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잠시 뒤에 제가 직접 가야겠네요.”허사연은 그 말을 듣더니 서둘러 말했다.“서준 씨, 절대 충동적으로 굴어서는 안 돼요!”“걱정하지 말아요. 충동적으로 굴지 않을게요. 전 그저 그들에게 황씨 일가의 젊은 사모님이 대체 누군지 물을 생각이에요.”말을 마치자마자 진서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확인해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진서준은 전화를 받았다.“누구세요?”“진서준, 내 목소리 기억해?”전화 건너편에서 유지수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진서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에서 콰득 소리가 났다.“유지수!”진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유지수’ 세 글자가 그의 잇새에서 흘러나왔다.옆에 있던 허사연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다.“난 네가 날 잊은 줄 알았는데.”유지수는 웃으며 말했다.“내 여동생을 납치한 사람이 너지?”진서준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알고 싶어? 내가 위치를 보내줄 테니까 날 만나러 와.”유지수가 말했다.“그래, 지금 갈게.”전화를 끊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문자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진서준은 곧바로 한제성에게 차를 준비해달라고 했다.“서준 씨, 유지수는 분명 함정을 파놓았을 거예요!”허사연이 서둘러 진서준을 막았다.“하지만 서라가 유지수 손아귀에 있는데 안 갈 수가 없잖아요. 난 그곳이 불바다라도 갈 거예요!”진서준은 허사연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작게 말했다.“사연 씨, 약속할게요. 나 꼭 무사히 돌아올게요.”허사연은 진서준의 손을 꽉 잡았다.“서준 씨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릴게요!”“네.”진서준은 곧바로 차를 타고 유지수가 보내준 주소로 향했다.곧 진서준은 차를 타고 오래된 아파트에 도착했고, 문자 내용에 따라 5층으로 향했다.“들어와.”방 안에서 유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서준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의 온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내뿜어졌다.그는 유지수를 죽어라 노려보면서 화가 난 얼굴로 따져 물었다.“내
진서준은 충격받은 얼굴로 유지수를 바라보았다.허사연과 헤어지고 방탕하기 그지없는 그녀와 다시 만나자니.“유지수, 너 생각은 하고 말하는 거야?”진서준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진서준, 우리 학창 시절에 연애할 때 네가 그랬잖아. 날 평생 사랑할 거라고.”유지수는 손을 뻗어 진서준의 손을 잡았다.진서준은 곧바로 뒤로 물러나며 차갑게 소리쳤다.“만지자 마! 무슨 낯짝으로 예전 일을 들먹이는 거야? 난 널 위해 술병으로 이지성의 머리를 내려치기까지 했어. 그런데 넌 내게 어떻게 했어?”3년 전 일이 거론되자 진서준은 화가 났다.“내가 감옥으로 간 뒤 넌 이지성 그 자식과 만났어. 심지어 이지성과 함께 내 어머니를 해쳤고, 어머니의 두 다리를 부러뜨리기까지 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뻔뻔하게 내 앞에서 옛날 일을 들먹여? 나랑 다시 만나고 싶다고? 꿈 깨! 그딴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진서준은 두 눈이 벌게졌다. 분노 때문에 그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다시 한번 얘기할게. 서라를 내놔!”유지수는 진서준이 옛정을 생각하지 않고 단호히 굴자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무정하게 나오겠다 이거지? 그러면 날 탓하지 마!”진서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살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유지수는 진서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세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네가 날 죽인다면 진서라도 죽을 거야. 네 동생을 구하고 싶다면 날 대신해 세 가지 일을 해줘야 해.”유지수는 서둘러 자신의 진짜 목적을 얘기했다.조금 전 진서준과 다시 만나자고 한 것은 진서준의 마음속에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지금 보니 진서준은 그녀를 죽도록 미워하고 있었다.“꿈 깨! 내 동생을 납치하고 내 어머니를 해쳤으면서 나한테 일을 부탁해?”진서준은 화를 냈다.“안 그러면 넌 평생 서라를 보지 못할 거야!”유지수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진서라는 그녀가 가진 비장의 무기였다.진서라만 있다면 진서준은 절대 그녀를 죽
