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표정이 어두워졌다.“너보고 남으라고 한 건 박민정이니 두원 별장에 가서 박민정 도와.”박민정이 함부로 그의 일에 참견한 게 유남준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추경은은 멍해 있더니 저도 모르게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말을 내뱉기도 전에 박민정과 함께 지내면 유남준과도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말을 삼켰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알겠어. 지금 바로 두원 별장에 갈게.”추경은 이 모든 게 이렇게 쉽게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다른 한편.박민정은 유남준이 그 귀찮은 일을 다시 자신에게 떠넘겼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전날 집에 돌아온 후 수정한 곡을 챙겨 출근했다.추경은이 두원 별장에 도착했을 때 박민정은 없었다.두원 별장의 가정부들은 추경은을 알지 못했다.가정부는 박윤우에게 추경은을 아는지 물었지만 박윤우는 바로 부정하며 대답했다.“그게 뭐예요? 먹는 거예요?”가정부는 그 말을 듣고 문밖 경비에게 말했다.“대표님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이거나 대표님을 유혹하려는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내쫓아요.”가정부는 항상 박윤우와 박민정의 편이었다.그녀 역시 여자로서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유남준은 항상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잘생긴 데다가 돈이 많았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하지만 집까지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었다.“이모, 잘하셨어요! 엄마가 돌아오면 이 얘기 전할게요. 엄마도 이모를 칭찬할 거예요.”박윤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칭찬은 필요 없고 월급이나 올려주면 돼.”가정부의 소망은 단순했다.박윤우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그렇게 전할게요.”“그래.”가정부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그녀는 박윤우를 돌보는 좋은 일자리를 찾은 후 지난 1년 동안 모은 월급으로 진주에 집 한 채의 계약금을 낼 수 있게 되었다.진주에서 가장 저렴한 지역의 집도 평당 5, 600만 원은 했다.그녀가 지금 받는 월
추경은 또 다른 걸 물었다.그 사이 경비원은 그녀에게 옷을 찾아 걸쳐 주었다.추경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오빠 진짜 좋은 사람이네요.”경비는 얼굴이 빨개지며 쑥스러워했다.추경은은 또 말했다.“진짜예요, 거짓말이 아니라고요. 앞으로 저는 이곳에 살 거예요. 잘 부탁드려요.”“정말요? 그럼 잘됐네요. 경은 씨,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도와드릴게요.”추경은은 자신의 외모와 말솜씨로 경비원을 단숨에 매료시켰다.오늘.박민정과 에리가 일을 마쳤을 때 시간은 이미 늦었다.박민정은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에리는 그녀를 붙잡으며 무조건 데려다주겠다고 했다.“민정 씨, 곡 작업에 대해 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이번엔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걱정 마. 밖은 확인했어. 기자들 없었어.”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어차피 둘은 단순히 곡 얘기를 할 것이기 때문에 선을 넘은 것도 아니었다.두원 별장에 도착했을 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에리는 직접 내려 박민정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고마워.”박민정은 손에 곡 작업을 위한 여러 가지 자료와 가방을 들고 있었기에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둘이 입구로 걸어가고 있을 때 추경은이 경비실에서 나왔다.그녀는 경비원의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박민정과 에리가 함께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새언니!”추경은이 큰 목소리로 박민정을 불렀다.박민정은 흠칫 놀랐다.‘추경은이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추경은은 일부러 우산을 쓰지 않고 박민정과 에리 쪽으로 달려왔다.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추경은은 앞에 있는 남자 연예인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어머, 에리 씨 아니에요?”에리는 눈살을 찌푸렸다.그가 귀국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죄송합니다. 잘못 보셨네요.”그는 마스크를 쓰고는 우산을 박민정에게 건넸다.“이만 가볼게.”“그래.”박민정도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에리
