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언니, 고마워요.”추경은은 순간 미소를 짓고는 박민정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외투를 경비원에게 돌려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이렇게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는 상류층의 아가씨는 상류 사회든 일반 대중이든 누구에게나 좋은 첫인상을 남기곤 했다.추경은 그렇게 박민정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조금씩 자기편으로 만들고 있었다.두원 별장에 도착한 추경은은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새언니, 저 잠깐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네.”박윤우와 가정부는 깜짝 놀랐다.가정부는 이 사람이 진짜 사장님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자신이 하루 종일 못 들어오게 했기 때문에 나중에 보복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박윤우는 엄마가 이렇게 위험한 사람을 집으로 들인 것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었다.추경은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박윤우에게 인사를 한 뒤 주방으로 갔다.“아저씨, 제가 도와드릴까요? 예전에 유명 셰프에게 요리 좀 배운 적이 있어요.”추경은은 주방의 메인 셰프에게 말을 걸었다.셰프는 두 명의 보조를 데리고 있었다. 두 청년은 추경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추경은 이런 분위기를 즐겼다.메인 셰프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한 청년을 도와 채소를 씻기 시작했다.박윤우는 이 상황을 보고 박민정의 손을 잡아당겼다.“엄마, 왜 저 사람을 여기로 데려왔어요?”박민정은 윤우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해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경은 이모가 갈 데가 없어서 잠시 여기서 지내기로 했어.”박윤우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엄마는 너무 순진하네. 추경은이 아빠를 뺏으려고 왔다는 걸 모르는 걸까?’박민정은 추경은의 속셈을 모르는 게 아니라 신경 쓰지 않은 것이었다.아직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여우처럼 약은 추경은은 나중에 천천히 처리해도 되었다.식사 준비를 다 한 추경은은 미소를 지으며 가정부들을 도와 음식을 날랐고, 또 박윤우를 돌보는 가정부에게도 인사를 건넸다.“윤우를 돌봐주신 분이시죠? 윤우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 다 선생님 덕분이에
추경은은 박민정의 질문에 대해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임산부는 배고프면 안 되는 건가요?”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며 사과했다.“죄송해요, 잘 몰랐어요.”박민정은 그녀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계속 식사를 했다.고영란이 올지, 안 올지는 그녀의 마음이었다.하지만 얼마 전에 진행했던 태아 검사는 결과가 조금 안 좋았다.의사도 규칙적인 식사가 필요하다고 경고했었다. 굶으면 태아 발육이 멈출 수 있으니 말이다.게다가 박민정은 원래도 위가 좋지 않았다.박윤우는 추경은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엄마, 경은 이모 나무라지 마세요.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모를 거 아니에요.”그는 추경은을 바라보며 또 말했다.“경은 이모, 혹시 결혼할 사람이 없어요?”추경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뭐라고?”“서른 넘으셨죠? 엄마보다 더 나이 많아 보이는데.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결혼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죠?”추경은은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녀는 겨우 화를 참으며 말했다.“윤우야, 이모는 이제 스물네 살이야. 너희 엄마보다 몇 살 어리다고.”“네?”윤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런데 엄마보다 더 나이 많아 보이는데요? 혹시 관리를 잘 안 해서 그런 건가요? 엄마한테 가르쳐달라고 해요. TV에서 자주 그러잖아요. 세상에 못생긴 여자는 없고 게으른 여자만 있다고. 관리 좀 해요. 결혼 못 하는 상황을 피하는 게 좋겠죠.”주위 사람들은 박윤우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추경은은 이렇게까지 창피를 당한 적이 없었다.‘저 녀석이 감히 나한테 창피를 줘? 나를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고 그래. 외국까지 줄 설 수 있는데 결혼할 사람이 없다는 건 무슨 소리야?’“윤우야, 이모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 여기서 너랑 네 엄마, 아빠를 돌보는 게 좋아.”추경은은 머리가 똑똑하지 않았지만 웬만한 재벌가 아가씨들보다 인내심이 있었다.박민정은 윤우에게 여러 번 놀림을 당하면
