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겨울, 늦은 봄

늦은 겨울, 늦은 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4-12-18
에:   한청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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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주 씨, 개인 신상정보를 전부 다 삭제하시겠습니까? 삭제하면 안희주 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아무도 찾지 못할 겁니다.” 잠깐 침묵하던 안희주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아무도 절 찾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의아하게 여겼지만 이내 대답한다. “알겠습니다. 절차가 마무리되려면 보름 정도 걸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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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전화를 끊은 후 안희주는 휴대전화로 보름 뒤 F국으로 떠나는 항공편 티켓을 구매했다. 그 시각 TV에 주성 그룹 발표회가 재방송되고 있었다.일주일 전, 주성 그룹 대표 성서진이 주얼리를 발표했다. 전 세계 최고급 다이아몬드와 보석으로 만들어졌고 아내를 위해 제작한 단 하나뿐인 주얼리였으며 이름을 ‘러브 주’라고 지었다.안희주의 ‘주’를 따서 지은 이름이었는데 성서진이 안희주만을 사랑한다고 전 세계에 공개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러브 주’가 공개되자마자 각 포털사이트의 실검에 올랐고 SNS에서도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온통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 얘기뿐이었다. 발표회가 끝난 후 TV에 길거리 인터뷰가 이어졌다.“안녕하세요. 성서진 대표님과 사모님의 러브 스토리에 관해서 알고 계신가요?”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부러워하며 대답했다.“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전에 대표님이 책 한 권을 쓰셨는데 거기에 전부 사모님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사모님이 체리를 좋아해서 마당에 체리 나무를 심었대요. 우리 남편한테 좀 따라 배우라고 하니까 불가능하대요. 그때 어찌나 화가 나던지.”기자는 다른 사람에게도 질문했다. 그러자 한 젊은 여대생이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두 분은 정말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의 현실 버전이라니까요? 대표님은 사모님밖에 몰라요. 4년 전에 사모님이 신부전증에 걸려서 신장 이식을 받아야 했잖아요. 그때 대표님은 누구보다 마음을 졸였고 자기 신장이 사모님과 매치한다는 결과를 받자마자 사람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신장을 이식해주었어요. 사모님이 대표님의 목숨과도 같다면서 사모님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고 했어요.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좋은 남자가 있을 수 있죠?”...기자들이 여러 명을 인터뷰했는데 다들 하나같이 성서진과 안희주의 사랑을 부러워했다.여러 번이나 재방송되는 뉴스를 보면서 안희주는 자신을 비웃듯 피식 웃었다.어릴 적부터 얼굴이 예뻐서 그녀에게 대시하는 남자가 매우 많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이혼으로 사랑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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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전화를 끊은 후 안희주는 휴대전화로 보름 뒤 F국으로 떠나는 항공편 티켓을 구매했다. 그 시각 TV에 주성 그룹 발표회가 재방송되고 있었다.일주일 전, 주성 그룹 대표 성서진이 주얼리를 발표했다. 전 세계 최고급 다이아몬드와 보석으로 만들어졌고 아내를 위해 제작한 단 하나뿐인 주얼리였으며 이름을 ‘러브 주’라고 지었다.안희주의 ‘주’를 따서 지은 이름이었는데 성서진이 안희주만을 사랑한다고 전 세계에 공개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러브 주’가 공개되자마자 각 포털사이트의 실검에 올랐고 SNS에서도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온통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 얘기뿐이었다. 발표회가 끝난 후 TV에 길거리 인터뷰가 이어졌다.“안녕하세요. 성서진 대표님과 사모님의 러브 스토리에 관해서 알고 계신가요?”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부러워하며 대답했다.“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전에 대표님이 책 한 권을 쓰셨는데 거기에 전부 사모님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사모님이 체리를 좋아해서 마당에 체리 나무를 심었대요. 우리 남편한테 좀 따라 배우라고 하니까 불가능하대요. 그때 어찌나 화가 나던지.”기자는 다른 사람에게도 질문했다. 그러자 한 젊은 여대생이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두 분은 정말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의 현실 버전이라니까요? 대표님은 사모님밖에 몰라요. 4년 전에 사모님이 신부전증에 걸려서 신장 이식을 받아야 했잖아요. 그때 대표님은 누구보다 마음을 졸였고 자기 신장이 사모님과 매치한다는 결과를 받자마자 사람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신장을 이식해주었어요. 사모님이 대표님의 목숨과도 같다면서 사모님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고 했어요.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좋은 남자가 있을 수 있죠?”...기자들이 여러 명을 인터뷰했는데 다들 하나같이 성서진과 안희주의 사랑을 부러워했다.여러 번이나 재방송되는 뉴스를 보면서 안희주는 자신을 비웃듯 피식 웃었다.