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안개 속에 잠겨 널 잊었다

짙은 안개 속에 잠겨 널 잊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By:   은등  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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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저 생각해봤는데 민 씨 가문을 떠나서 고모랑 해외에서 함께 살려고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원정숙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안도감, 그리고 어딘가 간절한 부탁이 담겨 있었다. [그래, 단비야. 내가 비자 준비를 바로 시작할게. 한 달 정도는 걸릴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줘. 그동안 친구들도 많이 만나. G국으로 이주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테니 작별 인사는 꼭 제대로 해야 해.] [특히 삼촌 말이야. 삼촌은 너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키워줬잖니. 그 은혜는 절대 잊으면 안 돼. 진심을 다해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해.] “네.” 원단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히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베란다로 향했던 그녀는 천천히 거실로 돌아왔다. 그러다 무심코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 한 장에 시선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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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17살의 민태건은 그네 뒤에 서서 활짝 웃으며 7살 난 원단비를 밀어주고 있었고 그녀의 치맛자락은 바람에 휘날려 화원의 튤립들을 스치고 있었다. 비록 여러 해가 지났지만 원단비는 여전히 사진을 찍은 그날 얼마나 즐거웠는지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절은 지났고 원단비와 민태건은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생각에 원단비의 눈가에는 약간의 슬픔이 스쳤고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며 옛 생각에 잠겼다. 원씨 가문과 민씨 가문은 대대로 사이가 좋았고 민태건은 원단비보다 10살이 많았는데 그 촌수로 인해 원단비는 어릴 때부터 민태건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원단비가 7살이 되던 해, 그녀의 부모님이 의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민태건은 원단비를 민씨 가문에 데려와 자신의 곁에서 키우기로 했다. 아마도 어려서 부모님을 잃은 원단비가 가여웠던 건지 민태건은 시시각각 그녀를 곁에 두고 모든 것은 자신이 직접 해주곤 했다. 매일 원단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재우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접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왔다. 뿐만 아니라 원단비가 신기하고 재밌는 물건을 보기라도 한다면 모두 사주곤 했었다.소년은 그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데려온 콩알 만하던 아이를 어엿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키워냈다. 민태건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인해 원단비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 달라붙곤 했다. 소녀의 감정이 싹트는 나이가 되자 원단비는 너무나 당연한 듯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그녀와 함께 자란 민태건을 좋아하게 되었다. 원단비가 17살이 되던 해, 민태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에게 대형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파티에서 민태건은 술에 취했고 원단비는 그런 민태건을 부축하여 방에 데려갔다.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상황에 원단비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민태건에게 입을 맞추고 말았다. 순간, 민태건은 눈을 번쩍 떴고 바로 원단비를 소파의 반대편으로 밀어냈다. 원단비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고 하늘이 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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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17살의 민태건은 그네 뒤에 서서 활짝 웃으며 7살 난 원단비를 밀어주고 있었고 그녀의 치맛자락은 바람에 휘날려 화원의 튤립들을 스치고 있었다. 