고영란은 들어오자마자 비서에게 들고 있던 선물을 내려놓게 한 뒤, 바로 윤우를 찾으러 갔다.윤우는 아직 씻고 있었다.주방에 들어선 고영란은 추경은이 음식을 먹고 있는 걸 발견했다.추경은도 고영란을 보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이모, 어떻게 오셨어요?”추경은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내려놓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고영란의 눈빛에는 추경은에 대한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여기 남준이 집이야. 내가 왜 못 와? 너는 왜 이러고 있어? 왜 주방에서 먹고 있는데?”고영란의 눈에는 이러한 행동이 매우 무례해 보였다.추경은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억울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죄송해요, 이모. 어제 이모를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요. 오늘 아침 너무 배가 고팠어요."“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야지.”고영란은 추씨 가문의 상황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뒤에서 윤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머니.”고영란은 환하게 웃으며 돌아서서 웅크려 앉아 말했다.“아이고, 우리 귀여운 윤우구나. 할머니가 안아보자.”고영란이 윤우를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추경은은 어제 윤우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리고 윤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윤우야, 일어났어? 아침 곧 준비될 거야.”추경은은 윤우에게 다가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또 위층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는 안 깨셨어? 8시 반이 다 되어 가는데.”고영란이 예전처럼 박민정을 나무랄 줄 알았지만 고영란은 예상 밖의 답변을 내놓았다.“임신했잖아. 잠 많이 자야지.”오랜만에 만난 고영란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렇게 박민정의 편을 드는 그녀를 보고 추경은 조금 놀랐다.하지만 추경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제가 해외에서 배운 간호학 지식에 따르면 임산부는 하루에 8시간만 자면 충분하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오래 자면 태아의 뇌 발달에 좋지 않다고 해요.”고영란은 이 말을 듣고 추경은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박민정은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는 추경은 때문에 다소 당황스러웠다.‘나를 돌봐주러 왔다고 하더니 이제는 내가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까지 간섭하는 거야?’“네, 왜요?”박민정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이모 오셨어요. 새언니 빨리 내려오라고 하셨으니 저한테 화내지 마세요.”추경은의 말은 일부러 크게 해서 아래층에 있는 고영란까지 들리게 했다.고영란은 이 말을 듣고 약간 불쾌해졌다.‘이 시간까지 잤으면서 뭐가 불만인 거야?’고영란은 윤우 앞이라 박민정에게 화를 내지 않았지만 내심 불쾌한 기색을 억누르며 박민정이 내려온 후에 말했다.“앞으로는 일찍 일어나. 너무 오래 자면 태아에게 좋지 않아.”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추경은이 분명히 고영란에게 무언가를 말했을 거라고 직감했다.자세히 설명해 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한 박민정은 그냥 대충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어차피 고영란은 한 달에 몇 번 오지도 않는다. 고영란이 떠나고 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테니 이런 사소한 문제로 논쟁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아니나 다를까, 박민정이 순순히 응하자 고영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추경은은 옆에서 괜히 나서며 말했다.“이모, 걱정 마세요. 제가 새언니를 잘 감시할게요.”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추경은을 당장 내쫓고 싶었다.추경은은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박민정을 보고 말했다.“새언니, 제가 도와드릴 테니 이제 일찍 일어나실 수 있을 거예요.”“정말 고맙네요.”“천만에요.”고영란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눈치채지 못하고 윤우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윤우야, 오늘 할머니가 널 데리고 놀러 나갈까?”박윤우는 요즘 박민정이 바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집에 남아있으면 오히려 박민정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추경은도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이모,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혹시 윤우와 이모께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물건을
차가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유남우는 두원 별장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유남우는 멀리서 박민정이 정원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누워 있었고, 그녀의 하얀 손등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대표님.”경비원은 유남우를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보통 사람들은 유남우와 유남준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은 거의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유남우는 그대로 박민정 앞에 다가갔다.