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찬이 당황해 마지 못할 때 박민정은 이미 만족한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하랑아, 오늘 윤우도 좀 봐줘.”조하랑은 마냥 이상하기만 했다.“급한 일 있다고 하더니 그게 뭔데? 뭐길래 이렇게까지 숨기는 거야?”“그냥 일이야. 주말에 해야 할 일.”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 조하랑에게 아직 말하기 난감했다.비록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조하랑은 더 이상 깊이 묻지 않았다.“너 임신한 몸이야. 그게 뭐든 꼭 조심하고.”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이윽고 박민정은 박윤우에게 말했다.“윤우야, 오늘 하랑 이모랑 형이랑 재밌게 놀고 있어. 말 잘 듣고.”박윤우 역시 의문이 들기는 매한가지였다.‘일 있으면 나 그냥 집에 놔주고 와도 되는데...’‘집에 있으면 하랑 이모 귀찮게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실은 박윤우를 집에 놔두면 추경은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자기와 함께 나오려고 할까 봐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말썽 피워도 형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자기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박윤우는 잘 알고 있다.평소에 박예찬을 괴롭힐 수 있으나 큰 일 앞에서는 반드시 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이때 박예찬도 덧붙였다.“엄마, 얼른 가서 일 봐. 내가 윤우 잘 지키고 있을게.”순간 조하랑은 약간 민망하기도 했다.자기보다 더 어른답고 성숙한 박세찬의 언행에 말이다.하물며 심씨 가문과 유씨 가문에서 보낸 경호원도 모두 근처에 있으니 아이들의 안전 문제는 더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다.“얼른 가.”조하랑이 말했다.“알았어.”박민정은 그제야 공원에서 나왔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민기에게 뒤따라오라고 했다.정민기가 있는 한 어디로 가든 그리 두렵지 않았다.박민정은 정민기에게 시간이 되면 무술도 배우고 경호원도 하라고 했었다.앞으로 언젠가는 그 역할을 발휘하게 될 날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다.정민기가 운전한 차를 타고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개간하지 않은 땅에 이르게 되었다.이곳은
“이건 뭐지?”가정부는 의문이 가득했다.집안에는 가정부 말고도 다른 도우미들도 적지 않다.결벽증이 다소 심한 유남준을 주인으로 모시면서 그 어느 곳에서도 먼지 하나 만져낼 수 없게 청소하는 것이 그들의 원칙이다.그러한 환경 속에서 갑자기 하얀 가루가 나타나니 당황하고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가장부는 티슈로 그 하얀 가루를 깨끗이 닦아서 휴지통에 버렸다.한편, 추경은은 물 한 잔을 이미 유남준에게 건네주었다.“남준 오빠, 물 마셔.”물잔을 건네받은 유남준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바로 마셨다.꿀꺽꿀꺽 거침없이 물을 들이마시고 있는 유남준을 바라보면서 추경은은 심장이 두근거렸다.거의 다 마시자 추경은은 바로 물잔을 도로 손에 넣었다.“컵 좀 씻고 올게. 물 더 마시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물잔에 증거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추경은은 바로 증거를 인멸하려고 했다.깨끗이 여러 번이나 씻고 또 씻고 나서야 원래 자리에 도로 올려 놓았다.가정부는 암암리의 추경은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았는데, 의문은 점점 더 짙어지게 되었다.전과 같았더라면 추경은은 손에 물을 대자마자 바로 가정부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었다.지금처럼 저렇게 세심하게 잔을 씻을 리가 없단 말이다.추경은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또다시 가정부와 눈이 마주치면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근데 오늘따라 왜 그렇게 깜짝깜짝 놀라는 거죠?”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사람처럼 말이다.추경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오늘 별일 없으면 나가서 좀 쉬세요. 여긴 내가 알아서 하면 돼요.”가정부가 계속 집 안에 있으면 유남준에게 손을 쓸 틈이 없게 되니 말이다.“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사모님께서 오늘 꼭 집에 있으라고 당부하셨어.’같은 여자로서 가정부는 박민정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비록 유남준은 세상 까칠하고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명하고 돈도 많으니 많은 여자들이 어떻게든 무엇이라도 얻