비록 여러 해가 지났지만 원단비는 여전히 사진을 찍은 그날 얼마나 즐거웠는지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절은 지났고 원단비와 민태건은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생각에 원단비의 눈가에는 약간의 슬픔이 스쳤고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며 옛 생각에 잠겼다. 원씨 가문과 민씨 가문은 대대로 사이가 좋았고 민태건은 원단비보다 10살이 많았는데 그 촌수로 인해 원단비는 어릴 때부터 민태건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원단비가 7살이 되던 해, 그녀의 부모님이 의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민태건은 원단비를 민씨 가문에 데려와 자신의 곁에서 키우기로 했다. 아마도 어려서 부모님을 잃은 원단비가 가여웠던 건지 민태건은 시시각각 그녀를 곁에 두고 모든 것은 자신이 직접 해주곤 했다. 매일 원단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재우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접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왔다. 뿐만 아니라 원단비가 신기하고 재밌는 물건을 보기라도 한다면 모두 사주곤 했었다.소년은 그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데려온 콩알 만하던 아이를 어엿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키워냈다. 민태건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인해 원단비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 달라붙곤 했다. 소녀의 감정이 싹트는 나이가 되자 원단비는 너무나 당연한 듯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그녀와 함께 자란 민태건을 좋아하게 되었다. 원단비가 17살이 되던 해, 민태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에게 대형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파티에서 민태건은 술에 취했고 원단비는 그런 민태건을 부축하여 방에 데려갔다.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상황에 원단비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민태건에게 입을 맞추고 말았다. 순간, 민태건은 눈을 번쩍 떴고 바로 원단비를 소파의 반대편으로 밀어냈다. 원단비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고 하늘이 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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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문밖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원단비는 사색을 멈추었다. 원단비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보니 마침 민태건과 눈이 마주쳤다. 홀로 식탁에 앉아있는 것을 본 민태건은 무의식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는데 곧 11시였다. 민태건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위층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사 한마디 없었고 마치 낯선 사람처럼 차가웠다. 원단비는 가슴이 시큰시큰했지만 참지 못하고 민태건을 불렀다. “삼촌, 저녁은요?” 그러나 민태건은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민서랑 먹었어. 내가 여러 번 말했지, 나 기다릴 필요 없다고.” 마지막 목소리는 문을 닫는 굉음에 묻히고 말았다. 원단비의 마음도 따라서 철렁했고 단지 눈이 뻑뻑할 뿐이었다. 전에 민태건이 원단비에게 이런 말투로 이야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민태건은 원단비가 가족을 잃은 후 혼자 있는 걸 매우 두려워하고 혼자 밥 먹는 걸 매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학업이든 일이든 아무리 바빠도 늘 돌아와 원단비와 함께 식사를 했으며 출국조차도 항상 갔다가 바로 돌아오곤 했다. 오직 원단비가 입맛이 없거나 아플 것이 걱정되어 말이다. 10여 년 동안 예외는 없었다. 하지만 원단비가 처음 고백한 뒤로 모든 것은 변했다. 민태건은 주동적으로 원단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야근과 출장을 반복하며 그녀와의 만남을 피했다. 더군다나 더 이상 원단비에게 깜짝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으며 그녀에 대한 모든 편애를 철회했다. 그리고 진민서가 나타난 후, 민태건이 원단비를 보는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고 마치 낯선 사람 같았다. 원단비도 그 연유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원단비는 식어가는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식탁에는 여러 가지 요리가 있었지만 원단비는 오히려 맛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배를 채우고 난 원단비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서야 민태건의 방문 앞에 가서 가볍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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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원단비는 평소 외출을 자주 하지 않았고 대부분 화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폭설이 내리는 날 원단비가 외출을 한다고 하니 진민서도 왠지 궁금해졌다. “단비야, 너 남자친구도 없는데 이런 날에 나가서 뭐하는 거야?” 