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 이 녀석이 찾아온 목적은 단순하지 않을 겁니다...”진서준이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너희들이야말로 ‘찾아온’ 사람들이겠지.”“여기는 대한민국의 영토야!”해리스는 화가 나서 얼굴이 지지 벌게서 목에 핏대를 세워 진서준을 향해 외쳐댔다.“이 별장은 오늘 우리가 돈 주고 산 거야!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이미 우리의 사적 재산이란 말이다!”설사 해리스 그들이 이 별장을 샀다 하더라도, 진서준의 눈에는 이곳 역시 대한민국의 영토인 것이었다.“너 말대로 한다면, 내가 돈을 줘서 네 나라 토지를 산다면, 네 나라 이름을 내 이름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이네?”진서준이 코웃음을 쳤다.“이건 완전히 억지 논리야!”해리스의 불끈 쥔 두 주먹에서 삐걱삐걱 뼈마디가 끊어진 듯한 소리가 났다.등 뒤에 있는 엘리사만 아니었다면, 해리스의 주먹은 벌써 진서준에게 날렸을 것이었다.“공주님, 저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들었지요?”“저 녀석은 무식한 오랑캐입니다!”‘공주님?’이 호칭을 들은 진서준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살짝 스쳤다.진서준은 이 여자가 해외 어떤 귀족의 따님인가 했었다.“해리스, 뒤로 물러가거라.”엘리사가 냉정하게 명령했다.이 멍청한 놈, 내 신분을 폭로하다니!“하지만...”“어서 물러나지 못해?”엘리사는 카리스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거실의 분위기는 빙점까지 내려갔다.엘리사의 싸늘한 얼굴은 본 해리스는 주눅이 든 채, 엘리사의 등 뒤로 물러섰지만, 두 눈은 뚫어지게 진서준을 노려보았다.해리스가 뒤로 물러서자 진서준은 그제야 엘리사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녀의 조각 미모에는 메이크업 흔적이 전혀 없었으며 피부도 눈부시게 하얗다. 그녀는마치 예쁜 도자기 인형과 같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귀티였다.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도도하고 고귀한 느낌을 주었다.이내 진서준의 표정은 고요한 물처럼 평온해졌다.이에 조용히 진서준을 지켜보던 엘리사는 약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해리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공주님이 이렇게 적극적인데 이 녀석이 감히 거절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이봐, 너 지금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거지? 한 번만 더 거절해 봐. 명령을 거역해서라도 널 죽여버리겠어!”해리스가 분노에 차서 외쳤다.엘리사도 사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얼굴은 둘째 치고, 공주라는 신분만으로도 무수한 남자들이 앞다투어 데이트 신청을 하며 줄 서서 그녀와의 만남을 갈망했었다.그런데 지금은 엘리사가 신분을 낮추어 이렇게 직접 찾아왔는데도 진서준은 거절에 거절을 거듭하고 있다.하지만 심기가 아무리 불편해도 엘리사는 황실 교육을 받고 자랐던 터라 그 불쾌함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그만해요, 해리스. 우리 용란과 대한민국은 문화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요. 아무래도 우리가 조금 무례했던 것 같아요.”엘리사는 해리스를 제지하고 다시 진서준에게 질문을 던졌다.“실례지만, 이름이 뭐예요?”엘리사가 진서준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그러자 진서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설마 몰라서 묻는 건가요?”이 두 사람이 자기 신분을 모른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그렇다면 자기를 찾아온 이유가 정말 그냥 밥이나 먹자는 건지 진서준은 의혹이 들기 시작했다.진서준은 요즘 누군가의 감시를 받아며 살아왔던지라 습관적으로 의심이 많아졌다.“진짜 몰라서 묻는 거예요.”엘리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내 이름은... 김평안입니다.”진서준이 서슴없이 가짜 이름으로 답했다.진서준이 거짓말을 하는 걸 보고 엘리사는 진서준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김! 평! 안!”엘리사가 또박또박 진서준의 이름을 되뇌었고 예쁜 두 눈은 반달처럼 휘어졌다.“안녕하세요, 저는 엘리사입니다.”엘리사가 손을 내밀며 꽤 전통적인 인사법을 했다.그런데 이 전통적인 인사법도 엘리사 공주가 하면 열에 아홉은 감격스러워 어쩔 바를 모를 것이었다.진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거절하기도 미안해서 손끝으로 가볍게 터치
진서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해리스는 지금처럼 긴장하지 않았을 것이다.혈귀 백작 두 명이 따라온다 해도 자기 실력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제 실력이 자기와 비슷한 진서준이라는 변수가 생겼다.만약 그 혈귀 백작 두 명이 쫓아오고 진서준이 틈타 엘리사 공주를 해치려고 한다면 자기 실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내일 아침에 돌아갈 수는 있지만 오늘 밤의 방문은 더 이상 간섭하지 마시죠.”엘리사도 해리스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한발 물러섰다.원래는 강남에서 며칠 더 머무르며 천천히 구경하다가 무도 교류회가 시작될 때쯤에나 경성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이었다.“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반드시 공주님 옆을 지키겠습니다.”