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우울한 기분을 안고 호텔 로비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때, 격정적인 피아노소리가 그녀의 귀를 자극했다.고개를 돌려 보니 로비 중앙에 비치된 피아노 앞에서 누군가가 격정적인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다. 소리를 듣고 몰려온 사람들이 연주자의 주변을 에워싸고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그가 연주하는 곡은 인셉션 OST 중의 하이라이트 부분이었다. 유월영도 무척 좋아하는 곡이었다.중학교 때 어느 날 현시우를 보러 그의 학교에 찾아갔다가 음악교실을 지나며 우연히 들은 곡이었다.그때는 현시우한테 정신이 팔려서 연주자가 누군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음악교실을 지나쳤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 그 곡을 다시 들으니 연주자의 얼굴이 궁금해졌다.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피아노 앞에서 무아지경으로 연주 중인 사람은 다름 아닌 연재준이었다.그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람들이 다 보는 공간에서 혼신의 힘을 담아 연주하고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건반을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모습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하지만 그의 얼굴을 알아본 유월영은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연주자가 그라면 아무리 좋은 멜로디라도 감상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를 발견한 연재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세웠다.“이리 와, 유월영.”유월영은 기분이 나빴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연재준이 말했다.“일 때문에 불렀어.”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자리였기에 유월영도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네, 대표님.”유월영은 연주를 멈추고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구경하던 사람들도 연주가 멈추자 뿔뿔이 흩어졌다.연재준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설 의원이 그제 신주로 가자마자 신 회장이 식사 요청을 보냈다더라고? 둘이 식사 자리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 SK의 지분이 갑자기 20%에서 35%로 늘어서 지금은 해운이랑 동등한 위치에 있게 됐어.”유월영은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그랬군요.”“설 의원의 일정은 항상
잠시 뜸을 들이던 유월영이 물었다.“예를 들자면요?”그는 여전히 건반을 두드리며 느긋하게 말했다.“수석비서 자리, 여전히 네 거야.”유월영이 다시 물었다.“또 있나요?”연재준이 답했다.“연봉도 올려줄 거고 연말 보너스도 두둑하게 나갈 거야.”“그리고요?”연재준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가 기억하는 유월영은 욕심이 지나친 사람은 아니었다.그는 건반을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너 아직 자차 없지? 출퇴근하기 불편했을 거야.”유월영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의 사람으로 일해온 3년, 집이나 차는 고사하고 그 흔한 명품백 하나 선물한 적 없던 그였다.그녀가 계속해서 물었다.“그리고 또요?”“네 엄마 수술비, 그거 내가 책임질게.”연재준은 턱을 살짝 치켜들고 부드럽게 말했다.“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엄마의 수술비는 그의 마지막 카드였다. 그는 그녀가 가장 신경 쓰는 게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유월영이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술을 마신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죠? 그 전에 대표님이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왜 제가 그곳에 돌아갈 거라고 자신하나요?”연재준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선박 파티 때, 저를 팔아서 프로젝트를 입찰한 것도 대표님이죠? 제가 새 직장을 찾는 걸 방해하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저를 비참하게 만드셨어요. 그런데 돌아오라는 한 마디에 제가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가야 하나요? 대표님은 대체 저를 뭐로 생각하나요?”처음에는 담담히 응대하고 싶었다.하지만 산책하다가 현시우를 만난 탓인지, 2개월 사이에 쌓은 감정이 한 순간에 폭발해 버렸다.유월영은 냉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대표님은 저를 집에 키우는 애완견 정도로 생각하셨죠. 한 번도 저를 인간 취급을 안 해주셨는데 제가 왜 거기로 돌아가야 하나요?”한참이나 그녀를 노려보던 연재준은 결국 피아노 건반으로 시선을 돌리고 연주를 마무리했다.“그냥 해본 말이야. 오기 싫으면 어쩔 수 없는
