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과 유남준도 박윤우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박윤우는 보기에 평범한 그 구슬을 손에 쥐었다. "아빠, 엄마, 이 구슬 진짜 그리 비싸? "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래, 사리자는 무척 귀한 거야. 이후에 꼭 잘 간수해야 해." 게다가 유명훈도 득도한 승려가 원적 후의 사리자라 했으니 이걸 얻기가 어지간히 쉽지 않았을 거다. "알았어." 박윤우는 대답한 뒤 박민정에게 기대어 잠들었다. 박민정은 윤우를 꼭 껴안았다. 지금의 그녀는 윤우를 한순간도 자신의 시선밖에 내놓을 자신이 없다. 저택으로 돌아왔다. 박민정은 박윤우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에야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유남준은 먼저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 밤에 그 둘은 함께 잠을 잤다. 박민정은 윤우가 사고를 당하는 악몽을 꾸고 놀라 잠에서 깨었다. "윤우야......" 깊게 잠들지 않았던 유남준은 그녀의 소리를 듣고 그녀를 안았다. "악몽 꿨어?" 박민정은 유남준의 포옹 속에서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네, 윤우가 또 사고당하는 꿈을 꿨어요." 유남준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꿈일 뿐이야." "네."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잠에 들지 하였다. "근데 유지훈은 왜 윤우를 밀었을까요?" 그 영상을 보았을 당시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어린아이가 이리도 나쁜 짓을 할 수 있지?' "어린아이들은 보통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기 마련이야. 나의 아버지와 큰아버지 둘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았어. 그래서인지 유성혁은 어릴 적부터 날 경쟁대상으로 여겨왔어." 유남준이 대답했다. 그러나 과거의 유남준에게 유성혁은 그의 상대가 될만한 자격조차 없었다. 유남준이 박민정에게 이런 얘길 꺼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그녀가 유 씨 가문에 시집온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유남준의 큰아버지는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듣기론 주로 해외의 사업을 경영해서 간혹 설 쇨 때에나 집으로
그러나 박윤우를 건들지 못한다 하여 박민정도 건들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하여 말했다. "제 남편이 요즘 사업하느라 매일같이 해외출장 가지 뭐예요. 하도 바빠서 저랑 같이 연회에 참석도 못했네요." "제 남편도요. 매일 사업하랴, 고객 만나랴, 여기에 저랑 동반참석하지도 못했잖아요." "말도 말아요." 듣기엔 자신의 남편이 여기가 나쁘다 저기가 나쁘다 푸념 늘어놓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의 남편이 능력 있다 자랑하는 거다. 윤소현의 아부를 떠는 사람도 있었다. "제부매부들이 바빠봤자 둘째 오빠보다 바쁘겠나요? 지금 큰오빠가 손을 놓으니 호산그룹은 둘째 오빠가 다 관리하잖아요. 그런 와중에도 둘째 형님과 시간을 보내시려고 노력하잖아요." 윤소현은 득의양양해져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남우 씨가 저를 배려해서 산부인과 검사 같은 거 할 때마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 빼내여 절 동반해주려 하네요." 그들이 한마디 두 마디 서로 주고받을 때 박민정은 못 들은 척하였다. 박윤우도 그저 묵묵히 밥만 먹었다. 박윤우는 눈앞의 아줌마들이 고의로 엄마가 들어라고 하는 소리인 것을 알았다. 박민정의 반응이 너무도 미지근했던 건지 그들 무리 중 한 명이 직접 박민영한테 말을 걸었다. "그래도 큰 형님이 젤 좋으시겠어요. 지금 큰오빠가 눈이 안 보여서 일할 필요도 없으니 매일매일 형수님과 같이 시간 보낼 수 있잖아요." 박민정은 하던 동작을 멈추고 말했다. "그래, 우린 돈도 많고 일할 필요도 없으니 아주 즐거워." 이 말을 들은 몇몇이 순간 말문을 잃었다. 이때 식사를 끝마친 박윤우가 곤혹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의 아빠가 직업이 없다고 누가 그랬어요? 아빠 회사 엄청 커요." 이 말을 들은 사촌언니동생들은 의아했다. "윤우야, 너의 아빠가 회사가 있다고? 어디 있는데? " 그들은 유민준 같이 눈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박윤우는 똘망똘망한 큰 눈동자로 그들을 지그시
“경은 씨.”절뚝절뚝 추경은을 쫓아온 윤소현.윤소현의 부름에 추경은은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보았다.“새언니,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유남우로 인해 추경은은 윤소현을 살짝 두려워하고 있다.“별거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고 싶어서요. 잠깐 시간 돼요? 어디로 가는 길이었어요? 함께 해도 될까요?”윤소현의 말에 추경은은 거절하기에 뭐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유명훈이 있는 쪽으로 나란히 향했다.이때 윤소현이 추경은에게 물었다.“형님 마음에 안 들죠?”마음에 찔린 추경은은 흠칫거리고 말았다.하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면서 반박에 나섰다.“그럴 리가요.”박민정을 싫어한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추경은도 아니고 말이다.“그래요? 난 또 경은 씨도 나랑 같은 마음인 줄 알았죠.”한숨까지 내쉬면서 윤소현이 말했다.“새언니도 민정 언니 싫어하는 거예요?”윤소현의 말을 듣고서 추경은은 바로 확인 사살에 들어갔다.