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교통사고로 실명한 그해, 나는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시력을 회복한 그는 갖은 수단으로 나를 찾아내더니 제 옆에 강제로 남겨두었다. 다들 그가 나를 너무 사랑한다고 한다. 내게 버림받았음에도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자가 약혼녀를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났다. “박지유, 배신당한 느낌이 어때? 아주 좋아?” 나는 머리를 흔들며 가볍게 웃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며칠밖에 안 남았으니까. 이제 곧 그를 잊을 테니까...
View More내가 다시 깨났을 때 김서준과 허다은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김서준은 병실을 나가기 전, 내게 다가오며 맹세했다.“지유야, 나 올 때까지 기다려. 다 설명할게. 절대 나 잊으면 안 돼. 쟤가 한 말 새겨듣지 마. 사실이 아니야.”그를 잊든 말든 이젠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 뒤로 3일 동안 김서준은 나타나지 않았다.아이도 당연히 지켜내지 못했다. 나는 울지도 난리를 피우지도 않았고 곧장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유강빈이 몇 번이고 내게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제 겨우 정신 상태가 호전되고 있는데 제발 그 재수 없는 인간을 언급하지 말라고 온몸으로 거부했다.유강빈은 슬슬 내게 D국에 가서 지내게 될 요양원에 대해 말해줬다.“거기 환경 아주 좋아. 한식도 있고 양식도 있어. 매일 의사가 회진을 오고 분기마다 여행도 다닐걸. 그때 가서 나랑 함께 유럽 여행 실컷 다니자.”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있어요? 어차피 여행 다녀봤자 기억하지도 못할 텐데.”나는 문득 말실수한 걸 알아채고 재빨리 한마디 덧붙였다.“그래도 선배랑 함께 다니면 뭐든 좋아요.”유강빈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한참 후에야 말을 내뱉었다.“양심은 있네.”나는 일부러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선배, 나 지금 바로 놀러 가고 싶어요.”“이제 막 유산해서 걸어 다닐 수 없을 텐데...”“그럼 나 휠체어에 앉히고 산책 좀 하면 안 돼요?”입원한 지도 어느덧 보름이 지났고 나는 갑갑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유강빈은 끝내 내 고집에 못 이겨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전에 공부할 때도 자주 해변을 거닐었다.유강빈은 나를 휠체어에 앉히고 해변을 천천히 거닐다가 풍선 파는 사람을 보더니 하나 사주었다.풍선에 소원을 쓰고 하늘에 날려 보내면 하늘에서 내 소원을 이뤄준다는 말을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나는 유성펜을 꺼내 풍선에 나의 작은 비밀을 열심히 적어내렸다.유강빈이 보려고 하면 애교를
내가 임신을 해버렸다.이 소식을 알았을 때 나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남자친구도 없는데 임신이라니?!유강빈은 걱정 섞인 얼굴로 나를 데리고 이것저것 검사를 진행했다.김서준도 언짢은 표정이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곧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내가 왜 임신을 해? 누구 애인지는 알아?”나는 오직 유강빈만 믿는데 그가 좀처럼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저 내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그래, 그럼 그러라고 하지 뭐. 어차피 낳아봤자 키울 수도 없을 테니까.나는 속도 없이 잘만 먹고 잘만 잤다. 기억을 자꾸 잃지만 매일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그러던 어느 날 한 여자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박지유,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아이를 빌미로 남자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천하다 정말!”그녀는 예쁘장한 얼굴에 썩 친절하지 못한 태도를 지녔다. 내가 거들떠보지 않으니 그녀가 점점 더 몰아붙였다.“말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지 말라고. 고작 임신이잖아! 너만 애 낳을 줄 알아?!”그녀가 내게 진단서를 한 장 내던졌는데 그 위에는 허다은이라는 여자가 임신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허다은은 아마도 지금 이 여자겠지.다만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이 아이 아빠도 아닌데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네 뱃속의 애랑 내 뱃속의 아이는 아빠가 다 같아.”나는 화들짝 놀란 채 막연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그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다만 네가 나보다 조금 더 빨리 임신했어. 뭔 말인지 알겠어?”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단지 기억력이 나쁠 뿐 바보는 아니니까.“너랑 잔 후에 바로 나랑 잤다는 얘기야. 네 아이랑 내 아이 출산 예정일이 보름을 안 넘겨.”“그래도 차이점은 있지.”그녀가 웃으며 내게 바짝 다가왔다.“내 아이는 정정당당하게 태어나겠지만 네 아이는 사생아야.”“헛소리 집어치워. 너야말로 사생아야. 저주받을 년.”
