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일찍 김예훈은 덥수룩한 머리로 눈이 몽롱한 채 전기 스쿠터를 타고 남해시에서 가장 번화한 상권에 도착했다.YE 투자 회사는 이 지역의 중심부에 있었다.어젯밤에 김연철한테 전화해서 회사 인수인계를 다 마쳤으니 오늘 가서 서명만 하면 되었다.어쨌든 2조 원으로 바꾼 회사였기에 김예훈은 신경이 쓰여서 아침부터 아침도 못 먹고 달려왔다.회사 로비에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여기 직워들은 하나같이 엘리트들이었고, 하나같이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일상복을 입은 김예훈은 아무리 봐도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김예훈은 앞으로 자신의 직원이 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김예훈, 너야?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아름다운 여성이 김예훈 곁을 지나다가 약간 의아한 듯 물었다.송문영은 마음이 급해났다. 김예훈은 어젯밤에 화이트골드 호텔에서 친구들에게 사기를 치려고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을 찾아왔다. 송문영은 김예훈이 자신을 스토킹하는 스토커라고 여겼다.자신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송문영이 김예훈을 보는 눈빛은 마치 변태를 보는 눈빛과 같았다.저 미친놈이 회사까지 찾아와서 자신을 괴롭힌다고 여겼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 알아? 네가 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 거야?"라고 물었다.송문영은 기세등등해서 사람을 몰아붙였다.“YE 투자회사 아니야?” 김예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건데 네가 뭔 상관이야?""무슨 일이시죠?" 이때 중년의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회사의 경호팀장으로서 한 무리의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기세등등했다.송문영을 발견한 경호팀장은 깍듯이 경례를 한 뒤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송 부장님, 무슨 일이시죠?"송문영이 대표로 승진한다는 소문이 무성했기에 보안팀장는 그녀에게 아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어떻게 보안 유지를 한 거예요? 어떻게 이런 사람이 회사로 막 들어오죠?" 송문영은 손가락으로 김예훈의 코를 가리키며 쌀쌀맞게 말했다.경호팀장은 죄
“나보고 나가라는 거야?”직원이 사장에게 나가라니, 김예훈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사람 말 못 알아들어? 나가라니까! 누가 뽑아줬든 아는 사람이 있든 신경 안 써. 그냥 지금 당장 사라져!”송문영은 이를 꽉 깨물었다. 말이 끝나자 그녀는 가방에서 돈뭉치를 꺼내 바닥에 집어 던졌다.“안 나가겠다, 이거지? 돈이 필요한 거 아니야? 이 돈 들고 꺼져!”바로 그때,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가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러자 직원들이 사측에서 몰려드려 재빠르게 예의를 갖추었다.마침 고급 가죽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긴 포니테일 머리를 한 여성이 걸어 내려왔다. 20살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서류 봉투를 품에 안고 있었다.그녀의 외모는 송문영과 견줄 만했지만, 몸에서 뿜어내는 아우라는 송문영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송문영은 다른 사람들은 쳐다 보지도 않고 빠르게 김예훈 앞으로 다가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김예훈은 그녀를 쳐다보는 순간 누군지 떠올랐다. 하은혜. 김예훈이 YE 가문에 있을 때 자신을 따라다닌 적이 있었다. 그런 하은혜가 YE 투자 회사의 대표 비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랜만이에요.”김예훈은 고개를 끄덕였다.“하 비서, 제 정신이에요?”송민영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단아한 얼굴에 분노가 가득 찼다.“우리 대표님이 누군지 모두가 다 아는데, 청소 도우미한테 함부로 대표라고 하면 안 되죠!”“청소 도우미요?”하은혜는 조심스럽게 김예훈을 바라보았다. 무표정인 그를 보고 나서야 몸을 돌려 송민영을 차갑게 쳐다봤다.“송 팀장,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봐요. 오늘부터 이 분이 바로 우리 회사의 새로운 대표, 김예훈 대표님이십니다.”“뭐라고요?!”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아연실색했다. 특히 경호팀장은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대표에게 나가라고 소리치다니…….“그럴리가요! 말도 안 돼!”송민영은 얇은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이 사람이 김예훈인 건 맞아요. 하