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지한 모습으로 대답했다.“싫어할 뿐만 아니라 아주 눈엣가시 같은 존재죠. 겉과 속이 180도 다른 여자잖아요. 아주버님 여자로만 평생 살 여자로 보여요?”뼈가 있는 듯한 윤소현의 말에 추경은은 눈빛이 확 달라졌다.연예인 스캔들 기사를 보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글쎄 형님이 우리 남우 씨까지 넘보고 있잖아요.”순간 추경은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마침내 가면을 벗어던지기까지 했다.“너무 뻔뻔한 거 아니에요? 남자가 그렇게도 고플까요? 양다리도 아니고 문어 다리라고 하다니...”“문어 다리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윤소현은 의문이 들었다.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면서 추경은 역시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새언니, 혹시 에리라고 알고 있어요?”‘에리?’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윤소현은 바로 에리가 누군지 떠올랐다.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표절 논란으로 한동안 떠들썩했었을 때 에리가 박민정을 위해 나선 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그 글로벌 가수 에리를 가리키는 거예요?”“네.
유씨 가문의 어느 한 빌딩에서.유남준과 유남우 두 형제가 날카롭게 맞서고 있다.“권해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넌 이미 알고 있었지?”유남준이 물었다.여유로운 모습으로 난간에 기대고 있는 유남우, 그는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대답했다.“이번 일은 끼어들지 않았어.”이러한 대답은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이기도 하다.유남준은 자기 동생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따뜻하고 상냥한 사람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직도 자기한테 칼을 겨누고 있는 유남우의 모든 행위가 믿어지지 않았다.“호산 그룹도 네 손에 넣었잖아. 근데 뭐가 아직도 불만이야?”‘그걸 말이라고 묻는 거야?’유남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따지고 보면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불만인 건 네가 내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까지 해놓고서도 나한테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빚지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네가 재수 없고 역겨워!”그 말을 듣게 된 유남준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유남우의 멱살을 한 방에 잡고서 힘을 가득 주었다.두 사람은 체형이,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하고 아팠던 유남우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설령 눈이 먼 유남준이라고 하더라도.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홍주영은 그 광경을 보고서 바로 달려가려고 했다.그러나 그때 옆에 있던 서다희가 그녀를 말렸다.“홍 비서님, 우리가 가히 간섭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멱살을 단단히 잡힌 유남우는 서서히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하지만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은 채 오히려 밀어붙였다.“죽여! 어디 한 번 죽여봐! 근데 똑바로 기억해! 민정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처음부터 끝까지 민정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고!”“만약 내가 죽게 되잖아? 그럼, 민정이는 널 평생 원수로 생각하면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잘생긴 얼굴이 험상궂어 보일 정도로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유남준은 무거운 소리로 엄숙하게 말했다.“앞으로 이상한 놈들이랑 엮이지 마. 아니면 너까지 죽
마침 권진하의 행방에 대해 알리려고 했던 서다희였다.“지금 두원 별장 문 앞에 무릎 꿇고 있습니다.”“사모님을 납치한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면서 권해신 스스로 벌인 일이라고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대표님께서 이번 한 번만 봐주시면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역시나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확신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내용을 알아넬 수 없는 상황이다.“권해신은 나한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같아. 너도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돼.”“네, 알겠습니다.”유남준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서다희다.권해신을 더 이상 남길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권진하는 어떻게 할까요?”권씨 형제를 단번에 처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하물며 권진하는 담도 적고 여자한테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약하디약한 사람이다.“일단 남겨둬.”