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은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이 세상에서 추경은보다 유남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실은 어릴 적에 유남우를 처음 봤을 때 전혀 두렵지 않았었고 심지어 갖은 장난도 쳤었다.큰 병을 앓았었던 유남우는 대부분 시간을 방에서만 보냈었다.추경은은 그런 병약한 그가 싫어서 한동안 몰래 사적으로 뒤를 따라다니면서 돌로 때리고 했었다.유남우는 그때 돌에 맞았다고 하더라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었다.그 뒤로 추경은은 더욱더 심한 장난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비가 펑펑 쏟아지던 밤이었다.추경은은 비를 쫄딱 맞은 채 몰래 들어오는 유남우를 보고서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비아냥거렸었다.“쯧쯧, 어디 갔다 오는 거야? 할아버님한테 고자질한다? 너 몰래 나갔다고.”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한 상황에서 유남우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었다.그때 자기를 바라보던 유남우의 시선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추경은이다.그 눈빛은 그토록 차갑고 냉혹하며 무서울 수가 없었다.마치 지옥에서 도망쳐 나온 악귀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유남우는 추경은의 머리카락을 덥석 잡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연못으로 끌고 가서 바로 담가버렸었다.1분을 간격으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죽기만 못하는 고통을 느끼게 했었다.자그마치 30분 동안 지속하였었고 유남우는 그 과정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그 뒤로 추경은은 감히 이제는 유남우에게 도발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볼 때마다 벌벌 떨게 되었다.대표이사실에서 나온 추경은은 아직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마케팅 부서로 내려온 추경은을 보게 된 최현아는 넋이 나간 듯한 그녀를 보고서 물었다.“위층에는 무슨 일로 간 거예요?”“별거 아니에요. 새언니한테 서류 좀 전해달라고 둘째 오빠가 불러서 간 거예요.”추경은이 대답했다.그러자 최현아는 바로 추경은의 손에 있는 서류를 빼앗아 오면서 훑어보더니 별문제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려주었다.“꼭 명심해야 해요. 우린 같은
박예찬은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으로 이내 덤덤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그와 반대로 유지훈은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마냥 어리둥절하기만 했다.김훈이 박예찬을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유지훈은 생각하면 할수록 질투심이 불타올랐다.박민정의 뒤를 따라온 최현아는 자기 아들이 ‘구박’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순간 두 눈이 뒤집혔다.“지훈아, 예찬이가 또 널 괴롭혔어?”두말하지 않고 최현아는 바로 박민정을 뿌리치고서 달려갔다.그런 모습에 박민정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예찬이가 유지훈을 괴롭혔다고? 또?’‘제발 상황 파악 좀 하고 말하면 안 돼?’김훈과 유명훈 역시 두 아이의 엄마까지 오게 된 것을 보게 되었다.“너희들이 여긴 어쩐 일이야?”유명훈이 먼저 물었다.최현아는 우물쭈물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왜냐하면, 이 사실을 듣고 온 것이 아니라 박민정의 뒤를 쫓아온 것이니 말이다.박민정 역시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도려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김훈은 그제야 유지훈이 고자질한 것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다른 애들한테 이미 확인도 해보았는데, 유지훈이 자꾸 때려서 같이 안 노는 거라고 했어. 우리 예찬이가 중간에서 시킨 게 아니라.”최현아는 순간 언짢기 그지없었다.“동서가 먼저 다른 애들한테 우리 지훈이랑 놀지 말라고 학부모 위원회에 알린 거잖아. 우리 지훈이 왕따하려고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한테 그렇게 큰 권력이 있었던 거예요? 유지훈은 무려 유씨 가문의 증손자인데 누가 감히 유지훈을 왕따할 수 있겠어요.”이윽고 김훈이 나서서 자기 ‘새끼’들을 옹호하기 시작했다.“민정이랑 예찬이는 착하기 짝이 없는 애들이야. 너야말로 애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그러더니 또 바로 유명훈에게 말했다.“유 회장, 자네 손주 며느리가 며칠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하찮은 수단으로 우리 김씨 가문의 사업까지 빼앗아 가려고 했었어. 그러니 대체 뭐가 진짜