해리스가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안 되죠. 해리스 씨는 분위기만 망칠 거예요. 게다가 진서준 씨는 나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어요.”엘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 녀석이 악의가 없다는 걸 어떻게 아시죠?”해리스는 혀를 차며 물었다.“눈은 마음의 창이잖아죠. 진서준 씨가 날 볼 때 눈빛은 아주 맑았어요. 여기까지만 해두죠. 나도 더 이상 얘기하려니 피곤해요. 나 가볼게요.”엘리사는 곧바로 진서준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엘리사가 혼자 따라오는 것을 본 진서준은 조금 놀랐다.“경호원은 안 데리고 오는 건가요?”“해리스 씨가 오면 분위기만 망칠 테니까요. 난 당신의 가족들이 해리스 씨 때문에 기분 좋은 하루를 망치길 원하지 않아요.”엘리사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진서준은 그 말에 가볍게 웃었다.“그럼 내가 엘리사 씨에게 무례하게 굴면 어쩌려고요? 당신은 외국의 공주잖아요. 내가 당신을 납치하면 앞으로 평생 먹고사는 걱정은 없겠네요.”물론 그럴 용기가 있느냐가 문제겠지만 돈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미처 쓰지도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용란은 국제적으로 강대한 국가였고 군사력과 경제력이 막강한 나라였다.지구에서 살 마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감히 엘리사 공주를 납치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진서준 씨
엘리사는 공주라는 신분이 있지만, 그 또한 평범한 여성이었다.아까 진서준이 여러 번 핑계를 대며 엘리사의 방문을 거절했을 때, 엘리사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불만이 쌓였다.그래서 진서준의 친구가 이름을 잘못 부른 것을 빌미로 진서준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역시나 엘리사의 말을 들은 진서준의 얼굴에는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스쳤다.“그래요, 내 이름은 김평안이에요. 진서준은 어릴 때 불리던 별명이고요... 당신은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어릴 적 별명을 짓는 전통을 모를 수 있죠.”하지만 진서준은 짧은 순간에 머리를 굴려 재빨리 변명했다.“그래요? 그런데 당신 성씨가 좀 특이한 것 같은데요.”엘리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진서준을 조용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난 대한민국 문화에 대해 깊게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성씨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이 점은 우리 용란 국가와 비슷한 것 같네요.”엘리사의 쉬지 않고 들이대는 공격적인 태도에 허윤진이 재빨리 진서준을 변호했다.“당신이 뭔데 참견이죠? 이 사람이 진서준이든 김평안이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물론 상관있죠. 난 진서준 씨 친한 친구거든요.”엘리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난 형부한테 외국인 친구가 있다는 거 처음 듣는데요?”허윤진은 그 말에 즉시 머리를 돌려 진서준을 쳐다보며 따졌다.허윤진은 절대로 낯선 외국 여자가 진서준을 넘보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이분은 옆집에 살아. 아까 그 중년 남자가 이분 경호원이야. 나도 이분을 방금 알게 됐어.”진서준은 옆집 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무슨 일이야?”그때, 허사연과 다른 가족들도 별장에서 나왔고 마당에 서 있는 서양 여성을 보자 모두가 순간 멍해졌다.“이분들이 다 진서준 씨 가족인가요? 대한민국은 일부다처제가 금지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엘리사는 또다시 진서준을 난감한 처지에 놓일 질문을 던졌다.진서준의 얼굴은 순간 붉으락푸르락해졌다.‘이게 한 나라 공주라는
“아까 그 여자는 용란의 공주야.”허윤진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그 여자가 공주라고요?”“아까 그 여자한테서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어요.”허사연이 담담하게 말했다.“그 이국 공주가 왜 당신을 찾아왔죠?”김연아가 진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설마 그 여자와 하룻밤 보내놓고 책임지기 싫다고 하는 건 아니죠?”진서준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김연아 씨, 그런 농담은 하지 마세요. 오늘 오후에 처음 만난 사이예요.”김연아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진서준의 당황한 모습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키득 웃었다.허윤진은 진서준의 해명을 듣자 질투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처음 만났으면 어때요? 외국 여자들은 대개 자유분방하잖아요. 그 여자가 먼저 형부를 찾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찾아왔다면 분명 뭔가 목적이나 이유가 있을 것이다.하지만 진서준은 엘리사가 왜 자기를 찾아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엘리사라는 이름조차도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진서준이 가명을 사용할 수 있듯, 엘리사도 충분히 가명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었다.