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학회는 보안이 매우 철저했다.왜냐하면 연회장에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교육계의 거물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큰 사건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주현경의 말을 듣자 완전 무장한 경호원 몇 명이 잽싸게 달려왔다.“두 분 초대장 좀 보여주시죠.”경호원이 김예훈을 향해 물었다.김예훈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술을 닦아내더니 이예운을 흘긋 쳐다보았다.이예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초대장을 꺼내서 건네주었다.이 광경을 본 주현경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이예운에게 진짜로 초대장이 있을 줄이야!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재빨리 말했다.“팀장님, 어디서 훔쳐 온 초대장일 지도 모르니까 자세히 보셔야 해요.”사과하려던 경호팀장이 그녀의 말에 서둘러 초대장을 펼쳐서 확인해보더니 안색이 돌변했다.“이건 성남 고등학교 교장한테 보낸 초대장이잖아요. 저도 아는 분이긴 한데, 대체 무슨 수로 이 초대장을 가지고 나타난 거죠?”“굳이 물어볼 필요 있나요? 이 여우 같은 년이 성남 고등학교 선생이잖아요. 초대장을 훔쳐서 애인이랑 어떻게든 기회를 노려보려고 몰래 들어왔겠죠!”경호팀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현경을 흘긋 쳐다보았다. 물론 고마운 기색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언짢은 듯 눈치를 주었다.몰래 훔친 초대장도 발견하지 못하고 현장에 들여보냈다는 자체만으로도 경비팀으로서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걸 보여줬다.이런 일은 모른 척하거나, 조용히 처리하는 게 상책이다.그런데 이 멍청한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즉, 이 사건을 깔끔하게 해결해야만 그는 경호팀장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이런 생각에 경호팀장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짜증을 애써 억누르며 심호흡을 했다.“저도 두 분이 대체 어디서 초대장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소란을 피우지 말고 저를 그냥 따라오시죠? 나중에 억지로 끌려 나가게 된다면 서로 쪽팔리잖아요?”김예훈은 초대장에 적힌 글씨를 흘긋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잘 보세요, 초대장에는 성남 고등
경호팀장의 호통에 주현경은 깜짝 놀랐고 얼굴도 부루퉁해 있었다.기껏 학회를 위하는 마음에 사기꾼과 도둑년의 정체를 까밝혔더니 경호팀장은 전혀 고마워하는 기색이 없었다.다만 그녀가 어찌 경호팀장의 생각을 헤아리겠는가? 만약 일이 계속 커지면 결국 잘 처리되더라도 경호팀장은 끝장날 운명인데!“두 분, 이쪽으로 오시죠?”경호팀장은 평정심을 되찾고 손짓했다.이예운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런 장소에 참석한 건 처음인지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하지만 김예훈은 오히려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만약 내가 팀장님이라면 여기서 윽박지르는 대신 얼른 가서 이예운 씨의 신분부터 알아볼 겁니다. 어쨌거나 성남 고등학교는 성남시에서 제일 좋은 고등학교로 알려졌는데, 팀장님이 그런 학교의 교장님을 쫓아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지 않겠어요?”이내 경호팀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동안의 식순에 따르면 곧 양정국이 개회사를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지라 얼른 이 상황을 마무리 짓지 못하면 골치 아프게 될 것이다.“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경고합니다. 저도 저지만 스스로 난처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김예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모처럼 참을성 있게 설득했더니 경호팀장은 절대로 순순히 물러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팀장님, 진짜예요! 아니면 주총장님한테 연락해서 물어보세요. 제가 교장님으로 임명받은 건 오늘 오후에 있은 일이거든요.”이예운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설명을 보탰다.경호팀장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이예운이 말하는 주총장이 성남시 교육청 일인자인 주현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고작 경호팀장인 그에게 어찌 그런 분의 연락처가 있겠냐는 말이다.또한, 이를 통해 이예운이 사회초년생으로서 확실히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주현경은 이예운과 김예훈이 자리를 뜨기는커녕 오히려 경호팀장과 말다툼하는 걸 보자 자칫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일이 커질수록 결국에는 이예운이 더 큰 망신을 당하지 않겠는가?이렇게 되면 이예운과
