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딸은 엄마의 편을 들곤 한다.하지만 윤소현은 윤석후가 바람피웠다는 말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았다.“엄마, 이 일로 저를 부른 거예요?”한수민은 전혀 놀라지 않는 딸의 반응을 보며 물었다.“설마 이미 알고 있었어?”윤소현은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다.“아빠 같은 사람이 밖에 여자가 있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죠. 잊었어요? 예전에 아빠가 정수미랑 있을 때도 엄마를 몰래 만났잖아요.”윤소현의 말은 한수민에게 큰 충격이었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내 딸 맞아?”한수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윤소현은 아직 그녀와 갈라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저 당연히 엄마 딸 맞죠. 그러니까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감히 이런 말 못 하죠.”한수민은 약간 진정하며 말했다.“그러면 네 아빠가 나를 배신하는 걸 그냥 이렇게 두고만 볼 거야?”“걱정 마세요. 아빠에게 조심하라고 말할게요.”말을 마친 후 윤소현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엄마, 지금은 병원에서 푹 쉬고 안정을 취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한수민은 미간을 구겼다.“나 VIP 병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잖아. 내가 어떻게 안정을 취할 수 있겠어?”“YN그룹이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그 위기를 해결하려고 모든 자산을 아빠에게 줬어요. VIP 병실로 옮길 돈, 정말 없거든요.”“그럼 내가 전에 준 돈은?”“그것도 아빠한테 빌려줬죠.”한수민은 상황을 믿기 힘들었지만 더 이상 반박할 힘이 없었다.“소현아, 네 아빠가 재산을 다 빼돌렸다고 했어. 넌 절대 속지 마.”“그럴 리가요?”윤소현은 믿지 않는 척하며 말했다.“지금 가서 잘 물어볼게요. 엄마는 먼저 병원으로 돌아가세요.”윤소현이 떠난 후.한수민은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다가 택시를 타고 서교에 있는 박민정 아버지의 묘지로 갔다....두원 별장에서.“지금 묘지로 갔다고요?”“네.”한수민을 감시하는 사람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주먹을
유남준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들어와.”서다희가 걸어 들어오며 물었다.“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지금 거의 다섯 시가 되었어요. 윤우 도련님을 학교에서 데려오기로 하셨잖아요.”“윤우?”유남준은 의아해했다.“그게 누군데?”서다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대표님 또 윤우를 잊으신 거야?’“대표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지금이 몇 년도죠?”유남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서 비서, 요즘 너무 한가했지? 두바이행 비행기 표는 준비됐어? 초급 칩셋 프로젝트에 대해 협상하러 가야 하잖아.”그는 눈을 뜨고 일어나려 했지만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왜 아무것도 안 보이지?”‘초급 칩셋이라... 대표님과 사모님이 결혼한 지 1년째 되던 해에 있었던 일인데? 이걸 어떻게 하지? 그때면 유앤케이가 제일 힘들 때이기도 하고, 대표님이 온갖 비웃음을 받던 시기인데.’“대표님, 할 얘기가 있어요.”“말해.”서다희는 녹음기를 꺼냈다.이 녹음기에는 그가 매번 해명할 때마다 하는 말들이 꼼꼼하게 녹음되어 있었다.약 한 시간 후.유남준은 두원 별장으로 돌아왔다.윤우는 그의 다리에 매달리며 말했다.“아빠, 오늘 학교에서 저 데려오기로 했잖아요. 왜 약속 안 지키셨어요?”유남준은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윤우를 들어 옆으로 던졌다.“다른 데 가서 놀아.”윤우는 의아해하며 서다희를 쳐다봤다.서다희가 눈짓을 하자 윤우는 바로 상황을 깨달았다.윤우는 유남준의 병이 이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다.거의 이틀마다 한 번씩 바뀌었으니 말이다.그는 위층으로 올라가 박민정에게 알렸다.“엄마, 우리 이 기회에 떠날까?”박민정은 이해하지 못했다.윤우는 유남준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매일 ‘아빠’와 ‘쓰레기 아빠’를 번갈아 부르면서 말이다.“왜 가려고 해?”“지금 아빠는 상태가 안 좋아서 그래. 우리 새로운 아빠 찾자.”박민정은 황당했다.“아빠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거니?”그리고 허리 숙여 아이에게 설명했다
