는 황후와 사사로운 관계라도 맺었느냐?"황제의 위엄에 서왕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답하였다."황상, 소인은 그러한 적이 없습니다."소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높은 곳에서 내려와 서왕 앞에 섰다. 그의 키 크고 날렵한 모습이 어둠을 드리웠다."네가 남녀 문제에 신중함이 있어 여자와 말을 섞는 일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허나 지난번 어전에서 네가 황후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의문이 생겼다.""만일 네가 마차에서 내려 길을 안내했다면, 평범한 거리에서 황후는 설령 칼을 뽑더라도 가까이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단지 뒤로 물러나기만 하면 안전할 수 있었겠지.""그런데 내가 본 것은, 너희가 고작 두 걸음 사이였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후가 너를 알아보고 계속해서 쫓아 칼을 휘두르지 않았을 터인데,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소욱이 가장 신뢰하는 이는 다름 아닌 서왕이었다. 그러니 그날 이상함을 눈치채고도 바로 드러내지 않고 서왕이 스스로 해명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서왕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오늘도 황후와의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니, 혹시나 그를 해칠 소문이 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소욱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왕을 바라보며, 못미더워하는 듯 말했다."황후가 어떤 자이든 나는 상관없다. 하지만 그대는 내 곁에서 가장 가까운 자가 아닌가? 그 여인 때문에 자네가 명예를 잃게 된다면…."서왕은 몸을 낮추고 공손히 절을 올리며 말했다."황상의 보호를 받다니, 신이 무슨 덕이 있어 감히…""그날 어전에서 신은 실로 사실을 말하지 않았사옵니다. 황상께 죄송하여 마음이 불안했사오나, 황후마마께 약조를 드린 터라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옵니다.""그러니 황상께서는 소인에게 벌을 내려주소서."그는 차라리 벌을 받겠다고 했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소욱의 주먹이 움켜쥐어지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서왕의 성격은 충의롭고, 일단 한 번 한 약속은
막사를 열고 들어온 황제의 키 큰 실루엣은 위엄과 당당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봉구안은 소욱이 이렇게 빨리 선성에 도착한 것을 보고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어떻게 이렇게 빨리 선성까지 온 거지?’소욱은 갑옷도 벗지 않은 채 성큼성큼 다가와 아직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그녀를 단숨에 끌어안았다.“왜, 나를 못 알아보겠느냐?”봉구안은 정신을 차리고 팔을 들어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폐하께서 친히 군을 이끄셨다… 고생 많으셨습니다.”소욱은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턱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너를 보니 수고로움도 잊게 되는구나. 오늘 밤, 저들을 공격하려는 것이냐?”그리움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도 될 터. 지금은 적을 물리치는 것이 우선이었다.봉구안은 표정을 단단히 가다듬고 대답했다.“예, 이제 때가 왔습니다.”원래 계획은 봉구안이 병력을 이끌고 선성의 적군을 고립시키고, 외부와의 모든 연락을 차단하여 적국이 원군을 파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 후 소욱 황제와 스승이 ‘거미줄’ 기계 장치를 활용해 적의 원군을 소멸시키고, 이어 선성 내의 적군을 몰살하는 계획이었다.그렇게 되면 적군은 식량 부족과 내부 갈등, 공포로 인해 기세를 잃게 될 터였다.이런 방식으로 남제는 적은 병력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다.봉구안은 그날 밤의 공성 계획을 황제에게 설명하였다.소욱은 그녀의 여윈 얼굴을 보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알겠다. 먼저 좀 쉬는 게 좋겠구나. 군사 업무는 내가 맡으마. 밤에 적을 치려면 너도 푹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소욱이 나타나자 봉구안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하지만 ‘쉰다’는 건 그녀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더구나 소욱과 비교하자면 그녀는 몇 달간 큰 고생도 아니었다.“지금은 기세를 몰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소욱은 그녀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알기에 더는 말리지 않았다.