박예찬이 자기 증손자가 아니라면서 말끝마다 강조하는 유명훈의 말에 김훈은 화가 난 것이었다.조하랑은 그 긴 이야기의 끝에 자기가 엮이게 될 줄은 몰랐다.화가 잔뜩 난 김훈은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조하랑은 바로 등을 토닥거려주었고 어느새 김인우도 도착했다.“몸도 성치 않으시면서 왜 이렇게 나오신 거예요? 그냥 저 부르시지 그러셨어요!”김인우는 어이가 없었다.그러자 김훈은 보란 듯이 기침을 더더욱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이제 겨우 괜찮아진 김훈이었는데, 김인우가 부채질하는 바람에 모든 게 물거품으로 변해버렸으니 말이다.“그만 좀 해요! 기침하시는 거 안 보여요?”한마디 하고서 바로 김훈을 토닥거려주었다.“할아버님, 그만 화 푸세요. 이게 다 저랑 인우 씨 탓이에요. 증손자 말고 다른 건 갖고 싶지 않으세요? 가능한 한 만족시켜 드릴게요. 그리고 일단은 연애부터 하고 나중에 결혼한다고 이미 약속했었잖아요.”조금 괜찮아진 김훈은 문득 무엇인가 떠오른 듯했다.“그럼, 일단 아이부터 가지고 그러고 나서 연애하고 결혼하면 안 되겠어?”“...”“...”김인우도 조하랑도 모두 말문이 턱하고 막혀 버렸다.마침 세 사람 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박민정 역시 김훈의 말을 듣고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여기 무슨 할리우드야?’유명훈과 최현아가 유치원을 떠난 뒤였다.당황한 두 사람을 보고서 김훈은 부랴부랴 덧붙였다.“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지금 이 사회에서 혼전임신은 극히 평범한 일이란다. 적어도 우리 인우가 가능한 사람인지 한 번 시도는 해보아야 할 것 아니냐.”그 말을 듣고서 조하랑은 더더욱 할 말이 없었고 김인우는 귀까지 빨개졌다.“할아버지! 그만 좀 하세요!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면 경로당으로 확 보내버릴 거예요! 꼭 잡혀 사시게 할머니도 찾아드리고요!”“...”박민정은 두 사람의 티키타카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어느 정도 상황을 마무리하고 난 뒤, 박예찬은 자기 교실로 향했다.가는 도중에 가만히 홀로 서 있는
윤소현과 같은 사람에게는 인간성 따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만약 한수민이 엄마 노릇을 하지 못하여 모녀 관계를 끊은 것이라면 그나마 말이 통하는 데 그와 정반대로 한수민은 엄마 노릇을 너무 잘해 왔었다.하지만 윤소현은 자기한테 마음을 다해 주는 엄마를 버리고 돈과 권력이 많은 정수미를 엄마로 선택했다.윤소현의 본성을 잘 알고 있는 박민정은 이제는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혈연관계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윤소현 씨가 그러지 않았어요? 그뿐만 아니라 윤소현 씨 몸에는 한 여사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요?”윤소현은 자기가 했었던 말을 도로 받으면서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화가 미친 듯이 치오르고 있음에도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으니 말이다.“여하튼 한수민한테 당장 소송 취소하라고 해! 어차피 얼마 살지도 못하는데 소송만 취소해주면 우리 아빠가 그 뒷일을 책임져줄 수 있다고 했어.”그 아빠에 그 딸이라고 어지간히 어이가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두 부녀에게 버림을 받은 한수민이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마음대로 해요.”이윽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한편, 윤씨 가문에서.윤석후가 윤소현에게 물었다.“어떻게 됐어?”윤소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미친년이 싫다고 하잖아요!”“네 엄마 원래 걔 좋게 보지도 않았어. 대신 나서서 말린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야.”윤석후는 한숨을 내쉬면서 덧붙였다.“한수민은 이혼하겠다고 난리지 박민호는 또 재산을 빼앗아 가겠다고 난리지... 해외에서 잘 살 수 있었는데, 걔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한 거잖아!”박민정에게 거절을 당하자, 윤소현은 박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기고만장하기 그지없는 윤소현으로붙터 전화가 걸려오자, 박민호는 의아해하면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받았다.“어머, 이게 누구야. 발레를 하는 우리 누나 아니야? 누나한테 나 같은 동생이 있었다는 거 이제야 기억난 거야?”잔뜩 비아냥거리고 있는 박민호의 목소리를 듣고서 윤소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
한수민의 말을 듣고서 유남우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죄송합니다만, 제가 나서기에는 좀 어려운 상황인 것 같아요. 소현이 엄마시면 저한테는 장모님이시고 윤석훈 씨도 제 장인어른이나 다름없잖아요. 두 분이 하시는 법정 싸움에 제가 끼어든다는 건 여러모로 걸리는 부분이 많아요.”한수민은 그 대답을 듣고 나서도 풀이 죽지 않았다.유남우가 이렇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찾아온 것도 윤소현을 위해서가 아님을 내심 알고 있는 한수민이다.“지금껏 살면서 내가 누구한테 가장 미안해하는지 알아요? 민정이요. 하지만 그 죄를 모두 갚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그래서 가능한 한 재산을 도로 빼앗아 와서 민정이한테 줄 생각이에요.”한수민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유남우는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병원에서 나가고 나서 그는 박민호에게 말했다.“병실에 경호원 좀 붙여서 민호 씨 엄마 보호해 드리도록 해요.”갑작스러운 상황에 박민호는 마냥 이상하기만 했다.“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그냥 시킨 대로 해요.”“네.”