옷을 야하게 입고 있는 추경은.지금 추경은은 유난히 낭패한 모습으로 유남준의 다리를 붙잡고 있다.“남준 오빠, 나 좋아하지 않아? 조금이라도.”가정부와 도우미들은 추경은의 말을 모두 똑똑히 듣게 되었다.그리고 가정부는 그제야 추경은이야말로 유남준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여자에게 손을 댄 적이 없는데, 이번 일로 그 원칙이 무너지고 말았다.한방에 추경은을 멀리 차 버렸으니 말이다.“꺼져!”이윽고 문 앞에서 구경하고 있던 그들에게 말했다.“의사 불러와.”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남준 역시 자기가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었다....두원 별장 안은 그렇게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박민정은 지금 한창 땅 주인과 계약서를 체결하고 있었다.“IM 그룹에서 정말로 계약을 엎을까요?”“IM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회사를 합병하고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빼앗아 갔는지 아세요? 빌딩이나 세우고 랜드마크를 세울 돈이 남아있을 것 같아요?”박민정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저 호산 그룹에서 온 거예요. 호산 그룹이 진주시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모릅니까?”남자 사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호산 그룹이야 당연히 믿죠. 다만 전에 IM 그룹과 계약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었는데, 땅을 그쪽에게 넘기면 IM 그룹에서 보복이라도 하면 어떡하죠?”“이쪽 바닥은 원래 그래요.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고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앞으로 사장님 뒤에는 저희 회사가 지지하고 있을 거예요. 하물며 복수한다고 한들 그건 불법이잖아요.”“네! 그럼, 사인할게요.”그렇게 박민정은 IM 그룹의 프로젝트를 빼앗아 왔다.박민정은 꽤 운이 좋았던 편에 속한다.왜냐하면 오늘 이 사장은 IM 그룹과 최종 계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따라서 오늘 IM 그룹에서 하지 못한 서류까지 모두 받아내면서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게끔 한발 앞서게 되었다.정민기 역시 박민정의 모습에 속으로
“사모님.”가정 의사였다.‘의사까지 왔단 말이야?’박민정은 슬슬 두려움이 밀려왔다.‘남준 씨가 또다시 기억을 잃은 걸까?’가정 의사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서 박민정은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서 있는 가정부와 도우미들, 소파에 앉아 있는 유남준, 그리고 야한 옷차림으로 처량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추경은이 보였다.그리고 추경은 앞에는 가정부가 모아둔 하얀 가루가 있었다.박민정이 온 것을 보고 추9경은은 울먹이면서 말했다.“새언니, 나랑 남준 오빠 사랑하게 해주세요.”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박민정이다.‘뭐? 뭘 해달라고?’비록 두 사람 사이에 혈연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대사가 영... 그러했다.‘제삼자는 넌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가정부와 도우미들 역시 당황해 마지 못했다.추경은은 박민정을 향해 벌벌 기어가면서 말했다.“새언니, 저 어릴 적부터 남준 오빠 좋아했었어요. 남준 오빠가 너무 좋아요... 좋아서 죽을 것 같다고요! 새언니가 이해하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다고요!”“새언니랑 남준 오빠 사이는 사랑이 아니라 그냥 가족 간의 정이라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아이가 있어서 할 수 없어 같이 살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고요.”“새언니만 괜찮다고 하면 앞으로 윤우랑 세찬이한테 정말 잘할게요. 절대 구박도 하지 않고 새엄마 노릇 잘하면서 살게요.”“믿지 못하겠으면 앞으로 평생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절대 아이들의 상속권도 빼앗아 가지 않을게요.”박민정은 추경은이 뭐라고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뒤범벅이 되었다.한편, 옆에서 듣고 있던 박윤우는 분노가 극으로 달했다.“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우리 엄마랑 아빠 엄청 사랑하거든요! 사랑못 받는 쪽은...”박민정은 박윤우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윤우야, 그만하고 먼저 방에 들어가 있어. 어디 아파서 그러는 걸 거야. 이모랑 방에서 놀고 있어.”이윽고 가정부는 바로 박윤우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박윤우가 가자마자 추경은은 엉엉
