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은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렀다.둘째 날 오후, 진서준은 진혁의 전화를 받았다.“할아버지, 무슨 일이에요?”“오늘 밤 양씨 가문 노인의 생신 연회가 열릴 예정이야. 너도 참석할래?”진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지금 저는 인피면구를 쓰고 있어 별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요.”진서준이 진혁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진혁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말했다.“그래도 가보는 게 좋을 거야. 오늘 밤엔 거물급 인사들이 많이 올 거야. 너도 그 자리에 가서 그 사람들의 정체를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양씨 가문 가주의 생신 연회는 전국의 여러 가문이 앞다투어 참석하려고 경쟁하는 핫한 모임이었다.사대 가문 중 하나인 양씨 가문과 이런 방식으로 연결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지위는 급상승할 것이 분명했다.지방 가문들뿐만 아니라 강남의 서씨 가문, 서남의 유씨 가문 같은 명문대가도 참석할 예정이었다.“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밤에 가볼게요.”“초대장은 이미 네가 머무는 곳 앞에 두도록 했어.”“네? 누가 다녀갔나요?”진서준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이틀 동안 진서준은 계속 이 다락방 안에서 수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진서준의 현재 지각으로는 누군가가 문 앞에 다가오면 당연히 느껴야 했는데 누군가가 아무 소리도 없이 이 다락방에 다녀갔다는 사실이 진서준을 깜짝 놀라게 했다.전화를 끊은 후, 진서준은 곧바로 문 앞에 나가 보았다.문 앞 바닥에는 금박이 새겨진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초대장만 봐도 엄청난 가격으로 만들어진 느낌이 물씬 풍겼다.역시 대한민국에서 서열 1위에 놓인 최고 가문다운 스케일이었다.진서준은 초대장을 가슴에 넣고 차고로 향했고 이내 아우디 차 한 대를 선택해 양씨 가문 장원으로 향했다....월용정.양씨 가문 장원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산과 물이 어우러진 풍경은 옛날 사람의 시와 그림에서 본 듯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진서준이 차를 몰고 도착했을 때, 이미 주변에는 고급 차들이 즐비했다.눈에 들어오는 차들
“김평안!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렇게 또 만날 줄은 몰랐네.”황현호는 음침한 표정을 지으며 진서준과 조민영에게 다가갔다.방금 진서준을 본 순간, 황현호는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진서준은 한때 신농 테스트를 통과하고 순조롭게 선발되어 들어간 사람이었다.일단 신농에 들어간 무인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절대 신농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신농의 지옥 같은 처음 훈련을 버텨내지 못하고 죽든가 아니면 평생을 신농에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진서준처럼 신농에 잠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사람은 황현호도 처음 보았고 심지어 전에 이런 소문도 듣지 못했다.“이봐, 넌 도대체 어떻게 신농에서 나온 거냐? 설마 네 실력이 바닥을 쳐서 신농이 널 버리고 내보낸 거야?”황현호는 진서준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여기는 양씨 가문의 집안이니 진서준이 여기서 자기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황현호는 마음대로 진서준을 조롱해도 안전하다고 판단했다.진서준은 황현호를 한 번 쓱 쳐다보고 단 두 글자만 내뱉었다.“꺼져.”“껌딱지 같은 인간이 또 여기까지 따라와서 질척대네요.”조민영도 입술을 삐쭉 내밀며 황현호를 불쾌하게 바라보았다.이제 막 아저씨랑 단둘이 있을 수 있었는데 이 귀찮은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쳐버린 것이다.진서준에게 욕을 먹는 건 그렇다 쳐도 조민영에게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자 황현호는 속이 꽉 막히는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여태껏 어디 가든 호감형 존잘로 통한 자기가 조민영의 눈에는 왜 40대 아저씨만도 못 한 존재로 보이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신농에서 돌아온 후, 황현호는 이내 조민영의 정체를 알아냈다.동북 조씨 가문 가주의 딸이자 조기강의 조카라는 화려한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황현호의 황씨 가문이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 가문이라고 해도 이런 명문대가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황현호의 아버지도 현재 대한민국에 없으니 조씨