시끄러운 다툼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기절했던 내가 힘겹게 눈을 떴을 때 잘생긴 남자 두 명이 바로 앞에서 다투고 있었다.두 사람 모두 얼굴에 멍이 들었고 경비원이 겨우 뜯어말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다들 진정하시고 말로 하세요 말로.”나는 일어나 앉아서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를 보며 이리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하필 이때 정장 차림의 남자가 더 흥분하며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눈물범벅이 된 채로 물었다.“지유야, 나 기억나? 기억할 수 있겠어?”지유라니?대체 왜 날 이렇게 부르는 거지?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에게 잡힌 손을 힘껏 빼냈다.“누구세요?”“내가 그쪽 알아요?”“강빈 선배, 이분 선배 친구예요?”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이때 유강빈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창백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박지유, 너 지금 뭐라는 거야? 정말 이 사람 누군지 모르겠어?”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다.별안간 김서준이 언성을 높였다.“유강빈,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우리 지유 이렇게 만들었지? 이 모든 게 네가 벌인 짓이잖아. 지유가 왜 날 기억 못 하냐고?!”“젠장, 이게 다 네가 지유 자극해서 그런 거잖아. 얘 말은 들어도 안 주고 제멋대로 능멸하고 딴 여자랑 약혼한 것도 모자라 팔찌까지 남한테 줘? 지유는 너 일부러라도 잊어야 해. 안 그러면 애가 너무 힘들어. 널 잊어야 그 고통을 조금은 덜 수 있다고!”“X발 개소리 집어치워.”두 사람은 또다시 처절하게 싸웠다. 마치 야수처럼 서로가 죽일 듯이 공격했다.그날 김서준과 유강빈은 나란히 경찰서에 끌려갔다.유강빈이 단독으로 그를 찾아 얘기를 나눴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단지 그날부로 김서준이 매일 내 병실에 찾아와 지나간 추억을 말해주곤 했었다.“이 머플러는 네가 떠준 거야. 솜씨가 서툴러서 한 달 만에 완성했지 뭐야.”“이건 우리 졸업 사진이야. 너 이때 내 옆에 서 있었어. 우린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야. 그땐 학창
유강빈은 내게 다음 주 D국으로 가는 항공권을 끊어줬다. 떠나기 전에 나는 김서준의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열대과일 리치를 사서 마지막으로 묘지에 한 번 찾아가기로 했다.김서준과 상관없이 그녀는 내게 은인이었다.김서준의 엄마는 교외의 가장 호화로운 묘지에 안장되었다. 영정 사진 속 그녀는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이제 막 허리를 숙이고 묘지를 깨끗이 청소하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유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상대는 바로 허다은이었다.그녀가 다정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우리 시어머님 뵈러 오셨어요? 마음은 고마운데 앞으론 굳이 이럴 필요까지 없어요. 내가 사람을 시켜서 청소할 테니까.”내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내가 챙겨온 꽃다발을 내던지는 그녀였다. 이때 문득 그녀의 손목에 시선이 닿았는데 익숙한 팔찌가 한눈에 들어왔다.나는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 팔찌가 왜 다은 씨한테 있어요?”허다은은 거들먹거리며 내게 답했다.“서준 씨한테 받은 거예요. 어머님이 예비 며느리한테 물려주는 거라고 하던데요?”“아니야, 이런 거 아니잖아...”이 팔찌는 그의 엄마가 내게 준 선물이니 김서준이 제멋대로 남들에게 넘겨줄 자격이 없다.“김서준 어디 있어? 지금 어디 있냐고?!”사람이 이성을 놓아버리면 힘이 저절로 샘솟는 듯싶다. 내게 마구 휘둘리던 허다은은 얼굴까지 잔뜩 일그러졌으니까. 그녀는 겨우 손을 들어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지유 씨 안 보고 싶대요. 지유 씨 떠나거든 이리로 온다고 했어요.”나는 냉큼 김서준 앞으로 다가가 막무가내로 그의 가슴팍에 주먹을 휘둘렀다.“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저 팔찌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이렇게 궁지로 밀어붙이는 건데? 이 나쁜 자식! 개자식!”한편 김서준은 아무 말 없이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꼬리를 씩 올렸다.“너 이런 년인 거 우리 엄마가 알았으면 그 팔찌 차라리 개나 줘버렸을걸?”“박지유, 적당히 해. 말끝마다