박민호는 이제는 캐묻지 않았다.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그렇게 박민호와 헤어지고 나서 차에 오른 유남우는 자기 변호사팀과 연락을 닿았다.어떻게든 이번 이혼 소송에서 한수민이 이기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내심 결정을 내렸다.하지만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암암리에 진행할 생각이었다....두원 별장.집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심심한 나머지 핸드폰으로 기사를 확인해 보았는데, 마침 한수민 이혼 소송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되었다.[유명 무용가 시한부 판정받음. 재혼한 남편과 현재 이혼 소송 중. 서로 등을 돌리게 된 그 이유는... 하찮음.]자극적인 말로만 구성된 기사 제목을 보고서 박민정은 링크를 누르고 자세한 보도를 확인했다.하지만 형편없는 기자가 쓴 기사일 뿐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지도 못했다.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의 한수민은 그때 그 유명한 무용가가 아니라 일반인보다 못한 존재로서 이
보름 남짓이 못 본 사이 한수민은 몰라보게 변해버렸다.온몸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간병인의 부축 하에서 간신히 걸어왔다.현장 기자들 안중에 한수민은 더는 소문이 자자한 무용가가 아니었다.후회와 참회의 마음으로 법정에 나선 한수민은 움푹 꺼져 들어간 두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친딸인 윤소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한수민의 눈빛과 마주친 윤소현의 얼굴에는 그에 대한 혐오감과 놀라움만 쓰여 있을 뿐,다른 감정은 전혀 없어 보였다.“한수민은 왜 왔어?”그녀가 비서에게 물었다.“그건 모르겠어요.”비서가 고개를 살살 흔들면서 대답했다.“쓸모없는 놈!”한수민은 윤소현을 향한 눈길을 박민정 쪽으로 돌리더니 끝내 박민정의 얼굴에 머물고 말았다.박민정은 여전히 냉정했다. 그의 눈동자는 고요한 호숫물처럼 아무런 파문도 없었다.한수민의 가슴은 칼로 도리는 듯 아팠다.자신에 지나간 세월에 박민정에게 끊임없는 상처만 주지 않았더라도 이런 눈빛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정민기가 그녀의 곁을 지나서 박민정한테 다가서 말했다.“제가 도착했을 때 이미 양쪽 싸움이 붙었어요. 그래서 두 사람을 차에 태워서 데려왔어요.”“네, 수고했어요.”박민정이 머리를 끄덕하면서 말했다.정민기는 자리를 찾아서 앉고, 재판은 바로 시작됐다.한수민은 이혼소송을 제출하면서 부부 공동재산의 절반을 요구했다. 이어서 그녀는 자기가 입원하고 있는 사이 윤석후의 불륜 증거를 제출했다.윤석후가 계속 사실을 부인하려고 발버둥질했지만, 호산 그룹 법무팀의 변호사가 증인으로 출석했기에 윤석후는 결국 깡그리 지고 말았다.판사는 당장에서 이혼 판결을 내리고, 윤석후의 재산 절반을 한수민에게로 줄 것으로 판결 내렸다.재판이 끝난 뒤윤소현은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그녀는 당장 달려 나가서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남우 씨, 어떻게 된 일이에요? 호산 그룹에 왜 한수민의 소송을 돕는 거예요?”재판 결과를 알고 있는 유남우는 사무실의 의자에 앉아서 창밖의 빌딩을 보면서 대답했다.“소
한수민의 입에서 자신을 배려하는 말이 나왔다는 점이 박민정은 너무 가소롭게 느껴졌다.“우리한테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에 올라서 떠나갔다.그녀는 오늘 뜻밖의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생각 밖으로 잠잠했다.한데 눈만 감으면 한수민의 가냘픈 말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계절이 바뀌고 있으니, 너랑 아기랑 다 건강을 잘 챙기고…’그녀는 방금 앞에 서 있던 한수민이 진심인지, 아니면 여전히 허위적인지 분별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한수민이 준 받은 상처는 한평생 아물 수 없을 것이다.박민정은 그 누구보다도 한수민을 증오했다.“도착했습니다.”정민기의 말소리에 박민정은 어렴풋한 사색 속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두원 별장에 도착했다.오늘따라 유남준도 일찍 돌아왔다. 소파에 앉은 채 그녀한테 물었다.“어떻게 됐어?”“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한수민이 재판에서 이겨서 뜻대로 이혼하고 재산까지 절반 가졌어요.”박민정이 옆에 다가와 앉으며 대답했다.한수민이 소송을 걸어 얻은 돈을 윤소현한테 주지는 않을 것이고, 아마도 박민호에게 줄 계획일 것이다.그렇다면 그 돈이 다시 박씨 가문에 돌려준 셈이지.피곤함이 막 몰려오자, 박민정은 유남준의 팔짱을 끼면서 애교를 부렸다.“매일 저를 회사까지 바래다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오늘 나 혼자 두고 아침 일찍 나갔대요?”그녀도 무심결에 던진 말이지 화나서 한 말이 아니었다.너무 갑작스러운 열정에 놀란 유남준은 말문이 탁 막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독여 주었다.“당신이 좋아하는 프로젝트 몇 건 가져왔는데 한번 봐.”“싫어요… 왜 또 업무에요?”박민정이 한숨을 지었다.‘유남준, 당신은 정말로 인간성이 없는 금수야.’“당신이 이 몇 건의 프로젝트만 완성할 수 있다면 당신의 마케팅 5팀은 절대로 안 쫓겨나.”유남준이 덧붙여 말했다.그는 오늘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김인우한테서 검진을 받았다.이번 주만 지나면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뭐라고? 질렸다고?’