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여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조희선은 너무 잘 알고 있다.진서준이 감옥에 있을 때, 조희선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조정연을 찾아간 적이 있다. 하지만 조정연은 그녀를 만나지도 않고 문전박대했다.조정연은 조희선과 친자매지만,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심지어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된 친구보다도 못했다.정이 싹 떨어진 조희선은 부자가 된 지금도 조정연을 찾아갈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이제 와서 정란이 그들 일가를 가족 회식에 초대한 것은 틀림없이 이 기회를 빌려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다.“괜찮아요, 어머니. 어차피 그 집에서 초대하는 거니까 우리는 가서 먹기만 하면 돼요.”진서준이 허허 웃었다.“나는 참을 수 있는데, 걔들이 험한 말을 하면 네가 걔들과 싸울까 봐서 걱정이지.”조희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걔네와 싸우지 않을 것을 약속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진서준이 다짐하자, 옆에 있던 진서라도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엄마, 오빠가 절대 손을 쓰지 않을 거예요.”진서라와 조희선 앞에서 진서준은 웬만한 일은 참고 넘어갔다.하지만 상대방이 눈치 없이 진서라와 조희선에게 손을 대면 그는 절대 참을 수 없다.가족은 진서준에게 건드리면 안 되는 역린이다.아들과 딸이 그렇게 말하자 조희선은 마지못해 동의했다.“알았어. 너희 뜻대로 해.”거의 점심이 됐을 때 서정훈이 깨어났다.곁을 지키고 있던 심해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서정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여보, 드디어 깨어났군요.”서정훈은 여전히 허약했고, 종잇장처럼 창백하던 얼굴에 핏기가 조금 돌아왔다.“수술은 잘됐어?”그는 힘없이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그러자 심해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진 선생님이 당신을 살렸어요.”서정훈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침에 최문혁 등 의료진을 만났을 때 그중 진씨 성을 가진 의사는 없었다.심해윤은 그가 듣고 화를 낼까 봐 감히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진 선생님이 당신을 살렸다는 것만 알면 돼요.”말을 마친 심해윤은 즉시
서정훈의 성미를 아는 심해윤은 우성환 원장을 불러다 서정훈을 잘 돌보라고 부탁한 후 비서를 따라 이번 회식 장소인 오션호텔로 갔다.점심시간이 되자 진서준도 진서라와 조희선을 차에 태우고 오션호텔로 왔다.차를 세운 후, 진서준은 조희선을 차에서 안아 내리고 휠체어에 앉혀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이때 정란 일가는 호텔 3층 창문 옆에 서서 진서준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진짜 올 줄은 몰랐네.”정란이 진서준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5성급 호텔이 그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지. 게다가 방금 민찬 씨가 아버님한테 들은 바로는 오늘 점심 심 처장님도 여기서 식사하신대요.”정란의 아버지 정태호가 공민찬에게 물었다.“민찬아, 이따 식사할 때 심 처장님을 좀 소개해 줄래?”공민찬이 으쓱하며 웃었다.“문제없습니다. 이따가 다 같이 심 처장님께 한 잔 올리러 갑시다.”이번 식사 자리에 공민찬의 아버지도 운 좋게 동행했다.인사처 처장이자 서울시 부시장의 부인이라, 이렇게 대단한 인물을 정란 일가도 TV에서나 볼 수 있었다.그런 인물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그들은 잔뜩 흥분했다.“아래를 좀 봐요. 진서준이 들어온 것 같아요.”정란의 말을 듣고 모두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진서준 일가는 한 중년 남자의 뒤를 따라 담담하게 호텔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오션호텔 입구에서 미모의 호텔 직원 몇 명이 진서준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어서 오세요!”그녀들은 일제히 허리를 90도로 굽혔고, 머리를 평소보다 더 낮게 조아렸다.이 호텔을 허씨 가문에서 운영하고 있어 진서준을 본 적이 있고 진서준의 신분을 알기 때문이다.진서준은 담담했지만, 앞에서 가던 중년 남자는 깜짝 놀라며 살짝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오션호텔에 와서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공손했지, 이렇게 격식을 갖춰 인사한 적은 없었다.하지만 이런 대접을 받은 중년 남자는 가슴을 더 활짝 폈다.“오빠, 5성급 호텔이라서 그런지 종업원 태도부터 다르네.”