전화를 끊은 소은혜는 간단하게 외출 준비를 하고 옆방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녀는 가볍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연재준은 소파에 앉아 독한 양주를 마시고 있었다.“설마 술친구나 해달라고 저 부른 거예요? 그럴 줄 알았으면 화장 안 하고 오는 건데. 에이, 아깝게. 로맨틱한 데이트 기대하고 열심히 화장했더니 이게 다 뭐예요.”연재준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잔에 술을 따랐다.소은혜와 그의 관계를 정의하자면 조금 복잡했다.그녀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괴며 그에게 물었다.“기분이 안 좋아요? 유 비서가 또 대표님 화나게 했어요? 안 그래도 뭐 좀 사러 내려갔다가 둘이 하는 대화를 들었어요.”연재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그러자 소은혜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태연하게 말했다.“유 비서는 아니겠죠. 그 여자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대표님 기분에 영향을 주겠어요? 백유진 씨랑 뭔가 문제가 생겼나요?”술 기운 때문인지, 연재준은 차갑게 비웃음을 터뜨렸다.“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백유진이지.”소은혜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예전에 그가 백유진을 대하던 태도를 생각하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항상 연애가 처음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백유진이 남자랑 키스하는 사진을 봐서 자존심이 상한 게 분명했다.연락처를 차단하고 출장을 나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소은혜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느긋하게 말했다.“하지만 지금 백유진 씨랑 헤어지면 가장 기뻐할 사람은 연 회장님이겠군요. 어쩌면 이게 기회다 싶어서 대표님과 유 비서의 재결합을 추진하실지도 몰라요.”연재준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물론 소은혜는 유월영이 다시 그에게 돌아올 리 없다고 확신했다.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대표님도 저한테 큰 도움을 주셨으니까 보답할 겸, 제가 도와드릴게요.”말을 마친 그는 호텔 카운터로 전화를 걸었다.“여기 1901호실인
유월영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그럼 일정은 어떡한대요? 나 혼자 가요? 아니면 여기서 계속 기다려요?”이 비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알아서 하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월영은 또 소은혜에게 전화를 걸며 이번에도 안 받으면 혼자 가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그런데 그때, 뒤에서 소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월영 씨, 미안해요. 내가 많이 늦었죠?”그녀는 유월영의 앞에 다가가더니 웃으며 말했다.“며칠 병원에 있다 보니 약간 절제가 안 됐나 봐요.”유월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빨리 출발해요. 오늘 할 일이 많아요.”업무량이 많고 소은혜가 30분이나 지각하면서 시간이 급박했기에 유월영은 차에 오르자마자 노트북을 펼쳤다.소은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편안히 허리를 기대고는 여기저기 몸이 쑤신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소 팀장님, 제가 설명드린 거 다 들으셨죠?”“그럼요. 몸이 피곤해서 그렇지 귀는 열려 있다고요.”소은혜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만 찢어지는 것보다는 같이 움직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하나씩 공략하는 게 효율적인 것 같네요.”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해서 담당자와 소통하는 건 전부 유월영의 몫이 되었다.소은혜는 방관자처럼 편히 앉아서 대화에 끼지도 않고 듣기만 했다.‘하, 어젯밤 무리했으니 피곤해서 정신이 없겠지.’유월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차라리 혼자 오는 게 나았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한참 농땡이나 부리던 소은혜가 담당자에게 갑자기 물었다.“근처에 약국 있어요? 근육통이 심해서 파스 좀 사야겠네요.”유월영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담당자도 난감한 기색으로 눈치를 보다가 약국이 있는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소은혜는 그대로 업무를 유월영에게 맡긴 채, 가버렸다.담당자가 유월영에게 물었다.“저분 진짜 경영사업팀 팀장 맞아요?”유월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네.”담당자가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
