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돌아가려던 진서준의 걸음이 멈췄다. 진서준은 차라리 엘리사의 질문에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괜히 이 여자가 자기를 계속 물고 늘어지기라도 하면 귀찮아질 게 뻔했다.“제 이름은 김평안입니다.”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뭐라고요? 당신도 이름이 김평안이에요? 전에 진서준도 자기 이름이 김평안이라고 했거든요...”엘리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진서준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평온하게 설명했다.“저와 진서준은 나이 차이가 크게 나긴 하지만 굉장히 가까운 사이예요. 진서준은 적으로 돌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가끔 제 이름을 쓸 때가 있죠.”엘리사는 그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문 좀 열어줄래요? 안에 들어가서 진서준을 기다리고 싶어요.”엘리사는 진서준을 바라보며 간절히 부탁하는 말투로 말했다.용란 사람들이 자국의 공주가 이런 애원 섞인 말투로 대한민국 사람에게 말하는 걸 들었다면 아마도 충격이 너무 커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진서준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방금 강남으로 갔거든요.”“그래요? 그럼 진서준 씨 전화번호라도 줄 수 있나요?”“미안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진서준 본인의 허락 없이는 절대 줄 수 없으니까요.”진서준은 단호하게 거절했다.‘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꼴을 봐야 하지?’용란 공주가 왜 자꾸 자기를 찾는지 진서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설마 자기가 엘리사를 구해준 적이 있기 때문인가?사실 진서준은 처음에 엘리사를 구할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엘리사의 특수한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해줘야 했던 것이다.그때 엘리사를 구하기 위해 진서준은 목숨을 잃을 뻔했다.진서준의 태도가 너무 단호하자 엘리사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는 별장을 떠났다.엘리사가 떠나자 진서준은 그제야 거실로 돌아왔다.“또 그 용란 공주야? 왜 그 공주는 우리가 어디를 가도 따라다니지?”허윤진과 다른 여성들은 창문을 통해 엘리사를 목격했다.그리고 진서준과 엘리사 사이의 대화도 처음부터 마지
진서준은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렀다.둘째 날 오후, 진서준은 진혁의 전화를 받았다.“할아버지, 무슨 일이에요?”“오늘 밤 양씨 가문 노인의 생신 연회가 열릴 예정이야. 너도 참석할래?”진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지금 저는 인피면구를 쓰고 있어 별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요.”진서준이 진혁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진혁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말했다.“그래도 가보는 게 좋을 거야. 오늘 밤엔 거물급 인사들이 많이 올 거야. 너도 그 자리에 가서 그 사람들의 정체를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양씨 가문 가주의 생신 연회는 전국의 여러 가문이 앞다투어 참석하려고 경쟁하는 핫한 모임이었다.사대 가문 중 하나인 양씨 가문과 이런 방식으로 연결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지위는 급상승할 것이 분명했다.지방 가문들뿐만 아니라 강남의 서씨 가문, 서남의 유씨 가문 같은 명문대가도 참석할 예정이었다.“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밤에 가볼게요.”“초대장은 이미 네가 머무는 곳 앞에 두도록 했어.”“네? 누가 다녀갔나요?”진서준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이틀 동안 진서준은 계속 이 다락방 안에서 수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진서준의 현재 지각으로는 누군가가 문 앞에 다가오면 당연히 느껴야 했는데 누군가가 아무 소리도 없이 이 다락방에 다녀갔다는 사실이 진서준을 깜짝 놀라게 했다.전화를 끊은 후, 진서준은 곧바로 문 앞에 나가 보았다.문 앞 바닥에는 금박이 새겨진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초대장만 봐도 엄청난 가격으로 만들어진 느낌이 물씬 풍겼다.역시 대한민국에서 서열 1위에 놓인 최고 가문다운 스케일이었다.진서준은 초대장을 가슴에 넣고 차고로 향했고 이내 아우디 차 한 대를 선택해 양씨 가문 장원으로 향했다....월용정.양씨 가문 장원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산과 물이 어우러진 풍경은 옛날 사람의 시와 그림에서 본 듯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진서준이 차를 몰고 도착했을 때, 이미 주변에는 고급 차들이 즐비했다.눈에 들어오는 차들