“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진서준은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며 말했다.“알았어요, 우린 농담한 거예요. 진서준 씨가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 다 알아요.”허사연이 진서준의 높게 쳐든 손을 잡아 내리며 웃었다.“하지만 공주를 진서준 씨 여자로 만든다면, 진서준 씨 실력을 인정할게요.”허사연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진서준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 이국 공주와 얽히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다들 얘기를 좀 더 나눈 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조희선이 여기서 지내고 있어 허사연은 진서준과 한 침대를 쓰는 게 부끄러웠다.조희선에게 자기 행동이 안 좋게 비쳐 자기에 대한 평가가 낙하산을 탈까 봐 신경이 쓰였다....밤은 쌀쌀했다.운대산 별장 밖,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박쥐 같은 그림자
해리스는 별장에 들어선 브래드를 보자마자 입고 있던 정장이 터질 정도로 온몸의 근육이 순식간에 팽팽하게 팽창되었다.해리스와 브래드는 오랜 앙숙이었다.용란에 있을 때부터 해리스는 브래드를 끈질기게 추적했었다.단순한 실력만 놓고 보면 브래드가 해리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다만 브래드는 혈수사였기 때문에 그 속도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박쥐처럼 어마어마하게 빨랐다.특히 밤이 되면 브래드의 붉은 눈동자는 어떤 어둠에도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해리스는 항상 브래드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번에 브래드가 직접 별장에 찾아왔다. 해리스가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브래드의 목적이 뭔지 알 수 있었다.“브래드, 공주님을 깨우기 전에 여기서 썩 물러나는 게 좋을 거야.”해리스는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브래드를 노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협했다.“내가 여기 온 건 바로 그 공주님을 위해서야.”브래드는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엘리사 공주의 피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진미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지 궁금하네...”“네놈이 공주님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네놈이 어디로 도망치든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해리스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위협했지만 주동적으로 공격을 개시하지는 않았다.그 이유도 간단했다. 브래드 혼자서 온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혈수사도 함께 있다는 걸 해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해리스가 먼저 선제공격을 개시하면 이 두 혈수사는 분명 호랑이를 산에서 유인하는 계략을 쓸 것이다.브래드는 해리스가 제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비웃듯 미소 지었다.“해리스, 예전엔 나만 보면 죽일 듯이 쫓아오더니 오늘은 왜 거북이처럼 움츠리고 있는 거야? 네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내가 마음껏 즐기도록 할까?”브래드는 해리스에게 공격하지 않고 대신 거실의 가구를 부수기 시작했다.쿵쾅, 쿵쾅!연이어 들려오는 소음은 심지어 잠을 자던 진서준까지 잠에서 깨게 했다.“저 여자가 이 밤중에 왜 저
“맞아요, 저희 두목이 공주님을 만나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군요.”브래드는 엘리사와 오래된 친구인 것처럼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난 볼 일이 많아 그럴 시간 없어요. 당신 두목이 날 보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 하세요.”가식적인 브래드의 태도에 엘리사는 한치의 여지도 없이 냉랭하게 대꾸했다.이 혈수사들이 무슨 속셈인지 엘리사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용란에 있을 때, 혈수사들은 이미 엘리사의 아버지를 찾아와 용란 황실 호위대를 대한민국의 용멸 계획에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엘리사의 아버지가 이를 거부했던 적이 있었다.그 이후로 이 혈수사들은 엘리사를 인질로 삼아 용란 국왕을 협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미안하지만, 공주님에겐 지금 선택지가 없어요. 저와 함께 가셔야만 해요.”브래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우리 공주님 말씀 못 들었어? 당장 꺼지지 않으면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해리스는 겉으론 위협적인 모습으로 브래드에게 소리쳤다.지금 해리스가 할 수 있는 건 위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싸움이 진짜 벌어진다면 브래드는 어떻게든 해리스를 붙잡아 두고, 그 사이에 브래드의 동료가 엘리사를 납치하려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엘리사가 납치당하면 용란 국왕은 결국 혈수사들에게 굴복하고 용란 황실 호위대도 용멸 계획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용란과 대한민국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란 국왕은 그의 친위대를 용멸 계획에 포함하고 싶지 않았다.만약 이 계획이 대한민국에 발각된다면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전면전으로 치닫는다면 다른 나라들은 분명히 강 건너 불구경할 것이고 용란을 도와줄 국가는 없을 것이다.브래드와 해리스가 대치하는 사이, 지엔은 이미 몰래 2층 창문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브래드는 지엔이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하고 돌연 해리스에게 달려들었다.“잘 됐군.”해리스는 체내의 모든 힘을 주먹에 집중했다.해리스는 한 방에 브래드를 쓰러뜨리고 브래드의 목