“네.”...두원 별장.소파에서 쉬고 있던 박민정은 추경은한테서 듣게 되었다.권씨 가문 셋째 도련님인 권진하가 지금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고.추경은이 박민정에게 물었다.“이지원은 잡았어요?”이지원이 하이힐로 다친 다리를 무자비하게 찍었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추경은이다.추경은의 질문에 박민정은 눈을 살짝 뜨고 대답했다.“잡히지 않았을걸요? 내가 경찰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요.”진정성이라곤 일도 없는 박민정의 대답에 추경은은 순간 불쾌해졌다.“좀 분명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네요.”추경은은 일부러 일을 크게 벌이려고 했다.“새언니랑 이지원, 서로 라이벌 사이 아니에요? 우리 납치당했을 때 그년이 얼마나 기고만장했는지 다 까먹은 거예요?”박민정은 추경은을 흘겨보면서 대답했다.“아니요. 기억하고 있어요.”“하지만 기억하고 있다고 한들 뭘 어떻게 하겠어요?”말 문이 턱 막힌 추경은은 바로 정신을 차리면서 밀어붙였다.“남준 오빠한테 본때를 보여주라고 해야죠!”박민정은 일부러 거절하는 척을 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를 헤치려고 했던 사람도 권씨 가문 형제 같아요.
“사모님 택배 하나 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경비원이 박민정에게 말했다.“네, 감사합니다.”‘뭘 보내신 거지?’택배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서 방에서 박윤우가 뛰쳐나왔다.택배는 언제나 설레는 법, 두 사람은 함께 택배를 확인하기 시작했다.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고 말았다.박스 안에는 여자아이의 장난감과 일상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장난감과 일부 용품은 하도 낡아서 누렇게 변하기도 했다.내용물을 보자마자 박민정은 단번에 어릴 적 자기가 사용했던 물건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박민호와 한수민은 전에 박씨 가문 옛 저택을 법원에 공탁으로 넘겼었다.그 옛 저택을 이지원이 먼저 사들였고 나중에 유남준이 소유권을 차지하면서 박민정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었었다.다시 박씨 가문 옛 저택으로 들어갔을 때 박민정은 어릴 적 자기가 사용했었던 물건을 단 하나도 보지 못했었다.“한수민이 이 모든 걸 챙기고 있었다는 말이야?”박민정은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한수민이 챙겼을 리가 없다면서.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윤우는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해졌다.“엄마, 여기 안에 있는 거 다 엄마 것이야? 엄마가 어릴 적에 썼었던 물건들이야?”단번에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박민정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일기장 위에는 ‘박민정’이라고 떡 하니 쓰여 있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그래. 학교 다닐 때 썼던 물건들이야.”이윽고 박민정은 누렇게 바래버린 일기장을 한 페이지씩 넘기었다.첫 페이지에는 진주시 유씨 가문으로 처음 왔을 때의 심정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8월22일, 날씨 맑음. 드디어 아빠와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도 인제 아빠와 엄마가 있다. 너무 좋고 행복하다.][8월23일, 날씨 흐림. 엄마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나에게 있는 것 같다. 나만 잘하면 아빠도 엄마도 나를 좋아할 것이라고 아줌마께서 말씀해 주셨다. 내가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여 두
‘쓰레기?’한수민의 말을 듣고서도 박민정은 예전처럼 슬프거나 화나지 않았다.“그럼, 감사히 잘 받을게요.”“한 여사님, 앞으로 부디 천국으로 가시길 바랄게요.”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박민정이었다.하지만 갑자기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되면서 서서히 흔들리고 말았다.한수민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애를 썼었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한수민을 친엄마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매번 상처받고서도 괜찮은 척했었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조금씩 무너졌다.한편, 병원 안에서.끊긴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한수민은 박민정이 마지막으로 했던 그 말을 끊임없이 되새겼다.“한 여사님, 앞으로 부디 천국으로 가시길 바랄게요.”‘천국?’‘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건데... 천국은 무슨...’한숨을 내쉬면서 한수민은 앨범을 열어 보았다.그 안에는 어린 시절 박민정이 썼었던 그 일기들이 저장되어 있었다.실은 금고를 되찾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한수민이 먼저 확인했었다.박민정의 일기장을 한번 또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본 한수민이다.만약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박민정을 끔찍이 여기면서 살 것이라고 후회를 금치 못했다.간병인 역시 진심으로 후회하고 한수민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후회한다고 한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사모님, 제가 로펌에 문의를 해보았는데, 그쪽에서 의뢰 사안을 접수할 수 있다고 했어요. 