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가만히 서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연재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이게 다 너 때문에 화가 나서 상처가 다시 벌어진 건데 모른 척할 거야?”“뭘 해드려야 하죠? 나가서 꽃이라도 사올까요? 원하는 게 있으면 대놓고 말을 하세요. 예를 들면 물 안 떠다 주면 사진을 공개해 버리겠다든가. 그러면 제가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것 아니에요.”결국 연재준은 황당함에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너 때문에 화병 나서 죽으면 그때 그 사진들을 인쇄해서 내 무덤에 붙일 거야. 사람들 다 보게.”유월영도 화가 치밀었다.“미친 거 아니에요?”연재준은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었는지 이불을 걷고 상처를 부여잡은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유월영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다가가서 물컵에 물을 따라 건넸다. 노현재까지 여기 있는데 상처 또 벌어졌다고 찾아와서 난리를 부리면 주영문 같은 꼴이 되기 싫었다.“목 마르면 차라리 하 비서를 부르지 그래요? 밖에 대기하고 있는데.”연재준은 물컵을 받지 않고 그녀가 먹여줄 때까지 기다렸다.너무 자연스러워서 유월영은 황당함에 웃음이 나왔다.손이 다친 것도 아닌데 꼭 이래야만 할까?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렸다.목을 충분히 축인 연재준은 만족스럽게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며 활짝 웃었다.“주영문 혼내줬어.”“알아요.”“그런데 주영문 다리는 누구 걸작일까?”유월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걸 제가 어떻게 아냐고요?’“사방에 적을 두었을 테니 누구한테 맞아도 이상하지 않죠.”연재준이 말했다.“난 누가 했는지 알겠는데.”“누군데요?”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궁금해하지 않는 게 좋아.”유월영은 미친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침대로 돌아가려고 뒤돌아섰다.연재준은 그대로 손을 뻗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고 유월영은 반사적으로 손길을 뿌리쳤다.본능적인 거부에 그는 잠깐 당황하는 듯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내 몸에서도 냄새 나. 좀 닦아줘.”유월영이 그 부탁을
유월영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다가가서 한 손으로 그의 옷을 벗겨주었다.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가슴으로 드리우면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그는 그녀의 날렵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피부의 솜털마저 똑똑히 보였다.시선을 점점 아래로 내리던 연재준의 눈빛이 점점 혼탁해졌다.그는 최근에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현시우가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일부러 약 올리려고 더 거칠게 다루었는데 전혀 성취감이 들지 않았다.조금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유월영은 점점 뜨거워지는 그의 체온을 느끼고 경계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연재준은 눈빛에 드리웠던 욕정을 순식간에 억누르고 싸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러고는 일부러 여유 있는 척, 재촉했다.“빨리 좀 해. 내 맨 살을 그렇게 보고 싶었어? 아니면 내가 다쳐서 아무것도 못할 때에 보복이라도 하려는 거야?”유월영은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 하며 속으로 후회했다.그러면서도 깨끗한 환자복을 가져와서 입혀주었다. 연재준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지금은 욕구가 올라와도 참아야 할 때였다. 그녀에게 들키는 순간 도망갈 것이다.병원 신세를 지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옆에 붙잡아두려면 자제해야 했다.분명 응급 처치가 끝났을 때는 이틀만 입원해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3일째가 되자 갑자기 수액이 남았다면서 병원 측에서 퇴원을 거부했다.“퇴원이요? 안 되는데요. 모레까지 수액 남았어요.”유월영은 당황하며 간호사를 재촉했다.“수액이 어떻게 남을 수 있죠? 분명 심각한 상처도 아니고 이틀 있다가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는데요.”그녀의 추궁에도 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저는 잘 모르겠고 담당 선생님 지시예요. 어쩌면 염증이 가라앉지 않아서 수액을 더 처방했ㅆ을 수도 있거든요.”말을 마친 간호사는 바쁘다고 가버리고 유월영만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있었다.이