추경은은 이마에 피가 뚝뚝 떨어지면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싫... 싫어... 가기 싫어...”진심이었다. 만약 이래도 가게 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된다.박민정은 추경은이 이 정도까지 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자기한테 이렇게 독한 사람은 남에게도 더 독하게 굴 것이다.경호원은 다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유 대표님, 추경은 씨께서 많이 다치셨습니다.”“병원으로 데리고 가.”유남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인명피해까지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실은 그동안 추경은을 보내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네.”경호원 여러 명이 바로 다가가서 추경은을 데리고 나갔다.가는 내내 추경은은 달갑지 않아 하면서 중얼거렸다.“내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두원 별장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멀리 가고 나서야 두원 별장은 다시 조용해졌다.박민정은 자리를 찾아 앉아 유남준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괜찮아요? 병원에 갈래요?”혹시라도 그 약에 문제가 있을까 봐 걱정이된 것이었다.“아니야. 이미 확인해 보았고 별문제 없어.”박민정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럼, 됐어요. 어디 아프면 바로 말해줘요.”자기를 관심하고 있는 박민정의 말과 태도에 유남준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려 바로 품으로 끌어안았다.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고서 다른 사람들은 바로 자리를 내주었다.거실에는 그렇게 박민정과 유남준 단둘이만 남게 되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의 귓가에 약간 불만한 어투로 중얼거렸다.“오늘 왜 나 혼자만 집에 남겨둔 거야?”박민정은 추경은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만히 두고 간 건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하랑이랑 만난다고 했었잖아요. 여자 둘만 만나는데 남준 씨가 따라가면 불편하잖아요.”박민정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하지만 유남준은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오늘 나랑 추경은 사이에 무슨 일
무척이나 불쌍해 보이는 추경은을 마주하면서도 박민정은 눈빛이 더없이 차가웠다.“네? 경은 씨, 대체 내가 이상한 거예요. 아니면 경은 씨가 이상한 거예요? 감히 내 남편을 넘본 것으로 부족하여 어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죠?”추경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저 남준 오빠 진심으로 좋아한단 말이에요.”그 말에 박민정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말은 왠지 내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 같네요.”“그리고 가장 관건은 남준 씨가 경은 씨 싫어하잖아요. 남자한테 사랑해달라고 강요하고 협박하는 건 좀 별로지 않아요?”추경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난...”박민정은 지금 추경은을 상대할 틈이 없었다.“별일 없으면 그만 가보시죠.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 데 좀 비켜줄래요?”박민정에게 도움을 청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추경은은 바로 가면을 벗어던졌다.“참 인간이 어쩜 그렇게도 융통성이 없어? 하루빨리 회사에서 쫓겨 나가길 바랄게! 그땐 나한테 도와달라고 말 꺼내지도 마.”이윽고 문을 ‘쾅’ 닫으면서 나갔다.‘참 곱게 볼 수가 없는 사람이야.’‘어디 아픈 거 아니야? 뇌 구조가 궁금할 정도야.’박민정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난 뒤 더 이상 이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했다.추경은 때문에 자기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추경은은 사무실에서 나가자마자 바로 최현아에게 알렸다.“박민정이 지금 회사에 있어요.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하는 게 없어 보였어요.”“확실해요?”최현아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네! 직접 확인해 보았는데, 호산 그룹 회의 자료 그 외에 IM 그룹에 관한 서류는 없었어요.”추경은은 순간 눈빛이 싸늘해졌다.“일부러 관심 얻으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만한 실려도 없으면서 말이에요.”최현아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알았어요. 계속 지켜보고 있어요.”회사 안에서 최현아와 박민정이 내기한 일은 어느새 유씨 가문 고영란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고영란은 소식을 듣자마자 다소 놀란 모
