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은 결코 쉽게 헛된 약속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한 약속은 목숨을 걸고라도 반드시 지킬 것이다.허사연은 그 말을 듣고 몹시 행복했다.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모든 걸 말해줬다.“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요!”...시끌벅적한 설 명절이 끝나고 허사연과 허윤진은 보름 동안 집에서 허성태와 함께 있다가 운대산으로 갔다.허사연과 허윤진을 운대산으로 보내면 적어도 그녀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진서준은 그녀들과 함께 운대산으로 가지 않고 먼저 신농산에서 가장 가까운 장릉 마을로 향했다.신농산이 명승지가 된 후 장릉 마을의 경제도 따라서 빠르게 발전했다.기차역뿐만 아니라 지난 2년 동안 고속철도역도 개통했다.10여 층 높이의 빌딩들이 하나둘씩 우뚝 솟아 있었고 다양한 호텔, 펜션 등 없는 게 없었다.진서준이 장릉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진서준은 호텔에 입주하고 짐을 놓은 후에 식당에 가서 신농에 관한 정보를 좀 알아보려고 했다.방금 기차에서 내릴 때 진서준은 이미 장릉 마을에 온 많은 무인을 발견했다.종사와 대종사 경지인 무인들이 내공 경지의 무인들보다도 더 많았다.그건 대한민국 무도계의 많은 사람이 소식을 얻었다는 걸 말해주었다.신농이 이번 달에 열 명의 제자를 모집할 것이다.만약 운 좋게 그의 제자가 되면 신분이 순식간에 변할 수 있었다.하지만 신농이 제자를 모집하는 것도 매우 엄격했다. 나이가 너무 많거나 자질이 평범해도 안 되었다.신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에 드문 천재들이었다.진서준은 여러 식당에 갔지만 모두 사람들로 가득 찼다.여러 집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빈자리 하나를 찾았다.들어가서 앉자 종업원 한 명이 달려왔다.“고객님, 뭘 준비해 드릴까요?”“이 가게의 대표 메뉴를 모두 주세요.”진서준이 말했다.“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종업원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웃으면서 대답했다.요 며칠 그가 만난 고객들은 모두 돈이 엄청 많은 부자였다.평소에 이곳으로 여행을
“아저씨도 신농 문파에 들어가려고 온 거예요?”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러자 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예전부터 신농에 들어가고 싶었어요.”“그러면 아저씨는 무슨 실력이죠?”소녀가 계속하여 물었다.진서준은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그러자 소녀는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진서준을 자세히 쳐다보았다.“이급 대종사세요? 연세가 기껏해야 마흔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데. 제 넷째 삼촌과 비슷하겠네요. 하지만 제 넷째 삼촌은 아저씨보다 실력이 더 뛰어날 거예요. 삼촌은 수련 천재이기에 우리 집안의 모든 자원을 삼촌한테 다 줬어요.”소녀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넷째 삼촌이 누구세요?”진서준은 궁금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40대의 이급 대종사는 대한민국에서 극히 드문 존재였다.이런 사람은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하지만 소녀는 자기 넷째 삼촌이 진서준보다도 더 강하다고 말했다.“아저씨,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줘야 해요.”소녀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제 넷째 삼촌은 조기강이에요. 올해 금방 검존 봉호를 받은 분이죠.”소녀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살짝 어리둥절했다. 사실 그도 조기강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봤다.마흔다섯 살의 나이에 사급 대종사였고 검도를 수련하는 그는 동북 조씨 가문의 최강자였다.다만 진서준은 이해가 되지 않은 게 있었다.‘이 소녀가 조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왜 이런 초라한 옷차림일까? 설마 집에서 몰래 도망쳐 나온 건 아니겠지?’“혹시 아가씨도 조씨 가문 분이세요?”진서준이 물었다.그러자 소녀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 이름은 조민영이라고 해요. 조씨 가문의 사람이 맞긴 하죠. 그런데 이 사실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돼요.”진서준은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런데 왜 저한테는 알려주는 거죠?”조민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어요. 아저씨는 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서준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민영 씨, 같이 먹죠.”