이 대답을 들은 박민정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유남준을 감쌌던 두 팔을 어디에 둘 줄 몰라 어쩔 바를 몰라 했다.박민정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은숨을 한껏 들이켠 후 말했다.“남준 씨,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니에요?”방금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는데 갑자기 이혼을 제출하니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런 거 없어.”유남준이 차디찬 눈빛을 보이면서 대답했다.더 이상 유남준과 상대하기 싫다는 듯 박민정은 그와 몇 미터 사이를 두고 앉아서 사색에 잠겼다.드디어, 거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말았다.박민정이 계속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던 유남준이 말을 꺼냈다.“절대로 당신이 섭섭지 않게 할 테니 잘 생각해 봐.”말을 마친 그는 몸을 일으켜서 계단으로 향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당장 달려가서 유남준한테 한바탕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박민정은 미심쩍었다. 유남준이 올라간 뒤 급히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 건너편의 서다희가 이내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혹시 요즘 유남준 씨한테 무슨 일 없나요?”오늘 대표님이 병원에 가셔서 김인우 의사 만나서 검진받고 다음 주부터 수술받기로 했다.이 일을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하게 했다.만일 수술 결과가 좋지 못하면 박민정 모자가 유씨 가문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할 걸 예측했다.그래서 먼저 이혼서류를 밟아서 거액의 위자금을 박민정한테로 돌리려고 했다.“대표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서다희가 시치미를 뚝 떼며 되물었다.박민정은 이혼과 관련한 말을 서다희 에게 말하기는 머쓱했다.“아니요, 혹시 남준 씨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 해서요. 이를테면 머리를 어디에 박았다는가…”“그럴 수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항상 안전이 일 위라고 하십니다.”허다희한테서 아무런 가치 있는 정보를 얻을 것 같지 않은 박민정은 전화를 끊었다.어느덧 저녁이 되어 박윤우가 돌아왔다.저녁밥을 먹고 있던 박윤우가 궁금
박민정은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뭘 봐야 하죠?”“지금은 몸과 정신을 잘 추슬러야 해. 내일 출근해서 회의 도중 졸고 있으면 안 되잖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네 위치를 확고히 하는 거야. 나머지는 내가 정리해 줄 테니까.”그의 말을 듣자 박민정도 슬슬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그럼 나 먼저 쉬러 갈게요. 당신도 일찍 자요.”“응.”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뒤 유남준은 노트북을 꺼주고 휴대폰을 들었다.그는 전화를 걸어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민정이가 지엔에 출근해. 혹시라도 해결 못 할 일이 생기면 즉시 나한테 보고해.”지엔 그룹 안에도 유남준의 사람이 있었다....윤소현은 최근 들어 더욱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병원에서 몇 차례나 아이의 위독 통보를 보냈지만 그녀는 그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한편, 그녀는 아버지 윤석후를 회사로 들여보냈고 부녀가 함께 회사를 점점 혼란스럽게 만들어가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정수미는 이미 박민정을 새 총괄자로 임명하고 회사를 넘길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을.다음 날 아침,회사의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다.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모두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한편, 윤소현은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을 새롭게 단장할 계획을 세웠다.“이 물건들은 전부 대표님이 좋아하던 것들입니다. 정말 다 버리시겠습니까? 만약 대표님이 회복되신다면 찾으실 텐데요...”비서가 조심스럽게 묻자 윤소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럼 창고에 쌓아 두면 되겠네.”“하지만...”“하지만은 무슨. 지금 회사 관리는 내가 하고 있어. 내 스타일대로 꾸미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그녀는 단호히 말했고 그때 윤석후가 들어왔다.“딸, 내 사무실은 옆방으로 하면 되겠군.”그가 가리킨 곳은 정호철의 사무실이었다.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정호철과 함께 고위 임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정호철은 어제 박민정과 만났던 지라 상황을 잘 파악하
