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박민정은 이미 해운 별장으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유남준이 박윤우를 빼앗아 가려는 줄 알고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박윤우의 기분은 박민정 못지않게 나빴다.그 역시 조급한 모습으로 유남준 곁에 서 있다.‘아들인 내가 있는데 그러고 싶으실까?’“아빠, 경은 이모한테 이렇게 일찍 씻으라고 하신 거예요? 이따가 같이 자려는 건 아니죠?”그 말에 유남준은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고 말았다.하지만 대답하지 않고 도려 물었다.“대체 그런 건 어디에서 배운 거야?”어린 나이에 좋은 건 배우지 않고 일찍 어른들 세계에 눈을 떴으니 말이다.박윤우는 텔레비전에서 본 것만 알고 화면이 어두워지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잘 모른다.“배울 필요 없어요. 형이 그랬는데, 이 나이가 되면 다 알게 된다고 했었어요.유남준은 안색이 더더욱 어두워졌다.‘박민정은 대체 집에서 애들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서다희 입에서 알다시피 큰아들 박예찬은 선생님 따라 해외로 여행을 가서 당장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다.박예찬은 돌아오고 나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김씨 가문에서 보내고 김훈은 이미 박예찬을 증손자로 맞이했다고 했다.“어린아이들이 알 건 아니야. 밥 먹고 집으로 돌아가.”유남준이 차갑게 말했다.박윤우는 가만히 듣기는 했지만 달갑지 않았다.“그래서 같이 자냐고요.”텔레비전에서는 일단 아이를 속여서 밖으로 보내고 나서 나쁜 일을 했었기 때문이다.유남준이 대답하려고 할 때 추경은이 샤워 가운을 입고 나왔다.“남준 오빠, 욕실에 샴푸가 없던데 오빠 샴푸 써도 돼?”박윤우는 바로 추경은을 바라보았는데,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가운만 걸치고 나온 그 몸매는 무척이나 이기적이었다.흔히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악녀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유남준의 얼굴에 한기가 가득했다.“없으면 쓰지 마.”‘하여간 여자들이란 귀찮아.’추씨 가문 어르신 추재훈만 아니었더라면 유남준은 이미 추경은을 내쫓아 버렸을 것이다.추경은은 본래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와 유남
대략 8년 전, 박민정과 유남준이 결혼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였다.고영란이 추경은을 데리고 두원 별장으로 왔었는데, 그때의 추경은은 흠 하나 없이 맑았고 말솜씨도 제법 뛰어난 소녀였다.모든 것에 낯설어하고 있는 박민정을 보고서 추경은은 먼저 선뜻 다가가 이야기도 하고 했었다.박민정은 지금껏 추경은이 했었던 그 역겨운 말을 기억하고 있다.두 사람만 있을 때 했었던 말을.“새언니, 전에 남준 오빠가 만났던 그 새언니가 훨씬 더 예쁜 것 같아요.”“우리 남준 오빠가 그 새언니한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모르죠? 새언니네 조건이 좀 그러해서 두 사람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결혼했을지도 몰라요.”“전에 커플 프로필 사진까지 찍고 그랬었는데...”추경은은 쉴 새 없이 중얼거렸고 17, 18살 되는 소녀가 아니라 아직 철이 들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박민정은 그때 유남준을 끔찍이 사랑하여 추경은 입에서 유남준과 이진원의 좋았던 순간들 그리고 자꾸 자기와 이지원을 비교하는 말에 마음이 언짢았다.하지만 결국 끝까지 참을 수밖에 없었다.가기 전까지 추경은은 계속 성숙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했었다.“새언니, 제가 조금 전에 한 말들은 우리 남준 오빠한테 알려주지 마세요. 남준 오빠 엄청 화 낼 거예요. 지원 언니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 남준 오빠가 싫어하거든요.”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추악하기 그지없는 추경은이었다.박민정은 평생 그녀와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내왔는데, 또 이렇게 나타나게 되어 순간 짜증이 났다.하지만 지금의 박민정 역시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추경은은 자기가 이곳에서 샤워한 것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박민정의 모습을 보고서 바로 쪼르르 달려가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새언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박민정은 바로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가식적인 그 모습을 받아주지 않았다.아예 무시해 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유남준에게 물었다.“윤우는 왜 데리고 온 거예요?”유남준이 지금 추경은이랑 어떤 사이인지 전