브래드는 온몸을 감싸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그 쌀쌀한 기운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브래드는 해리스가 빠른 걸음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브래드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는 해리스가 당연히 자기를 무시한 채 지엔을 쫓아갈 거라고 여겼다.“당장 아까 그 녀석에게 공주님을 무사히 돌려보내라고 전해. 그렇지 않으면 네 뼈를 하나하나씩 부러뜨려 줄 테니.”해리스는 한 손으로 브래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의 머리를 벽에 처박았다.브래드의 심장은 밀려오는 긴장감에 맹렬하게 뛰었고 가까스로 진정한 브래드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맘대로 날 고문해 봐. 내 목숨은 어차피 별 가치 없으니까.”브래드는 해리스가 엘리사에게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다.엘리사가 혈수사들의 손에 있는 한, 해리스는 절대 자기를 해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우리가 공주님을 죽일 수는 없겠지만 팔 하나나 다리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부러뜨릴 수 있지.”“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해리스는 브래드의 복부에 주먹을 내리꽂았다.푸흡...순간, 브래드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혈수사의 피는 일반인보다 훨씬 더 강렬한 비린내가 나서 이내 거실 전체에 짙은 피비린내가 퍼졌다.“공주님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치면 우리 용란은 너희 혈수사들을 전부 쫓아낼 거야.”해리스는 분노에 차서 외쳤다.“그럼 용란은 모든 혈수사들의 적이 되겠네.”브래드는 피를 뱉어내며 해리스에게 비웃음을 날렸다.“내가 구라를 치는 것 같아? 진짜 한 번 우리 용란과 전면전을 벌여 볼래?”브래드의 오만한 태도에 해리스는 그의 목을 당장이라도 비틀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었다. 오직 브래드만이 엘리사가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해리스는 굳은 표정으로 잠시 고민한 뒤, 결국 주먹을 한 번 더 휘둘러 브래드를 기절시켰다.그리고 그 길로 급히 별장을 나서 곧장 진서준이 머무는 별장으로 향했다.해리스는 깊게 숨을 들이쉬
황예은이 옷을 다 갈아입자 서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을 찾으러 갔다.“서준아, 예은 언니가 좀 화난 것 같으니까 이따가 해명할 때 되도록 조심해.”서지은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알았어.”진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은 조심하라는 말을 다시 되새겼다.만약 상대가 너무 무례하게 굴면 진서준도 결코 양보하며 자세를 낮추지 않을 예정이었다.문제는 자기가 일부러 실수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진서준은 황예은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들어간 게 아니었다.게다가 진서준은 황예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진서준 씨, 아까 지은한테서 들었는데, 진서준 씨가 저를 구했다고 하던데요.”황예은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어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그 눈빛과 태도는 마치 왕좌에 앉은 여왕처럼 고압적이었다.이는 오랫동안 높은 자리를 지키며 형성된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황경영이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황예은은 회사 업무의 일부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회사의 지도자, 그것도 여성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그러니 황예은의 성격도 강인하고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황예은이 이사장으로 올라간 후, 회사 내에서 황예은의 이름만 들어도 직원들이 벌벌 떨곤 했다.“맞아요. 제가 구했습니다.”진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황예은 맞은편에 앉았다.그런데 앉고 나서야 진서준은 후회했다.황예은이 입은 옷은 목선이 매우 낮았다.비록 황예은이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앉아 있었지만 풍만한 가슴이 살짝 드러나 있었고 그 모습이 진서준의 시야에 그대로 들어왔다.당혹한 모습을 감추려고 진서준은 뒤로 기대어 눈을 감았다.하지만 이 자세는 상대방에게 매우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황예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대화할 때 이런 태도로 임하는 것은 큰 실례였다.진서준이 소파에 기대 누운 모습을 보자 황예은의 마음속에서 잠잠했던 분노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진서준 씨는 다른 사람
