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은 후 안희주는 휴대전화로 보름 뒤 F국으로 떠나는 항공편 티켓을 구매했다. 그 시각 TV에 주성 그룹 발표회가 재방송되고 있었다.일주일 전, 주성 그룹 대표 성서진이 주얼리를 발표했다. 전 세계 최고급 다이아몬드와 보석으로 만들어졌고 아내를 위해 제작한 단 하나뿐인 주얼리였으며 이름을 ‘러브 주’라고 지었다.안희주의 ‘주’를 따서 지은 이름이었는데 성서진이 안희주만을 사랑한다고 전 세계에 공개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러브 주’가 공개되자마자 각 포털사이트의 실검에 올랐고 SNS에서도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온통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 얘기뿐이었다. 발표회가 끝난 후 TV에 길거리 인터뷰가 이어졌다.“안녕하세요. 성서진 대표님과 사모님의 러브 스토리에 관해서 알고 계신가요?”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부러워하며 대답했다.“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전에 대표님이 책 한 권을 쓰셨는데 거기에 전부 사모님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사모님이 체리를 좋아해서 마당에 체리 나무를 심었대요. 우리 남편한테 좀 따라 배우라고 하니까 불가능하대요. 그때 어찌나 화가 나던지.”기자는 다른 사람에게도 질문했다. 그러자 한 젊은 여대생이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두 분은 정말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의 현실 버전이라니까요? 대표님은 사모님밖에 몰라요. 4년 전에 사모님이 신부전증에 걸려서 신장 이식을 받아야 했잖아요. 그때 대표님은 누구보다 마음을 졸였고 자기 신장이 사모님과 매치한다는 결과를 받자마자 사람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신장을 이식해주었어요. 사모님이 대표님의 목숨과도 같다면서 사모님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고 했어요.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좋은 남자가 있을 수 있죠?”...기자들이 여러 명을 인터뷰했는데 다들 하나같이 성서진과 안희주의 사랑을 부러워했다.여러 번이나 재방송되는 뉴스를 보면서 안희주는 자신을 비웃듯 피식 웃었다.어릴 적부터 얼굴이 예뻐서 그녀에게 대시하는 남자가 매우 많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이혼으로 사랑에 그
이튿날 아침, 성서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안희주에게 모닝 키스를 해주었다.“희주야, 어제 결혼기념일을 놓쳤으니까 오늘 보충해줄게. 놀이공원 갈까? 전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별로 관심이 없었던 안희주가 거절하려는데 성서진은 이미 제멋대로 외출할 물건을 챙기더니 옷까지 준비해주었다.놀이공원에 도착해서도 안희주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적시는 걸 보고는 바로 물을 먹여주었고 인형을 힐끗거려도 망설임 없이 사다 주었다.회전목마, 범퍼카, 대관람차까지 전부 다 탔다. 아무리 유치한 놀이기구라도 안희주가 좋아하는 거라면 무조건 함께했다.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놓은 적이 없었다. 안희주가 놓으려고 해도 절대 놓지 않았다. 심지어 풍선까지 사서 그녀의 가방에 걸어주며 웃으면서 말했다.“희주야, 이러면 평생 널 잃어버릴 일이 없어.”‘잃어버릴 일이 없다고? 근데 내가 이번에 가려는 곳은 아마 평생 찾지 못할 거야. 넌 날 진작 잃어버렸어.’선남선녀의 알콩달콩한 모습은 놀이공원의 수많은 여행객들의 이목을 끓었고 두 사람을 알아본 사람도 있었다.“성서진 대표님이랑 사모님 아니야? 여기서 실물을 영접하다니.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한 여자가 흥분한 얼굴로 폴짝폴짝 뛰면서 남자 친구를 끌고 안희주의 앞으로 다가왔다.“저기... 사진 같이 찍어도 될까요? 저희 두 분 팬이거든요. 엄청 응원하고 있어요.”안희주는 신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여자에게 실망을 줄 수 없어 알겠다고 했다.성서진은 사진 찍기 싫어했지만 안희주의 뜻을 따랐다.찰칵.사진을 다 찍은 후 커플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 사이가 참 좋은 것 같아서 너무 부러워요. 계속 이대로 쭉 행복하셔야 해요.”성서진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옆에 서 있는 안희주가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에게 앞날이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점심을 먹는 사이에 성서진은 자꾸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안희주는 심장이 너무 아파 오른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성서진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다가왔다.“희주야, 왜 그래?”그의 두 눈에 담긴 걱정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안희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도 당장 따라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이렇게나 사랑하면서도 그녀에게 숨긴 게 너무도 많았다.안희주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말했다.