방금은 그가 너무 충동적이었다.엄마가 아픈 아빠를 두고 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런 제안을 했다.“미안해, 엄마. 잘못했어.”“그래, 잘못을 알면 됐어.”박민정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윤우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는 박민정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있어서 박민정은 유남준보다 백 배는 더 중요했다.“엄마, 밥 먹으러 가자.”“그래.”식탁에서 유남준은 꼿꼿하게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박민정과 윤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몇 숟가락 대충 뜨고는 일어섰다.“나 일이 있어서 오늘 밤엔 안 돌아올 거야.”박민정은 잠시 멈칫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알겠어요.”같은 대답이었다.유남준은 자신이 진짜로 기억을 잃은 건지 믿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다희에게 제호 클럽에 가자고 했고 김인우와 방성원도 불러냈다.유남준이 자리에 앉았고 김인우와 방성원이 차례로 도착했다.김인우는 유남준 옆에 앉으며 말했다.“남준아,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니? 네가 우리를 술 마시자고 부르다니. 몸은 괜찮아?”6년 전 박민정이 실종된 후 유남준은 점점 그들과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박민정이 진주에 돌아온 이후로는 그들과 거의 약속을 잡지 않았었다.“농담하지 말고, 나 물어볼 게 있어.”김인우는 즉시 진지해졌다.“뭐 물어보려고 하는데?”“나 정말 박민정 좋아해?”김인우는 물론, 머릿속에 온통 임신한 아내 생각뿐인 방성원도 옆에서 그 말을 듣고는 웃음을 터뜨렸다.“남준아, 너 우리 놀리는 거야?”방성원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김인우도 어이가 없는 듯이 말했다.“난 또 무슨 심각한 문제라고. 이걸 물어볼 줄은 몰랐네. 박민정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유남준은 이마를 주무르며 말했다.“나 또 기억을 잃었어.”김인우는 멈칫했다.“그럼 우리는 기억해?”“그냥 몇 년간의 기억만 없어.”유남준이 대답했다.김인우는 곧바로 진지하게 말했다.“남준아, 너 계속 이러면 안 되잖아. 얼른 병원에 가
박민정은 김인우가 말이 없자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다른 일 없으면 끊을게요.”그때 김인우가 다급하게 말했다.“잠시만. 한 번 와주는 게 좋겠어. 그래도 남준이가 형수 말을 들을 것 같은데?”그도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는 잘 몰랐다.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알겠어요. 하지만 임신 중이라 남준 씨 취했으면 제가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걸 미리 말해둘게요.”“걱정 마. 나랑 성원이도 도울 거야. 그냥 남준이가 술을 더 안 마시도록 설득해 주면 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운전기사는 박민정은 제호 클럽에 데려다줬다.도착한 후, 그녀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VIP 룸으로 들어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유남준은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양쪽에는 김인우와 방성원이 앉아 있었다.두 사람은 유남준을 말릴 수 없었고, 더욱이 말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들은 박민정을 보더니 마치 구세주를 본 것처럼 두 눈을 반짝였다.“형수.”아직 취하지 않은 유남준은 김인우의 호칭을 듣더니 눈살을 찌푸렸다.박민정은 유남준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그만 마시고 돌아가요.”유남준은 술잔을 들고 있는 손을 무의식적으로 더 꽉 쥐었다.그는 대답하지 않고 옆에 있는 김인우에게 물었다.“네가 불렀어?”김인우는 어물쩍거리며 대답을 회피했다.“남준아, 더 마시면 안 돼. 형수 말 듣고 돌아가.”유남준이 웃음을 터뜨렸다.“형수가 어디 있다고 그래?”김인우는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박민정이 화낼까 봐 걱정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를 부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박민정은 정신적으로 매우 강했다.그녀는 김인우와 방성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몸을 구부려 유남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았다.“그만 마시라고 했잖아요. 못 들었어요?”유남준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술잔을 내려놓았다.박민정은 손에 든 술잔을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테이블 위의 술병을 하나씩 모두 쓰레기통에