이에 손지강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비록 손씨 가문의 세자이긴 하지만, 차마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날뛸 수 없는지라 주현경을 힘껏 노려보고 나서야 눈 딱 감고 앞으로 나섰다.“여러분, 두 사람이 저랑 아는 사이는 맞아요. 그러나 절대 친구는 아니에요. 저는 쓰레기랑 친구 사귀는 취미는 없거든요.”만약 평소라면 그는 이예운의 편을 들어줬을지 모르지만, 이예운이 또다시 김예훈을 선택한 이상 사내대장부가 어찌 자존심도 없이 한낱 여자의 비위를 맞춰줄 수 있겠냐는 말이다.사람들의 관심이 전부 김예훈한테로 쏠린 탓에 아무도 성남시 일인자 양정국이 연회장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오늘 성남 고등학교에 비서도 동행했던지라 그는 김예훈을 단번에 알아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무슨 오해가 생겼나 봐요. 김예훈 씨라는 분은 절대로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가서 설명할까요?”양정국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손을 젓더니 한참 후에 느릿느릿 말했다.“통제 불능인 상황까지 가면 몰라도 아직은 나설 필요 없어.”비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비록 김예훈의 신분은 알 수 없지만, 문제는 그가 오늘 경기도 일인자의 수행비서마저 모셔왔다는 점이었다.이런 사람이 귀인 또는 거물이 아니면 뭐냐는 말이다!누가 봐도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당연히 도움을 줘야 하지 않겠는가?양정국은 여유만만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고작 비서 따위가 그의 생각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그동안 성남시 일인자의 자리를 지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예를 들면 일류 가문인 손씨 가문은 그를 대신할 다른 사람을 적극 지원했는데, 그 후임자가 바로 왕태호였다.비록 오늘 사건 때문에 왕태호는 당분간 잠잠해질 가능성이 크지만, 손씨 가문은 양정국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다만 그가 설령 성남시 일인자라고 해도 손씨 가문을 확실하게 해결할 자신이 없었다.이제 손씨 가문 세자가 화를 자처하려고 나대는데, 양정국은 당연히 수수방관하기 마련이다.이처럼 하늘에서 뚝
“남들이 손세자가 너무 일찍 성공한 탓에 자만심이 들기 마련이라고 하던데, 오늘 보니 전혀 김세자 못지않은데요?”“아쉽게도 시대를 잘못 타고났군요. 3년만 더 일찍 사회에 나왔더라면 성남시에 김세자란 이름이 들리지도 않았을 텐데.”“그러니까, 다들 김세자를 너무 추켜세웠나 봐요. 사실상 손세자가 더 유망할 수도 있겠네요?”스스로 고상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이제 손지강의 비위를 맞춰주기 급급했다.어쨌거나 손지강 덕분에 체면이 선 만큼 뭐라도 보답해야지 않겠냐는 말이다.물론 김세자와 비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경기도의 일인자라고 하면 단연코 김세자이니까.전설 속 김세자와 비교하는 말을 들은 손지강은 저도 모르게 우쭐하는 표정을 지었다.경기도에서 김세자랑 같이 언급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영광이 따로 없었다.그날 복률이 김세자와 가장 근접한 남자라고 스스로 자부하지 않았는가!“자, 여러분, 저를 너무 비행기 태우시면 안 됩니다. 제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고 있거든요.”손지강은 겸손한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대단한 재주는 없어도 쓰레기 하니만큼은 기가 막히게 치우죠.”이 말을 듣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이내 손지강은 김예훈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꺼져.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손지강, 너무 한 거 아니야? 우리도 초대장이 있다고.”이예운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손지강이 일부러 태클 거는 게 뻔했다.손지강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피식 웃었다.“초대장? 성남 고등학교 이사장은 우리 집안 사람이야. 네가 초대장을 훔친 거지? 감히 우리 집 물건마저 손을 대다니? 이예운, 오늘 똑바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말을 마친 손지강은 이예운 쪽으로 걸어갔다.이예운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그녀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김예훈이 앞으로 나서더니 앞을 가로막았다.순간 어리둥절한 이예운은 넋을 잃고 말았다.감히 자신의 앞길을 막는 김예훈을 보자 손지강이 싸늘하게 말했다.
