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부영권이 눈을 뜨자 그를 추켜세우기 시작했다.부영권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괜찮아졌습니다.”“선생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지금 당장 처장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우성환이 서둘러 반재윤 처장에게 연락했다.전화 건너편, 반재윤은 부영권이 환자를 살렸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말했다.“우 원장님, 부영권 선생님께 일단 떠나지 말라고 하세요. 다른 병원에 그 환자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있거든요.”우성환은 그 말을 듣자 얼이 빠졌다.“환자가 몇 명쯤 더 있는 거죠?”“최소 스무 명이요.”반재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많다고요? 반재윤 선생님은 조금 전 진단할 때 독에 당한 거라고 하셨습니다.”우성환이 반재윤에게 설명했다.반재윤이 말했다.“그들 모두 같은 노인복지시설 노인들이에요...”우성환은 그 순간 왜 이렇게 많은 노인이 중독됐는지 깨달았다.범인은 그들의 밥이나 물에 독을 탔을 것이다.“부영권 선생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우성환은 서둘러 병실로 돌아가 조금 전 반재윤 처장에게서 들은 말을 부영권에게 전했다.부영권은 그의 말을 듣더니 미간을 구기며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스무 명이요? 지금 제 실력으로는 많아서 다섯 명밖에 더 구하지 못합니다.”부영권이 다섯 명밖에 더 구하지 못한다고 하자 우성환은 애가 탔다.그러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진 선생님에게 도와달라고 해야겠어요!”부영권은 그 말을 듣고 물었다.“진 선생님이라는 분 혹시 진서준 씨인가요?”“네, 설마 아는 분이십니까?”“하하, 신의인 진서준 씨가 있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걱정하던 부영권은 곧바로 표정을 풀면서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다른 이들은 진서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부영권이 진서준을 신의라고 부르자 다들 궁금해졌다.“하지만 아직은 좀 이르군요. 진서준 씨께서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겁니다.”“그러면 잠시 뒤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환자들은 아직 상태가 괜찮거든
진서준은 말을 마친 뒤 곧바로 몸을 돌려 서울 병원으로 달려 들어갔다.차에 치여서 엉망이 된 마이바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대머리 남자는 진서준의 거만한 모습에 냉소를 금치 못했다.“성깔이 있네. 하지만 이렇게 성깔을 부릴 수 있을 정도의 뒷배경이 있을지는 모르겠어.”대머리 남자도 더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차에 탔다. 그는 조금 구겨진 차를 타고 사거리를 떠났다.몇 분 뒤 진서준은 서울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마침 병원 로비에 도착한 진서준은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을 마주쳤다. 여자는 진서준과 갈등이 있었던 왕나연이었다.저번에 강호걸에게 문제가 생긴 뒤로 왕나연은 더는 그와 연락하지 않았다.왕나연 곁의 청년은 그녀가 최근에 작업을 건 재벌 집 자제로 그의 아버지는 서울 병원 외과 교수였다.왕나연은 남자 친구의 인맥을 통해 서울 병원에서 실습을 하고, 졸업한 후 이곳에서 근무할 생각이었다.서울 병원은 문턱이 아주 높았다. 국내 명문대 졸업생이 아니거나 인맥이 없다면 들어갈 수가 없었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진서준,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진서준을 알아본 왕나연은 화가 난 얼굴로 진서준을 노려보았다.진서준이 짜증스레 말했다.“네 병원도 아니고 내가 여기에 오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지?”“하하, 어이가 없네.”왕나연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곁에 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내 남자 친구 아버지가 이 병원 교수거든. 이 병원의 일들은 교수들 마음대로야.”평범한 차림새의 진서준을 본 윤서호의 눈동자에 경멸이 스쳤다.“나연아, 이 남자 누구야?”“예전에 나한테 고백했었는데 내가 거절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날 때렸어!”왕나연은 없는 말을 지어내며 윤서호의 손을 빌려 진서준에게 복수하려 했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더니 냉소를 머금었다. 그는 급하게 반박하지도 않았다.윤서호는 지금 왕나연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기에 진서준이 왕나연을 때린 적이 있다는 말을 듣자 그 자리에서 왕나연을 위해 복수할 생각이었다.