어릴 적부터 얼굴이 예뻐서 그녀에게 대시하는 남자가 매우 많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이혼으로 사랑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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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튿날 아침, 성서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안희주에게 모닝 키스를 해주었다.“희주야, 어제 결혼기념일을 놓쳤으니까 오늘 보충해줄게. 놀이공원 갈까? 전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별로 관심이 없었던 안희주가 거절하려는데 성서진은 이미 제멋대로 외출할 물건을 챙기더니 옷까지 준비해주었다.놀이공원에 도착해서도 안희주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적시는 걸 보고는 바로 물을 먹여주었고 인형을 힐끗거려도 망설임 없이 사다 주었다.회전목마, 범퍼카, 대관람차까지 전부 다 탔다. 아무리 유치한 놀이기구라도 안희주가 좋아하는 거라면 무조건 함께했다.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놓은 적이 없었다. 안희주가 놓으려고 해도 절대 놓지 않았다. 심지어 풍선까지 사서 그녀의 가방에 걸어주며 웃으면서 말했다.“희주야, 이러면 평생 널 잃어버릴 일이 없어.”‘잃어버릴 일이 없다고? 근데 내가 이번에 가려는 곳은 아마 평생 찾지 못할 거야. 넌 날 진작 잃어버렸어.’선남선녀의 알콩달콩한 모습은 놀이공원의 수많은 여행객들의 이목을 끓었고 두 사람을 알아본 사람도 있었다.“성서진 대표님이랑 사모님 아니야? 여기서 실물을 영접하다니.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한 여자가 흥분한 얼굴로 폴짝폴짝 뛰면서 남자 친구를 끌고 안희주의 앞으로 다가왔다.“저기... 사진 같이 찍어도 될까요? 저희 두 분 팬이거든요. 엄청 응원하고 있어요.”안희주는 신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여자에게 실망을 줄 수 없어 알겠다고 했다.성서진은 사진 찍기 싫어했지만 안희주의 뜻을 따랐다.찰칵.사진을 다 찍은 후 커플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 사이가 참 좋은 것 같아서 너무 부러워요. 계속 이대로 쭉 행복하셔야 해요.”성서진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옆에 서 있는 안희주가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에게 앞날이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점심을 먹는 사이에 성서진은 자꾸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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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안희주는 심장이 너무 아파 오른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성서진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다가왔다.“희주야, 왜 그래?”그의 두 눈에 담긴 걱정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안희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도 당장 따라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이렇게나 사랑하면서도 그녀에게 숨긴 게 너무도 많았다.안희주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말했다.“괜찮아요...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요.”성서진은 그녀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다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서진은 그녀를 웃게 해주려고 재미난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고 노력해도 안희주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안희주는 유리창에 기댄 채 창밖의 풍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희주야,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성서진이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없어요.”안희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오늘 내가 봤던 드라마를 생각하고 있었어요.”성서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무슨 드라마인데?”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서진을 쳐다보았다.“남자 주인공이 예전에는 여자 주인공을 엄청 사랑했었는데 나중에 마음이 변했고 여자 주인공한테 숨기는 것도 많더라고요...”안희주는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고 빤히 쳐다보았다.“서진 씨, 나중에 서진 씨도 마음이 변하면...”“절대 그럴 일이 없어.”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서진은 이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가로챘다.“희주야, 내가 평생 사랑하는 여자는 너뿐이야. 이 세상 남자들이 다 배신한다고 해도 난 배신하지 않아. 난 네가 없으면 안 돼.”안희주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그때 성서진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그가 망설이다가 끊으려 하자 안희주가 말했다.“받아요.”성서진은 그제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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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러브 주’의 가치가 어마어마하여 팔려면 경매장에 내놓는 방법뿐이었다. 그렇다면 ‘러브 주’가 경매장에 나왔다는 걸 봤단 말인가?안희주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경매장에 갔었어요?”성서진은 잠깐 멈칫하면서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가 싶더니 잠시 후 대답했다.“너한테 주얼리 좀 사주려고 갔지.”‘나한테? 아니면 임유리한테? 임유리가 엄청난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줬는데 당연히 보답해줘야지.’