“괜찮아요...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요.”성서진은 그녀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다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서진은 그녀를 웃게 해주려고 재미난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고 노력해도 안희주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안희주는 유리창에 기댄 채 창밖의 풍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희주야,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성서진이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없어요.”안희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오늘 내가 봤던 드라마를 생각하고 있었어요.”성서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무슨 드라마인데?”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서진을 쳐다보았다.“남자 주인공이 예전에는 여자 주인공을 엄청 사랑했었는데 나중에 마음이 변했고 여자 주인공한테 숨기는 것도 많더라고요...”안희주는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고 빤히 쳐다보았다.“서진 씨, 나중에 서진 씨도 마음이 변하면...”“절대 그럴 일이 없어.”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서진은 이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가로챘다.“희주야, 내가 평생 사랑하는 여자는 너뿐이야. 이 세상 남자들이 다 배신한다고 해도 난 배신하지 않아. 난 네가 없으면 안 돼.”안희주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그때 성서진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그가 망설이다가 끊으려 하자 안희주가 말했다.“받아요.”성서진은 그제야 전
‘러브 주’의 가치가 어마어마하여 팔려면 경매장에 내놓는 방법뿐이었다. 그렇다면 ‘러브 주’가 경매장에 나왔다는 걸 봤단 말인가?안희주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경매장에 갔었어요?”성서진은 잠깐 멈칫하면서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가 싶더니 잠시 후 대답했다.“너한테 주얼리 좀 사주려고 갔지.”‘나한테? 아니면 임유리한테? 임유리가 엄청난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줬는데 당연히 보답해줘야지.’안희주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했다.“판 게 아니라 기부했어요.”성서진이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희주 네가 착한 건 알겠는데 다른 건 다 기부해도 이것만은 기부하지 말았어야지.”그러고는 품 안에서 케이스 하나를 꺼내 안희주에게 건넸다. 검은색 벨벳 케이스 안에 ‘러브 주’가 담겨있었다. 주얼리의 빛깔은 여전히 남달랐다.“내가 다시 사 왔어. 러브 주는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뜻하는 거니까 절대 빼선 안 돼.”성서진은 다시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안희주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온 목걸이를 보면서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성서진, 원래 연기를 이렇게 잘했어? 다른 여자한테서 달려오자마자 닭살이 돋는 애정 표현이 그렇게 쉽게 나와?’그날 저녁 안희주가 자려고 누웠는데 성서진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그는 재빨리 끊어버리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또 울렸다.끊임없이 울리는 전화에 성서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안희주가 시끄러워할까 봐 전화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주변이 조용하여 상대의 목소리가 더욱 정확하게 들렸다.“서진아, 나와 놀자. 우리 다 모였는데 너만 없어.”성서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희주 재워야 해. 끊어.”“끊지 마. 아내 바보 그만하고 나와. 우리 엄청 오랜만에 모이는 거란 말이야.”“그래. 남들은 아내가 생기면 친구를 잊는다던데 넌 아예 친구를 버려버렸어. 너무한 거 아니야?”소리가 너무 복잡한 탓에 성서진은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됐어. 조용히 좀
안희주는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더는 그와 연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만 일어날게요.”성서진도 함께 일어나려 하자 친구들이 말렸다.“형수님이야 몸이 안 좋아서 푹 쉬어야 하지만 우린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대로 가면 안 되지.”“그래. 형수님 혼자 집에 보내서 쉬게 하고 넌 우리랑 같이 놀자.”안희주는 성서진이 잡고 있는 손을 빼면서 천천히 말했다.“기사님이 데려다주니까 걱정하지 말고 서진 씨는 그냥 여기 있어요.”그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어찌나 빨리 나갔는지 성서진이 미처 잡을 새도 없었다.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희주는 겉옷 주머니에 그녀의 휴대전화가 아닌 다른 사람의 휴대전화를 발견했다. 