박민정은 깊은 잠에 빠져 있어 유남우가 온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유남우도 그녀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빛이 가려져서인지 따뜻함이 덜해졌다.박민정은 그걸 느끼고 몸을 뒤척이며 얼굴에 덮인 책을 내려놓고 눈을 떴다.눈앞에 점점 빛이 보이더니 그제야 박민정은 눈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고개를 들어보니 남자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쳐 버렸다.“남준 씨, 왜 왔어요?”유남우의 목울대는 살짝 울렁였다.“민정아.”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또 눈에 초점이 맞춰지자 박민정은 눈앞의 사람이 유남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남우 씨는 여기 어떻게 왔어요?”박민정은 당황해하더니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형이 외국에서 돌아온 후 바로 나가서 지낸다고 들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왔어.”박민정은 유남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도 지금 유남준의 상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남준 씨가 외국에서 약간의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그곳에서 요양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간 거예요.”유남준이 현재 몇 년 전의 기억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그랬구나. 난 또 너와 싸운 줄 알았어.”유남우는 중얼거렸다.그가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박민정은 형식적으로 물었다.“좀 앉을래요?”“그래.”유남우는 대답한 후 바로 옆에 있던 벤치에 앉았다.박민정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잠시 후 가정부는 과일과 다과를 가져왔다.유남우
“오랜만이야.”추경은의 미소는 약간 어색해 보였다.그녀는 몇 걸음 물러서면서 고영란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이런 추경은의 모습은 박민정도 처음 본 것이었다.유남준을 본 추경은은 항상 달려들어 애교를 부리지 않았던가?그런데 유남우에게는 왜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것일까?“남우야, 네가 왜 왔어?”고영란이 다가오며 의아해했다.“형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와봤어요.”“아, 남준이는 여기 없고 해운 별장에 있어.”고영란은 또 박윤우에게 말했다.“윤우야, 빨리 삼촌께 인사드려야지.”박윤우는 유남우를 몇 번 본 적 있지만 왠지 이 남자가 무겁게 느껴졌다.“삼촌, 안녕하세요”박윤우는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건넸다.“그래.”유남우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숙이더니 사탕을 꺼내 박윤우에게 건넸다.“삼촌이 윤우에게 줄 선물이 없네. 오늘 밥 먹고 챙긴 사탕밖에 없어.”분명 유남우는 그렇게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였지만 박윤우의 눈에는 그의 주위에 검은 안개가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박윤우은 단순히 직감이 예리한 정도가 아니라 정신을 집중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의 주위에 엷은 빛이 감도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핑크색이나 금색의 빛이 맴돌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박민정과 고영란처럼 말이다.반대로 추경은처럼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 주위에는 차가운 파란색이나 청록색 빛이 맴돌고 있었다.하지만 박윤우는 평소처럼 집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남우 주위에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퍼져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박윤우는 약간 두려운 마음으로 사탕을 받아 들고 고영란 옆에 섰다.그는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예전에 박예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박예찬은 여러 서적들을 통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발견했다.어릴 때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박윤우는 방으로 달려가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오늘 어떤 사람의 몸에서 검은빛이 나는 걸 봤어. 너무 무서웠어.”박윤
전에 박윤우는 유남우와 가까이 있은 적이 거의 없었다.가까이 있었다고 해도 그에게서 검은 안개를 느끼지 못했지만 오늘은 확실히 보였다.“집에서 조심하고 있어. 나 지금 비행기 타야 하니까 이따가 다시 얘기하자.”“알겠어.”박윤우는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창밖을 보니 유남우가 여전히 밖에서 박윤정, 고영란과 이야기하고 있었다.멀리서도 유남우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보이는 것 같아 무섭게 느껴졌다.밖에서.고영란은 유남우를 보더니 박윤우가 방송을 했던 일을 떠올렸다.어떻게 어린아이를 돈을 벌게 할 수 있지?“민정아, 너 요즘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남우를 따라 회사에서 경험 좀 쌓아보는 게 어때? 그래야 수입도 좀 늘어나지 않겠어? 하루에 3, 4시간만 일해도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애들한테도 무리 안 갈 거야.”박민정과 유남준이 해외로 떠난 후로 고영란은 이미 이 일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박민정은 조금 놀랐다.