원장은 그들이 조금 전 내쫓은 젊은이에게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그 태도는 식품의약품안전처 처장을 봤을 때와 똑같았다.“조금 전 누가 진서준 씨를 내쫓으라고 한 거죠?”우성환은 경비원들의 앞에 서서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윤 교수님 아들이었습니다.”한 경비원이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그래요.”우성환은 억지로 화를 억눌렀다.“진서준 씨, 일단 환자부터 구해주세요. 이 일은 제가 꼭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우성환이 말했다.“네.”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곧바로 꼭대기 층에 있는 중환자실에 도착했다.출근해야 하는 의사를 제외하고 다른 의사들은 전부 이곳에 있었다.원장의 뒤에 젊은이 한 명이 있는 걸 본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젊은이를 바라보았다.“저 청년은 누굴까요?”“원장님 친척 아닐까요? 아마 이 일을 빌려서 자기 친척을 우리 병원에서 근무시킬 생각이겠죠.”“쳇, 병원에서는 인맥 같은 거 이용하면 안 된다고 하더니 본인이 그러네요.”사람들이 수군덕대고 있을 때 진서준을 알아본 부영권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신의님!”경멸에 찬 표정이던 사람들의 입이 순간 떡 벌어졌다.‘신의라니? 이 청년이 신의라고? 거짓말이겠지!’부영권은 진서준의 앞에 서서 공손히 그와 악수했다.“부영권 선생님,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시면 돼요. 신의라고 부르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진서준은 웃으며 말했다.“진서준 씨는 신의라는 이름에 걸맞은 분이죠!”부영권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곧이어 그는 부끄러운 듯 말했다.“제가 무능하여 병실에 있는 환자들을 전부 구할 수는 없는지라 이렇게 신의님을 모시게 됐습니다.”부영권은 여전히 호칭을 바꾸지 않았고 진서준도 그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환자는 어디 있죠? 안내해 주시죠.”진서준이 말했다.“여기 있습니다.”우성환과 부영권은 진서준을 데리고 아주 큰 병실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십여 명의 안색이 창백한 노인이 누워있었다.노인들은 전부 독에 당
뒷모습을 봤을 때, 주혁구는 안에서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 있는 의사의 나이가 많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우 원장님, 저 의사 선생님 이름이 뭡니까? 의술이 뛰어나신가요? 제 아버지 병을 치료할 수는 있는 건가요?”연이은 질문에서 그가 진서준을 불신한다는 걸 누구든 눈치챌 수 있었다.다행히 중환자실은 방음이 좋았다. 방음이 좋지 않았다면 진서준이 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주혁구 씨, 진 선생님은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의술로서는 강남 최고입니다!”우성환은 진서준을 최고라 일컬었다.“강남에서 제일 뛰어난 의사는 부영권 선생님 아니신가요?”주혁구는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의문을 표했다.이때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부영권이 다가왔다.“예전이었다면 제 의술이 강남 최고라는 말을 인정했을 겁니다. 그러나 진 선생님과 비교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부영권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주혁구는 부영권을 바라보았다. 부영권은 몇 년 전 그의 아버지를 진찰한 적이 있었다.“부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부영권을 발견한 주혁구는 무척 흥분했다.그를 가장 흥분케 한 건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이었다.의술과 덕성을 겸비한 부영권은 절대 함부로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주혁구는 부영권의 말을 믿었다.“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세요. 진 선생님이 나섰으니 반드시 나으실 겁니다!”부영권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네, 그럼 전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주혁구는 조금 전처럼 초조해 하지 않았다.잠시 뒤 주혁구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한 뒤 주혁구는 전화를 받았다.담담한 표정이었던 그는 전화 내용을 듣자마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일단 현장 직원들 진정시키고 당장 소식을 차단해. 내가 바로 갈게!”명령을 내린 뒤 주혁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우 원장님, 부영권 선생님, 현장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우성환이 덤덤히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보세요. 신의님께서 나오시면