“아빠, 엄마!”조민영의 말투는 여전히 밝고 경쾌했고 진서준과 얘기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친구들 앞이든 부모님 앞이든, 조민영은 항상 이렇게 천진난만했다.“이 맹랑한 녀석,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바쁜가 본데, 오늘 밤 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조태희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조민영을 힐끔 쏘아보았다.오늘 연회는 양씨 가문에서 주최한 행사인지라 동북을 휘어잡을 수 있는 조태희조차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조씨 부부가 조민영을 데리고 연회에 입장하자마자 순식간에 조민영이 사라지니 적잖이 당황했던 것이다.“아빠, 그냥 옛 친구를 만나서 그랬지 뭐예요. 설마 내가 사고라도 칠까 봐 그러세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아시잖아요?”조민영은 혀를 살짝 내밀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조태희는 시선을 딸에게 고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옆에 있는 진서준에게 슬쩍 눈길을 보내며 자세히 관찰했다.보배 같은 딸이 남성 친구를 사귀는 일에 대해 조태희는 상당히 깐깐한 기준을 갖추고 있었다.“저 친구는 누구냐?”조태희는 진서준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고 그의 눈에는 엄격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내 친구예요. 내가 이전에 신농에 있을 때 아저씨가 날 많이 도와주셨어요.”조민영이 황급히 대답했다.“네 친구라고?”조태희는 다시금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을 친구로 뒀어?”진서준이 쓰고 있는 인피 면구 덕분에 그는 마흔이 넘은 중년처럼 보였고 나이로 따지면 확실히 조태희와 비슷한 연령대였다.보통 여자라면 이렇게 나이 많은 아저씨를 친구로 두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단, 그 아저씨의 돈을 보고 접근한 거라면 별개의 얘기였다.하지만 조민영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조태희는 자기 딸이 이런 사람과 접점이 있다는 게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아빠, 아저씨는 진짜 내 친구라니까요. 이름은 김평안이에요.”조민영은 아버지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진서준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진서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
서늘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는 황현호의 눈에 자신감이 어렸다.방금 자리를 비웠던 황현호는 사실 조력자를 청하러 간 것이었고 그 조력자는 아직 볼일이 남아 있어 아직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혹시 진서준이 몰래 빠져나갈까 봐 황현호는 다시 돌아와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던 중, 조민영의 아버지가 진서준에게 시비를 거는 장면을 목격한 황현호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참여한 것이다.“황 총각도 왔구나.”조태희가 황현호를 발견하자 싸늘했던 표정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대놓고 웃음을 터뜨리며 반가워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조태희의 태도가 분명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조태희가 진서준에게는 냉정하게 대하면서도 황현호에게는 훈훈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 모습은 사실 이상하지 않았다.자기 딸이 40대로 보이는 중년 남자와 어울리는 걸 좋아할 아버지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하물며 황현호는 으뜸가는 부자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었던지라 조태희는 당연히 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황현호를 볼 수밖에 없었다.조씨 가문은 동북 지역 최고의 명문대가이긴 했지만 그 재정 상태는 예전처럼 풍족하지 않았다.중공업과 탄광업에 기반을 둔 조씨 가문은 시대 변화에 따라 수익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만약 명주 황씨 가문과의 혼인 관계를 성사할 수 있다면 곤란한 처지에 머무른 조씨 가문에게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다.게다가 황현호는 황씨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였다.“태희 삼촌, 제가 예전에 신농산에 갔을 때 민영 씨를 만났거든요. 그때도 민영 씨가 이 중년 남자랑 같이 있었는데 전 민영 씨가 이 중년 남자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황현호는 조태희에게 공손한 태도로 웃으며 신농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물론 자기가 조민영에게 질척대며 불순한 의도를 가졌던 건 슬쩍 넘기며 언급하지 않았다.“제 실력이 부족한 탓에 민영 씨를 구할 수 없어 참으로 유감입니다.”황현호는 뻔뻔하게도 자책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황현호의