별장에서 황예은은 이미 깨어난 상태였다.다만 지금 황예은의 몸에는 옷이 거의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상반신에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 속옷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이 속옷은 서지은이 가져온 속옷이었고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새것이었다.그리고 하반신에는 아까 진서준이 마사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다.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두 여자는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황예은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남자를 보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황예은의 차가운 눈빛만으로도 지금 심정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황예은은 자기 알몸을 보고 있는 이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황예은은 사실 이번이 진서준에게 두 번째로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순간이란 걸 몰랐다.“서준아, 왜 노크하지 않고 그냥 들어왔어...”서지은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서지은은 진서준이 약왕 이용진과 저녁 식사를 오래 하고 밤늦게나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서준이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이다.“언제까지 더 볼 생각이야?”황예은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진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린 뒤 말했다.“먼저 나가 있을게. 옷을 다 갈아입었으면 날 불러.”진서준이 나간 뒤, 황예은은 서지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 누구야?”“진서준이에요. 제 남자친구거든요.”서지은이 솔직하게 대답하며 한마디 보탰다.“예은 언니, 사실 언니 목숨도 진서준이 구한 거예요.”그 말을 듣자 황예은의 눈에서 뿜어나오던 냉기가 다소 누그러졌다.어쨌든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너무 차가운 태도로 대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황예은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내 옷은 네가 벗긴 거야?”서지은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서준이 언니를 치료할 때 상황이 너무 위급해서 먼저 언니를 여기 데려온 거예요. 나도 여기 들어와 치료 과정을 볼 때 서준이 언니를 추행하는 줄 알았어
지금까지도 진서준은 박씨 가문의 의도가 오리무중이었다.하지만 박씨 가문의 일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진서준의 우선순위는 약재를 구하고 모든 정력을 간첩을 잡는 데 쏟아부어야 했다.호텔을 떠난 진서준은 이용진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30여 분을 달린 끝에 진서준 일행은 마침내 이용진의 장원에 도착했다.이용진의 장원 면적은 서씨 가문 것만큼 크지 않았지만 화려함만큼은 서씨 가문을 능가할 기세였다.각종 명인의 고화와 진귀한 보물들이 온 사방에 진열되어 있었다.이 모든 보물은 하나하나가 최소 10억 이상의 진품이었고 적어도 진서준이 자세히 살펴본 결과 위조품은 하나도 없었다.이 보물들만 해도 자산 가치가 조 단위를 뛰어넘을 될 터였다.“용존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만 하세요.”이용진이 호탕한 어조로 말했다.“난 이런 것들에는 관심 없습니다.”진서준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렇군요...”이용진은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돈을 통해 진서준과의 관계를 더 가까이 만들고자 했던 이용진의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진서준과 친분이 두터워지면 나중에 치료를 부탁하기도 훨씬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서준은 이용진의 속셈을 꿰뚫어 본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약왕님 체내 내상이 다 나으면 매주 두 번씩 무도를 연마하고 한 달에 다른 사람과 한 번 실력을 겨루는 수준으로 수련하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약왕님 무도 실력도 늘어날 뿐 아니라 건강에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알겠습니다. 앞으로 꼭 용존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이용진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수많은 별장을 지나 진서준은 이용진을 따라 규모가 어마어마한 냉장실로 들어갔다.냉장실 안에는 사람 키 절반 정도 되는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각 기둥 위에는 희귀한 약재들이 놓여 있었고 방탄유리로 보호되고 있었다.