추경은의 예쁜 얼굴은 순간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윤우야, 함부로 말하지 마. 이모 조금 전에 깨끗하게 씻었어.”“우리 형이 더러운 것 만지고 나면 아무리 씻어도 손에 남아 있어서 고온으로 소독하고 살균해야 한다고 했어요.”추경은은 그 말에 의아하기만 했다.“고온으로 어떻게 소독하고 살균한다는 말이야?”“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기름통에 손을 넣고 한번 튀겨야 하지 않겠어요?”“...”박민정은 늘 추경은이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겨왔었다.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윤우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박윤우는 조금 전에 추경은이 화장실에서 청소한 일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듣자마자 박민정은 자기 아들이 일부러 추경은을 놀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박윤우는 2살이 거의 되었을 때부터 스스로 엉덩이를 닦았고 위생에도 엄청 신경 썼다.바지에 묻히고 다니는 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그렇게 행동한 박윤우의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아들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기로 했다.“그랬구나.”“경은 씨, 좀 더 씻어야 할 거예요.”추경은은 조금 전 욕실에서 샤워할 때 손에 껍질이 일어날 정도로 씻었다.지금 그녀는 멋쩍고 화가 난 상황이다.“네, 알아요. 수도 없이 씻었어요.”더 이상 유남준에게 밥을 덜어주기도 민망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실은 그녀가 직접 나서서 할 필요도 없었고 부하들이 음식을 가져올 때 책임지는 아주머니께서 먹기 좋게 모두 세팅하여 보내오곤 한다.즉, 추경은의 조금 전 모든 행동은 부질없었다는 것이다.“엄마, 아빠 밥 드시는 거 좀 도와줘. 혼자 드시기에 좀 힘드실 거야.”박윤우는 추경은이 나서서 또 ‘공로’를 가로챌까 봐 박민정을 재촉하기 시작했다.유남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박민정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다.하지만 박민정은 여전히 그러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윤우야, 아빠 지금 앞이 안 보이시는 것뿐이지
과일을 먹으면서 박윤우와 책을 보고 있던 박민정은 추경은이 갑자기 화제를 자기 쪽으로 돌리자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남준 씨한테 내가 뭘 말했다고?’그 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간 건 말할 것도 없고 추경은이 했었던 그 말들을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유남준에게 말한다고 한들 절대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쓴다며 쓴소리를 들을 게 그때는 분명했으니 말이다.“무슨 말을 했었다는 거죠?”박민정은 금시초문인 것처럼 덤덤하게 물었다.생각지도 못한 박민정의 반응에 추경은은 목이 메고 만다.“그...”유남준 앞에서 그때 했었던 그 말들을 하려고 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이때 박민정은 하품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참 이상하네요. 경은 씨도 자기가 했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저한테 남준 씨한테 말한 거 아니냐고 따지는 거 참 웃기지 않아요?”“적어도 어느 방면에 관한 내용인지 힌트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 제가 말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기억할 거 아니에요.”추경은은 순간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양쪽에 늘어진 손을 꼭 움켜잡고서 다시 입을 열기는 했지만.“새언니, 저 그냥 여기 있게 해주세요. 언니도 오빠도 제가 옆에서 잘 챙겨 드릴게요.”“참, 윤우까지 제가 알아서 다들 엄청 잘 챙겨 드릴게요. 절대 그 어느 하인보다 뒤떨어지지 않게 잘할게요.”박민정은 하인이 되고 싶다며 하인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며 자기 자신을 선전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이 일에 관해서는 남준 씨한테 물어보시죠. 저도 우리 윤우도 하인 필요 없거든요.”박윤우도 바로 말을 가로채버렸다.“맞아요. 경은 이모, 저 필요 없어요.”추경은은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는데, 박민정이 다시 문제를 유남준에게 돌릴 줄은 몰랐다.박민정에게 부탁하면 자기 뜻을 받아줄 줄 알았는데 말이다.“남준 오빠, 나 여기 있게 할 거지?”추경은은 울먹이며 덧붙였다.“나, 이대로 돌아가면 할아버지한테
박윤우는 어리둥절한 채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유남준은 손 세정제를 이리저리 흩뿌려 놓으면서 손을 씻고 있었다.박민정은 엉망이 된 세면대를 닦으며 불평을 쏟아냈다.“서 비서님에게 먼저 물건들을 어떻게 쓰는지, 어디에 두는지 설명해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박민정은 유남준이 중요한 일이 있어 자기를 부른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자존심을 세우느라 서다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달라고 하지 않은 것이었다.그래서 그는 지금 손 세정제나 클렌징폼, 그리고 다른 물품들이 어디 있는지 모른 채 혼자 더듬거리고 있었다.유남준은 어젯밤에 세면대의 물건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모자라 지금은 뻔뻔하게 박민정을 불러 수습하게 만들었다.“왜 경은 씨보고 대신 정리해 달라고 하지 않아요?”박민정의 불평이 유남준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과거에는 시키는 대로 얌전히 일하던 박민정이 이제는 자기를 나무라기 시작했으니 유남준은 믿기지 않았다.“박민정, 그동안 내가 너무 잘해줬지?”“어떻게 생각해요?”박민정은 마지막 물건을 정리하고 유남준의 손을 잡았다.