진서준 일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조정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언니, 다리가 아직 안 나았어? 진작에 다 나은 줄 알았는데. 그동안 너무 바빠서 언니를 만날 시간이 없었어. 지금 만나도 늦지 않지.”조정연이 만나자마자 조희선의 상처를 들추자, 진서준은 은근히 화가 났다.같은 부모한테서 나온 자식인데, 조정연은 왜 이렇게 악독할까?조희선은 그래도 괜찮은 듯 얼굴에 그리 어색하지 않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네가 바쁘다는 걸 알고 나도 찾지 않았어.”정란 일가가 말하기 전에 진서준은 직접 조희선을 밀고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진서준이 주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본 정란은 다소 불쾌한 듯 그를 째려보았다.“늦게 와놓고 사과도 없이 그냥 앉아?”진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항상 이 시간에 점심을 먹어. 아까 몇 시에 오라는 말은 안 했잖아.”진서준은 조희선과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말대꾸하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았다.정란 일가가 감히 불손한 말을 한다면, 그는 절대 오냐오냐하지 않을 것이다.“웃기네. 우리가 밥을 사는데, 네가 밥 먹는 시간에 맞춰야 하니? 란이 몇 시에 오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이렇게 늦게 와?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조정연이 진서준을 향해 성난 목소리로 야단쳤다.“우리 탓이야. 우리 탓이야. 다음에는 꼭 일찍 올게...”조희선은 진서준의 손을 누르며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낸 후 계속 사과했다.“또 오겠다고? 당신들이 5성급 호텔에 평생 한 번 와도 대단한 거지.”정란이 코웃음을 쳤다.정란 일가가 밥을 사는 거지만 그들은 감히 비싼 것을 주문하지 못했다.현재 정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은 아버지 정태호뿐이다.남자친구 공민찬도 있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헤프게 쓰지 못한다.“5성급 호텔이 뭐가 대단해서. 우리 어머니가 오고 싶으면 매일 올 수도 있어.”진서준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놈이 뭘 그리 잘난 척해?”정민이 보다못해 진서준에게 삿대질하며 욕을
정민이 눈알을 굴리더니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감옥에는 극악무도한 사람들 천지라고 하던데, 안에 있을 때 매일 얻어맞았어?”“뭘 물어? 팔다리가 비쩍 말라 가지고 딱 봐도 얻어맞게 생겼구먼.”정란이 맞장구를 쳤다.무심코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조희선은 가슴이 뜨끔해 안쓰럽고 미안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그녀가 그동안 진서준에게 감옥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지 않은 것은 상처를 들추어내 아프게 할까 봐 걱정돼서였다.정민의 말을 듣고 나서 조희선은 진서준에게 매우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한 번 들어가 보지 그래.”“됐어. 내가 너 같은 범죄자와 뭘 비교해!”진서준의 말에 정민은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정민은 아직 대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곧 졸업한다.아직 일자를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올해 졸업하는 학생이니 취직이 어렵지는 않다.“진서준, 너 취직이 안 되면 우리 아버지 회사에 가서 건물 청소나 해.”정란이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쳐다보았다.지금 사회에서 감옥살이한 적이 있다는 말만 들어도 공기업은 감히 채용하지 못한다.사기업도 지금은 구직자의 경력을 중요시하는 편이다.진서준같이 감옥 갔다 온 대학생은 거의 취직이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공장의 단순 생산직은 어쩌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정태호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덤덤하게 말했다.“서준아, 우리도 친척이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이모부로서 내가 최대한 도와줄게.”“필요 없어요.”“그래, 계속 집에서 부모에게 빌붙어 살아.”진서준이 거절하자, 정란이 코웃음을 쳤다.사실 지금 진서준이 정태호한테 도와달라고 해도 정태호는 그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쓸모없는 친척을 돕는 것은 스스로 골칫거리를 만드는 것이다.그 뒤로 정란 일가는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조희선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희선은 어쨌든 친척인데 일이 너무 커져서 앞으로 얼굴도 못 보는 것은 원치 않았다.“민찬 씨, 시간이