유월영은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랩을 가져오게 했다. 랩으로 상처 부위만 감싸면 간단한 샤워를 살 수 있었다.안 그래도 어제는 물수건으로 닦기만 해서 온몸이 찝찝했다.병실 공간은 컸지만 방음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연재준은 병상에 누워 해외 바이오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하고 잔 실수의 연속이었다.바이오도 환자복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이해한다며 다음에 통화하자고 했다.“괜찮습니다. 계속하시죠.”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일에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점점 생각이 먼산으로 갈 것 같았다.남자는 본능이 앞서는 동물이었다.남녀관계에서 여자는 남자가 자신에게 해줬던 사소한 일상을 기억한다. 예를 들면 날이 더울 때 선물하는 아이스크림, 추울 때 챙겨주는 외투 같은 사소한 것들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하지만 연재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그녀와 사랑을 나누던 밤이었다.그와 유월영은 그런 쪽으로 아주 잘 맞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그의 취향에 맞춰주었다.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진 인형 같다는 느낌도 있었다.둘이 처음 만나고 1년이 지났을 때 그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온 그는 딱히 무언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유월영은 그가 흥미를 느낀 첫 존재였다.첫 잠자리가 끝나고 이어지는 한달 동안 그들은 매일 같이 출근하고 저녁이면 연재준의 오피스텔로 돌아가서 밤새 서로를 안았다.소녀였던 유월영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가 다 가르쳐야 했다.업무적으로 그는 그녀에게 스승이었고 정사에서도 그랬다.그는 오늘 가르친 것을 내일 응용하도록 그녀에게 시켰다. 그가 그녀에게만 내준 숙제와도 같았다. 만약 그녀가 숙제를 완수하지 못하는 날이면 벌로 될 때까지 연습하게 했다. 매일 밤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그만 자자고 애원했다.‘그땐 그랬었지.’욕실에서 물소리가 끊어지고 연재준의 사색도 끊겼다.그는 담담히 시선을 내리
유월영은 흠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연재준은 물수건을 그녀에게 돌려주며 쌀쌀맞게 말했다.“난 안 급해. 너만 괜찮다면 말이지.”괜찮을 리가 없었다. 엄마의 병이 완쾌되기 전까지 그녀는 마음을 졸일 것이다.다만 매번 언니에게 전화할 때마다 상태가 안정적이라고 하기에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하고 싶었다.연재준이 제시한 조건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가능하다면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다.그녀는 말없이 수건을 가지고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새 물수건을 가지고 돌아와 그에게 건넸다.연재준은 자세를 바꾸더니 당당하게 말했다.“잔등 좀 닦아줘. 피가 말라붙었는지 간지럽네.”“그건 좀….”“인공 심장 이식은 해외 전문가들이 우리 나라보다 더 숙련되었어. 다만 네 엄마 상황으로는 비행기를 탈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너 해외로 건너간다고 해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유월영은 물수건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해외로 가는 걸 고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처럼 엄마의 상태가 장시간 비행을 감당할 수 없었다.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다가가서 그의 등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주었다.남성미 물씬 풍기는 앞모습에 비해 그의 잔등에는 두 갈래의 흉터가 있었다.그것은 두 개가 교차하여 X자 모양으로 생긴 채찍자국이었다.오래된 상처인데도 지금까지 흉터가 진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맞을 때 그가 얼마나 아팠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 상처의 근원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연재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누가 감히 채찍으로 그의 몸에 상처를 새길까?과거 둘이 사이가 좋을 때 신경 쓰여서 물어본 적 있었다. 혹시 어릴 때 뭘 잘못해서 연 회장이 때린 건 아닌지 물어봤다.그럴 때마다 연재준은 표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그 정도로 모진 사람은 아니라고 답했다.연 회장이 아니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았다.유월영은 갑자기 이 상처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졌다.물론, 지금의 그녀는 그런 유치한 질
