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쇼핑하는데 타고난 것 같았다.이날 밤, 정민아는 이 옷들에 정신이 팔려 잠도 파우더 룸에서 잤다.김예훈은 스스로 제 발등을 찍은 느낌이 들었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정민아의 주의를 돌릴 수 있게 되었다.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정민아는 오히려 김예훈이 어떻게 이 일들을 해낼 수 있었는지에 관해 묻지 않았다.방금 충전을 마치고 핸드폰을 켜자 다급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정민아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였다. 김예훈은 전화를 받고 욕설을 퍼부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맞은편 사람들은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다.김예훈과 정민아는 하룻밤 내내 옷을 입어 보았다.한편, 정지용 세 사람은 모두 정민아의 집 아래층에서 꼼짝도 안 하고 밤새 전화를 걸었다.지금 이 순간, 전화가 연결되자 세 사람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정민택은 정지용의 말투가 거슬릴까 봐 냉큼 핸드폰을 빼앗았다. “김예훈, 난 큰아버지 정민택이야!”“네?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잠도 안 잡니까? 제정신인가요?”김예훈의 말을 듣고 전화 맞은편의 정민택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그러나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김예훈, 민아는? 민아 바꿔줘, 민아한테 긴히 할 말이 있어!”김예훈은 잠이 덜 깬 정민아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민아는 아직 자고 있습니다. 통화하기 어려운 상태이니 저한테 말씀하세요.”정민택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웃으면서 말했다. “김예훈, 전에 민아를 해고하고 너희들을 정씨 일가에서 내쫓은 일은 실수였어!”“아버님께서 내리신 결정이야. 민아한테 다시 재무 매니저를 맡기기로 하셨어!”“이건 좋은 소식이야, 지금 당장 민아를 깨워서 같이 별장으로 와. 아버님의 뜻이니까.”정민택이 보기에는 현재 수입이 없는 정민아 가족한테는 다시 제자리로 복귀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근데 뜻밖에도 김예훈은 콧방귀를 끼며 말할 줄 몰랐다. “재무 매니저요? 위에 부대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재
김예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전 일에 관심없습니다. 아내가 절 먹여살리는 게 좋거든요.”김예훈이 태연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정민택 등 세 사람은 눈을 흘겼다. 여자 덕 보고 사는 주제에 이렇게 당당할 줄은 몰랐다. 참 뻔뻔스러운 인간이다.“그럼, 말해봐, 도대체 원하는 게 뭔지?”정민택은 여전히 화를 참고 있었다. 자신의 말투가 거슬려 김예훈이 또다시 전화를 끊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조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민아를 해고시킨 사람이 직접 와서 민아를 데려가는 겁니다!”“좋아, 내가 민아를 해고했어, 내가 직접 데리러 갈게!” 정민택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큰아버지,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큰아버지가 정씨 일가에서 그런 권력이 있다면 지금 저한테 전화를 걸지도 않았겠죠?”“어르신께서 직접 오시라고 전하세요. 그렇지 않은 한 저희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뚜뚜뚜...”김예훈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정민택은 벌써 아침 8시가 된 것을 확인하고 지체할 겨를이 없이 곧장 집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정동철 역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지금 이 순간, 그가 정민택의 말을 듣고 숨을 헐떡이며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뭐라고? 그 데릴사위 놈이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언제든지 가문에서 쫓겨날 놈이 감히 그런 조건을 제시하다니!”“죽고 싶어 환장했나!”이 순간, 정동철은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손을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 이건 그의 존엄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가업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그는 이미 마음속에 정해진 답이 있었다. …한편, 파우더 룸. 정민아가 잠에서 깨어나 이상한 눈빛으로 김예훈을 쳐다보고 있다. 성남시에 온 후로부터 김예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그가 말한 일은 다 현실이 되었다. 정씨 일가에서 정말 날 데리러 온다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예전에 남해시에 있을 때, 가끔은 김예훈이 날뛴다고 생각했지만 절대