“이거 놔. 내 말은 사실이야!”유지수는 진서준의 어깨를 힘껏 때렸다. 하지만 힘이 너무 약해서 진서준은 간지러울 뿐이었다.진서준의 힘은 더욱더 강해졌다. 유지수는 숨쉬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을 발견했다.유지수는 얼굴이 빨갛게 되었고 사지를 끊임없이 버둥거렸다.잠깐이지만 유지수는 죽을 것만 같았다.극도로 분노한 진서준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유지수를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콜록콜록...유지수는 한참을 기침했다.“너 방금 진서라를 죽일 뻔한 거 알아?”유지수는 고개를 들었다. 진서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두려움이 보였다.진서준이 정신을 차려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유지수는 오늘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다.“유지수, 그건 누구한테서 들은 소리야?”“안 알려줄 거야!”유지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나한테 진서라의 머리카락이 있어. 믿기지 않는다면 이걸 가져가서 친자확인을 해봐. 검사 결과가 나오면 알 수 있겠지.”유지수는 긴 머리카락 한 올을 꺼내서 탁자 위에 놓았다.진서준은 그것을 챙기지 않았다. 진실을 알려면 어머니에게 전화 한 번 하면 되니 말이다.“유지수, 네가 이렇게 악랄할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어떻게 감추고 산 거야? 아니면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변한 거야?”진서준은 유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앞의 여자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대학 시절 연애할 때도 약삭빠른 구석이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지독하지는 않았다.“사람은 원래 변해. 너도 3년 전이랑은 달라졌잖아.”유지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지난 3년간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지. 우리가 변한 것도 정상이야.”진서준은 오랫동안 침묵했다.“무슨 일을 해주길 바라는 거야?”진서준은 진서라를 위해 결국 타협을 선택했다.유지수를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진서라는 반드시 무사해야 했다.“첫 번째 일은 아주 간단해. 황씨 일가를 없애버려.”유지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진서준의 동공이 떨렸다.“너 황씨 일가의 사모님이 아니
진서준은 자신이 일찌감치 유지수의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유지수는 황씨 일가에 시집온 순간부터 오늘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정말로 무시무시한 여자였다.진서준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 일은 해줄게. 두 번째 일은 뭐야?”“급해하지 마. 첫 번째 일을 끝내면 두 번째 일이 뭔지 알려줄게.”유지수는 탁자 위 물을 마신 뒤 느긋하게 말했다.“서라와 통화하게 해줘.”진서준이 말했다.“좋아. 난 처음부터 네가 서라와 통화할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어. 그래야 네가 안심하고 날 위해 움직일 테니 말이야.”유지수는 아주 오래된 휴대전화를 꺼내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서라에게 전화를 넘겨.”진서라는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진서준은 유지수가 건넨 휴대전화를 건네받고 서둘러 말했다.“서라야? 너 맞아?”“오빠, 나야!”진서준의 목소리를 들은 진서라는 무척 흥분했다.“너 괜찮아? 유지수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어?”진서준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아니, 아무 짓도 안 했어.”진서라가 대답했다.진서라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진서준은 그제야 안심이 됐다.“서라야, 무서워하지 마. 오빠가 최대한 빨리 널 구해줄게.”진서준은 이를 악물고 약속했다.“응, 난 오빠를 믿어. 오빠도 무사해야 해.”유지수는 전화를 끊을 때가 된 것 같자 손을 뻗으며 말했다.“시간 됐으니까 전화 나한테 넘겨.”진서준은 미련 가득한 얼굴로 유지수에게 휴대전화를 넘겼다. 그는 유지수를 바라보며 경고했다.“유지수, 내 동생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너랑 네 주변 사람들 다 죽여버릴 거야.”유지수는 진서준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진서준이 경고하지 않아도 유지수는 진서라를 터치하지 않을 것이었다.“3일 줄게. 3일 안에 황씨 일가 사람들을 없애버려. 그 뒤에 서라랑 영상 통화 할 수 있게 해줄게.”유지수는 말을 마친 뒤 문을 가리켰다.“이제 가봐.”진서준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몸을 돌려 아파트를 나섰다.그러나 진서준은 바로 떠