안으로 들어오려던 신연우는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방음 효과가 좋지 않은 병원 병실에서 그들의 대화가 똑똑히 들렸다.차분하게 시선을 내린 그의 주변에서 우울한 분위기가 풍겼다.최선을 다해 양분을 제공해서 곳 꽃이 필 거라고 기대했는데 모든 게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결국 그는 조용히 뒤돌아 섰다.연재준은 속으로 비웃음을 터뜨렸다.물수건을 내려놓은 유월영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저를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신 교수님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않은 건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진짜 필요한 때가 오면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교수님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겠죠.”연재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넌 걔가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유월영은 솔직히 대답했다.“제가 만난 중에 가장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저한테 잘해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으니까요.”연재준은 대놓고 비웃었다. 그녀의 순진함에 웃음이 나왔다.유월영은 더 이상 그와 변론하기 싫어서 환자복을 던져준 뒤에 병실을 나왔다.신연아를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입원한지 이틀이나 됐는데 한 번도 찾아간 적 없었다.병실에 가보니 신연우도 거기 있었다.“교수님.”신연우는 그녀를 본 순간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다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월영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그는 병실에 못 간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지금 오는 길이에요. 연아 밥 챙겨주고 가려고 했는데. 많이 배고파요?”신연아는 이상한 눈으로 오빠를 쳐다봤다.분명히 조금 전에 도시락만 내려놓고 나갔다 돌아오더니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배는 안 고파요. 연아 씨 보러 왔어요.”유월영은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신연아의 종아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연아 씨는 좀 괜찮아요?”신연우가 대신 대답했다.“통증은 많이 가셨대요. 연아야, 너 걱정돼서 문안까지 왔는데 넋 놓고 인사도 안 할 거야?”신연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인사를 건넸다.“왔어요?”유월영은 웃으며 말
신연우가 매화 마을에서 채집한 데이터를 메일로 보내주었기에 유월영은 다음 날부터 노트북으로 데이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다친 손도 이제는 움직일 수 있어서 속도가 났다. 한바탕 일을 마친 뒤, 수액도 끝나고 간호사가 와서 링거를 거두어 갔다.유월영은 수액 병에 쓰인 약명이 이틀 전이랑 다른 것을 보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신연우에게서는 점심에 못 올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배달을 따로 시켜준다고 했지만 유월영은 간만에 내려가서 먹겠다고 하며 거절했다.점심 때가 되자 유월영은 기지개를 펴며 침대를 내려 외투를 챙겼다.연재준이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내 것도 포장해 줘. 그 보답으로 오후에 재미난 거 보여줄게.”“깜빡할 것 같으니까 그냥 하 비서 시켜요.”유월영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연재준은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바깥의 화창한 날씨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병원을 나온 유월영은 근처 칼국수 집으로 들어가서 칼국수를 주문했다.식사를 기다리는 동안에 그녀는 아까 찍어둔 약명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갑자기 입원 날짜가 이틀이나 늘어난 게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그리고 그녀의 그런 추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약명을 검색한 결과 일반 비타민 주사였다.의료진이 당장 퇴원해도 되는 환자에게 영양제를 더 투여했을 리는 없었다.누군가 권력을 이용해서 의사와 짜고 행한 일이 틀림없었다.그리고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핸드폰을 내려놓은 유월영은 대충 식사를 마친 후에 싸늘한 얼굴을 하고 병원으로 돌아갔다.‘연재준! 대체 이 변태 같은 통제욕을 언제면 그만둘 거야!’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자 연재준이 정장을 갈아입고 앉아 있었다.그녀가 밥을 먹고 오는 사이에 그는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는 환자에서 다시 냉철하고 철두철미한 연 대표로 돌아가 있었다.유월영이 당황해서 잠시 주저하는 사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안 사준다더니 진짜 아무것도 안 사왔네.”유월영이 물었다.“제 입원날짜 연기하게 시킨