“매일 병원에 계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시간 나실 때 아무 때나 오시면 됩니다. 아니면 병원에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가 있을 때 제가 연락드릴 테니 그때 오셔도 됩니다. 월급은 원하시는 금액을 말씀해 보세요. 제가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겠습니다!”우성환이 내건 조건을 들은 사람들은 부러워했다.그러나 그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진서준의 의술은 정말 굉장했기 때문이다.진서준 같은 사람은 어느 병원이든 서로 빼앗으려고 할 것이다.진서준은 잠깐 고민해 보더니 물었다.“제가 특별 초빙 의사가 된다면 여기 병원의 교수보다 권력이 클까요?”우성환은 흠칫했다가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고, 곧바로 진서준이 이런 질문을 한 의도를 눈치챘다.“진서준 씨가 저희 병원의 특별 초빙 의사가 된다면, 자르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제게 말 한 마디 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그 교수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몰랐기에 진서준과 우성환의 대화에 어리둥절해졌다.병원에 외과 교수, 내과 교수 등 교수는 많았다.설마 병원의 어느 교수가 진서준의 심기를 거스른 걸까?“그래요? 그 사람이 말하길 자기 아버지 직권을 이용해서 자기 여자 친구를 병원에 꽂아주겠다고 하던데.”진서준의 말에 우성환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한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오늘 병원에 채용 면접이 있나요?”중년 남자는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오늘 채용 면접은 윤 교수님께서 책임지셨습니다.”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하던 사람들은 윤 교수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진서준을 건드린 사람은 병원의 외과 교수 윤도석이었다.“면접이 몇 시부터죠?”우성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9시 30분부터 시작입니다. 10분쯤 남았습니다.”“다들 각자 볼 일 보세요. 집으로 돌아가 쉴 분들은 쉬세요.”일부는 떠났고 일부는 윤도석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궁금하여 그곳에서 기다렸다.“진서준 씨, 진서준 씨와 부영권 선생님께서 계셔서 다행입니다. 이번 면접에서 진서준
윤도석은 밖으로 나온 뒤 그를 찾은 의사를 따라 복도 제일 안쪽에 있는 사무실로 왔다.사무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윤도석은 깜짝 놀랐다.사무실 안에는 십여 명의 의사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원장 우성환과 부영권도 있었다.“원장님, 부영권 선생님.”두 사람을 본 윤도석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윤도석 교수님,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진서준 선생님이라고 우리 병원의 특별 초빙 의사입니다.”우성환은 굳어진 표정으로 엄숙하게 진서준의 신분을 소개했다.윤도석은 그 말을 듣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려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진서준은 20대 청년이었기에 그는 우성환이 자기를 놀리는 건가 싶었다.특별 초빙 의사는 교수인 그보다 권력이 더 컸다.그리고 원장의 권력이 이곳에서 가장 컸기에 윤도석은 우성환의 말에 따라야 했다.“진서준 씨, 안녕하세요.”윤도석은 곧바로 진서준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인사를 건네는 윤도석을 향해 진서준은 냉담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진서준의 태도에 윤도석은 조금 불쾌했다.병원 교수인 데다가 그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데 이런 태도를 보이니 말이다.윤도석은 매우 화가 났지만 원장이 자리에 있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번 면접은 진서준 씨와 부영권 선생님이 함께 들어갈 겁니다. 면접 책임자는 진서준 씨가 될 거고요.”우성환의 말을 들은 윤도석은 넋이 나갔다.이번 면접에서 그는 아들의 여자 친구뿐만 아니라 꽤 예쁘장한 여대생 두 명을 합격시키기로 했다.그는 상대방의 돈을 받았고 두 여대생은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했다.그런데 지금 이제 와서 갑자기 책임자를 바꾼다면 분명 구설에 오를 것이다.“그... 면접 같은 사소한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진서준 씨와 부영권 선생님을 귀찮게 하겠어요?”윤도석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러나 우성환은 그에게 기회를 줄 생각 따위 없었다.“이 두 분께서는 지금 한가하세요. 그리고 이 기회를 통해 우리 서울 병원이 어떤 수준인지도 보고 싶어 하시고요. 이 일은 이렇게 정해졌으니 윤 교수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진서준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휴대전화를 살 수 없었기에 많은 사람과 연락이 끊겼다.“난 면접 보러 왔어.”진서준이 웃으며 말했다.“어? 너도 면접 보러 왔다고?”가태윤은 깜짝 놀랐다.“너 설마 의대 나온 거야?”“아니.”진서준은 고개를 저었다.“서준아, 내가 일부러 너 상처 주려고 그러는 건 아닌데 의대 출신이 아니거나, 명문대 출신이 아니면 이 병원에 들어가기는 힘들어.”가태윤은 진서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난 상관없어. 중요한 건 네가 이 병원에 들어올 수 있는지 없는지야.”가태윤은 한숨을 푹 쉬었다.“나도 아마 들어가긴 힘들 거야. 내가 알아봤는데 이미 세 명이 편법을 썼대. 이제 자리가 두 개만 남았으니 난 가망이 없을 거야.”가태윤은 진작 사회에 발을 들였기에 학교와 사회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 사회에서 발을 붙이려면 뒷배와 인맥이 없으면 안 됐다.“내가 장담하는데 실력만 있다면 반드시 이 병원에 들어올 수 있을 거야.”진서준이 웃으며 말했다.