“김평안!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렇게 또 만날 줄은 몰랐네.”황현호는 음침한 표정을 지으며 진서준과 조민영에게 다가갔다.방금 진서준을 본 순간, 황현호는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진서준은 한때 신농 테스트를 통과하고 순조롭게 선발되어 들어간 사람이었다.일단 신농에 들어간 무인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절대 신농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신농의 지옥 같은 처음 훈련을 버텨내지 못하고 죽든가 아니면 평생을 신농에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진서준처럼 신농에 잠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사람은 황현호도 처음 보았고 심지어 전에 이런 소문도 듣지 못했다.“이봐, 넌 도대체 어떻게 신농에서 나온 거냐? 설마 네 실력이 바닥을 쳐서 신농이 널 버리고 내보낸 거야?”황현호는 진서준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여기는 양씨 가문의 집안이니 진서준이 여기서 자기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황현호는 마음대로 진서준을 조롱해도 안전하다고 판단했다.진서준은 황현호를 한 번 쓱 쳐다보고 단 두 글자만 내뱉었다.“꺼져.”“껌딱지 같은 인간이 또 여기까지 따라와서 질척대네요.”조민영도 입술을 삐쭉 내밀며 황현호를 불쾌하게 바라보았다.이제 막 아저씨랑 단둘이 있을 수 있었는데 이 귀찮은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쳐버린 것이다.진서준에게 욕을 먹는 건 그렇다 쳐도 조민영에게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자 황현호는 속이 꽉 막히는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여태껏 어디 가든 호감형 존잘로 통한 자기가 조민영의 눈에는 왜 40대 아저씨만도 못 한 존재로 보이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신농에서 돌아온 후, 황현호는 이내 조민영의 정체를 알아냈다.동북 조씨 가문 가주의 딸이자 조기강의 조카라는 화려한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황현호의 황씨 가문이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 가문이라고 해도 이런 명문대가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황현호의 아버지도 현재 대한민국에 없으니 조씨
“아빠, 엄마!”조민영의 말투는 여전히 밝고 경쾌했고 진서준과 얘기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친구들 앞이든 부모님 앞이든, 조민영은 항상 이렇게 천진난만했다.“이 맹랑한 녀석,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바쁜가 본데, 오늘 밤 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조태희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조민영을 힐끔 쏘아보았다.오늘 연회는 양씨 가문에서 주최한 행사인지라 동북을 휘어잡을 수 있는 조태희조차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조씨 부부가 조민영을 데리고 연회에 입장하자마자 순식간에 조민영이 사라지니 적잖이 당황했던 것이다.“아빠, 그냥 옛 친구를 만나서 그랬지 뭐예요. 설마 내가 사고라도 칠까 봐 그러세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아시잖아요?”조민영은 혀를 살짝 내밀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조태희는 시선을 딸에게 고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옆에 있는 진서준에게 슬쩍 눈길을 보내며 자세히 관찰했다.보배 같은 딸이 남성 친구를 사귀는 일에 대해 조태희는 상당히 깐깐한 기준을 갖추고 있었다.“저 친구는 누구냐?”조태희는 진서준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고 그의 눈에는 엄격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내 친구예요. 내가 이전에 신농에 있을 때 아저씨가 날 많이 도와주셨어요.”조민영이 황급히 대답했다.“네 친구라고?”조태희는 다시금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을 친구로 뒀어?”진서준이 쓰고 있는 인피 면구 덕분에 그는 마흔이 넘은 중년처럼 보였고 나이로 따지면 확실히 조태희와 비슷한 연령대였다.보통 여자라면 이렇게 나이 많은 아저씨를 친구로 두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단, 그 아저씨의 돈을 보고 접근한 거라면 별개의 얘기였다.하지만 조민영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조태희는 자기 딸이 이런 사람과 접점이 있다는 게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아빠, 아저씨는 진짜 내 친구라니까요. 이름은 김평안이에요.”조민영은 아버지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진서준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진서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
서늘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는 황현호의 눈에 자신감이 어렸다.방금 자리를 비웠던 황현호는 사실 조력자를 청하러 간 것이었고 그 조력자는 아직 볼일이 남아 있어 아직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혹시 진서준이 몰래 빠져나갈까 봐 황현호는 다시 돌아와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던 중, 조민영의 아버지가 진서준에게 시비를 거는 장면을 목격한 황현호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참여한 것이다.“황 총각도 왔구나.”조태희가 황현호를 발견하자 싸늘했던 표정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대놓고 웃음을 터뜨리며 반가워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조태희의 태도가 분명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조태희가 진서준에게는 냉정하게 대하면서도 황현호에게는 훈훈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 모습은 사실 이상하지 않았다.