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주는 임시 주민등록증을 챙기고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드디어 모든 게 다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F국에 도착한 후 안희주는 새로운 신분이 생겼다. 바로 바닷가 민박집 사장.그녀와 달리 명인시에 있는 성서진은 거의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몇 시간 전.임유리를 집에 데려다준 후에도 그녀는 성서진을 놓아주지 않았다.“서진 씨,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겠다고요?”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애교를 부렸다.성서진은 어찌할지 계속 고민했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불안했다.“그만 올라가. 오늘은 희주 옆에 있어야 해.”조금 전 안희주와 한 약속이 떠올라 임유리의 손을 뿌리쳤다. 이제 보니 오랫동안 그녀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다. 더 혼자 뒀다간 삐질 거라고 생각했다.그 생각에 성서진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임유리는 다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서진 씨, 내가 그 옷을 입은 걸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집까지 데려다줬는데 오늘 아니면 다음엔 입지 않을 거예요.”말하면서도 손으로 계속 그의 옷 속을 더듬거렸다. 그런데 성서진의 눈빛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안 돼. 희주랑 약속했단 말이야.”하지만 결국 임유리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타협했다.몇 시간 후 성서진은 옷을 정리했다. 구겨진 곳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희주야, 나 왔어. 늦게 와서...”미안해라는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성서진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별장이 텅 비어있었고 안희주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쓰레기통에 입도 대지 않은 찹쌀도넛이 버려져 있었다.순간 마음이 움찔한 그는 본능적으로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안희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라도 한 것처럼.“희주야...”그녀의 이름을 부를수록 성서진은 더욱 당황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불가능한 생각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희주가 날 떠났나? 아니, 그럴 리가 없어.’“희주야,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지? 빨리
“그럼 너희들은... 희주가 어디 갔는지 알아? 언제 나갔어?”성서진이 마른 입술을 적시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도우미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침 일찍 짐을 챙기고 나가셔서 저희도 잘 몰라요.”‘나갔다고? 어디 갔지?’성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각자 가정을 꾸렸기에 절대 부모님을 찾아갈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희망을 안희주의 친구들에게 거는 수밖에.“여보세요? 성서진입니다. 혹시 희주 어디 있는지 알아요?”“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희주가 왜 나랑 같이 있겠어요?”이런 대화만 벌써 여러 번이었다.성서진은 심지어 그의 친구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안희주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극도의 절망감이 다시 그를 덮쳤고 마치 안희주가 없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안희주는 그가 평생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였고 그의 피와 살이나 다름없었다. 살이 뜯겨나간 고통에 성서진은 완전히 무너져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희주야, 장난 좀 그만하면 안 될까? 보고 싶어, 희주야.”성서진이 목놓아 울부짖었다. 두 눈에 핏발이 서서 벌겋게 된 모습은 짝을 잃은 수컷 사자 같았다.그는 문득 뭔가 떠올라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다.서재로 들어가 선물 상자를 꺼냈다. 손을 슬쩍 댔을 뿐인데 ‘보름 뒤에 열어보기’라고 적은 포스트잇이 떨어졌다.그는 마치 희망이라도 찾은 것처럼 선물 상자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희주가 이 안에 말을 남겼을지도 몰라. 나더러 찾아오라고.”성서진은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겹겹이 쌓인 포장지를 뜯고 선물 상자를 열었다. 안희주의 사인이 적힌 이혼 합의서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말...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성서진은 이혼 합의서를 꽉 쥔 채 넋이 나간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희주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데 날 버렸다는 게 말이 돼? 희주가 나한테 준