진서준의 진지한 모습에 가태윤은 장난스레 말했다.“설마 네가 이번 면접 책임자야?”“잠시 뒤면 알게 될 거야.”진서준이 싱긋 웃었다.“허풍 떨지 마. 이제 곧 면접 시작이니까 우리 빨리 가자!”가태윤은 진서준을 끌고 면접실로 향했다.면접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진서준은 걸음을 멈추었다.가태윤은 안에 사람들이 꽤 많이 있는 걸 보았다. 심지어 면접관도 이미 도착한 상태인 걸 본 그가 말했다.“우리 앞문 말고 뒷문으로 들어가자.”진서준은 부영권에게 앞문으로 가라고 눈치를 준 뒤 가태윤과 함께 뒷문으로 면접실 안에 들어갔다.“부영권 선생님!”부영권이 들어오자 윤도석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이했다.“진서준 씨는요?”“면접 시작하면 올 겁니다.”부영권이 덤덤히 말했다.윤도석은 그 말을 듣자 진서준을 향한 불만이 더욱 커졌다.부영권도 미리 도착했는데 진서준은 시간 맞춰
윤서호는 말을 마친 뒤 진서준의 곁에 있는 가태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이 사람 당신 친구야?”윤서호는 거만한 얼굴로 가태윤을 바라보았다.가태윤은 조금 전 윤서호가 한 말을 들었다. 윤서호는 병원 교수의 아들이었고 그의 아버지가 바로 이번 면접 책임자였다.만약 진서준과 선을 긋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 합격하지 못할 것이다.진서준도 고등학교 때 친구인 가태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가태윤은 잠깐 망설이더니 진서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맞아. 난 진서준 친구야.”윤서호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는 가태윤이 자신을 두려워해서라도 곧바로 진서준과 선을 그을 줄 알았다.그러나 가태윤은 오히려 그를 도발했다“친구라고? 그러면 오늘 둘 다 합격하지 못할 줄 알아!”윤서호가 냉소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네 아버지는 외과 교수일 뿐이야. 이 병원이 네 집안 거라도 되는 줄 알아?”진서준이 팔짱을 끼고 평온한 눈빛으로 윤서호를 바라보았다.“내가 합격 못 한다고 하면 합격 못 하는 거야!”윤서호는 책상을 내리치면서 진서준을 향해 소리쳤다.그 소리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앞에 앉아있던 부영권과 윤도석도 소리를 듣고 그곳을 바라보았다.윤서호가 소리를 지르는 대상이 진서준임을 확인한 부영권은 안색이 흐려졌다.“저 사람은 누구죠?”부영권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윤도석은 화가 나서 이가 갈렸다. 그는 윤서호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원장이 직접 임명한 특별 초빙 의사인 데다가 이번 면접 책임자인데 그런 진서준을 건드리다니!“그게... 제 아들입니다.”윤도석이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오늘 윤 교수님 아들도 면접을 봅니까?”부영권이 차가운 눈빛으로 윤도석을 바라보았다.“여자 친구랑 같이 온 겁니다. 저도 방금 알았습니다.”윤도석이 설명했다.그러나 부영권은 절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진서준은 건방진 윤서호를 바라보며 냉소했다.“잠시 뒤에도 지금처럼 건방지길 바라.”말을 마친 뒤 진서준은 앞으로 나갔다
도지아는 그 표정이 왠지 묘하게 신경 쓰였다.부모님이 나가자 집 안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우리 집에 손님이 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부모님이 좀 들뜨셨나 봐.”도지아가 무심하게 해명했다.“괜찮아, 이해해. 우리 집도 손님 올 때마다 우리 엄마 엄청 챙기시거든.”진서준이 웃으며 대응했다.“맞다, 아까 우리 동생 봤을 때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도지아가 본론을 꺼냈다.“이상한 점? 글쎄, 딱히 못 느꼈는데?”진서준이 고개를 저었다.“애초에 네 동생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아까 네가 유흥업소에 갇혔을 때, 걔가 엄승현 찾아가서 인맥을 동원해 널 구해달라고 부탁했어.”도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우리 동생이 진짜 요즘 이상해. 말로는 독설을 퍼붓는데 속은 여전히 착해.”“혹시 일부러 너희를 멀리하는 거거나 너희를 보호하려는 거 아닐까?”진서준이 나름대로 추측했다.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뭔가 압박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설마 민수가 잡혀갔을 때 하경범 부하들이 협박이라도 한 걸까?”도지아도 진서준의 추측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날, 도지아의 부모와 도민수는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민수가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전화해서 집에 오라고 해야겠어.”도지아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을 걸어도 도민수가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아예 꺼버렸다.“이 자식이 정말...”도지아가 인상을 찌푸렸다.“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한테는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일단 그냥 내버려둬. 말하고 싶으면 알아서 말하겠지.”진서준이 위로하듯 말했다.한편, 노래방의 한 방에서 도민수는 테이블에 엎드려 하얀 가루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시고 있었다.그러고는 완전히 취한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때? 기분 좋아?”노란 머리 청년이 민수의 머리채를 잡고 비열하게 웃었다.