송문영은 얼굴이 붉어졌다. 김예훈은 송문영이 여유를 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젯밤만 해도 김예훈 앞에서 당당하게 콧대 세우고 함께 노래부르기도 싫어하던 송문영이 오늘 이곳에 서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한다.김예훈은 그녀를 한참 쳐다보았다. 훈녀로 불리던 옛 동기 송문영은 까칠했지만 본성이 나쁜 건 아니었다. 이 생각이 든 김예훈이 입을 열었다.“이번 일로 당장 널 해고할 생각은 없어. 다만 승진과 관련해서는 네 능력을 보고 판단할게.”말을 마친 김예훈은 송문영을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졌다. 이제 막 회사를 받았기에 운영 상황 같은 것도 어떤지 모르는 판국에, 송문영과 쓸 데 없는 이야기 주고 받을 시간이 없었다.송문영은 아름다운 여자지만 김예훈이 보았던 미모의 여성은 차고 넘쳤다. 적어도 자신의 아내인 정민아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YE 투자 회사는 대표가 바뀌면서 진행 중이던 모든 투자 계획이 중단된 상황에 오히려 1조를 투입해 양질의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한다.이 소식은 마치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남해시 전체로 전파됐다.남해시 유명 일가 세력들에게 크나큰 변수가 될 것임을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이 시기에 가장 먼저 YE 투자 회사에 취임한 새 대표 이사의 신임을 사게 된다면 남해에서 제일 가는 일가로 급부상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물론 정씨 일가는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고 그 즉시 가족 연회를 열어 모든 친인척을 불러 모았다.정민아는 김예훈에게 연회에 참가할 준비를 해야하니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며 전화를 걸었다.김예훈은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정민아는 이미 자신의 빨간 포르쉐에 올라타 있었다. 휴대폰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여보, 내가 늦었지.”김예훈은 잰걸음으로 정민아에게 다가왔다.정민아는 허리 라인이 강조된 예복을 갖춰 입었다. 가슴팍에는 독특한 장미 브로치를 차고 있었다.‘프라하의 심장?’김예훈의 눈이 반짝였다. 이것이 왜 그녀에게
“뭐?”김예훈은 순간 멍해졌다. 입 속에 있던 스테이크를 삼키는 것도 잊었다. 언제부터 진행된 일인 건지, 전혀 모르는 일이다.게걸스럽게 먹는 김예훈을 보고 정소현은 더욱 질색하며 차갑게 말했다.“동훈 오빠가 정식으로 혼담 얘기를 꺼냈어. 오늘 저녁에 예물을 보내올 거야. 눈치 있으면 조용히 앉아 있어. 눈치 없이 굴면…….”정소현은 피식 조소를 내뱉었다. 정씨 일가가 합법적인 사업을 하고는 있지만 친척 중에 경호원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소란이라도 피운다면 모가지를 그대로 꺾어버릴 수도 있다.“발표할 것이 있으니 모두 정숙하라.”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던 정 씨 일가의 어르신, 정동철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얼굴에는 기대 섞인 표정이 묻어났다.“모두 소식 들었겠지. YE 투자 회사가 갑자기 대표 이사를 바꾸더니 이미 협상 마친 모든 투자를 부결시켰단다. 심지어 프로젝트에 1조원을 투입했지. 이유를 통 모르겠어.”“이 알 수 없는 새 대표 이사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우리 정 씨 일가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다!”“수많은 남해시 내 일가와 기업이 영향을 받았으니 대규모 구조조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최근 몇 년 들어 정 씨 일가는 남해시에서도 상위권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도 이류 일가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구나.”“현재로서 남해시에서 힘을 더 키우고 우리 정 씨 일가가 장기적인 발전을 이루기에는 아직 부족하다.”“우리 정 씨 일가가 일류 가문으로 거듭나 경기도에서 영향력 있는 최고 일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다!”“YE 투자 회사와 협력해 새로운 대표 이사와 가까이 한다면, 그 1조원이라는 파이를 나눠가질 수 있다면! 앞으로 우리 정 씨 일가는 남해시에서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정동철의 말이 끝나고, 장내에 있던 정 씨 일가는 서로를 바라만 볼 뿐 정적만 흘렀다.YE 투자 회사와 협력을 한다? 새로운 대표 이사와 가까이 한다?이번이 기회라는 건 모두 안다.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박동훈은 맵시 있는 수트를 입고 단정히 정리한 머리카락을 모두 뒤로 넘긴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선물 상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열렬한 박수로 박 대표를 환영해주세요!”한 청년이 크게 외쳤다.그 순간 장내에는 환호소리가 울려 퍼졌다.