유남준은 본능적으로 손을 뺐고 눈에는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민정은 더욱 화가 났다.“남준 씨가 손 내밀어 만져봐야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알 거 아니에요?”유남준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그의 마지못한 태도에 박민정은 그를 골탕 먹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박민정은 유남준의 손을 잡는 대신 방금 씻고 아직 마르지 않은 손을 그의 얼굴에 철썩 내리쳤다.유남준은 즉시 화를 냈다.“뭐 하는 거야?”“별거 아니에요. 남준 씨 얼굴이 건조해 보여서 수분을 좀 보충해 주려고요.”말을 마친 후 박민정은 다른 손을 내밀어 유남준의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이상하게도 유남준은 평소 얼굴 관리를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의 얼굴은 매우 희고 피부도 부드러웠다.모공도 거의 보이지 않아 가까이서 보면 마치 그림 속의 캐릭터 같았다.그래서인지 어떤
박민정은 유남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윤우를 내 곁에서 데려가려고 하는 거예요?”조금 전까지 묻지 않았다고 해서 그 생각이 잊혀진 건 아니었다.유남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딜 봐서 내가 윤우를 데려가려 한다고 생각한 거야?”박민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내가 오해한 건가?’“그럼 내일 윤우를 데리고 돌아갈게요.”“맘대로 해.”유남준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런 그의 태도를 보고 박민정은 그가 윤우를 뺏으려 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다.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아래층으로 가서 윤우를 데려와 객실에서 함께 자려고 했다.그때 유남준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앞으로 애한테 엉뚱한 걸 가르치지 마.”“내가 엉뚱한 걸 가르쳤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박민정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유남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윤우와 예찬이는 너무 조숙해. 어린애들이 가지지 않아도 될 생각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이상한 생각들보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걸 가르치는 게 더 중요해.”엉덩이를 닦는 것도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니.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분명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유남준은 가능한 한 말을 돌려서 표현했기 때문에 박민정은 어리둥절했다.지금 박민정은 피곤해 자고 싶어졌기에 대충 대답했다.“알았어요.”그리고 박민정은 윤우를 찾으러 갔다.윤우는 혼자 거실에서 기다리다가 엄마와 아빠가 계속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박민정은 곤히 잠든 윤우를 보고 조심스럽게 그를 안아 침실로 데려갔다.박윤우는 원래 깔끔한 걸 좋아해서 추경은을 괴롭히기 전에 이미 몸을 깨끗이 씻어두었다.그래서 박민정은 그를 씻겨줄 필요가 없었다.박민정은 간단히 씻은 후 그를 안고 곧바로 잠들었다.다음 날.알람 소리에 박민정 모자가 깨어났다.박윤우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엄마...”아직 잠이 덜 깬 상태였다.“엄마가 왜 나랑 같이 자고 있어?”이 말을 하자마자,
박윤우는 흠칫했다.‘경은 이모가 간 줄 알았는데 지금 문 앞에서 불쌍한 척 동정을 사려고 해?’유남준은 표정이 바뀌지 않은 채로 말했다.“그냥 내버려둬요.”“알겠습니다.”가정부는 자리를 떴다.박민정도 추경은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릴 줄은 몰랐다.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아침 식사를 마저 하고 별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아침을 먹은 후, 박민정은 윤우를 데리고 유치원으로 향했다.별장 밖에는 빗방울이 가볍게 내리고 있었고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이따금 더 큰 비가 내릴 듯한 분위기였다.가정부가 우산을 들어줬는데 박민정은 바로 문 앞에서 비에 젖어 초라해진 추경은을 발견했다.추경은도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녀는 온몸이 다 젖어 있었다.지금은 4월이라 비가 오면 겨울 못지않은 추위를 느낄 수 있었다.추경은은 추워서 입술이 새파래졌는데 박민정을 보자 구세주를 찾은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새언니, 제발 저를 여기에 있게 해주세요. 저는 뭐든지 할게요. 여기 떠나면 갈 곳이 없어요. 제가 이대로 돌아가면 할아버지는 제 다리를 부러뜨릴 거예요.”박민정의 맑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윤우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가자.”추경은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박민정이 도와주지 않자 무릎 꿇은 채로 그녀에게 다가가고는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새언니, 정말 제가 죽는 걸 눈 뜨고 지켜보실 건가요? 무릎 꿇고 이렇게 빌게요. 제발 여기에 있게 해주세요.”추경은은 마치 박민정이 그녀를 여기에 있게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애원했다.분명 그녀를 여기서 쫓아내려고 한 사람은 유남준인데 추경은은 마치 박민정이 잘못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이를 보고 있던 가정부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사모님이 너무 속이 좁다고 생각했다.사촌동생이 와서 도와주겠다는 데도 허락하지 않는다니, 집이 가난하거나 지낼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이거 놔요!”박민정은 이제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추경은은 그녀를