신연우의 비싼 구두가 주영문의 머리를 짓밟고 있었고 주영문은 얼굴이 진흙탕에 처박힌 채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개 같은 자식! 차라리 여기서 날 죽여! 안 그러면 나중에 나도 네 놈의 다리를 분질러버릴 테니까!”신연우는 태연한 표정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고 주영문의 얼굴은 점점 깊은 진흙탕으로 빠지고 있었다.데이터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구석진 곳에서 주영문이 기습해 왔다.하지만 이미 다리가 골절된 주영문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신연우는 아주 손쉽게 주영문을 발 밑에 놓고 짓밟을 수 있었다.평소였다면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는 현재 굉장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어젯밤 연재준과 유월영의 대화를 들은 뒤로 안 그래도 저기압인데 주영문이 마침 나타났던 것이다. 그날 밤에 주영문이 유월영을 납치하고 약을 먹이지만 않았어도 그 뒤에 일련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하루종일 부아가 치밀었다.“그건 다 네가 자초한 거잖아.”신연우는 쭈그려 앉아 주영문의 귓가에 대고 부드럽게 말했다.“널 죽여서 뭐해? 차라리 살려두고 천천히 괴롭히는 게 더 재밌지.”차와는 거리가 있었기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유월영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광기 어린 저 표정을 보았을 때 평소에 그녀가 알던 신연우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그녀는 갑자기 주영문의 다리를 누가 부러뜨렸냐고 묻던 연재준의 얼굴이 떠올랐다.“설마 주영문 다리를 부러뜨린 사람이….”재미난 구경을 보여준다고 안 간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나온 것 치고는 연재준의 표정은 시큰둥했다.“신연우가 한 거야.”그는 처음 만날 때부터 신연우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주영문 다리 사건을 보고 받았을 때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신연우와 현시우를 떠올렸다.그래서 이쪽 전문가인 노현재에게 부탁해서 이미 도망간 주영문을 붙잡아다가 매화 마을에 풀어놓았던 것이다.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속았
하정은은 조용히 뒷좌석 가림막을 올렸다.유월영은 그와 가림막 사이에 갇힌 자세가 되었다.공간이 비좁아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유월영은 울먹이며 그를 밀어냈다.“왜 이래요! 놔요!”연재준은 한 손으로 그녀를 받치고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잡은 채, 눈을 직시했다.“신연우를 위해서는 되지도 않은 핑계까지 갖다 붙이며 널 속인 것조차 용서하고, 나한테는 온갖 있지도 않은 죄명을 같아 붙이다니. 유월영 너 참 대단하다.”남자의 얼음장 같은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감싸며 도망가지 못하게 그녀를 옥죄었다.“소은혜가 나 때문에 너를 수림에 갖다 버렸다고 했지? 하지만 우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왜 그걸 해명을 하고 있지?유월영은 웃음이 나왔다.“둘이 어떤 관계인지 나는 관심 없어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유월영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그의 손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억세게 그녀를 압박했다.“넌 항상 소문만 듣고 너 혼자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나를 천하에 악인으로 만들었어. 내가 그랬지. 네가 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선박에서 내가 언제 너를 내주는 조건으로 프로젝트를 손에 넣겠다고 말한 적 있어?”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유월영도 화가 치밀었다.“그런 얘기 하셨잖아요!”“내가 양보한다고 한 건 가면 무도회 파트너를 이야기한 거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으면 뭘 어떻게 말해야 하지?”“결국 난 양보도 하지 않았잖아. 처음부터 너한테 왼쪽으로 가라고 했지? 그런데 너는 어땠지?”“그건!”유월영은 이를 갈고 울먹이며 말했다.“증거도 없고 시간도 많이 흘렀으니 거짓말을 해도 아는 사람이 없겠죠. 물론 핑계를 댈 거면 그냥 대세요. 어차피 지금은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까요. 이거나 빨리 풀어줘요.”연재준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신경 안 써도 내가 신경 쓰여. 네가 뭔데 날 원망해?”유월영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결국 그녀는 속에서 참았던 말을 입밖으로 뱉고 말았다.“3년 동안 저는 대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