정씨 일가의 사람들이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걸 정민아는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전에 남해시에 있을 때는, 정동철이 직접 나서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늘 높은 신분과 권위를 유지해왔다.근데 이번에 그가 직접 이곳으로 온다고?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노인네 이익과 관계되는 일이야, 어떻게 안 오겠어?” 김예훈은 웃었다.정민아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입을 열었다. “예훈 씨, 솔직히 말해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아무것도 안 했어.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김예훈이 답했다.“그날 김세자의 환영 파티에서 하 비서가 널 알아봤잖아?”“널 CY그룹 창립식에 초청도 했어.”“네가 정씨 일가를 대표해 가지 않으면 가문에서 누가 가겠어?”“CY그룹은 김세자가 설립한 회사이니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지?”“그래서 말인데. 저들은 아마 이미 CY그룹에게 거절당했을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너한테 부탁하러 온 거고.”김예훈이 막힘없이 조리있게 말하는 것을 본 정민아가 참지 못하고 빙그레 웃었다. “똑똑하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당신이 김세자인 줄 알겠어!”김예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김세자라고 말했는데 네가 안 믿잖아!”김예훈은 모처럼 진지하게 진실을 말했다.하지만 정민아는 그냥 피식 웃고 넘어갔다.“알았어,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말해도 돼. 하지만 밖에서는 이런 농담 절대 하지 마!”“만약 이 말이 김세자의 귀에 전해진다면 일이 복잡해지니까.”김예훈은 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대로 말해도 믿는 사람이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약 30분 후, 남해시의 자동차 번호판을 달고 있는 벤츠 한대가 현대몰 문 앞에 멈춰 섰다.정동철은 뒷좌석에서 내려와 미간을 찌푸리며 눈앞의 럭셔리한 쇼핑몰을 쳐다보았다.김예훈은 창가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르신이 직접 오셨어. 우리도 내려가자.” 정민아는 비록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지만 속으로
오전 10시 쯤.김예훈과 정민아 두 사람은 CY그룹이 있는 빌딩으로 찾아왔다.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친절하게 그들을 어제 정지용이 들렀던 사무실로 안내했다.사무실의 담당자는 정민아를 보자마자 바로 일어섰다.그가 공손하게 걸어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민아 씨 맞으시죠? 앉으세요. 만나 뵙게되서 영광입니다!”“커피 아니면 차로 하시겠습니까?”정민아는 어리둥절해졌다.눈앞의 이 사람은 양복 차림에 깔끔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손에는 롤렉스의 골드 시계를 차고 있었고 아무리 봐도 임원급 인물인 것 같았다.방금 차에서, 정동철은 이 고위층 임원에 대해 무서운 사람이라고 형용하면서 정민아한테 거듭 조심하라고 일러줬다.근데 뜻밖에도 상대방이 이렇게 친절하게 자신을 대하자 정민아는 조금 당황스러웠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오히려 뒤에 서 있던 김예훈은 대범하게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물 한 잔 주세요. 아내한테는 커피 한 잔 부탁해요.”“네. 두 분 앉아계세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이 담당자는 더할 나위없이 공손했다.그가 두 사람을 소파로 안내한 뒤 직접 커피와 물을 준비해와서 두 사람한테 전해줬다.어제의 태도와는 그야말로 천지차이였다.만약 정지용이 이곳에 있었더라면 분명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을 것이다.지금 이 순간, 이 담당자는 감히 내색하지 못하고 겸손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엉덩이만 의자에 살짝 걸칠 뿐 허리를 곧게 펴고 있었고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지금 이 순간, 그는 감히 김예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김예훈의 다리만 쳐다보고 있다.이분이 바로 전설 속의 그 사람인가!정민아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전 정씨 일가의 정민아라고 합니다. 오늘은 정씨 일가를 대표해 저희 회사와 관련된 일을 상의하러 왔습니다. 시간이 되시는지요?”담당자는 마른 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저희 쪽에서도 체면을 세