“어머님, 무슨 일이세요?”갑자기 걸려 온 고영란의 전화에 박민정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이때 고영란은 몹시나 언짢아하면서 운을 떼기 시작했다.“현아랑 내기했다면서? 어떻게 함부로 그런 내기를 할 수 있어? 네가 회사로 들어간지 이제 얼마나 됐다고 그러는 거야? 현아 걔가 회사에 몇 년이나 있었는지 알기나 해? 넌 호산 그룹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IM 그룹에 대해서는 더더욱 백지상태잖아.”“현아가 지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 며칠 뒤에 나도 네 할아버지도 모두 회사로 불러들여서 대놓고 널 무참하게 굴 생각이래.”고영란은 박민정을 좋아하는 축이 아니지만 결국 자기 가족이니 팔을 안으로 굽히고 있는 것이다.여하튼 박민정은 자기 며느리이니 절대 최현아에게 당하는 꼴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그래요? 처음 듣는 말이긴 하네요.”최현아가 이미 유명훈과 고영란까지 찾아갔었다는 말을 박민정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그렇게 한 이유는 얼추 두 가지로 예측된다.첫째, 혹시나 박민정이 계약을 무를까 봐.둘째,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박민정을 호되게 모욕하려고.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박민정의 대답에 고영란은 순간 더 짜증이 났다.“회사 경영은 네가 하는 작곡이란 전혀 다른 개념이야. 하물며 넌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우리 남준이 아내잖아. 만약 이대로 현아한테 지게 된다면 우리 남준이 체면은 어떻게 할 건데?”한바탕 야단을 치고 난 뒤 고영란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IM 그룹 공급업체를 빼앗아 올 생각이라면서? 너한테 돈 줄 테니 가서 돈으로 해결하도록 해.”그 말인즉슨, 밑지는 장사라고 하더라도 체면부터 챙기라는 것이다.공급업체에 거액의 돈을 건네면서 호산 그룹과의 합작 관계를 유지하라는 말이기도 하다.“아니에요. 어머님, 저한테 다 계획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남준 씨 체면도 어머님 체면도 제가 지켜드릴 거예요.”박민정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다시 덧붙였다.“그래도 고마워요. 마음만 받고 별일 없으시면 그만 일 보러 갈게요.”말을
“누나, 나 윤석후한테 소송 걸었어.”박민정에게 칭찬을 들으려는 듯 박민호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박민정은 지금까지 이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전에는 윤씨 가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박씨 가문의 재산을 도로 되찾아오려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필경 박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니 만약 윤씨 가문에서 그 사실을 알고 걸고넘어지면 지금 박민정 손에 있는 유언장도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박형식은 생전까지 늘 박민정을 친딸로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소송 걸었으면 됐어. 내가 가지고 있는 증거들 모두 줄 테니 앞으로 남은 일은 네가 알아서 해야 할 거야.”박민정이 말했다.지금 박민정이 할 수 있는 일은 박형식이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는 것뿐이다.박형식 대신 응당 박형식의 모든 것을 도로 찾아오는 것.“그렇게 할게.”“누나, 역시 누나밖에 없어.”자기한테 대신 소송을 걸어 달라고 하고 돈에 증거까지 서슴지 않게 준다는 박민정의 모습에 박민호는 진심을 다해 말했던 것이다.“그래. 앞으로 열심히 일만 해. 내가 뒤에서 지지해 줄게.”박민정은 진심으로 말했다.“걱정하지 마.”박민호는 대답하고 나서 말머리를 돌려 물었다.“엄마는? 요즘도 연락해?”한수민 얘기가 나오자 박민정은 순간 안색이 달라졌다.“아니... 근데 왜?”“그냥 물어보는 거야. 어제 나한테 전화 왔었는데 앞으로 누나한테 잘하라고 신신당부하셨어. 그리고 이상한 말도 엄청 많이 했었어.”박민호는 등을 의자에 기댄 채 두 다리를 사무실 책상 위에 ‘탁’ 걸치고 어제 한수민이 전화에서 했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한수민은 말끝마다 박민정을 감싸고 있었으니 말이다.갑자기 달라진 한수민이 마냥 이상하기만 한 박민호였다.“다른 건?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박민정은 다소 긴장해지기 시작했다.행여나 박민호에게 자기의 신분을 알렸을까 봐.“아니,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박민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난 뒤 덧붙였다.“누나, 걱정하지 마. 나 더 이상 엄마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