“유지수가 맞아요.”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유지수가 이렇게 치밀할 줄은 몰랐네요. 황씨 일가의 사모님 자리를 꿰차기까지 하다니!”허사연은 유지수의 치밀함에 다시금 놀랐다.“유지수는 내게 세 가지 일을 시켰어요. 그 세 가지 일을 완수하면 서라를 풀어주겠대요.”진서준은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뭘 요구한 거죠?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줄게요!”허사연이 서둘러 말했다.“유지수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에요. 유지수의 첫 번째 요구는 황씨 일가를 없애는 거예요.”그 말에 방금 도착한 한씨 일가 남매는 깜짝 놀랐다.한보영이 서둘러 말했다.“진서준 씨, 충동적으로 굴지 마세요. 조씨 일가를 처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국안부 사람들이 당신을 노리고 있을 거예요. 이때 황씨 일가를 없앤다면 국안부에서는 틀림없이 진서준 씨를 죽이기 위해 호국장군을 보낼 거예요!”진서준은 한보영의 은인이었다. 그래서 한보영은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알아요.”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곧 진서준은 유지수가 수집한 황씨 일가의 범죄 증거를 꺼냈다.“이건 유지수가 준 거예요. 그들을 죽일 때 제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요.”허사연 등 사람들은 범죄 증거를 보더니 눈동자에 불길이 타올랐다.“황씨 일가 사람들은 정말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네요!”허사연이 말했다.“하지만 그들을 죽일 수는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나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될 테니 말이에요.”진서준은 고개를 저었다.진서준은 황씨 일가와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진서라를 구하기 위해 황씨 일가 사람들을 죽인다면 그는 유지수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유지수, 그 여자 참 괘씸하네요. 유지수는 진서준 씨가 나쁜 놈이 되기를 바라는 게 틀림없어요!”허사연이 화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처음부터 이런 역겨운 일을 시키는 걸 보면 두 번째, 세 번째 일은 더욱더 악랄할 거예요!”“하지만 서라가 유지수의 손아귀에 있어요.”진서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진서라
순찰사 노진명은 하루 종일 조사한 끝에 조씨 일가의 조규범이 서울의 진서준과 갈등이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그 뒤로 조씨 일가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들이 보낸 사람들은 모두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설마 진서준이라는 젊은이가 한 짓일까?”노진명은 잠깐 고민한 뒤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는 진서준에게 연락한 것이 아니라 황보식에게 연락했다.황보식은 전라도에서 간부를 맡은 적이 있었기에 노진명의 옛 상사라고 할 수 있었다.“진명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거야?”황보식이 물었다.“황보식 어르신, 서울에 있는 진서준이라는 젊은이를 아시나요?”노진명이 물었다.“진 마스터님은 당연히 알지. 그건 왜 묻는 거야?”황보식은 아직 조씨 일가가 처단당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황보식이 진서준을 존대하자 노진명은 화들짝 놀랐다.황보식은 곧 70대가 되는 노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진서준을 진 마스터님이라고 존대한다는 건 진서준이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어르신, 전라도에 오늘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조씨 일가가 멸문당했습니다. 아마도 원한 때문인 듯합니다.”노진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뭐라고?”황보식은 화들짝 놀랐다.전라도에서 일한 적이 있는 황보식은 조씨 일가의 저력을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조씨 일가가 갑자기 멸문당했다니, 충격적이었다.황보식은 노진명이 왜 갑자기 진서준에 관한 일을 묻는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진명아, 진서준 씨는 이 일과 전혀 관련이 없다.”황보식은 진서준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당연히 진서준을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네, 알겠습니다.”노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전화를 끊은 뒤 노진명은 더욱더 진서준을 의심했다.노진명은 곧바로 진서준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했다.알면 알수록 놀라웠고 점점 더 진서준이 한 짓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진서준과 황보식의 관계는 남달랐다. 노진명이 진서준을 건드린다면 황보식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것이다.결국 노진명은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돼요.”