‘내가 바람피운 걸 진작 알고 있었나?’성서진은 이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동안 잘 숨긴다고 생각했고 안희주와 임유리 모두 잘 챙길 수 있을 줄 알았다.그리고 이미 충분히 신중하게 행동했고 임유리는 그냥 데리고 노는 여자일 뿐이기에 안희주 앞에 데려오지 않는 이상 절대 들킬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결국 알아버리고 말았다.‘그나저나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희주도 참 독한 애야. 어떻게 나랑 이혼하고 나의 세상에서 사라질 수가 있어?’눈물이 눈가를 적셨고 시선이 점점 흐릿해졌다.그러다가 문득 예전에 안희주가 프러포즈를 받아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앞으로 좋은 아내가 되려고 노력할게요. 하지만 난 무슨 이유든지 날 속이는 건 용납 못 해요. 만약 날 속인다면 서진 씨의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겁니다.”그때까지만 해도 성서진은 절대 그녀에게 미안한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속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마음 같아선 이 마음을 꺼내서 안희주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변한 걸까?친구들이 옆에서 자꾸 부추길 때부터, 매일 똑같은 결혼생활이 지겹기 시작한 때부터, 그리고 수많은 유혹이 그를 뿌리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점점 예전의 그 마음을 잃어갔다.결국 더 자극적인 걸 원하게 되면서 임유리의 저질스러운 수단에도 쉽게 넘어갔다.친구들이 안희주에게 변함없이 잘해주면 절대 알 리가 없고 영원히 허황한 꿈속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설득하기도 했다.하여 그는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을 거란 착각에 빠졌다. 그러다 보니 안희주가 참고 양보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까맣게 잊고 말았다.부모님의 생생한 예가 있으니 절대 그들과 똑같은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아이 때문에 버티다가 나중에 서로에게 남은 거라곤 원망밖에 없었고 헤어진 후에는 심지어 원수가 되기도 했다.딸을 사랑하는 마음도 매일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점점 사라졌다. 나중에는 안희주마저 미워하게 되었
성서진은 무의식적으로 이혼 합의서를 찢으려다가 문득 그녀가 남기고 간 마지막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찢어버린다면 마지막 그리움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그는 이혼 합의서에 적힌 안희주의 이름을 어루만졌다. 두 눈에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희주야, 내가 잘못했어. 다른 여자를 만나선 안 됐었는데.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너뿐이야.”“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아. 뭘 해도 다 되는데 떠나지만 말아줘, 응?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희주야...”잘못을 하도 많이 빌어서 목소리가 다 갈라졌다. 하지만 그 사과를 들어야 하는 사람은 눈앞에 없었다.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이 없었다.“안희주, 내가 사인하기 전까지 우린 여전히 부부야. 널 꼭 찾아낼 거야.”성서진의 두 눈에 결연함이 비쳤다.절대 이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안희주는 그의 것이니까. 무릎 꿇고 싹싹 비는 한이 있더라도 안희주를 잡을 것이다.성서진은 조심스럽게 이혼 합의서를 다시 넣었다. 다행히 휴대전화에 그녀의 사진이 남아있어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었다.그는 온 집안을 뒤지면서 안희주와 연관된 물건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그녀와 연관된 물건은 진작 다 버려서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입지 못하는 옷까지 팔 건 팔고 버릴 건 버렸으며 가구마저 싹 다 바꿔버렸다. 정말 남은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그때 임유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서진 씨, 방금 인터넷에서 러브 주가 경매로 나왔다는 소식을 봤어요. 사모님이...”“뭐?”순간 흠칫한 성서진은 그녀에게 부채질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장 비서, 러브 주가 다시 경매에 나왔는지 알아봐. 만약 나왔다면 얼마가 들든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낙찰받아.”한참이 지나서야 비서 장재영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그게... 대표님, 이미 해외의 한 수집가가 러브 주를 사 갔어요. 우리 한발 늦었어요...”툭.성서진이 휴대전화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순간 화면이 산산