안희주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했다.“판 게 아니라 기부했어요.”성서진이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희주 네가 착한 건 알겠는데 다른 건 다 기부해도 이것만은 기부하지 말았어야지.”그러고는 품 안에서 케이스 하나를 꺼내 안희주에게 건넸다. 검은색 벨벳 케이스 안에 ‘러브 주’가 담겨있었다. 주얼리의 빛깔은 여전히 남달랐다.“내가 다시 사 왔어. 러브 주는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뜻하는 거니까 절대 빼선 안 돼.”성서진은 다시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안희주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온 목걸이를 보면서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성서진, 원래 연기를 이렇게 잘했어? 다른 여자한테서 달려오자마자 닭살이 돋는 애정 표현이 그렇게 쉽게 나와?’그날 저녁 안희주가 자려고 누웠는데 성서진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그는 재빨리 끊어버리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또 울렸다.끊임없이 울리는 전화에 성서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안희주가 시끄러워할까 봐 전화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주변이 조용하여 상대의 목소리가 더욱 정확하게 들렸다.“서진아, 나와 놀자. 우리 다 모였는데 너만 없어.”성서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희주 재워야 해. 끊어.”“끊지 마. 아내 바보 그만하고 나와. 우리 엄청 오랜만에 모이는 거란 말이야.”“그래. 남들은 아내가 생기면 친구를 잊는다던데 넌 아예 친구를 버려버렸어. 너무한 거 아니야?”소리가 너무 복잡한 탓에 성서진은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됐어. 조용히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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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안희주는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더는 그와 연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만 일어날게요.”성서진도 함께 일어나려 하자 친구들이 말렸다.“형수님이야 몸이 안 좋아서 푹 쉬어야 하지만 우린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대로 가면 안 되지.”“그래. 형수님 혼자 집에 보내서 쉬게 하고 넌 우리랑 같이 놀자.”안희주는 성서진이 잡고 있는 손을 빼면서 천천히 말했다.“기사님이 데려다주니까 걱정하지 말고 서진 씨는 그냥 여기 있어요.”그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어찌나 빨리 나갔는지 성서진이 미처 잡을 새도 없었다.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희주는 겉옷 주머니에 그녀의 휴대전화가 아닌 다른 사람의 휴대전화를 발견했다. 검은색 케이스인 걸 보니 성서진의 휴대전화였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운전기사에게 차를 다시 돌리라고 했다.그런데 차가 술집 문 앞에 멈춰선 순간 택시에서 내리는 임유리를 발견했다. 임유리는 휴대전화를 보면서 화장을 고치고는 곧장 술집으로 걸어갔다.안희주는 휴대전화를 꽉 쥔 채 임유리를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성서진의 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그러더니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성서진의 품에 와락 안겼다. 성서진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머리를 어루만졌다.“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임유리는 성서진의 어깨에 기대어 애교 섞인 웃음을 지었다.“서진 씨가 보고 싶어서 전화 받자마자 바로 달려왔죠.”성서진이 가볍게 웃었다.“상 줘야지, 그럼.”그러고는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됐어. 애정 행각 좀 그만해.”친구들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장난을 쳤다.문 앞에 서서 문틈 사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희주의 표정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다들 성서진과 임유리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그녀 앞에서 연기했던 것이었다.“서진아, 유리도 왔으니까 이젠 화끈하게 놀아도 되겠지?”친구들이 손뼉을 치자 아까 나갔던 여자들이 다시 우르르 들어갔다. 모두 품에 여자 한 명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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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집으로 돌아온 안희주는 고열에 시달렸고 열이 좀처럼 쉽게 내리지 않았다.성서진이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얼굴도 빨갛게 달아오른 안희주를 보고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곧장 그녀를 들어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안희주는 눈꺼풀이 무거워 겨우 눈을 떴다.주사를 갈아주러 들어왔던 간호사는 안희주가 깨어난 걸 보고 매우 기뻐했다.“사모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온 하루 열이 내리지 않아서 성 대표님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요. 계속 옆에서 지키다가 방금 전화 받으러 나가셨어요. 대표님 불러올까요? 사모님이 깨어나신 거 알면 엄청 좋아하실 겁니다.”안희주는 고개를 내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아니에요.”간호사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주사를 갈아준 후 나가버렸다.커다란 병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여 밖에서 통화하는 성서진의 목소리마저 다 들릴 정도였다.