다만 지금 사모님께서 금전적으로 넉넉한 편이 아닌 점을 고려하여 벤처 소송을 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어요. 패소하게 되면 변호사 수임료를 지급하지 않으셔도 되고 만약 승소하게 된다면 10%를 변호사 수임료로 지급해야 할 거예요.”거동이 불편한 한수민은 윤석후와의 이혼 소송 문의를 간병인에게 부탁했었다.만약 승소하게 된다면 한수민이 받게 될 모든 재산의 10%를 변호사 수임료로 반드시 지급해야 한다.그와 반대로 만약 패소하게 된다면 단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문적 박대를 당한 추경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에 귀를 기울였다.뭐라도 듣고 싶어서 이내 안달 난 모습으로 말이다.다행히도 방음 효과가 꽤 뛰어났고 베란다에서 얘기하고 있었으므로 추경은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뻔뻔할 수 있어? 꽉 막힌 공간에 남녀 단둘이 들어가다니!”일그러진 얼굴로 추경은이 내내 중얼거렸다.옆에 박윤우가 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한참 박민정을 욕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다리 쪽이 젖어 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긴가민가하면서 고개를 숙인 추경은은 액체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박윤우를 보게 되었다.박윤우는 추경은의 다리에 그 액체를 붓고 있었고 그 냄새는 유난히 지독했다.“아! 박윤우! 뭐 하는 짓이야!”세상 순수한 눈빛으로 박윤우가 대답했다.“경은 이모, 이건 제가 아줌마한테서 가지고 온 거예요. 꽃에 주는 비료라고 하던데, 이거 이렇게 많이 뿌리면 꽃이 빠르게 자란다고 했었어요.”“경은 이모 다리가 하도 낫지를 않아서 이렇게라도 하면 좀 빨리 낫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비료 주고 있는 거예요.”그 말을 듣고서 추경은은 바로 사색이 되어버렸다.이윽고 비명과 함께 미친 듯이 욕실로 뛰어갔다.허겁지겁 달려가는 그 모습을 보고서 박윤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까지 쳤다.“흥! 감히 우리 엄마를 욕하다니!”같은 시각, 방안에서.베란다에서 한창 얘기를 하고 있던 박민정과 정민기는 밖의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민정 씨, 제가 알아본 것에 따르면 그때 이지원은 진주시를 떠나지 않고 권진하를 찾아가서 그와 사적으로 만남을 유지했다고 했어요. 나중에는 권진하가 이지원에게 특별히 집까지 마련해줬다고 해요.”정민기의 말을 듣고 난 박민정은 조금 믿어지지 않았다.“네? 제 기억으로는 권진하에게 따로 약혼녀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지원의 친한 친구인 하예솔이 권진하의 약혼녀였던 것 같은데요?”정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하예솔도 지금까지 속고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알게 된다면 권진하와 결
홍주영은 오늘 유남우와 함께 회사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차에서 내리겠다는 유남우의 말에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직접 찾아왔다.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것은 지금 이 끔찍한 장면이었다.홍주영은 여실히 박민정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급히 소리쳤다.“도련님, 빨리 민정 씨를 놓아주세요! 지금 위험해 보여요.”그제야 홍주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유남우는 급히 박민정을 놓았다.하지만 이미 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하고 보랏빛이 돌 정도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민정아!”유남우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박민정은 숨을 헐떡이며 말할 겨를조차 없었고 홍주영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민정 씨, 천천히 숨을 고르세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유남우의 눈빛에는 뚜렷한 죄책감이 어렸고 그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하지만 박민정은 곧바로 몇 걸음 물러나 그의 손길을 피했다.“나, 방금 거의 죽을 뻔했어요.”그녀는 아직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만약 유남우가 조금이라도 더 심하게 했다면 그녀는 정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유남우의 손은 공중에서 멈춰버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홍주영이 대신 사과하며 말했다.“민정 씨,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홍주영은 누구보다도 유남우가 박민정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방금 들었던 유남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는지라 그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더는 오빠를 보고 싶지 않아요.”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유남우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만이 맴돌았다.‘보고 싶지 않아요.’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던 홍주영은 조심스레 말했다.