원단비는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전, 전 볼일이 있어서요.” 어차피 비자처에 도착하면 그들도 아마 알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진민서도 더 이상 묻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민태건과 오늘의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뒷좌석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잊은 듯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빨간 신호등이 걸린 틈을 타 진민서는 립스틱을 꺼냈고 민태건에게 건네며 발라달라고 했다. 민태건도 거절하지 않고 진민서의 얼굴을 받치고 부드럽고 섬세하게 손을 움직였다. 두 사람의 몸은 거의 붙을 것 같았고 원단비는 몸을 돌려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무렵, 진민서가 갑자기 집에 가서 겉옷을 챙기고 싶다고 했다. 네비게이션에서 2킬로메터밖에 남지 않았다고 표시됨에도 민태건은 생각도 하지 않고 같은 방향이 아니라며 원단비에게 내려서 다른 차를 타라고 했다. 원단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차에서 내렸다. 검은 카이엔이 쏜살같이 달려 온통 눈보라가 튀었다. 길에는 사람도 차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단비는 눈을 밟으며 2킬로미터를 걸어 비자처에 도착했고 모든 자료를 제출했다. 원단비가 일을 마치고 나오자 입구에서 고등학교 때의 담임선생님을 만났고 두 사람은 몇 마디 인사를 나누었다. 원단비가 해외로 이주한다는 말을 들은 담임선생님의 얼굴에는 의아한 표정이 번쩍였다. “해외로 가면 다시 안 돌아온다고? 네 삼촌도 허락했니?” 원단비는 왜 갑자기 민태건 말을 꺼내는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허락했어요. 저와 삼촌은 혈연관계도 없고 저도 이제 컸으니 계속 귀찮게 할 순 없잖아요. 해외로 나가 새로운 생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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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5일 후, 민태건은 진민서를 데리고 돌아왔다.집에 들어서자마자 원단비의 시선은 진민서 목에 걸려있는 눈부신 목걸이로 향했다. 원단비는 한 번 보고는 눈을 늘어뜨렸다. 원단비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고 그 목걸이는 역시 진민서에게 줄 것이 맞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애초에 삼촌이 말하려다 말았던 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민태건 앞에서 진민서는 줄곧 원단비를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주동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단비야, 요 며칠 집에 혼자 있어서 심심했지? 내가 물건들 많이 사왔는데 네가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좀 볼래?”말하면서 진민서는 외투를 벗었고 원단비를 상자 더미로 끌고 갔다. 원단비는 고개를 저으며 연거푸 거절했지만 진민서는 약간 나무라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한 번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뭘 사양하고 그래? 미래의 숙모가 너에게 선물 주는 거라고 생각해. 어때?” “숙모”라는 두 글자를 들은 원단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한눈에 진민서 어깨와 목에 남겨진 키스자국이 들어왔는데 마음이 살짝 철렁했다. 진민서가 보낸 사진들 중에는 호텔의 큰 침대가 담긴 것도 있었는데 그때 원단비는 그것을 찍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진민서에게 남겨진 흔적들을 보니 원단비는 순간 알아차렸고 눈을 떨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진민서는 한쪽으로는 원단비를 도와 상자를 뜯으면서 한쪽으로는 오늘 밤 연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태건 씨, 심민주 아가씨의 성인 연회에 단비도 데려가자. 둘은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으니 대화가 통할 거야.” 저녁 연회에 관한 말을 들은 원단비는 멍해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민태건이 원단비를 민씨 가문에 데려온 이후로 그녀는 어떤 연회에도 참가한 적이 없었다.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뒤에서 혀를 놀리며 원단비를 기생충이라 놀렸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민태건은 고개를 저으며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진민서는 민태건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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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원단비는 깊이 잠 들지 않았던 터라 곧 인기척에 놀라 깼다. 