“도대체 술 얼마나 마신 거예요?”박민정은 유남준에게서 풍기는 강한 술 냄새에 이마를 찡그렸다.유남준은 대답하지 않고 긴 손으로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나 집에 데려간다며?”박민정은 잠깐 멈칫했다.유남준이 그녀를 추궁하려고 남긴 줄 알았는데 말이다.박민정은 마지못해 손을 내밀어 유남준의 손목을 잡았다.“가요.”유남준은 더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일어서 그녀와 함께 걸어 나갔다.박민정은 유남준을 데리고 나가면서 클럽에 온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누구야? 왜 이렇게 잘생겼어?”“가게에 새로 온 직원 아니야? 몸매 대박이네.”몇몇 여자들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런데 앞에 있는 여자는 얼굴이 예쁜 것 말고 돈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그중 한 명은 박민정과 유남준을 단번에 알아봤다.이지원의 친구인 하예솔은 술잔을 잡은 손을 꽉 쥐며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그녀의 친구가 농담하며 말했다.“예솔아, 너 곧 결혼하잖아. 우리와 남자 뺏지 마.”상류층 사회에는 부잣집 도련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부잣집 아가씨들은 보통 사람들이 평생을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을 이미 타고났다.그래서 그들은 남자 친구를 만나 결혼하는 평범한 삶을 원하지 않았다.하예솔의 한 친구가 유남준 쪽으로 다가갔다.“잘생긴 오빠!”사실 상류층 사회 사람들은 대부분 유남준을 알고 있었다.다만 클럽 1층은 조명이 어두웠고, 그들은 유남준을 직접 본 적이 없기에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여자는 유남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유남준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꺼져.”박민정은 멈춰서 뒤돌아 여자를 바라봤다.여자는 약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다시 평정심을 찾고는 박민정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었다.“오빠, 눈이 멀었어? 저 여자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거 안 보여?”박민정은 그녀의 말에 화가 나지 않았지만 유남준은 분명히 화를 낼 것이다.그는 정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여기 시끄럽네.”유남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자가
박민정은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TV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에리였다.구릿빛 피부의 그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아프리카 아이들과 함께 봉사를 하고 있었다.유남준의 건강 상태 때문에 에리는 그다지 제약을 받지 않아 꽤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었다.지금의 그는 비행기를 타고 몰래 진주로 돌아오고 있었다.막 공항에 도착한 에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바로 박민정에게 연락했다.“민정 선배, 지금 뭐 하고 있어?”전화가 연결되자 그는 장난스럽게 물었다.박민정은 경험 많은 작곡가로서 많은 방면에서 에리를 이끌었다. 게다가 그보다 나이도 많아 에리는 가끔 박민정을 선배라고 부르곤 했다.박민정은 그의 뉴스 영상을 보고 있던 중인데 마침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마침 네가 봉사하는 영상을 보고 있었어.”박민정이 대답했다.“내 영상을 보고 있었다고?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농담 그만해. 거긴 잘 적응하고 있어?”박민정이 물었다.에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잘 지내고 있지. 그런데 너무 지루해서 회사에서 신경 안 쓰는 틈을 타 몰래 돌아왔어.”“돌아왔다고?”“응, 이제 막 공항에 도착했어. 나 데리러 올래?”박민정은 한숨을 푹 쉬었다.“미안. 요즘 집안일이 좀 바빠서.”“알겠어.”에리는 약간 실망했다.매니저는 그에게 빨리 가자며 눈짓했다.공항에는 사람이 많아 그를 알아보는 팬이 있으면 일이 많이 복잡해질 것이다.“민정 선배, 다음에 꼭 나에게 곡 하나 써줘. 여기 너무 시끄러우니까 이만 끊을게.”에리는 아쉬움을 감추며 전화를 끊었다.“나 전화 오래 하지도 못했단 말이야.”“회사에 들키고 싶어?”매니저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회사에서 에리를 키우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 한다는 걸 당연히 눈치챌 수 있었다.하지만 최근 한동안 IM 그룹 경영진은 에리를 잊었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래서 그들은 몰래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아프리카에서 최고 대우를 받았지만 여전히 국내