검은색 케이스인 걸 보니 성서진의 휴대전화였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운전기사에게 차를 다시 돌리라고 했다.그런데 차가 술집 문 앞에 멈춰선 순간 택시에서 내리는 임유리를 발견했다. 임유리는 휴대전화를 보면서 화장을 고치고는 곧장 술집으로 걸어갔다.안희주는 휴대전화를 꽉 쥔 채 임유리를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성서진의 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그러더니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성서진의 품에 와락 안겼다. 성서진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머리를 어루만졌다.“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임유리는 성서진의 어깨에 기대어 애교 섞인 웃음을 지었다.“서진 씨가 보고 싶어서 전화 받자마자 바로 달려왔죠.”성서진이 가볍게 웃었다.“상 줘야지, 그럼.”그러고는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됐어. 애정 행각 좀 그만해.”친구들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장난을 쳤다.문 앞에 서서 문틈 사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희주의 표정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다들 성서진과 임유리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그녀 앞에서 연기했던 것이었다.“서진아, 유리도 왔으니까 이젠 화끈하게 놀아도 되겠지?”친구들이 손뼉을 치자 아까 나갔던 여자들이 다시 우르르 들어갔다. 모두 품에 여자 한 명씩
집으로 돌아온 안희주는 고열에 시달렸고 열이 좀처럼 쉽게 내리지 않았다.성서진이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얼굴도 빨갛게 달아오른 안희주를 보고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곧장 그녀를 들어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안희주는 눈꺼풀이 무거워 겨우 눈을 떴다.주사를 갈아주러 들어왔던 간호사는 안희주가 깨어난 걸 보고 매우 기뻐했다.“사모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온 하루 열이 내리지 않아서 성 대표님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요. 계속 옆에서 지키다가 방금 전화 받으러 나가셨어요. 대표님 불러올까요? 사모님이 깨어나신 거 알면 엄청 좋아하실 겁니다.”안희주는 고개를 내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아니에요.”간호사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주사를 갈아준 후 나가버렸다.커다란 병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여 밖에서 통화하는 성서진의 목소리마저 다 들릴 정도였다.늘 차분하고 점잖은 성서진은 그녀 앞에서만 통제력을 잃었었다. 그런데 이젠 통화하는 목소리에 기쁨과 흥분이 담겨있었다.잠시 후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는데 성서진이 가버린 듯했다.그녀는 온 힘을 다해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몇 층 내려가다가 성서진이 임유리를 부축하여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두 사람의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임유리는 안희주를 발견하고 일부러 놀란 척 소리를 질렀다.“어머, 사모님도 병원에 계셨어요?”그 소리에 성서진이 고개를 들었고 멀지 않은 곳의 안희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순간 움찔하더니 재빨리 임유리의 손을 내려놓았다.“희주야, 약을 가지러 내려왔다가 실수로 유리랑 부딪혔어. 유리가 임신했는데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부축한 거야.”성서진은 안희주가 오해할까 봐 다급하게 설명했다.안희주의 시선이 임유리의 아랫배로 향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말했다.“유리 씨 언제 임신했어요? 아이 아빠는
“아니에요, 아무것도.”안희주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에 눈부신 불꽃놀이가 아름답게 펼쳐졌다.낮에 임유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 저녁에 성서진이 그녀를 위해 불꽃놀이를 준비했다고 했다.안희주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창밖의 불꽃놀이를 바라보자 성서진이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불꽃놀이 좋아해? 그럼 다음에 이것보다 더 성대한 불꽃놀이를 보여줄게. 어때?”성서진은 안희주를 품 안에 꼭 껴안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안희주는 겉으로는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에 씁쓸함과 눈물이 섞여 있었다.“서진 씨, 난 다른 사람이 했던 건 싫어요.”그게 불꽃놀이든 사람이든...“...”분명히 불꽃놀이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서진은 가슴이 움찔하여 저도 모르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잠깐 침묵하다가 그녀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그럼 다른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줄게. 