민태건의 옷깃에서는 익숙한 코롱 향수의 냄새가 났고 원단비는 재빨리 그의 신분을 확정할 수 있었다. ‘삼촌?’ ‘왜 갑자기 삼촌이 나한테 덮쳐서 입을 맞춘 거지?’ 원단비는 온몸을 흠칫 떨었고 아직 채 반응하기도 전에 민태건의 쉰 목소리가 뜨거운 숨소리와 뒤섞여 들려왔다. “민서...”그 순간 원단비는 온몸이 뻣뻣해졌다. 그리고 물씬 풍기는 술냄새가 원단비로 하여금 지금의 상황을 더욱 명확히 느끼게 했다.‘삼촌은 날 민진서로 착각한 거야.’ 방심한 이 찰나, 민태건의 두 손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원단비는 너무나 당황했고 한쪽으로는 허리춤의 못된 손을 누르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민태건을 밀어내려 했고 말투에는 긴급함이 가득했다. “삼촌, 사람 잘 못 봤어요. 전 단비예요!” 민태건은 술에 취한 나머지 알아듣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원단비의 발버둥이 그의 욕구를 더욱 자극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민태건의 키스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원단비의 부드러운 입술을 머금고 가볍게 빨아들였다. 원단비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원단비는 급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고 저도 모르는 새에 거즈를 적셨는데 상처에 스며들어 따끔한 통증을 일으켰다. “삼촌, 저를 아프게 했어요. 상처가 너무 아파요.” 알콜이 효과를 일으킨 건지 원단비의 외침이 작용한 건지 민태건은 몸이 약간 굳어 그녀의 두 손을 놓아주었다. 원단비는 얼른 옆으로 몸을 피해 신발을 신을 겨를 없이 쿵쾅거리며 거실로 달려가 담요를 싸맸고 날이 밝아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다음날 오후, 원단비가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의 민태건을 발견했다.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 원단비는 소파 구석으로 움츠러들었다. 원단비의 행동을 본 민태건의 눈에는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어젯밤 네가 날 방에 데려갔어?” 이 물음에 약간 어리둥절한 원단비가 설명을 하려는 찰나 민태건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민태건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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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누군가 인터넷에 표절 사건을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해당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오늘 전시회를 개최한 원단비와 진민서였다. 핸드폰에서 열성적인 네티즌들이 만든 팔레트를 보면 두 그림은 화면과 내용, 구도와 색채까지 거의 모두 똑같다고 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인 화가 원단비의 표절 의혹#이라는 주제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몇 명의 친구들은 원단비의 곁을 에워싸고 마치 뜨거운 솥 위의 개미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떻게 단비가 표절한 걸 수 있어? 이 그림의 교복은 분명 우리 고등학교 건데 이 사람들 눈이 먼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이 여자는 분명 단비 본인이잖아. 우리 모두 증명할 수 있어!” “분명 이 진민서가 표절한 거야. 뻔뻔하게 표절을 해?” 원단비는 아직 기본적인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 원고를 꺼내 스스로 결백을 증명하려 했다. 가는 길 내내 원단비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고 처음 그림을 그릴 때의 장면을 회상했다. 그 해 원단비는 18살이었고 민태건은 더 이상 그녀를 데리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원단비는 학년 1등 시험지를 들고 집에 돌아와 서재로 달려갔고 민태건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민태건은 책상에 엎드려 잠에 들었고 원단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석양의 은은한 빛이 민태건의 미간을 비추었고 찬란한 금빛 아래 그는 침범해서는 안 될 신불처럼 보였다. 원단비는 민태건을 그 신단에서 끌어내릴 사람이 되고 싶었다. 때문에 원단비는 시험지를 들어 민태건의 얼굴을 덮고는 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민태건은 원단비 때문에 놀라 깨어났고 또 한바탕 그녀를 꾸짖었다. 하지만 원단비는 오히려 이런 꾸중을 마음에 두지 않았고 곧바로 이 화면을 그림으로 그려 여러 해 동안 세심하게 소장했다. 하지만 지금 원단비는 이미 민태건을 내려놓았고 급히 돈을 써야 했기에 이 그림을 전시회의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게 원단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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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첫 번째 전화는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전화도 여전히 받지 않았다. 