진서준은 맛있는 고기 요리를 직접 조민영 앞에 밀어 놓았다.조민영은 푸짐해 보이는 고기 요리를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군침을 꿀꺽 삼켰다.며칠 동안 고기 구경도 하지 못했으니 먹고 싶은 굴뚝같았다.“아저씨, 그... 그럼 저도 사양하지 않을게요.”조민영은 젓가락을 들고 정신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조민영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며 진서준은 몇 년 전의 진서라를 떠올렸다.두 사람의 성격은 너무 닮아 있어서 똑같은 틀에서 찍어낸 것 같았다.하지만 진서라는 특별한 체질이 아니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조민영의 국수가 나왔을 때, 그녀는 이미 배가 불러 있었다.“아저씨, 저 배 터질 것 같네요. 아저씨가 아직 덜 배부르면 제 국수 더 드세요.”조민영은 별다른 생각 없이 국수를 선뜻 진서준 앞에 밀었다.“고마워요, 나도 마침 국수가 먹고 싶었거든요.”진서준도 사양하지 않고 두세 입 만에 국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올라온 음식을 전부 해결하고는 진서준은 웨이터를 불러 계산했다.“민영 씨, 혹시 묵을 곳은 있어요?”조민영은 밥값도 계산할 수 없는 정도였으니 호텔에 묵을 돈도 있을 리 없었다.진서준이 이런 질문을 던진 건 조민영에게 방을 잡아주려는 의도였다.지금쯤 장릉 마을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고 어쩌면 사수들이 있을지도 몰랐다.만에 하나 사수가 조민영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조민영은 틀림없이 죽을 길밖에 없었다.“없어요...”조민영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민영 씨가 이 아저씨를 믿는다면 아저씨랑 같이 가시죠. 아저씨가 방 하나 잡아줄게요.”진서준은 그 모습을 보자 미소 지으며 제안했다.“저 아저씨 믿어요.”조민영은 즉시 고개를 들며 신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이 소녀는 기쁨과 분노가 얼굴에 바로 드러나는 타입이라 자기 감정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좋아요, 그럼 아저씨랑 같이 갑시다.”진서준은 조민영을 데리고 식당을 나
진서준은 조민영의 대담한 제안에 깜짝 놀랐다.조민영의 무구한 체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항상 속지 않는 건 아니었다.진서준은 조민영이 이렇게 무조건 자기를 믿을 줄은 상상하지 못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당연히 알죠. 그래도 전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기에 저한테 불순한 생각을 품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조민영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해명했다.그 말을 들은 진서준은 오히려 민망해졌다.“민영 씨에게 불순한 생각은 들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민영 씨가 이따가 잘 때 옷을 벗으면...”진서준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우려를 드러냈다.“괜찮아요, 옷은 벗지 않아도 돼요. 그냥 외투만 벗으면 되죠.”조민영은 달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조민영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진서준도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게다가 밖에 누군가 조민영을 노리고 있으니 같은 방을 쓰면 조민영도 보호할 수 있어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아저씨, 저기... 미안하지만 일단 나가 있을래요? 아무래도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아서요. 몇 분 안 걸릴 거예요.”조민영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그래요, 내가 밖에 있을 테니 나쁜 놈이 창문으로 들어오면 꼭 날 불러요.”“알았어요.”진서준은 방을 나와 조용히 밖에서 기다렸다.그런데 10분이 넘게 지났는데도 욕실에서는 여전히 샤워 소리가 들렸다.진서준은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직감하고 재빨리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방안의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조민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제기랄!”진서준은 욕설을 내뱉고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창문 아래 바닥에 물 자국이 있었고 진서준은 그 자국을 따라 한참을 추적한 끝에 어느 산림에 도착했다.그리고 멀리서 희미하게 조민영의 구조 요청이 들려왔다.진서준은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진했다.그곳에 도착했을 때, 조민영은 목욕 수건을 걸친 채로 검은 양복을 입은 청년 어깨에 들려 있었다.그 청