유월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소 팀장님은 제 개인적인 일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 보여요. 비행기에서도 그랬고 기회만 생기면 업무랑 상관없는 일로 계속 저를 떠보는 것 같아서요.”“저는 친한 동료 사이라도 지켜야 할 선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소 팀장님은 개인적인 일정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소은혜가 물었다.“많이 신경 쓰이나 봐요? 나랑 연 대표님 관계가? 혹시 질투해요? 사실 아직도 연 대표님한테 마음이 있는 거죠? 3년 동안 항상 붙어 다녔잖아요. 어떻게 하루아침에 모든 걸 끊어내겠어요.”유월영은 그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을 했다.“난 소 팀장님 사적인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자꾸 일과 무관한 일을 이야기할 거면 그냥 짐 싸고 돌아가세요. 이러시는 거 여러 사람 불편하게 만들거든요.”“만약 저를 라이벌로 의식해서 일부러 그러시는 거라면 정말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군요.”소은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솔직히 팀장님 이러는 거 정말 짜증나요.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태도 때문에 나까지 사람들한테 오해를 받잖아요. 난 오늘 일정을 위해 어젯밤 밤잠을 줄여가며 계획표를 만들었어요. 오늘 일정을 순조롭게 끝내기 위해서요. 그런데 팀장님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에 나까지 얼굴로 이 자리에 올라온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사잖아요.”말문이 트인 유월영은 더 이상 소은혜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항상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던 소은혜의 얼굴이 처음으로 차갑게 굳었다.만약 소은혜가 적당히 선을 지켰더라면 유월영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진심을 담아 마지막으로 말했다.“난 연 대표님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둘이 무슨 사이든, 뭘 했든 전혀 관심 없다고요. 팀장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도 꼭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그러니까 자중하시라고요.”“자중이라….”소은혜가 갑자기 싸늘한 웃음을 터뜨렸다.
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연재준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유월영을 빤히 노려보며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나중에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 있을 때 다시 연락해.”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더니 갑자기 유월영에게 짜증을 부렸다.“안 탈 거면 거기 버튼 계속 누르고 있지 말아줄래?”이번 엘리베이터를 놓치면 또 한참을 기다려야 했기에 유월영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엘리베이터에 탔다.공간이 좁아서 최대한 그와 멀리 떨어져 서 있는데도 그녀는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둘은 아무런 말이 없이 엘리베이터 전광판만 쳐다보고 있었다. 도중에 연재준의 핸드폰이 여러 번 울렸지만 그는 울리는 족족 끊어버렸다.유월영은 그의 뒤쪽에 서 있었기에 보고 싶지 않아도 핸드폰 화면이 그대로 보였다.백유진이었다.조금 전까지 백유진과 통화하고 있었던 걸까?아니나 다를까, 한참 말이 없던 연재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렇게 돼서 이제 만족해?”“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그런 말을 하는 사이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6층에 도착했다.연재준은 엘리베이터를 나서려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문을 닫았다.유월영은 짜증을 참으며 차갑게 경고했다.“또 왜 이러시는 거예요? 여기 CCTV 있어요.”“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연재준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도 CCTV 있는 곳에서 일을 치르는 악취미는 없어.”유월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연재준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가상 번호로 나한테 그딴 것을 보내면 내가 출처를 못 찾을 것 같았어? 백유진 키스하는 사진, 그거 네가 나한테 보낸 거지? 나랑 백유진 사이를 이간질하려고?”유월영은 이번에는 부인하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둔갑시켜서 모함하는 걸 두고 이간질이라고 해요. 그게 사실이면 단순한 고발에 불과하죠.”연재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그 사진 어디서 났어?”당연히 불법적인 경로로 취