허사연은 11시에 오션호텔 매니저의 전화를 받았다.전화 내용은 심해윤이 호텔에 식사하러 온다는 것이었다.심해윤은 신분이 매우 특별하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었고, 또 어젯밤에 진서준이 서현욱을 때렸는데, 허사연은 이 기회를 빌려 진서준 대신 상황을 해명하고 싶었다.하지만 호텔에 오니 프런트 직원이 그녀에게 진서준이 왔다고 알렸다. 그래서 급히 찾으러 온 것이다.“바쁜데 방해될까 봐.”진서준이 다가가 허사연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사연은 진서준을 흘겨보고는 긴장된 표정으로 조희선을 바라보았다.허사연이 자기 어머니 앞에서 긴장하는 것을 보고, 진서준은 그녀가 이전보다 더 귀엽게 느껴졌다.“아주머니, 서라 씨, 저희 호텔 요리는 괜찮았나요?”“좋았어요.”조희선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다행이에요. 입에 맞으시면 앞으로 제가 매일 요리팀에 시켜서 보내드릴 수 있어요.”허사연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너무 번거로워요. 평소에 서라가 집에서 밥 해주면 돼요. 근데 사연 씨가 오랫동안 우리 집에 오지 않았네요.”지난번 오해가 풀린 후 조희선은 허사연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고, 심지어 진서준과 허사연이 올해 바로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하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결혼을 너무 급하게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녀도 안다.“저 오늘 저녁 시간이 있습니다.”“그럼, 오늘 저녁에 우리 집으로 놀러 와요. 서준한테 차로 데리러 가라고 할게요.”허사연의 말에 조희선은 희색이 만면했다.지금 조희선이 가장 바라는 것은 가족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이는 것이다.“저녁에 윤진을 도와주러 가야 해요.”진서준이 허사연에게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그 계집애가 또 뭘 도와달래요?”허사연은 허윤진네 학교에서 무도회가 열리는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절대 진서준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작은 일이에요. 금방 끝나요.”진서준은 가서 허윤진과 춤을 추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서준 씨, 심 처장님이 위층에 계시니까 우리 둘이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정태호가 급히 말했다.“그럼, 심 처장님을 방해하지 않고 이만 가보겠습니다...”말하고 나서 정태호는 심지어 잔에 든 술도 마시지 않은 채 그냥 돌아섰다.정란과 기타 몇 명은 내키지 않았지만 정태호의 뒤를 따라 슬그머니 룸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정란 일가가 떠나간 후 심해윤은 성난 목소리로 공준호를 꾸짖었다.“아들한테 사람을 데리고 와서 술을 권하라고 시키다니. 주임 자리를 내놓고 싶어요?”심해윤은 연세가 좀 있지만 아직 노안이 오지는 않았다.공민찬과 공준호가 그렇게 닮았는데, 심해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처장님, 잘못했습니다. 화내지 마십시오.”공준호는 놀라서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방금 확실히 생각이 짧았다.심해윤이 기분 좋으니 자기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정란 일가는 풀이 죽어 룸에서 나오다가 그때 마침 술잔을 들고 오는 진서준, 허사연과 마주쳤다.굉장히 미인인 허사연을 보고 공민찬과 정민 두 사람은 눈이 번쩍 뜨였다.“진서준, 넌 뭐 하러 왔어?”정란은 허사연을 보지 못하고 방금 빈정상한 것을 진서준에게 분풀이했다.진서준이 코웃음을 쳤다.“술을 권하러 가지 않았어? 왜 벌써 나오는 거지? 설마 심 처장님이 반기지 않던?”“헛소리하지 마. 우리 방금 심 처장님께 한 잔 올렸어. 처장님이 이따 우리 방에 오시겠다고 했어.”대단한 미인 허사연 앞이라 정민은 미친 듯이 허풍 떨기 시작했다.모르는 사람들은 정민 일가가 정말 심해윤과 술을 마신 줄 알겠다.정씨 집안 사람들은 아무도 정민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고 모두 침묵했다. 스스로 체면 깎는 일은 할 수 없으니까.진서준은 정민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즉각 알아챘다.“술잔에 담긴 술은 심 처장님이 직접 따라주신 거라고 말할 거야?”진서준이 정민의 손에 들린, 술이 가득 찬 술잔을 가리키며 코웃음을 쳤다.자기 술잔에 술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정민은 멍해졌다. 이런 망신이
방금 공민찬이 데려온 사람들 때문에 공준호는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그런데 또 낯선 사람 두 명이 심해윤에게 술을 올리겠다고 한다. 심해윤이 이번에도 그가 부른 줄 안다면 그의 주임 자리는 날아갈지도 모른다.“심 처장님과 아는 사이입니다.”진서준이 한 손으로 문을 잡고 닫지 못하게 했다.공준호는 진서준의 말을 믿을 리 없었다. 그의 눈에는 그저 줄 대러 온 사람들로 보였다.하지만 공준호가 아무리 힘을 써도 룸의 문은 돌담에 막힌 듯 끄떡도 하지 않았다. 공준호는 진서준을 무섭게 쏘아보더니 성난 목소리로 경고했다.“당장 손을 놓아요. 심 처장님이 오시면 용서를 빌 기회도 없어요.”진서준이 되물었다.“제가 왜 용서를 빕니까? 제가 심 처장님을 건드린 것도 아닌데.”공준호는 진서준의 말에 놀랐다. 멍청한 척하는 건지, 정말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그냥 고위 관료도 아니고 서울시 부시장 부인의 식사 자리에 쳐들어가는 것은 범죄는 아니지만 그 결과가 범죄보다 훨씬 더 무섭다.식사하던 심해윤 일행도 이상 상황을 감지하고 공준호에게 물었다.“공 주임님, 문 앞에 서서 뭐 해요?”심해윤의 질문에 공준호는 급히 둘러댔다.“호텔 직원이 한사코 술을 올리겠다고 하는데 거절하는 중입니다.”