사수 청년은 조기강을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눈앞에 있는 이 중년 남자는 확실히 검존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이 남자는 나이가 45세 정도이고 사급 대종사 이상의 실력에 검을 사용하는 사람이었다.대한민국 전역을 둘러봐도 이 조건에 맞는 사람은 동북 조씨 가문의 조기강밖에 없었다.“난 조기강이 아니야. 내가 조기강이었다면 아까 그 한 방에 넌 이미 재가 되었을 거야. 네가 잡아간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 그 여자는 조씨 가문 금지옥엽, 조기강의 조카딸이야.”진서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사수 청년은 그 말에 순간 멍해졌다. 자기가 납치한 여자가 이렇게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인 줄은 몰랐다.동북 조씨 가문은 동북에서 명망이 가장 높은 명문대가였다.얼마 전 봉호전에서 조기강이 검존의 칭호를 얻으면서 조씨 가문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이런 상황에서 조민영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조씨 가문은 분명 끝까지 진상을 파헤칠 것이다.그때가 되면 이 사수 청년은 죽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건 물론이고 심지어 청년이 속해 있는 조직과 관련자도 함께 몰락할 게 분명했다.사수 청년은 조민영을 보면서 아쉬운 눈빛이 가득했고 입을 쩝쩝 다셨다.청년이 조민영의 미모에 탐욕을 느낀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민영의 몸이 청년에게 너무나도 큰 유혹이었다.마치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갈망하듯 자기가 죽더라도 조민영의 몸을 한 번 즐기고 싶었다.“난 이 여자를 네게 넘길 수 없어. 이 여자는 내 거야.”청년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불을 발견하고 달려드는 나방처럼 청년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조민영은 사수 청년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조민영은 눈앞의 이 사수 청년이 얼마나 음침하고 위험한 존재인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그럼 죽어.”말이 떨어지자마자 진서준은 자취를 감췄다.다음 순간, 사수 청년이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황금빛 검광이 그의 오른팔에 떨어졌다.
“나머지 네 명의 실력은 어때?”진서준이 청년을 바라보며 물었다.사수 청년이 숨김없이 대답했다.“모두 나보다 강해. 난 아는 게 이 정도야. 이제 날 죽여줘... 제발 부탁이야!”옆에 있던 조민영이 차마 더 이상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아저씨, 저 사수를 편히 보내 드리죠.”진서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서준도 더 이상 조민영에게 지금보다 더욱 잔혹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러죠, 지금 끝낼게요.”검광이 번뜩이자 청년의 목에 눈에 띄는 혈흔이 생겼고 이내 그의 몸은 영혼이 이탈한 것처럼 가볍게 옆으로 쓰러졌다.사수를 처치한 후, 진서준은 곧바로 조민영의 손을 잡고 그녀의 몸을 영기로 살폈다.“다행이네요. 민영 씨 무구한 체질은 사수에게 침해당하지 않았어요.”진서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구한 체질? 그게 뭐예요?”조민영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조민영뿐만 아니라 조씨 가문 사람들 모두 조민영이 무구한 체질이라는 사실을 몰랐다.사실 이 특별한 체질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건 오직 수선자들뿐이었다.그 사수 청년은 단지 조민영의 몸이 마치 마약처럼 그를 유혹한다고만 느꼈을 뿐이었다.“무구한 체질은 굉장히 특별한 체질이에요. 민영 씨가 다른 사람의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것도 그 체질 때문이죠.”진서준이 체질에 대해 대략 설명했다.“아, 그랬던 거군요.”조민영은 확실하게 알아듣진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자, 나랑 함께 돌아가서 쉬죠.”진서준은 조민영을 데리고 숙소로 향했다.“아저씨, 잠깐만요!”그때, 조민영이 갑자기 외쳤다.“왜 그러죠?”진서준이 고개를 돌려 조민영을 봤다.조민영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자기 몸에 두른 수건을 가리켰다.“저... 이대로 돌아갈 순 없잖아요...”조민영은 키가 작지만 몸매는 아주 늘씬했기에 얇은 수건 하나로는 그녀의 매혹적인 몸매를 가릴 수 없었다.진서준은 조금 전까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쪽으로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조민영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상
