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요?”하은혜는 멈칫하고 말았다. 방호철이 좋은 마음에 물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람인지라 호기심이 앞섰다.방호철은 아무렇지 않게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말했다.“후지와라 미유 씨는 어차피 일본인이잖아요. 부산에서 죽은 사실이 심각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일본 쪽에 많이 달렸죠. 제가 일본과 관계가 좋은 거 아시잖아요. 제 한마디면 일본에서도 이 일을 더는 묻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없었던 일로 해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저 부산 경찰서에도 아는 사람이 있어서 저한테 반 시간만 주시면 모든 진술을 전부 다 바꿔드릴 수도 있어요! 심지어 확실한 증거도, 언론도 반 시간 내에 없애버릴 수 있다고요. 김예훈이 한 시간 내로 멀쩡하게 걸어 나와 다시 예전의 호화 생활을 누리게 할 수 있어요. 어때요?”방호철이 아무렇지 않게 한 말에 이미연과 조효임 등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얼굴에는 믿기 어려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특히 김예훈과 방호철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알고있는 진윤하와 최산하 등도 방호철이 이 기회를 빌어 김예훈을 짓밟아 놓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말이다.그런데 김예훈을 도와줄 생각을 하다니.하은혜는 한참 동안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더니 말했다.“대가는 무엇인데요? 거래하려면 방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셔야 할 거 아니에요.”이에 방호철이 피식 웃었다.“여기 오기 전에 사쿠라 씨가 김예훈의 손에서 부산 버뮤다 H 번지를 뺏어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은혜 씨를 보자마자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럽시다. 은혜 씨가 저한테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거 어때요? 오늘 저녁 저랑 밥 한 끼 함께해 주면 김예훈을 도와줄게요. 어때요?”방호철은 진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하은혜를 위해서 하는 말인 것처럼 말이다.이에 조인국이 본능적으로 말했다.“은혜 씨, 대답하세요. 방 도련님은 충분히 해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훈이가 평생 감옥에 있기만은 두고 볼
분위기가 심각해진 부산 제1 경찰서 내부는 그야말로 혼비백산이었다.심문실, 김예훈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어 쪽잠을 자고 있었다.하루가 지나도 경찰들은 김예훈을 이곳에 가두어두고 주기적으로 물과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 외에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하지만 김예훈은 그래도 대충 경찰들의 관심이 온통 인증과 물증에 있다는 것과 후지와라 미유를 영구 제명시키려고 한 증거까지 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일부러 그러는지는 몰라도 용의자이자 당사자인 김예훈을 심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의도했던 심리 전술인지,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아무튼 심문실에 잡혀 온 24시간 동안 아무도 김예훈을 신경 쓰지 않았다.겪어보지 못한 것이 없는 김예훈은 이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그저 편안히 한잠 자고 일어나 전체 사건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그러다 결국 후지와라 미유의 죽음은 며칠 전부터 계획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조효임 일가를 통해 후지와라 미유와 마주치게 한 후 이른바 협박한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상황을 봐서 필요하다면 후지와라 미유는 희생자로 변해야 했다.후지와라 미유의 희생으로 모든 증거를 김예훈에게 돌려 용의자이자 살인자로 만드는 것이다.아마도 이 사건을 클라이맥스로 몰고 갈 더욱 정확한 증거가 남아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방호철이 김예훈 때문에 자극을 받아 완벽했던 계획에 차질이 발생한 것이다.최종목적에 달하기엔 애매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김예훈은 눈을 감고 전체 사건을 되돌아보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방심한 틈을 타 함정을 파놓은 것도 모자라 김예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리 예상해서 계획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심지어 분명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도 어쩔 수 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라고 볼 수 있었다.그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후지와라 미유가 증거를 남기려고 죽기 전날 김예훈의 방에 가서 일부러 샤워하면서 머리카락을 남겨놓은 것이다.