절대 다른 여자가 부럽지 않게 말이야.”안희주는 아무 대답 없이 먼 곳만 조용히 바라보았다.그 후 며칠 동안 성서진은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왔는데 누가 봐도 수상했다. 도우미마저 이상함을 눈치채고 웃으면서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몰래 서프라이즈를 준비 중인가 봐요.”“그러게요. 대표님은 정말 사모님을 사랑하세요. 얼마 전에 주얼리를 제작하더니 이젠 또 새로운 걸 준비하고. 서프라이즈가 끊이질 않네요.”하지만 안희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성서진은 안희주의 손을 잡고 외출했다.“희주야, 나랑 어디 다녀오자. 무조건 마음에 들 거야.”안희주가 거절하려는데 휴대전화가 갑자기 진동했다. 임유리가 문자를 보냈다.[희주 씨, 서진 씨 마음속에 희주 씨가 중요한지 내가 중요한지 한번 맞혀봐요.]곧이어 성서진의 휴대전화도 진동했다.안희주가 대충 힐끗거렸는데도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말았다. 임유리가 검은 스타킹을 신은 다리 사진 한 장을 보내면서 이런 문자도 덧붙였다.[시간 지나면 기다리지 않아요.]성서
첫날 임유리가 성서진이 직접 그녀에게 새우껍질을 까주는 사진을 보냈을 때 안희주는 화로를 준비하여 성서진과 함께 찍은 사진을 몽땅 태워버렸다.두 번째 날에 성서진과 함께 오동나무 밑에서 키스하는 사진을 보냈다. 안희주는 일꾼들을 불러서 별장 뒷마당의 체리 나무를 밀어버렸다.세 번째 날에는 성서진이 그녀의 라이브 방송에서 했던 고백 모음집이었다. 안희주는 그가 예전에 그녀에게 썼던 수백 통의 연애편지를 꺼냈다.오랜 시간이 지나 누렇게 변했지만 글씨는 여전히 뚜렷하게 잘 보였다.안희주는 필적을 어루만지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문서 세단기에 던졌다....떠나는 당일 아침.안희주가 눈을 떠보니 오랜만에 집으로 들어온 성서진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의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데 표정이 왠지 어두워 보였다.“희주야, 방금 문자가 한 통 왔는데 삭제 성공이라고 했어. 뭘 삭제한 거야?”안희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다급하게 휴대전화를 가져와 확인해보니 개인 신상정보를 성공적으로 삭제했다는 문자였다.다행히 비밀번호를 설정해놓은 상태라 성서진은 삭제 성공이라는 내용밖에 보지 못했다. 안희주는 그제야 마음을 놓으면서 말했다.“아니에요. SNS 계정이 해킹당했는데 안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다시 복구한 다음에 삭제했어요.”성서진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웃었다.“자기가 좋아하는 거 사 왔어. 뭘 사 왔는지 맞혀봐.”안희주는 잠깐 멈칫했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동쪽 구역에서 파는 찹쌀도넛요.”“어떻게 알았어?”성서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어떻게 모를 리가 있겠는가?예전에 연애할 때 매번 그녀가 화를 내면 달래려고 머나먼 동쪽 구역의 그 가게까지 가서 찹쌀도넛을 사 오곤 했다.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 순식간에 마음이 녹아내렸었다. 안희주는 주얼리도, 비싼 자동차도 아닌 딱 그 찹쌀도넛을 좋아했다.그때 성서진이 웃으면서 이런 말도 했었다.“우리 희주 달래기 너무 쉬운 거 아니야?”안희
“희주야.”성서진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면서도 안희주의 이름을 불렀다.성주환이 어두운 표정으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성서진, 오늘부터 열심히 일하면서 몸조리하는 데 집중해. 안희주 찾기만 해봐.”“쿨럭쿨럭.”성서진이 연신 기침하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왜요?”“희주 내 와이프예요. 이혼 서류에 사인하지 않았으니 아직 부부예요.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나 용서해줄 거예요.”“사실 희주 마음 약한 사람이에요. 잘 달래기만 하면 용서해 줄 거예요.”“닥쳐.”성주환이 성서진의 말을 칼같이 잘라버리더니 안희주와 나눈 통화를 들려줬다.또렷한 말소리가 병실을 가득 메웠고 이내 성서진의 모든 자신감이 부서졌다. 녹음 파일은 끝났지만 방안은 여전히 조용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성서진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이건 가짜에요. 희주 찾으러 가야겠어요. 지금 당장 만나야겠다고요.”“가서 알려줄 거예요. 내게 여자는 희주밖에 없다고, 평생 사랑한 여자는 희주 밖에 없다고요.”성서진은 막무가내로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링거 바늘을 뽑아 던지며 허약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성주환은 말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성서진은 몇 걸음 걸지 못하고 바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등에 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다시 터지면서 피가 새어 나왔다.성서진이 이를 악물고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앞으로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몇걸음 걷지 못하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성주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너희들, 서진이 침대로 옮기고 몸조리 잘하게 지켜. 절대 나가지 못하게 해.”성주환이 이렇게 말하더니 입에 약을 털어넣었다. 성주환은 몸이 좋지 않았다. 산에서 노후 생활을 보낸 것도 사실 몸조리하기 위해서였지만 이 나이에 다시 소환되어 뒤처리를 맡을 줄은 몰랐다.성주환은 성서진을 챙기고 바로 옆 병실에 누워 의사와 간호사의 검사를 받았다. 3일 후 성서진은 차도를 보이자마자 바로