김예훈과 비교하면 박동훈 같은 청년이야말로 정 씨 일가의 환영을 받을 만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가장 중요한 건, 박동훈이 정 씨 일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지금 이 순간 정 씨 일가의 눈에 박동훈은 재물신과도 다름 없었다.박동훈은 웃음기가 묻어나는 얼굴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레드카펫을 밟는 연예인과도 같은 모습이 마치 성공한 인사처럼 보였다.“어르신, 초대도 없이 찾아와 실례했습니다. 제가 에둘러 말할 줄 모르는 성격이라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박동훈은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저는 정민아 양에게 한 눈에 반했습니다. 하지만 민아 양은 보잘 것 없는 녀석에게 시집을 갔습니다.”“3년 전, 이 일을 그저 농담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사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을까요? 전 민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민아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아요. 오늘 이곳에 온 것도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말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박동훈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외쳤다.“민아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민아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와아아!장내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김예훈은 안중에도 없는 직설적인 고백이었다. 그 역시 이 자리에 있는데 말이다.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김예훈은 정말 보잘 것 없는 놈이다. 체면 살려줄 가치가 없다.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말이다.그저 지금 저 데릴사위가 잔뜩 성이 났을까 걱정이다.“ 몇 년 간 민아만 바라봤습니다!”박동훈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민아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오늘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성과를 가져왔어요.”박동훈은 선물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그 안에는 수표가
일말의 의문을 품고 있던 정민아 역시 이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어제 정민아도 장미와 프라하의 심장 모두 박동훈이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박동훈이 사실대로 인정하니 더욱 확실해졌다.어제 오전에 했던 말인데 오후에 곧바로 프라하의 장미와 프라하의 심장을 준비하다니, 박동훈이 말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금방 찾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닌데, 혹시나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내가 있는 남자이기에 정민아는 이 혼사에 응해서는 안 된다는 걸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감동이 몰려오면서도 부끄러워졌다.“김예훈 표정 봤어? 아주 놀라 자빠진 것 같은데, 웃겨 죽겠네! 하하하!”이때, 정지용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김예훈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웅성이기 시작했다.김예훈의 표정은 확실히 일그러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박동훈의 뻔뻔한 거짓말 때문이었다. 누군가 폭로하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도 없는 거짓말이다.“박 대표님, 우리 데릴사위 표정 좀 보세요. 대표님을 때리고 싶나 본데요?”정지용은 계속 입을 놀렸다.“그럴 수나 있겠어? 박 대표 머리카락도 못 만질 걸? 하하하!”“몸에 있는 거 전부 합쳐도 박 대표님 머리카락 한 가닥 만도 못 하지. 건들기만 해 봐, 우리가 가만히 안 둬!”“왜? 아무 말도 못 하겠어? 놀라서 벙쪘어?”정지용은 ‘하하하’ 박장대소를 했다.“김예훈, 더 머저리 같을 수는 없어? 오늘 당신 와이프 때문에 온 사람이 있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잖아. 데릴사위 꼴이 말이 아니네.”“하하하!”사방에서 신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정민아는 부끄러움이 극에 달했다. 아직 법적으로는 부부사이이기에 김예훈이 놀림 받는 만큼 스스로도 창피했다.오늘 밤에 이런 일이 있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그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옆에 있던 임은숙이 김예훈을 노려보며 말했다.“아직도 화가 나나? 말 한 마디라도 잘못 놀렸다가는 큰 코 다칠 줄 알게!”