그저 한마디 덧붙였다.“밤에 공성을 시작할 때,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봉구안은 적군을 밑으로 내리차고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땅굴로 던졌다.옆에 있던 은이는 재빨리 반응해 구멍을 방패로 막았다.곧이어 땅굴 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땅굴 안.북연 황제는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전진하던 중, 전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무슨 일이냐!"곧 누군가 소리쳤다."장수말벌이다! 장수말벌이 나타났다! 모두 도망쳐라!"‘장수말벌?’‘어디서 장수말벌이 나타났단 말인가!’황제는 생각할 틈도 없이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후퇴를 했다.비좁은 땅굴 속에서 후방 병사들은 탈출하려고 앞으로 밀치고, 앞쪽 병사들은 장수말벌을 피해 후방으로 되돌아오며 두 무리가 엉켜 서로 밀치고 싸웠다.결국 병사들은 장수말벌에 쏘여 온몸이 붓고 고통 속에 비명을 질렀다.다시 선성으로 돌아왔을 때, 병사들의 모습은 완전히 엉망이었다.북연 황제는 호위병들의 보호로 장수말벌의 공격은 피했지만, 여전히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대체 어디서 장수말벌이 나온 거냐!"한 병사가 대답했다."폐하, 남제군입니다! 그들이 땅굴을 발견하고 저희를 막았습니다!"단춘은 얼굴 곳곳에 벌에 쏘인 자국이 생겨 눈꺼풀까지 부어올랐다.그는 분노를 참으며 얼굴이 검게 변해갔다."남제 놈들이 어떻게 땅굴의 존재를 알았단 말인가! 분명 적의 간첩이 있는 거겠지!"북연 황제도 단춘의 생각에 동의하며 소리쳤다."그 밀정을 찾아내라! 가죽을 벗겨버리겠다!"하지만 밀정을 찾지 못한 사이, 연합군의 군량은 거의 바닥이 났고, 병사들은 생존을 위해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거기에 밤마다 음병의 괴롭힘까지 더해져, 병사들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선성 밖.맑은 하늘 아래, 남제군이 둘러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다.고기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선성 안 병사들까지도 그 냄새를 맡고 침을 삼켰다.주막 안.봉구안은 몇몇 장수들과 전략 회의를 하고 있었다.그때 은삼이 들어와 공손히 말했다."황후마마, 진나라가 항복을 요청했습니다."봉구안은 고개를 들
남강 왕궁.서왕은 상객으로 예우받았다.남강왕은 술잔을 들며 거창하게 말했다.“내가 짐작했지. 남제는 큰 책략을 가지고 있다.”“서왕, 남제가 요즘 기세가 대단하군. 한 달 남짓 만에 적국의 원군 십여만을 섬멸했다니, 정말 감탄스럽구나.”“이렇게 가면 곧 적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서왕은 자만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남제가 적군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전원이 한마음으로 뭉쳤기 때문입니다.”“아직 전세가 안정되지 않았으니,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남강왕과 아래에 앉은 신하가 눈빛을 주고받았다.이윽고, 그 신하가 일어서며 말했다.“서왕 전하, 귀국이 승전가를 이어가며 구름을 걷어내고 푸른 하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남강 외곽의 수화부 연합군도 물러갔으니, 이제 남강을 귀국의 주둔군이 지킬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서왕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이것이 바로 남강 군신들의 진짜 속셈은 남제 군대를 남강에서 철수시키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서왕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렇다면, 내일 제가 병력을 데리고 떠나겠습니다.”애초에 떠날 생각이었다.남강에 주둔했던 것은 남강을 지원하고, 수화부를 막으며, 남제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수화부 연합군이 이미 물러났으니, 황상과 황후의 계획에 따라 그는 확실히 귀국해야 했고, 5만 군사를 이끌고 동방을 증원해 조유관을 지킬 때였다.남강왕은 무척 만족한 듯 술잔을 들어 함께 건배했다.“남제와 남강은 형제의 맹약을 맺은 사이. 서왕, 이 잔을 비우며 남제가 이 난관을 넘기고 대승을 거두길 기원하자구나!”서왕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왕좌에 앉은 남강왕은 남몰래 서왕을 냉랭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남제는 심모원려한 나라였다. 전쟁도 허실을 섞어 대하기 어려웠다.작은 실수가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에, 남강은 항상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수화부 연합군이 물러났으니, 남강에 남제 주둔군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남강 땅에 남제 군사 한 명도 남길 수 없었다!