“미안해요. 프러포즈는 못 받아주겠네요. 서진 씨 더는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 헤어져요.”꿈속에서 안희주는 성서진의 손을 뿌리치더니 점점 더 멀어져 갔다.“희주야, 아니야. 그러면 안 돼.”“내가 잘해줄게. 네가 좋아하는 연남동 찹쌀 도넛도 매일 매일 사줄게. 쥬얼리, 장신구, 부동산, 주식, 네가 원하는 건 다 줄게. 내 곁에 남아주면 안 돼?”성서진이 간절하게 애원했지만 안희주는 고개를 돌리지도, 눈빛을 주지도 않았다. 미친 듯이 쫓아가 봐도 소용이 없었고 손에 들었던 결혼반지도 사라졌다.‘희주가 날 버리다니. 내 사랑을 버리다니.’“희주야. 희주야.”성서진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고 눈을 질끈 감은 채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에서 깨지 못하고 안희주의 이름만 연신 불러대는 성서진을 보고 성주환은 걱정이 앞서 한숨을 푹 내쉬더니 비서를 시켜 어렵게 안희주의 최신 연락처를 알아냈다.“여보세요? 희주야. 나다. 성서진 할아버지. 우리 결혼식 때 한번 봤지?”금방 손님을 들여보낸 안희주는 갑작스러운 전화에 어리둥절했다.“할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만약 서진 씨와 재결합하라고 하실 생각이면 더 토론할 생각 없습니다.”한동안 성서진의 괴롭힘을 받지 않은 안희주는 성서진이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방법을 바꿔 성주환까지 소환하자 안희주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성주환은 다소 난감해 보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했다.“희주야. 서진이가 잘못한 거 안다. 하지만 서진이 지금 많이 아파. 용서하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한번만 보러 와주면 안 되겠니? 이번 기회에 깔끔히 끝내는 것도 좋지 않겠어?”“걱정하지 마. 앞으로 더는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거야. 내가 이렇게 부탁하마.”수화기 너머에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죄송해요. 지금 잘 지내고 있고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돌아가면 다시 나올 수는 있나요? 성씨 가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큰 가문이지만 저는 일개 서민일뿐이에요.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성서진은 안희주를 함부로 말한 ‘친구’에게 복수하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친구’들의 가문을 탄압했다. 그들이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임유리는 복수만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이용당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힘든 만큼 성서진도 똑같이 힘들게 해주고 싶었다.제보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 계정 하나를 따로 판 임유리는 라이브를 켜고 찌라시를 전파하는가 하면 성서진과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들려줬다.겨우 이미지가 좋아졌던 주성 그룹은 다시 화두에 올랐고 성서진의 이미지에도 데미지가 갔다. 귀국해서 조사받아야 했던 성서진은 안희주를 찾는 걸 일단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회사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나오는 바람에 주성 그룹 상황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많은 회사들이 성서진의 손에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주성 그룹이 이번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진다 해도 큰 회사였으니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어도 회사의 성장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성서진은 내외로 몰아치는 문제에 연속 3개월이나 제대로 쉬지 못했다.임유리는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으로 성서진이 구치소에 넣어버렸다. 위에서 조사를 진행했고 확실히 주성그룹에 재무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140억 원의 벌금으로 끝냈다.하지만 주성 그룹도 많은 인원이 빠져나갔고 조사를 받는 동안 프로젝트를 많이 잃으면서 원기를 크게 다치고 말았다.성주환은 진작 회사 일에 손을 놓고 산에서 노후 생활을 보내다가 이번 일로 소환되고 말았다.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진 성서진을 보며 성주환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회사 상황이 조금 나아지자 성주환이 성서진을 따로 불렀다.쿵.지팡이를 힘껏 바닥으로 내리꽂은 성주환이 엄숙하게 말했다.“꿇어.”성서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꿇어앉았다. 어찌나 말랐는지 뼈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서진아,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내가 여러 번 말했지? 초심을 지켜야 한다고, 와이프 말 잘