별장에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김예훈을 바라봤다.저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혹시 정말 YE 투자 회사의 새 대표이사가 누군지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김예훈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YE 투자 회사의 새 대표이사는 바로 나, 김예훈입니다.”모두가 경악했다. 장내 전체에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하지만 그 순간,“당신이라고? 하하하하!”박동훈은 배를 잡고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그는 겨우 웃음을 멈추고 정동철을 향해 말했다.“어르신, 저 데릴사위가 허풍 떨기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바보였네요.”정지용과 일부 사람들이 모두 ‘풉’하며 웃음을 뿜었다. 그러고는 바보를 쳐다보듯 김예훈을 바라봤다.“김예훈, 네가 무슨 대표이사야!”정지용이 말했다.“참 재미없네. 그런 헛소리를 누가 못해?”정가을이 비웃으며 말했다.임은숙 역시 성이 났다.“그만 망신시키고 당장 돌아와!”“고집 부리지 말고 그만 해.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네 얼굴에 침 뱉는 거나 마찬가지야.”정민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김예훈이 오늘 너무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자신이 YE 투자 회사의 대표이사라고 최면을 건다고 여겼다.“그만 해. 의사한테 가보자.”정민아는 김예훈을 끌어당기며 말했다.“민아야, 날 믿어. 내가 증명할게.”김예훈은 휴대폰을 만지며 말했다. 그의 통화기록에 이름이 하나 눈에 띄었다.“박동훈 씨, 당신은 YE 투자 회사의 임원이니 이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죠?”‘하은혜’라는 세 글자가 박동훈의 눈에 들어왔다.“참 우습네요. 우리 대표이사님의 비서 이름이 증거라는 겁니까? 그럼 휴대폰에 세계 갑부의 비서 이름이 있으면 저도 세계 갑부겠네요?”박동훈은 전혀 믿지 않았다.YE 투자 회사의 명성은 대단하다. 베일에 싸인 새 대표이사를 제외하면 부 대표부터 대표이사 비서까지 남해시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 김예훈도 아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허풍은 도를 넘었다.“그럼
”박 대표님, 바보랑 무슨 대화를 하겠어요. 전 하나도 안 믿어요.”주변에 있던 정지용이 더 이상 못 봐주겠다는 듯 말했다. 이내 김예훈의 폴더폰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허풍이나 떨고 있어! 증거라고? 웃기고 있네!”“당장 나가! 같은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역겹다고!”“우리 정 씨 가문에 어떻게 저런 놈이 있을 수가 있는지!”“파렴치한 놈!”하나 둘씩 정 씨 일가에 먹칠을 한다며 김예훈을 욕하기 시작했다.김예훈이 대표이사일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 김예훈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밀려왔다.“이게 왜…….”하은혜가 3년 전에 사용하던 전화번호를 더 이상 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휴대폰을 바꿨다는 말도 해주지 않다니, 하은혜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짜악!전혀 예상치 못했다. 모두가 이 소동을 즐기려고 하던 그때, 한 편에 앉아있던 임은숙이 갑자기 일어나 김예훈의 뺨을 내리쳤다.김예훈조차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그만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얼굴도 부어올랐다.“개자식, 아직 덜 망신 당했다 이거야? 우리 집 개에 불과한 놈이 누가 입을 놀리라 했어!”“네가 정말 뭐라도 된 것 같니? 새 대표이사라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하하하하!”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코미디라도 보듯 흥미진진한 눈빛이었다.정민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뭇거렸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오늘 일 때문에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건 알겠지만 왜 이렇게 뻔히 들킬 거짓말을 하는 거야? 이럴 필요 없어. 이혼하겠다는 말 안했으니까.”“당장 박동훈 대표님께 사과해. 이 일이 새어나가 YE 대표이사가 알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일이야.”김예훈은 잠시 멍해졌다. 정민아가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 순간 박동훈은 참을 수 없었다. 김예훈이 계속 발악을 하는 것이 이득이었다.“어르신, 이렇게 허풍을 치다가는 큰일날 지도 모릅니다.”박동훈이 말했다.