늘 차분하고 점잖은 성서진은 그녀 앞에서만 통제력을 잃었었다. 그런데 이젠 통화하는 목소리에 기쁨과 흥분이 담겨있었다.잠시 후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는데 성서진이 가버린 듯했다.그녀는 온 힘을 다해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몇 층 내려가다가 성서진이 임유리를 부축하여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두 사람의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임유리는 안희주를 발견하고 일부러 놀란 척 소리를 질렀다.“어머, 사모님도 병원에 계셨어요?”그 소리에 성서진이 고개를 들었고 멀지 않은 곳의 안희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순간 움찔하더니 재빨리 임유리의 손을 내려놓았다.“희주야, 약을 가지러 내려왔다가 실수로 유리랑 부딪혔어. 유리가 임신했는데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부축한 거야.”성서진은 안희주가 오해할까 봐 다급하게 설명했다.안희주의 시선이 임유리의 아랫배로 향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말했다.“유리 씨 언제 임신했어요? 아이 아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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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아니에요, 아무것도.”안희주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에 눈부신 불꽃놀이가 아름답게 펼쳐졌다.낮에 임유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 저녁에 성서진이 그녀를 위해 불꽃놀이를 준비했다고 했다.안희주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창밖의 불꽃놀이를 바라보자 성서진이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불꽃놀이 좋아해? 그럼 다음에 이것보다 더 성대한 불꽃놀이를 보여줄게. 어때?”성서진은 안희주를 품 안에 꼭 껴안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안희주는 겉으로는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에 씁쓸함과 눈물이 섞여 있었다.“서진 씨, 난 다른 사람이 했던 건 싫어요.”그게 불꽃놀이든 사람이든...“...”분명히 불꽃놀이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서진은 가슴이 움찔하여 저도 모르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잠깐 침묵하다가 그녀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그럼 다른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줄게. 절대 다른 여자가 부럽지 않게 말이야.”안희주는 아무 대답 없이 먼 곳만 조용히 바라보았다.그 후 며칠 동안 성서진은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왔는데 누가 봐도 수상했다. 도우미마저 이상함을 눈치채고 웃으면서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몰래 서프라이즈를 준비 중인가 봐요.”“그러게요. 대표님은 정말 사모님을 사랑하세요. 얼마 전에 주얼리를 제작하더니 이젠 또 새로운 걸 준비하고. 서프라이즈가 끊이질 않네요.”하지만 안희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성서진은 안희주의 손을 잡고 외출했다.“희주야, 나랑 어디 다녀오자. 무조건 마음에 들 거야.”안희주가 거절하려는데 휴대전화가 갑자기 진동했다. 임유리가 문자를 보냈다.[희주 씨, 서진 씨 마음속에 희주 씨가 중요한지 내가 중요한지 한번 맞혀봐요.]곧이어 성서진의 휴대전화도 진동했다.안희주가 대충 힐끗거렸는데도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말았다. 임유리가 검은 스타킹을 신은 다리 사진 한 장을 보내면서 이런 문자도 덧붙였다.[시간 지나면 기다리지 않아요.]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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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첫날 임유리가 성서진이 직접 그녀에게 새우껍질을 까주는 사진을 보냈을 때 안희주는 화로를 준비하여 성서진과 함께 찍은 사진을 몽땅 태워버렸다.두 번째 날에 성서진과 함께 오동나무 밑에서 키스하는 사진을 보냈다. 안희주는 일꾼들을 불러서 별장 뒷마당의 체리 나무를 밀어버렸다.세 번째 날에는 성서진이 그녀의 라이브 방송에서 했던 고백 모음집이었다. 안희주는 그가 예전에 그녀에게 썼던 수백 통의 연애편지를 꺼냈다.오랜 시간이 지나 누렇게 변했지만 글씨는 여전히 뚜렷하게 잘 보였다.안희주는 필적을 어루만지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문서 세단기에 던졌다....떠나는 당일 아침.안희주가 눈을 떠보니 오랜만에 집으로 들어온 성서진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의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데 표정이 왠지 어두워 보였다.“희주야, 방금 문자가 한 통 왔는데 삭제 성공이라고 했어. 뭘 삭제한 거야?”안희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다급하게 휴대전화를 가져와 확인해보니 개인 신상정보를 성공적으로 삭제했다는 문자였다.다행히 비밀번호를 설정해놓은 상태라 성서진은 삭제 성공이라는 내용밖에 보지 못했다. 안희주는 그제야 마음을 놓으면서 말했다.“아니에요. SNS 계정이 해킹당했는데 안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다시 복구한 다음에 삭제했어요.”성서진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웃었다.“자기가 좋아하는 거 사 왔어. 뭘 사 왔는지 맞혀봐.”안희주는 잠깐 멈칫했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동쪽 구역에서 파는 찹쌀도넛요.”“어떻게 알았어?”성서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어떻게 모를 리가 있겠는가?예전에 연애할 때 매번 그녀가 화를 내면 달래려고 머나먼 동쪽 구역의 그 가게까지 가서 찹쌀도넛을 사 오곤 했다.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 순식간에 마음이 녹아내렸었다. 