한보영은 진서준에게 웃으며 말했다.이내 진서준 일행은 도시에서 가장 큰 샤부샤부 가게에 도착했다.한제성은 그 가게의 단골이었다. 그들이 들어가자마자 샤부샤부 가게 매니저가 곧바로 그들을 맞이했다.“안녕하세요, 한제성 씨. 몇 명이세요?”“네 명이요. 룸으로 부탁해요. 그리고 가장 비싼 세트와 술을 주세요.”한제성은 손을 휘저으며 호쾌하게 말했다.“네, 이쪽으로 오세요.”매니저는 곧바로 진서준 일행을 안내했다.이내 매니저는 그들을 1번 룸으로 안내했다.아름다운 인테리어와 넓은 공간이 훌륭했다.자리에 앉은 뒤 네 사람은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아무도 진서라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곧 직원이 한제성이 주문한 음식들을 내왔다.진서준 일행이 한창 식사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한제성이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합니다, 황씨 일가 도련님이 꼭 이 룸을 써야겠다고 하셔서요...”매니저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황씨 일가요? 황서진 그 자식 말인가요?”한제성은 미간을 구겼다.“네, 황서진 씨입니다.”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황서진이라는 말에 진서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진서준은 유지수가 준 자료를 보았었다.황서진은 아주 악랄한 놈이었다. 그는 약자들을 괴롭히는 아주 극악무도한 놈이었다.반년 전, 그는 남자의 앞에서 그의 아내를 강간했고, 일을 마치고는 두 부부를 호수에 빠뜨려 익사시켰다.황씨 일가의 세력이 워낙 크다 보니 그 일은 흐지부지 끝나게 되었다.“이 룸은 제가 먼저 예약했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전 절대 양보하지 않을 거예요!”한제성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그...”매니저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건방진 목소리가 들려왔다.“한제성, 내가 그동안 가만히 놔뒀더니 몸이 근질거리나 봐?”7, 8명의 사람이 문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남자는 눈이 움푹 파여들어갔고 얼굴은 창백한 것이 술과 여색에 찌들어 산 모습이었다.그 청년은 다름 아닌 황서진이었다.
한제성은 깡이 있는 청년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한보영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용혈과를 구하러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한제성은 황서진처럼 먹고 노는 것밖에 모르는 쓰레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게다가 진서준이 바로 그의 뒤에 서 있었다.진짜로 싸우게 된다면 진서준이 도와줄지도 몰랐다.“한제성, 너 정말 맞고 싶은가 보네!”황서진은 차갑게 웃더니 한보영에게 말했다.“한보영, 오늘 내가 한씨 집안을 대신해 한제성 이 자식을 혼내줄게.”말을 마친 뒤 황서진은 바로 한제성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갑작스럽게 날아드는 따귀 때문에 한제성의 안색이 달라졌다.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다짜고짜 뺨을 때리다니. 게다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잘나가는 집안 자제들이었다.오늘 한제성이 황서진에게 따귀를 맞는다면 한제성은 앞으로 고양에서 얼굴을 다닐 수 없을 것이다.“안 돼!”한보영의 안색이 달라졌다.짝!누군가 더 빨리 움직여서 황서진의 뺨을 때렸고 황서진은 그 자리에서 몇 바퀴를 회전했다.황서진은 머리가 어지러웠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서준 씨!”진서준이 나서자 한제성은 무척 기뻐했다.그는 진서준이 가만히 있지 않을 줄 알았다.“네 사람들 데리고 당장 꺼져!”진서준이 차갑게 말했다.황서진이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진서준은 법의 집행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유지수가 임무를 내렸다고 해서 일부러 황씨 집안에 시비를 걸 생각도 없었다.그렇게 하면 오히려 유지수의 음모가 실현되는 것을 도와주게 되기 때문이다.황서진이 가만히 있었다면 진서준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감히 내 뺨을 때려? 죽어!”황서진은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한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의 앞에 섰다.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황서진, 경고하는데 진서준 씨는 우리 집의 귀한 손님이야. 우리 집안과 너희 집안이 싸우는 걸 원한다면 어디 한 번 해봐!”황서진은 한보영의 말을