곧이어 약간 어질러진 침대 사진이 성서진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에 성서진의 눈동자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왔다.“너였어?”매서운 목소리와 함께 성서진이 무서울 정도로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기 시작하더니 어디론가 문자했다.[임유리, 내가 경고했지. 희주가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안 된다고.]문자를 확인한 임유리는 하찮다는 듯 가볍게 웃더니 도발이라도 하듯 전화를 걸었다.“안희주 씨, 서진 씨 말투는 언제 따라배운 거예요? 이제 제법 잘 따라 하네요?”“내가 안희주 씨였다면 사모님 자리 진작 내려놓았을 거예요. 서진 씨 아이를 가졌거든요. 곧 서진 씨가 프러포즈할지도 몰라요.”“그때가 되면 안희주 씨는 아무 존엄도 없이 쫓겨나고야 말겠죠. 우스운 꼴 보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빨리 물러나요. 그래야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죠. 그렇게 질척거리다가 더 험한 꼴 보는 수도 있어요.”임유리의 말투는 점점 기세등등했지만 수화기 너머는 여전히 조용했다. 임유리는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이내 불안함을 걷어내고 말을 이어갔다.“안희주 씨, 너무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워서 말이 안 나오죠? 내가 전에 그랬잖아요. 서진 씨가 마음에 둔 사람은 나라고. 안희주 씨는 그냥 쇼윈도라고나 할까?”곧이어 들리는 성서진의 목소리에 임유리의 기세가 한꺼번에 박살 나고 말았다.“그래?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안희주를 도발해? 그동안 내가 너무 잘해줬다, 그렇지? 그러니까 정신 못 차리고 이렇게 나오는 거 아니야?”“말해. 안희주한테 도대체 무슨 말 했어?”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뱉어낸 한마디 한마디가 임유리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했다. 이제 정말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임유리는 손이 너무 떨려 핸드폰을 잡고 있기도 힘들었다.‘아니, 아니야. 뱃속에 서진 씨 아이가 있는데 날 어떻게 하지는 못할 거야.’순간 자신감을 되찾은 임유리는 1초 만에 눈물을 뚝뚝 떨구며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진 씨, 미...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사모님이 먼저 욕
임유리는 너무 무서웠다. 성서진이 안희주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임유리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절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지금 임유리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임유리는 얼른 라이브 할 수 있게 준비하며 온갖 불쌍한 척은 다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임유리가 라이브를 켜고는 눈물을 흘리며 억울한 척했다.“언니들, 오빠들. 나... 너무 힘들어요...”“내 남자 친구가... 양다리를 걸쳤어요. 아마 그 여자를 위해 나를 버릴 것 같은데 난 이미 남자 친구의 아이까지 가졌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전에 분명... 분명 많이 사랑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걸까요?”“...”임유리가 그럴듯하게 살을 붙이자 내연녀에서 단번에 괴롭힘을 당한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게다가 사실을 왜곡하면서 안희주에게 했던 짓을 모두 안희주가 한 짓으로 돌렸고 임유리는 어느새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언니들, 오빠들,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 너무 무서워요. 설마 남자 친구가 아이를 지워버리라고 하지는 않겠죠?”“오빠 없이는 살아도 아이는 지우기 싫어요. 아이는 내 정신적 지주라 없으면 안 돼요.”임유리가 라이브 방송을 이어가며 눈물로 호소하자 정의감에 사로잡힌 네티즌들이 임유리 편을 들기 시작했다.[세컨드가 너무 했네.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지?][남자는 역시 쓸게 못 돼.][저 근처 사는데 제가 도와줄게요.]...흥분한 몇몇 네티즌들은 임유리네 집 근처까지 찾아와 지켜주겠다고 나섰다. 임유리는 그 사람들에게 주소를 알려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유리네 집 아래에는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유리 씨, 무서워하지 마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잘못하면 벌받아야죠. 우리가 있는 한 절대 유리 씨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몰려온 네티즌들이 임유리 앞을 막아섰다. 임유리는 그제야 아랫배를 만지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곧이어 성서진이 까만 제복을 입은 보디가드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거슬리는
“닥쳐. 임유리, 넌 그냥 잠깐 심심풀이로 쓰인 장난감일 뿐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랑 희주에 관해서 토론하는 거지?”성서진의 눈빛은 차갑다 못해 음침하기까지 했다.“고작 아이 하나 가지고.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어.”“저 여자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서 중절 수술시켜.”절망한 임유리가 어떻게든 배를 감싸 쥐었다. 목숨도 지키고 부귀영화도 누리려면 무조건 이 아이를 지켜야 했기에 일부러 사람이 많은 쪽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무조건 그녀를 구해줄 거라고 믿었다. 라이브 방송에서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그녀를 위해 나서주겠다고 했던 그 네티즌들이 떠올랐다.성서진이 손을 저으며 쫓아가던 보디가드를 멈춰 세우더니 마지막 발악을 하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눈빛이 점점 매서워졌다. 