다들 그 말을 듣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진서준이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깔끔한 상태로 나올 수 있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다.엄승현은 눈을 굴리더니 이내 눈치 빠르게 잽싸게 뛰어가 아부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호랑이님, 아까 소란을 일으킨 그놈 찾으시는 거죠? 제가 어디 갔는지 압니다. 당장 안내해 드릴게요.”“뭐라고?”조호의 얼굴이 싹 어두워졌고 당장이라도 사람을 찢어버릴 눈빛이 번뜩였다.엄승현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예상이 맞았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호랑이 씨, 그놈 진짜 제대로 혼내줘야 합니다. 원하시면 제가 지금 바로 길을 안내할게요.”“닥쳐, 이놈아.”철썩!조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엄승현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미친놈아, 죽고 싶으면 혼자 뒤져. 왜 애꿎은 사람까지 끌어들여? 꺼져!”힘들게 저 귀신 같은 무시무시한 녀석을 보내버렸는데 어디서 굴러온 개념 없는 놈이 다시 자기를 이끌고 저 녀석에게로 데려가겠다는 거지?조씨 가문 거물도 없는데 조호 본인이 감히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조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며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엄승현은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뭐, 뭐야? 호랑이가 지금 겁먹은 거야?”“이상하네, 저놈이 대단한 배경이라도 있나?”“말도 안 돼. 저놈 그냥 외지인이잖아. 배경은 개뿔.”하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엄승현은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틀림없이 호랑이가 직접 손보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동부 구역은 호랑이 구역이잖아. 근데 내가 길을 안내하면 체면이 안 서잖아. 소문이 퍼지면 체면도 구겨질 거고.”“승현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다들 엄승현의 말에 공감하자 엄승현은 자신감을 되찾고 비웃었다.“두고 봐. 오늘 밤 도민수 그 녀석 가족이 다 뒤질 거야.”20분 후.진서준과 도지아는 차를 타고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건물에 들어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도지아 집 문 앞에 섰다.“엄마
갑자기 누군가 봉쇄된 유흥업소에서 걸어 나오니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어라? 진짜 저 녀석이네? 근데 왜 멀쩡하지?”엄승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상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조호가 직접 나서서 판을 깔았다면 피를 안 보고 끝날 리가 없었다.진서준이 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만신창이가 됐어야 정상인데 지금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했다.“어서 나랑 가서 진서준한테 감사하다고 하자.”도지아가 도민수를 잡아끌었다.“가고 싶으면 혼자 가. 난 안 가.”도민수의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뭐야, 너 왜 그래? 아까는 진서준을 누구보다 더 걱정했잖아?”동생의 앞뒤 다른 태도에 도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닥치고 신경 꺼.”도민수는 누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동생의 거친 행동에 도지아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진서준을 찾아갔다.“이상하네, 저 녀석 진짜로 멀쩡하잖아?”엄승현 일행은 의아해하며 웅성거렸다.“승현 오빠,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아세요?”“나도 몰라.”엄승현은 고개를 저었다.“혹시 저 녀석이 호랑이한테 뭔가 큰 보상을 약속한 거 아닐까요? 호랑이가 저 녀석을 저렇게 고분고분 풀어 줄 이유가 없잖아요?”단발머리 여자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가능성 있어. 아니면 어떻게 호랑이의 구역에서 저렇게 멀쩡하게 나왔겠어?”“그래, 직접 물어보자.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떠나 진서준 쪽으로 걸어갔다.“진서준, 괜찮아?”도지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다친 것처럼 보여?”진서준이 홀가분한 말투로 되물었다.“이깟 조무래기 건달도 못 이길 거면 내가 감히 하경범을 건드릴 수 있었겠어?”“그렇긴 해.”도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진서준이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는 도지아도 잘 몰랐다.황예은에게 슬쩍 떠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 황당했다.황예은의 입에서 나온 진서준은 거의 만능 인간이었다.세상에 정말 그런 남자가 존재할까?“야, 너 대체 어떻게 호랑