그 말을 듣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곤륜 문주의 딸을 감히 죽이려고 하다니, 대체 어느 미친놈이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꾸민 거지?“두목은 장강훈이라는 놈인데 서남 지역에서 악명 높은 악당이에요.”신수란이 한마디 더 보탰다.“뭐라고요? 그놈을 만났다고요?”유기명이 깜짝 놀랐다.“아는 사람이에요?”신수란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유기명을 쳐다봤다.“들어본 적은 있죠. 얼마 전 내 동생 유기태가 국안부에서 그놈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근데 이놈이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행방이 오리무중이라 찾기가 어려웠죠.”유기명은 신수란을 보며 물었다.“그래서 아가씨들은 어떻게 그놈 손에서 빠져나온 거죠?”신수란은 순간 머뭇거리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누군가 우리를 구해줬어요.”“네? 누가 아가씨를 구한 거죠? 내가 알기로 장강훈은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서남에서 그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거든요.”유기명이 흥미를 보였다.서남 무도계의 강자들은 유기명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대다수가 유씨 가문에 초빙되어 가문의 귀빈으로 섬기고 있고 거절한 이들은 전부 세상과 연을 끊은 은둔 고수뿐이었다.설마 유기명이 모르는 강자가 더 있다는 건가?신수란이 곧 이름을 밝히려 하자 진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누가 됐든 간에 그 강도가 죽었다면 된 거죠.”갑작스러운 개입에 신수란은 기분이 언짢아졌다.유기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진서준을 흘끗 쳐다보고는 진서준의 말투를 곱씹으며 속으로 추측했다.이 여자들을 구한 건 진서준이 틀림없을 것이다.“이장로님, 그놈들은 단순히 아가씨를 납치하려 했을 뿐,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어요.”신수란이 상황을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그렇다면 그놈들 뒤에 배후 세력이 있다는 거겠군.”이장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설상가상으로 슬기가 이번에 우리랑 함께 하산한 걸 아는 사람은 종문 내부 제자들뿐이야. 그런데 곤륜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소식이 그놈들 귀에 들어갔다고? 그렇다면..
이때의 조슬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입술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조금만 가까이 가도 조슬기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신수란은 조슬기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바로 옆방으로 달려가 따뜻한 물로 자기 체온을 되찾으려 했다.조슬기를 업고 오는 내내 신수란 또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조슬기의 체온은 거의 0도에 가까웠고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고통에 신음하는 조슬기를 보며 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내가 일단 치료할게. 성약당 장로가 도착하려면 최소 내일 아침은 되어야 해.”“네가 치료한다고? 경호원 주제에 뭘 안다고 사람을 살린다고 지껄여?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네가 뭔데 이렇게 나대?”은청준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누가 경호원이라고 해서 사람을 못 구한다고 했죠?”유정이 즉각 반박했다.은청준이 지속적으로 진서준을 물고 늘어지는 모습이 영 거슬렸는데 이제는 대놓고 모욕까지 하니 유정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유 아가씨, 경호원이 사람을 못 구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전 그냥 저 사람이 자격이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은청준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유정이 유 가주의 딸만 아니었다면 유정에게 욕설을 퍼부었을지도 모른다.아까 진서준과 대련하려고 할 때에도 유정 때문에 망신당했는데 지금은 또 저 하찮은 경호원 따위를 위해 유정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니, 이러다간 정말 곤륜 차세대 천재 일인자인 자기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유씨 가문의 경호원이 자기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라니 기막힌 일이었다.“김평안 오빠는 우리 유씨 가문을 여러 번 구한 의술이 뛰어난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 목숨도 이분이 살리셨죠. 그런 분이 왜 자격이 없다는 거죠?”유정은 전혀 기죽지 않고 은청준과 눈을 맞추며 쏘아붙였다.은청준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목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유 아가씨, 아가씨는 제 후배 신분을 아나요? 제 후배는 우리 종문 문주의 따님입니다.