정민아는 지금 멍해졌다. 잠시 후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부본부장님, 그 말씀은 저희 정씨 일가에서 파산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다는 건가요?”“네, 필요 없습니다. 또한 그룹 쪽에서 정씨 일가 회사에 대해 추가로 투자할 생각입니다!”“하지만, 그 일에 관한 계약서는 3일 후에 다시 체결해야 하니 정민아 씨가 다시 한번 오셨으면 합니다!”이 담당자는 엄청 공손한 태도를 보였고 다른 임원들도 모두 하나같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고 정민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김예훈도 일어서서 무심하게 말했다. “수고했습니다.”그 담당자는 흠칫하더니 이내 밝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닙니다! 응당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그 담당자는 너무 감격하여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 이분한테 수고했다는 말을 듣다니? 얼마나 큰 영광인가?...CY그룹을 떠날 때까지도 정민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동철의 일행들이 긴장한 얼굴로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정민아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정동철은 제일 먼저 앞으로 걸어가 입을 열었다. “민아야, 일은 어떻게 됐어?”정민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일은 잘 해결됐어요!”“CY그룹 쪽에서 우리 회사의 실적이 나쁘지 않다면서 파산 절차를 밟는 것을 잠시 보류하겠다고 했어요.”“또 그룹 쪽에서 저희한테 추가로 투자할 계획이라고 해요. 업무도 저희한테 맡겨주겠다고 했어요.”“하지만 3일 뒤에 계약서를 쓰러 와야 해요...”자신이 정씨 일가의 회사를 경영하면 나날이 발전할 것이라는 그 담당자의 말을 정민아는 전하지 않았다.지금 이 말을 꺼낸다면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는가?정민아는 여전히 마음이 착하고 효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는 차마 이 말을 할 수가 없었다.“그래! 좋아!”“민아야! 넌 이 할아버지의
정동철은 차가운 얼굴로 정지용을 쳐다보다가 잠시 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말한 것을 내가 어찌 모를 수 있겠니?”“난 진작에 이 점에 대해 생각해봤어!”“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 일은 정민아의 체면을 앞세워 해결한 일이야!”“만약 계약서를 쓸 때 우리 쪽에서 다른 사람을 보낸다면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어!”“지용아, 네 생각을 알고 있다.”“하지만 이번 일은 반드시 신중해야 해!”“이건 우리 정씨 일가의 생사존망이 달린 문제야!”정지용은 입을 벌린 채 더는 뭐라고 대꾸하지 못했다.할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이번 일은 중대한 사안이라 자신이 제멋대로 투정을 부릴 여지가 없었다.하지만, 정말 이대로 정민아가 실권을 잡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 것일까?만약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정씨 일가에서 자신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설마 성남시에 와서도 정민아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걸까?지금 이 순간, 정지용은 험상궂은 얼굴을 한 채 머리를 숙이고 있다.정동철은 그를 한번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정지용은 그가 중시하는 사람이고 앞으로 정씨 일가의 가업을 이어받을 후계자이기도 하다.그러나 문제는, 이 상황에서 마냥 그를 감싸고 돌 수는 없었다.이 일은 정씨 일가의 생사존망이 달린 일이다!...정동철이 자리를 뜬 후 정지용과 정가을 두 사람만 남았다.정지용이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바닥에 던졌다.“천한 년! 도대체 김세자와 어떤 사이인 거야? 설마 숨겨둔 애인이라도 되는 건가?” 정지용은 이를 악물었다.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앞으로 정씨 일가에서 무슨 수로 정민아와 경쟁할 수 있겠는가?이때 정가을이 피식 웃었다.웃음소리를 듣고 정지용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정가을, 왜 웃어? 이게 지금 웃겨?”“정민아가 정말 김세자의 숨겨둔 여자라면! 그럼 넌 복씨 가문에 시집가도 정민아 상대가 아니야!”“늘 정민아를 이기고 싶어 했잖아?”