유월영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그래서요? 한정판도 아니고 대학병원에 다 있는 건데요.”“브랜드와 집도의가 다르면 효과도 다르지. 아마 네 엄마 주치의는 감염 확률이 50퍼센트 이상이라고 했을 거야. 내가 소개한 의사가 집도하면 감염률을 10퍼센트로 낮출 수 있어.”연재준이 여유만만한 얼굴로 답했다.유월영은 순간 숨이 막혔다.엄마를 담당하는 주치의도 신주시에서는 꽤 알아주는 흉부외과 박사였다. 그런 인물조차 감염확률이 50퍼센트 이상이 된다고 말했다.그런데 연재준은 10퍼센트로 낮출 수 있다니! 엄마가 살 수 있는 확률이 절반 이상 늘어난 격이었다.“유 비서, 이번에는 협박 아니야. 오히려 너한테 더 좋은 길을 제시한 거지.”연재준은 그녀를 놓아주고 밖으로 나갔다.“선택은 네가 해.”엘리베이터에 홀로 남은 유월영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꽉 쥐었다.선택지를 준 것 같지만 사실 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연재준의 이런 거래 방식이 너무도 역겨웠다.백유진과 냉전 중이면서 소은혜를 방으로 불러 밤새 불태운 주제에 장난치듯이 그녀에게 회사로 돌아오라고 말했다.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거절할 수 없는 거래 조건을 제시했다.엘리베이터가 아래 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그녀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유월영은 먼저 언니에게 문자를 보내 엄마의 상태를 물었다.아무 일 없고 상태가 안정적이라는 답장이 오자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추자 그녀는 다시 회의실이 있는 6층을 눌렀다.그리고 신연우에게 보낼 문자를 입력했다.[교수님, 신주의대는 국내 의학계에서도 인정받는 대학이잖아요. 둘째 형님은 유명한 한의사이기도 하니 혹시 추천할만한 흉부외과 선생님이 있나요?]그녀는 자신보다 인맥이 넓은 신연우가 어쩌면 진 박사보다 더 괜찮은 의사를 추천해 줄 거라고 기대했다.하지만 결국 발송 버튼을 누르지는 못했다. 그녀는 일단 일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다시 고민하기로 했다.엘리베이터를 나선 유월영은 표정을 수습하고 회의실로
호텔로 돌아간 소은혜는 곧장 회의실로 가서 소리쳤다.“큰일 났어요! 유월영 씨가 갑자기 사라졌어요!”오늘 업무를 정리하던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 쏠렸다.실험실 사고를 해결하고 돌아온 신연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는 여기서 일을 마치고 돌아올 유월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지금 뭐라고 하셨나요?”소은혜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오늘 데이터 수집하러 연구기지를 돌고 호텔로 돌아오려는데 유월영 씨가 갑자기 화장실을 간다고 먼저 나갔거든요. 저랑 운전기사는 차에서 30분을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아서 화장실에 찾아가 봤더니 아무도 없었어요.”“월영 씨 핸드폰에 전화했는데 전화기도 꺼져 있더라고요. 근처에서 한참을 찾았는데 못 찾아서 일단 먼저 돌아왔어요. 날도 늦었는데 다 같이 찾아봐요.”신연우가 물었다.“실종 지점이 어딘가요?”“송학로 연구기지요.”대답을 그는 가장 먼저 회의실을 뛰쳐나갔다.연재준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소은혜를 노려보고 있었다.서지욱이 말했다.“뭔가 이상해. 유 비서는 일할 때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이 아니야. 일단 흩어져서 찾아보자. 이 비서, 여긴 이 비서한테 맡길게.”연재준도 비서를 호출했다.“하 비서도 나가서 찾아봐.”사람을 찾는 일을 부하직원에게 맡긴 두 사람은 호텔에서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소은혜도 피곤하다며 회의실에 남았다.하지만 한 시간을 기다려도 수색을 나간 팀원들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조바심이 난 서지욱이 말했다.“우리 그냥 신고하자.”연재준은 턱을 괴고 앉아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다 큰 성인이 제 몸 하나 못 지킬까.”서지욱이 인상을 확 구겼다.“만약 납치라도 당했으면?”연재준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유월영을 납치해서 이득 볼 게 뭐가 있어?”서지욱은 약간 실망한 눈으로 친구를 바라봤다.아무리 회사를 나간 직원이라지만 그와 함께 한 정이 있는데 어찌 이렇게 무덤덤할 수
공항을 나서기도 전에 유월영은 연회 부인의 전화를 받았다.그녀의 목소리는 들뜬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월영아! 우리가 방금 어떤 좋은 소식을 들었는지 알아?”“무슨 소식인데 이렇게 신나셨나요?”유월영은 웃으며 물었다.“네 엄마의 심장이식 공여자가 나왔어! 적합 검사도 성공했어!”유월영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정말이에요?”“정말이야! 공여 심장은 지금 국내에 있어. 나랑 네 엄마는 짐을 싸고 바로 귀국할 준비를 하고 있어! 이제 네 엄마도 인공 심장 없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어!”유월영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좋은 소식이에요. 너무 다행이에요.”옆에서 상황을 몰랐던 연재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유월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답했다.“엄마가 드디어 심장이식을 할 수 있다고 해요!”연재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처음으로 적합 검사에 성공했던 심장은 백유진 아버지가 먼저 받아 갔고 그들은 무려 5년을 기다려야 했다. 인공 심장은 보통 7~10년 정도 지속되지만 심장이식이 성공하면 이영화는 평생 건강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이번 공여자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과도 같았다.