하지만 두 검의 차이는 누가 봐도 너무나도 컸고 이건 진서준에게 손해 보는 장사였다.“이봐요, 은청준 씨, 곤륜 제자로서 이런 요구를 하는 건 곤륜 얼굴에 먹칠하는 게 아닌가요?”유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놓고 면박을 줬다.은청준도 유정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지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유 아가씨, 그 말은 좀 심한 거 아닌가요? 제 검도 희귀한 명검 중 하나입니다.”은청준은 굳은 얼굴로 즉시 반박했다.“상관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바로 시작하자.”은청준은 진서준의 말에 바로 반응하며 유정이 더 이상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이 참선검은 반드시 자기 손에 넣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규칙은 간단해. 검이 먼저 상대의 몸에 닿는 쪽이 승리야, 어때?”단순하고 직관적이며 오직 실력으로 승부를 가리는 대련이었다.“문제 없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막 대련이 시작되려던 그 순간, 갑자기 집사가 허겁지겁 뛰어왔다.“가주님! 조슬기 아가씨의 소식을 받았습니다!”“뭐라고? 아가씨가 어디 있어?”유기명이 즉시 반응하자 이장로가 손을 내저었다.“이 대련은 일단 여기까지 하고 먼저 슬기부터 찾자.”그 말을 듣자 은청준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일그러졌지만 이장로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었다.“김평안, 그 검 잘 보관해 둬라. 내가 반드시 가져갈 거니까.”은청준은 검을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리를 떠났다.“조슬기 아가씨가 이미 금도에 도착해서 우리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즉시 날 거기로 데려가 주세요.”이장로가 급히 말하자 유기명이 서둘러 제안했다.“이장로님, 제가 사람을 보내 아가씨를 모셔 오겠습니다. 여기서 쉬시는 게 어떠신지요?”“아닙니다,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하겠습니다.”이장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거절했다.조슬기가 과연 무사한지 이장로는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알겠습니다. 이봐, 즉시 이장로님을 모시고 출발해.”
식사도 아직 하지 않았는데 분위기는 이미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유정은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쭉 진서준에게 머물렀다.진서준이 이따가 대련 중에 다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유씨 가문에 머무르는 동안, 유정은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예를 들면 곤륜을 비롯한 4대 은세 종문에 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이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가장 오래 유지되어 온 은세 세력이었다.심지어 경성의 4대 가문조차도 이 4대 종문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게다가 종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괴물 같은 천재였다.은청준이 곤륜의 차세대 중에서도 뛰어난 인재로 손꼽힌다면 그건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 대단한 실력을 갖췄을 가능성이 컸다.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만약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반면 진서준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고 전혀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한 모습이었다.진서준의 여유로운 태도에 은청준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흥, 대련이 시작되면 네놈이 나와의 실력 차이를 뼈저리게 깨닫게 될 거야.’은청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저녁 식사 내내 유기명과 이장로만 가끔 대화를 나눴다.곧 식사가 끝나자 곤륜의 다른 제자들도 소식을 듣고 하나둘씩 몰려왔다.다들 유씨 가문 저택 뒤편의 넓은 공터에 모여 구경하기 시작했다.“저 녀석 미친 거 아냐? 감히 은 선배와 대련하겠다고? 살고 싶지 않은 건가?”“은 선배는 이미 사급 대종사야. 선배의 실력은 끔찍할 정도로 강해. 웬만한 사람은 상대도 안 되지.”“내기나 해볼까? 저 자식이 선배의 검을 몇 번이나 막아낼 수 있을지?”“난 한 방도 못 버틴다고 봐. 선배는 이미 검의를 깨우쳤잖아.”곤륜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진서준을 과소평가했다.다들 은청준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또래 중에서 아무도 은청준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반면, 진서준은 겉보기에는 40대로 보였지만 전혀 강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이런 사람이 실력자라고 한다