공준호는 심해윤이 절대 뇌물을 받지 않는 청렴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외식할 때도 그녀는 호텔에서 어떤 혜택도 받지 않는다.역시나 심해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직원한테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보내세요.”“들었죠? 심 처장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우리는 술이 필요 없으니 얼른 가세요.”공준호는 진서준을 향해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진서준이 시큰둥하게 말했다.“지금 우리를 들여보내지 않으면, 잠시 후에 우리를 모시러 와야 할걸요.”“웃기시네. 모시러 간다고? 당신들 누군데? 위에서 내려온 고위 관료라도 돼?”공준호는 하찮게 여기며 진서준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자 진서준은 문을 잡고 있던 손을 내리고 공준호에게 문을 닫으라고
정란 일가는 배꼽을 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댔다.“진서준, 우리를 웃겨 죽일 셈이야? 심 처장님이 너를 맞으러 나온다고? 이왕이면 더 크게 허풍 떨지 그래!”“심 처장님이 정말 나오면 앞으로 네가 시키는 일은 다 할게.”정민이 코웃음을 쳤고, 조정연도 같이 빈정거렸다.“감옥 갔다 온 사람이 다르긴 다르다. 아무 말이나 내뱉어.”정씨 일가의 말에 허사연은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진서준의 허풍이 좀 지나치긴 했다. 그녀는 진서준을 편들고 싶어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진서준은 휴대폰을 켜더니 침착하게 심해윤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그때 룸에서 식사하고 있던 심해윤은 휴대폰 벨 소리를 듣고 꺼내 보았다.진서준에게서 온 전화인 것을 확인한 심해윤은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급히 휴대폰을 들고 구석으로 갔다.다른 사람들은 심해윤의 동작을 보고 어느 고위 관료의 전화인 줄 알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심 처장님, 지금 오션호텔에서 식사 중이시죠?”“네, 설마 진 선생님도 여기 계셔요?”진서준의 질문에 심해윤은 처음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이어 반가워하며 물었다.진서준이 서정훈의 목숨을 구했는데, 아직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했다.진서준도 지금 오션호텔에서 식사하고 있다면 심해윤은 직접 술잔을 들고 가서 술을 권하고 싶었다.“네, 그리고 제 여자친구가 처장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진서준의 여자친구가 자기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에 심해윤은 좀 당황했다.“어느 룸에 계셔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처장님이 계신 룸 밖에 있어요.”“네? 문밖에 있다고요? 그럼 왜 안 들어오세요?”심해윤은 말하고 나서 갑자기 공준호를 돌아다보았다.그녀는 방금 문을 두드린 사람이 호텔 직원이 아니라 진서준과 그의 여자친구였다는 것을 알아챘다.순간 심해윤은 공준호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심해윤의 서늘한 눈빛에 공준호는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그는 자기가 어쩌다 또 심해윤을 건드렸는지 전혀 몰랐다.“어떻게 된 건지 알았어요. 잠시만요. 곧 나갈게요.”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라 성동석도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그때, 진서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성 신의님의 귀문 13침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단지 표면적인 것만 해결한 겁니다.”진서준의 말에 가뜩이나 화가 난 사람들의 불만이 전부 터져 나왔다.“무슨 개소리야! 네가 성 신의님께 훈수 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진짜 주제 파악이 안 되네. 그렇게 재간 있으면 얼른 나와 치료해 봐. 뒤에 비겁하게 숨어 훈수나 두지 말고.”“성 신의님은 한의계에서 거물로 불리는 사람이야. 네가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자격이 있을 것 같아?”사람들의 공격 폭탄을 받았지만 진서준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했다.“안 믿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진서준은 더 이상 말을 아꼈다.그때, 신수란이 갑자기 놀라며 외쳤다.“안 돼! 아가씨 맥박이 사라졌어!”모두가 다시 조슬기를 보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성 신의님, 서둘러 응급조치를 해 주세요. 우리 슬기를 살려내야죠.”이장로도 초조한 마음에 급히 부탁했다.성동석은 곧바로 침을 놓으며 조슬기의 체내 한기를 끌어내 맥박을 안정시키려고 했다.하지만 침을 놓으면 놓을수록 점점 상태가 악화했다.아까 성동석의 침이 조슬기의 체내에 쌓여있던 한기를 완전히 폭발시켰기 때문이었다.지금 조슬기는 남극의 빙산처럼 차가워졌고 그녀의 체내에서 나오는 한기를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죄송한데 이 병은 내가 치료할 수 없네요.”그 말을 듣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누구도 이 신의가 치료를 포기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성 신의마저 치료할 수 없는 이 병을 과연 치료할 수 있는 신의가 존재할까?“성 신의님. 제발 더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 슬기는 이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슬기는 우리 종주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따님입니다.”이장로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성동석은 한숨을 쉬고는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하지만 저는 한 사람을 알고