전화를 끊은 유월영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재준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사실 그녀는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려 왔다. 연재준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수술 준비는 내가 다 맡을게. 걱정 마, 반드시 성공할 거야.”유월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월영의 어머니를 위해 연재준은 최고 수준의 의료팀을 초청해 모든 것을 직접 관리했다. 귀국 후 이영화는 정밀 검사를 받고 거부 반응 억제제를 복용하며 수치를 안정시켰다. 며칠 후, 수술이 진행되었다.수술 당일, 마취 직전 이영화는 의사를 통해 딸에게 전했다.“월영아, 집에 가서 쉬렴. 병원에서 기다리다가는 네 몸이 상할 거야. 네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어떻게 견디겠니?”동생 유수영도 수화로 말했다.“언니, 집
유월영은 최근 여유 시간이 많아지면서 인터넷에서 ‘빈정거리는 말투’를 배우게 되었다.“내가 뛰어가서 구해줄 줄 몰랐다고요?”유월영의 놀림에 연재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당신을 과소평가했어. 전부 내 잘못이야.”유월영은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은 본래 선하다고 믿고 있었다. 예전에 그들이 함께 영안으로 출장 갔을 때, 강수영이 자신이 연재준의 사촌 여동생임을 숨긴 채 의도적으로 애매한 태도를 보여 그녀를 불편하게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사장에서 철근이 떨어질 뻔하자 강수영은 주저 없이 유월영을 밀어내 구해주었다.연재준은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내가 정말 여대생을 좋아한다면 대학 때 왜 연애하지 않았겠어? 여보, 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해서 날 나쁘게 몰아가지 마.”이때 승무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그는 갈비 한 조각을 집어 뼈를 발라내고 고기를 그녀의 그릇에 넣어주며 말했다.“내가 좋아하는 건 오직 당신뿐이야.”유월영은 미소를 지으며 갈비를 입에 가져갔다. 기내식은 의외로 맛이 좋았고 그녀는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창밖 구름을 보며 담소를 나누었다.그때 서정희가 다가왔다.“고민서 씨,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우연이네요. 결혼하셨다고 들었어요. 신혼 축하드려요.”유월영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고맙습니다.”하지만 연재준은 서정희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유월영은 서정희가 자신을 ‘고민서’라고 부르는 걸 듣고 그녀가 자신의 소식을 계속 지켜봐 왔다는 걸 알아챘다.“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서정희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예전에 제가 철이 없었어요. 이제야 깨달았는데 정말 많은 어리석은 짓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사과드리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인사드렸어요.”유월영은 어떤 사람들은 깨닫는 데 시간이 걸린다지만, 서정희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서정희를 마음에서 지운 지 오래였기에 담담
유월영은 임신 8개월 차에 연재준과 함께 마르세유에서 신주시로 돌아와 출산 준비를 하려 했다.두 사람은 아이가 국내에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유월영의 몸 상태를 고려해 연재준은 전용기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항로 신청을 시도하는 도중 마르세유에서 항공 통제가 이뤄져 신청이 어려워졌다.다행히 유월영은 입덧도 심하지 않아 두 사람은 일반 항공편을 이용하기로 했다.그러던 중, 항공기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났다.바로 서정희였다.서정희가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는 최근 몇 년 동안 그녀와 만난 적도 그녀에 대한 소식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유월영은 그녀를 거의 잊고 있었지만 그녀가 한때 유월영과 연재준의 애매한 관계를 부추겼던 기억은 있었다.두 사람은 기내에서 우연히 마주쳤다.서정희는 유월영의 배를 보고 잠시 멍해지더니 급히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마치 자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다.유월영은 굳이 그녀와 인사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에 그냥 못 본 척하며 연재준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연재준은 메뉴를 주문하고 있었고 유월영은 레몬수를 마시며 무언가를 떠올리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연재준은 젖은 물티슈로 그녀의 젓가락과 숟가락을 닦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월영아,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나 무서워.”그는 지금 대부분의 신경을 유월영에게 집중하고 있었다.그녀의 기분을 잘 아는 연재준은 그녀가 보내는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연재준은 부드럽게 말했다.“나랑 서정희 씨는 진짜 아무 관계도 없어.”유월영이 천천히 말했다.“내가 당신이 그 여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생각났어요. 그때 서정희 씨가 자작극으로 나를 납치하려다 사건을 일으켜서 사이버 폭력에 시달렸던 거요. 심지어 피 묻은 택배까지 받았었죠.”연재준은 잠시 멍해지더니 곧바로 부정하며 말했다.“그 택배, 과연 극성팬이 보낸 걸까요? 아니면 누군가 내가 당신 품에 빨리 안기도록 만든 계략일까요?”연재준은