마치 곧 죽을 포로를 보는 사람처럼 말이다.아니나 다를까, 임유리는 이내 더 큰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흥분에 사로잡혔던 네티즌들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게 뉴스에 오르는 성서진과 주성 그룹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길 가던 아이에게 물어봐도 성서진이 안희주를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알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부러워하는 부부가 많았기에 아이 앞에서도 종종 얘기하곤 했다.네티즌들은 성서진과 성서진이 데리고 온 보디가드를 본 순간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봤지만 그들이 즐겨보던 커플 유튜버 임유리가 성서진의 내연녀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에 네티즌들은 성서진에 대해 크게 실망하면서도 임유리가 그들의 동정심을 이용해 본처인 안희주를 내연녀로 만든 것에 더 분노했다. 그런 임유리를 믿고 보호해 주겠다고 나서며 편까지 들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임유리가 그들의 선심을 이용해 그들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엎어버릴 수도 있었다. 임유리는 그쪽으로 달려가자마자 분풀이하려고 달려든 네티즌들에게 묻히고 말았다. 네티즌들은 임유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집단 폭행했다.‘내연녀’, ‘세컨
하지만 성서진은 임유리에게 그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이미 안희주에게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녀를 되돌리려면 이 아이를 절대 남겨서는 안 된다.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한 성서진과 안희주는 영원히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마음을 모질게 먹은 성서진은 보디가드에게 임유리를 끌고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임유리는 여러 번 반항했지만 결국 보디가드를 이기지 못하고 차가운 수술대에 눕고 말았다. 마취가 시작되자 임유리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눈꺼풀도 점점 스르르 감겼다.다시 깨어났을 때 아랫배는 이미 텅 빈 상태였고 모양을 갖춰가던 아이는 죽고 말았다. 게다가 아랫배가 찢어질 듯이 아파 움직이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 이제 이 세상 어디서도 그 아이를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절망한 임유리가 침대에 누워있는데 보디가드가 얼른 안희주에게 얼른 사과하라고 보챘다.얼마 지나지 않아 성서진은 임유리가 올린 사과 영상을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당겼지만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임유리가 사과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성서진은 이미 안희주를 잃었고 안희주가 어디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처럼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안희주가 인터넷에 남겨놓은 흔적만 아니었다면 성서진은 안희주의 존재가 꿈은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희주가 떠나던 날 임유리를 바래다주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겠지.”“내가 임유리의 꼬드김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그랬다면...”달리 방법이 없었던 성서진은 룸에 앉아 술만 계속 퍼부어댔다.제대로 된 잠을 잔 지가 언젠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집에 스며들었던 안희주의 향기가 점점 옅어져 더는 있을 수가 없었다.성서진은 몇 병인지 모를 술을 한꺼번에 들이부었지만 취하기는커녕 점점 더 말짱해졌다. 이제 옆에 안희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말이다.“허허.”성서진이 술병을 안고 씁쓸하게 웃었다.“희주야. 미안해. 술 마시면 안 되는 건데. 술 냄새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는
“희주야.”성서진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면서도 안희주의 이름을 불렀다.성주환이 어두운 표정으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성서진, 오늘부터 열심히 일하면서 몸조리하는 데 집중해. 안희주 찾기만 해봐.”“쿨럭쿨럭.”성서진이 연신 기침하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왜요?”“희주 내 와이프예요. 이혼 서류에 사인하지 않았으니 아직 부부예요.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나 용서해줄 거예요.”“사실 희주 마음 약한 사람이에요. 잘 달래기만 하면 용서해 줄 거예요.”“닥쳐.”성주환이 성서진의 말을 칼같이 잘라버리더니 안희주와 나눈 통화를 들려줬다.또렷한 말소리가 병실을 가득 메웠고 이내 성서진의 모든 자신감이 부서졌다. 녹음 파일은 끝났지만 방안은 여전히 조용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성서진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이건 가짜에요. 희주 찾으러 가야겠어요. 지금 당장 만나야겠다고요.”“가서 알려줄 거예요. 내게 여자는 희주밖에 없다고, 평생 사랑한 여자는 희주 밖에 없다고요.”