이 한마디에 이장로의 눈이 번뜩였다.“성 신의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종주님과 우리 장로들도 사실상 수년간 슬기 체내의 한기를 흡수해 왔습니다.”성동석은 수염을 쓸어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한기는 이미 환자의 몸에 쌓여 한독이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귀문 13침을 사용해서 환자 체내에 쌓인 한독을 제거하면 환자는 무사히 깨어날 겁니다.”그 말을 듣자 곤륜의 모든 제자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역시 성 신의님입니다. 오자마자 바로 치료 방법을 제시하다뇨.”“맞아요, 누군가는 입만 살아서 나불대기만 했지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때는 아무것도 못 했잖아요.”누군가가 진서준을 흘끗 보며 비웃었다.이렇게 진서준을 깎아내리자 성동석의 의술이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성 신의님,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지금 바로 침을 놓아 우리 슬기를 구해주세요.”이장로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간곡히 부탁했다.“문제없습니다. 이제 내가 침을 놓아 환자의 한독을 깔끔하게 제거할 겁니다.”말을 마친 성동석은 은침을 꺼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조슬기의 발삼리와 명문 등 13곳의 주요 혈 자리에 침을 놓았다.그 동작은 유려하게 이어졌고 물 마시듯이 자연스러웠다.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전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귀문 13침은 이 세상 99%의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었고 성동석은 평생을 이 침 연구에 바쳤다.그러니 성동석의 귀문 13침에 대한 숙련도는 자연스레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13침이 꽂히는 순간, 다들 조슬기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빠져나오는 모습을 맨눈으로 확인 수 있었다.한기가 나오자 방 안의 온도도 급격히 내려갔고 맨눈으로 볼 수 있는 하얀 차가운 기운이 방 안을 떠다녔다.“성 신의님, 대답합니다. 침을 놓는 순간 신의의 풍모가 물씬 나네요.”“이제 우리 후배는 드디어 깨날 수 있겠어.”“후배가 완치되면 우리도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이장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역시 신의님입니다. 이 침법은 세상 그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엄두도 못 내
“성 신의라는 세 글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말하는 거야? 개뿔도 모르는 녀석이 나대긴 뭘 나대?”“성 신의님이 구할 수 없으면 뭐 네가 구할 수 있다는 거야?”곤륜 종문 제자들이 즉시 반발하며 진서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뭐라고요? 당신 스승은 누구입니까? 말해 보세요, 혹시 내가 알지도 모르죠.”성동석은 진서준을 쳐다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성동석은 수십 년 동안 이 바닥을 누볐지만 그동안 그의 의술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그런데 오늘 얼핏 봐도 40대인 남자가 자기 의술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이 나이대의 사람은 성동석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40대 사람은 이 바닥에 몸을 담근 지 10년이 넘었으니 다들 본인이 수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착각하며 의술에 대한 자부심이 넘칠 것이다.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직 배워야 할 게 산처럼 많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저 녀석은 거만하기 짝이 없는 무지한 놈일 뿐입니다. 성 신의님, 신경 쓰지 마세요.”은청준은 진서준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경고했다.“죽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이장로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아까 우리가 내린 결정을 두고 그러는 거라면 지금 당장 나가세요.”유기명은 집사가 말한 성약당 장로가 왔다는 소식에 다시 방에서 나왔다.“내일 아침에나 온다고 하지 않았어?”유기명이 집사에게 물었다.“다 우연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성약당 산 아래로 갔을 때, 마침 막 산에서 내려온 성 신의님을 만났습니다.”집사가 대답했다.성약당에 가려면 산을 오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큰 문제였다.하지만 비행기로 산 아래까지 가면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그렇군.”유기명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대화를 마치고 곧 방에 들어갔다.방에 들어가자마자 유기명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무슨 일이죠?”유기명은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가주님, 가주님이 초빙한 이 경호원이 너무 건방지네요