진서준이 자세히 둘러보니 여기에 진열된 약재는 성약당의 것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희귀성만큼은 성약당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 사람은 바로 어제 서울시에서 체포되었던 박운기였다.진서준 역시 이렇게 빨리 박운기를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운기야, 저 사람 알아?”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박운기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바로 저놈이 사람들을 이끌고 내 계획을 망쳤습니다.”박운기가 이를 갈며 말했다.만약 진서준이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박운기의 계획은 이미 성공했을 것이다.그랬다면 박씨 가문으로 돌아갈 때는 차가운 시선 대신 온갖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이번에 서울시에서의 임무를 맡기 위해 박운기는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경쟁했다.모두가 보기에 이 임무는 그야말로 공을 세우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렇게 쉬운 임무를 박운기가 망쳐버렸다.망친 것도 모자라 박씨 가문은 관계를 동원해 박운기를 구출해야만 했다.공을 세워야 할 장사가 완전히 손해만 본 장사로 탈바꿈한 것이다.박씨 가문의 계획을 망친 장본인이 진서준이라는 사실을 알자 중년 남자는 진서준을 쓱 훑어보고는 냉랭하게 비웃었다.“전설 속의 용존님, 역시 이름값 제대로 하시는군요.”진서준은 그 남자를 힐끗 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진서준이 자기를 무시하자 중년 남자의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잠깐 스쳤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약왕님은 언제부터 용존님과 친구가 되셨습니까?”중년 남자는 이용진을 발견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박재명, 분명히 말해두지. 용존님 일은 바로 내 일이야. 감히 용존님에게 시비를 걸려고 한다면 내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이용진이 싸늘하게 대응했다.박재명은 박씨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아니었다.그는 단지 박서명의 넷째 동생일 뿐이었다.그래서 이용진은 굳이 박재명을 깍듯하게 모시며 아부할 필요가 없었다.이용진의 말에 박재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약왕님, 굳이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박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이용진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가능하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애초에 병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죠.”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용존님.”그러자 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직은 섣불리 고마워하지 마세요. 제가 치료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 이용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기꺼이 돕겠습니다!”이용진이 자신 있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제가 약왕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다면 당연히 약재 때문이죠.”진서준은 차분하게 진서라의 체내 독소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약재를 설명했다.이용진은 그 얘기를 들은 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용존님, 솔직하게 말할게요. 용존님이 언급하신 약재 중 혈령지는 제 약재 창고에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약재는 아쉽게도 제 창고에 없습니다.”“그것 하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진서준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적어도 하나는 확보했으니 오늘 헛걸음을 한 게 아니었다.“얼마면 되겠습니까? 시세대로 구매하겠습니다.”이용진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용존님, 가격을 말하는 건 제게 따귀를 날리는 겁니다. 용존님이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 약재 창고에 나머지 세 가지 약재가 있었다면 전부 무료로 드렸을 겁니다.”이용진이 이렇게 호탕하게 나오자 진서준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혈령지 하나를 받는 건 결코 과한 요구가 아니었다.“용존님, 급하지 않으시다면 식사를 마친 후 제가 약재 창고로 가서 혈령지를 가져오겠습니다.”이용진의 제안에 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죠.”“오늘 식사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곽 선생님, 어서 앉으시죠.”이용진은 웨이터를 불러 이곳의 대표 요리를 전부 주문했다.이 대표 요리들만 해도 가격이 2억을 넘겼다.일반인 한평생 월급을 한 끼 식사로 소비하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만찬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차려졌