연지석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좋아. 한번 해볼게.”그녀도 자신의 능력을 키워보고 싶었다. 동시에 이번 기회를 통해 정수미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응.”결정을 내린 후 박민정의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연지석은 그녀가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곧바로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일을 맡아보겠다고 전했다.정수미는 그 말을 듣고 오후에 병원으로 먼저 들르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라고 했는데 박민정은 모두 받아들였다.그녀는 유남준에게도 메시지를 보내 오늘은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알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왜 그래?”박민정은 그제야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유남준은 이 일이 제법 의외였다. 하지만 정수미가 박민정에게 회사를 맡기려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박민정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놀라웠다.박민정은 덧붙였다.“지석이가 그러더라고요. 문제를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 후, 유남준이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연지석의 말에 설득 당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박민정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정수미의 병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던 주주들까지 급히 병원을 찾을 정도였다.비서는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박민정을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했다.“작은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시죠. 안에 계신 분들은 모두 지엔 그룹의 주주들과 고위 임원들입니다. 대표님께서 미리 만나보라고 하셨어요.”정수미가 미리 이들을 불러놓은 듯했다. 나이 지긋한 주주들과 임원들은 그녀를 보고 모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작은 아가씨.”박민정이 공손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수
정수미의 말이 끝나자 박민정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비서까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박민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곧바로 거절했다.“죄송해요. 저는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자신이 없어요.”그러나 정수미는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 그냥 스스로를 단련한다고 생각하면 돼.”“이렇게 중요한 문제는 차라리 윤소현 씨에게 맡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박민정이 다시 말했다.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박민정이 선뜻 수락하지 않으리라는 걸 정수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전에 동생에게 배운 방법을 쓰기로 했다.“민정아, 내 몸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솔직히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런 나의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줄 수 없니?”“소현이는 회사를 경영할 사람이 아니야. 만약 그 애에게 회사를 넘긴다면 지엔 그룹은 끝장날 거야.”“그리고 생각해 봐. 넌 내 친딸이야. 당연히 네가 회사를 맡아야 하는 거 아니겠니?”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정수미의 말에 박민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자신의 회사 하나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자신이 거대한 지엔 그룹을 책임질 수 있을까?“안 돼요. 저는 정말 감당할 수 없어요. 만약 소현 씨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차라리 전문적인 경영인을 고용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그러자 정수미는 다시 설득했다.“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직접 경영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나를 도와줘. 중요한 일이 생기면 네가 나한테 보고하고 내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어때?”“나는 지금 병원에 있어서 직접 나설 수도 없어.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내 친딸인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단다.”그 말에 박민정의 마음이 흔들렸다. 오랜 침묵 끝에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래. 충분히 고민해 보고 결정하거라. 생각이 정리되면 내게 연락해 줘.”그렇게 말한 후, 정수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곧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