성약당의 장로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은청준은 얼굴에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아가 진서준을 밀쳐냈다.“비켜! 이제 너 같은 쓸모없는 놈은 필요 없어.”진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확인했다.“확실해? 잘 생각해. 나중에 다시 사람을 구해달라고 내게 빌면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만큼 간단하진 않을 거야.”은청준은 콧방귀를 끼며 차갑게 웃었다.“성약당 장로가 여기 있는데 너 같은 쓰레기가 나설 필요가 있겠어?”성약당의 명성은 대한민국에서 자자했다.그 당시 은청준은 아직 은씨 가문에 있었고 그 후 진서준이 성약당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그 소란 때문에 성약당 장로들이 전부 바뀌었지만 그들의 의술은 여전히 뛰어났고 이전 장로들보다 훨씬 더 비범했다.곤륜의 이장로도 성약당 장로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청준아, 얼른 장로님을 맞이하러 가.”“알겠습니다.”은청준은 서둘러 대답하고 바로 돌아서서 장로를 맞이하러 갔다.“정말 내가 치료할 필요 없겠습니까?”진서준이 이장로를 보며 묻자 이장로가 에둘러 대답했다.“하나는 누구도 모르는 작은 인물,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명성이 자자한 성약당 장로. 김평안 씨라면 어떻게 선택할 겁니까?”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어넘겼다.“적어도 난 이 무명의 인물한테 먼저 시도해 보라고 할 겁니다. 그게 적어도 말에 믿음이 없다고 떠들어대는 소리 듣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니까요.”이장로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이봐요,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인데 어떻게 함부로 시도하게 하겠습니까? 만약 당신 가족이 저렇게 누워 있다면 당신도 아무나 함부로 시도하게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그럼 장로님은 어떻게 내가 사람을 살릴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겁니까?”진서준이 다시 되묻자 이장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면박을 줬다.“그만하세요. 입 다물고 그냥 한쪽에 서서 구경만 하세요.”진서준은 이장로의 태도를 확인한 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한쪽에 서서 기다렸다.잠시 후, 은청준은 머리가 하얀 노
“이장로님, 부탁은 했지만 이놈이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방금 내가 이놈을 존중하지 않았다며 트집을 잡더군요.”은청준은 여전히 진서준에게 책임을 떠넘겼다.하지만 이장로는 은청준을 잘 알고 있었다.이장로는 은청준이 거만한 태도로 행패를 부려서 진서준이 대답하지 않은 거라고 추측했다.“은청준,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이장로는 살기가 섞인 표정으로 최종 통보를 내렸다.그 말을 듣자 은청준은 순간 멈칫하며 마음속에서 불만이 피어올랐다.“제가 방금 말투가 좀 거칠긴 했지만 이놈의 태도도 별로였습니다. 심지어 주동적으로 나가서 나랑 한 판 붙자고 하더군요.”은청준은 여전히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일부 책임을 진서준에게 떠넘기고 있었다.“은청준, 이젠 하다 하다 장로인 나까지 속일 거야?”이장로는 분노를 터뜨렸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지금 당장 김평안 씨에게 사과해!”은청준은 얼굴이 굳어졌고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사과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우리 후배를 치료할 수 없다면 어떡하죠? 그럼 내가 당한 망신을 이 사람에게 그대로 돌려줘도 됩니까?”잠자코 지켜보던 진서준이 손을 들어 올리며 끼어들었다.“부탁이고 나발이고 그냥 없던 일로 해. 내가 뭐 하늘의 신이라도 돼? 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만병을 고치는 능력도 없어.”이장로는 진서준이 은청준을 일부러 괴롭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은청준이 무슨 말을 하던 진서준은 반대로 대답하며 그를 괴롭히는 중이었다.물론 은청준을 괴롭히는 건 조금 전에 당했던 말도 안 되는 행패에 대한 복수였다.“김평안 씨, 걱정 마세요. 설령 슬기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더라도 이 자식이 김평안 씨와 따지지 않도록 약속하겠습니다.”이장로가 진심을 담아 진서준과 약속하자 진서준은 이장로를 흘끗 보고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말한 대로 하길 바랍니다.”“얼른 사과 안 해?