일본은 대한민국 문화를 너무나도 좋아했다.특히 신중하게 계획해야 움직이는 그런 문화 말이다.일본 처지에서는 일본이 강국으로 거듭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것이다.대한민국의 일부 지역만 점령할 수 있다면 제대로 일어설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그런데 김예훈이 부산, 그리고 진주에서 일본인의 계획을 망쳤으니 그를 죽이려고 미야다 신노스케나 아마미네 토시로 같은 검신을 보낸 것이다.이들은 대한민국에 두 번째 총사령관이 나타날까 봐 두려웠다.일본 머리 꼭대기 위에 군림할 만한 두 번째 전설적인 존재가 나타날까 봐 두려운 것이다.김예훈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은 이미 진지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이들이 김예훈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서 마치 토네이도가 불어오는 것 같았다.아마미네 토시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김예훈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죽여버려!”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명의 일본 자객이 동시에 굴러와 김예훈의 발을 찌르려고 검을 내밀었다.김예훈은 본능적으로 공중으로 뛰어올랐고, 곧 또 두 명의 자객이 나타나 김예훈이 좌우로 움직이지 못하게 포위했다.이어 두 명의 자객이 하늘로 날아올라 김예훈의 모든 퇴로를 완전히 막아버렸다.이 둘은 동시에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고 했다.“재밌군.”김예훈은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역시 야마구치파보다 강한 일본 6대 파벌 중의 하나인 야마자키파답네.”소위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의 실력은 야마구치파 고수들보다는 훨씬 강력했다.저마다 탑 장병급으로 여덟 명이 모이면 위력이 엄청났다.일반 무신을 죽이려 해도 별문제가 없을 정도였다.감탄하는 동시에 김예훈은 이미 그중 한 명이 쥐고 있던 검을 딛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겉보기엔 단순한 동작인 것 같아도 정확히 이들의 약점을 찔러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빛을 극도로 어둡게 만들었다.퍽. 퍽.김예훈은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순간 발로 두 명의 자객의 얼굴을 걷어찼다.그리고 착지하
“일본의 천황이 신권과 황권이 통일된 존재라고 하지만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냥 꼭두각시일 뿐이야. 일본의 권력은 언제나 내각에 집중되어 있었어. 똑똑하지 못한 사무라이들이나 꼭두각시인 천황에 속을 뿐이지. 내 말 틀렸어?”김예훈은 태연하게 일본 사무라이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현실을 폭로했다.그들이 섬기던 군주는 이미 오래전부터 권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아마미네 토시로의 눈빛은 잠깐 사나워지긴 했지만 곧 침착해지면서 천천히 말했다.“김예훈, 역사책을 몇 권 읽었다고 우리 일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 마. 천황님은 네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위대하셔. 그런데 네가 우리 위대하신 천황님을 모욕했으니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를 수밖에. 당장 죽여버릴 거야!”아마미네 토시로의 단호한 외침과 함께 여덟 명의 야마자키파 자객들이 동시에 김예훈을 향해 달려들었다.여덟 명의 자객들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일본 검도에서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가장 날카로운 주합참을 선보였다.그들이 검을 내리치자 빛이 반짝였다.여덟 갈래의 빛이 서로 교차하면서 마치 폭풍우처럼 김예훈이 있는 쪽으로 몰려왔다.김예훈은 아무 말 없이 오른손으로 테이블을 ‘탁’ 쳤다.찻잔이 공중에 날아올라 첫 번째 빛과 부딪히면서 순식간에 가루가 되고 말았다.김예훈은 그 힘을 이용해 선실 밖으로 뛰어올라 갑판 난간 위에 착지했다.여긴 아직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고, 온 바닥에 피가 묻은 탄피가 널려있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그 여덟 명의 일본 자객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순식간에 갑판 위에 올라서서 또 한 번 검을 휘둘렀다.퍽.여덟 갈래의 빛이 하나로 모여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냈다.희미하게나마 갑판이 그 기세에 눌리는 느낌이었다.뒤쪽에서는 아마미네 토시로가 찻잔을 쥐고 걸어 나오면서 웃으며 말했다.“김예훈, 이 사람들은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이야. 나중에 천황님을 모시라고 내가 정성껏 가르친 제자들이지. 너 하나 죽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야. 네가 운 좋아서 온전한 시체라도