“민영 씨, 울지 마세요.”진서준은 손을 뻗어 조민영을 자기 곁으로 끌어당겼다.“이 자식, 허락도 없이 감히 내 딸을 건드려?”진서준이 조민영을 만지자 조태희는 더 격분했다.조태희는 이급 대종사다운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진서준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진서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작은 영광 한 줄기가 조민영과 조태희 사이에 나타났다.조태희 몸에서 뿜어나오는 천지를 삼킬 듯한 영기는 그 영광과 부딪치자마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이 광경을 본 조태희는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좀 하는군.”자기 대종사급 위압감을 손쉽게 막아낸 것을 보고 조태희는 진서준의 실력이 무시할 수 없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그래, 네 실력은 인정하지.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실력이어도 오늘은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할 거야!”조태희가 쌀쌀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이 광경을 본 황현호가 이 틈에 끼어들며 말했다.“태희 삼촌, 걱정 마세요. 방금 제 절친 양지천에 연락했습니다. 양 어르신 손자인 양지천은 오늘 연회 관리도 맡고 있지 않습니까. 이따가 양지천이 오면 이 남자를 내쫓도록 하죠.”황현호의 말을 들은 조태희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황 총각, 고맙네.”“별말씀을요, 태희 삼촌. 저도 이런 허세 부리며 어린 여자들을 속이는 사람은 정말 죽도록 싫습니다.”황현호는 진서준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명백히 진서준을 겨냥하고 있었다.이에 진서준은 황현호를 힐끗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 그 입 다물지 않으면 영원히 말 못 하게 될 수도 있어.”그러나 진서준의 위협에도 황현호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을 뿐이었다.영원히 말 못 하게 하다니, 이 남자가 설마 양씨 가문의 장원에서 자기 함부로 손을 댈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이봐 늙다리, 허세 부리느라 지겹지 않나? 내가 다 피곤할 지경이야. 신농에서 쫓겨난 폐물이 어디서 나불거리고 있어?”황현호는 거리낌 없이 진서준을 모욕하기 시작했다.“뭐라고? 황 총
오늘 밤, 배수정은 하늘색 비단 드레스를 입고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은백색 비녀로 고정한 모습이었다.평소 거의 화장하지 않던 배수정이었지만 오늘은 살짝 단장한 덕에 얼굴이 한층 화사해 보였다.배수정의 길고 가는 목이 공기 중에 드러나 있었고 약간의 한기에 닭살이 돋아난 모습이 진서준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그런 모습이 오히려 배수정을 더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보이게 했다.배수정은 양지천의 팔짱을 끼고 있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 누가 봐도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그런 배수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진서준을 보고 양지천의 눈에 한 줄기 냉기가 스쳤다.조태희 또한 진지한 목소리로 조민영을 꾸짖었다.“민영아, 이제 저 남자 본모습을 봤느냐? 더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넋을 놓는 저런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조민영 또한 배수정을 바라보는 진서준의 표정을 보았다.다행히 진서준의 눈에서 사심은 찾아볼 수 없었으나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이 느껴졌다.설마 아저씨가 저 여자를 아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아저씨, 저 여자랑 아는 사이예요?”조민영은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아니요, 모르는 사람이에요.”진서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배수정에게서 시선을 돌렸다.이미 배수정과의 인연을 끊기로 결심한 이상, 배수정이 누구를 남자친구로 만나든 더 이상 진서준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한편 배수정은 진서준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배수정은 이 중년 남자가 왠지 모르게 낯익게 느껴졌다.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배수정이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양 총각, 오늘 같은 날에 이런 사단을 만들어 미안하네.”조태희는 양지천에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사과는 제가 해야죠. 저희 양씨 가문이 제대로 하객을 확인하지 못한 탓에 이런 불청객이 입장하게 했으니 전적으로 다 저희 책임입니다.”양지천은 격식을 갖춘 신사처럼 깍듯하게 행동했다.그런 양지천과 황현호를 보며 조태희는 만족스럽게