유월영은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내가 뭘 잘못했을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며 생각에 빠져들었고 결국 정신적으로 지쳐 3일간 결석했다.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연재준은 현시우를 찾아갔다.연재준은 유월영이 현시우와의 관계에서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다.이를테면, 부모님이 평범한 가정 출신인 그녀와의 관계를 반대해 둘을 억지로 떼어놓았을 것이라고 여겼다.하지만 현시우를 찾은 그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쇼핑하고 있었다.연재준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현시우의 옷깃을 움켜잡았다.“너, 월영이한테 진심이 아니었다면서 왜 계속 나한테 그녀와 멀리하라고 경고한 거야?”현시우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월영이와 헤어지더라도 네가 그녀에게 손끝 하나라도 닿게 두지 않을 거야.”연재준은 싸늘하게 웃으며 도로 건너편 복싱장을 가리켰다.“그럼 한번 내기할래?”“뭐?”연재준이 그의 옷깃을 놓으며 말했다.“네가 지면 신주시를 떠나고 다시는 유월영 앞에 나타나지 마.”현시우는 그 말에 분노를 느꼈고,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들이 폭발할 기회를 찾은 듯했다.“좋아.”두 사람은 전력으로 싸웠고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하지만 결국 현시우가 지고 말았다.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유월영과 자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현시우가 출국하던 날, 유월영은 그의 차를 따라 한참을 달렸다.백미러로 그 모습을 본 현시우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차 세워요!”연회 부인이 그의 손을 잡고 멈추려 했다.“시우야, 마지막 순간에 모든 걸 망치지 마. 네 외할머니가 마르세유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네가 정말 레온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고씨 가문에 복수할 희망이 생겨. 월영이는 우리가 성공한 후 다시 만나면 되잖아.”하지만 현시우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서 뛰쳐나갔다.유월영은 울며 물었다.“대체 어디 가는 거야? 정말 나를 버릴 셈이야?”현시우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 유
현시우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그럼 뭐야?”유월영이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현시우, 무슨 일이 있든 나한테 말해줘. 너도 그랬잖아 여자친구는 이런 순간에 필요한 존재라고. 내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들어줄 수는 있어. 고민은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보다 말로 털어놓는 게 훨씬 나아.”“물론, 네가 정말 혼자 있고 싶다면 내가 시간을 줄게. 하지만 연락을 끊으면 안 돼. 그러면 나도 걱정이 되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말이야. 정말 힘들어.”그녀의 말에 현시우는 마치 심장에 바늘이 꽂힌 것 같았다.그 바늘은 그의 숨소리를 따라 점점 더 깊이 찔러 들어갔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월영아, 그냥 여기까지 하자. 내가 사람을 불러 너를 집에 데려다줄게.”유월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지금 나랑 헤어지자는 거야?”현시우의 목젖이 떨렸다.그는 “그래”라고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차마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그가 침묵하는 동안 유월영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그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렸다.유월영의 눈물에 현시우는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달래려 했다.하지만 유월영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뒤돌아 뛰어갔다.현시우가 본능적으로 뒤따라 가려 했지만 연회 부인이 제때 나타나 그를 막았다.“시우야! 지금은 내버려둬.”어머니의 충고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현씨 가문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고 유월영은 산길을 따라 뛰면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계속 흘렀다.가을은 좋은 계절이 아니었다.가을은 모든 것이 시들어가는 계절이었다.유월영은 눈앞이 흐릿해졌고 너무 빨리 뛰다가 발이 엉켜 땅에 넘어졌다.흙투성이가 된 채로 집에 돌아온 그녀는 책상 밑에 몸을 숨겼다.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아래층의 부모님이 들을까 봐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손등에