오늘은 아마도 11월 15일일 것이다. 나는 비스듬히 눈을 뜨고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눈앞엔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이 떡하니 서 있었는데 그는 바로 나의 선배이자 주치의 유강빈이었다.또 한 명의 남자도... 어두운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픽픽 쓰러지기나 하고. 박지유, 너 대체 언제부터 연기가 늘었어?”나는 1초 동안 머리가 아찔거리다가 드디어 그가 누군지 생각났다.“약혼까지 다 해놓고 왜 또 날 찾아오는 건데요?”김서준이 웃으며 동문서답으로 말을 이어갔다.“너 병원에 실어다 주면서 들었는데 요즘 이 자식 자주 찾아온다며?”“실종된 2년 동안 대체 어떻게 지냈는지 줄곧 궁금했는데 답 나왔네.”그는 유강빈 앞으로 다가가 음침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아쉽게도 그쪽이 2년 동안 이루지 못한 일을 내가 해냈지 뭐야?”이보다 더 적나라한 암시는 없었다. 나는 순간 심장이 움찔거려 그에게 베개를 내던졌다.“꺼져. 당장 꺼지라고.”김서준은 피하지 않고 베개에 그대로 맞았다.이때 유강빈이 훤칠한 체구로 우리 앞에 나섰다.“대표님, 이제 그만 나가주시겠어요? 계속 더 환자를 자극하면 경비원 부를 수밖에 없어요.”김서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우릴 쳐다보다가 몇 초 뒤 병실을 나섰다. 문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울려 퍼져 두 귀가 쩌렁쩌렁해질 지경이었다.나는 머리를 움켜쥐고 한참 넋 놓고 있었다.이에 유강빈이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걱정 마. 김서준은 아무것도 몰라. 네가 과로로 쓰러진 줄 알 거야.”“근데 지유야, 너 정말 2년 전의 진상과 지금 이 병을 김서준한테 얘기 안 할 거야?”“네, 그럴 필요 없어요. 며칠 뒤엔 모든 기억을 다 잃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뭘.”사실 별것도 아니었다. 2년 전, 김서준이 실명한 첫 달에 나도 마침 희소병 진단을 받았었다.전 세계에 발병률이 5퍼센트도 안 되는데 일단 이 병에 걸리기만 하면 8년 안에 모든 기억을 점차 잃게 되고 식물인간처럼 혼미상태에 빠지게 된다.나는 부모님이 일찍
며칠 후, 김서준과 해상 그룹 회장이 나란히 마주한 사진이 각 언론 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이어서 김서준은 허다은과 함께 기자들의 인터뷰를 받았고 그녀가 다정하게 이 남자의 팔짱을 꼈다. 둘의 모습은 선남선녀를 방불케 했다.“허다은 씨, 혹시 박지유 씨에 관해서 들으신 적 있나요? 여기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이에 허다은이 아주 털털하게 대답했다.“요즘 세월에 누구나 속 썩이는 엑스 한 명쯤은 있잖아요. 중요한 건 현재의 저랑 서준 씨에요. 과거는 과거일 뿐 우리가 만남을 잘 이어가면 돼요. 불필요한 사람은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나는 TV 앞에 마주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인터뷰를 쭉 지켜보았다. 이때 뒤에 서 있던 한 여자가 기고만장한 얼굴로 내 앞에 다가오며 비아냥댔다.“다은 언니랑 대표님은 이제 곧 정식 부부가 될 거고 이 집도 두 사람 공동 재산이에요. 그쪽은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얼른 나가주시죠?”나는 그 여자를 거들떠보지 않은 채 노트를 꺼내 글을 적기 시작했다.[11월 15일, 김서준 딴 여자랑 약혼 발표.]요 이틀 기억력이 유독 달려서 중요한 건 반드시 노트해야만 했다.내게 무시당한 그 여자는 더 약올랐는지 노트를 덥석 채갔다.“지금 내 말 안 들려요? 끝까지 버티고 있을 거냐고요? 이참에 내가 대신 짐 정리해줄까요?”그녀는 다른 사람을 지시하며 내 방에 쳐들어와 옷장 안의 옷을 싹 다 내던지고 화장대 위에 놓인 몇 안 되는 기초제품들까지 모조리 쓰레기통에 버렸다.나는 마치 아웃사이더처럼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다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지금 다들 뭐 하는 거지? 왜 내 물건을 싹 다 치우는 거야?’방 안에 소음이 울려 퍼졌고 나는 심신이 피로해서 손으로 귀를 막으려 했다.“언제까지 서 있기만 할 거예요? 당장 꺼지라고!”이때 그 여자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힘이 워낙 세다 보니 내 손목에 둘렀던 팔찌가 부러지고 에메랄드 비즈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끝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