은범은 황현호가 이렇게 물러서려는 걸 용납할 수 없어 곧바로 황현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현호야, 내일 안 가면 이번 생에 다시는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없을 거야. 이건 나만 아는 건데, 몰래 알려줄게. 이번 신농산 제자 선발 기준이 예전보다 훨씬 쉬워졌대. 네가 잘 아는 신농산의 그 고수들과 겨룰 필요도 없어. 그냥 간단한 테스트 하나만 통과하면 돼. 너도 알다시피 대한민국에서 4대 은거 종문은 모든 무인이 꿈에도 바라는 장소잖아. 네가 신농에 들어가면 네 아버지도 널 정말 자랑스러워할 거야. 그리고 수련을 끝내고 나면 진서준을 죽이는 건 개미를 밟는 것만큼이나 쉬울 거라고.”은범의 말에 황현호는 다시 솔깃해졌다.황현호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보고 은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부추겼다.“현호야, 우리 집 어르신이 그러는데 신농 사람들은 전부 선법을 배운다고 하더라고. 생각해 봐, 네가 선인이 되면 앞으로 천년만년 살 수 있어. 그때가 되면 여자를 마음껏 즐기며 영원히 늙지 않는 세월을 보낼 수 있을 거야.”여자는 황현호에게 아주 큰 유혹이었다.황현호는 은범의 말을 듣자 점점 두 눈에 광채가 돌기 시작했다.“그럼... 그럼 나도 내일 너랑 같이 갈게.”황현호가 결국 동의하자 은범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황현호의 실력으로는 신농산에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은범이 이렇게 열심히 설득한 이유는 황현호가 테스트에서 죽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면 설령 은범이 신농산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황현호의 죽음을 진서준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었다.진서준이 황경영의 외아들인 황현호를 죽인다면 황경영은 진서준에게 반드시 필사적으로 복수하려 들 것이다.그렇게 되면 은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황씨 가문과 진서준 두 세력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둘 다 망가지는 꼴만 지켜보면 되는 거였다.자기가 세운 계획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완벽해 은범은 밤새 잠도 안 올 정도로 신났다.“어? 저기 저렇게 예쁜 여자가 왜 있지?”황현호는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자기 앞에서 진서준을 모욕하자 조민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황현호의 행동에 은범도 깜짝 놀랐다.이 시기에 많은 무인들이 장릉 마을에 몰려온 상황에서 은범과 황현호는 경호원조차 데려오지 않았다.두 사람의 실력으로는 장릉 마을에서 거의 최하위권에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주동적으로 낯선 사람을 건드리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죄송합니다, 두 분. 이 친구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요.”지난번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한 사건을 겪은 후로 은범은 인내심이 더욱 강해져서 이런 상황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는 건 그리 큰 일이 아니었다.나중에 상황을 뒤집을 수만 있다면 그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진서준은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은범을 쳐다보았다.“범아, 난 정신 상태가 이상한 게 아니야. 정신 상태가 이상한 건 이 여자야. 스폰서를 찾을 거면 나 같은 사람을 찾아야지, 왜 굳이 거의 50살에 가까운 사람을 찾아? 미친 거 아니야?”황현호는 은범처럼 똑똑하지 않았다.그래서 은범이 계속 눈치를 주고 있었지만 황현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은범은 속으로 황현호에게 쌍욕을 날리고 있었다.‘미련한 놈아, 네 집안 배경만 없었으면 벌써 딴 사람 칼을 맞고 뒈졌을 거야!’호텔에 있던 다른 손님들도 다들 멈춰 서서 이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철썩!갑작스러운 귀싸대기 소리가 호텔 로비에 울려 퍼졌다.진서준이 무서운 기세로 황현호의 뺨에 귀싸대기를 한 대 때리자 황현호는 그대로 자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황현호의 눈앞이 어지럽게 빙빙 돌았다.“닥치지 못해? 또 함부로 지껄였다가는 영원히 그 입을 다물게 해줄 테니까.”진서준은 쌀쌀한 시선으로 황현호를 내려다보며 위협했다.지금의 진서준은 황현호를 죽일 각오도 있었다.지금 진서준의 신분은 김평안이었다.이 신분으로 황현호를 죽인다면 황씨 가문은 눈에 불을 켜고 김평안을 찾게 될 테니 걱정할 게 하나도 없었다.신농산에서 내려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