“김평안 씨는 내가 엄청난 공을 들여서 모셔 온 분입니다.”유기명이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며 진서준을 자랑하기 시작했다.“겉보기엔 40대 초반처럼 보이지만, 그 실력은 정말 어마어마합니다.”“어마어마하다고? 그럼 나랑 한번 붙어볼래?”은청준이 비웃으며 말했다.은청준은 스물여섯 살에 이미 사급 대종사가 되었는데 반면 이 경호원은 체내에 강기가 거의 없었다.아무래도 겨우 종사의 문턱을 밟은 무인인 것 같은데 이런 쓰레기가 세속에서는 강자로 불리는 건가?유기명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은청준 씨와는 비교할 수 없죠. 하지만 김평안 씨 검술은 누구나 다 알아주는 실력입니다.”“마침 나도 검술이 특기인데, 한 번 겨뤄볼까?”은청준이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청준아,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무도는 남과 다투라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이장로가 차분하게 말하자 은청준은 곧바로 태도를 고쳐잡고 공손하게 말했다.“이장로님, 저는 그냥 세속 무인과 가볍게 한 수 겨뤄볼 생각이었습니다.”이장로는 은청준을 흘긋 보았으나 그의 속마음을 굳이 들춰내지는 않았다.은청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야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같은 종문 사람이니 체면은 세워줘야 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진서준이 다시 강조하자 은청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쏘아봤다.이 녀석 왜 이렇게 말이 많지? 혹시 정신 상태가 이상한 건가?“은범은 내 사촌 동생이야. 네가 그 못난 동생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은청준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신농산에서 만난 적이 있어.”“뭐라고? 걔가 신농산에 갔다고?”이 말에 은청준은 흥미가 동했다.“그 녀석 실력으로는 신농산 테스트를 통과하기 힘들 텐데?”은청준은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은범이 어떤 인물인지 은청준은 잘 알고 있었다.애매한 실력과 어중간한 재능을 갖고 있는 은범이 은씨 가문에서 빛을 볼 일은 없었다.은청준과 은범의 격차는 눈에 보일 정도로 컸다.“그 녀석은 테
진서준은 아버지 진요한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이렇게 닮은 꼴로 곤륜 사람들을 만나면 곤륜 장로가 진서준을 알아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진서준은 곤륜에 관해 잘 알지 못했기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인피면구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목소리까지 완전히 변해버린 진서준을 보고 유정은 깜짝 놀랐다.하지만 진서준이 자기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진서준이 하는 말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했다.“알겠어요, 진서준 오빠.”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름 잘못 불렀어. 지금 난 김평안이야.”진서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강조했다.“그냥 김평안이라고 부르면 돼.”“알았어요.”그렇게 진서준은 유정과 함께 거실로 향했다.인피면구를 쓴 진서준을 본 유기명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진서준이 슬쩍 보낸 눈짓을 보고 유기명은 즉시 이 사람이 진서준이란 걸 깨달았다.“유정아, 이리 와 앉아. 네게 소개할 사람이 있어.”유기명이 유정을 옆에 앉히며 말했다.이때, 곤륜의 이장로가 진서준을 흘끗 보더니 별다른 반응 없이 바로 유정에게 시선을 돌렸다.“가주님, 따님 건강이 막 회복된 것 같은데, 맞나요?”이장로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네? 이장로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유기명은 깜짝 놀랐다.유기명은 아직 딸의 병에 관해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이장로가 그냥 보는 것만으로 큰 병을 앓았다는 걸 눈치챘다.이건 거의 신의 영역 아닌가?“따님께서는 겉보기에 건강해 보이지만 눈에 피곤한 기운이 남아 있고 걸음걸이도 미세하게 불안정합니다.”이장로가 천천히 해명했다.“역시 곤륜 장로님이십니다.”유기명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 딸은 최근 큰 병에서 막 회복된 참입니다.”“따님을 치료한 의사는 보통 인물이 아닐 것 같네요.”이장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큰 병인데도 이 정도로 빠르게 완치하다니, 의술이 보통이 아닐 텐데... 혹시 성약당 장로가 아닙니까?”유기명은 순간 멈칫하더니 곁눈질로 진서준이 살짝 고개를 젓는 것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도 겨우 서른을 갓 넘긴 정도였다.“가주님, 이번에 찾아온 건 부탁할 일이 따로 있어서입니다.”이장로가 용건을 말하자 유기명이 시원하게 대답했다.“말씀만 하십시오. 우리 유씨 가문은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곤륜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면 그건 곧 곤륜이 유씨 가문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곤륜은 대한민국 4대 최강 종문 중 하나였다.곤륜이 유씨 가문에 빚을 진다면 훗날 유씨 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우리 종주님 따님도 이번에 곤륜에서 내려왔습니다.”이장로가 말문을 열었다.“네? 조슬기 아가씨도 왔습니까? 근데 아가씨는 어디에...”유기명이 멈칫하더니 이장로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단번에 깨달았다.“어제 하산할 때 슬기와 경호원 두 사람이 따로 움직였고 밤에 저희와 다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군요. 나중에 수소문해 봤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주님께서 슬기를 찾아주신다면 이 늙은 몸이 신세를 지는 셈 치겠습니다.”이장로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이장로님, 과한 말씀입니다. 제가 즉시 서남 지역 전체에 조슬기 아가씨를 찾으라고 명령하겠습니다.”유기명은 망설일 틈도 없이 즉시 지시를 내렸다.서남에서 유씨 가문은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명령이 내려가자 서남의 크고 작은 도시, 심지어 작은 마을까지도 조슬기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모두가 조슬기를 찾기 위해 분주한 사이, 진서준이 유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오빠!”진서준을 보자마자 유정이 반갑게 소리쳤다.“유정아, 몸은 좀 어때?”진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많이 좋아졌어요.”유정은 대답하며 진서준을 위아래로 살폈고 다행히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걸 보고서야 안심했다.혹시라도 진서준이 자기를 위해 묘강에 가서 복수라도 했던 게 아닌지 걱정했던 것이다.진서준이 앞으로 다가가 유정의 맥을 짚었다.“확실히 거의 다 나았네. 이틀만 더 쉬면 원래 상태로 돌