김서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김 대표, 지금 시간 돼? 다은이랑 혼사로 얘기 좀 나누지?”상대는 바로 허다은의 아빠이자 전설로 불리는 해상 그룹 회장이었다.“저 지금...”“이리로 와. 밥 먹는 건 둘째치고 사업 건으로 세부 사항을 논의하려고 그래.”김서준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더니 휴대폰을 옆으로 치웠다.“빌어 나한테! 네가 말만 하면 바로 거절할게.”“허다은이랑 결혼할 일도 없고 더는 그 누구도 안 만나.”나도 한때 똑같이 그에게 애원했었는데...다른 여자를 껴안고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용기 내 알려주고 싶었는데, 애초에 그를 떠난 이유를 낱낱이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때 김서준은 뭐라고 했었지?“박지유, 변명거리 둘러대지 마.”“사기꾼 주제에 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지금 나더러 그 해명을 들어달라고? 좋아, 무릎 꿇고 빌어! 그럼 들어줄게.”내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더니 이제 와서 서로 등 돌리고 상처만 너덜너덜해지자 나보고 무릎 꿇고 빌라고?!나는 그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서준 씨는 나한테 이미 놀다 질린 장난감에 불과해요. 애원할 가치조차 없다고요.”“이만 가요.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김서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휴대폰을 들고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지금 바로 갈게요.”말을 마친 그 남자는 나를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나는 한참 거리를 누빈 후에야 겨우 휴대폰으로 현주소를 찾아내고 집까지 돌아왔다.집에 돌아오자 김서준이 뜻밖에도 주방에 있었다. 허다은이 나타난 이후로 이 남자는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질 않았다.그는 기분이 별로인지 술잔을 들고 내 뒤에 있는 탁자를 넌지시 바라봤다.탁자 위에는 탐스럽고 빛깔 좋은 살구가 놓여 있었는데 학교 뒷산에서 땄을 때랑 거의 비슷한 살구였다.“먹어.”김서준이 거만한 자세로 말을 내뱉으니 감히 선뜻 거절할 수가 없었다.다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이때 김서준이 힘껏 나를 잡아당겼다.그의 두 눈동자에 불씨가 활활 타올랐다.“날 무시해? 아직도 내가 장님이라고 놀리고 싶은 거야?”그는 질책하는 투로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한때 실명했던 일은 줄곧 그의 치부가 되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한 그가 먼저 언급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다.나는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낮에 발생한 일을 되새기려고 애를 썼지만 어렴풋한 머릿속엔 조각난 잔상들만 몇 개 떠다닐 뿐이었다.“왜 이래요? 미쳤어요? 내가 뭘 건드렸냐고요?”나는 그에게 꽉 잡힌 손을 빼내려고 몸부림치면서 안색도 점점 굳어갔다.“머리가 어지러워서 좀 잘 테니 일단 나가주시죠.”“가긴 어딜 가? 지금 날 내쫓는 거야?”“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기억하는 거야? 하긴, 너처럼 매정한 여자가 기억할 리가 없지.”그가 불쑥 저 자신을 비웃듯 쓴웃음을 지었다.“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새겨둬. 지금 네가 사는 집, 먹는 음식들 모두 내가 공급하고 있어. 넌 날 내쫓을 자격 없다고!”‘오늘이 무슨 날이라니?’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곰곰이 생각해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백지장이 돼버렸다.‘괜찮아. 나중엔 서준 씨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 소소한 기념일쯤이야 잊으면 잊으라고 하지 뭐.’내가 아무 말도 없자 인내심이 바닥난 김서준은 살구를 집어 들더니 다짜고짜 내 입가에 갖다 대고 고집스럽게 말했다.“먹어.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