“스위트룸은 따로 갈라져 있으니까 오해하지 마.”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도지아가 설명했다.“오해 안 해. 네가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알아.”진서준이 무심하게 답했다.사실 둘은 황예은의 소개로 알게 되었을 뿐, 알고 지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진서준은 본인이 그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스위트룸에 들어가자 도지아는 안쪽 방을 골랐다.“네 다리에 바른 연고에 아직 물 닿으면 안 돼. 되도록 샤워는 참아.”진서준이 슬쩍 주의를 줬다.“알았어.”도지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적셔 상반신만 가볍게 닦았다.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몸매를 보자 진서준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내 몸매가 별론가? 아니면 내 얼굴이 부족한 건가? 예은과 비교하면 차이가 없다고 할 순 없네.’솔직히 외모만 놓고 보면 황예은을 이길 여자는 없었고 심지어 허사연조차도 약간 밀릴 정도였다.10분 후, 도지아는 가운을 입고 방에서 나왔다.진서준도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아까 얘기했던 거 계속할게. 내공 수련을 하려면 타고난 재능이 엄청 중요해.”진서준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재능 앞에서는 노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만약 네가 타고난 천재라면 빠르게 입문할 거고 아니라면 그냥 시간 낭비야.”감옥에 있을 때, 창욱 어르신이 진서준을 슬쩍 만져보더니 바로 천재라고 단언하며 무조건 제자로 삼겠다고 했었다.지금 돌이켜보면 그 말이 맞긴 했다.진서준이 연마하는 선법을 다른 사람이 똑같이 배운다고 해도 그 사람이 이 속도로 성장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알겠어.”도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 재능부터 한번 확인해 줘.”“손 내밀어.”도지아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잠시 후, 내가 너한테 원기 조금 밀어 넣을 거야. 그걸 느낄 수 있다면 넌 무도계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는 거고 못 느끼면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아.”진서준은 그렇게 말하며 도지아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경락을 따라 원기를
“이게 무슨 천벌 받을 일이야, 기가 막히는구나.”아버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한탄했다.“그래도 그렇지. 마약에 손댔다고 해서 어떻게 너를 팔아넘길 생각을 해? 그게 사람이야? 넌 민수 친누나잖아.”이게 바로 도지아 아버지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다.마약을 한 건 차라리 괜찮았다.그냥 도민수를 끌고 가서 반년 동안 재활센터에 처박아 두면 된다.하지만 도민수는 마약 때문에 도지아를 팔아넘겼다.이건 이미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놈이었다.“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도지아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물었다.“경찰에 신고해야지. 이 자식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해.”도지아 아버지는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당신 미쳤어요? 쟤 우리 친아들이라고요. 아들 인생 망칠 일이 있어요?”도지아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휴대폰을 빼앗았다.“이놈은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야. 그냥 짐승이야.”도지아 아버지는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우리 딸이 이놈 때문에 잘못될 뻔했잖아.”“지아가 없었으면 우리가 납치당했겠어요? 우리가 납치 안 당했으면 민수가 강제로 마약을 했겠어요? 그럼 이후의 일들이 벌어졌겠냐고요?”도지아 어머니는 여전히 아들을 감싸며 말했다.“당신 진짜 노망났어? 그러니까 지아를 그 개자식한테 넘기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도지아 아버지는 아내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둘 다 제 자식이에요. 아무튼 경찰 신고는 절대 안 돼요.”도지아 어머니는 도지아에게 애원했다.“지아야, 엄마가 부탁할게. 제발 신고하지 마, 응? 엄마가 약속할게. 다시는 민수가 이런 짓 못 하게 말이야.”솔직히 도지아는 어머니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했기에 미리 결론을 내려두었다.“그럼 재활센터로 보내요. 난 집에서 나가서 살 거예요. 민수랑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거예요.”“안 돼, 지아야. 나가야 할 놈은 저 개자식이야. 넌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해.”도지아 아버지가 간절하게 설득했다.“아빠, 엄마, 지금까지 키