박민정은 손바닥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오빠는 거짓말쟁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 있겠어요? 오빠가 준 그 약들, 내가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신을 아껴주던 남우 오빠가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까지 해칠 수 있는지.유남우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이 방법밖에 없었어!”그는 박민정을 자기 곁에 완전히 붙잡아 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박민정은 냉소를 흘렸다.“방법이 이것뿐이라니. 오빠는 정말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해요. 오빠가 이런 사람이 되어버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박민정의 마지막 말이 유남우의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끊어버린 것 같았다.그는 손을 들어 박민정의 팔을 움켜쥐었고 분노와 슬픔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변했다고? 네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어?”유남우가 박민정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자 그녀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이거 놔요!”하지만 유남우는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그녀를 붙잡았다.“변한 건 너야! 네가 먼저 변했어! 너 어릴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나를 좋아한다고, 크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그는 목이 메었다.“너는 나랑 유남준도 구별 못 했어.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 인간이랑 결혼하고 그 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유남우의 목소리가 떨렸다.“넌 원래 나만 좋아해야 했어. 네가 변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유남우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내가 헛소리를 하는 건지 아닌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내가 너를 1년 넘게 보살폈어. 그런데 유남준이 나타나자마자 넌 또 유남준한테 가버렸지. 너한테 사랑은 그렇게 쉬운 거야?”박민정은 그가 너무 꽉 끌어안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
박예찬 역시 하루빨리 박민정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병세가 계속 나아졌다 악화됐다를 반복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의 마음도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김인우와 조하랑은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다투었고 이 끝없는 싸움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었다.그렇게 매일 부딪히면서도 결국 두 사람이 잘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이런저런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박예찬은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박씨 가문.그날 밤, 박민정은 금세 잠에 들었다.이곳에서의 밤은 신림현에서 지낼 때와 달랐는데 전에 느끼던 두려움 없이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휴식을 방해할까 두려워 결국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그렇게 밤새 뒤척이던 그는 다음 날 아침, 눈 밑에 푸른 기운이 남아 있을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제대로 쉬지 못한 티가 났다.유남준은 아침부터 박민정을 찾았지만 진서연에게 뜻밖의 답을 들었다.“보스는 이미 나가셨어요.”“언제 나간 거야? 어디로 갔는데?” 유남준이 다급히 묻자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민기 씨가 따라갔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준은 그녀가 안전한지 걱정되는 한편, 어제의 감정이 풀렸는지도 알고 싶었다.한편, 박민정은 차에 앉아 어제의 불쾌한 감정을 이미 잊은 듯했다.운전기사가 차를 몰며 앞길을 달리는 동안 박민정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정민기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며 동행자 역할을 했다. 박민정이 묻는 질문에만 간단히 대답했을 뿐,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박민정은 그의 존재를 쉽게 잊어버릴 정도였다.얼마 후, 두 사람은 한 대학의 정문에 도착했다.이곳은 박민정이 예전에 다녔던 대학교였다.익숙하면서도 낯선 이곳에 발을 내딛으며 그녀는 말했다.“분명 여기서 학교를
저녁 식사 시간 내내 박민정은 유남준을 철저히 무시했다.유남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기로 결심했다.식사가 끝난 후 박민정이 소화를 시키기 위해 산책을 나서자 유남준은 그녀를 따라갔다.민수아와 다른 사람들은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주었다.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살짝 짜증 난 표정으로 유남준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민정아, 화 풀어.”유남준이 다가가며 말했으나 박민정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어.” 유남준이 다시 말을 꺼냈다.사실 박민정은 그렇게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 순간 그녀는 두 사람이 결혼 후 어떻게 지내왔는지 문득 궁금해졌다.“우리가 결혼했을 때에도 평소에 자주 내 일에 간섭했어요?”박민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그건 유남준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유남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급히 대답했다.“당연히 아니지.”그가 어찌 감히 박민정을 화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자연스러웠는데요?”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유남준은 말문이 막혔다. 아직 변명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은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이만 얘기 그만하죠.”“민정아...”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피하며 경계하는 얼굴로 말했다.“유남준 씨, 자중하세요.”유남준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민수아, 설인하, 그리고 진서연은 흥미진진하게 속닥거렸다.“무슨 일이야? 부부싸움 한 건가?”“부부싸움은 개도 안 끼는 법이라더니. 우리 얼른 자러 가자.”“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아.”그들은 수군거리며 한쪽으로 사라졌다.박민정은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더는 산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유남준을 뒤로 하고 거실로 돌아갔다.유남준은 딱딱하게 굳은 발걸음으로 민수아와 두 사람에게