자기 딸이 40대로 보이는 중년 남자와 어울리는 걸 좋아할 아버지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하물며 황현호는 으뜸가는 부자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었던지라 조태희는 당연히 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황현호를 볼 수밖에 없었다.조씨 가문은 동북 지역 최고의 명문대가이긴 했지만 그 재정 상태는 예전처럼 풍족하지 않았다.중공업과 탄광업에 기반을 둔 조씨 가문은 시대 변화에 따라 수익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만약 명주 황씨 가문과의 혼인 관계를 성사할 수 있다면 곤란한 처지에 머무른 조씨 가문에게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다.게다가 황현호는 황씨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였다.“태희 삼촌, 제가 예전에 신농산에 갔을 때 민영 씨를 만났거든요. 그때도 민영 씨가 이 중년 남자랑 같이 있었는데 전 민영 씨가 이 중년 남자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황현호는 조태희에게 공손한 태도로 웃으며 신농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물론 자기가 조민영에게 질척대며 불순한 의도를 가졌던 건 슬쩍 넘기며 언급하지 않았다.“제 실력이 부족한 탓에 민영 씨를 구할 수 없어 참으로 유감입니다.”황현호는 뻔뻔하게도 자책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황현호의
“민영 씨, 울지 마세요.”진서준은 손을 뻗어 조민영을 자기 곁으로 끌어당겼다.“이 자식, 허락도 없이 감히 내 딸을 건드려?”진서준이 조민영을 만지자 조태희는 더 격분했다.조태희는 이급 대종사다운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진서준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진서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작은 영광 한 줄기가 조민영과 조태희 사이에 나타났다.조태희 몸에서 뿜어나오는 천지를 삼킬 듯한 영기는 그 영광과 부딪치자마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이 광경을 본 조태희는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좀 하는군.”자기 대종사급 위압감을 손쉽게 막아낸 것을 보고 조태희는 진서준의 실력이 무시할 수 없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그래, 네 실력은 인정하지.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실력이어도 오늘은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할 거야!”조태희가 쌀쌀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이 광경을 본 황현호가 이 틈에 끼어들며 말했다.“태희 삼촌, 걱정 마세요. 방금 제 절친 양지천에 연락했습니다. 양 어르신 손자인 양지천은 오늘 연회 관리도 맡고 있지 않습니까. 이따가 양지천이 오면 이 남자를 내쫓도록 하죠.”황현호의 말을 들은 조태희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황 총각, 고맙네.”“별말씀을요, 태희 삼촌. 저도 이런 허세 부리며 어린 여자들을 속이는 사람은 정말 죽도록 싫습니다.”황현호는 진서준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명백히 진서준을 겨냥하고 있었다.이에 진서준은 황현호를 힐끗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 그 입 다물지 않으면 영원히 말 못 하게 될 수도 있어.”그러나 진서준의 위협에도 황현호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을 뿐이었다.영원히 말 못 하게 하다니, 이 남자가 설마 양씨 가문의 장원에서 자기 함부로 손을 댈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이봐 늙다리, 허세 부리느라 지겹지 않나? 내가 다 피곤할 지경이야. 신농에서 쫓겨난 폐물이 어디서 나불거리고 있어?”황현호는 거리낌 없이 진서준을 모욕하기 시작했다.“뭐라고? 황 총
오늘 밤, 배수정은 하늘색 비단 드레스를 입고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은백색 비녀로 고정한 모습이었다.평소 거의 화장하지 않던 배수정이었지만 오늘은 살짝 단장한 덕에 얼굴이 한층 화사해 보였다.배수정의 길고 가는 목이 공기 중에 드러나 있었고 약간의 한기에 닭살이 돋아난 모습이 진서준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그런 모습이 오히려 배수정을 더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보이게 했다.배수정은 양지천의 팔짱을 끼고 있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 누가 봐도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그런 배수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진서준을 보고 양지천의 눈에 한 줄기 냉기가 스쳤다.조태희 또한 진지한 목소리로 조민영을 꾸짖었다.“민영아, 이제 저 남자 본모습을 봤느냐? 더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넋을 놓는 저런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조민영 또한 배수정을 바라보는 진서준의 표정을 보았다.다행히 진서준의 눈에서 사심은 찾아볼 수 없었으나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이 느껴졌다.