조호는 동부 구역 귀도파의 두목이었다.그 지위는 노랑머리 청년의 상급 보스와 맞먹었다.그런 조호가 지금 한 청년 앞에서 이렇게 공손하게 행동하고 있었다.이것만 봐도 상대의 정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노랑머리 청년은 완전히 얼이 빠졌다.“진서준 씨, 이놈 어떻게 처리할까요?”조호가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물었다.“그냥 죽여. 이런 쓰레기는 살아 있어 봤자 사람들에게 해만 끼쳐.”진서준이 무심하게 대답했다.“뭐라고요? 호랑이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분도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노랑머리 청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겁하며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하지만 진서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도지아 쪽으로 걸어갔다.“호랑이님. 저 삼생파 소속입니다. 우리 두목의 체면 봐서라도 한 번만 살려주세요.”노랑머리 청년은 무릎으로 기어가 조호 앞에 매달렸다.“나도 널 살려주고 싶어. 하지만 이건 진서준 씨 명령이야. 따를 수밖에 없어.”조호가 부하들에게 손짓하자 부하 두 명이 즉시 다가왔다.한 명은 검은 두건을 꺼내 노랑머리 청년의 얼굴을 뒤집어씌웠고 다른 한 명은 단단히 밧줄을 감아 그의 목을 조였다.노랑머리 청년은 공중에서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30초 후 완전히 조용해졌다.“네 동생을 어떻게 할 생각이야?”진서준이 질문을 던졌다.“나도 몰라.”도지아는 초점 없는 눈으로 대답했다.친동생이 그깟 마약 한 봉지를 위해서 자기를 배신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도지아는 이제야 도민수의 눈에 자기가 마약 한 봉지보다도 가치 없는 존재였다는 걸 깨달았다.“이런 일이 없었던 걸로 하고 계속 모르는 척하는 것도 여러 방법의 하나야.”진서준이 제안했다.“하지만 한 번이 있으면 두 번도 있는 법이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길 때, 난 아마 이곳에 없을 거야. 그때는 네가 스스로 보호할 줄 알아야 해.”진서준이 솔직하게 말했다.어떤 일이든 한 번 일어나면 두 번도 일어나기 마련이다.도민수는
다음 순간, 도민수의 시선은 흐릿해지고 완전히 환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자, 그럼 내가 먼저 할게. 이따가 너희도 실컷 즐겨.”노랑머리 청년은 눈에 불을 켜고 도지아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별장 대문을 거칠게 걷어찼다.그와 동시에 천장의 전등이 박살 나며 순식간에 실내가 암흑으로 뒤덮였다.그리고 문 쪽에서 서늘한 한기가 흘러들어왔다.“누구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여길 쳐들어와? 죽고 싶어?”노랑머리 청년은 분노에 이를 갈았다.딱 한 걸음만 더 가면 이 여자를 즐길 수 있었는데 누군가가 이 좋은 노릇을 방해한 것이다.그때, 별장 대문에서 어떤 남자의 실루엣이 나타났다.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노랑머리 청년 일행은 그의 모습을 똑똑히 확인했다.“야, 너 뭐야? 여긴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당장 꺼져.”노랑머리 청년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하지만 진서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조용히 안으로 걸어왔다.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환상에 빠진 도민수를 내려다보며 씁쓸하고 실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도박꾼, 술주정뱅이, 약쟁이... 이 세 부류의 말은 절대 믿어선 안 돼.”진서준이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다행히 진서준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도지아에게 위치추적기를 달아두었다.“야, 내 말 들리지 않아? 뭘 멍때리고 있어?”노랑머리 청년은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진서준의 뺨을 갈기려 손을 치켜들었다.철썩!따귀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노랑머리 청년의 몸이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열 바퀴 가까이 빙글빙글 돌았고 진서준이 힘껏 걷어차자 새우처럼 접힌 채 바닥에 처박혔다.“웩!”노랑머리 청년은 쓰러진 채 입을 벌리더니 그 자리에서 어제 먹은 밥까지 모두 토해냈다.“형님, 괜찮으세요?”건달 하나가 달려와 노랑머리 청년을 부축했다.“저 개자식이... 다들 저놈 죽여버려!”노랑머리 청년은 분노에 차 똘마니들에게 명령했다.삼생파 두목인 노랑머리 청년은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에