방호철이라는 사람이 절대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최소한 김예훈과 맞설 수 있는 자격이 충분했기 때문이다.끼익!김예훈이 전체 사건을 되짚어 보고 있을 때, 심문실 문이 열리면서 멀끔하게 경찰 제복을 입은 3명의 경찰이 걸어들어왔다.김예훈을 직접 체포했던 경찰이 의미심장한 태도로 물었다.“김예훈 씨, 진술할 준비 되셨나요?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요? 정말 인간쓰레기나 다름없네요. 아, 맞다. 자기소개를 해보자면 저는 대한민국 격투기왕 변우진의 사촌 형이자 부산 제1 경찰서의 소대장 변장우라고 합니다. 제 사촌 동생이 섭섭지 않게 잘 챙겨달라고 부탁했는데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제 사촌 동생도 당신을 정말 싫어하는데 하은혜 씨 때문에 저한테 어쩔 수 없이 전화해서 부탁한 거예요. 김예훈 씨, 어떻게 연적의 도움을 받을 지경까지 온 거예요? 정말 실패한 인생이나 다름없네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면 이제는 사실대로 말해주세요!”변장우는 김예훈을 가소롭게 내리깔아 보았다.“했던 짓들 모조리 말하라고요! 사실대로 말하면 제 사촌 동생을 봐서라도 재판장님 앞에서 감형을 선처해 볼게요.”변장우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두 명의 경찰도 김예훈을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어떻게 살았으면 연적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창피하게!’김예훈은 다리를 꼬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변장우를 힐끔 쳐다보았다.“변우진 씨의 사촌 형 되신다고요? 변 도련님께서 저를 이렇게 끔찍이 생각할 줄 몰랐네요. 그런데 도와주라고 부탁한 거 확실해요? 제가 평생 감옥에서 나가지 못하게 짓밟아달라고 한 거 아니고요?”김예훈이 아무렇지 않게 한 말에 변장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김예훈의 말대로 돌보기는커녕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짓밟아달라고 했으니 말이다.“이봐요!”이때 다른 한 경찰이 잠깐 멈칫하더니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면서 말했다.“김예훈 씨, 정말 이곳이 무슨 안방인 줄 아세요? 소대
“왜요? 안 쏘세요?”김예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다리를 흔들거렸다.경찰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결국 의자에 퍽 주저앉고 말았다.다른 한 경찰은 담배 한 대를 꺼내 한 모금 빨고는 김예훈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었다.“김예훈이라고? 이 사건은 이미 조사가 끝났어. 조씨 가문 파티에서 피해자한테 영구 제명시키겠다면서 협박했다면서? 최소 20명 이상의 증인이 있는데 무슨 수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그래!”김예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당신들 소대장님이 나를 보살펴 주겠다잖아. 그런데 보살펴 주기나 했어? 아무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이 증거가 될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사건이 처리하기 쉽겠네?”“죄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네?”경찰이 냉랭하게 말하자 김예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난 살인도 하지 않았고, 사람을 해치지도 않았고, 누구한테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왜 인정해야 하는 건데?”“누구한테 죄짓지 않았다고? 나중에 조상님들 앞에서 말하기 부끄럽지 않겠어?”경찰이 음흉한 표정으로 김예훈의 앞에 조사록을 던졌다.“증인들이 하는 말이 다 똑같아. 너랑 사이좋은 조씨 가문이든 변우진 씨든 너를 모함할 이유가 뭐 있겠어! 아직도 인정 못 해? 그리고 이건 몰랐지? 네가 욕실에서 피해자를 강제추행하는 바람에 하수구에서 피해자랑 너의 모발을 발견했다는 거? 그리고 침대 옆에서 피해자의 속옷도 발견했고. 김예훈, 이게 다 증거가 아니고 뭐야! 아직도 변명할 거 있어?”풉!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변명이라... 자, 그래서 얻은 결론이 뭔데? 피해자를 협박한 죄? 내가 서양인 행세나하는 일본인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아?”“너...”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경찰은 김예훈에게 삿대질한 손으로 그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이때 변장우가 냉랭하게 말했다.“그만해. 김예훈 씨의 행실이 극악무도하긴 해도 제 사촌 동생을 봐서 마지막으로 실토할 기회를 드릴게요. 아니면 제가 모든 사실을 까발려야 인정할 거예요? 그러면 자수가 아니라 감형도 안 될 텐데.