“뭐? 네 개가 되라고?”정장 남자는 이 말을 듣자마자 분노가 폭발했다.“네가 뭔데 우리 아버지를 개 취급해? 거울이나 보고 네 꼴부터 확인해.”조호도 눈살을 찌푸렸다.“그래, 네가 종사인 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 귀도파에도 종사가 없는 게 아니야. 종사라는 이유로 날 얕볼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우리 귀도파도 그냥 조직이 아니야. 뒤에 든든한 배경이 있다고.”진서준은 그 말에 흥미를 보였다.“그래? 그럼 너희 귀도파 주인은 누구야?”조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이 청년이 하는 말이 참 기분이 나빴다.진짜 주인이라니, 자기를 개 취급하는 것 같았다.그런데 기분 나쁘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조호가 이렇게 거들먹거릴 수 있는 건 귀도파 뒤에 거물이 있기 때문이었다.“르벨 하씨 가문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조호가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익숙한 가문의 이름에 진서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결국 하씨 가문에 빌붙은 거였군.”“빌붙다니? 우리 조씨 가문은 단순히 의지하는 게 아니야. 하씨 가문에서 우리 조씨 가문의 대단한 인물을 공양하고 있거든. 그분은 대종사야.”조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래? 대종사였어? 하씨 가문에서 그 대종사를 공양하고 있어?”진서준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짙은 흥미를 보였다.“그럼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인물 말이야.”“좋게 말하는데 너 선 넘지 마. 얼른 여기서 나가. 네가 종사라 오늘은 특별히 봐주겠어.”조호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근데 계속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 가문 거물을 보겠다고 떠들면 내가 장담하건대 넌 무조건 죽을 거야.”종사와 대종사는 하늘과 땅 차이처럼 격차가 컸다.이 애송이가 조씨 가문의 거물을 이길 수 있다는 건 조호가 보기엔 한낱 망상일 뿐이었다.“상관없어. 마침 요즘 할 일도 없는데 잘 됐어.”진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언제든 너희 집안 그 거물 불러내. 하씨 가문이 공양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 좀 해보자고.”“죽고
“그럼 됐네요.”정장 남자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흥, 우리 아버지한테 개기는 놈은 죽는 길밖에 없어.”하지만 정장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누군가가 공중을 가르며 정장 남자의 옆으로 날아가더니 벽에 거칠게 처박혔다.“뭐지?”조호 부자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방금 날아간 게 귀도파 정예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지금 그 정예는 죽은 개처럼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뭐야, 이게?”조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조호가 반응하기도 전에 연이어 비명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까지 우쭐대며 다가가던 정예들이 전부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을 내고 있었다.반면, 진서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 광경을 본 조호의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몇 초 만에 자기 정예 부하들이 전부 나가떨어졌다.진서준이 설마 이렇게 강력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네 부하들, 영 쓸모가 없는데?”진서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네 차례인가?”조호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이곳 르벨의 고수들은 죄다 알고 있는 조호였지만 이 청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설마 외지에서 일부러 찾아와 귀도파와 시비를 걸려는 놈인가?“대체 넌 누구야?”조호가 쌀쌀하게 물었다.“지금에서야 내 신분이 궁금해졌어? 늦어도 한참 늦었어.”진서준이 여유롭게 대답했다.“경고하지. 르벨 동부 구역은 내 구역이야. 설령 네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내 구역에서 깽판 치면 살아 나가지 못할 거야.”조호가 굳은 얼굴로 위협했다.“그래? 그럼 네가 어떻게 날 못 나가게 하는지 한번 보자.”진서준이 가볍게 웃었다.조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냈다.“네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총알은 못 피하겠지?”옆에서 정장 남자도 한숨을 돌리며 비웃었다.“방금까지 그렇게 까불더니 총 앞에서도 한번 까불어 봐.”지금 시대에서 총을 손에 쥔 자가 곧 생사를 결정하는 법이다.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일반인은 총알 한 방이면 끝장