“말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이제는 칼을 뽑는 수밖에 없겠구나.”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눈빛에 차가운 살기가 스쳤다.그는 앞에 놓인 말차를 가볍게 들며 담담하게 말했다.“차로 술을 대신해 너에게 마지막 한 잔을 권하지. 보는 안목이 없는 자에게 말이야.”김예훈도 차를 따라 들며 비슷한 말투로 답했다.“그럼 나도 야마자키 검신에게 한 잔을 권하지. 눈뜬장님에게 말이야.”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며 공기 중에 살기가 감돌았다. 동시에 잔을 기울여 단숨에 마셔버렸다.김예훈이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시자 아마미네 토시로가 흥미롭게 말했다.“들어오고부터 이렇게 태연하게 내 차를 마시다니...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이미 독을 탄 거 아니었어?”김예훈이 비웃듯 말했다.“이렇게 말만 늘어놓은 건 내가 쓰러지길 기다린 거 아니야?”“하지만 안타깝게도 헛수고야.”전쟁터에서 온갖 살인 수법과 독을 겪어본 김예훈에게 이런 독은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그는 처음부터 아마미네 토시로가 독을 탄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에게 아무런 효과도 없으므로 티를 내지 않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불사의 잠'이라고 우리 야마자키파에서 대대로 이어온 독약인데...”“중독된 자는 짧은 시간 내에 온몸에 힘이 풀려 혼미상태에 빠져 깨어날 수가 없지.”“그런데 너의 상태를 보니 전혀 효과가 없구나.”“아깝게 됐군.”“대체 어떻게 독을 피한 거냐?”독이 통하지 않자 아마미네 토시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간을 벌기 위해 질문을 했다.김예훈은 비웃으며 대답했다.“알려줄 순 있지만 대신 질문에 답해 줘야겠어.”“너희 야마자키파라도 어쨌든 일본 6대 파벌 중 하나 아니냐?”“일본 궁중 어의이자 종주인 네가 일본에서 지위가 높을 텐데…”“왜 김현민 같은 놈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며 나를 두려워하는 눈치였으면서 스스로 나서는 것이야?”“돈? 권력? 다 가진 놈이 왜?”“대체 어떤 대가로 이렇게 목숨을 내던지는
“그게 무슨 뜻이냐?”아마미네 토시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정말 네 아랫것들이 떠벌리는 것처럼 잘났으면 택시에 폭탄을 설치하거나 그 많은 총잡이로 날 상대하지 않았겠지. 진짜 잘난 놈이면 그냥 칼 들고 와서 대놓고 내 목을 베어 버렸어야지. 그런데 넌 그러지 않았단 말이지.”“이렇게 삽질을 많이 한다는 건 이유가 하나밖에 없지. 그건 바로 네가 졸아서 그래. 내가 한 방에 너 죽일까 봐. 미야타 신노스케 꼴 날까 봐.”김예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말이야. 내가 김현민이랑 등지자마자 너같이 일본 최고의 검객이란 놈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부산에 나타났지? 비행기가 아니라 로켓을 탄다고 해도 이렇게 일찍 도착할 수는 없지.”“사실은 미야타 신노스케가 올 때부터 넌 이미 부산에 왔었지. 그런데 내가 두려워서 꼼짝도 못 했고. 오늘도 어쩔 수 없이 나온 거잖아. 결론은 하나야. 넌 내 상대가 안 돼. 두려웠던 거지.”김예훈은 차를 탁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뭐... 그러고 보면 야마자키파의 검신으로서 미야타 신노스케보다는 조금 똑똑하긴 하네. 그래서 내가 오늘은 특별히 살려주도록 하지. 무릎 꿇고 차 한 잔 따라주고 사과한 다음 너희 나라로 굴러가면 돼. 그럼 내가 너의 면목을 봐서 좀 살려줄 수도 있고.”“닥쳐!”“죽고 싶구나!”“감히 우리 검신을 모욕하다니! 죽여주마!”여덟 명의 검객들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선창 안은 순식간에 살기로 가득 찼다.김예훈은 눈썹 하나도 까딱이지 않고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네가 진짜 이 쓰레기들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번 덤벼봐. 그때 가서야 알게 될 거야. 그날 용문당에 양상철이 있거나 말거나 달라지는 건 없다는걸.”아마미네 토시로가 비웃듯 웃더니 덤덤하게 말했다.“김예훈, 너의 그 자신감은 인정해 주마. 하지만 지나친 자만은 독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해. 내가 널 두려워한다고? 네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건 아니고?”“내가 미리 부산에 온 건 안동 김씨
“닥쳐!”“건방지구나!”“누구를 등지고 야마자키파 검신 앞에서 이렇게 허세를 부리는 거냐?”“사전을 안 읽어봤나? ‘사’자라는 글자를 모르느냐?”여덟 명의 검객들이 하나같이 분노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누구인가?야마자키파의 검신이자 일본 황실의 어의, 진정한 무신 급의 인물이다.그는 오랜 세월 동안 수행하며 전설적인 천인합일의 경지를 추구해왔다.이러한 대인물은 일본에서의 지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다.이와 같은 일본 검객들의 눈에 그는 살아있는 미야모토 무사시 , 사사코 코지로우 와도 같은 존재였다.그런데 비천한 일반인 주제에 감히 아마미네 토시로를 조롱하다니!이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아마미네 토시로의 평온하던 얼굴에 미묘한 냉기가 스쳤다.하지만 그는 곧 평정을 되찾고 왼손을 가볍게 들어 그만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그의 동작에 여덟 명의 검객들은 억울한 듯 입을 다물었지만 눈빛으로 김예훈을 산 채로 목 졸라 죽일 듯했다.“김예훈, 네가 인물인 건 안다.”“얼마 전, 야마구치파의 검신 미야타 신노스케도 너에게 큰 피해를 보았지.”“너 때문에 야마구치파의 고수들은 거의 전멸했고...”“나카노 가문의 음양사 한 명도 목숨을 잃었지.”“하지만 넌 잘 알 거야. 미야타 신노스케에게서 그 정도 이득을 본 건 무신 양상철이 네 뒤를 봐줬기 때문이지.”“네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너 자신이 제일 잘 알겠지?”“그런데 오늘 양상철이 없이 혼자 여기 와서 내가 널 죽이려면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이런 상황에서도 감히 내가 네 앞에서 체면이 없다고 말하다니?”“김예훈, 대체 누가 네게 하늘만큼의 배짱을 준 거냐?”“너의 수준을 잊게 할 정도로?”“감히 내 아마미네 토시로 앞에서 건방을 떨어? 너한테 그럴 자격이 있나?”한 검객이 참지 못하고 비웃으며 김예훈을 노려보았다.“김예훈, 얼마 전에 감히 아마미네 다이토 도련님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시켰다지?”“누구든 네게 손을 대면 무신 양상철의 적이라