“새언니, 고마워요.”추경은은 순간 미소를 짓고는 박민정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외투를 경비원에게 돌려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이렇게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는 상류층의 아가씨는 상류 사회든 일반 대중이든 누구에게나 좋은 첫인상을 남기곤 했다.추경은 그렇게 박민정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조금씩 자기편으로 만들고 있었다.두원 별장에 도착한 추경은은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새언니, 저 잠깐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네.”박윤우와 가정부는 깜짝 놀랐다.가정부는 이 사람이 진짜 사장님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자신이 하루 종일 못 들어오게 했기 때문에 나중에 보복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박윤우는 엄마가 이렇게 위험한 사람을 집으로 들인 것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었다.추경은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박윤우에게 인사를 한 뒤 주방으로 갔다.“아저씨, 제가 도와드릴까요? 예전에 유명 셰프에게 요리 좀 배운 적이 있어요.”추경은은 주방의 메인 셰프에게 말을 걸었다.셰프는 두 명의 보조를 데리고 있었다. 두 청년은 추경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추경은 이런 분위기를 즐겼다.메인 셰프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한 청년을 도와 채소를 씻기 시작했다.박윤우는 이 상황을 보고 박민정의 손을 잡아당겼다.“엄마, 왜 저 사람을 여기로 데려왔어요?”박민정은 윤우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해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경은 이모가 갈 데가 없어서 잠시 여기서 지내기로 했어.”박윤우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엄마는 너무 순진하네. 추경은이 아빠를 뺏으려고 왔다는 걸 모르는 걸까?’박민정은 추경은의 속셈을 모르는 게 아니라 신경 쓰지 않은 것이었다.아직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여우처럼 약은 추경은은 나중에 천천히 처리해도 되었다.식사 준비를 다 한 추경은은 미소를 지으며 가정부들을 도와 음식을 날랐고, 또 박윤우를 돌보는 가정부에게도 인사를 건넸다.“윤우를 돌봐주신 분이시죠? 윤우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 다 선생님 덕분이에
추경은은 박민정의 질문에 대해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임산부는 배고프면 안 되는 건가요?”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며 사과했다.“죄송해요, 잘 몰랐어요.”박민정은 그녀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계속 식사를 했다.고영란이 올지, 안 올지는 그녀의 마음이었다.하지만 얼마 전에 진행했던 태아 검사는 결과가 조금 안 좋았다.의사도 규칙적인 식사가 필요하다고 경고했었다. 굶으면 태아 발육이 멈출 수 있으니 말이다.게다가 박민정은 원래도 위가 좋지 않았다.박윤우는 추경은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엄마, 경은 이모 나무라지 마세요.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모를 거 아니에요.”그는 추경은을 바라보며 또 말했다.“경은 이모, 혹시 결혼할 사람이 없어요?”추경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뭐라고?”“서른 넘으셨죠? 엄마보다 더 나이 많아 보이는데.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결혼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죠?”추경은은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녀는 겨우 화를 참으며 말했다.“윤우야, 이모는 이제 스물네 살이야. 너희 엄마보다 몇 살 어리다고.”“네?”윤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런데 엄마보다 더 나이 많아 보이는데요? 혹시 관리를 잘 안 해서 그런 건가요? 엄마한테 가르쳐달라고 해요. TV에서 자주 그러잖아요. 세상에 못생긴 여자는 없고 게으른 여자만 있다고. 관리 좀 해요. 결혼 못 하는 상황을 피하는 게 좋겠죠.”주위 사람들은 박윤우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추경은은 이렇게까지 창피를 당한 적이 없었다.‘저 녀석이 감히 나한테 창피를 줘? 나를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고 그래. 외국까지 줄 설 수 있는데 결혼할 사람이 없다는 건 무슨 소리야?’“윤우야, 이모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 여기서 너랑 네 엄마, 아빠를 돌보는 게 좋아.”추경은은 머리가 똑똑하지 않았지만 웬만한 재벌가 아가씨들보다 인내심이 있었다.박민정은 윤우에게 여러 번 놀림을 당하면
고영란은 들어오자마자 비서에게 들고 있던 선물을 내려놓게 한 뒤, 바로 윤우를 찾으러 갔다.윤우는 아직 씻고 있었다.주방에 들어선 고영란은 추경은이 음식을 먹고 있는 걸 발견했다.추경은도 고영란을 보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이모, 어떻게 오셨어요?”추경은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내려놓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고영란의 눈빛에는 추경은에 대한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여기 남준이 집이야. 내가 왜 못 와? 너는 왜 이러고 있어? 왜 주방에서 먹고 있는데?”고영란의 눈에는 이러한 행동이 매우 무례해 보였다.추경은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억울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죄송해요, 이모. 어제 이모를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요. 오늘 아침 너무 배가 고팠어요."“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야지.”고영란은 추씨 가문의 상황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뒤에서 윤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머니.”고영란은 환하게 웃으며 돌아서서 웅크려 앉아 말했다.“아이고, 우리 귀여운 윤우구나. 할머니가 안아보자.”