지엔 그룹의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윤소현이 정수미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그러니 그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사실 정수미의 건강 상태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만 하면 지엔 그룹은 당연히 윤소현의 것이 될 터였다.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상황. 그렇기에 병원에서 요양 중인 정수미는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윤소현은 회사를 접수하는 한편,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하나씩 내몰았다. 특히 정수미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오래된 간부들은 모두 그녀 손에 의해 잘렸다.며칠 전 유남준이 풀어준 정호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지엔 그룹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면서도 정호철는 그곳에 대한 미련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그는 요즘 병원 근처를 자주 찾아와 멀리서 조용히 정수미를 지켜보곤 했다.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면서.그런 그를 정수미의 비서가 발견했다.“정 매니저님?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혹시 대표님을 뵈러 오셨나요?”순간 정호철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아, 그게...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우연히.”그러나 그의 어설픈 변명이 정수미 곁에서 잔뼈가 굵은 비서를 속일 리 없었다.비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마침 지나가신 김에 들어가 보시죠. 대표님께서 병원에만 계시느라 몹시 지루해하셨거든요.”그렇게 정호철은 반쯤 떠밀리듯 정수미의 병실로 들어서게 되었다.병실에는 약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거북한 냄새 속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정수미의 모습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대표님,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신 겁니까?”정호철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번에도 그저 평소처럼 앓다가 금방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정수미는 그런 그의 반응이 오히려 우습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이전부터 이랬어. 별일 아니야.”그러면서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지금 시간이면 회사에 있어야 할
문밖에 갇힌 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유남준의 눈에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서렸다.그는 대체 언제쯤 아내와 제대로 함께 지낼 수 있을까?두 사람은 이미 오래된 부부나 다름없건만 정작 함께하는 모습은 연애 초기보다도 못했다.오전 아홉 시가 넘어서야 윤소현은 정수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곧장 병실로 향했다.그곳에서 정수미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엄마, 깨어나셨어요? 왜 비서에게 미리 연락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정수미는 차가운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리더니 먼저 의사에게 나가달라고 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비서에게 들었어. 너랑 민정이가 밤새 나를 지켰다고. 괜히 너희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긴장된 마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서며 윤소현이 말했다.“엄마, 전 엄마 딸이에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어요?”이어서 그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지금 몸은 좀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많이 나아졌어.”정수미가 잠시 말을 멈춘 뒤 덧붙였다.“의사 말로는 아마도 상한 음식을 먹은 탓일 거라고 하더구나.”“어제 저희가 요리사에게 같은 음식을 다시 만들게 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무언가 찾아내셨나요?” 윤소현은 다급히 물었는데 혹여 정수미가 진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그러나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의사는 음식에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어. 아마도 고객과 외식하는 자리에서 뭔가 잘못된 걸 먹었을 거라고 하더구나.”그 말을 듣고서야 윤소현은 긴장했던 마음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앞으로는 꼭 조심하셔야 해요.”“그래야겠지.” 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녀가 윤소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묘하게 의미심장했다.“엄마, 민정이는 어디 갔어요?”주위를 둘러보던 윤소현은 박민정이 보이지 않자 자연스레 물었다.“이제 난 괜찮으니 민정이에게 돌아가 쉬라고 했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만약 엄마께