김예훈이 인파 속으로 뛰어들자 남은 총잡이들은 눈꺼풀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몇 명은 허리에서 단검을 꺼냈지만 움직이기도 전에 김예훈이 빠른 몸놀림으로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탕탕탕!총잡이들은 하나둘씩 몸을 떨더니 어떤 이는 바다로 날아가 떨어졌고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쓰러졌다.그들은 한 사람의 힘이 이 정도까지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단순한 주먹과 발차기만으로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김예훈은 쓰러진 적들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그는 갑판에서 깨끗한 타월을 집어 머리를 닦으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선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유람선의 내부는 호화로웠다.우아한 인테리어와 은은한 향기가 피비린내 나는 외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연출했다.안쪽은 전체적으로 일본풍으로 꾸며져 있었다.중앙에는 30cm 높이의 낮은 탁자가 놓여 있었고 주변에는 이끼와 정교한 불상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이렇게 작은 유람선 안에 이런 세팅을 해놓은 주인공의 취향이 의아할 정도였다.선실 후반부에는 정교한 대나무 마루와 퉁퉁마디로 만든 자리가 깔려 있었다.평범한 소재지만 눈에 띄게 고급스러움과 값비싼 분위기가 느껴졌다.그 자리 위에는 흰 대머리에 일본 전통 목욕 복 차림을 하고 다리에 일본도를 놓은 중년의 일본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그는 갈색 찻잔에 들어있는 말차를 마시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그의 뒤에는 검도복을 입은 8명의 일본 검객이 허리의 일본 장도를 움켜쥔 채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김예훈은 일본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탁자 앞에 앉으며 덤덤히 말했다.“이게 누구야?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궁중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 아니야? 수행을 마치고 부산에 가서 내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떠들어 대지 않았어? 목숨을 버리려고 여기까지 와서 내게 시비를 건 건가?”“이제 보니 너희 일본 놈들은 정말
김예훈의 표정은 차가웠다. 물속에서 몸을 굴리며 회피하던 그는 놀라운 속도로 유람선에 접근했다.불과 십여 초 만에 그는 이미 유람선의 후미에 다가왔다.오른손으로 선체를 가볍게 짚으며 몸을 날려 갑판 위로 올라섰다.그와 동시에 그가 방금 빼앗은 작살을 휘둘렀다.푸!피가 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김예훈의 모습을 찾던 두 명의 총잡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을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졌다.김예훈은 몸을 굴리며 다른 두 명의 총잡이 앞으로 다가갔다.손에 든 작살을 던져 그들을 갑판에 박아버렸다.“젠장!”이제서야 다른 총잡이들도 반응했다.사방에서 검은 두건을 쓴 스무 명이 넘는 총잡이들이 달려왔다.그들은 이미 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한 상태였고 김예훈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탕탕탕!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나왔다.좁은 갑판은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공간으로 변했다.진한 화약 냄새가 퍼지며 김예훈은 전쟁터에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힘들다.체로 치듯 총알을 맞거나 벌집이 되어 죽었을 것이다.그래서 이 순간 총잡이들은 하나같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탕탕탕!하지만 김예훈은 불가능해 보이는 타이밍에 바닥에 떨어진 총을 집어 들었다.그리고 닫히지 않은 창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강철 창문이 떨어지며 김예훈 앞을 가로막았다.탕탕탕!그 순간 총알들이 창문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김예훈은 극적으로 죽음의 위기를 피해냈다.나머지 총알들은 빗나가거나 갑판에 박혀 딱딱한 소리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총잡이들의 탄약이 바닥났지만, 김예훈은 겨우 살짝 긁힌 상처조차 없었다.주변은 이미 벌집이 되어 있었다.김예훈은 무심하게 또 다른 총을 주워 탄창을 교체했다.그리고 총잡이들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또 할 거냐?”총잡이들은 정신이 멍해졌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탄창을 교체했다.다시 총을 들이대며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김예훈이 먼저 두 자루의 총을 동시에 발사했다.탕