성서진은 막무가내로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링거 바늘을 뽑아 던지며 허약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성주환은 말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성서진은 몇 걸음 걸지 못하고 바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등에 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다시 터지면서 피가 새어 나왔다.성서진이 이를 악물고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앞으로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몇걸음 걷지 못하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성주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너희들, 서진이 침대로 옮기고 몸조리 잘하게 지켜. 절대 나가지 못하게 해.”성주환이 이렇게 말하더니 입에 약을 털어넣었다. 성주환은 몸이 좋지 않았다. 산에서 노후 생활을 보낸 것도 사실 몸조리하기 위해서였지만 이 나이에 다시 소환되어 뒤처리를 맡을 줄은 몰랐다.성주환은 성서진을 챙기고 바로 옆 병실에 누워 의사와 간호사의 검사를 받았다. 3일 후 성서진은 차도를 보이자마자 바로
“미안해요. 프러포즈는 못 받아주겠네요. 서진 씨 더는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 헤어져요.”꿈속에서 안희주는 성서진의 손을 뿌리치더니 점점 더 멀어져 갔다.“희주야, 아니야. 그러면 안 돼.”“내가 잘해줄게. 네가 좋아하는 연남동 찹쌀 도넛도 매일 매일 사줄게. 쥬얼리, 장신구, 부동산, 주식, 네가 원하는 건 다 줄게. 내 곁에 남아주면 안 돼?”성서진이 간절하게 애원했지만 안희주는 고개를 돌리지도, 눈빛을 주지도 않았다. 미친 듯이 쫓아가 봐도 소용이 없었고 손에 들었던 결혼반지도 사라졌다.‘희주가 날 버리다니. 내 사랑을 버리다니.’“희주야. 희주야.”성서진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고 눈을 질끈 감은 채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에서 깨지 못하고 안희주의 이름만 연신 불러대는 성서진을 보고 성주환은 걱정이 앞서 한숨을 푹 내쉬더니 비서를 시켜 어렵게 안희주의 최신 연락처를 알아냈다.“여보세요? 희주야. 나다. 성서진 할아버지. 우리 결혼식 때 한번 봤지?”금방 손님을 들여보낸 안희주는 갑작스러운 전화에 어리둥절했다.“할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만약 서진 씨와 재결합하라고 하실 생각이면 더 토론할 생각 없습니다.”한동안 성서진의 괴롭힘을 받지 않은 안희주는 성서진이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방법을 바꿔 성주환까지 소환하자 안희주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성주환은 다소 난감해 보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했다.“희주야. 서진이가 잘못한 거 안다. 하지만 서진이 지금 많이 아파. 용서하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한번만 보러 와주면 안 되겠니? 이번 기회에 깔끔히 끝내는 것도 좋지 않겠어?”“걱정하지 마. 앞으로 더는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거야. 내가 이렇게 부탁하마.”수화기 너머에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죄송해요. 지금 잘 지내고 있고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돌아가면 다시 나올 수는 있나요? 성씨 가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큰 가문이지만 저는 일개 서민일뿐이에요.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성서진은 안희주를 함부로 말한 ‘친구’에게 복수하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친구’들의 가문을 탄압했다. 그들이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임유리는 복수만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이용당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힘든 만큼 성서진도 똑같이 힘들게 해주고 싶었다.제보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 계정 하나를 따로 판 임유리는 라이브를 켜고 찌라시를 전파하는가 하면 성서진과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들려줬다.겨우 이미지가 좋아졌던 주성 그룹은 다시 화두에 올랐고 성서진의 이미지에도 데미지가 갔다. 귀국해서 조사받아야 했던 성서진은 안희주를 찾는 걸 일단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회사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나오는 바람에 주성 그룹 상황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많은 회사들이 성서진의 손에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주성 그룹이 이번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진다 해도 큰 회사였으니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어도 회사의 성장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성서진은 내외로 몰아치는 문제에 연속 3개월이나 제대로 쉬지 못했다.임유리는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으로 성서진이 구치소에 넣어버렸다. 위에서 조사를 진행했고 확실히 주성그룹에 재무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140억 원의 벌금으로 끝냈다.