“피해자가 그걸 안 믿자 당신은 자기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직접 별장에까지 초대했고, 가치가 2천억 원이나 되는 별장을 보여주면서 피해자에게 심리적 부담을 줬지. 그리고 조씨 가문의 별장에 돌아갔을 때 일부러 피해자를 방으로 유인해서 강제로 추행했고. 피해자는 그 치욕을 못 이겨서 결국엔 자살을 선택한 거지. 이것이 바로 전체 사건의 경과야. 김예훈! 인증, 물증이 모두 명확한데 그래도 인정 안 할 거야?”변장우는 그럴듯하게 말하면서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었다.김예훈은 놀라운 표정으로 손뼉을 치면서 감탄했다.“대단해요.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막장 드라마가 제일 재미있는 줄 알았는데 변 소대장님의 추리를 들어보니 막장 드라마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의문스러운 점을 여쭤봐도 될까요?”변우진은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김예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첫째, 제가 포레스트 별장도 가지고 있고, 유명 플랫폼과 혜성 엔터테인먼트까지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이지 않고도 마음대로 여자를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미쳤다고 예쁜 여배우들을 놔두고 서양인인 척하는 일본 인플루언서한테 들이댔겠어요? 둘째, 방금 피해자가 제 방에 들어왔다고 하셨는데 하은혜 씨 진술은 들어보셨어요? 피해자 욕실에 있는 샤워기가 고장 나서 잠깐 제방에 있는 욕실을 빌렸을 뿐이라고요! 저도 사용했던 욕실인데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발견된 건 지극히 정상 아닌가요?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저를 살해자로 몰아가는 거,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변장우가 냉랭하게 말했다.“김예훈, 안타깝지만 하은혜 씨는 당신의 비즈니스 파트너라 그분이 하신 진술은 믿을바가 못돼. 나는 물론 재판장님께서도 당신의 밀을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현재 모든 증거가 두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어. 당신이 피해자를 모욕하고 살해했거나, 피해자가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거나. 만약 전자라면 사형을 받을 것이고 후자라면 최소한 10년 형을 받을 거야. 아
“저한테 이럴 권력마저 없다고 말씀하실 건 아니죠? 그랬다간 곧 저의 변호사님한테서 고소장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 국민의 합법적 권력을 침범했으니까요!”김예훈은 앞에 놓인 물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변장우는 김예훈을 아래위로 훑더니 냉랭하게 말했다.“역시 고지능 범죄자야. 법에 대해 알고있는 것도 많고! 뻔히 법을 알면서 왜 법을 어기려고 하는 거지? 내가 말하는데,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법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고 해도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사촌 동생의 부탁대로 내가 보호해 줄 줄 알았어? 천만에. 나는 더 엄하게 다룰 거야. 그래야 법에 대한 존중이지!”변장우는 정의로운 척 김예훈이 자신한테 의지하지 못하게 딱 잘라 말했다.김예훈이 담담하게 웃었다.“소대장님, 제가 소대장님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소대장님은 저를 보호하지도 못해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통화 한번 할게요.”“허허허, 내가 보호하지 못해? 너는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되고?”변우진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해봐! 어디 어떤 대단한 사람이 보호해 줄지 지켜봐야겠어!”변장우는 자신의 핸드폰을 김예훈의 앞에 툭 던져주었다.‘촌놈 주제에 아무리 돈 많다고 해도 얼마나 많겠어. 이 큰 부산을 뒤집어 놓을 정도라도 돼? 정말 웃겨!’김예훈도 아무 말 없이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했다.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전화기 너머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저예요.”김예훈이 피식 웃었다.“어르신, 안녕하세요.”임강호가 멈칫하더니 다시 정신을 차리면서 말했다.“김예훈 군, 왜 낯선 번호로 전화하는 건가?”“일이 좀 있어서요.”김예훈이 웃었다.반나절이 지나도 그럴듯한 대화가 들리지 않자 변장우가 테이블을 툭툭 쳤다.“얼른 말해. 사람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수다나 떠는 곳이라고 아니라고! 1분만 더 줄게. 1분 뒤에 바로 끊어버릴 거야.”이 대화를 엿듣고 있던 임강호가 심각한 말투로 물었다.“김