“복씨 가문에 시집가면 정민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성남시, 로열 가든 클럽.이곳은 성남에서 가장 호화로운 프라이빗 클럽 중의 하나이다.평소에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부자들이다.이런 곳은 재벌 2세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이고 룸 하나에서 하룻밤 소비가 몇 억원에 달하는 곳이기도 하다.이런 곳은 부자들이 희희낙락거리며 노는 곳이지만 일반인들한테는 평생 가까이할 수 없는 곳이었다.한편, 이곳의 은밀한 룸 안.복현이 가운데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제가 마련한 자리입니다, 다들 술도 안 먹고 아가씨도 안 부르고, 왜? 날 무시하는 건가요?”그의 맞은편에는 지금 적어도 십여 명의 성남시 재벌 2세들이 앉아있었다.하지만 지금 이 재벌 2세들은 하나같이 풀이 죽어있다.예전에는 이런 곳에서 여자들과 희희낙락거리며 놀았었다.하지만 오늘은 하나같이 풀이 죽어서 앞에 놓여있는 프랑스 와인조차도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복현의 말을 그들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중 한 재벌 2세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복현 도련님, 저희를 조롱하지 마세요!”“저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겁니까?”“저희 가문의 기업이 모두 CY그룹에 의해 인수합병되었습니다! 게다가 채무를 감당하지 못해 지금 파산 절차를 밟고 자산 통합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앞으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복현 도련님께서 저희를 거두어주시겠습니까?”이 말을 꺼낸 재벌 2세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과거에 얼마나 날뛰던 인간들이었는가?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성남시의 최고 가문인 김씨 가문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그러나 어제서야 이들은 알게 되었다. 진정한 최고의 가문이 어떤 건지? 경기도의 최고 가문이 어떤 것인지?김씨 가문은 손을 쓰지도 않았다.소문에 의하면 김세자의 말 한마디에 성남시 전체가 흔들린 것이다.얼마나 많은 가문과 기업이 인수합병되었는지 모른다.김세자는 이번 자산 통합을 통해 CY그룹의 세력을 더 크게 확장할 것으로 보인다.
“김세자 무슨 룰을 어겼다는 겁니까?”누군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김세자와 관련있는 일이라 다들 함부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수가 없었다.혼자만의 힘으로 수십조에 달하는 왕국을 만든 장본인, 3년 전 이미 경기도의 최고 위치에 오른 그 남자는 이들한테 신 같은 존재였다.비록 지금 그 남자 때문에 파산할 수밖에 없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 하나 그 남자한테 원한을 표할 수가 없었다.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복현은 망설이고 있는 재벌 2세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경멸했다.이들은 평소에 놀고먹기만 하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 일상인 인간들이었다.하지만 막상 일이 닥쳤을 때는 찌질한 모습밖에 찾아볼 수가 없었다.마음속으로 경멸했지만 복현은 티를 내지 않고 계속해서 태연하게 말했다. “얼마 전에, 남해시에서 온 정씨 일가라고 들어봤죠?”이 말을 꺼내자 누군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자산이 몇천억밖에 안 되는 작은 집안이 감히 우리 성남시에 발을 붙일 생각을 하다니, 농담도 아니고?”“이런 가문은 반년도 지나지 않아 성남시에 뼈도 못 추스르게 되겠죠?”“듣자 하니, 그 가문의 사람이 김세자의 환영 파티에 참석한 것도 모자라 하 비서한테 인정까지 받았다고 합니다!”“듣기로는 정씨 일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경영권이 CY그룹에 있다고 하던데. 그들의 자산이면 아마 지금쯤 우리와 똑같이 파산 절차를 밟고 있을 거예요.”사람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복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정씨 일가는 파산 절차를 밟지 않았습니다. 듣자하니 CY그룹 쪽의 신임을 받아 추가로 투자를 받을 계획이라고 하더군요!”복현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 말을 듣고 있던 재벌 2세들은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누군가 충격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정씨 일가 따위가! 듣자 하니 별장도 임대했다고 하던데!”“우리 가문들은 다 파산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요?”“이건 불공평합니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