“지천아, 저 녀석은 분명 초청장이 없을 거야.”황현호가 옆에서 불을 지폈다.“내가 아까 여기 올 때 입구에서 초청장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사람을 봤어. 아마 저 녀석이 훔쳐 간 거겠지.”그 말을 들은 양지천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양씨 가문의 초청장을 훔친 것은 절대 가벼운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이에 진서준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응했다.“초청장이라면 여기 있어.”그러고는 금박이 새겨진 초청장을 바닥에 던졌다.초청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 양지천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자기에게 그 초청장을 직접 줍게 하는 것은 양지천의 얼굴에 귀싸대기를 날리는 것 같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주워!”양지천은 분노를 터뜨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초청장을 원해서 줬더니 이젠 나더러 주우라고 해? 사람을 괴롭혀도 정도껏 해야 하지 않겠나?”진서준이 미소를 거두며 양지천을 노려보았다.“정도껏 해야 한다고?”양지천은 진서준의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진서준을 마음껏 무시하면 뭐 또 어쩔 건데? 양씨 가문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마지막으로 말할게. 얼른 주워!”분노한 양지천은 이를 악물고 치아 사이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조민영은 상황이 심각해지자 초청장을 줍기 위해 달려가려 했다.조민영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지만 이 팽팽한 분위기만은 알아챌 수 있었다.진서준이 지금 굴복하지 않으면 양씨 가문뿐만 아니라 조태희와 황현호까지 모두 진서준을 공격할 상황이었다.과거 진서준이 장릉 마을에서 조민영을 구해준 적이 있었으니 이제 조민영이 선뜻 나서서 진서준의 편을 들어줄 차례였다.“민영아!”조태희는 딸이 진서준을 도와 초청장을 주우려 하자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러나 조민영이 초청장을 줍기 전에 진서준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아 막았다.“민영 씨, 이 일엔 나서지 마세요.”“아저씨, 이 사단은 저 때문에 생긴 거잖아요. 제 탓으로 아저씨가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할 순 없어요...”조민영은 울먹이며 진심을 전했다.“억
노인이 다가오자 양지천은 마음속 분노를 억누르며 공손하게 말했다.“나 할아버지, 수고 좀 해 주십시오.”조태희는 노인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러다 갑자기 조태희의 눈에 공포가 스쳤다.“나영진이네!”무인에 대해 잘 모르는 황현호는 조태희의 말에 고개를 돌려 물었다.“태희 삼촌, 나영진이 누구예요?”조태희는 차가운 숨을 들이쉬며 눈앞의 노인에 관해 설명했다.“이분이 바로 나영진 노인이야. 20년 전, 나영진 노인은 사급 대종사였지. 그때 사급 대종사에 불과한 나영진 노인은 북쪽 지역 같은 등급 대종사들을 반쯤 쓸어버렸어. 당시 동북에서 두 번째로 잘 나가는 명문대가라 불리던 심씨 가문이 있었는데, 그 집안 사람 서른여섯 명이 하룻밤 사이에 전부 숨졌어. 그 후 국안부에서 조사단을 파견했으나 결국 아무런 결과도 내놓지 못했어. 하지만 당시 관계자들의 말로는 나영진 노인이 한 짓이라고 했었지. 그 일이 있은 뒤로 나영진 노인은 흔적을 감추고 다시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어.”조태희는 심씨 가문의 한 청년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이 사건이 더욱 기억에 남았다.심씨 가문의 실력은 조씨 가문에 미치지 못했지만 동북에서 조씨 가문을 제외한 최고의 가문이었다.나영진이 혼자서 심씨 가문 전체를 없앨 수 있으니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그리고 20여 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아마도 나영진의 실력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나영진은 조태희를 힐끗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네.”조태희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나영진 노인, 부디 이따가 제 딸이 다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나영진은 시선을 거두며 차분히 말했다.“최대한 여자애를 다치지 않게 해주마.”하룻밤 사이에 심씨 가문의 서른여섯 명을 죽인 나영진이 절대 선한 마음을 가진 신사일 리가 없었다.조태희가 이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조민영도 나영진에게 목숨을 잃
아침, 설표 특전대 기지.단잠에 빠져 있던 소정태와 고인권 등 사령관은 갑작스러운 군부의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8대 특전대 사령관들은 즉시 회의실에 집합했다.“어젯밤, 묘강에서 폭동이 발생했어. 그러나 배논국 군부가 폭동을 단숨에 진압하며 묘강은 다시 배논국의 영토로 돌아갔어.”상부의 이 한마디에 현장에 있던 여덟 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소정태 일행은 서남 국경에서 묘강의 사수들과 적지 않게 맞닥뜨린 경험이 있었다.다들 묘강의 사람들은 전부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미친놈일 뿐만 아니라 주술과 독충술까지 능숙히 다루는 존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그들은 자기들만의 군대와 탱크와 같은 대형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배논국 군부가 강제로 공격했다간 양측 모두 피바다가 될 게 뻔했다.그런데, 단 하룻밤 만에 묘강이 평정되다니 너무나 기묘한 일이었다.“혹시... 진 교관이 한 일이 아닐까?”고인권이 불쑥 입을 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여덟 사령관은 진서준이 묘강으로 갈 가능성을 두고 논쟁을 벌였었다.