“내가 알기론 부산 기관에서 임씨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임강호 어르신뿐인데 설마 방금 연락한 사람이 임강호 어르신은 아니지?”변장우는 틈을 노리려고 차가운 표정으로 김예훈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만약 전화 받은 사람이 임강호 어르신이라면 이 전화를 씹어먹을 거야!”옆에 있던 두 명의 경찰도 가소롭게 쳐다보았다.‘살인 용의자 주제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전화 한 통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 웃겨!’김예훈은 굳이 부정하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임강호 어르신께 연락드린 거 맞아요. 어르신께서 이 일을 해결해 줄 만한 사람을 보내준다네요?”“뭐라고? 너 같은 놈이 감히 내 앞에서 허세를 부려?”변장우는 한껏 무시하는 말투였다.“임강호 어르신이 아무리 부산 일인자라고 해도 경찰서 일에 관여하지는 못해. 경찰서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고 싶다면 유홍기 서장님을 찾아야지! 염치도 없어! 어떻게 자기 입으로 임강호 어르신께 전화드렸다고 말할 수 있어? 정말 웃겨!”사람들은 저마다 김예훈을 비웃었다.‘감히 우리 앞에서 수작을 부려? 상대를 가려가면서 해야지! 어떻게 모두가 다 아는 임강호 어르신을 입에 오르내릴 수 있어? 부산 일인자가 이렇게 사소한 일까지 챙길 정도로 한가해 보여?’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믿든 말든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 굳이 핸드폰을 씹어 드시겠다는데 나중에 정말 지켜볼 거예요.”변장우가 콧방귀를 꼈다.“그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남는 게 시간이거든! 일단 밥 먹고 나서 다시 얘기해. 그동안 자수할지 말지 잘 생각해 봐. 얻어 맞는 것보다 순순히 죄를 인정하는 것이 낫겠지? 아, 그리고 임강호 어르신께서 보내신 사람이 누군지 기대해 볼 거야! 분명 네가 그 입으로 임강호 어르신께 연락드렸다고 했어!”변장우 등은 웃으면서 심문실에서 나갔다.김예훈은 차가운 표정으로 이들을 무시한 채 계속 눈감고 휴식을 취했다.변장우 등은 심문실에서 나가자마
심문실.김예훈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경찰 서장 유홍기는 그의 앞에서 공손하게 예의를 갖췄다.“김 도련님, 저는 임강호 어르신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오늘 마침 서울에 회의가 잡혀있는 바람에 오시지 못했습니다. 섭섭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도련님을 도와드리라고 말씀하셨으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유홍기는 임강호의 최측근으로 오래전부터 김예훈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 임강호 부부가 김예훈에게 큰 빚을 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인지 아무리 관직이 높은 경찰서 서장이라고 해도 굽신거릴 뿐이다.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변장우 등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지경이었다. 김예훈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과 친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의 앞에서 센척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김예훈은 피식 웃더니 유홍기에게 심문실 안에 있는 녹음기를 꺼달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유 서장님, 굳이 말을 돌려서 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이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저의 현재 처지가 어떤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유홍기는 살짝 고개를 쳐들더니 한숨을 내쉬었다.“김 도련님께서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인증을 보든 물증을 보든 모두 김 도련님께 불리한 상황입니다. 특히 20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서 피해자를 협박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일은 아니잖아요. 비록 재판장님께서 법대로 하실 테지만 이 부분이 행실이 바르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서장님께서 높은 곳에 오르기까지 분명 많은 것을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건을 조사할 때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아시잖아요. 제가 어떤 장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조사해 보셨나요?”유홍기가 멈칫하고 말았다.“아니요.”“그러면 그 많은 증인 중에 사건 발생 전과 후를 언급한 사람은 없을까요?”김예훈의 계속되는 물음에 유홍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