고영란이 윤우를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추경은은 어제 윤우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리고 윤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윤우야, 일어났어? 아침 곧 준비될 거야.”추경은은 윤우에게 다가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또 위층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는 안 깨셨어? 8시 반이 다 되어 가는데.”고영란이 예전처럼 박민정을 나무랄 줄 알았지만 고영란은 예상 밖의 답변을 내놓았다.“임신했잖아. 잠 많이 자야지.”오랜만에 만난 고영란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렇게 박민정의 편을 드는 그녀를 보고 추경은 조금 놀랐다.하지만 추경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제가 해외에서 배운 간호학 지식에 따르면 임산부는 하루에 8시간만 자면 충분하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오래 자면 태아의 뇌 발달에 좋지 않다고 해요.”고영란은 이 말을 듣고 추경은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박민정은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는 추경은 때문에 다소 당황스러웠다.‘나를 돌봐주러 왔다고 하더니 이제는 내가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까지 간섭하는 거야?’“네, 왜요?”박민정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이모 오셨어요. 새언니 빨리 내려오라고 하셨으니 저한테 화내지 마세요.”추경은의 말은 일부러 크게 해서 아래층에 있는 고영란까지 들리게 했다.고영란은 이 말을 듣고 약간 불쾌해졌다.‘이 시간까지 잤으면서 뭐가 불만인 거야?’고영란은 윤우 앞이라 박민정에게 화를 내지 않았지만 내심 불쾌한 기색을 억누르며 박민정이 내려온 후에 말했다.“앞으로는 일찍 일어나. 너무 오래 자면 태아에게 좋지 않아.”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추경은이 분명히 고영란에게 무언가를 말했을 거라고 직감했다.자세히 설명해 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한 박민정은 그냥 대충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어차피 고영란은 한 달에 몇 번 오지도 않는다. 고영란이 떠나고 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테니 이런 사소한 문제로 논쟁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아니나 다를까, 박민정이 순순히 응하자 고영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추경은은 옆에서 괜히 나서며 말했다.“이모, 걱정 마세요. 제가 새언니를 잘 감시할게요.”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추경은을 당장 내쫓고 싶었다.추경은은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박민정을 보고 말했다.“새언니, 제가 도와드릴 테니 이제 일찍 일어나실 수 있을 거예요.”“정말 고맙네요.”“천만에요.”고영란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눈치채지 못하고 윤우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윤우야, 오늘 할머니가 널 데리고 놀러 나갈까?”박윤우는 요즘 박민정이 바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집에 남아있으면 오히려 박민정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추경은도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이모,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혹시 윤우와 이모께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물건을
차가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유남우는 두원 별장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유남우는 멀리서 박민정이 정원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누워 있었고, 그녀의 하얀 손등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대표님.”경비원은 유남우를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보통 사람들은 유남우와 유남준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은 거의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유남우는 그대로 박민정 앞에 다가갔다.박민정은 깊은 잠에 빠져 있어 유남우가 온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유남우도 그녀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빛이 가려져서인지 따뜻함이 덜해졌다.박민정은 그걸 느끼고 몸을 뒤척이며 얼굴에 덮인 책을 내려놓고 눈을 떴다.눈앞에 점점 빛이 보이더니 그제야 박민정은 눈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고개를 들어보니 남자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쳐 버렸다.“남준 씨, 왜 왔어요?”유남우의 목울대는 살짝 울렁였다.“민정아.”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또 눈에 초점이 맞춰지자 박민정은 눈앞의 사람이 유남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남우 씨는 여기 어떻게 왔어요?”박민정은 당황해하더니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형이 외국에서 돌아온 후 바로 나가서 지낸다고 들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왔어.”