한참 고민하던 성서진이 서툴게 사과했다.“희주야, 내가 잘못했어. 다 내 잘못이야. 다른 여자와 엮이면 안 되는 건데. 임유리 아이는 이미 지우라고 했고 내 옆에 얼씬도 못 하게 했어. 제발 부탁이야. 나 좀 용서해 줘.”“네가 하라는 건 뭐든 다할게. 그러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성서진이 간절하게 애원하는 동안 안희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성서진의 말이 끝나자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래요. 용서해 줄게요.”예상 밖의 대답에 성서진은 순간 흥분했다.“정말?”성서진은 안희주의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캐치하지 못한 채 얼른 되물었다.“허.”안희주가 차갑게 웃었다.“원하던 대답 해줬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든 상관없이 용서해 줄게요.”“이제 만족해요? 만족했으면 그만해요.”용서했다는 말이 필요하다면 듣고 싶은 만큼 들려줄 수 있지만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산산이 부서진 거울은 아무리 이어 붙이려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할 말을 마친 안희주는 성서진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과감하게 전화를 끊었다. 안희주는 전에 사랑하지 않는다면 성서진이 눈앞에서 죽어버린다 해도 소용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성서진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희주야, 네가 좋아하는 찹쌀 도넛 사줄 테니까 나 용서해주면 안 돼?]성서진이 포기하지 않고 안희주에게 문자를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희주가 보내온 문자를 받았다.[이제 찹쌀 도넛 안 좋아해요.]‘왜 안 좋아하는 거지?’성서진은 손이 떨려 핸드폰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왜 갑자기 사랑하지 않는 거지?’문자를 더 보내고 싶었지만 다시 차단된 상태였다. 용서했다는 안희주의 말을 듣고도 성서진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안희주는 성서진이 원하는 게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이미 사랑하지 않기에,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았기에 그랬던 것이다.성서진은 처음으로 이렇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안희주가 떠난
성서진은 자책에 빠졌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조건 초심을 지켰을 테지만 아쉽게도 인생에 후회란 없었다.낯선 거리에 서 있는 성서진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바를 몰라 했다.‘계속 찾아야 하는 걸까? 계속 찾아야 하는 건 맞는데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지?’“안녕하세요. 사진에 나온 여자가 제 아내인데 싸우는 바람에 저랑 길이 엇갈렸어요. 혹시 연락처 좀 알려줄 수 있을까요?”성서진이 진지하게 말했다.주저하는 호텔리어가 답례로 큰돈을 줄 거라는 말에 환하게 웃더니 안희주의 연락처를 건넸다. 하지만 전화를 걸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아직 비행 중인가 보네.”성서진이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안희주에게 사과의 결심을 보여주기 위해 인스타에 반성문까지 올렸다. 반성문에는 어떻게 진심을 알게 되었는지, 어떻게 잘못을 깨닫게 되었는지 절절하게 적혀 있었다.사과하는 태도가 매우 진지할뿐더러 매일 새로운 내용으로 반성문을 올리며 안희주가 봐주길 바랐다. 그러자 일부 네티즌들도 원망하던 데로부터 그런 성서진을 마음 아파했고 성서진 편을 들기 시작했다.안희주는 그 반성문들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내가 떠나지 않았어도 이렇게 뉘우칠까?”“아니, 아마 점점 더 막 나갔겠지. 임유리만 만나던 데로부터 더 많은 여자를 만났을 거야. 한번 외도한 남자는 앞으로도 계속 외도할 거야.”안희주가 자문자답했다.‘내가 왜 용서해야지? 지금 이런 상태도 좋은데.’안희주는 이미 전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뤘다. 해변에 민박집을 열고 애완동물 몇 마리 키우면서 가끔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않으면 방콕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성서진을 떠나고 발견한 게 있다면 몸 상태가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할 때도 의사는 잘 회복하고 있다고 말했다.안희주는 이제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 어렵게 그 생활에서 도망쳤는데 다시 돌아가긴 싫었다.비행기가 착륙하고 비행 모드를 끄자 안희주의 핸드폰에 익숙한 전화번호가 떴다. 성서진이 걸어온 전화였다.안희주