추경은 천천히 박민정의 바지에서 손을 놓으며 말했다.“그럼 새언니가 대신 오빠에게 전해주세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경은 씨 머리가 이상한 거예요? 아니면 내 머리가 이상한 거예요? 아까는 나한테 여기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러라고 했죠. 그런데 이제는 남준 씨에게 전해달라고요? 그러면 처음부터 남준 씨에게 여기 머물 수 있게 부탁하지 그랬어요?”추경은은 박민정이 이렇게 말 잘하는 줄은 몰랐기에 잠시 당황했다.가정부들도 이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 보였다.박민정이 속이 좁은 사람이라서 외면한 게 아니라 추경은의 의도가 너무 불순해 보였기 때문이었다.“경은 씨를 여기에 머물게 못 하게 한 건 남준 씨인데 마치 내가 경은 씨를 못 머물게 하는 것처럼 행동하네요. 내 말이 효과가 있었다면 경은 씨는 나더러 다시 남준 씨에게 전해달라고 하지도 않았겠죠?”박민정이 덧붙였다.추경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새언니, 저를 오해했네요.”“그만해요, 난 그 수작에 넘어가지 않아요. 나도 할 일이 많아서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을 거예요.”박민정이 말을 마친 후 가정부의 우산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운전기사는 그녀를 두원 별장으로 데려갔다.박민정은 최근 새 앨범 작업과 에리와의 협업으로 바빴기 때문에 추경은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러나 추경은은 여전히 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떠나지 않으려 했다.그녀는 유남준이 그렇게 냉정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곧 큰 비가 쏟아져 내렸고 굵은 빗방울이 그녀의 몸에 내리쳤다.추경은은 추위에 몸을 떨었다.서다희가 유남준을 찾아왔을 때, 추경은이 문 앞에서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추경은 씨 아닌가요?”서다희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추경은은 달콤한 외모와 활발한 성격 덕에 사람과의 교제에 능했다.예전에 유남준의 집에 올 때마다 추경은은 항상 서다희를 '다희 오빠'라고 불렀다.추경은은 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다희 오빠...”서다희는 바로
방 안에서는 이미 유성혁이 상의를 벗은 채 박민정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그때, 최현아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여보!”“뭐야?” 유성혁은 갑작스러운 방해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유남준이 돌아왔어요.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까 얼른 옷부터 입어요!” 최현아가 다급하게 외쳤다.유성혁은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어떡하지? 어떡하지? 유남준이 내가 박민정과 함께 있는 걸 알게 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에요. 얼른 옷 다 입고 숨어요. 여기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최현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유성혁은 허겁지겁 옷을 걸쳐 입으며 당부했다.“꼭 나랑 관련 없는 일처럼 해줘. 아직 아무것도 못 했다고!”“알았어.” 최현아는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를 방에서 밀어내고 나서야 최현아는 박민정 쪽으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동서.” 그녀는 살며시 불렀다.박민정은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최현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유남준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기를.그녀는 박민정의 몸을 가볍게 감싸 이불을 덮어준 후,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잠시 후, 약효가 다소 풀렸는지 박민정은 흐릿한 눈빛으로 천천히 눈을 떴는데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웠다.그때였다.쿵!문이 거칠게 열리며 유남준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민정이는 어디 있어요?”최현아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을 막아섰다.“남준 씨! 갑자기 웬일이에요? 마침 남준 씨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요.”유남준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민정이는요?”“아마 술을 잘 못 마셔서 그런가 봐요. 지금 쉬고 있어요. 원래 남준 씨 방으로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전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최현아가 태연한 척 대답했다.분명 박민정은 오늘 칵테일을 한 모금 정도 마셨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냥 음료나