노랑머리 청년의 말에 도민수는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너 너무한 거 아니야?”도민수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너무해? 그게 네가 할 소리야?”노랑머리 청년은 도민수를 비웃으며 코웃음을 쳤다.“고작 마약 좀 얻겠다고 친누나를 바친 건 누구야? 대체 누가 더 개같은 짓을 한 거야?”노랑머리 청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솔직히 말해서 나도 너 같은 쓰레기 동생은 처음 봐.”주변에 있던 똘마니들도 박장대소했다.모두가 도민수를 한심한 광대 보듯이 쳐다봤다.“좋아. 영상 찍을게.”도민수는 이를 갈며 결국 받아들였다.“쯧쯧... 옛날에 많은 장군들이 여러 가지 수모를 견뎠다지만 넌 그 장군들보다 더 대단하네?”노랑머리 청년은 도민수가 이런 정도의 수모도 참을 수 있다고 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이건 거의 전대미문의 인내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저 여자 데리고 들어가.”노랑머리 청년이 도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내 누나 건들지 마. 내가 직접 업고 갈 거야.”도민수는 치근덕거리는 건달들을 밀쳐내고 직접 도지아를 업었다.그렇게 도지아를 별장으로 데려오자 노랑머리 청년은 문을 잠그라고 지시했다.“잠깐, 너희 하 도련님은 안 오는 거야?”도민수가 서둘러 물었다.“그 녀석이 오면 우리가 이 짓을 할 수 있겠어?”노랑머리 청년은 도민수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너 설마 아직도 우리가 하 도련님을 위해서 일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틀려도 한참 틀렸어. 우린 그냥 이 여자를 신나게 맛보고 싶을 뿐이야.”도민수는 순간 멍해졌다.“그럼 나한테 마약을 먹인 것도 너희 결정이었어?”“그래, 그게 아니면 뭐겠어?”노랑머리 청년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너희 같은 평범한 집안 놈들은 우리 하 도련님 기억 속에 남을 가치도 없어.”“이 벼락 맞아 뒈질 개자식들아!”도민수가 꽉 쥔 주먹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이 개자식이 누굴 욕하는 거야?”노랑머리 청년은 곧바로 발차기를 날려 도민수를 바닥에 나뒹굴게
“단순히 하경범의 동선을 조사하라는 것뿐이야. 너더러 그놈이랑 목숨을 걸고 싸우라는 게 아니야.”진서준이 조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사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야. 나 혼자 여러 일을 대응하기 어려워 그런 거야. 다른 일이 없으면 내가 직접 그놈을 찾아갔을 거야.”조상규가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떠올리며 조호는 이를 악물고 임무를 받았다.“알겠습니다, 진서준 씨. 사흘 내로 하경범의 일정을 조사해 보고하겠습니다.”“좋아, 그럼 일단 밥부터 먹자.”진서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식사가 끝난 후, 조호 부자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들이 나간 후, 오영수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였다.“저 자식 믿을 수 있는 겁니까? 하경범에게 달려가 밀고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겁니까?”“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저 녀석 앞에서 조상규를 죽인 겁니다.”진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죽인다는 걸 알게 됐으니 감히 딴생각은 못 할 겁니다.”오영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오영수도 인간 심리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왔기에 진서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세요.”오영수가 입을 열었다.“저는 단 하나만 궁금합니다. 대장님 삼촌은 도대체 언제 돌아오는 겁니까?”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궁금한 걸 말했다.진서준의 목표는 오영수의 삼촌에게서 자기 가문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그것이 아버지의 행방을 찾는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늦어도 모레면 돌아올 겁니다.”오영수가 대답했다.“셋째 삼촌이 돌아오면 바로 연락할게요.”“부탁할게요.”진서준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저녁 무렵.한 식당에서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민수야, 오늘은 웬일이야? 왜 갑자기 밥을 사주려는 거야?”도지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건 도민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최근 도민수는 화약고처럼 사소한 일에도 폭발하기 일쑤였다.그런데 갑자기 자기를 불러 밥을 사준다고 하니 너무나도 이상했다.“