유남준이 두원 별장에서 나가리라고 생각지도 못한 박민정이다.그것만으로 부족하여 가기 전에 서다희에게 은행 카드 한 장까지 던져 주었으니 말이다.“그 안에 들어 있는 돈으로 너랑 아이가 생활하기에 충분할 거야. 중요한 일 아니면 나한테 절대 연락하지 마.”유남준은 차갑게 한마디만 남기고 차에 올랐다.쓴소리는 유남준이 했는데 서다희가 오히려 더 미안해했다.“사모님, 노여움 푸세요. 아시다시피 대표님 좀 편찮으시잖아요.”“지금 대표님의 일거족일거수에 대해 저 역시 이해가 되지 않은 편이에요.”박민정은 노여워할 리가 없다.6, 7년 전에 모든 억울함을 감수했던 그 여린 여인이 아니기에, 오로지 유남준을 바라보며 좋은 아내로 살아가려고 했던 그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기에 말이다.지금의 박민정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마음이 굳건하다.유남준이 오른 검은색 마이바흐에 대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할 수 있을 만큼.“잘 가요.”서다희가 뭐라고 더 하고 싶었으나 마이바흐 차창이 내리더니 안에 있던 유남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서 비서, 안 가고 뭐 해!”그 소리에 서다희는 박민정에게 멋쩍게 인사를 하고서 바로 차에 올랐다.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면서 박민정은 전혀 슬프지 않았다.유남준이 병으로 요 몇 년간의 기억을 잃었기에 슬프지 않았고 유남준에 대한 감정이 몇 년 전부터 바닥을 보이고 있었기에 슬프지 않았다.지금 유남준을 마주하고 있는 박민정의 감정에는 사랑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보이질 않을 미미한 정도이다.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박윤우는 슬퍼하기는커녕 무척이나 홀가분해하는 박민정을 보고서 약간 마음이 놓였다.‘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다행이야.’“엄마.”박윤우는 박민정을 나지막이 불렀다.박민정이 홀가분해하는 이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더 이상 유남준에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하물며 유남준에게 카드 한 장까지 받았으니 더더욱.“윤우야,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싶지 않아?”
순간 방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고 한겨울의 칼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그 칼바람은 그대로 유남준의 얼굴을 덮쳐갔다.서다희는 눈치껏 바로 전화를 끊었다.“대표님, 계속 얘기 나누십시오.”때가 이러하니 바로바로 빠지는 게 살길이 아닐 수 없었다.김인우는 지금 당장 서다희에게 하이킥을 날릴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의리 없이 화를 잔뜩 돋우고 나서 홀로 도망치려고 하니 말이다.“남준아, 내가 바래다줄까?”김인우가 개인 별장으로 온 이유는 허구한 날 결혼을 재촉하고 계시는 어르신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함이다.조하랑과 일 년간 만나보면서 결혼하겠다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으나 어르신은 모든 걸 간파하기라도 한 듯했다.결혼하고 나서 연애를 해도 된다면서.하지만 김인우는 아직 결혼으로 한 여인을 잡아둘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다.“아니.”유남준은 왠지 모르게 경호원에게 박민정이 즐겁게 잘 놀고 있다는 소리에 가슴이 답답해졌다.예상한 대답에 김인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말과 행동이 다른 유남준을 자기가 나서서 타일러 줘야 할 것 같다면서.“남준아, 너 그냥 돌아가는 건 어때? 형수도 분명 기분 나빠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싶어서 나가 걸 거야.”유남준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그의 말에 살짝 녹아든 느낌이었다.“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그래 그럼.”김인우는 더 이상 타이르지 않았다.계속 이에 대해 말하게 되면 불꽃이 자기에게로 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진주시 도시 중심.박민정과 도한 엄마는 밥을 먹고 나서 아이 옷들을 엄청 많이 샀다.박윤우와 정민기는 입구 벤치 쪽에 앉아 멍하니 있기만 했다.여자들이 왜 이토록 쇼핑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박윤우의 모습이다.“아저씨, 저 심심해요.”반듯하게 앉아 있는 정민기 역시 심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읻다.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기 언정 여자와 쇼핑을 하고 싶지 않았다.너무 힘들고 지루한 과정이기 때문이다.“나도 심심해.”정민기가 말했다.“6층에 오락실 있지 않아요?