전에 고영란은 그녀가 밖에서 일하는 걸 항상 반대했었다.귀도 잘 안 들리는 며느리가 나가서 일하면 유씨 가문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며 말이다.그런데 지금은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지?“어머님, 전 가끔 작곡을 하기도 해요.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에요.”박민정이 대답했다.사람은 변하는 법이다.박민정이 예전에 직장을 다닐 때, 고영란은 그녀가 밖에서 일하는 걸 싫어했다.하지만 지금은 직업이 없다고 하니 편히 집에서 쉬고 있는 그녀가 꼴 보기 싫은 모양이다.“작곡?”고영란의 눈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네가 작곡을 한다고?”일반 사람에게도 작곡은 쉽지 않은 법이다. 더구나 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작곡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냥 취미로 하는 거지, 전문가는 아니에요.”“그럼 회사 다니는 게 낫겠다.”고영란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남준이도 회사로 보낼 생각이야. 잘 보이지 않으니까 네가 옆에서 도와주는 게 좋지 않겠어? 남준이한테 그렇게 하라고 연락할게..”박민정이 돌아온 이후, 그녀가 예전처럼
추경은은 꿍꿍이가 많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은 아니었다.그걸 알아챈 박민정은 추경은이 생각보다 상대하기 훨씬 수월한 존재라는 걸 느꼈다.“나 좀 쉬어야겠어요.”“그래요, 방해하지 않을게요.”추경은은 원래 박민정에게 많이 자면 안 된다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유앤케이로 데려가겠다는 그녀의 말에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정원에서 잠시 산책한 후 다시 앉아 휴식을 취했다.멀리서 추경은이 어디선가 큰 가방을 가져와 별장에 있는 가정부와 경비원들에게 뭔가를 나누어주고 있었다.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추경은을 박민정은 그저 조용히 지켜봤다.몇 개의 선물로 매수될 수 있다면 그만큼 더 많은 선물로도 쉽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박민정은 추경은의 행동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책을 보며 악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추경은은 가끔 박민정을 쳐다봤다.그녀가 자신의 행동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 심지어 별장 사람들과 함께 나가서 식사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그녀는 서다희에게도 메시지를 보내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스케줄을 확인한 서다희는 모레 저녁 9시 이후에 시간이 된다고 알려주었다.추경은은 곧바로 서다희와 모레 저녁 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서다희는 별장 사람들과는 달리 유남준의 최측근이었다. 유남준과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한 사람으로 박민정보다 유남준 옆에 더 오래 있었을 것이다.서다희를 사로잡으면 분명 유남준에게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저녁 식사 시간에 추경은은 무심코 휴대폰을 식탁에 올려놓았다.박민정은 자리에 앉자마자 문자 알림 소리를 들었다.무의식적으로 추경은의 휴대폰 화면을 보게 되었는데 ‘다희 오빠’로부터 온 메시지였다.[알겠어요. 그럼 모레 9시 반에 시즌 레스토랑에서 봐요.]박민정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의 문자를 훔쳐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추경은이 서다희를 저장한 호칭, 그리고 모레 9시 시즌 레스토랑에서 보기로 한 문자를 보며 박민정은 고개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
박민정의 시선이 우연히 유남준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유남준은 숨이 가빠지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직전 박민정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저기... 어젯밤 감사했어요.”박민정은 짧게 말한 뒤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유남준의 품이 순식간에 비어지며 허전함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그도 조용히 일어났다.창밖에는 두껍게 쌓인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기억나? 재작년 이맘때도 우리 여기 머물렀었잖아.” 유남준이 말을 꺼냈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들었지만 머릿속엔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먼저 읍내로 나가 식사를 한 뒤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은정숙을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이후 차를 타고 진주시로 향했다.진주시는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길 위에는 삼삼오오 모여 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잠시 멍해졌다.‘만약 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저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을까?’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몇 개의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뿐이었다.