“가주님! 대문 앞에 중요한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유씨 가문의 집사가 황급히 유기명을 찾아 소리쳤다.“중요한 손님이라고?”유기명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서남 지역에서 유씨 가문을 찾아 올 만한 중요한 손님이라면 꽤 오랜만이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씨 가문에서 중요한 손님으로 인정할 만한 인물 자체가 거의 없었다.설령 그것이 경성의 4대 가문이라고 해도 가주가 직접 방문해야만 중요한 손님이라고 할 수 있었다.“누가 왔어?”유기명이 물었다.“곤륜의 이장로입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유기명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뭘 꾸물거리고 있어? 어서 안으로 모셔 와야지!”유기명은 집사를 따라 급히 장원 입구로 향했다.그곳에는 이미 열댓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그들은 모두 흰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사극에서 튀어나온 듯한 복장이었고 등에는 검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풍기는 기운도 비범했다.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느 극단에서 뛰쳐나온 배우들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이장로님, 이 유씨 가문이란 곳,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를 대문 앞에서 기다리게 할 수 있습니까?”무리의 맨 앞에 선 잘생긴 청년이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다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우리 곤륜이 오랫동안 여기를 찾지 않은 건 맞지만 이런 대우는 너무한 거 아닙니까? 우리를 전혀 존중하지 않잖아요.”그들의 표정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이전에도 곤륜산에서 내려와 세속의 여러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를 가든 귀빈처럼 모시며 극진한 대우를 받았었다.하지만 유씨 가문이 이들을 이렇게 문 앞에 세워두고 있다니, 그 격차가 너무 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다 떠들었으면 이제 조용히 해.”그 순간, 백발의 이장로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이장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순간적으로 모든 이가 입을 다물었다.“종주님의 따님이 사라졌는데 너희는 지금 대접 타령이나 하고 있어? 이번에도 슬기를 못
진서라는 재빨리 움직여 유정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고마워, 서라야.”유정은 물컵을 받아 들고 천천히 마셨다.“몸은 어때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진서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이제 괜찮아.”유정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참 다행이네요.”진서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근데 진서준 오빠는 어디 있어? 왜 안 보이지?”유정이 문밖을 바라보며 물었다.지금 유정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은 진서준이었다.진서라는 급히 둘러대기 시작했다.“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어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나갔다고? 혹시 묘강으로 간 건 아니겠지?”유정도 바보는 아닌지라 진서라의 표정을 보니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아, 아니에요. 묘강은 워낙 위험한 곳이라 우리 오빠도 그렇게 무모하진 않아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서라의 마음은 누구보다 더 초조했다.벌써 하루가 지나도록 진서준에게서 아무 소식도 없었다.점심때 국제 뉴스를 본 진서라는 배논국의 묘강 지역에서 큰 소란이 있어 배논국이 결국 묘강 지역을 접수했다는 소식을 확인했다.하지만 진서준의 소식은 단 한 줄도 없었다.그러니 자연스레 진서준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그때 유기명이 방으로 들어왔다.딸이 깨어난 걸 보자 유기명은 눈물을 글썽이며 격동한 말투로 말했다.“유정아, 드디어 깨어났구나!”“죄송해요, 아버지. 걱정 끼쳐드려서...”유정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그동안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절반이 희끗희끗해졌고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바보 같은 소리 마. 사과할 사람은 나야.”유기명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때 내가 진서준의 말을 듣고 그 자식을 죽였더라면 네가 중독될 일도 없었을 거야.”“이미 지난 일이에요. 이제 그 얘긴 그만하세요.”진서라가 서둘러 다독였다.“그래, 그래. 이미 지나간 일이야. 더 이상 골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