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현장.양정국은 전화를 끊고 무심한 눈빛으로 손지강을 바라보았다.“회장님이 금방 오신대요. 그때 가서도 지금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으면 좋겠지만.”손지강이 냉소를 지었다.손씨 가문은 고작 성남시 일류 가문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고난을 함께 나누는 다른 3대 일류 가문이 있는데, 뭐가 두렵겠냐는 말이다.이따가 할아버지가 오면 그는 김예훈한테 무릎 꿇고 꺼지게 하는 건 물론 일인자 자리에서 양정국도 끌어내릴 예정이다.반면,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고작 이런 일 때문에 손씨 가문의 회장인 손장건이 친히 찾아오다니?보아하니 결코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닌 듯싶었다.양정국은 그제야 김예훈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김예훈 씨,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조금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김예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만약 진짜 늦었다면 당연히 상관없지만, 일찍 도착했으면서 일부러 수수방관하다가 기회를 봐서 나타나는 게 더욱 괘씸하지 않겠어요? 물론 어르신은 그런 분이 아니겠죠.”비록 김예훈은 웃고 있었지만 얼굴에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이 말을 듣자 제아무리 성남시 일인자라고 해도 양정국은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그는 마치 윗사람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이내 당황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억지로 미소를 짜냈다.“정말 늦게 왔으니 오해하지 마세요. 김예훈 씨가 연루된 일인데, 당연히 중요시하지 않겠어요?”김예훈은 피식 웃었다.양정국이 손지강에게 무릎 꿇으라고 하는 순간 그는 이미 상대방의 의도를 눈치챘다.아마도 손씨 가문이랑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라서 자신을 핑계로 손씨 가문을 상대하려는 듯싶은데, 물론 생각이나 수단 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머리는 잘 썼네요.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는데 다 이유가 있네요. 다만 날 도구로 삼다니, 그 결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어요?”김예훈은 손을 뻗어 양정국의 어깨를 두드렸다.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
“회장님! 저 자식이 절 때리고 무릎까지 꿇고 사과하라고 했어요. 게다가 양정국도 저 자식의 편을 들던데요? 이건 결국 저희한테 도전장을 내미는 거잖아요. 둘 다 죽여버려요! 이 세상에 온 걸 후회하게 해주세요.”손장건이 걸어 들어오자 손지강이 급히 달려가 큰소리로 외쳤다.그는 손장건이 제일 아끼는 손자였다. 아니면 손씨 가문의 세자가 되지 않았을 테니까.예전 같았으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장건이 대신 화풀이해줬을 건데 이번은 아니었다.손장건은 태연자약한 김예훈을 흘긋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손지강의 뺨을 때리면서 호통쳤다.“이 망할 놈아! 내가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했어? 안 했어? 허구한 날 돌아다니며 말썽을 피우다니! 아주 우리 집안의 씨를 말려 죽일 작정이야?”손지강은 손장건한테서 뺨을 얻어맞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물론 손지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모두가 알다시피 손씨 가문은 부동산과 교육업에 종사하는데, 두 업종 모두 폭리를 취하는 사업이다.따라서 손씨 가문은 성남시 일류 가문 중 가장 많은 유동자산을 보유하고 있다.이는 또한 손씨 가문 사람들이 항상 거만하게 행동하는 뒷받침이 되기도 했다.특히 손제자라고 알려진 손지강은 세자라는 신분을 내세워 성남시에서 남녀불문하고 막 대했다.게다가 손장건은 손지강을 끔찍하게 아꼈다. 손지강이야말로 손씨 가문의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뭐든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다.그동안 손지강을 건드리는 사람은 손장건의 손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결국 손지강은 점점 더 오만방자해졌다.그런데 이처럼 고상한 자리에서 손지강의 뺨을 때릴 줄이야!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손장건은 김예훈의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김예훈을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김예훈 씨,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을 포함해서 이미 다 전해 들었어요. 이 자리에서 손씨 가문을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이내 현장은 발칵 뒤집혔다.