박민정도 이번만큼은 그녀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그렇게 정수미는 드디어 박민정의 얼굴을 만져볼 수 있었고 뜨거운 촉감은 그녀가 지금 꿈꾸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줬다.그리고 어느새 누가가 빨개진 채 계속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민정아, 민정아...”“네, 저 여기 있어요.”“내가 지금 꿈꾸는 게 아니라 진짜 우리 민정이구나. 난 네가 또, 또 사라지는 줄 알았어.”정수미는 아주 기나긴 악몽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자기 딸을 데려갔고, 또 나중에 박민정을 만났는데 꿈속의 그녀는 절대 정수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차갑게 말했다.박민정은 그런 정수미의 모습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유남준이 마침 마실 물을 가져왔고 박민정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먹여줬다.의사도 와서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해줬다.모든 검사가 끝난 뒤 의사는 병실 밖에서 그들에게 결과를 말해줬다.길연서도 인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정 대표님께서 혹시 깨어나셨나요?” 그녀가 묻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방금 깨어나셨어요.”길연서는 빠르게 핸드폰을 꺼냈다.“지금 당장 큰 아가씨한테 알릴게요.”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의사가 길연서 더러 먼저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전했다.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던 정수미는 그녀를 보자마자 귓가에 무언가 말해줬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길연서는 다시 핸드폰을 끄더니 이후에도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밖에서 기다리다가 길연서의 부름에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정수미가 한껏 기운 없는 목소리로 박민정을 불렀고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갔다.그러자 정수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정아, 괜히 나 때문에 온 밤 고생했어. 이제 괜찮으니까 너도 빨리 돌아가서 쉬어.”“네.”박민정은 가볍게 대답만 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녀가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렇게 두 사람을 떠나보내자마자 정수미는 갑자기 침대에 털썩하고 쓰러지더니
기다린 지 벌써 세 시간이 넘었으나 정수미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길연서는 야식을 배달시켰다. “두 분은 이것 좀 드시고 가서 쉬어요. 여기는 제가 있을게요.”윤소현은 진작에 졸려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녀의 말에 음식을 힐끗 보더니 손을 저으며 답했다.“저는 안 먹을래요. 시간도 늦었고 지금 먹으면 살도 찌고 건강에도 안 좋아요.”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기지개를 켰다.“그럼 전 이만 쉬러 갈 테니까 제 동생이랑 지키고 있어요. 혼자서 지키면 제가 마음이 안 놓여서요.”사실 윤소현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졸리지도 않았고 이따 유남준이 오기에 그를 기다려야 했다.윤소현이 떠나가자마자 길연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20년 넘게 키운 수양딸이라고 해도 어떻게 지금껏 헤어져 있었던 친딸보다 더 정이 없는지, 길연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둘째 아가씨, 아니면 저기 간병인 침대에서 잠깐만이라도 눈 좀 붙이세요.”그러나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안 졸려요.”“그럼 뭐라도 좀 드세요.”박민정은 그녀의 말대로 음식을 조금 가져와서 먹은 뒤 계속 앉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이 찾아왔는데 가녀린 몸으로 정수미 곁을 지키고 있는 박미정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민정아.”박민정은 지금 유남준을 보기만 해도 무섭고 떨렸다.“왔어요?”원래 유남준에게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기어코 아이들을 재우고 이쪽으로 달려왔다.길연서는 정수미의 사위가 온 모습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인사했다.“유 대표님.”“안녕하세요.”“그럼 말씀 나누세요.”굳이 부부 사이에 끼기 싫어 길연서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박민정은 원래 그녀를 불러세우려고 했으나 한발 늦은 것 같았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유남준과 박민정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이때, 박민정이 어색함을 깨려고 먼저 말을 걸었다.“이만 돌아가서 쉬어요. 시간도 늦었고 내일 출근해야 하