유월영의 망연자실한 모습은 연재준조차 알아차릴 수 있었다.쉬는 시간, 그는 일부러 유월영이 있는 반을 지나가며 텀블러에 물을 담고 있던 유월영을 보고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그녀는 마치 듣지 못한 듯 돌아보지 않았다.“...”연재준은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현시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봐야 하나? 설령 죽었다고 해도 최소한 죽었다는 소식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러나 현씨 가문의 입단속은 철저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더구나 현시우와 연회 부인의 대화는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다만 현시우는 최근 병원에 드나들고 시골로 내려가는 등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분주하다는 소문만 들렸다.연재준은 손에 동전을 굴리며 고민했다.‘이 틈을 타서 슬쩍 끼어들어 볼까?’보름이 지나도 현시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결국 유월영은 참지 못하고 생애 가장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그녀는 직접 현씨 가문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유월영은 경비원에게 자신이 현시우의 학교 친구이며 그가 너무 오래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러 왔다고 말했다.경비원은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고하겠다고 했다.10분 후, 유월영은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월영아.”그녀가 돌아보자, 나온 사람은 바로 현시우였다.처음에는 기뻤지만 이내 화가 치밀어 올라 유월영은 달려가며 따졌다.“너 요즘 왜 그래? 왜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야?”그녀는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휴대폰 부모님이 뺏어갔어? 아니면 벌이라도 받은 거야? 혹시 맞기라도 한 거야? 아픈 건 아니지?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은 갔어?”“월영아.”현시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깊게 꺼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그의 모습은 지치고 초췌해 보였다.불과 보름 만에 그는 한층 더 야위었고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듯 보였
현시우는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로 어머니를 추궁했다.“단순히 유용우를 봤다는 이유로 유월영이 그의 친여동생이라고 단정 짓는 건 말이 안 돼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시는데요?”그가 아는 바로는 유월영의 집에는 세 자매가 있었다. 왜 꼭 유월영이어야 하는 걸까?“나이대가 맞지 않아서요?”그는 계속해서 반박했다.“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유월영의 집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에요. 자식을 여러 명 키우는 건 부담스럽고, 게다가 고씨 가문의 딸을 키우는 건 위험 부담도 크잖아요. 여동생이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않나요?”이 모든 시간 동안 그들은 늘 긴장 속에서 살아왔다.연회 부인은 외출조차 하지 못했고, 유용우네 가까이 지내는 것도 두려워했다.그래서 유용우네 부부가 시내로 이사한 것도 몰랐고, 그들의 세부 사항도 알 수 없었다.현시우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이유를 수십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연회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그러면 유전자 검사를 직접 해보렴.”“...”만약 그녀가 확신이 없다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현시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핏줄은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연회 부인은 그가 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아마 너는 처음부터 네 감정을 잘못 알았던 것 같아. 너의 마음속에서 유월영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어쩌면 혈연관계가 작용해서 너를 혼란스럽게 만든 걸지도 몰라.”“그렇지 않다면 너의 성격으로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네 주변에 훌륭하고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잖아? 그런데 너는 그들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잖아. 그런데 유월영을 알게 된 지 몇 달 만에 이렇게 깊이 좋아하게 된다니, 말이 안 되지 않니?”“그래서 내 생각엔 이건 사랑이 아니라 운명이 장난을 친 거야.