“그럼 그 여자를 구하고 싶은 사람에게 맡겨.”진서준은 이 말을 끝으로 바로 문을 닫았다.그 행동에 은청준 일행은 분노가 치솟았다.“당장 문 열어! 안 열면 후회할 줄 알아!”은청준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은청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다시 열렸다.진서준은 팔짱을 끼고 차가운 눈빛으로 은청준을 바라봤다.“너희가 어떤 불손한 짓을 하는지 한번 보자. 여기는 유씨 가문이지 너희 곤륜이 아니야. 너희가 멋대로 막 날뛸 수 있을 것 같아?”“유씨 가문이 뭐 어때? 사람 구하라고 하면 고분고분 구하기나 해. 이제 우리 종주님이 책임을 묻는다면 유씨 가문 가주라도 감당 못 할 거야.”은청준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진서준과 눈을 맞추었다.은청준의 배후에는 곤륜이 있었기에 하찮은 서남 유씨 가문을 은청준이 공손한 태도로 대할 수 없었다.게다가 은청준은 경성 은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했다.어느 쪽 신분이든 모두 유씨 가문보다는 훨씬 더 고귀했기에 당연히 유씨 가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반면, 진서준의 신분은 단지 유씨 가문의 하찮은 경호원일 뿐이었다.은청준의 고함에 유기명이 놀라 달려왔다.“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유기명이 급하게 소리 지르며 다가왔다.유기명은 진서준과 곤륜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왜냐하면 두 쪽 다 유기명이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가주님, 저는 이 집의 경호원에게 후배의 병을 부탁하려고 왔는데 이놈이 자존심을 세우며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네요.”방귀 낀 놈이 화낸다고 은청준은 먼저 이번 소란의 모든 책임을 진서준에게 떠넘겼다.그 말에 진서준은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곤륜에서 누군가에게 부탁할 때는 이렇게 고함을 지르라고 배웠어?”은청준은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처음에는 좋게 좋게 말했잖아? 네가 괜한 자존심을 세우며 자초한 일이지.”“됐어요, 다들 그만합시다.”유기명이 끼어들며 중재했다.“은청준 씨가 직접 와서 모시는 걸 보면 조 아가씨가
이장로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참지 못하고 욕을 날렸다.“젠장!”가장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상황이 결국 발생했다.“이장로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신수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공을 써서 슬기 체내 차가운 기운을 빨아낼 수밖에 없어.”이장로가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이 방법은 전에 곤륜산에서도 사용한 적이 있었지만 내공을 많이 소모하는 방식이었다.다행히도 그들 곤륜의 장로들과 종주는 내공이 꽤 깊었다.그렇지 않으면 슬기 목에 걸린 그 옥패 하나만으로는 이렇게 오래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저택에 이장로 하나만 있는지라 이 방법을 쓰는 게 별로 자신이 없었다.“이제 운에 맡길 수밖에 없어.”이장로는 이를 악물고 바닥에 앉아 두 손을 펼쳐 선천강기를 모은 후, 조슬기의 옆에 놓고 조슬기 체내 한독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그러나 막 시작하자마자 이장로의 얼굴은 빨려 나온 한독에 얼어붙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이 차가운 기운은 곤륜산이 내뿜는 기운보다 몇 배나 더 차가워 깊은 내공을 자랑하는 이장로조차 견디기 힘들어했다.그러니 지금 조슬기 같은 연약한 여자가 겪는 고통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1분이 지나자마자 이장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즉시 한독 제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안 되겠어.”이장로는 바로 일어나서 강기로 흡입된 한독을 체외로 밀어냈고 작은 얼음 조각 몇 개가 이내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차가운 기운이 얼음처럼 결빙된 것이다.조슬기의 상태는 이제 조금도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한 상태였다.“이장로님, 그 건방진 경호원을 한번 써보는 건 어떨까요?”은청준의 제안에 신수란은 순간 당황했다.“너 그 경호원이 치료하는 걸 결사코 반대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냐?”그러자 은청준은 천천히 자기 계획을 밝혔다.“우리 후배가 지금 위독한 상태인데 이제는 그놈에게 맡길 수밖에 없잖아. 그놈이 우리 후배를 기적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아무 문제 없이 이