“잠시 후 우리 집, 본가로 갈 거야.” 유남준이 그녀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본가요?”“응, 우리 집.”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마침 그녀도 그곳에서 두 아이를 보고 싶었다.유씨 가문의 저택에서 고영란은 요즘 완벽한 가정의 화목을 누리고 있었다.자식과 손자들이 곁에 머물렀고 두 아이는 날마다 그녀를 웃게 했다.박민정이 온다는 소식에 그녀는 하인들에게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도록 했다.차가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고영란은 직접 마중을 나왔다.“민정아, 어서 와서 앉아.”박민정의 기억 속 고영란은 어린 시절에만 머물러 있었다.그때의 고영란은 차갑고 냉담한 분위기를 풍기며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박민정은 어릴 적 그녀를 조금 두려워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오늘 하루 동안 많은 곳을 둘러보며 꽤 많은 기억을 떠올렸다.저녁이 되어서야 둘은 시골의 집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약간의 후회를 드러냈다.“벌써 열 시가 넘었네요. 지금 진주시로 돌아가면 새벽이 되어야 도착하겠어요.”유남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럼 오늘은 여기서 묵자. 밤늦게 운전하는 건 위험하니까. 게다가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잖아.”박민정은 타인의 사정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성격이었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여기서 자는 걸로 할게요. 그런데 괜찮을까요?”“물론 괜찮지.”유남준은 내심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몹시 반가웠다.박민정이 말한 건 두 개의 방이 있다는 뜻이었지만 유남준은 하나의 방을 생각했다. 그녀는 집 안을 둘러본 뒤 침실이 하나뿐임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저는 거실 소파에서 잘게요.”여기는 박씨 가문의 본가와는 달랐다. 박씨 가문의 저택은 침실 안에도 넉넉한 공간이 있어 소파를 두는 게 가능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유남준은 단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나도 소파에서 같이 잘게.”그의 대답에 박민정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그러지 말고 각자 따로 자요.”박민정은 비록 기억의 조각들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지만 유남준과의 관계가 너무 빨리 진전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유남준은 억지로 그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혼자 침실에서 자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여기는 외딴곳이라 네가 혼자 소파에서 자는 건 걱정돼. 침실 침대는 넓으니까 네가 불편하면 이불 하나로 우리 사이를 막아두면 되잖아. 어때?”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박민정은 망설이면서도 밖에서 들려오는 거센 바람 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좋아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남준은 곧바로 이불을 가져와 침대 가운데를 나누고 각각 이불을 하나씩 준비했다.유남준이 침대에 눕고 나서야 박민정도 몸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로
전날 밤 악몽 탓에 잠을 설친 박민정은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어느덧 차는 어느새 시골에 도착해 있었다.유남준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운전기사에게 차를 잠시 멈추게 했다.박민정은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몸을 비틀다가 그만 유남준의 품으로 넘어질 뻔했다.그는 재빨리 그녀를 받아 안았다.박민정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그의 몸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사과할 일은 아니야. 가자, 다 왔어.”벌써 도착한 걸까?박민정은 창밖을 보았는데 새하얀 눈 아래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그곳은 어린 시절 그녀와 정숙 아줌마가 함께 살던 집, 그녀의 진짜 집이었다.어릴 적 기억의 단편들이 박민정의 머릿속에서 하나둘 떠올랐다.“맞아요, 여기가 바로 그 집이에요.”그녀는 유남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아줌마, 나 돌아왔어요.”박민정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이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차가운 바람이 귀를 스치고 박민정은 눈 덮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집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고 그때 유남준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박민정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당신한테 여기 열쇠가 왜 있어요?”“예전에 네가 나한테 맡겼잖아. 우리 여기서 잠시 함께 살았었지.”“우리가 여기서 같이 살았다고요?”박민정은 이 말에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명품 정장에 품격이 넘치는 태도를 지닌 그가 이렇게 낡은 집에서 자신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유남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응. 예전에 네가 자꾸 삐져서 가출했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왔지.”그의 농담 섞인 말에 박민정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놀랐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테