3월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고 꽃들이 만개했다.각국의 원군이 남제 땅으로 들어오자 소욱이 이끄는 남제 군대가 그들을 포위 공격했다.'거미줄'은 아래에 있고 사람은 위에 있으니, 적들은 그 전술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각국 장병들은 이런 전투 방식을 본 적이 없었다. 기습적으로 나타나는 함정과 계략이 그들을 괴롭혔고, 남제군의 움직임은 신출귀몰했다.'병귀신속'이란 말 그대로, 소욱은 직접 전장에 나가 결단력 있고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한편, 선성에서는 연합군이 본국의 추가 지원군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들은 3개월째 고립되어 있었고, 식량은 점점 바닥났다. 더는 병사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다.이대로 가면 설령 선성의 보물을 찾아도 살아서 누릴 수 없을 터였다.그간 계속해서 성문 자물쇠를 열어보려 했지만, 50만이 넘는 병사들 중 그 자물쇠를 풀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단춘은 병사들을 이끌고 도끼와 대검을 들고 성문을 부수려 했지만, 철벽 같은 그 방어 장치는 칼도 창도 통하지 않았다.주국공부.북연 황제는 눈앞의 음식을 보고 젓가락을 세게 내려놨다.탁!그는 곧 질책하듯 물었다.“이게 전부냐? 고기는 어디 갔느냐!”호위병이 답했다.“폐하, 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황제가 호위병들을 훑어보니 그들 모두 예전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다.이대로 가다간 남제군이 공격해 오기도 전에 굶어 죽을 판이었다.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탁자를 뒤엎었다.“쾅!”“오늘 밤, 야습해서 탈출한다!”이대로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성문으로 나갈 수 없었기에, 그들은 운제와 벽에 매단 밧줄을 이용해 성벽을 넘어가야 했다.그날 밤, 북연군은 북쪽 성문을 통해 탈출하려 했다.밤하늘 아래, 모두가 조심스레 움직이며 성 밖의 남제군이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운제를 설치한 뒤, 병사들은 운제를 타고 성벽으로 올라갔다.그 후 밧줄을 붙잡고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하지만, 내려가는 도중 갑자기 화광이 비춰왔다.밝은 불빛이 그들을 드러내며
대하국의 지원군은 초조함에 휩싸였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리 옥석비가 있다지만, 겨우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남제 황제가 그들의 10만 대군과 싸우려 하다니, 너무나 오만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곧 이어진 광경은 그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땅이 갑자기 들썩이며 사방에서 수천의 병사가 솟아나 그들을 포위해 버렸다.대하국 선봉 지휘관은 망연자실했고, 후방 병사들은 무기를 움켜쥔 채 외쳤다.“장군님, 매복입니다!”소욱의 눈은 서늘하게 얼어붙어, 차갑기만 했다.“항복하는 자는 살려줄 것이다.”대하국 병사들은 전투용 쇠뇌를 준비하며 진영을 구축했고, 선봉 장수는 큰 소리로 외쳤다.“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 남제군을 모두 쓸어 버려라!”소욱의 얼굴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했고, 그는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멀리서 준비를 마친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올렸다.같은 시각, 북부에서는 북연의 10만 대군이 남제군의 기습을 받았다.맹건은 북방군을 이끌고 어디선가 나타났고, 그의 옆에는 옥석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북연 병사들은 맹건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북방군은 이미 궤멸된 게 아니었나? 어째서 여기에 나타난 거지?”맹건은 흙 언덕 위에 서서 강렬한 눈빛과 함께 살기를 뿜어냈다.남제를 공격하는 여러 나라들이 한창 공세를 펼칠 때, 그는 이미 황제와 봉구안으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아두고 있었다.처음에는 북방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너무 터무니없이 들렸지만, 곧 남제가 이미 ‘거미줄’로 불리는 비밀 통로를 구축해 놓았음을 알게 되었다.북방군은 패한 척하며 은밀히 거미줄 통로 속에서 숨었고, 그동안 백성들을 대피시키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이제야말로 반격의 때가 온 것이다.맹건은 장검을 뽑아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선조의 옥석비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 남제의 국토를 침범한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갇혀 있던 늑대처럼 전의를 불태우던 북방군은 순식간에 몰려들어 포효했다.“돌격하라!”북연의 주