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렇게 어마어마한 소식이 터진 것이다.“설, 설마 그랬겠어? 진 교관님이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묘강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잖아?”누군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맞아. 그건 너무 황당한 얘기야. 게다가 진 교관이 대체 어떻게 묘강에 갔단 말이야? 그곳은 철통같이 방어되어 있어서 전신전 병사들조차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이야.”“난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고 봐.”소정태가 갑자기 말했다.“너희들 기억하지? 예전에 너희가 설표 특전대가 최고 특전대로 올라설 거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지? 근데 진 교관님 덕분에 우리는 그 어려운 걸 해냈어, 그것도 한 달도 안 걸려서 말이야. 지금도 난 똑같이 믿어. 진 교관님은 묘강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야.”소정태는 진서준에 대해 백 퍼센트 신뢰하고 있었다.소정태는 그야말로 진서준의 열렬한 팬이었다.“그럼, 진 교관님께 전화라도 걸어볼까
레이더 화면에 수많은 적기가 포착됐고 곧이어 포탄이 몇 발 날아왔다.조종사들은 반응할 틈도 없이 폭격을 정면으로 맞았다.쾅!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칠흑 같은 밤하늘에 거대한 불꽃이 튕기며 대낮처럼 환해졌다.지상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오스프리 전투기 두 대는 완전히 파괴되어 잔해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유문기는 도망치는 걸 멈추지 않았다.유문기가 두려워하는 건 오스프리 전투기가 아니라 바로 그 괴물 같은 존재, 진서준이었다.묘왕은 자기 비장 카드인 오스프리 전투기가 파괴된 것을 보며 분노로 눈이 뒤집혔다.“누가 한 짓이야? 어떤 미친놈이 감히 내 전투기를 부쉈어?”그 순간, 배논국 군대 로고가 새겨진 전투기 수십 대가 시야에 들어왔다.이 광경에 묘왕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아까 상황 좀 더 제대로 파악하고 행동할 걸...’전투기 편대가 먼저 도착하고 이어 대규모 부대가 들이닥쳤다.지도자를 잃은 묘강은 머리를 잃은 파리 떼처럼 혼란에 빠졌다.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진서준은 더 이상 이들과 놀아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진서준은 참선검을 손에 잡고 단 일격으로 묘왕의 허리를 두 동강 냈다.눈을 뜬 채 죽은 묘왕의 눈에는 끝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분명했다.그러나 아무리 억울해도 묘왕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는 있을 수 없었다.“날 죽여.”이때의 유기철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은 마치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 이른 것 같았지만 사실은 유기철이 본인이 아무리 애원해도 진서준이 살려주지 않을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넌 네 친조카까지 해쳤어. 널 만 번 죽여도 내 분노가 풀리지 않을 거야.”진서준의 얼굴은 여전히 냉랭했다.“난 널 죽이지 않겠어. 대신 널 평생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 살게 해주지.”그 말과 함께 진서준은 손바닥으로 유기철의 가슴을 내리쳤다.유기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유기철은 진서준이 자기를 죽이는 건 두렵지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난 진서준을 보자 유문기 일행은 순간 얼어붙었다.유문기와 묘왕은 내부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진서준은 그들의 공동의 적이었다.진서준이 살아있다면 그들 모두 죽을 운명이었다.유문기와 묘왕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묘왕과 유기철은 모든 걸 쏟아부었다.두 사람의 몸은 거의 한계에 다다랐고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너 폭탄에 맞아 죽은 줄 알았는데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야?”유문기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방금 폭탄이 터진 후, 묘왕 혼자만 폭발의 중심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본 유문기는 진서준이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실은 유문기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유문기의 예측은 현실을 완전히 빗나갔다.“네 생각에 그 포탄 따위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네 눈엔 내가 저 늙은 영감탱이만도 못해 보이나?”영감탱이는 당연히 묘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진서준, 네가 묘왕을 죽여준다면 내가 묘강의 재산 절반을 네게 주마. 어때?”진서준과 맞설 수 없음을 깨달은 유문기는 새로운 방식을 선택했다.바로 진서준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다.