조호는 진서준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걸 보고 앞으로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조상규 같은 대종사조차 가볍게 정리되었는데 하물며 조호 같은 평범한 인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일행은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진서준 씨... 잠시 후, 제가 모셔도 될까요?”치파오 여자는 일부러 허리를 숙이며 가슴골을 드러냈다.조상규가 죽으면서 여자는 기댈 곳을 잃었으니 이제는 새로운 든든한 버팀목이 필요했다.조호의 아들은 자기 밥만 쳐다보며 눈길을 감히 다른 데다 돌리지 못했다.괜히 이상한 시선을 줬다간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조금 전엔 일부러 조상규를 자극하려고 연기한 거야. 넌 가봐도 좋아.”진서준이 손을 휘저었다.치파오 여자는 매력적이었지만 진서준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진서준에게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것도 한 명이 아니었다.이 말을 듣자, 치파오 여자는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저는 문 앞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여자가 나간 후, 진서준이 입을 열었다.“대장님, 하씨 가문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죠?”“하씨 가문이요?”오영수는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그다지 잘 알진 못합니다. 저는 군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 집에 잘 안 들릅니다.”“그럼 너는?”진서준은 조호를 바라봤다.조호는 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저도 하씨 가문의 사업에 대해 조금 아는 정도입니다. 현재 르벨의 모든 카지노는 하씨 가문이 장악하고 있고 그 외의 누구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다른 지역에서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의식주가 가장 중요했지만 르벨에서는 도박이 가장 중요했다.80세 노인부터 3살짜리 아이까지 누구나 도박을 했다.르벨 경제의 중심은 도박이었다.덕분에 하씨 가문은 지역 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같은 명문대가도 하씨 가문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하경범이라는 인물을
“뭐가 무리야? 네 여자가 따라준 차를 마시면 앞으로 너희 둘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다는 뜻에서 절교차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진서준이 웃으며 말했다.“진서준 씨가 큰형님이잖아요. 첫 잔은 큰형님이 먼저 드셔야죠.”“얼른 마셔. 마시지 않으면 널 죽일 거야.”진서준의 얼굴이 순간 냉랭하게 변했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진서준 씨, 농담이 심하시네요. 설마 차 한 잔 때문에 절 죽이겠습니까?”조상규가 여전히 억지로 웃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조상규의 웃음은 영원히 얼굴에 굳어버렸다.진서준이 갑자기 손을 뻗어 아무런 예고 없이 젓가락을 던졌다.그 젓가락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 조상규의 가슴을 관통했다.펑!심장이 터지는 끔찍한 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조상규는 고개를 푹 떨구고 그대로 식탁 위에 쓰러졌다.조호 부자는 겁에 질려 다리가 풀렸고 슬금슬금 진서준과 거리를 벌렸다.‘이건 분명 미친놈이야. 자기 심기를 건드렸다고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처음부터 이런 놈인 줄 알았다면 차라리 아까 목숨을 내걸고 싸웠을 것이다.치파오 여자는 더욱 기겁하며 벌벌 떨면서 진서준을 쳐다봤다.“아가씨, 이제 네 남편은 죽었어. 그러니 이 차는 네가 대신 마시도록 해.”진서준이 치파오 여자를 바라봤다.“저, 저요?”치파오 여자의 얼굴이 순간 얼어붙었다.조상규는 차 한 잔을 마시지 않으려다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그럼 자기도 거부하면 그대로 죽을 게 아닌가?“왜? 설마 차 한 잔도 못 마시는 건 아니겠지?”진서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치파오 여자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차에 독이 들어 있어요. 조상규가 저를 협박해서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전 정말 아무 죄도 없어요.”“뭐? 차에 독이 있다고?”조호 부자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방 하나 더 잡아.”진서준이 무심하게 말했다.“네. 지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치파오 여자는 공포에 질린 채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치파오 여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