네티즌들이 보낸 사진과 문자로 침대에 놓아둔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너무나 많은 정보에 성서진은 어떤 것이 유용한 정보인지, 어떤 것이 불필요한 정보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상금을 노리고 들어온 사람이 너무 많아 정보를 선별하는 사람을 따로 고용했지만 작업량은 여전히 너무 컸다.그제야 성서진은 이런 결정을 한 걸 후회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네티즌의 힘을 빌리거나 안희주가 먼저 흘리지 않으면 성서진은 안희주의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침대에 앉은 성서진은 너무 절망스러웠다. 그때 정보를 선별하던 사람들이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대표님, 누군가 안희주 씨가 A국 해명시의 교회 앞에 나타난 걸 보았다고 합니다. 지금 그쪽으로 사람을 보냈으니 얼른 오세요.”이 소식을 들은 성서진은 다시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소식이 진짜든, 가짜든 가볼 생각이었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안희주가 없는 나날은 성서진에게 지옥과도 같아 단 하루도 더 버티기 힘들었다. 안희주는 성서진에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과 공기 같은 존재라 없어서는 절대 안 된다.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뭍에 올라온 물고기도 죽기 전까지는 바다로 돌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성서진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성서진은 며칠째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안희주가 사라진 뒤로 성서진은 몸이 피곤해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만 억지로 한두 시간 정도 휴식했다. 혹시나 자다가 안희주의 소식을 놓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A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도 성서진은 일 처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짐을 찾으러 가는 성서진은 안희주가 이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엇갈리고 말았다.안주희 비행기가 이륙할 때 성서진은 급하게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근처 호텔에 안희주를 본 적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다들 본 적이 없다고 했다.얼마나 찾았을까, 드디어 한 골목에 있는 호텔에서 안희주의
성서진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져 손바닥에 땀이 차오를 정도였다.그렇게 한참 동안 기다려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이 너무 불안해 자기도 모르게 문을 밀기 시작했지만 굳게 잠긴 문은 아무리 열어도 열리지 않았다.옆에 놓인 화이트보드에는 ‘금일 휴업’이라고 적혀 있었다.성서진은 화이트보드에 그렇게 적은 게 안희주가 여기서 성서진을 기다리려고 일부러 휴업한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와의 만남을 이런 식으로 거절한 것이었다.그제야 성서진은 안희주가 그에게 장난을 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안희주는 애초에 성서진을 만날 생각이 없었고 그저 이런 방식으로 그를 거절하려 했을 뿐이었다.모든 상황이 성서진에게 ‘미안, 나는 너를 용서할 생각이 없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성서진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 민박집을 바라봤다.전에 사이가 좋을 때 바닷가에서 이런 민박집을 운영하며 가끔 바닷바람도 쐬고 서로 안아주며 간단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자고 말한 적도 있었다. 성서진은 안희주가 이런 생활을 좋아하는 걸 알고 국내 연해 도시의 민박을 사들여 가끔 같이 놀러 나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안희주는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활짝 웃었고 나가는 곳마다 다 마음에 든다며 성서진의 마음이 달콤해질 정도로 칭찬했다.‘언제부터 같이 나가지 않은 거지?’성서진이 넋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임유리와 함께하면서 안희주 옆을 지키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전에 사들였던 민박도 더는 가지 않았다. 전에 했던 약속을 거의 어긴 것이다.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성서진은 너무 죄책감이 들었고 그런 자신을 원망했다. 안희주의 마음을 얻으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안희주가 불안해하는 걸 알면서, 부모님처럼 서로 등을 돌릴까 봐 두려워하는 걸 알면서도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그렇게 많은 유혹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던 그가 왜 갑자기 변했는지 성서진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성서진은 정말 예전의 그에게 정신 차리라고 펀치라도 날리고 싶었다. 초심을 지키고 굳건하게 앞만 바라봤다면 이런