진서준을 자기편으로 영입하면 진서준이 자기를 건드릴 이유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묘강의 재산은 거의 배논국의 절반과 맞먹는 수준이었다.배논국은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국가였기에 그 재산은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였다.하지만 진서준에게 이 돈은 전혀 필요 없었다.진서준이 이번에 온 이유는 단 두 개, 유문기를 죽이고 묘왕을 없애기 위해서였다.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진서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더군다나 묘강의 돈은 대부분 불법적인 경로에서 온 더러운 돈이었다.그런 돈은 진서준이 원하지 않았다.유문기가 진서준을 설득하려는 걸 본 묘왕은 즉시 눈을 굴리며 외쳤다.“이봐 청년, 네가 저놈을 죽인다면 내가 묘왕의 자리를 네게 물려주겠어. 사실 너와 나 사이엔 그렇게 큰 원한도 없어. 유씨
묘왕의 온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옷은 다 찢어졌으며 고약한 타는 냄새가 났다.그 냄새는 묘왕의 옷 속에 숨어 있던 독충들이 조금 전의 고온에 의해 증발한 냄새였다.지금의 묘왕은 바람에 꺼져가는 촛불 같았고 누구든지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으려는 유문기는 유기철에게 소리쳤다.“아버지, 저놈을 죽여요! 저놈을 죽이면 우리는 묘강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유기철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내가 묘왕을 공격하라고?”유기철의 단전도 파괴되어 공격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제 단전도 저 진서준이란 자에게 쥐어박혀서 망가졌어요. 제가 공격할 수 있다면 왜 굳이 아버지를 시키겠어요?”유문기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유문기도 직접 전장에 나서서 묘왕을 죽이고 싶었다.그동안 유문기는 묘왕에게 개처럼 부려지며 살아왔다.때때로 독을 시험하는 일도 겪었는데 그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몇 년째 묘왕을 죽이고 싶었던 유문기는 드디어 적절한 기회를 잡았지만 아쉽게도 방금 진서준에게 단전이 파괴되어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다.“내 단전도 파괴된 거 잊었어?”유기철의 말에 유문기는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이걸 드시면 일시적으로 예전의 힘을 조금 되찾을 수 있습니다.”유기철은 약을 받아 들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이거 부작용 없겠지?”부작용이 없다면 유문기는 자기가 먼저 먹었을 것이다.“부작용 있습니다. 먹으면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폐인이 됩니다.”유문기는 솔직하게 부작용을 실토했다.“아버지. 지금 이게 우리 유일한 기회예요. 저놈을 죽이고 제가 묘왕이 되면 뼈가 다 부서져도 제가 아버지를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저놈 손에 죽을 겁니다.”유문기의 분석을 듣자 유미철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묘왕의 손에 죽거나 이 기회에 한 번 싸워보고 나중에라도 누군가 그를 돌봐 줄 수 있는 것,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유기철은 더 이상 망설이
묘왕의 허락을 받은 후, 두 명의 오스프리 전투기 조종사는 망설이지 않고 진서준을 조준 후 즉시 발포 버튼을 눌렀다.요란한 소리와 함께 끔찍한 불빛 두 개가 오스프리 전투기의 하단에서 솟아올랐고 미사일은 직선으로 진서준을 향해 날아갔다.“정말 목숨을 버리겠다는 거야?”진서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묘왕을 쳐다보았다.“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겠지!”묘왕은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처럼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두 사람은 모두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이 시점에서 물러나면 상대방이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미사일에 맞아 죽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주먹에 죽게 될 것이다.미사일이 당장 떨어져 폭발할 것 같은 시점에서도 두 사람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스승님!”유문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묘왕을 불렀다.“도망쳐! 멍하니 뭐 하고 있어?”유기철은 유문기를 끌고 급히 먼 곳으로 도망쳤다.쾅!미사일이 바닥에 떨어지자 그 무시무시한 힘이 주위 수백 미터를 순식간에 덮쳤다.유기철과 유문기는 이미 가장자리까지 도망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강력한 기폭에 휘말려 바닥에 사정없이 쓰러졌고 입과 코에서 피가 흐르며 처참한 모습을 보였다.유문기가 폭발 중심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는 걸 확인했다.유문기 부자가 가장자리에서 이렇게 심하게 다쳤으니 폭발 중심에 있던 진서준과 묘왕은 어땠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저놈이 죽었어, 드디어 죽었어!”유문기는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유문기가 입에 담은 저놈은 묘왕을 가리키는 건지, 진서준을 가리키는 건지 유기철은 분간할 수 없었다.“문기야, 얼른 떠나자.”유기철은 정신을 차리고 유문기를 잡아끌며 떠나려고 했다.“안 돼요. 난 이날을 정말 오래 기다렸단 말이에요.”유문기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며 얼굴에 끔찍한 미소를 떠올렸다.“늙다리가 오늘에 와서야 끝내 죽었네! 내가 널 이렇게 오래 모신 이유가 바로 네가 죽는 오늘을 위해서였어!”유문기는 거리낌 없이 호탕하