박민정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는데 낯선 번호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민정아, 나야, 에리.”청량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날 완전히 잊어버렸나 봐.”에리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예전에 나한테 밥 한 끼 빚진 거 기억 안 나? 게다가 지금 난 네 회사에 소속된 배우야. 이렇게 날 방치해서 되겠어?”그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며 살짝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다.박민정은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처음 접해본 터라 당황스러웠다.“저기, 그거... 조금만 더 미뤄도 될까?”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안 돼! 벌써 1년이나 빚진 건데 또 미루겠다고?”에리는 단호하면서도 애교를 섞어 불만을 드러냈다.옆에 서 있던 유남준은 통화 내용으로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갔다. 그는 박민정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예상대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에리였다.“민정아, 설마 유 대표가 우리 약속을 눈치채는 게 걱정되는 거야? 안심해. 절대 비밀로 할게!”‘우리 약속’라는 말에 유남준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에리 씨, 다시 제 아내를 귀찮게 굴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단숨에 전화를 끊어버렸다.박민정은 휴대폰을 빼앗기고 전화를 끊어버린 유남준의 행동에 잠시 멍해졌다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남준 씨,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그녀는 분명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남의 휴대폰을 빼앗아 전화를 끊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유남준은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보고 곧장 해명에 나섰다.“민정아, 에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배우라는 것들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봤다.“그게 당신이 내 휴대폰을 빼앗고 내 전화를 끊은 이유예요?”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유남준은 순간 말을 잃었다.어쩐지 아내 앞
박민정이 회사로 복귀한 후 긴장감이 감도는 사람은 윤소현뿐만이 아니었다. 이지원 역시 초조해하고 있었다.어렵사리 다시 연예계에 복귀한 그녀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박민정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드러날까 두려웠다.이지원은 종종 몰래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곤 했다.그날도 촬영을 마친 뒤 그녀의 차는 PMJ 회사 앞에 멈춰 있었다.이지원은 차 안에 앉아 박민정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드디어 박민정이 회사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도드라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정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알아보기 전에 이지원은 그녀 앞까지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민정 씨, 드디어 돌아왔네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의 마음 한구석에 본능적인 반감이 피어올랐다.비록 그녀는 이지원이 저질렀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다.이때 진서연이 재빠르게 박민정 앞을 막아섰다.“당신 누구에요?”이지원은 그제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는데 필러로 채워진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의 흔적과 연예계의 생존 경쟁 속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외모를 유지하려 애썼다.진서연은 그녀를 알아보자 얼굴을 찌푸렸다.“이지원 씨, 여기 왜 온 거예요? 또 우리 보스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에요?”이지원의 눈에 차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천한 년!'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태가 어떤지 보러 온 거예요.”박민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그렇다면 고맙네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이지원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박민정이 아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혹시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부담 갖지 말고.”이지원은 친절한 척 덧붙였다.“우리 보스가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일은 없으니 그만 꺼져요!”진서연
“민정아, 엄마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줄래? 날 욕해도, 화를 내도 괜찮으니 제발 그렇게 차갑게만 하지 말아줘, 응?”정수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저는 화낼 이유가 없어요.”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과거에는 기억이 있었기에 정수미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냉대를 받을 때마다 깊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그녀는 눈앞의 정수미를 낯선 사람처럼 느꼈고 그래서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정수미는 목이 칼로 베인 듯한 고통을 느꼈다.“모두 내 잘못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어떻게 해야 박민정에게 사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정수미는 눈을 떨구고 등을 살짝 구부린 채 방을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진서연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이를 다치게 했다니, 무슨 소리죠?”