원단비는 한 통 또 한 통 전화를 걸었고 아홉 번째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전화기 너머 차분한 숨소리가 들려오자 원단비는 불현듯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표절했다고 모함을 당했을 때도 이렇게 한 통 한 통 전화를 걸었던 생각이 났다. 그때 민태건은 딱 한 마디만 했다. [겁 내지 마, 삼촌이 있잖아.] 그러나 지금 원단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림의 원고 삼촌이 가져다 준거예요?” [그래, 나야.] 전화기 너머에서 긴 숨소리가 들려왔고 말소리에는 뚜렷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왜 그랬어요?” 몇 초 동안 침묵한 뒤에야 민태건은 입을 열었다. [그 그림은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되고 더욱이 네 이름을 씌워서는 안 돼. 너 모르는 거야?] ‘이제 보니 사람들이 눈치 채는 게 두려웠던 거구나.’ 여전히 원단비가 민태건에게 분수에 맞지 않은 생각을 품고 있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단비는 입가에 비참한 웃음을 지으며 핏발 서린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표절을 한 건 내가 아니라 진민서잖아요. 삼촌이 원고를 그녀에게 주면 전 더 이상 이 표절의 오점을 씻을 수 없게 돼요! 내 경력 전체가 망가졌다고요!” [민서는 단지 실수한 것뿐이지 고의로 하는 게 아니야. 네가 민서를 대신해 누명 한 번 쓰면 뭐 어때?] [내가 처음에 너에게 미술을 배우라고 한 건 단지 네가 취미를 찾아 주의력을 분산시키길 바랬던 거야. 그러니 그렇게 진지하게 임할 필요 없어.] [어차피 내가 평생 널 키울 거니 남은 인생 동안의 생계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 말을 마친 후 민태건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원단비는 여전히 핸드폰을 들고 있었고 눈빛은 앞의 거울로 향했다. 거울 속의 울어서 빨갛게 부은 눈과 초췌한 얼굴을 보고 원단비는 그것이 자신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게 원단비가 맞는 건가? 원단비는 민태건도 낯설게 느껴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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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모든 일을 마친 원단비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민태건은 먼저 집에 도착했고 거실 소파에 앉아 원단비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그녀를 불렀다. “거기 서!” “왜 그런 곳에 일하는 거야? 돈 부족해?” “집에 심심해서 다양한 생활을 체험해보고 싶었어요.” 이에 민태건 얼굴의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앞으로 가지 마.” 원단비는 이제 확실히 갈 필요가 없었다.원단비는 대충 대꾸하고 고개를 숙인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그 후 며칠 동안 민태건은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진민서가 매일 수많은 사진을 원단비에게 보내곤 했다. 반지, 웨딩 사진, 결혼식장, 부케 등 매 한 장 속에는 모두 결혼의 행복과 기쁨이 내비쳐졌다. 원단비는 진민서에게 답장하지 않았고 짐 싸느라 바빴다. 마지막 셋째 날 아침, 원단비는 계단 입구에서 막 외출하려던 민태건을 만났고 얼른 그를 불렀다. “삼촌, 3일 후 한 시간만 내서 저와 생일 보내줄 수 있어요?” 민태건이 원단비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키워줬으니 그녀는 민태건과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태건에게 이 말을 도발처럼 들렸다.때문에 민태건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내가 너에게 이런 요구를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지!” 민태건이 또 화를 내는 것을 본 원단비는 얼른 두 마디 설명했다. “이번엔 기분 나쁜 짓도 안 하고 몇 년 전처럼 고백도 안 하고 그냥...”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던 건데.” 두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고 원단비는 마지막 몇 글자를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기에 민태건은 한 글자도 듣지 못했다. 원단비가 몇 마디 정상적인 말을 하는 걸 듣고나서 민태건은 비로소 마음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생일날, 원단비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다렸지만 여전히 민태건은 오지 않았다. 곧 이륙 시간이 다가오자 원단비는 핸드폰을 들고 전화 한 통을 걸었다. 벨소리가 울린 지 10초 만에 귓가에는 진민서의 목소리가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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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오클랜드 공항의 비행기 착륙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먼 거리를 두고 원단비는 힘껏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고모 가족을 발견했다.