설마 아저씨가 저 여자를 아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아저씨, 저 여자랑 아는 사이예요?”조민영은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아니요, 모르는 사람이에요.”진서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배수정에게서 시선을 돌렸다.이미 배수정과의 인연을 끊기로 결심한 이상, 배수정이 누구를 남자친구로 만나든 더 이상 진서준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한편 배수정은 진서준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배수정은 이 중년 남자가 왠지 모르게 낯익게 느껴졌다.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배수정이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양 총각, 오늘 같은 날에 이런 사단을 만들어 미안하네.”조태희는 양지천에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사과는 제가 해야죠. 저희 양씨 가문이 제대로 하객을 확인하지 못한 탓에 이런 불청객이 입장하게 했으니 전적으로 다 저희 책임입니다.”양지천은 격식을 갖춘 신사처럼 깍듯하게 행동했다.그런 양지천과 황현호를 보며 조태희는 만족스럽게
“지천아, 저 녀석은 분명 초청장이 없을 거야.”황현호가 옆에서 불을 지폈다.“내가 아까 여기 올 때 입구에서 초청장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사람을 봤어. 아마 저 녀석이 훔쳐 간 거겠지.”그 말을 들은 양지천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양씨 가문의 초청장을 훔친 것은 절대 가벼운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이에 진서준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응했다.“초청장이라면 여기 있어.”그러고는 금박이 새겨진 초청장을 바닥에 던졌다.초청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 양지천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자기에게 그 초청장을 직접 줍게 하는 것은 양지천의 얼굴에 귀싸대기를 날리는 것 같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주워!”양지천은 분노를 터뜨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초청장을 원해서 줬더니 이젠 나더러 주우라고 해? 사람을 괴롭혀도 정도껏 해야 하지 않겠나?”진서준이 미소를 거두며 양지천을 노려보았다.“정도껏 해야 한다고?”양지천은 진서준의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진서준을 마음껏 무시하면 뭐 또 어쩔 건데? 양씨 가문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마지막으로 말할게. 얼른 주워!”분노한 양지천은 이를 악물고 치아 사이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조민영은 상황이 심각해지자 초청장을 줍기 위해 달려가려 했다.조민영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지만 이 팽팽한 분위기만은 알아챌 수 있었다.진서준이 지금 굴복하지 않으면 양씨 가문뿐만 아니라 조태희와 황현호까지 모두 진서준을 공격할 상황이었다.과거 진서준이 장릉 마을에서 조민영을 구해준 적이 있었으니 이제 조민영이 선뜻 나서서 진서준의 편을 들어줄 차례였다.“민영아!”조태희는 딸이 진서준을 도와 초청장을 주우려 하자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러나 조민영이 초청장을 줍기 전에 진서준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아 막았다.“민영 씨, 이 일엔 나서지 마세요.”“아저씨, 이 사단은 저 때문에 생긴 거잖아요. 제 탓으로 아저씨가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할 순 없어요...”조민영은 울먹이며 진심을 전했다.“억
“너 뭐라고 지껄였어? 또 한 대 더 맞으려고 작정했어?”허윤진의 차가운 표정을 보자 허준서는 겁먹고 한발 물러났다.허준서의 얼굴은 여전히 화끈거리고 아파서 말을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허준서는 씩씩거리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 허윤진. 이 한 대는 내가 꼭 기억할게. 너희 자매 두고 보자.”“왜? 사람이라도 불러 내게 복수라도 하자고 그래?”허윤진은 냉소하며 대꾸했다.“좋아, 그럼 얼른 불러 봐.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허윤진의 거만한 태도를 보자 허준서는 치를 떨며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허준서가 돌아서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눈앞에 누렁이가 한 마리 나타났다.허윤진을 실력으로 누를 수 없어도 허윤진이 기르는 개는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 허준서는 몇 걸음 다가가 누렁이에게 발길질했다.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누렁이는 허준서가 갑자기 공격해 오자 커다란 입을 벌려 허준서에게 달려들었다.우두둑!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허사연은 이 장면을 보고 이마에 손을 대고 미간을 찌푸렸다.허준서가 허윤진에게서 받은 화를 누렁이에게 풀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누렁이는 사실 단순한 개가 아니라 전에 진서준에게 훈련받은 대형 사자였다.비록 허사연 자매의 실력은 지금 큰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누렁이를 상대하기에는 둘이 힘을 합쳐도 역부족이었다.“아악!”발목이 물린 허준서는 극심한 통증에 울음을 터뜨리며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누렁이야, 그만 물어.”허사연은 인명 사고가 날까 걱정스러워 얼른 누렁이에게 명령했다.허사연의 명령에 누렁이는 그제야 발목을 물었던 입을 벌렸다.하지만 누렁이의 이빨에는 이미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허준서는 바닥에 엎드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펑펑 울고 있었다.문 앞의 경호원들도 처절한 비명을 듣고 급히 달려와 상황을 살폈다.허준서가 물린 것을 보고 경호원들은 허사연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선을 보냈다.“저분을 병원으로 데려다주세요.”허사연은 손을 내저으며 답답한