박민정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진서연에게 설명했고 진서연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윤소현이 어떻게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죠? 제 생각엔 일부러 자기 아이를 다치게 한 게 틀림없어요.”그녀는 단 한마디로 진실을 꿰뚫었지만 박민정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설마. 그래도 자기 친딸인데.”“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진서연은 단호히 말한 뒤 박민정을 위로했다.“보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래.”하지만 진서연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여러 차례 그녀에게 당부를 했다.박민정은 기억을 잃은 후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억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었다.그녀는 오늘도 진서연과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점심시간, 박민정은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잠깐 밖에 나가겠다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
가정부가 나가고 나자 정수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지?”정수미는 깊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윤소현을 입양했을까?비서도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의 복수심이 너무 강해요. 자신의 딸마저 이용하다니요.”비서는 윤소현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정수미가 박민정, 그녀의 친딸을 미워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수미는 스스로 중얼거리며 비서에게 묻는 듯 자신에게 묻는 듯한 말을 했다.비서는 사적인 가정사에 대해 조언할 수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오랜 고민 끝에 정수미는 윤소현의 방으로 향했다.윤소현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고열까지 나고 있는데도 이렇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소현아!”정수미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깨우자 윤소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길래 제 방에 오신 거예요? 쉬셔야 할 시간 아니에요?”정수미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왔다.”윤소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무슨 얘긴데 내일 하면 안 돼요?”“다혜와 민정이에 대한 얘기야.”정수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그 말을 듣자 윤소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엄마, 박민정한테 경고할 거죠?”흥분한 그녀의 말투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아니, 너한테 경고하려고 왔어.”정수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은 멍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정수미는 가정부가 털어놓은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고 윤소현은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엄마, 그 여자의 헛소리를 믿지 마세요! 다혜의 친엄마인 제가 어떻게 제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처음엔 나도 네 말을 믿었다. 네가 민정이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네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민정이를 경찰에 넘긴 거였어. 그런데 네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 실망이야.”정수미는 깊이 한숨을
비서는 정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둘째 아가씨는 아이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사람 같지 않아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래. 하지만 소현이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그때 민정이를 도왔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어떤 난리를 칠지 몰랐겠지.”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혜 일은 빨리 조사해 봐.”“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했다.정수미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외손녀를 바라보며 다짐했다.“다혜야, 걱정하지 마. 외할머니가 꼭 널 다치게 한 사람을 찾아낼게.”그녀는 윤소현을 편드는 것도, 박민정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윤소현을 달래며 조용히 진실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밝혀내기 위해.밤이 깊었을 때, 정수미는 아이를 돌보던 가정부를 불렀다.“자, 말해 봐. 오늘 왜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너한테 뭔가를 줬니?”가정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정말로 사모님께서 그랬어요.”정수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아직도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병원에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민정이가 다혜를 안은 뒤로 다혜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어떻게 그게 민정이가 했다는 걸로 바뀐 거지? 네가 직접 민정이가 아이를 해치는 걸 봤어?”가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얼버무렸다.“민정 아가씨가 다혜를 때리는 걸 희미하게 본 것 같아요...”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희미하게 봤다고? 그럼 왜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지?”가정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 그게 제가 혹시 잘못 본 걸까 봐...”그녀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정수미는 확신했다. 이건 명백히 거짓말이었다.“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면 용서해 줄 테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의 위협에 가정부는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