옆에 있는 주현경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물론 일이 이 지경까지 될 거라고는 그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여우 같은 이예운의 애인이 감히 손지강에게 손을 대다니? 이건 죽음을 자초하는 짓과 다름없었다.이제 큰일이다! 저 남자가 끝장나는 건 물론 이예운도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게 뻔했다.어쨌거나 손지강은 점잖은 겉모습과 달리 매너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당신 누구야? 감히 손세자에게 손을 대다니? 손세자가 대체 어떤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인지 알고 있어?”주현경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지강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김예훈을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어쨌거나 그녀는 일이 더 커지기를 바라는 입장이다.반면, 손지강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주변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그를 조롱하는 듯 하나같이 웃음거리를 기대하는 얼굴이었다.이에 이성을 완전히 잃은 손지강은 김예훈을 당장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반면, 경호원들도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김예훈이 감히 손지강에게 손을 댈 줄은 상상도 못 한지라 더욱이 귀싸대기 날릴 거라고는 예상조차 못 했다.이건 단지 손지강에게 손을 댄 걸 넘어서 일류 가문인 손씨 가문의 체면을 짓밟은 것과 마찬가지였다.곧이어 경호원들이 김예훈을 제압하려고 우르르 몰려드는 순간 위엄이 넘치는 누군가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성남시 일인자 양정국이 드디어 뒤늦게 모습을 보였다.그의 등장 타이밍은 기가 막혔다. 손지강이 김예훈의 심기를 건드리고 나서 손씨 가문과 김예훈의 모순도 극대화됨으로 서로 화해한다고 해도 무용지물인 상태였다.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 시점에 나서서 중재하면 나중에 양측 모두가 그에게 신세를 지게 되지 않겠는가!“어르신!”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사람들은 잇달아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성남시 일인자야말로 현장에 있는 손님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자랑했다.여기저기서 인사가 오가는 가운데 양정국이 경호팀장에게 다가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상황인가?
“어르신, 진짜 초대장이든 신분이 얼마나 대단하던 감히 나한테 손을 댔다는 자체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이때, 손지강이 서늘한 얼굴로 입을 뗐다.양정국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지강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손세자, 아마 눈앞에 있는 분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럴 텐데, 나조차 건드리기 힘든 귀인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으니 먼저 태클 건 쪽이 맞아도 싸지 않겠어요? 지금 당장 무릎 꿇고 김예훈 씨한테 사과해요. 아니면 어디 한 번 두고 봅시다!”말을 마친 양정국은 정중한 표정으로 김예훈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했다.양정국마저 공손하게 대하는 젊은이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양정국 씨! 그게 무슨 뜻이죠? 설마 지금 성남시 일인자라고 감히 손씨 가문의 앞에서 위세를 부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 똑똑히 들어요. 손씨 가문 말 한마디면 당신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다고요.”손지강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까지 그에게 무릎 꿇으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전성기 시절의 김병욱마저 동년배로서 서로 왕래만 했을 뿐이었다.무릎을 꿇으라는 양정국의 한 마디에 손지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손세자가 거절한 이상 손장건 회장님한테 연락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나중에 집안 어르신도 손세자처럼 당당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양정국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또한 그가 계획한 일이기도 했다.곧이어 그는 휴대폰을 꺼내 손장건의 번호를 눌렀다.“손장건 씨, 그쪽 손자가 우리 학회에서 말썽을 피우는데 직접 와서 해결해줄래요?”양정국이 무심하게 말했다.휴대폰 너머로 손장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손자 녀석이 어찌 그런 고상한 자리에서 소란을 피울 수 있겠어요? 어르신의 눈에 띄었으니 저 대신 좀 혼내주세요. 설마 어르신마저 안중에 없겠어요?”“회장님, 아직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모르는 것 같은데 직접 오시는 게 어떤