묘왕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체내의 선천강기를 돌려 방어 태세를 취했다.동시에 묘왕은 자기 몸에 숨겨둔 독충들을 풀어 진서준의 얼굴로 날려 보냈다.이 독충들이 가진 독은 전부 강력한 부식성을 지니고 있어 육급 이하의 선천 대종사 강기조차 이 독충들의 독성을 막아낼 수 없었다.독충과 진서준 사이의 거리가 반 미터도 채 남지 않았을 때, 진서준의 눈에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곧이어 그 불꽃이 하늘로 솟구치며 독충 무리를 덮쳤다.치지직...순간 고기를 구울 때 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독충들은 진서준이 내보낸 영화에 의해 몰살당했다.순식간에 가루로 변한 독충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빗물에 씻겨 사라졌다.이를 본 묘왕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그러나 묘왕은 지금 독충을 걱정할 여유조차 없었다.진서준의 양주먹이 이미 묘왕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오고 있기 때문이었다.묘왕 역시 자기 양 주먹을 내밀어 진서준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펑!두 사람의 주먹이 맞부딪히며 산이 무너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발밑의 지면이 지진이라도 난 듯 사방으로 갈라져 퍼져 나갔다.무시무시한 충격파에 머리 위로 떨어지던 빗물조차 접근하지 못했다.이를 꽉 악물고 있는 묘왕의 얼굴이 철판처럼 굳어졌다.묘왕은 산을 뒤엎는 듯한 공포스러운 힘이 주먹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지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게다가 묘왕의 주먹 끝 강기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반면, 진서준의 상태도 묘왕보다 크게 나아 보이지 않았다.백 년 가까이 살아온 묘왕의 내공과 실력은 역시나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우르릉!하늘에서 갑작스러운 천둥소리가 울렸다.번개의 섬광이 칠흑 같은 밤하늘을 찢어 잠깐의 백광을 드러냈다.곧이어 하늘에서 헬리콥터의 로터 소리가 들려왔다.묘왕과 정면으로 겨루고 있던 진서준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헬리콥터 두 대가 빠르게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묘왕과 속
비는 점점 거세졌고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빗물로 흠뻑 젖은 바닥에 쓰러진 유문기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단 한 방에 자기가 완전히 폐인이 되다니, 이 녀석의 실력이 대체 얼마나 강한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진서준은 유문기를 멍청이를 보듯이 바라보며 말했다.“너 같은 비겁한 수작질이나 하는 녀석이 감히 나랑 정면으로 겨룬다고? 널 쉽게 죽이고 싶지 않아서 봐주는 거야. 그게 아니었으면 너도 방금 그 탱크처럼 새까만 시체로 변했을 거야.”탱크조차 진서준의 일격을 당해내지 못했는데 하물며 겨우 종사 경지에 불과한 유문기가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지금 진서준에게 유문기를 죽이는 건 손바닥 뒤집는 일과도 같았다.하지만 그냥 죽이는 건 유문기에게 너무 가벼운 벌을 내리는 것과 같았다.진서준은 유문기의 뼈를 하나하나 산산이 부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두고 왜 굳이 짐승이 되려고 해?”짐승이 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너... 너 대체 누구야?”유문기의 눈알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같은 20대 청년인데 왜 이 녀석의 실력은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에 있는 거지?“너희 집 큰 짐승이 안 알려줬어?”진서준이 유기철을 가리켰다.“누굴 짐승이라는 거야? 너야말로 짐승이야!”유기철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분노에 차 욕을 내뱉었다.“유기명 삼촌이 네 목숨을 살려줬을 때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사람을 시켜 유정을 독살하려고 시도해? 네가 짐승이 아니면 뭔데? 짐승조차도 은혜를 알고 갚을 줄 알아. 넌 인간의 뇌를 가진 고등 동물인 주제에 자각도 없는 거야?”진서준은 유기철을 바라보며 섬뜩한 살기를 내뿜었다.“그건 그 여자가 죽어 마땅했기 때문이야!”유기철은 일말의 자책도 없이 계속 헛소리를 지껄였다.“다들 입 다물어!”묘왕이 분노의 외침을 터뜨리더니 곧이어 원한에 가득 찬 시선으로 진서준을 노려봤다.“이봐, 오늘 네가 무슨 이