허준서가 다시 나타나자 허사연 자매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어젯밤 허준서의 행동은 허씨 가문 모두에게 크나큰 불쾌감을 주었다.“성태 삼촌, 안녕하세요. 사연아, 안녕.”허준서는 오자마자 허사연 일행에게 차례로 인사했다.허성태는 미소를 지으며 허사연에게 말했다.“젊은이들끼리 얘기해. 이 영감은 끼지 않을게.”말이 끝나자 허성태는 낚시 도구를 챙기고 별장 옆 호수로 낚시하러 갔다.허성태가 그렇게 급히 나가는 모습을 보자 허준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어젯밤 허사연의 남자친구는 평범한 사람이 틀림없었다.물론 그 남자가 어젯밤 데려온 여자도 연기하고 있는 거였다.허성태도 두 사람이 망신을 당할 걸 알았기에 여기서 체면을 구길 수 없었던 것이다.속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 허준서는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사연아, 네 남자친구는 어디 있어? 그 여자랑 황 장로님도 같이 데려오라고 얼른 전해. 난 여기서 네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을게.”허준서는 별장이 자기 집인 것처럼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넌 한발 늦었어. 진서준 일행은 비행기를 타고 강남으로 갔어.”허윤진은 허준서와 그의 여자친구를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뭐라고? 강남에 갔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허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그 사람이 강남에 간다고 해도 너희 허씨 가문 명성으로는 황 장로님을 청할 수 없어. 사연아, 내 말이 거칠게 들릴 수 있지만 잘 들어. 서울에선 너희 허씨 가문이 어느 정도 체면은 있어도 서울만 넘어가면 모든 걸 장담할 수 없어...”말을 마치며 허준서는 경멸의 미소를 지었다.물론 허준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명확했다.“뭐라고?”허윤진은 이를 악물고 허준서를 노려보았다.지금 허윤진의 성격은 이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진서준을 만나기 전이라면 허준서가 이렇게 허씨 가문을 모욕했으면 허윤진은 이미 경호원을 불러 허준서를 처리하라고 했을 것이다.친척이라고 해서 봐줄 필요는 없었다. 맞아야 할 사람은 맞아야 제정
이건 사실을 직접 허준서에게 알려주는 것보다 더 잔인한 방식이었다.이미 목적지에 다다른 허준서에게 발차기를 날려 출발 지점으로 되돌려버리는 방식은 중간에 허준서를 막아서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하지만 그 잔혹함을 잘 모르는 변희영은 살짝 분개하며 말했다.“그럼 황 장로는 헛걸음한 셈이잖아요?”황운재는 자기가 헛걸음이었다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하고 급히 말을 돌렸다.“괜찮습니다, 아가씨. 여기 이제 제가 필요한 일은 없는 것 같으니 다시 강남으로 돌아가겠습니다.”황운재가 급히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자 변희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황 장로, 하루 쉬고 가세요.”“안 됩니다. 강남에는 이상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한 명 있습니다. 시간을 지체할 순 없습니다.”황운재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강남에 황운재의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변희영은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환자가 누구죠?”진서준이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비록 성약당이 새롭게 개편되었지만 일반인들은 여전히 성약당의 장로급 인물의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황 장로를 부른 사람은 분명 강남에서 유명한 가문일 것이다.강남의 유명한 가문 중, 진씨 가문과 서씨 가문은 진서준도 알고 있었다.만약 진씨 가문이라면 진서준은 상관하지 않을 거지만 서씨 가문의 사람이면 진서준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서씨 가문 현 가주의 딸입니다.”황 장로가 진서준의 질문에 대답했다.“뭐라고요?”진서준의 눈동자가 확장되며 황 장로를 믿기지 않는 듯 쳐다보았다.진서준의 큰 반응에 황 장로는 깜짝 놀랐다.“진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서씨 가문 현 가주의 딸이라면, 서지은이 아닌가?시지은이 병에 걸렸다니, 그야말로 금시초문이었다.진서준은 황운재의 손목을 잡고 다급하게 물었다.“환자가 서지은이 맞습니까?”“네, 진 선생님도 혹시 아시나요?”황 장로가 진서준이 환자를 알자 깜짝 놀랐다.진서준은 서지은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듣고 마음이 다급해졌다.“무슨 병인가요?