박민정은 홀로 홀 대각에 앉아 있다가 어딘가 불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이 감각... 낯설지 않았다.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현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동서, 벌써 가려고?”“네.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가볼게요.”최현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내가 바래다줄까? 어차피 나도 딱히 할 일 없는데.”“아니에요, 괜찮아요.”박민정이 정중히 거절하자 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물었다.“그런데 남준 씨는? 어디 갔어?”“일이 있어서 나갔어요.”그 말을 듣자 최현아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그래? 그럼 다행이네. 내가 데려다줄게, 길을 잃으면 곤란하잖아.”“괜찮아요. 길은 기억하고 있어요.”설령 잊는다 해도 하인들에게 물으면 될 일이었다.박민정은 가볍게 웃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걸음을 옮길수록 몸이 이상했는데 발이 휘청이고 머리가 묘하게 어지러웠다.최현아는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다가왔다. 이대로 그녀를 그냥 보낼 리 없었으니까.“괜히 사양하지 마.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최현아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지금은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하지만 점점 시야가 흐릿해졌다.혹시 몸에 다시 문제가 생긴 걸까? 머릿속이 어지럽고 다리가 힘없이 풀렸다.마지막 남은 의식으로 박민정은 힘겹게 입을 뗐다.“...구급... 구급차를 불러줘요...”그러나 그녀가 완전히 쓰러지기 직전, 최현아가 그녀를 붙잡았는데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구급차? 정말 순진하기도 하지.”최현아는 비웃듯 말하며 박민정을 외딴 곳으로 끌고 갔다. 곧 어둠 속에서 몇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최현아가 지시한 대로 움직였다.박민정은 서쪽에 있는 빈집으로 실려 갔다.최현아는 남자들을 향해 싸늘하게 경고했다.“오늘 일
박민정이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기색이 어린 최현아의 시선과 마주쳤다.“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저쪽에서 사촌 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같이 갈래?”최현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요, 전 혼자가 좋아서요.”박민정은 조용히 거절했다.최현아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었지만 그 눈빛은 싸늘했다.“그래? 알겠어.”박민정은 그녀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최현아는 곁에 앉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최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나도 시끄러운 분위기는 별로야. 어차피 동서도 혼자고, 나도 혼잔데, 같이 있어도 괜찮잖아?”이렇게 나오니 박민정은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게다가 여기는 유씨 가문 안이었기에 자신이 뭐라고 그녀를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박민정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유씨 가문의 젊은 친척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 사이, 최현아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슬쩍 박민정의 잔을 힐끔거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교활한 빛이 스쳤고 이내 일부러 놀란 척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동서, 이것 좀 봐.”그녀가 화면을 내밀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화면에는 에릭에 대한 연예 뉴스가 떠 있었다.박민정이 그 기사를 읽는 사이, 최현아는 잽싸게 손을 뻗어 박민정의 잔을 건드렸다. 긴장한 듯한 그녀의 손길이 빠르게 움직였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에릭 씨, 동서네 회사 직원 맞지? 설마 남자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가십 뉴스잖아요. 아마 거짓일걸요.”박민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에릭이 그런 취향이라면 연지석과 그렇게 티격태격할 리가 없었다. 연지석처럼 잘생긴 남자가 앞에 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건 정말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였다.“그렇지? 요즘 매체들은 자극적인 소문을 너무 많이 퍼뜨려.”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문득 박민정에게 물었다.“오늘 밤엔 안 돌아가겠네?”