“문 닫아, 전원 퇴장시켜.”조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즉시 움직였다.순식간에 유흥업소에서 즐기던 사람들이 전부 나갔고 유흥업소 전체가 텅 비었다.감시 카메라는 전부 끊겼고 유흥업소의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다.이유도 모른 채 쫓겨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웅성거렸다.“대체 누가 호랑이 구역에서 깽판 친 거야?”“호랑이가 모든 사람을 내쫓으면 그건 누군가 죽는다는 뜻인데?”“조용히 살면 안 돼? 왜 하필 호랑이를 잘못 건드려서...”사람들은 몇 마디 수군거리고 이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이봐 청년, 생각보다 꽤 침착해 보이네.”조호가 진서준을 보며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바지에 지렸을 텐데 이 녀석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꼼짝도 안 했다.“하지만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조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삿날이라고? 나한테 하는 소리 맞아?”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우리 아버지가 자기한테 하는 소리라도 된다는 거야?”정장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아까 그렇게 잘난 척했잖아. 지금도 그렇게 까불어 봐.”진서준은 정장 남자를 한번 쓱 보더니 진지하게 경고했다.“입단속 잘해. 안 그러면 조금 있다가 평생 말할 수 없게 될 거니까.”그 말에 조호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자식이 정말 건방지네. 좋아, 네 오만함을 봐서 특별히 기회를 주지. 스스로 팔 하나 자르고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네 숨통을 끊어놓지 않을게.”조호가 칼을 꺼내 진서준 앞에 던졌다.그런데 진서준은 가볍게 웃더니 주머니에서 천기각 각주의 옥패를 꺼냈다.“이거 본 적 있어?”“그냥 싸구려 옥패 아니야? 뭐야,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야? 늦었다, 이 자식아.”정장 남자가 실소를 터뜨렸다.조호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진서준은 옥패를 집어넣었다.이 무리는 천기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그렇겠지. 애초에 그 노인네가 지하 세계를 누빈 것도 아닌데 이런 조폭들을 천기각에 끌어들이진
“됐어, 다들 그만 좀 해.”이때 엄승현이 나서서 중재하기 시작했다.“다들 아까 일 때문에 민감해진 것 같은데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자.”“엄승현, 너 인맥 넓잖아? 아까 그 사람 구해낼 수 있어?”도민수가 갑자기 물었다.“뭐? 무슨 소리야? 나보고 호랑이 손아귀에서 사람을 빼내라고?”엄승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이 녀석이 호랑이의 아들을 때려놓고 이제 와서 엄승현에게 사람을 구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사실 방금 엄승현이 자기 목숨 건진 것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민수야, 그럴 필요 없어. 진서준은 괜찮을 거야.”도지아가 조용히 말했다.“헛소리 마. 상대는 호랑이라고. 동부 구역에서 호랑이는 그야말로 지하의 황제야.”도민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분한테 찍히면 대단한 사람이 나서지 않는 이상 무조건 죽는다고.”자기 동생이 아직도 착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아채자 도지아는 가슴이 뭉클했다.“내가 왜 나서야 하는데? 나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엄승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사실 도와주고 싶어도 도무지 도울 수 없었다.호랑이가 마음만 먹으면 엄씨 가문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적어도 저 사람은 우리를 구해줬어.”도민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팩트를 말했다.“내가 구해달라고 했어? 애초에 저놈이 괜히 주먹을 휘둘러서 일이 이렇게 커진 거잖아. 저놈이 흥분하지만 않았다면 우린 진작에 저기서 나왔어.”엄승현이 뻔뻔하게 말했다.“맞아, 자기가 영웅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제 곧 처맞을 텐데 아주 꼴좋네.”단발머리 여자가 대놓고 비웃었다.그들의 차가운 태도에 도민수는 분노가 치밀었다.“민수야, 넌 나를 못 믿는 거야? 내가 진서준이 무사할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도지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누나를 믿으라고?”도민수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어떻게 누나를 믿어? 며칠 전 일은 벌써 잊었어?”도지아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히 잊지 않았어. 근데 결국 다들 무사히 돌아왔잖아.”“무사히 돌아왔다고?”