아침 햇살이 창밖 나뭇잎을 뚫고 지나가며 산산이 부서져 진서준의 몸 위로 떨어졌다.“오빠, 밥 먹으러 나와!”진서라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여동생의 목소리에 진서준은 천천히 눈을 뜨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알았어!”진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며 진서라를 따라 1층 거실로 내려갔다. 조희선과 김연아는 이미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었다.아침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변희영의 전화가 울렸다.“위치를 보낼 테니 바로 그리로 오세요.”변희영은 전화를 끊고 진서준에게 휴대폰을 건네 허씨 가문 별장의 위치를 황운재에게 보내게 했다.“진짜 그 장로를 불렀어요?”진서준은 변희영의 행동에 살짝 놀랐다.어제는 변희영이 그냥 장난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당연하죠, 우리 성약당은 이제 예전과 달라 허준서 같은 돌팔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요.”변희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진서준은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사실 그 녀석이 돌팔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보통 사람을 깔보는 의사가 될 거예요. 그런 사람은 정말 당신들 성약당에 들어가면 안 되죠.”의사는 부모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만약 모든 의사가 허준서처럼 약삭빠른 사람이라면 성약당도 결국 다시 과거처럼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약삭빠른 사람이라고요? 그럼 더더욱 성약당에서 받아들일 수 없죠.”변희영은 쌀쌀한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자, 얼른 식사나 하죠. 성약당 새 장로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요.”아침 식사를 마친 후, 진서준은 변희영과 함께 허씨 가문으로 향했다.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황운재는 이미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황운재는 올해 예순이 넘은 백발의 노인이었다.황운재는 무인이 아니었지만 대신 뛰어난 의술과 높은 덕망을 가진 사람이었다.밤새 차를 타고 와서인지 황운재는 매우 피곤해 보였다.“아가씨, 진 선생님!”황운재는 진서준과 변희영을 보자마자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 앞에 공손히 다가갔다.황
허준서는 웃으며 믿지 않았다.“너 정말 연기 잘한다. 황 장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너 같은 계집이 어떻게 그런 분 전화번호를 알 수 있겠어?”변희영은 허준서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황운재에게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황 장로도 들었죠?”“네... 들었습니다. 아가씨는 지금 어디 계시는가요? 제가 오늘 저녁에 바로 운전해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황운재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이었다.황운재는 현장에 도착해서 허준서를 죽도록 두들겨 패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서울에 있어요. 도착하면 전화하세요.”변희영이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자 허준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웃었다.“계속해 봐, 왜 그만두는 거야? 네 기막힌 연기를 더 보고 싶어.”변희영은 냉랭하게 한마디 남겼다.“황운재가 내일 온대.”이때 허성태가 앞으로 나서며 중재하기 시작했다.“됐어, 더 이상 이런 재미없는 얘기 하지 말고 같이 식사나 하자.”미래의 장인어른이 이렇게 말하니 진서준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식탁에 앉자 아무도 허준서와 그의 여자친구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모두가 두 사람이 불편했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런 불편한 분위기기 계속되자 허준서는 진서준 일행이 자기를 질투하고 있다고 더욱 확신했다.저녁 식사를 끝낸 후, 진서준은 조희선과 다른 여자들을 데리고 함께 떠났고 허사연 자매는 집에 남았다.허사연 자매는 집에서 허성태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오랫동안 자매는 아버지와 이렇게 오붓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반면 허준서와 이청아는 허씨 가문의 별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5성급 호텔에 가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물론 두 사람이 머문 5성급 호텔도 사실 허씨 가문의 재산이라는 사실은 알 리가 없었다.“오빠, 그런 사람 때문에 화내지 마.”귀가하는 길에 진서라가 진서준을 위로했다.진서준은 그 말에 웃으며 답했다.“서라야, 네가 지나치게 걱정하는 거야. 내가 오늘 기분이 안 좋은 건 그 사람 때문이 아니야.”배수정의 일