하지만 주성 그룹도 많은 인원이 빠져나갔고 조사를 받는 동안 프로젝트를 많이 잃으면서 원기를 크게 다치고 말았다.성주환은 진작 회사 일에 손을 놓고 산에서 노후 생활을 보내다가 이번 일로 소환되고 말았다.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진 성서진을 보며 성주환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회사 상황이 조금 나아지자 성주환이 성서진을 따로 불렀다.쿵.지팡이를 힘껏 바닥으로 내리꽂은 성주환이 엄숙하게 말했다.“꿇어.”성서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꿇어앉았다. 어찌나 말랐는지 뼈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서진아,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내가 여러 번 말했지? 초심을 지켜야 한다고, 와이프 말 잘
한참 고민하던 성서진이 서툴게 사과했다.“희주야, 내가 잘못했어. 다 내 잘못이야. 다른 여자와 엮이면 안 되는 건데. 임유리 아이는 이미 지우라고 했고 내 옆에 얼씬도 못 하게 했어. 제발 부탁이야. 나 좀 용서해 줘.”“네가 하라는 건 뭐든 다할게. 그러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성서진이 간절하게 애원하는 동안 안희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성서진의 말이 끝나자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래요. 용서해 줄게요.”예상 밖의 대답에 성서진은 순간 흥분했다.“정말?”성서진은 안희주의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캐치하지 못한 채 얼른 되물었다.“허.”안희주가 차갑게 웃었다.“원하던 대답 해줬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든 상관없이 용서해 줄게요.”“이제 만족해요? 만족했으면 그만해요.”용서했다는 말이 필요하다면 듣고 싶은 만큼 들려줄 수 있지만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산산이 부서진 거울은 아무리 이어 붙이려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할 말을 마친 안희주는 성서진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과감하게 전화를 끊었다. 안희주는 전에 사랑하지 않는다면 성서진이 눈앞에서 죽어버린다 해도 소용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성서진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희주야, 네가 좋아하는 찹쌀 도넛 사줄 테니까 나 용서해주면 안 돼?]성서진이 포기하지 않고 안희주에게 문자를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희주가 보내온 문자를 받았다.[이제 찹쌀 도넛 안 좋아해요.]‘왜 안 좋아하는 거지?’성서진은 손이 떨려 핸드폰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왜 갑자기 사랑하지 않는 거지?’문자를 더 보내고 싶었지만 다시 차단된 상태였다. 용서했다는 안희주의 말을 듣고도 성서진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안희주는 성서진이 원하는 게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이미 사랑하지 않기에,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았기에 그랬던 것이다.성서진은 처음으로 이렇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안희주가 떠난
성서진은 자책에 빠졌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조건 초심을 지켰을 테지만 아쉽게도 인생에 후회란 없었다.낯선 거리에 서 있는 성서진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바를 몰라 했다.‘계속 찾아야 하는 걸까? 계속 찾아야 하는 건 맞는데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지?’“안녕하세요. 사진에 나온 여자가 제 아내인데 싸우는 바람에 저랑 길이 엇갈렸어요. 혹시 연락처 좀 알려줄 수 있을까요?”성서진이 진지하게 말했다.주저하는 호텔리어가 답례로 큰돈을 줄 거라는 말에 환하게 웃더니 안희주의 연락처를 건넸다. 하지만 전화를 걸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아직 비행 중인가 보네.”성서진이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안희주에게 사과의 결심을 보여주기 위해 인스타에 반성문까지 올렸다. 반성문에는 어떻게 진심을 알게 되었는지, 어떻게 잘못을 깨닫게 되었는지 절절하게 적혀 있었다.사과하는 태도가 매우 진지할뿐더러 매일 새로운 내용으로 반성문을 올리며 안희주가 봐주길 바랐다. 그러자 일부 네티즌들도 원망하던 데로부터 그런 성서진을 마음 아파했고 성서진 편을 들기 시작했다.안희주는 그 반성문들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내가 떠나지 않았어도 이렇게 뉘우칠까?”“아니, 아마 점점 더 막 나갔겠지. 임유리만 만나던 데로부터 더 많은 여자를 만났을 거야. 한번 외도한 남자는 앞으로도 계속 외도할 거야.”안희주가 자문자답했다.‘내가 왜 용서해야지? 지금 이런 상태도 좋은데.’안희주는 이미 전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뤘다. 해변에 민박집을 열고 애완동물 몇 마리 키우면서 가끔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않으면 방콕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성서진을 떠나고 발견한 게 있다면 몸 상태가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할 때도 의사는 잘 회복하고 있다고 말했다.안희주는 이제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 어렵게 그 생활에서 도망쳤는데 다시 돌아가긴 싫었다.비행기가 착륙하고 비행 모드를 끄자 안희주의 핸드폰에 익숙한 전화번호가 떴다. 성서진이 걸어온 전화였다.안희주