“왜요?” 주영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주연 무용수를 다시 맡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제 와서 필요 없다니.“더 잘 추는 사람을 찾았거든.” 무용 선생님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사실 선생님은 박민정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이 말이 주영리의 분노를 더욱 부추겨 이후 박민정이 큰일을 당할 뻔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그 사람이 누구인데요?” 주영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잠시 후 무대에 오를 거야. 보면 알겠지만 정말 주 비서가 따라갈 수 없는 실력이더라.” 무용 선생님은 담담하게 말했다.주영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지금껏 동료들에게 자신이 주연 무용수로 공연한다고 떠벌렸는데 이게 모두 헛소리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도대체 누가 그녀를 대신하게 됐는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호텔 밖에서는 고급 차들이 하나둘씩 도착하며 적지 않은 기업인들이 차에서 내렸다.박민정의 회사 사장인 제임스는 특별히 중요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은은한 고급스러움을 자랑하는 한 대의 링컨 차량이 천천히 호텔로 들어섰다.이를 본 제임스의 눈이 반짝였고 그는 직접 차량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유 대표님.”차에서 내린 사람은 유남준이었다. 그는 제임스와 간단히 악수를 나눴다.“유 대표님, 조용히 대화 나눌 수 있는 전용 룸을 준비해뒀습니다. 함께 가시죠.”“좋습니다.”제임스는 유남준을 모시고 2층의 특별실로 향했다.이를 지켜본 회사 직원들은 사장이 젊은 외국 남성에게 이렇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의아했다.“저 사람 누구야? 사장님이 저렇게 친절한 건 처음 보는데?”“몇 년 전 협력 파트너라고 하던데, 엄청난 실력을 가진 사람이래.” 누군가가 대답했다.“외모도 멋지네. 설마 대기업 대표일 줄이야.”직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그때 박민정이 그들 앞을 지나며 대화 내용을 듣게 되었고 무심코 유남준이 사라져간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은 어딘가 익숙했지만 곧 시야에서 사
박민정은 주영리가 이렇게 서두를 줄 몰랐지만 더 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 자신의 상태를 솔직히 설명했다.“그럼 공연 당일에는 무용이 가능하다는 말이지?”“네, 당일에는 문제없을 것 같아요. 다만, 그전까지는 연습이 힘들 것 같아요.”무용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한숨 돌렸다.“그럼 괜찮아. 공연만 잘하면 돼. 민정 씨 연습 수준이라면 당일엔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거야.”그녀는 확신했다. 몇 날 며칠을 연습하지 않아도 박민정의 실력은 주영리보다 월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알겠습니다. 그럼 이틀간만 쉬겠습니다.”“그래, 푹 쉬어.”박민정은 문득 떠오른 듯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주 비서님에겐 다른 무용수를 섭외했다고만 말해주세요.”무용 선생님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왜?”박민정은 자신의 부상 이유와 병원에 가게 된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뭐? 주영리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아까 와서 주연 무용수 자리를 달라고 하더니, 민정 씨가 오후에 넘어졌다길래 이상하다 싶었어. 주영리의 품성이 이렇게 바닥일 줄은 몰랐네!”선생님은 화가 나면서도 박민정의 부탁을 이해했다. 그녀 역시 주영리가 또 다른 수를 쓰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그 후, 박민정은 온라인으로 이틀간의 휴가를 신청했다.주영리는 박민정이 부상을 당했으니 굳이 더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휴가를 승인하고는 집으로 돌아가 춤 연습에 몰두했다.그녀는 반드시 공연 당일 모두를 놀라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회사의 중요한 인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무용 선생님은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정의감이 강한 그녀는 주영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주 비서, 민정 씨가 부상으로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됐어. 주 비서가 주연 무용수를 맡을 수 있을까?”주영리는 일부러 망설이는 척했다.“저요? 선생님, 예전에 제가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나섰다가 공연을
병원에서 의사는 박민정의 다리를 엑스레이로 찍고 정밀 검사를 진행했다.“다리 관절 부상이 꽤 심합니다. 최소 일주일은 쉬셔야 하고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어요.”“그 정도로 심각한가요?”박민정은 단순히 넘어져서 조금 아플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놀라며 물었다.“네, 관찰 결과 그렇습니다.”“하지만 며칠 후에 무용 공연이 있는데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조급한 표정으로 묻는 그녀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어났다.무용 선생님이 자신을 회사에 추천한 만큼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더구나 오랜 시간 연습한 공연을 이렇게 포기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됩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근육과 뼈에 무리가 갔습니다. 집에서 잘 쉬셔야 해요. 움직임은 최소화하셔야 하고 춤은 절대 안 됩니다.”의사는 약을 처방하며 그녀에게 집에서 충분히 쉬라고 당부했다.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박민정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다리 관절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그때 주영리가 전화를 걸어왔다.“민정 씨, 병원에서는 뭐래요? 많이 다친 건 아니죠? 보니까 꽤 심하게 넘어졌던데. 