허준서 같은 사람이 성약당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자 변희영은 순간 멈칫하며 자기 귀를 의심했다.“네가 성약당에 들어간다고?”변희영은 분명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물론이지, 너도 성약당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어?”허준서는 변희영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허준서는 눈앞의 여자가 어디서 본 사람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진서준은 눈앞의 광경이 우습기만 했다.성약당의 옛 당주 손녀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성약당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지, 그야말로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너 뭐가 그렇게 웃겨?”허준서는 진서준을 노려보며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너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모르고 자꾸 고개를 쳐 세우니 너무 웃겨서 그래.”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허준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진서준을 분노에 찬 눈빛으로 쳐다봤다.“이 자식이 지금 누구를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하는 거야? 난 곧 대한민국 의학계 정점에 설 남자야. 너 같은 쓰레기가 감히 날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해? 너야말로 바깥세상을 모르는 두꺼비 같은 놈이야.”허준서가 진서준을 거친 말로 모욕하자 허사연 일행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하지만 진서준은 허사연에게 눈짓하며 일단 참으라고 암시했다.변희영은 휴대폰을 꺼내 허준서에게 물었다.“누가 널 성약당에 초대했어?”“왜 그걸 묻는 거야? 말해도 네가 알 수 없잖아.”허준서는 팔짱을 끼고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변희영이 예쁘게 생기지만 않았다면 허준서는 이런 사회 최하층 주민과 말을 섞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네가 말하지 않으면 네가 사기 치는 게 맞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변희영은 허준서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허준서를 화나게 했다.그러자 변희영의 예상대로 허준서는 마침내 미끼를 덥석 물었다.허준서는 변희영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네 귀를 세우고 잘 들어, 날 초대한 사람은 성약당 새로운 장로 황운재야.”황운재는 변희영의 할아버지가 새로 발탁한 장로가 확
허준서는 차분하게 생각한 후 천천히 눈을 뜨고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준서야, 내 몸 상태가 어떻게 된 거야?”허준서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허성태가 급히 물었다.“삼촌, 삼촌 몸에 큰 문제가 있네요.”허준서는 마음이 아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허준서는 허성태의 상태를 더 심각하게 말할 작정이었다.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의술을 아는 건 허준서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허준서는 진서준이 의술을 안다는 헛소리는 믿지 않았다.“뭐? 무슨 큰 문제가 있다는 거야?”허성태가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또 물었다.허준서가 허성태의 친척이 아니었다면 허성태는 이미 사람을 불러 허준서를 별장에서 쫓아냈을 것이다.지금 허성태의 몸은 어느 때보다 더 건강한 상태였다.심지어 허성태는 대다수 젊은이보다도 건강 상태가 더 좋았다.“자세하게 설명하기엔 너무 많은 의학 용어가 포함돼서 제가 말해도 잘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빨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예요.”허준서의 말에 진실을 모르는 허사연 자매는 깜짝 놀랐다.“서준아, 아빠를 얼른 봐줘.”허사연이 진서준을 잡아당기며 말했다.하지만 진서준은 덤덤하게 웃으며 허사연의 손을 톡톡 쳤다.“아버님 몸은 괜찮아. 저 사람은 단지 겁을 주는 거야.”이 말을 듣자 허준서의 얼굴은 굳어졌고 이내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강남 명의당 수련생이고 곧 성약당에 들어갈 사람이야. 이래도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조금 전까지 긴장해 어쩔 바를 모르던 허사연도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허사연은 허준서보다는 진서준의 말을 더 믿기 때문이었다.이 세상에서 진서준의 말을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허사연일 것이다.“내가 거짓말인지 아닌지 어차피 믿지 않을 테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낫겠죠?”진서준은 휴대폰을 꺼냈다.“뭘 하려고요? 설마 여기 시내 의사를 부를 생각인가요?”허준서는 진서준의 말이 우스꽝스러웠