네티즌들이 보낸 사진과 문자로 침대에 놓아둔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너무나 많은 정보에 성서진은 어떤 것이 유용한 정보인지, 어떤 것이 불필요한 정보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상금을 노리고 들어온 사람이 너무 많아 정보를 선별하는 사람을 따로 고용했지만 작업량은 여전히 너무 컸다.그제야 성서진은 이런 결정을 한 걸 후회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네티즌의 힘을 빌리거나 안희주가 먼저 흘리지 않으면 성서진은 안희주의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침대에 앉은 성서진은 너무 절망스러웠다. 그때 정보를 선별하던 사람들이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대표님, 누군가 안희주 씨가 A국 해명시의 교회 앞에 나타난 걸 보았다고 합니다. 지금 그쪽으로 사람을 보냈으니 얼른 오세요.”이 소식을 들은 성서진은 다시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소식이 진짜든, 가짜든 가볼 생각이었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안희주가 없는 나날은 성서진에게 지옥과도 같아 단 하루도 더 버티기 힘들었다. 안희주는 성서진에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과 공기 같은 존재라 없어서는 절대 안 된다.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뭍에 올라온 물고기도 죽기 전까지는 바다로 돌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성서진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성서진은 며칠째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안희주가 사라진 뒤로 성서진은 몸이 피곤해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만 억지로 한두 시간 정도 휴식했다. 혹시나 자다가 안희주의 소식을 놓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A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도 성서진은 일 처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짐을 찾으러 가는 성서진은 안희주가 이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엇갈리고 말았다.안주희 비행기가 이륙할 때 성서진은 급하게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근처 호텔에 안희주를 본 적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다들 본 적이 없다고 했다.얼마나 찾았을까, 드디어 한 골목에 있는 호텔에서 안희주의
성서진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져 손바닥에 땀이 차오를 정도였다.그렇게 한참 동안 기다려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이 너무 불안해 자기도 모르게 문을 밀기 시작했지만 굳게 잠긴 문은 아무리 열어도 열리지 않았다.옆에 놓인 화이트보드에는 ‘금일 휴업’이라고 적혀 있었다.성서진은 화이트보드에 그렇게 적은 게 안희주가 여기서 성서진을 기다리려고 일부러 휴업한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와의 만남을 이런 식으로 거절한 것이었다.그제야 성서진은 안희주가 그에게 장난을 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안희주는 애초에 성서진을 만날 생각이 없었고 그저 이런 방식으로 그를 거절하려 했을 뿐이었다.모든 상황이 성서진에게 ‘미안, 나는 너를 용서할 생각이 없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성서진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 민박집을 바라봤다.전에 사이가 좋을 때 바닷가에서 이런 민박집을 운영하며 가끔 바닷바람도 쐬고 서로 안아주며 간단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자고 말한 적도 있었다. 성서진은 안희주가 이런 생활을 좋아하는 걸 알고 국내 연해 도시의 민박을 사들여 가끔 같이 놀러 나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안희주는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활짝 웃었고 나가는 곳마다 다 마음에 든다며 성서진의 마음이 달콤해질 정도로 칭찬했다.‘언제부터 같이 나가지 않은 거지?’성서진이 넋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임유리와 함께하면서 안희주 옆을 지키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전에 사들였던 민박도 더는 가지 않았다. 전에 했던 약속을 거의 어긴 것이다.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성서진은 너무 죄책감이 들었고 그런 자신을 원망했다. 안희주의 마음을 얻으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안희주가 불안해하는 걸 알면서, 부모님처럼 서로 등을 돌릴까 봐 두려워하는 걸 알면서도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그렇게 많은 유혹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던 그가 왜 갑자기 변했는지 성서진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성서진은 정말 예전의 그에게 정신 차리라고 펀치라도 날리고 싶었다. 초심을 지키고 굳건하게 앞만 바라봤다면 이런