이용진은 평생 실력이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청년을 본 적이 없었다.자기를 지키는 두 호위가 반응할 틈조차 없이, 아니, 심지어 방어할 기회도 없이 한순간에 당하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곽윤상 역시 진서준이 갑자기 공격을 시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해명할 기회가 생겼다.“약왕님, 이분은 바로 국안부 용존님이십니다.”곽윤상이 재빨리 이 틈을 이용해 설명했다.“뭐라고? 네가 바로 그 용존이라고?”이용진은 입을 떡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용존이라는 이름은 이미 명주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대다수 명주시 명문대가는 이 절세 천재를 돈으로라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진서준을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진서준이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용존이라는 봉호를 받은 인물이니 앞으로 거의 30년이 지나면 대한민국 전역에서 진서준과 겨뤄볼 만한 상대가 있을 리 없었다.심지어 4대 은거 문파조차도 진서준에게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보시다시피 용존이 틀림없습니다.”진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서준이 처음부터 용존이라는 신분을 밝혔다면 이용진은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대한민국 전역에서 이 나이에 육급 절정의 대종사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진서준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이용진은 이제야 이 청년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용존님, 방금 제가 무례했던 점은 널리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약왕 이용진은 몸을 약간 숙이며 진서준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조금 전의 거만했던 태도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용진은 곽윤상이 명주시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질책했었다.그런데 3분도 안 돼 본인이 직접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이용진은 지금 누군가가 그에게 귀싸대기라도 날린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약왕님, 앉으세요.”진서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용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놀라운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진서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방금 당신이 한 얘기는 전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체내에 숨은 질병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 오는 날씨에 수련을 하다 보면 체내 강기를 돌릴 때 복부 아래쪽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통증은 심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요. 설령 신경이 쓰여 의사를 보인다고 해도 보통 의사라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정밀한 장비로도 알아내기 어렵겠죠.”진서준의 이 말에 이용진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진서준은 정확히 이용진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지난 2년 동안, 비만 오면 이용진은 온몸이 불편해졌다.특히 강기를 돌릴 때면 복부 아래쪽에서 은은하게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처음에는 이용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러나 점점 이상하다고 느껴져 성약당의 장로까지 불러 진찰을 받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그런데 진서준이 오늘 초면에 단번에 이 문제를 짚어내자 이용진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이용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묻자 진서준은 태연히 대답했다.“당연히 당신 얼굴을 보고 알았죠.”“얼굴을 본다고 어떻게 알 수 있어?”이용진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터무니없군. 성약당의 장로조차 알아내지 못한 문제를 네가 단번에 알아냈다고?”이용진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진서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이봐 청년, 솔직하게 말해. 내 곁에 내통자를 심어 놓은 게 아니야?”명주시에서 이용진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은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해야 했다.다시 말해 억울한 사람 천 명을 죽이더라도 내통자 한 명도 놓치지 않는 태도가 생존의 비결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명주시 같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이용진 곁의 두 대종사도 이