“손세자라는 자식이 날 몇 번이고 도발하고 성가시게 구는데, 내가 만만해 보입니까?”김예훈은 손장건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손장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이미 김예훈의 정체를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두려움이 밀려오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이내 손장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가 어떤 사람이며, 누가 김예훈 씨의 뒤를 봐주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우리도 당신 배후에 있는 분을 건드리고 싶은 생각이 없기에 오늘 일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다만 김예훈 씨도 제 분수를 알았으면 좋겠어요.”손지강은 옆에서 볼을 감싸 쥐고 물었다.“회장님, 저 쓰레기 같은 놈이 잘나가면 얼마나 잘나간다고 그래요? 고작 데릴사위에 불과한데,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라도 있나요? 대체 무슨 근거로 사과하라는 거예요? 회장님의 체면이 깎이는 건 그렇다 쳐도 손씨 가문마저 망신당할 수는 없어요.”“닥쳐!”손장건이 손지강을 노려보았다. 그는 오늘 일을 최대한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애썼는데, 뭣도 모르고 날뛰는 손자 녀석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이에 손장건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강아, 이리 와서 사과해!”“싫어요. 고작 데릴사위한테 사과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우리 손씨 가문에게 위협이 될 수 없어요!”“짝!”손장건은 다시 손지강의 뺨을 때리며 싸늘하게 말했다.“사과하라면 사과해. 무슨 쓸데없는 말이 그렇게 많아?”손장건은 처음으로 손지강을 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정녕 본인이 무슨 생각인지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현재 성남시의 정세는 며칠 전과 180도 변했다.CY그룹이 급부상하는 와중에 진주 이씨 가문도 심상치 않은 기세를 보였다.이런 상황에서 손씨 가문이 다른 3대 일류 가문과 공수동맹을 맺었다고 해도 고작 사소한 일 때문에 주요 세력 간의 균형을 깨드린다면 큰 난관에 봉착할 게 뻔했다.만약 이런 이유만 아니었다면 손장건의 성격으로 어찌 고작 김세자의 대변인을 두려워하겠는가!“사과하라니 말도 안
“무슨 뜻이죠?”김예훈이 무덤덤하게 물었다.이내 양정국은 나지막이 대답했다.“손지강이 별다른 능력이 없는데도 손씨 가문의 세자가 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유능한 양아버지를 뒀기 때문이죠.”“누군데요?”“경기도 조직의 보스 홍인경.”양정국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홍인경은 경기도 조직에서 말한 대로 하는 인물로서 신분이 꽤 높았다.양정국은 제아무리 성남시 일인자라고 해도 감히 홍인경을 건드릴 엄두는 나지 않았다.김예훈이 피식 웃었다.“그렇다면 손지강이 날 상대하려고 홍인경을 찾아갔단 말인가요?”“그럴 가능성이 커요.”양정국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김예훈 씨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쯤은 저도 알지만, 돈 있는 손씨 가문과 사람을 부리는데 도가 튼 홍인경이 손을 잡게 된다면 절대로 쉽게 대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어쨌거나 매사에 조심하는 게 좋을 듯싶어요.”김예훈은 고개를 돌려 양정국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나랑 손지강이 피 터지게 싸우고 둘 다 망했으면 하는 바람은 아니고?”“그럴 리가요!”양정국은 감히 김예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재빨리 고개를 떨구었다.김예훈이 무덤덤하게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을 봐서 날 이용한 건 그냥 넘어가 줄게요. 물론 지금부터 서로 빚진 게 없는 거예요. 만약 다음에 또 이런 짓을 벌인다면 그 후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양정국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가운데 김예훈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다들 편하게 있어요. 이건 학회잖아요. 각자 볼일 보세요.”양정국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수습에 나섰다.“여러분, 늘 그랬던 것처럼 즐겨요. 방금 일어난 일은 이제 잊어주세요!”사람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김예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다만 양정국이 끝까지 동행한 관계로 감히 다가가지는 못했다.그렇게 30분이 흘러 김예훈은 점점 지루함이 몰려왔다.소위 교육계 고위층 인사라고 자부하는 이들