어쨌든 정수미는 박민정의 친엄마다.길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나서야 안심되었다.그러나 윤소현은 계획이 틀어지자 박민정에게 한껏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민정아, 설마 엄마 유산을 네가 못 받을까 봐 걱정돼서 여기 남겠다는 건 아니지?”박민정은 원래 그녀와 입씨름하기 싫어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자꾸 자극하는 윤소현을 더는 봐주기 힘들어 이참에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맞아요. 정 대표님은 제 친엄마인데 당연히 제가 유산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더구나 유언장에도 제가 유산 절반을 상속받는다고 되어있고요.”박민정이 살짝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만약 정 대표님께서 진짜 돌아가셨는데 제가 없는 틈에 누군가가 유언장에 손을 대면 어떡해요?”“너!”윤소현이 박민정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높게 들자 옆에 서 있던 정민기가 단번에 그녀의 팔목을 잡고 내팽개쳤다.그러다가 윤소현은 뒤로 몇 발짝 휘청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박민정, 엄마가 죽길 바라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윤소현이 불같은 화를 냈지만 박민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수술실 문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정수미가 밀려 나오자 윤소현이 빠르게 달려가 의사한테 물었다.“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는 괜찮나요?”그러자 의사가 대뜸 엄숙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혹시 환자분께서 어제저녁이랑 오늘 아침에 뭘 드셨을까요?”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늘 드시던 음식이었어요.”자신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녀는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한 분이 대표로 가서 혹시 환자분이 먹다 남은 음식이 있으면 싸 오세요.”의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길연서는 곧바로 집안 도우미에게 전화하려고 했지만 윤소현이 그녀를 말렸다.“매일 먹다 남긴 음식은 모두 음식물 쓰레기 통에 버리는데 그걸 어떻게 갖고 와요? 의사 선생님, 우리 엄마는 대체 왜 저렇게 된 걸까요?”“일단 응급처치해서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여
그렇더라도 이상하게 이번이랑 지난번이랑 느낌이 다른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무 미련없이 돌아섰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자꾸만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이게 한 사람에게 감정이 있는 거랑 없는 것 차이일 것이다.오후가 되어서야 박민정은 진서연과 에리가 가짜 연인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그녀의 물음에 진서연이 답했다.“에리 씨 아버님이랑 어머님께서 크게 실망하실까 봐요.”“이러다가 나중에 들통나면 오히려 더 불쾌해하실 거야. 그때 가서 했던 말들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고.”“에리 씨가 요 며칠 시간을 이용해서 최대한 빨리 여자 친구를 찾겠대요. 그러면 저는 슬쩍 빠지면 되거든요.”“그래.”박민정은 더 이상 말하기도 뭐했다.저녁 퇴근길에 그녀는 정민기의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는데 하마터면 앞에 차를 들이받을 뻔했다.정민기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며 그녀에게 연신 사과했다.“정말 죄송합니다.”여태껏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이런 실수를 범했는데 한눈에 봐도 정민기는 지금 온통 진서연과의 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민기 씨, 혹시 서연이랑 무슨 오해가 생긴 건가요?”박민정의 물음에 정민기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아니요.”그가 부정하는 모습에 박민정은 원래 진서연과 에리 사이의 일을 솔직하게 말해주려 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을 보니 정수미 비서인 길연서였다.“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둘째 아가씨,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병원에 한 번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 대표님께서 지금 응급실에 실려 왔거든요.”울먹이면서 말하는 비서의 목소리에 박민정도 순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네, 바로 가겠습니다.”정민기는 그길로 박민정을 병원까지 데려다줬다.도착해보니 응급실 복도에서 윤소현이 안정부절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이모 정주보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