안희주는 주얼리도, 비싼 자동차도 아닌 딱 그 찹쌀도넛을 좋아했다.그때 성서진이 웃으면서 이런 말도 했었다.“우리 희주 달래기 너무 쉬운 거 아니야?”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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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안희주는 임시 주민등록증을 챙기고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드디어 모든 게 다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F국에 도착한 후 안희주는 새로운 신분이 생겼다. 바로 바닷가 민박집 사장.그녀와 달리 명인시에 있는 성서진은 거의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몇 시간 전.임유리를 집에 데려다준 후에도 그녀는 성서진을 놓아주지 않았다.“서진 씨,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겠다고요?”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애교를 부렸다.성서진은 어찌할지 계속 고민했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불안했다.“그만 올라가. 오늘은 희주 옆에 있어야 해.”조금 전 안희주와 한 약속이 떠올라 임유리의 손을 뿌리쳤다. 이제 보니 오랫동안 그녀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다. 더 혼자 뒀다간 삐질 거라고 생각했다.그 생각에 성서진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임유리는 다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서진 씨, 내가 그 옷을 입은 걸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집까지 데려다줬는데 오늘 아니면 다음엔 입지 않을 거예요.”말하면서도 손으로 계속 그의 옷 속을 더듬거렸다. 그런데 성서진의 눈빛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안 돼. 희주랑 약속했단 말이야.”하지만 결국 임유리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타협했다.몇 시간 후 성서진은 옷을 정리했다. 구겨진 곳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희주야, 나 왔어. 늦게 와서...”미안해라는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성서진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별장이 텅 비어있었고 안희주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쓰레기통에 입도 대지 않은 찹쌀도넛이 버려져 있었다.순간 마음이 움찔한 그는 본능적으로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안희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라도 한 것처럼.“희주야...”그녀의 이름을 부를수록 성서진은 더욱 당황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불가능한 생각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희주가 날 떠났나? 아니, 그럴 리가 없어.’“희주야,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지?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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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럼 너희들은... 희주가 어디 갔는지 알아? 언제 나갔어?”성서진이 마른 입술을 적시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도우미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침 일찍 짐을 챙기고 나가셔서 저희도 잘 몰라요.”‘나갔다고? 어디 갔지?’성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각자 가정을 꾸렸기에 절대 부모님을 찾아갈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희망을 안희주의 친구들에게 거는 수밖에.“여보세요? 성서진입니다. 혹시 희주 어디 있는지 알아요?”“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희주가 왜 나랑 같이 있겠어요?”이런 대화만 벌써 여러 번이었다.성서진은 심지어 그의 친구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안희주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극도의 절망감이 다시 그를 덮쳤고 마치 안희주가 없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안희주는 그가 평생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였고 그의 피와 살이나 다름없었다. 살이 뜯겨나간 고통에 성서진은 완전히 무너져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희주야, 장난 좀 그만하면 안 될까? 보고 싶어, 희주야.”성서진이 목놓아 울부짖었다. 두 눈에 핏발이 서서 벌겋게 된 모습은 짝을 잃은 수컷 사자 같았다.그는 문득 뭔가 떠올라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다.서재로 들어가 선물 상자를 꺼냈다. 손을 슬쩍 댔을 뿐인데 ‘보름 뒤에 열어보기’라고 적은 포스트잇이 떨어졌다.그는 마치 희망이라도 찾은 것처럼 선물 상자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희주가 이 안에 말을 남겼을지도 몰라. 나더러 찾아오라고.”성서진은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겹겹이 쌓인 포장지를 뜯고 선물 상자를 열었다. 안희주의 사인이 적힌 이혼 합의서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말...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성서진은 이혼 합의서를 꽉 쥔 채 넋이 나간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희주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데 날 버렸다는 게 말이 돼? 희주가 나한테 준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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