단춘의 손이 떨렸다.“뭐라고? 죽였다고?”보고하던 병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는 무릎을 꿇으며 성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음병들이 지나간 후, 병사 수십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너무도 참혹한 광경이었습니다. 장군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단춘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그 자신도 답을 몰랐다.평생 사람과의 전투만 치러왔던 그에게, 이번에는 귀신과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주국공부.시위병이 황제의 침실로 뛰어들어왔다.“폐하! 음병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북연의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말했지! 귀신이면 귀신도 베란 말이다! 당장 음병들을 모두 없애라!”황제의 광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광기가 귀신을 향해 번졌다.시위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폐하, 그들은 음병입니다. 신출귀몰하며 잡으려 하면 금세 사라집니다.”“야간 경계 중인 우리 병사들이 수십 명 죽임을 당했고, 그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습니다. 도저히 손쓸 수가 없습니다!”북연 황제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어렸다.설마, 이 선성에 진짜 귀신이 있다는 것인가?그는 고심하며 생각을 이어가다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만지더니, 문득 얼굴이 굳어졌다.“내 옥쇄가 어디 갔느냐!”시위병들은 놀라며 어리둥절해했다.황제의 옥쇄가 사라졌다니!제국의 상징이자 중요한 물건이 어째서 사라진 걸까?……다음 날, 선성 밖.남제군은 성 안에서 음병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몇몇 적군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이야기는 너무도 황당해서 믿기 힘들었다.본진 안.장수들은 일제히 갑옷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봉구안도 차분히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머리가 빠른 자들은 이미 이 모든 것이 황후의 계략임을 간파했다.음병들은 분명 살아 있는 병사들이었다.남제군이 비밀 통로를 통해 이동한 전례가 있는 만큼, 선성 내부에도 비밀 통로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음병으로 적군의 사기를 꺾은 만큼, 이제 공격 명령이 내려질 것이
귀신이 출몰했다는 한 병사의 외침에, 선성을 경계하던 병사들은 순간 굳어버렸다.텅 비었던 선성 내부의 광장에 갑자기 수많은 장병들이 나타난 것이다.그들은 남제 갑옷을 입고, 천둥소리가 어우러진 밤하늘 아래 규칙적으로 걸어갔다.그들 몸에서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성벽 위, 누군가 공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음병이다! 음병이 나타났다!”음병이 길을 지나간다는 전설은 여러 나라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사람들은 평소 죄를 짓지 않으면 한밤중에 귀신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다는 말을 흔히 하곤 했다.하지만 현실에서는 비겁한 자들뿐만 아니라 겁이 많은 사람들도 귀신을 무서워했다.세상에는 겁이 많은 사람이 더 많았으니, 음병의 등장에 병사들은 모두 몸을 떨었다.그래도 그나마 용기를 내는 병사들이 장군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러 갔다.음병들의 창백한 얼굴만 봐도 등골이 서늘해졌던 그 순간, 단춘 장군은 바로 갑옷을 챙겨 입고 성벽으로 나왔다.그조차도 음병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남제 장병들이 기괴하게 행진하는 모습을 보자, 단춘은 잠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병사들에게 단호히 명령했다.“고개를 돌려라! 눈을 감아라! 그들을 보지 말아라!”이는 오래된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었다.음병이 길을 지나갈 때 이를 보면, 음병들이 자신도 같은 동료로 착각해 데려간다는 것이다.여기서 데려간다는 건, 결국 목숨을 잃는다는 뜻이었다.귀신과 신령은 가까이하기보다는 멀리해야 했다.단춘 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 역시 병사들에게 같은 지시를 내렸다.천둥소리가 계속 이어졌고, 이는 번개의 울림인지 음병들의 말발굽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한편, 북연의 황제는 선성의 국공부에서 자다가 바깥의 소리에 잠에서 깼다.“밖에 무슨 일이냐!”경호병이 급히 보고했다.“폐하, 음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음병?”황제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이건 틀림없이 남제의 계략이다. 무장을 갖춰라! 그 음병들이란 놈들을