상태가 심각하면 며칠 휴가 내고 푹 쉬어요.”주영리의 목소리는 겉으론 걱정하는 듯했지만 속내를 들킨 듯한 뻔뻔함이 느껴졌다.박민정은 손을 꽉 쥐며 차분히 대답했다.“좀 심각하긴 해요. 의사가 될 수 있으면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도 출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어머, 큰일이네! 다리를 다쳤는데 그럼 주연 무용수는 어쩌죠?”주영리는 놀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이제 박민정이 빠지면 자신이 주연으로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저도 모르겠네요.”박민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마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주영리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며 더욱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이런 기회는 또 있을 테니까요! 내가 선생님께 잘 얘기해볼게요. 민정 씨는 푹 쉬고
해외.지난번 박민정이 회사 직원들에게 한 방 먹인 후, 직원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일을 그녀에게 떠넘기지 않았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박민정은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 철저히 고립되었다.모두가 그녀를 외면했으며 주영리는 그녀에게 가장 어려운 업무만 할당했다.“민정 씨, 당신 능력 좋잖아요? 능력 있는 사람이 더 일하는 게 당연하죠. 설마 이번에도 사장님께 가서 이건 내 일이 아니라고 할 거예요?”주영리는 비꼬는 어투로 말했다.다른 인턴이었다면 벌써 그녀의 이런 태도에 못 이겨 회사를 떠났을 것이다.하지만 박민정은 달랐다. 주영리가 아무리 어려운 업무를 맡겨도 그녀는 끝내 방법을 찾아 일을 완벽히 마무리했다.사내 동료들은 그녀를 외면했지만 아래층에서 오후에 진행되는 댄스 연습에서는 다른 부서 직원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다들 박민정의 성격을 좋아했고 그녀와도 꽤 좋은 관계를 맺었다.주영리는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녀는 그저 박민정이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박민정은 오히려 더욱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사장은 그녀를 몇 차례나 칭찬했다.“실제로 민정 씨는 인턴 같지 않아. 정직원보다 훨씬 뛰어나니까.”그 말을 들을 때마다 주영리의 마음은 질투로 불타올랐다.이제 곧 국내 손님들을 맞이할 행사를 준비해야 했고 직원들의 업무도 점점 바빠졌다.주영리는 박민정이 참여하는 댄스 연습을 보러 갔다가 그녀가 주연 무용수로 가장 앞에서 춤추는 모습을 목격했다.백조처럼 눈에 띄는 그녀의 모습에 주영리는 속이 끓어올랐다.만약 박민정이 이번에 주연으로 나서고 국내 사장들에게 눈에 띄게 된다면 그녀는 단숨에 회사에서 입지를 다질 것이 분명했다.사실 주영리는 주연 자리에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박민정이 자신을 대신하게 된 걸 깨닫자 깊은 후회와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원래 이 자리는 내 거였어!”주영리는 무용 선생님을 찾아가 따졌다.“분명 예전에 제가 주연 하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왜
유남준은 잠든 아들이 꿈속에서조차 자신을 두려워하며 박민정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박윤우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뒤 다시 서재로 향했다.여전히 찾아내지 못한 박민정의 행방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없이 다른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피곤함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워도 그의 눈은 감기지 않았다.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그녀를 찾을 수 없던 걸까?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정말 죽었단 말인가?‘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는 단호히 부정했다.‘아니야. 민정이는 절대 죽지 않았어. 만약 민정이가 정말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그렇게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이고 아침이 되자 전화벨 소리가 그의 짧은 잠을 깨웠다.전화를 보니 서다희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민정이에 대한 소식이라도 있어?”서다희는 상사의 질문에 솔직히 답했다.“아직 없습니다.”“그럼 무슨 일이야?”“제임스 씨 기억하시죠? 다음 주 해외에서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네요. 해외 무역 관련해서 논의하고 싶답니다.”“좋아. 일정 잡아.”전화를 끊기 전 유남준은 다시 물었다.“아직 조사하지 않은 곳은 얼마나 남았지?”세상은 참 크다고 하면 작다고 하면 작았다.서다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전 고민했다. 모든 곳을 다 찾으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몰랐다.“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미 확인했지만 이번에 제임스 씨 고향은 아직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겸사겸사 그쪽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좋아. 그리고 다른 지역도 인력을 더 투입해.”“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던 그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바로 움직였다.그의 얼굴은 한 해 동안 한층 늙어 보였고 깔끔하게 정리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박윤우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그는 보모에게 아이를 잘 돌봐달라고 당부한 뒤 집을 나섰다.그가 향한 곳은 IM이 아닌 박민