박민정은 방을 옮기면 더 편히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밤새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렸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꿈, 정숙 아줌마의 죽음, 그리고 한수민의 죽음까지...꿈속의 모든 일들이 희미하고 불분명했지만 그 슬픔은 그녀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꿈에서 겪은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박민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꿈을 되짚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는 게 없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세수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박민정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누나.”동생 박민호였다.박민호는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박민정은 그를 보고도 별다른 반가움을 느끼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박민호를 몇 번이나 마주쳤기 때문이었다.“응, 여긴 웬일이야?”박민정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유남우가 그녀를 속이고 있을 때, 박민호는 늘 유남우를 도와 거짓말을 꾸미는 데 일조했다.박민호도 그녀의 냉랭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누나, 설마 나한테 화난 거야? 나도 남우 형한테 속았던 거라고!”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속았다니, 무슨 말이야?”“남우 형이 그러더라고. 유 대표가 진심으로 누나를 대하지 않는다면서 오직 형만이 누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나도 예전에 유 대표가 누나에게 잘못했던 걸 생각하니 누나가 더 사랑받는 사람이랑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형 말을 믿었지.”박민호는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히 말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그래? 알겠어. 그럼 이제 무슨 일로 온 건데?”박민호는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누나, 기억은 얼마나 돌아왔어? 뭐라도 생각난 거는?”박민정은 솔직히 말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아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그래? 괜찮아, 천천히 떠올리게 될 거야.”박민호는 옆에 있는 과일 바
비서는 정 대표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나서서 말을 보탰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찾아뵐 수 있을까요?”“대표님께서 예전에 잘못하신 건 전부 아가씨의 정체를 모르셨기 때문이에요. 이제 모든 걸 아시고 정말 많이 후회하고 계십니다.”이 말을 듣자마자 박윤우가 재빨리 박민정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당신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에요! 우리 엄마를 데려갈 생각하지 마요!”“윤우 군, 저희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대표님은 윤우 군 엄마의 친엄마세요. 절대 두 분을 해칠 분이 아니세요.” 비서는 간절히 설득했지만 박윤우는 냉소를 띠며 되받아쳤다.“그럼 예전에 우리 형이 죽을 뻔한 건 누가 그랬는데요? 엄마 얼굴이 이렇게 된 건 또 누구 탓인데요?”비서는 말문이 막혔고 ‘그건 전부 오해’ 라고 간신히 변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그녀를 제지했다.박윤우는 여전히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우리 엄마가 정 대표님 딸이 아니었다면 자기 잘못을 인정했을까요? 우리 엄마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끝까지 괴롭혔겠죠?”“옳고 그름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딸만 감싸고 우리 엄마를 다치게 했어요.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한다고요? 웃기지 마요!”박윤우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정수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미안하다...”정수미는 고개를 숙이며 박민정에게 사과했다.“민정아,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옳고 그름도 모르고 소현이만 감싸느라... 그래서 이렇게 됐어.”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점점 떨려왔다. 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아이조차 아는 간단한 이치를 성인이자 회사 대표인 그녀가 몰랐다는 것이 더 의아했다. 그저 자기 편을 감싸기에 바빴던 사람일 뿐이었다.“정 대표님, 더 할 말이 없으시면 저희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