성문이 잠긴 것은 자명했지만, 그 열쇠를 쥔 자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명백한 것은 이 일이 연합군 내부의 소행일 리 없다는 것이다.즉, 그들 사이에 이미 남제의 첩자가 스며들었다는 뜻이었다.연합군은 차가운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놀람이 가시자마자, 각 군대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수화부 연합군은 대하국 동부 연합군을 비난하며 말했다.“첩자는 분명 당신들 안에 숨어있을 것이오! 동방군과 교전한 건 당신들밖에 없지 않소!”“우리 수화부는 남부에서 바로 온 병사들이란 말이오!”단춘은 즉각 반박했다.“북연 연합군도 마찬가지로 남제와 싸웠소!”“그리고 남부에서 왔다고 해서 첩자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소?”“오히려 이미 섞여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소!”북연 황제는 이때 상대적으로 침착한 태도로 그들의 다툼을 제지했다.“그만하라! 너희의 소리가 귀를 찌르니 멈추거라!”“첩자가 어디에 있든 간에, 지금 중요한 건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성문이 잠겼다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적도 성문을 뚫지 못하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황제의 이 말은 언뜻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단춘 같은 경험 많은 장수에게는 부족함이 있었다.단춘은 그의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며 물었다.“폐하, 혹시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계신 겁니까?”“저희가 성문을 나갈 수 없다는 건, 결국 여기서 갇혀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이 말이 나오자, 군대는 순식간에 동요하기 시작했다.포위된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남제군이 서두르지 않고 성을 공격하지 않는 것도, 시간을 두고 연합군의 식량을 고갈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는 전략임이 분명했다.……선성 밖.남제군은 자리를 잡고 주둔 중이었다.지휘소에서는 봉구안이 침착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한 장군이 허리를 굽혀 물었다.“황후마마, 병사들이 선성을 언제 공격하냐고 묻고 있습니다.”봉구안은 그
선성 밖에서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수십만 남제 장병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는 선성 위를 울려 퍼지며, 마치 갇혀 있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성 안에서도 그 소리가 선성을 흔들 만큼 강렬하게 울렸다.봉구안은 전마를 타고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갑옷 아래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성문은 이미 단단히 닫혀 있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였다.성루 위에서는 단춘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그 옆의 부장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장군, 저건 동방군입니다. 대체 어떻게 선성에 나타난 걸까요?! 분명 감주에 있어야 할 자들인데…”하늘에서 날아온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북연의 황제는 성 밖 동방군의 존재에 크게 분노했다.그는 단춘의 옷깃을 움켜잡고 호통을 쳤다.“감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그런데 이게 대체 뭐냐! 단춘, 정말 잘도 해냈구나!”단춘은 당혹스러웠다.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기에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그때 수화부 연합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남제가 당신들을 속인 게 확실하군!”황제는 점점 격분하며 단춘을 더욱 매섭게 쏘아봤다.“동방군이 너희 뒤를 따라왔는데도 모르다니, 이런 실력으로 남제를 우리 북연과 나누겠다고? 정말 가소롭구나!”단춘은 황제의 손을 뿌리치며 반박했다.“폐하, 성 밖에 있는 건 일부 동방군에 불과합니다.”“게다가 우리 동부 연합군만 속은 것도 아닙니다.”“남부 연합군인 수화부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남제군을 알아챘습니까? 똑같이 속았으면서 왜 저희에게만 책임을 묻습니까?”동부 연합군의 장수들도 이에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남제의 계략은 워낙 교묘합니다. 감주를 언제 빠져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폐하, 북부 연합군이라고 해서 뒤따라오는 남제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그만들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