“뭐?”유성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고 곧이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비웃었다.“그 여자, 가식 떨기는 끝내주더니. 진짜 정절을 지키는 여자인 줄 알았잖아. 그리고 유남준, 그렇게 대단하다면서? 어째서 자기 동생 하나 제대로 손보지도 못하는 거야?”유성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최현아는 그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는데 그가 무슨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와서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여보, 당신이 예전부터 그 여자를 원했던 거, 난 다 알고 있어요. 내가 도와줄게요.”유성혁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당신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당신밖에 없어.”최현아는 그가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모습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당신이 날 사랑하는 건 알지만 동시에 여전히 민정 씨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난 다른 여자들처럼 질투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긴 듯했다.유성혁은 원래부터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순간적으로 그의 흥미가 자극되었다.“당신 정말 최고야. 하지만 박민정은 너무 고고한 척하는 년이잖아. 절대 동의하지 않을걸? 그리고 유남준이 알면 난 팔다리가 부러질 거라고.”최현아는 그가 결국 겁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여보, 당신은 참 어리석어요. 민정 씨가 거절하는 건 당신이 어디 가서 이 사실을 떠벌릴까 봐 그런 거죠. 내가 잘 설득하면 오늘 밤엔 당신 것이 될 거예요.”“정말이야?” 유성혁의 눈빛이 반짝였다.“당연하죠. 그러니까 깨끗하게 씻고 기다리고 있어요.” 최현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유성혁은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좋아! 약속한 거다!”그는 들뜬 표정으로 손을 비비며 자리를 떠났다.최현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박민정은 유남준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마치 새롭게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남준 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앞으로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하지 마.”둘은 부부였으나 박민정은 늘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이 말에 박민정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깜빡했어요.”“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마.” 유남준이 덧붙이자 박민정은 말문이 막혔고 무슨 말을 해도 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알겠어요.”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그 모습을 본 유남준은 다시금 마음이 아려왔다. “가자, 좀 쉬어야지.”“네.”박민정은 그의 뒤를 따라 두 사람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그곳에 도착하자 유남준은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고 집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이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던 박민정은 소파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맞다, 아이들은요?”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아이들은 본가에서 안전해. 게다가 오늘 가문의 여러 친척들도 모일 건데 아이들이 그 사람들과 친해지면 나중에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리를 비우는 게 실례가 되진 않을까요?”“아니.”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어.”그의 말에는 어떠한 허세도 섞여 있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의 능력을 믿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어젯밤 잠을 설친 탓인지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은 가끔씩 시선을 들어 그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예전에는 일할 때 누구도 그의 집중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박민정이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이었다.그가 얼마나 그녀를 바라보고
“아버지, 드세요. 이건 제가 직접 정성 들여 고운 탕이에요. 백세를 넘긴 한의학자의 비법을 배워 만든 거라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꽤 걸렸어요. 드시면 장수하실 거예요.”유석진이 아부하듯 말하자 유명훈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이냐?”“그럼요. 제가 아버지를 속이겠습니까? 제가 해외에서 돌아온 이유도 아버지를 잘 모시고 장수하시게 하려는 거죠.”유석진은 유남준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버지와 달리, 유명훈의 환심을 사는 데 능숙했다.그래서인지 유명훈은 늘 그쪽을 편애했다.“석진아, 우리 집에서는 네가 가장 효심이 깊구나.” 유명훈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물론 이 나이가 되면 누구나 늙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하지만 유명훈은 늙고 싶지 않았고 죽음은 더더욱 두려웠다. 그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에서 수혈을 받기까지 했다.“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동생과 아이들도 다 효심이 깊어요.” 유석진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유남준에게 보냈다. “그렇지, 남준아?”유남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말로 유명훈도 그의 성격을 아는 터라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다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히 있어라.”그렇게 말했지만 모인 이들은 각자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유명훈은 문득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민정아.”“네, 할아버지.” 박민정이 공손하게 대답하자 유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불렀다.이제 모두의 시선이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아, 넌 이제 우리 유씨 가문의 중요한 일원이야. 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냐?”“많이 나아졌어요.” 박민정은 조용히 대답했다.“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완전히 회복되면 가정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회사 일은 남준이에게 맡기고 말이다.”유명훈은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그가 유남준과 박민정의 결혼을 허락한 것도 당시 박민정의 가문이 유씨