처음엔 네티즌들도 조롱하다가 결국엔 상금에 눈이 멀어 일부러 쓸데없는 정보와 증거를 제공했다. 그 뒤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상금을 받는 걸 보고 네티즌들이 수사대를 만들어 열정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다.심지어 안희주까지도 이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행방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안희주는 전혀 감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주민등록을 말소한 데서 그녀의 결심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안희주는 한번 돌아서면 그만이지 용서하는 법은 절대 없었기에 성서진의 사과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잘못한 걸 알았으면서 왜 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뻔뻔하게 나왔는지 의문이었다. 사실 안희주는 성서진이 마음이 변했다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해줬으면 좋게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서진은 몸과 마음을 따로 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몸은 임유리와 함께면서 마음은 임유리를 향해 있다고 했다. 그녀를 속이는 게 그렇게 재밌다면 안희주도 성서진과 놀아줄 생각이었다.안희주는 일부러 몇 사람에게 사진과 행방을 흘리며 성서진에게 보내주라고 하고는 차갑게 웃으며 시간을 계산해 A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로 올라탔다.바다 저편에 있는 성서진의 핸드폰에 또렷한 사진과 자세한 주소가 날아왔다. 성서진은 문자를 확인한 순간 너무 흥분해 손이 파르르 떨렸다.“희주야, 이제 나 용서하는 거지? 내가 찾으러 가길 기다리고 있는 거 맞지?”성서진은 F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티켓을 구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성서진을 태운 비행기와 안희주를 태운 비행기가 동시에 출발했지만 항로와 목적지가 아예 달랐다.F국에 도착하자마자 성서진은 고향에 온 듯한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성서진은 비서에게 옷차림에 문제가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안희주가 묵고 있다는 민박집으로 향했다.로맨틱하면서도 따듯한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성서진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처음 고백했을 때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나 용서해주겠지? 꼭 용서해 줄 거야.’두 사람이
그 이혼서류는 성서진에게 준 마지막 선물일뿐더러 성서진과 철저히 선을 긋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스운 건 성서진은 지금 그 이혼 서류로 안희주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성서진은 이혼 서류를 하루에도 여러 번 볼 수 있게 코팅했다.“희주야,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그냥 얼굴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될까?”“희주야, 너 괴롭힌 사람들 내가 싹 다 혼내줬어.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그러니 한 번만 나 보러 와주면 안 돼?”“희주야...”그렇게 한참 중얼거리던 성서진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아무리 성씨 가문이라고 하지만 친구들의 가문을 혼내는 건 쉽지 않았다. 성서진과 안희주의 결혼이 깨졌다는 소문이 터지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사랑은 믿을 게 못 된다며 반발해 나섰다. 성서진과 안희주의 사랑 이야기에 감동해 주성 그룹의 단골이 된 사람들도 많았다.결혼이 파경을 맞았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이 팬이었던 사람들은 순간 안티로 변했고 성씨 가문, 성서진, 주성 그룹에 대한 원성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성서진과 임유리가 몸을 섞었던 사진과 경과까지 터트린 사람도 있었다.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에 성서진과 안희주의 사랑을 추종했던 걸 후회하며 주성 그룹 인스타로 가서 악플을 남겼다. 그러자 주성 그룹의 주가가 연일 하락세를 보였고 ‘러브 주’라는 쥬얼리도 덩달아 사람들의 눈 밖에 났다. 사랑의 징표던 ‘러브 주’가 지금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외국의 쥬얼리 수집가들도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나 얼른 낮은 가격에 쥬얼리를 처분했다. 그들도 성서진과 안희주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에 매료되어 이 쥬얼리를 사들였는데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성서진은 헐값에 ‘러브 주’를 다시 사들였다.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쥬얼리에서 안희주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이 쥬얼리를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사랑과 심혈을 기울였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재료 선택에서 설계까지, 그가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