은청준은 조금 짜증이 났다.유기명 딸이 이해 못 한다고 쳐도 유씨 가문 가주인 사람이 상황을 파악할 줄 모르다니, 너무나 어이없었다.경호원이 사람을 치료하게 허락하는 건 금시초문이었다.“가주님, 지금 하신 말, 설마 진심입니까?”은청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이장로도 미간을 찌푸리며 심기가 불편한 티를 냈다.“제 목숨은 바로 김평안 씨가 구해준 겁니다. 그러니 김평안 씨 의술을 믿지 않을 수 없죠.”유기명은 곤륜 사람들의 표정에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가주님이 믿지만 우리는 전혀 믿을 수 없습니다.”은청준의 태도는 단호했다.그들은 절대 진서준이 나서서 치료하게 놔둘 수 없었다.조슬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장로도 엄중한 처벌을 받을 터였다.현재로서는 성약당 장로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정 못 믿겠다면 저도 방법이 없네요. 조 아가씨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건 다 당신들 책임일 겁니다.”유기명은 말을 끝내고 손을 휘저으며 나갔다.이장로의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다.“너희는 여기서 슬기를 지켜.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나에게 알려.”이장로도 말을 마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은청준은 유기명의 말에 냉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하룻밤뿐인데, 하룻밤 동안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있나?”“너희 남자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얼른 다 나가!”신수란은 모두를 밖으로 내쫓았고 혼자서 조슬기 곁을 지켰다.진서준이 나오자 유기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동했고 유기명이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진서준, 조 아가씨 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어?”“저 여자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체내에 찬 한독이 너무 많아서 짧은 시간 내에 해결하려면 하늘의 신이 내려와야 할 겁니다.”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그럼 넌 어떻게 생각해? 오늘 밤 조 아가씨 병이 악화할 확률이 높을 것 같아?”유기명이 다시 물었다.유기명은 조슬기에게 자기 집에서
그 말을 듣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곤륜 문주의 딸을 감히 죽이려고 하다니, 대체 어느 미친놈이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꾸민 거지?“두목은 장강훈이라는 놈인데 서남 지역에서 악명 높은 악당이에요.”신수란이 한마디 더 보탰다.“뭐라고요? 그놈을 만났다고요?”유기명이 깜짝 놀랐다.“아는 사람이에요?”신수란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유기명을 쳐다봤다.“들어본 적은 있죠. 얼마 전 내 동생 유기태가 국안부에서 그놈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근데 이놈이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행방이 오리무중이라 찾기가 어려웠죠.”유기명은 신수란을 보며 물었다.“그래서 아가씨들은 어떻게 그놈 손에서 빠져나온 거죠?”신수란은 순간 머뭇거리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누군가 우리를 구해줬어요.”“네? 누가 아가씨를 구한 거죠? 내가 알기로 장강훈은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서남에서 그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거든요.”유기명이 흥미를 보였다.서남 무도계의 강자들은 유기명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대다수가 유씨 가문에 초빙되어 가문의 귀빈으로 섬기고 있고 거절한 이들은 전부 세상과 연을 끊은 은둔 고수뿐이었다.설마 유기명이 모르는 강자가 더 있다는 건가?신수란이 곧 이름을 밝히려 하자 진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누가 됐든 간에 그 강도가 죽었다면 된 거죠.”갑작스러운 개입에 신수란은 기분이 언짢아졌다.유기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진서준을 흘끗 쳐다보고는 진서준의 말투를 곱씹으며 속으로 추측했다.이 여자들을 구한 건 진서준이 틀림없을 것이다.“이장로님, 그놈들은 단순히 아가씨를 납치하려 했을 뿐,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어요.”신수란이 상황을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그렇다면 그놈들 뒤에 배후 세력이 있다는 거겠군.”이장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설상가상으로 슬기가 이번에 우리랑 함께 하산한 걸 아는 사람은 종문 내부 제자들뿐이야. 그런데 곤륜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소식이 그놈들 귀에 들어갔다고?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