“손님, 이 케이크는 당일 제조된 거라 유통기한이 짧아요. 냉장고에 넣어도 최대 3일밖에 보관할 수 없으신데, 이렇게 많이 사가시면 다 드실 수 있으신가요?”유월영이 조심스레 물었다.연회 부인은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일 제조된 거라면 학생이 직접 만든 거예요?”“제가 아니고 저희 가게에서 직접 만든 거예요. 한번 맛보신 후에 마음에 드시면 구매하셔도 돼요. 다만 가족 인원이 많지 않으시면 한 번에 다 사는 건 추천해 드리지 않아요.”유월영이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그녀에게 건넸다.“우리 집은 식구가 많아서 다 먹을 수 있어요.”연회 부인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학생, 교복을 보니 신주시 고등학교 학생인 것 같은데 우리 아들도 그 학교 다녀요.”유월영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아, 그러신가요.”“학생, 참 예쁘게 생겼네.”연회 부인은 그녀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고 유월영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아니에요. 손님께서 훨씬 멋지고 품격 있어 보이세요.”“말도 참 예쁘게 하네요.”연회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케이크 맛있네요. 이거 전부 살게요. 계산해 주세요.유월영은 계산하며 말했다.“총 3만 6백 원인데, 3만 원만 받을게요. 맛있으시면 또 오세요.”“그럼 그럴게요.”계산을 마친 연회 부인이 케이크 포장을 들려고 했지만 그녀의 네일아트를 본 유월영이 주저하며 물었다.“차로 오셨나요? 제가 차까지 들어다 드릴게요.”“그래요, 그러면 저야 고맙죠.”연회 부인은 그녀를 차로 데려갔고 유월영은 케이크를 차에 실은 후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연회 부인이 출발하려는 찰나 중년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 옆에 멈췄다.“아빠!”유월영이 그를 부르는 소리에 연회 부인은 본능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유월영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은 고해양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었고 그녀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갑작스러운 만남에 연회 부인은 몸은 얼어붙었고 혼란에
“아니.”현시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남자들끼리의 문제일 뿐이야.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월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별거 아니긴 개뿔!”현시우는 예상밖의 반응에 잠시 멍해졌다.유월영이 이렇게 거친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비록 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그랬다는 사실에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월영아, 욕은 하지 마.”“할 거야! 너도 싸움질을 했으면서 내가 욕하는 걸 뭐라고 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유월영은 그의 상처를 가까이서 살펴보며 점점 더 화가 났다.“도대체 너랑 싸운 사람이 누구야? 왜 싸운 건데?”현시우는 말하고 싶지 않아 아픈 팔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월영아, 와서 안아줘.”“꿈 깨!”옆방에서 의무실 선생이 연재준의 얼굴에 멍이 든 곳에 약을 바르려고 했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이를 피하며 말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나가세요.”의무실 선생은 잠시 망설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료 상자를 챙겨 방을 나갔다.두 소년의 부상은 비슷했다. 뼈나 근육에는 이상이 없었고 학교 보안요원이 빠르게 싸움을 말려 모두 표면적인 상처에 불과했다.방문이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 옆방에서 들리는 대화가 연재준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유월영이 현시우를 걱정하며 하는 말들이 하나하나 그의 귀에 들어왔다.연재준은 그 말을 들으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있다면 이와 같을 거라고 느꼈다.학교는 싸움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고 다만 두 학생의 부모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연민철은 이미 아들 연재준을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현시우의 가족은 이 소식에 크게 놀랐다.현시우는 어릴 때부터 감정 기복이 별로 없고 차분한 성격으로 한 번도 싸움을 하거나 심지어 다툰 적도 없었다.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것도 학교 안에서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인 건지 현씨 가문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현시우의 어머니인 연회 부인은 현씨 가문에서 사모님으로 은둔하며 지냈다.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