“스승님, 지금 어떡해야 하죠?”유문기가 긴장한 기색으로 묻자 묘왕은 곧 평정심을 되찾으며 말했다.“당황하지 마. 우리에게는 아직 숨겨둔 비장의 카드가 있어. 오늘 저 녀석이 설령 지선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여기서 끝장날 거야. 게다가 방금 그 일격으로 꽤 체력을 소모했을 게 분명해. 오늘은 묘강의 모든 주민을 동원해서라도 저놈을 기어이 지치게 만들어야 해.”묘강에는 무려 3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있었고 그중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남자만 10만 명이 넘었다.이런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상대하려면 지선도 버거울 게 뻔했다.죽이지는 못해도 적어도 지쳐서 움직일 수 없게 할 수는 있었다.이게 바로 묘왕이 태연하게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그러나 진서준은 묘왕 일행에게 비장의 카드를 꺼낼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방금 참선검을 휘두르며 진서준은 곁눈질로 유기철을 발견했다.진서준이 발끝에 힘을 주고 허공에 뛰어오르자 그의 모습이 귀신처럼 제자리에서 사라졌다.사람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진서준은 이미 묘왕 일행 앞에 나타나 있었다.“너였구나!”유기철은 진서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확 변했다.“저 녀석을 알아?”묘왕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묘왕님, 이 사람이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진서준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녀석이 예전에 우리의 계획을 망쳤습니다.”유기철이 서둘러 진서준을 소개했다.눈앞의 청년이 진서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묘왕은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네놈이 내 오랜 계획을 그렇게 망쳐놓고 감히 혼자서 우리 묘강에 쳐들어와? 우리 묘강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묘왕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서준을 노려보며 버럭 화를 냈다.하지만 진서준은 묘왕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신 유기철을 차갑게 바라보며 은은한 살기를 드러냈다.유기철은 그 시선에 수만 마리 개미가 자기 몸을 기어다니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을 받았다.“유기철, 자기 친조카에게 독을 퍼뜨리는 네놈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짐승이야.”진서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탱크는 현대 전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존재 중 하나였고 말 그대로 전쟁 기계라 불릴 만했다.완전히 무장한 병사들이 대전차 무기가 없이 탱크를 마주하면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무도를 익힌 무인이라 해도 이런 존재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지금의 올기는 체내의 영기가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묘강에 들어왔을 때 탱크를 만났다면 한 번 싸워볼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모든 희망을 진서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진서준은 아래를 쓱 훑어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이제 넌 그만 물러나.”“알겠습니다!”올기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곧바로 몸을 줄여 진서준의 어깨 위로 돌아왔다.진서준은 몸을 천천히 놀려 기러기처럼 부드럽게 지면에 내려왔다.지면에 있는 사람들이 진서준의 움직임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세상에, 저 용 머리 위에 사람이 서 있었어!”“어머나, 그럼 아까 그 괴수가 주인이 있었단 말이야? 그럼 그 주인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람일까?”“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쩌겠어? 우리에겐 탱크가 있잖아. 게다가 전투기들도 곧 도착할 거라고.”놀라 두려워하는 사람도, 오만하게 웃는 사람도 있었다.한편, 묘왕과 유문기 두 사람은 여전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보아하니 저 녀석이 바로 그 짐승의 주인인가 보구나.”묘왕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저놈을 당장 죽여! 묘강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줘!”진서준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손바닥을 살짝 떨었다.그러자 참선검이 허공에 떠올라 진서준의 손으로 들어왔다.낯선 대한민국 청년을 보자 탱크 안에 있던 병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그들을 전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자가 겨우 스무 살 남짓의 청년이라고?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노인이라면 차라리 납득이라도 했을 것이다.“포격! 포격해!”지휘관의 목소리가 작전 통신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펑! 펑! 펑!포탄 세 발이 진서준이 서 있는 방향으로 동시에 발사되었다.포탄이 터지며 대지가 흔들리고 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