김예훈이 김현민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원래 평탄했던 도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몹시 울퉁불퉁했다.김예훈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웃으며 물었다.“기사님, 여기는 어디예요? 아니면 당신이 누구 사람인지 물어봐야 하나요? 지금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앞에는 오랫동안 보수되지 않고 있는 길이었는데 길가에는 이미 많이 낡은 경고 표지판들이 가득했다.김예훈의 질문에 대머리 택시 기사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앞에 있는 경고 표지판을 뚫고 길 끝을 향해 질주했다.기사의 무모한 행동에 김예훈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어디로 가냐고? 뭘 할 거냐고? 당연히 당신을 죽이러 가는 거지.”대머리 중년이 갑자기 섬뜩하게 웃었고 입가에서는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당신이 차에 탄 순간부터 당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고 이제 아무도 당신을 살려줄 수 없어. 김예훈 씨 잘 가! 사모님이 안부 전하라고 했어.”이어서 대머리 중년은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고 고개가 옆으로 떨어지더니 먼저 죽어버렸다.그의 오른발이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기에 차는 곧바로 도로를 벗어나 바다로 날아갔다.김예훈이 고개를 저었다.김서하가 자기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숨돌릴 시간마저 주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다만 이런 하찮은 수법으로 김예훈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솔직히 말해서 김서하든 김현민이든 다른 사람들 눈에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물일지 모르지만, 김예훈이 보기에 두 사람은 어디에든 내놓기 민망한 평균 이하 수준의 사람들이었다.차가 바다에 떨어지려는 순간 김예훈은 꽁꽁 닫혀 있는 차 문을 발로 차더니 차가 물에 빠지기 직전에 차에서 빠져나왔고 동시에 차는 물에 빠지면서 쿵 하는 폭발음이 터졌다.짙은 연기 속에서 수많은 철 조각이 날아다녔다.“푸!”김예훈은 바닷속 10미터 정도에 잠수했고 다시 옆으로 10여 미터 헤엄쳐 간 후에야 수면 위로 올라왔다.처음부터 김예훈은 누군가 고의로 준
김예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모님, 감히 말씀드리자면 진실 외에도 두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그게 뭐죠?”휴대폰 건너편의 박연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첫째는 안동 김씨 가문 당주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합니다. 10년 전의 진실에 반드시 진주·밀양의 안동 김씨 가문 고위층이 관련이 되어 있을 거라는 건 사모님도 잘 아시는 사실이잖아요. 만약 안동 김씨 가문 당주의 지지가 없다면 진실을 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잘못하다가는 사모님도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후계자 대체 인력이 필요합니다. 김현민 씨가 잡힌 후 당주 자리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있어야 안동 김씨 가문에 혼란이 오지 않을 것이고 또 사모님이 내정한 사람이어야만 사모님께서 김씨 가문을 더 잘 장악할 수 있지 않겠어요? 게다가 사모님은 아직 젊으시니 20년 후면 반드시 사모님의 친 아드님이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김예훈은 은근히 10년 전 사건의 진범이 김현민이라고 확신하는 듯 말했다.박연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김예훈 씨가 지금 한 얘기는 신중하게 고민해 볼게요. 그리고 몸조심해요. 아가씨는 안동 김씨 가문의 아가씨일 뿐만 아니라 용전의 안주인이에요. 겉으로는 청순한 백련화처럼 보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그 가면을 쓰고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죽였는지 몰라요. 부디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그녀의 손에 죽는 일은 없기를 바라요.”김예훈이 웃었다.“사모님, 감사합니다. 그 따위 계략으로 절대 저를 죽일 수 없을 거예요.”“저의 남편하고 얘기할 건데 언젠가 시간 내시면 저희 별장으로 식사 초대할게요.”박연서의 말에 김예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당주만 시간을 내주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괜찮습니다.”박연서는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김예훈 씨,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저의 병을 어느 정도라도 치료해 줘요. 앞으로 며칠 동안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부탁해요. 그리고 며칠 뒤 저희 아버님 생신 파티에 당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