‘이 녀석 미쳤나?’방 안의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이용진이 누구인가? 바로 명주시에서 누구나 다 아는 약왕이었다.전국을 논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절반 이상의 귀한 약재는 약왕의 손을 거친다.이런 사람이 어떻게 병에 걸릴 수 있을까?더군다나 매일 약재를 다루는 약왕에게 병이 있다면 명의들이 못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그러니 진서준이 이용진에게 병에 걸렸다고 말한 건 미친 소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소리였다.“이봐, 넌 지금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지 알고는 있나?”이용진의 얼굴은 어둠 그 자체였다.그는 이곳에서 꼬박 30분 넘게 기다렸다.그런데 자기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장본인이 고작 이런 애송이였고 오자마자 병이 있다며 모욕까지 했다.평소 인내심이 깊고 신사적이던 이용진도 이 순간만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용진의 분노를 눈치채자 곽윤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겁에 질려 진서준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하지만 진서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태연히 이용진 맞은편에 앉아 스스로 차를 따라 마셨다.진서준의 이 태연한 모습에 이용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아무래도 이 청년은 약왕인 이용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난 똑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요.”진서준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진서준의 말에 이용진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종사가 비웃으며 말했다.“약왕님은 무공을 수십 년간 연마하셨고 이미 종사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야. 병에 걸렸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진작 발견되었을 거야. 허튼소리도 정도껏 해야지.”보통 종사 경지에 오른 무인은 병에 걸리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무인의 근육, 뼈, 혈액은 이미 평범한 인간을 초월했기에 체내 바이러스조차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종사 무인이 병에 걸릴 경우라면 대개 다음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난치병이거나 중독이거나 아니면 심각한 내상이 있을 경우였다.하지만 이용진은 이 세 가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난치병은커녕, 누군가의 독에
“여기는 국제적인 대도시잖아요.”곽윤상도 감탄했다.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교내 미인 대회에 나가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 안내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손님, 저희 호텔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식사나 숙박을 원하시면 회원 자격이 필요합니다.”곽윤상은 군말 없이 금박으로 장식된 카드를 꺼냈다.여성 안내원은 카드를 꼼꼼히 확인한 뒤,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곽 선생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이미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꼭대기 층의 5번 방입니다.”곽윤상의 말에 여성 안내원이 대답했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여성 안내원은 프런트로 가서 예약 사항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꼭대기 층으로 가는 직행 엘리베이터는 총 네 대였고 속도는 어마어마했다.무려 300미터의 높이를 단 20초도 되지 않아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진서준은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멀리 보이는 구름층과 자기와 나란히 있는 듯한 달빛이 시야에 들어와 하늘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진 마스터님, 여긴 어떠십니까?”곽윤상의 질문에 진서준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내가 가본 레스토랑 중 가장 호화로운 곳 중 하나로군요.”“그렇긴 하죠. 이 호텔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곽윤상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이 호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회원이어야 하는데 꼭대기 층에 오고 싶다면 일반 회원으로는 부족하고 최소한 골드 회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골드 회원권을 발급받는 데만 200억이 필요합니다.”골드 회원권이 200억이나 한다는 말에 진서준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그럼 일반 회원은 얼마인가?”“10 억입니다.”곽윤상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며 말했다.“그리고 이 돈은 카드에 적립되는 게 아니라 그냥 회원권 발급 비용일 뿐입니다.”그 말을 듣고 진서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전국을 통틀어도 이런 가격을 자신 있게 책정하는 곳은 명주시의 호텔들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