박민정은 유남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도 지금 유남준의 상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남준 씨가 외국에서 약간의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그곳에서 요양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간 거예요.”유남준이 현재 몇 년 전의 기억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그랬구나. 난 또 너와 싸운 줄 알았어.”유남우는 중얼거렸다.그가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박민정은 형식적으로 물었다.“좀 앉을래요?”“그래.”유남우는 대답한 후 바로 옆에 있던 벤치에 앉았다.박민정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잠시 후 가정부는 과일과 다과를 가져왔다.유남우
“오랜만이야.”추경은의 미소는 약간 어색해 보였다.그녀는 몇 걸음 물러서면서 고영란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이런 추경은의 모습은 박민정도 처음 본 것이었다.유남준을 본 추경은은 항상 달려들어 애교를 부리지 않았던가?그런데 유남우에게는 왜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것일까?“남우야, 네가 왜 왔어?”고영란이 다가오며 의아해했다.“형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와봤어요.”“아, 남준이는 여기 없고 해운 별장에 있어.”고영란은 또 박윤우에게 말했다.“윤우야, 빨리 삼촌께 인사드려야지.”박윤우는 유남우를 몇 번 본 적 있지만 왠지 이 남자가 무겁게 느껴졌다.“삼촌, 안녕하세요”박윤우는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건넸다.“그래.”유남우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숙이더니 사탕을 꺼내 박윤우에게 건넸다.“삼촌이 윤우에게 줄 선물이 없네. 오늘 밥 먹고 챙긴 사탕밖에 없어.”분명 유남우는 그렇게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였지만 박윤우의 눈에는 그의 주위에 검은 안개가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박윤우은 단순히 직감이 예리한 정도가 아니라 정신을 집중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의 주위에 엷은 빛이 감도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핑크색이나 금색의 빛이 맴돌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박민정과 고영란처럼 말이다.반대로 추경은처럼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 주위에는 차가운 파란색이나 청록색 빛이 맴돌고 있었다.하지만 박윤우는 평소처럼 집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남우 주위에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퍼져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박윤우는 약간 두려운 마음으로 사탕을 받아 들고 고영란 옆에 섰다.그는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예전에 박예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박예찬은 여러 서적들을 통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발견했다.어릴 때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박윤우는 방으로 달려가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오늘 어떤 사람의 몸에서 검은빛이 나는 걸 봤어. 너무 무서웠어.”박윤
방 안에서는 이미 유성혁이 상의를 벗은 채 박민정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그때, 최현아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여보!”“뭐야?” 유성혁은 갑작스러운 방해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유남준이 돌아왔어요.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까 얼른 옷부터 입어요!” 최현아가 다급하게 외쳤다.유성혁은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어떡하지? 어떡하지? 유남준이 내가 박민정과 함께 있는 걸 알게 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에요. 얼른 옷 다 입고 숨어요. 여기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최현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유성혁은 허겁지겁 옷을 걸쳐 입으며 당부했다.“꼭 나랑 관련 없는 일처럼 해줘. 아직 아무것도 못 했다고!”“알았어.” 최현아는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를 방에서 밀어내고 나서야 최현아는 박민정 쪽으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동서.” 그녀는 살며시 불렀다.박민정은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최현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유남준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기를.그녀는 박민정의 몸을 가볍게 감싸 이불을 덮어준 후,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잠시 후, 약효가 다소 풀렸는지 박민정은 흐릿한 눈빛으로 천천히 눈을 떴는데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웠다.그때였다.쿵!문이 거칠게 열리며 유남준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민정이는 어디 있어요?”최현아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을 막아섰다.“남준 씨! 갑자기 웬일이에요? 마침 남준 씨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요.”유남준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민정이는요?”“아마 술을 잘 못 마셔서 그런가 봐요. 지금 쉬고 있어요. 원래 남준 씨 방으로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전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최현아가 태연한 척 대답했다.분명 박민정은 오늘 칵테일을 한 모금 정도 마셨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냥 음료나