나는 목적 없이 거리를 누비며 몸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하게 파고들었다.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16살 때의 김서준이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해 나는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부모님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나는 매우 혼란스럽고 성격도 갈수록 괴팍해졌다.김서준은 새로 이사 온 이웃이었고 바로 옆집에 살았다.이 남자도 가정환경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빠는 딴 여자랑 바람이 나서 멀리 떠나가 버렸고 엄마는 청소 일을 도맡으며 겨우 생계를 유지해나갔다.한편 김서준은 태생이 밝은 성격인지라 나만 보면 활짝 웃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를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내가 유일하게 기쁠 땐 학교 뒷산에 가서 살구를 뜯을 때였다. 쨍쨍 내리쬐는 햇살 아래 살구도 탐스럽게 무럭무럭 잘 자라났다.그날 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저녁 무렵 힘겹게 나무에 올라가서 이제 곧 살구에 손이 닿으려 할 때 그만 굴러떨어지고 말았다.아플 법도 한데 고통이 전혀 전해지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봤더니 김서준이 글쎄 창백한 얼굴로 내 몸 아래에 단단히 깔려있었다.“미안해요...”그때 그는 삐쩍 마른 체구라 내게 짓눌렸더니 그대로 뼈가 부러졌다.병원 병실에서 나는 대성통곡하며 미안하단 말만 반복했고 김서준은 오히려 매우 담담했다.“너 요즘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아서 바보 됐나 의심했는데 이제 드디어 우네? 그래, 울면 됐어.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어야지.”“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다 사줄게.”“박지유,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옆에 있잖아. 자꾸 혼자 다니지 마.”그땐 모든 게 소소한 일상이었지만 어언간 십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나는 길옆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니 행인들이 분주하게 지나가고 차들이 도로를 질주했다. 내 머리가 또다시 고장이 나버렸다.“나 방금 뭐 하려고 했지?”
김서준에게 감금당한 지 4년째 되는 해, 그에게 약혼녀가 생겼다.그녀는 바로 전설 속의 해상 그룹 따님 허다은이었다. 지적이고 온화한 성격에 김서준과 나란히 서 있으면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두 사람은 서로 알아간 지 반년이 넘었고 어느덧 결혼 얘기가 오갔다.이 몇 년간 김서준이 만났던 여자는 수없이 많았지만 다들 스쳐 가는 인연일 뿐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친구가 전화로 나를 일깨워주었다.“김서준 이번엔 진지한 것 같아. 상대가 예쁠뿐더러 김서준의 사업에도 보탬이 되잖아.”나는 허다은에 대해 줄곧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 그녀와의 첫 만남이 김서준 회사일 줄은 몰랐다.그날 아침 나는 재진 받으러 병원에 갔다. 나의 선배였던 주치의가 말하길 병세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 3개월 뒤엔 내가 모든 기억을 잃을 거라고 했다.“너 진짜 김서준한테 얘기 안 할 거야? 지금 말해주면 마음 되돌릴 수도 있을 텐데.”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관두기로 했다.이미 변심한 사람에게 굳이 아픈 상처를 드러내서 뭐할까? 다만 나는 그를 찾아가서 계약서에 서명을 받아야 했다.내 병은 죽는 병이 아니다. 외국에 특별히 내 상황에 특화된 요양원이 있는데 비용이 어마어마할 따름이다.나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별다른 친인척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그에게 내 일을 맡기고 대신 잘 처리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김서준 비서와 예약하지 않은 채 회사에 찾아갔더니 허다은도 자리에 있었다.나와 그녀는 응접실 양쪽에 각자 떨어져 않았고 그녀의 주변에는 몇몇 직원들이 둘러싸였다. 다들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며 아양을 떨었고 그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았다.“저분은 누구시죠?”그녀가 물었다.이에 다른 동료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박지유예요.”김서준 신변의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너무 잘 안다.이때 허다은이 떠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쭉 훑어보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먼저 말을 건넸다.“박지유 씨?”나는 그녀를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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