원단비는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다가갔고 활짝 웃는 세 사람의 얼굴을 발견했는데 마음 가득한 우울함이 싹 사라졌다. “고모, 고모부! 지나야!” 10살이 된 윤지나는 사촌언니를 처음 만났지만 일찍 엄마에게서 원단비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들었기에 보자마자 그녀의 품에 안겼다. “언니, 비행기 타고 오느라 안 힘들었어요? 지나가 다리 주물러 줄게요.” 고모부가 앞으로 나와 원단비의 짐을 받자 윤지나는 포동포동한 손을 뻗어 그녀의 다리를 눌렀다. 천진하고 귀여운 얼굴의 윤지나를 보면서 원단비는 마음이 녹을 것 같았고 바로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언니 안 피곤해. 오히려 지나가 여기서 두 시간이나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언니를 기다리는데 왜 힘들겠어요? 전 언니가 제일 좋아요!” 말하면서 윤지나는 원단비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원단비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눈을 휘었을 때, 그 모습은 꼭 반달처럼 부드럽고 사랑스러웠다.원정숙은 한 손으로 딸을 데려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원단비를 끌어당기며 말투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12시간이나 날아서 오느라 힘들었을 거야. 단비야, 먼저 집에 가서 한잠 자고 쉬고 싶어? 아니면 가서 뭐 좀 먹을래?” 비행기 안에서 7~8시간 동안 잠만 잔 원단비는 정신이 매우 맑았고 손을 들어 윤지나의 코끝을 톡 치더니 웃으며 말했다.“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나야, 언니한테 뭐가 맛있는지 소개해 줘!” “제가 알고 있는 건 너무 많죠! 엄마, 내가 좋아하는 건 언니한테 다 시켜주면 안 돼요?” 이야기와 웃음이 오가는 사이에 세 식구는 원단비를 데리고 공항을 나섰다. 쓰레기통을 지날 때 원단비는 겸사겸사 핸드폰을 그곳에 버렸다. 원정숙은 원단비의 그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핸드폰을 버리는 거야? 고장 났어? 가져가서 고치면 되지. 안 그러면 국내에 있는 친구들, 그리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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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민태건은 욕실에서 밖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나오자마자 민태건은 머리를 닦으면서 물었다. “누구한테서 전화 왔어?” 진민서의 얼굴에는 약간 긴장된 표정이 스쳤지만 곧 부인했다. “스팸 전화였어. 욕 몇 마디 해주고 끊었어.” 민태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있는 옷을 들어 갈아입으려 했다. 민태건의 동작을 본 진민서는 마음이 움찔하여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모레가 결혼식인데 오늘은 여기 남는 게 어때?” 순간 민태건의 눈에는 불쾌함이 스쳤고 곧바로 싸늘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말했잖아, 모든 건 연기일 뿐이라고. 계약 결혼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이거 놔!” 민태건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는 모습에 진민서는 깜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알겠어, 미안해 태... 민 사장님.” 옷을 갈아입은 민태건은 핸드폰을 들고 곧장 문을 나섰다. 민태건은 차에 오르면서 기사에게 집으로 가라고 분부했다. 시간은 8시 정각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원단비와 약속한 시간은 이미 놓쳤다. 원단비가 또 혼자 슬퍼할까 걱정되었던 민태건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기다린 후 상대방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다고 떴다. 다시 걸어도 여전히 전화는 통하지 않았다. 민태건은 순식간에 미간을 찌푸렸고 메시지도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민태건은 곧바로 집사 박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단비는요? 전화 받으라고 하세요.” “[아가씨는 한 시간 전쯤 캐리어 하나를 들고 집을 나가셨어요. 아마 그림 그리러 가셨을 거예요.] ‘그림을 그린다고? 한밤중에 길도 잘 보이지 않는데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어디 가서 그림을 그린다는 거야?’ 설마 민태건이 약속을 어겨 화가 난 원단비가 가출 수법을 쓰기 시작한 건가? 요 몇 년 간 원단비가 해온 온갖 나쁜 행위들을 떠올리며 민태건은 가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민태건의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한 줄기 불이 지펴졌고 바로 보좌관 서지수에게 전화를 걸어 원단비의 핸드폰을 위치 추적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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