박민정은 홀로 홀 대각에 앉아 있다가 어딘가 불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이 감각... 낯설지 않았다.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현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동서, 벌써 가려고?”“네.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가볼게요.”최현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내가 바래다줄까? 어차피 나도 딱히 할 일 없는데.”“아니에요, 괜찮아요.”박민정이 정중히 거절하자 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물었다.“그런데 남준 씨는? 어디 갔어?”“일이 있어서 나갔어요.”그 말을 듣자 최현아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그래? 그럼 다행이네. 내가 데려다줄게, 길을 잃으면 곤란하잖아.”“괜찮아요. 길은 기억하고 있어요.”설령 잊는다 해도 하인들에게 물으면 될 일이었다.박민정은 가볍게 웃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걸음을 옮길수록 몸이 이상했는데 발이 휘청이고 머리가 묘하게 어지러웠다.최현아는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다가왔다. 이대로 그녀를 그냥 보낼 리 없었으니까.“괜히 사양하지 마.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최현아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지금은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하지만 점점 시야가 흐릿해졌다.혹시 몸에 다시 문제가 생긴 걸까? 머릿속이 어지럽고 다리가 힘없이 풀렸다.마지막 남은 의식으로 박민정은 힘겹게 입을 뗐다.“...구급... 구급차를 불러줘요...”그러나 그녀가 완전히 쓰러지기 직전, 최현아가 그녀를 붙잡았는데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구급차? 정말 순진하기도 하지.”최현아는 비웃듯 말하며 박민정을 외딴 곳으로 끌고 갔다. 곧 어둠 속에서 몇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최현아가 지시한 대로 움직였다.박민정은 서쪽에 있는 빈집으로 실려 갔다.최현아는 남자들을 향해 싸늘하게 경고했다.“오늘 일
박민정이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기색이 어린 최현아의 시선과 마주쳤다.“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저쪽에서 사촌 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같이 갈래?”최현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요, 전 혼자가 좋아서요.”박민정은 조용히 거절했다.최현아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었지만 그 눈빛은 싸늘했다.“그래? 알겠어.”박민정은 그녀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최현아는 곁에 앉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최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나도 시끄러운 분위기는 별로야. 어차피 동서도 혼자고, 나도 혼잔데, 같이 있어도 괜찮잖아?”이렇게 나오니 박민정은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게다가 여기는 유씨 가문 안이었기에 자신이 뭐라고 그녀를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박민정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유씨 가문의 젊은 친척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 사이, 최현아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슬쩍 박민정의 잔을 힐끔거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교활한 빛이 스쳤고 이내 일부러 놀란 척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동서, 이것 좀 봐.”그녀가 화면을 내밀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화면에는 에릭에 대한 연예 뉴스가 떠 있었다.박민정이 그 기사를 읽는 사이, 최현아는 잽싸게 손을 뻗어 박민정의 잔을 건드렸다. 긴장한 듯한 그녀의 손길이 빠르게 움직였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에릭 씨, 동서네 회사 직원 맞지? 설마 남자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가십 뉴스잖아요. 아마 거짓일걸요.”박민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에릭이 그런 취향이라면 연지석과 그렇게 티격태격할 리가 없었다. 연지석처럼 잘생긴 남자가 앞에 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건 정말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였다.“그렇지? 요즘 매체들은 자극적인 소문을 너무 많이 퍼뜨려.”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문득 박민정에게 물었다.“오늘 밤엔 안 돌아가겠네?”