“설마 이 나이 먹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게?”의욕이 넘치는 김예훈을 보자 정민아는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그녀는 남편만 원한다면 김예훈을 해외로 유학 보내는 것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다만 김예훈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나 아니고 소현이 말이야. 올해 고3이잖아. 곧 대학교도 가야 할 텐데, 성남시에 그렇다 할 학교가 없는 것 같아서. 아마 서울이나 부산 또는 대전에 공부하러 보내야 할 것 같아.”정민아는 실소를 터뜨렸다.“소현은 엄마 아빠가 알아서 걱정할 거야. 넌 고작 형부일 뿐이니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도 돼.”김예훈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렇다고 정민아한테 오늘 학회에서 성남시 교육청 사람들의 진면목을 확인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대전 방문 일정을 며칠 더 당겨야 할 것 같군. 소현이 다닐 만한 대학교도 겸사겸사 찾아보고.”김예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전까지만 해도 대전에 가는 게 그리 시급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최대한 빨리 다녀와야 할 듯싶었다....성남시 교외, 복고풍의 일본식 정원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안팎으로 늘어서 있었다.덩치가 산만 한 사람들은 허리춤에 권총이라도 숨긴 듯 하나같이 불룩 튀어나왔다.이때 정원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 황급히 걸어 들어왔다.경호원들이 일제히 눈살을 찌푸리다가 상대방을 확인하는 순간 비로소 경계를 풀었다.왜냐하면 손씨 가문의 세자이자 그들이 모시는 보스 홍인경의 수양아들이 방문했기 때문이다.“대부님, 아들이 밖에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싸대기까지 여러 대 얻어맞았다고요.”방석에 무릎 꿇고 앉은 홍인경의 허벅지 위에는 일본 장검이 놓여 있었다.눈 감고 명상하던 그는 눈을 번쩍 뜨고 무덤덤하게 물었다.“성남시에서 감히 손씨 가문의 세자인 널 건드리는 사람이 있다고?”“대부님, 그 자식은 꽤 신분이 있는 놈 같아요. 방금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냈는데, 아마도 김세자 대신 일 처리 하는 사람인가 봐요.”손지강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소현이 다닐 대학교를 물색하기 위해 대전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은 김예훈은 곧바로 하은혜에게 대전 업무를 미리 진행해달라고 부탁했다.예를 들면, 대전 지사를 홀로 운영할 수 있는 유능한 현지인을 찾아야 하는 등이 있다.김예훈이 정민아에게 대전에 간다고 말하자 그녀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진짜 소현이 다닐 대학교를 찾으러 대전까지 간다고? 며칠 있을 건데?”“길어 봤자 5일?”김예훈은 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된다면 지사 업무를 이틀 내로 처리하고, 다음 날부터 대전 대학교에 다니면서 현지 조사할 수 있을 것이다.사실 김예훈은 정민아가 동행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탓에 도무지 외출할 시간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정민아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대전에 가는 건 괜찮은데, 이왕 가는 김에 나 대신 일 좀 봐 줄 수 있어?”“뭔데?”김예훈에게 승낙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조차 사치였다.사랑하는 아내의 부탁인데 언제 물불 가릴 틈이 있겠는가!“나랑 제일 친한 육해연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미르 제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대전에 가서 일한대. 여자애가 홀로 타지에서 생활한다고 하니 괜스레 걱정되잖아. 어차피 가는 김에 나 대신 확인 좀 해줄래? 지금 다니는 회사는 괜찮은지, 사는 곳은 어떤지 한 번 알아봐 줘.”정민아가 진지하게 말했다.“알았어, 걱정하지 마.”김예훈도 육해연을 알고 있다. 육씨 가문도 그동안 남해시에 살았는데, 나중에 외국으로 이민 갔다고 했다.육해연과 정민아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육해연이 귀국하게 된 계기도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른다.육해연은 능력이 뛰어난 여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미르 제국에서 무려 케임브루대학과 옥스코대학을 다니면서 전 세계 최고 학부인 두 대학교에서 모두 장학금을 탔다.게다가 졸업하고 나서는 리카 제국과 미르 제국의 대형 투자 회사에서 입사를 제안하는 오퍼를 꽤 많이 보냈다고 했다.육해연을 언급하자 정민아는 눈살을 살짝 찌푸