허준서가 대한민국의 성약당을 언급하자 허사연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들어본 적 있어, 왜?”허사연이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하자 허준서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했다.허사연이 들어본 적이 없다면 허준서는 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 고귀한 신분을 자랑할 방법이 없었을 것 같았다.허준서의 집안은 허성태 집안과 친척 관계였다.오랜 세월 동안 두 집안은 서로 왕래가 없었지만 허준서는 허성태가 이 지역에서 으뜸가는 부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반면 허준서의 집안은 그곳에서 비교적 평범하고 재력도 그다지 강하지 않아 허성태 집안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허성태 집안이 부럽지 않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하지만 허준서의 가족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한 번도 허성태에게 돈을 빌리러 가지 않았다.언젠가는 자기 집안 사람이 출세해서 허성태 앞에서 실컷 잘난 척하고 싶었다.이번에 허준서가 온 것도 자기가 앞으로 갖게 될 신분을 자랑하려는 것이었다.“성약당이 얼마 전 대규모로 제자를 모집했어.”허준서는 보이차를 한 모금 마시며 빙그레 웃으며 설명했다.그 전에 진서준이 성약당의 몇몇 장로들을 처치했기 때문에 많은 성약당 제자들이 겁에 질려 자발적으로 탈퇴했다.성약당은 대한민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절대 망할 수 없었다.이후 성약당의 옛 당주 변지산은 국안부의 한 호국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변지산은 그 호국장군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대한민국에서 덕망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집해 달라고 부탁했다.재능이 충분한 사람은 심지어 변지산의 제자가 될 수도 있었다.허준서는 운 좋게 선정되어 얼마 후 성약당에서 수련하게 되었다.“내 능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지만 운 좋게 성약당에서 수련하게 되었어. 게다가 성약당의 옛 당주가 능력 있는 사람을 직접 선발한다고 들었어. 운 좋게 당주의 제자가 되면 너희 집안도 우리 집안 덕분에 대박 날 거야.”허준서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침을 튕겨가며 자랑을 늘어놓았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무슨 상황인지 이
허윤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사실 혈연관계라고 해도 거의 없다고 보면 돼. 우리 아빠의 사촌 형 아들이거든.”진서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허윤진의 설명을 들으니 그다지 끈끈한 혈연관계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친척인데 함부로 내쫓을 수도 없는 법이었다.“가자, 들어가서 보자.”진서준은 허윤진과 함께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거실에 들어오자마자 허윤진은 슬며시 진서준의 손목을 놓고 자연스레 거리를 두었다.“서준아, 내가 소개할게. 이쪽은 먼 친척 오빠 허준서야. 그리고 이쪽은 오빠 여자친구 이청아야.”허사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에게 그 둘을 소개했다.진서준은 허준서를 쓱 훑어보았다. 외모는 잘생긴 편이었고 차려입은 옷도 꽤 비싼 편이어서 왠지 평범한 가정 출신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리고 허준서의 여자친구 이청아는 화려하게 꾸민 모습으로 남자들의 시선을 끌 만한 스타일이었다.“이쪽은 진서준이라고 해, 내 남자친구야.”“이 사람이 네 남자친구라고?”허준서의 눈빛에는 은근히 깔보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물론 잘 숨겨져 있었지만 그 미묘한 눈빛을 진서준은 눈치챌 수 있었다.진서준의 평범한 옷차림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허준서의 태도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좀 너무 평범하지 않나? 물론 평범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네가 그래도 고귀한 신분이잖아. 내가 보건대 너희 둘 사이에 큰 격차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지금은 괜찮더라도 나중엔 분명 그쪽으로 문제가 생길 거야.”허준서가 빙빙 돌려서 말했지만 속내는 진서준의 평범한 신분을 깔보고 있었다.허준서의 생각은 단순했다. 돈 있는 사람은 당연히 돈 있는 사람과 어울려야지 가난하지만 잘생긴 남자와 사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허준서는 허사연이 진서준의 외모만 보고 반한 거라고 생각했다.허준서의 말에 진서준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방금 배수정이 떠나간 터라 진서준의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하지만 허성태의 체면을 생각해 속에 올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