“뭐?”유성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고 곧이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비웃었다.“그 여자, 가식 떨기는 끝내주더니. 진짜 정절을 지키는 여자인 줄 알았잖아. 그리고 유남준, 그렇게 대단하다면서? 어째서 자기 동생 하나 제대로 손보지도 못하는 거야?”유성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최현아는 그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는데 그가 무슨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와서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여보, 당신이 예전부터 그 여자를 원했던 거, 난 다 알고 있어요. 내가 도와줄게요.”유성혁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당신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당신밖에 없어.”최현아는 그가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모습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당신이 날 사랑하는 건 알지만 동시에 여전히 민정 씨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난 다른 여자들처럼 질투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긴 듯했다.유성혁은 원래부터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순간적으로 그의 흥미가 자극되었다.“당신 정말 최고야. 하지만 박민정은 너무 고고한 척하는 년이잖아. 절대 동의하지 않을걸? 그리고 유남준이 알면 난 팔다리가 부러질 거라고.”최현아는 그가 결국 겁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여보, 당신은 참 어리석어요. 민정 씨가 거절하는 건 당신이 어디 가서 이 사실을 떠벌릴까 봐 그런 거죠. 내가 잘 설득하면 오늘 밤엔 당신 것이 될 거예요.”“정말이야?” 유성혁의 눈빛이 반짝였다.“당연하죠. 그러니까 깨끗하게 씻고 기다리고 있어요.” 최현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유성혁은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좋아! 약속한 거다!”그는 들뜬 표정으로 손을 비비며 자리를 떠났다.최현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박민정은 유남준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마치 새롭게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남준 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앞으로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하지 마.”둘은 부부였으나 박민정은 늘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이 말에 박민정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깜빡했어요.”“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마.” 유남준이 덧붙이자 박민정은 말문이 막혔고 무슨 말을 해도 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알겠어요.”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그 모습을 본 유남준은 다시금 마음이 아려왔다. “가자, 좀 쉬어야지.”“네.”박민정은 그의 뒤를 따라 두 사람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그곳에 도착하자 유남준은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고 집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이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던 박민정은 소파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맞다, 아이들은요?”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아이들은 본가에서 안전해. 게다가 오늘 가문의 여러 친척들도 모일 건데 아이들이 그 사람들과 친해지면 나중에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리를 비우는 게 실례가 되진 않을까요?”“아니.”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어.”그의 말에는 어떠한 허세도 섞여 있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의 능력을 믿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어젯밤 잠을 설친 탓인지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은 가끔씩 시선을 들어 그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예전에는 일할 때 누구도 그의 집중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박민정이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이었다.그가 얼마나 그녀를 바라보고
“아버지, 드세요. 이건 제가 직접 정성 들여 고운 탕이에요. 백세를 넘긴 한의학자의 비법을 배워 만든 거라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꽤 걸렸어요. 드시면 장수하실 거예요.”유석진이 아부하듯 말하자 유명훈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이냐?”“그럼요. 제가 아버지를 속이겠습니까? 제가 해외에서 돌아온 이유도 아버지를 잘 모시고 장수하시게 하려는 거죠.”유석진은 유남준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버지와 달리, 유명훈의 환심을 사는 데 능숙했다.그래서인지 유명훈은 늘 그쪽을 편애했다.“석진아, 우리 집에서는 네가 가장 효심이 깊구나.” 유명훈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물론 이 나이가 되면 누구나 늙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하지만 유명훈은 늙고 싶지 않았고 죽음은 더더욱 두려웠다. 그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에서 수혈을 받기까지 했다.“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동생과 아이들도 다 효심이 깊어요.” 유석진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유남준에게 보냈다. “그렇지, 남준아?”유남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말로 유명훈도 그의 성격을 아는 터라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다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히 있어라.”그렇게 말했지만 모인 이들은 각자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유명훈은 문득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민정아.”“네, 할아버지.” 박민정이 공손하게 대답하자 유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불렀다.이제 모두의 시선이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아, 넌 이제 우리 유씨 가문의 중요한 일원이야. 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냐?”“많이 나아졌어요.” 박민정은 조용히 대답했다.“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완전히 회복되면 가정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회사 일은 남준이에게 맡기고 말이다.”유명훈은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그가 유남준과 박민정의 결혼을 허락한 것도 당시 박민정의 가문이 유씨