처음엔 네티즌들도 조롱하다가 결국엔 상금에 눈이 멀어 일부러 쓸데없는 정보와 증거를 제공했다. 그 뒤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상금을 받는 걸 보고 네티즌들이 수사대를 만들어 열정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다.심지어 안희주까지도 이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행방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안희주는 전혀 감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주민등록을 말소한 데서 그녀의 결심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안희주는 한번 돌아서면 그만이지 용서하는 법은 절대 없었기에 성서진의 사과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잘못한 걸 알았으면서 왜 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뻔뻔하게 나왔는지 의문이었다. 사실 안희주는 성서진이 마음이 변했다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해줬으면 좋게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서진은 몸과 마음을 따로 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몸은 임유리와 함께면서 마음은 임유리를 향해 있다고 했다. 그녀를 속이는 게 그렇게 재밌다면 안희주도 성서진과 놀아줄 생각이었다.안희주는 일부러 몇 사람에게 사진과 행방을 흘리며 성서진에게 보내주라고 하고는 차갑게 웃으며 시간을 계산해 A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로 올라탔다.바다 저편에 있는 성서진의 핸드폰에 또렷한 사진과 자세한 주소가 날아왔다. 성서진은 문자를 확인한 순간 너무 흥분해 손이 파르르 떨렸다.“희주야, 이제 나 용서하는 거지? 내가 찾으러 가길 기다리고 있는 거 맞지?”성서진은 F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티켓을 구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성서진을 태운 비행기와 안희주를 태운 비행기가 동시에 출발했지만 항로와 목적지가 아예 달랐다.F국에 도착하자마자 성서진은 고향에 온 듯한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성서진은 비서에게 옷차림에 문제가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안희주가 묵고 있다는 민박집으로 향했다.로맨틱하면서도 따듯한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성서진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처음 고백했을 때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나 용서해주겠지? 꼭 용서해 줄 거야.’두 사람이
그 이혼서류는 성서진에게 준 마지막 선물일뿐더러 성서진과 철저히 선을 긋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스운 건 성서진은 지금 그 이혼 서류로 안희주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성서진은 이혼 서류를 하루에도 여러 번 볼 수 있게 코팅했다.“희주야,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그냥 얼굴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될까?”“희주야, 너 괴롭힌 사람들 내가 싹 다 혼내줬어.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그러니 한 번만 나 보러 와주면 안 돼?”“희주야...”그렇게 한참 중얼거리던 성서진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아무리 성씨 가문이라고 하지만 친구들의 가문을 혼내는 건 쉽지 않았다. 성서진과 안희주의 결혼이 깨졌다는 소문이 터지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사랑은 믿을 게 못 된다며 반발해 나섰다. 성서진과 안희주의 사랑 이야기에 감동해 주성 그룹의 단골이 된 사람들도 많았다.결혼이 파경을 맞았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이 팬이었던 사람들은 순간 안티로 변했고 성씨 가문, 성서진, 주성 그룹에 대한 원성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성서진과 임유리가 몸을 섞었던 사진과 경과까지 터트린 사람도 있었다.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에 성서진과 안희주의 사랑을 추종했던 걸 후회하며 주성 그룹 인스타로 가서 악플을 남겼다. 그러자 주성 그룹의 주가가 연일 하락세를 보였고 ‘러브 주’라는 쥬얼리도 덩달아 사람들의 눈 밖에 났다. 사랑의 징표던 ‘러브 주’가 지금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외국의 쥬얼리 수집가들도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나 얼른 낮은 가격에 쥬얼리를 처분했다. 그들도 성서진과 안희주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에 매료되어 이 쥬얼리를 사들였는데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성서진은 헐값에 ‘러브 주’를 다시 사들였다.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쥬얼리에서 안희주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이 쥬얼리를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사랑과 심혈을 기울였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재료 선택에서 설계까지, 그가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