진서준이 호랑이의 아들까지 후려치는 걸 보자 사람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너 미쳤어? 조 도련님은 호랑이 아들이라고. 이분을 때린 건 곧 호랑이의 얼굴에 뺨을 때린 거랑 다름없다고.”엄승현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조 도련님, 복수할 대상을 잘못 찾으면 안 됩니다. 문제를 일으킨 건 저 사람들이지 우린 아무 상관 없습니다.”“맞아요, 조 도련님. 저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정장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이 쪽팔린 놈들아, 다 꺼져.”정장 남자가 침을 뱉으며 욕설을 내뱉었다.이렇게까지 비굴한 놈들은 정장 남자도 처음 봤다.“어서 가자, 다들 서둘러.”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 기쁨에 찬 얼굴로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너희도 가. 여긴 나 혼자로도 충분해.”진서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그래도...”도지아는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여기 남아봐야 나한테 짐만 돼. 그냥 가.”진서준이 단호하게 다시 축객령을 내렸다.그 말에 은근히 기분이 상한 도지아는 진서준을 살짝 째려봤다.“알겠어. 조심해. 가자, 민수야. 여긴 진서준한테 맡기자.”도지아는 도민수의 팔을 끌며 방을 나섰다.같은 시각, 정장 남자도 전화를 마쳤다.정장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서준을 노려봤다.“어디 한번 보자. 네가 얼마나 배짱 좋은 놈인지. 우리 아버지가 오시면 그때도 지금처럼 잘난 척할 수 있길 바랄게.”진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조호가 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엄승현 일행은 유흥업소 건너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그들은 창문을 통해 건물 앞에 줄지어 선 승합차들을 확인했다.그 차에서 강철로 된 칼을 든 건장한 남자들이 쏟아져 나와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어휴, 빨리 도망쳐서 다행이야. 조금만 늦었다면 우린 꼼짝없이 죽었어.”그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아까 정장 남자가 엄승현 일행을 놔주지 않았다면 저 방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야, 도민수. 그냥 네 누나한테 조 도련님이랑 한 달만 있으라고 해. 그럼 우린 다 여기서 나갈 수 있잖아.”“그래, 네 누나가 조 도련님이랑 잘 되면 넌 조 도련님 처남이 되는 거야. 그건 일반 신분이 아니야.”“맞아, 너희 집안이 이 기회를 잡고 르벨에서 우뚝 서는 거야.”다들 자기 안전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민수를 설득하려 했다.“너희들 인간 맞아? 우리 누나를 희생해서 너희 목숨을 구하겠다고?”도민수는 눈을 부릅뜨고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자기 친구들이 이 정도로 역겨운 사람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이 일 애초에 너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 네가 조 도련님을 때리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 꼴 났겠어?”정장 남자가 엉덩이를 만졌던 여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아까 저놈이 네 엉덩이 만졌을 때, 네가 먼저 성추행이라고 소리쳤잖아?”도민수는 어이가 없었다.아까 기껏 도와줬더니 지금 와서 오히려 자기를 원망하고 있었다.정말 배은망덕하긴 짝이 없었다.“그때 저 사람이 조 도련님인 줄 알았으면 난 절대 그런 말 안 했어.”여자가 당당하게 반박했다.“너희들 정말 대박이다.”도민수는 분통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너희랑 같은 학교 다녔다는 게 진짜 내 인생 최대의 수치야.”“조 도련님, 우리 모두 도민수 누나가 조 도련님을 모시는 걸로 동의했어요. 그러니 제발 우리를 풀어주세요.”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도지아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이 사람들이 역겨워 토할 것만 같았다.“진서준, 부탁할게.”도지아는 진서준을 바라봤다.“알았어. 넌 먼저 동생을 데리고 나가 있어.”진서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도민수의 병을 봐주는 거였는데 주먹을 또 휘두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 여자는 못 건드려.”진서준은 무심한 말투로 정장 남자에게 경고했다.“넌 또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정장 남자는 진서준의 건방진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