학회 현장.양정국은 전화를 끊고 무심한 눈빛으로 손지강을 바라보았다.“회장님이 금방 오신대요. 그때 가서도 지금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으면 좋겠지만.”손지강이 냉소를 지었다.손씨 가문은 고작 성남시 일류 가문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고난을 함께 나누는 다른 3대 일류 가문이 있는데, 뭐가 두렵겠냐는 말이다.이따가 할아버지가 오면 그는 김예훈한테 무릎 꿇고 꺼지게 하는 건 물론 일인자 자리에서 양정국도 끌어내릴 예정이다.반면,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고작 이런 일 때문에 손씨 가문의 회장인 손장건이 친히 찾아오다니?보아하니 결코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닌 듯싶었다.양정국은 그제야 김예훈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김예훈 씨,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조금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김예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만약 진짜 늦었다면 당연히 상관없지만, 일찍 도착했으면서 일부러 수수방관하다가 기회를 봐서 나타나는 게 더욱 괘씸하지 않겠어요? 물론 어르신은 그런 분이 아니겠죠.”비록 김예훈은 웃고 있었지만 얼굴에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이 말을 듣자 제아무리 성남시 일인자라고 해도 양정국은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그는 마치 윗사람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이내 당황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억지로 미소를 짜냈다.“정말 늦게 왔으니 오해하지 마세요. 김예훈 씨가 연루된 일인데, 당연히 중요시하지 않겠어요?”김예훈은 피식 웃었다.양정국이 손지강에게 무릎 꿇으라고 하는 순간 그는 이미 상대방의 의도를 눈치챘다.아마도 손씨 가문이랑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라서 자신을 핑계로 손씨 가문을 상대하려는 듯싶은데, 물론 생각이나 수단 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머리는 잘 썼네요.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는데 다 이유가 있네요. 다만 날 도구로 삼다니, 그 결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어요?”김예훈은 손을 뻗어 양정국의 어깨를 두드렸다.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
“회장님! 저 자식이 절 때리고 무릎까지 꿇고 사과하라고 했어요. 게다가 양정국도 저 자식의 편을 들던데요? 이건 결국 저희한테 도전장을 내미는 거잖아요. 둘 다 죽여버려요! 이 세상에 온 걸 후회하게 해주세요.”손장건이 걸어 들어오자 손지강이 급히 달려가 큰소리로 외쳤다.그는 손장건이 제일 아끼는 손자였다. 아니면 손씨 가문의 세자가 되지 않았을 테니까.예전 같았으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장건이 대신 화풀이해줬을 건데 이번은 아니었다.손장건은 태연자약한 김예훈을 흘긋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손지강의 뺨을 때리면서 호통쳤다.“이 망할 놈아! 내가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했어? 안 했어? 허구한 날 돌아다니며 말썽을 피우다니! 아주 우리 집안의 씨를 말려 죽일 작정이야?”손지강은 손장건한테서 뺨을 얻어맞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물론 손지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모두가 알다시피 손씨 가문은 부동산과 교육업에 종사하는데, 두 업종 모두 폭리를 취하는 사업이다.따라서 손씨 가문은 성남시 일류 가문 중 가장 많은 유동자산을 보유하고 있다.이는 또한 손씨 가문 사람들이 항상 거만하게 행동하는 뒷받침이 되기도 했다.특히 손제자라고 알려진 손지강은 세자라는 신분을 내세워 성남시에서 남녀불문하고 막 대했다.게다가 손장건은 손지강을 끔찍하게 아꼈다. 손지강이야말로 손씨 가문의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뭐든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다.그동안 손지강을 건드리는 사람은 손장건의 손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결국 손지강은 점점 더 오만방자해졌다.그런데 이처럼 고상한 자리에서 손지강의 뺨을 때릴 줄이야!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손장건은 김예훈의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김예훈을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김예훈 씨,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을 포함해서 이미 다 전해 들었어요. 이 자리에서 손씨 가문을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이내 현장은 발칵 뒤집혔다.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