박민정은 그에게 안긴 채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고 가슴 한편이 알 수 없는 먹먹함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어 유남준의 등을 두드렸다. “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자요.” 유남준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박민정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품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풀어냈다.이제는 그녀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발코니로 나가 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새벽 여섯 시가 되자 유남준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에게 덮여 있는 담요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있었다.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가 돌아왔을 때 박민정이 곁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간 걸까?혹시 꿈을 꾼 걸까 싶어 그는 2층 방으로 올라가 욕실에서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잠을 청했다.박민정은 그의 움직임을 들었지만 상태가 괜찮아 보이자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아침 여덟 시, 유남준은 평소처럼 정시에 일어났고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아한 태도로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는데 박민정은 그의 맞은편에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다가 놀라고 말았다.어젯밤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오늘은 마치 전혀 취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였다.유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하고는 눈을 들어 그녀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왜?”“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박민정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식사를 이어갔다.두 아이도 식탁 위의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결국 참지 못한 박윤우가 작은 목소리로 여름 박예찬에게 물었다. “형, 나 왜 집이 이상한 것 같지?”“조용히 하고 만두나 먹어.”“아, 응.”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가족들은 청명을 맞아 조상을 기리기 위해 본가로 향했다.차가 본가 대문 앞에 멈추자마자 고영란이 반갑게 달려 나왔다. “윤우야, 예찬아, 어서 할머니한테 오렴.”유남우도 그녀 옆에 서서 서슴없이 박민정을
유남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택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했는데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박민정은 다가가기가 너무 부끄러워 멀리서 그 여자 형체랑 똑같이 제작된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마음에 들어요? 저는 상관없긴 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이런 기괴한 물건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민정아,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아?”그의 말에 박민정은 깜짝 놀랐다.“왜요?”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구매한 물건이었다.“오해하지 말아요. 사람마다 생리적 욕구가 있기 마련이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희는 부부잖아요. 그렇죠?”유남준은 그녀가 자기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역시나 박민정은 그가 왜 화 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라가며 다시 설명했다.“원래는 다른 여자를 찾아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저희는 현재 부부잖아요. 또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서로 사랑했다고 해서 그렇게 처리하는 건 아닌 것 같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머리가 아파서 소파에 털썩하고 앉았다.“알겠으니까 그만 말해.”‘날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지?’‘그저 성욕을 못 참아서 안달 난 짐승으로 생각하나?’박민정은 그제야 입을 꾹 닫았는데 순간 거실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진 것 같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박민정이 그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자러 갈게요. 내일 옛 저택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그러나 유남준은 여전히 토라진 말투로 답했다.“응. 마음대로 해.”그러나 박민정은 그가 화 났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기쁜 마음으로 돌아섰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멍한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그냥 이대로 가는 거야?”그리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그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제우스 클럽.방성원과 유남준은 술을 마시며
그리고 침대에 던져지고 나서야 박민정은 이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재빨리 이불을 몸에 둘렀다.“오지 말아요!”그러나 유남준의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민정아, 나도 남자야.”시간도 많이 흘렀고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매일 그냥 잠만 자려고 하자니 그도 나름 괴로웠다.그리고 이 상태로 두 사람이 계속 지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병들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유남준은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그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하여 다 포기한 채 가만히 누워 온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엄마.”박예찬과 박윤우가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박민정을 불렀다.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진서연이랑 설인아, 그리고 민수아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두 아이도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있는 힘껏 유남준을 밀쳐냈다.하여 오늘에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멈춰야 했다.박민정이 황급히 방에서 나오니 두 아이가 마침 문 앞에 서 있었다.“엄마, 자고 있었어? 왜 얼굴이 빨개?”박윤우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게...”겨우 설명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유남준이 갑자기 방 안에서 나오더니 한껏 어두운 얼굴로 두 아이에게 물었다.“왜 벌써 왔어?”“추석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어요.”박예찬은 뭔가 눈치챈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러나 박윤우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엄마, 저 쓰레기 아빠랑 같이 잔 거야?”“아니.”박민정은 단번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저 찾을 물건이 있어서.”“무슨 물건인데?”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질문 공세에 박민정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가 겨우 답했다.“책.”“무슨 책? 나도 같이 찾아볼게.”“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