진주국제공항.김병욱과 김청미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세계 일류인 대도시 중에서도 뒤처지지 않는 이 아름다운 도시에 발을 내디뎠다.VIP 게이트에 도착하자 김병욱이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대전 쪽에 이미 연락 해뒀으니 가서 가만히 앉아서 지켜만 보면 돼.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김청미가 호탕하게 웃었다.“두려워?”김병욱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살기 어린 빛이 스쳐 지나갔다.그의 뒷모습을 본 김청미는 고개를 흔들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말이야. 이런 수단이 정말 먹힐 거라고 생각해? 만약 실패라도 한다면 큰 어르신께서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으실 것 같은데?”...대전공항. 김청미가 비행기에 오르는 동안 김예훈은 이미 기다리다 지쳐 지루하기까지 하였다.30분이 지나서야 육해연이 모습을 드러냈다.얼추 168cm 돼 보이는 늘씬한 키와 글래머스한 몸매, 그리고 상반되는 시원한 이목구비와 얼굴형은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그녀의 외모와 이미지는 아름답다는 말보다는 여자 수장으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할 수 있으며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신비로운 분위기를 소유하였다.그녀가 나타나자 많은 사람은 연예인인 줄 알고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였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육해연은 그들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그 시각 육해연도 김예훈을 알아보고는 이내 자신의 캐리어를 그에게 넘겨주었다.“이따가 절 이곳으로 데려다주세요. 급한 일이 있어서요.”김예훈에게 한 장의 주소가 적힌 종잇장을 내밀더니 그녀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김예훈은 지금,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이런 무례한 행동을 보고 카리스마가 있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애교로 봐주어야 하는지 고민 중이었다.하지만 그는 정민아의 부탁도 있었기에 아무 말도 없이 육해연의 캐리어를 들고는 따라나섰다.지하 주차장에 들어서자 육해연은 의아한 듯 김예훈을 바라보았다.김예훈이 대전에서 잠시 운전하는 차는 벤틀리였다
육해연은 괜히 유학파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속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그의 말에 땅속이라도 숨어들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김예훈은 이미 그런 시선에는 익숙한지 오랜 터라 아무렇지도 않았다.김예훈은 백미러로 육해연을 쳐다보았다.“여자 등골 빼먹는 게 제 취미라면요?”“그럼 내 손으로 당신 처리할 거예요.”육해연의 살기 어린 음성이었다.김예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혹시 해외에서 공부한 전공이 살인과예요? 절 처리하겠다고요? 엄연한 법치국가에서?”“말 돌리지 말아요. 이제 돈 가져다주면 그거 가지고 민아 곁에서 떠나요. 걱정하지 말아요, 아마 당신이 평생 놀고먹어도 될 액수니까. 당신이 민아 곁에서 떠나 주기만 한다면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말하는 육해연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고 냉정하였다.김예훈은 어이가 없었다.“육해연 씨, 그 전제가 왜 우리 이혼인겁니까? 좀 더 평화롭고 나이스한 방법은 없는 겁니까? 그리고 중요한 건 이제 장인어른 장모님도 신경 쓰지 않아요.”“당신...”김예훈에게 정곡을 찔린 육해연의 얼굴은 그대로 찡그러졌다.“좋아요. 그렇게 이혼이 하기 싫으면 당신도 남자니까 남자답게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사업 하나 정도는 해야 할 거예요. 아니면 제가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김에훈이 웃었다.“민아가 지금 쟁취한 모든 기회 제가 준 겁니다. 전 뒤에서 항상 그녀를 지지하고 있고요. 이걸로 부족한가요?”김예훈의 말을 들은 육해연은 이 뻔뻔하고 당황한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김예훈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 살기가 어려있었다.“김예훈 씨, 설마 CY그룹이 당신 거고 당신이 그 김세자라고 말할 건 아니죠?”김예훈은 잠시 흠칫하였다.“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이건 극비라서 그룹 내에서도 모르는 일인데.”그의 말에 육해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김예훈 씨, 적당히 좀 해요. 이젠 꿈까지 꾸는 거예요? 설마 꿈이 공상가인 거면 빨리 병원 가서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