박민정은 그에게 안긴 채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고 가슴 한편이 알 수 없는 먹먹함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어 유남준의 등을 두드렸다. “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자요.” 유남준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박민정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품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풀어냈다.이제는 그녀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발코니로 나가 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새벽 여섯 시가 되자 유남준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에게 덮여 있는 담요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있었다.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가 돌아왔을 때 박민정이 곁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간 걸까?혹시 꿈을 꾼 걸까 싶어 그는 2층 방으로 올라가 욕실에서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잠을 청했다.박민정은 그의 움직임을 들었지만 상태가 괜찮아 보이자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아침 여덟 시, 유남준은 평소처럼 정시에 일어났고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아한 태도로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는데 박민정은 그의 맞은편에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다가 놀라고 말았다.어젯밤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오늘은 마치 전혀 취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였다.유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하고는 눈을 들어 그녀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왜?”“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박민정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식사를 이어갔다.두 아이도 식탁 위의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결국 참지 못한 박윤우가 작은 목소리로 여름 박예찬에게 물었다. “형, 나 왜 집이 이상한 것 같지?”“조용히 하고 만두나 먹어.”“아, 응.”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가족들은 청명을 맞아 조상을 기리기 위해 본가로 향했다.차가 본가 대문 앞에 멈추자마자 고영란이 반갑게 달려 나왔다. “윤우야, 예찬아, 어서 할머니한테 오렴.”유남우도 그녀 옆에 서서 서슴없이 박민정을
유남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택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했는데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박민정은 다가가기가 너무 부끄러워 멀리서 그 여자 형체랑 똑같이 제작된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마음에 들어요? 저는 상관없긴 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이런 기괴한 물건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민정아,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아?”그의 말에 박민정은 깜짝 놀랐다.“왜요?”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구매한 물건이었다.“오해하지 말아요. 사람마다 생리적 욕구가 있기 마련이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희는 부부잖아요. 그렇죠?”유남준은 그녀가 자기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역시나 박민정은 그가 왜 화 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라가며 다시 설명했다.“원래는 다른 여자를 찾아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저희는 현재 부부잖아요. 또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서로 사랑했다고 해서 그렇게 처리하는 건 아닌 것 같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머리가 아파서 소파에 털썩하고 앉았다.“알겠으니까 그만 말해.”‘날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지?’‘그저 성욕을 못 참아서 안달 난 짐승으로 생각하나?’박민정은 그제야 입을 꾹 닫았는데 순간 거실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진 것 같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박민정이 그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자러 갈게요. 내일 옛 저택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그러나 유남준은 여전히 토라진 말투로 답했다.“응. 마음대로 해.”그러나 박민정은 그가 화 났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기쁜 마음으로 돌아섰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멍한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그냥 이대로 가는 거야?”그리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그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제우스 클럽.방성원과 유남준은 술을 마시며
그리고 침대에 던져지고 나서야 박민정은 이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재빨리 이불을 몸에 둘렀다.“오지 말아요!”그러나 유남준의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민정아, 나도 남자야.”시간도 많이 흘렀고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매일 그냥 잠만 자려고 하자니 그도 나름 괴로웠다.그리고 이 상태로 두 사람이 계속 지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병들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유남준은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그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하여 다 포기한 채 가만히 누워 온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엄마.”박예찬과 박윤우가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박민정을 불렀다.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진서연이랑 설인아, 그리고 민수아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두 아이도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있는 힘껏 유남준을 밀쳐냈다.하여 오늘에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멈춰야 했다.박민정이 황급히 방에서 나오니 두 아이가 마침 문 앞에 서 있었다.“엄마, 자고 있었어? 왜 얼굴이 빨개?”박윤우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게...”겨우 설명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유남준이 갑자기 방 안에서 나오더니 한껏 어두운 얼굴로 두 아이에게 물었다.“왜 벌써 왔어?”“추석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어요.”박예찬은 뭔가 눈치챈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러나 박윤우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엄마, 저 쓰레기 아빠랑 같이 잔 거야?”“아니.”박민정은 단번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저 찾을 물건이 있어서.”“무슨 물건인데?”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질문 공세에 박민정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가 겨우 답했다.“책.”“무슨 책? 나도 같이 찾아볼게.”“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