고영란은 그 말을 듣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이미 두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윤우까지 맡으라니! 너야말로 아이들의 아빠잖아!”유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윤우는 여기 두고 가세요.”어차피 집에는 가정부와 집사가 있었기에 그가 굳이 박윤우를 직접 돌볼 필요는 없었다.“그래야지. 윤우는 너한테 맡길게. 난 이제 가보마.”고영란은 단호하게 말했다.거실에 앉아 있던 박윤우는 이 모든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떨궜다. 사실 그는 집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엄마를 아직 찾지 못한 지금, 유남준과 단둘이 있는 시간은 그에게 끔찍한 고역이었다.하루 종일 숙제나 문제 풀이를 강요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고영란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본 박윤우는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할머니, 이제 가시는 거예요?”그는 속으로 외쳤다. ‘할머니,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하지만 고영란은 그의 진심을 알아채지 못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 난 이제 가야 해. 너는 아빠랑 잘 지내도록 해. 네 아빠는 지금 온몸에 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잖니.”고영란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박윤우는 할머니의 상황을 이해했기에 마지못해 그녀를 현관까지 배웅했다.고영란이 떠난 뒤 그는 방으로 들어가 게임이라도 하려는 찰나였다.그때 위층에서 유남준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윤우.”그는 순간 긴장하며 움찔했다. 그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2층 복도에 서 있는 아빠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위로 올라와.”박윤우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아빠, 또 뭔데요?”그는 투덜거리며 물었다.“숙제 검사.” 유남준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본가에 가기 전에 준 두 장의 문제지 어디 있지?”박윤우는 땅속으로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그게... 깜빡하고 안 가져왔어요.”그는 더듬거리며 변명했다.하지만 유남준은 화내지 않고 무표정하게 말했다.“그
박민정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유남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직장은 어때?]그녀는 짧게 답했다.[괜찮아요.]하지만 유남우는 그녀의 대답에 묘한 걱정이 들었다.그는 박민정이 직장에서 오래 일하며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다 보면 혹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까 두려웠다.[만약 힘들거나 맞지 않는다면 그만둬도 돼.]그는 다정하게 말했다.[네, 알겠어요.]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오히려 지금 직장은 그녀에게 도전 의식을 심어주고 있었다.무엇보다 그녀는 집에만 갇혀 있던 지난 1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며 지루함에 지쳐 있었다.이제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머리도 한층 더 빠릿빠릿해진 기분이었다.유남우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향했다.비록 유남우가 그녀를 위해 가사 도우미를 고용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일하는 게 더 편했다.별다른 일이 없을 때는 직접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진주시 유씨 집안의 오래된 저택에서.유남우는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지만 한동안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윤소현이 위층으로 올라왔다.유남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일부러 휴대폰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욕실로 들어갔다.역시나 그가 자리를 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소현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의 휴대폰을 들여다봤다.마침 그때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발신자는 어제 본 것과 동일한 프로필 사진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평범했다.“정말 감사해요. 당신 덕분에 이 직장을 구할 수 있었어요.”윤소현은 의아해하며 메시지를 유심히 읽었다.그때 욕실에서 유남우가 조용히 걸어나왔다.“뭘 보고 있어?”그의 목소리에 윤소현은 깜짝 놀라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아까 누가 메시지를 보낸 걸 봤어요. 당신이 직장을 구해줬다면서 감사하다고 하던데요.”유남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아, 별거 아니야. 예전에 한 고객의 딸이 해외에서 공부를
회사 직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박민정이 어떻게 그들의 업무를 제쳐두고 사장에게 이런 상황을 고발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사장은 박민정의 말을 듣고 문서들을 다시 살펴보았다.그 양은 분명 인턴 한 명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그는 고개를 들어 주영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주 비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왜 주 비서랑 다른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를 인턴에게 맡기는 거지?”“만약 이런 식이라면 내가 아예 새로운 직원을 뽑는 게 낫지 않나?”“아니면 당신들이 직접 이 인턴에게 급여를 주고 있는 건가?”주영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장님,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저는 단지 동료들에게 일이 너무 많으면 우선 민정 씨에게 맡기라고 말했을 뿐입니다.”그러나 사장은 더욱 화가 난 듯 말했다.“우리 회사의 업무는 이미 적절히 분배되어 있어. 이 인턴이 오전 동안 두 건의 번역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하다면, 왜 당신들은 자신의 업무조차 제시간에 끝내지 못하는 건가? 이건 당신들의 업무 능력을 재검토해야 할 문제로 보이네.”사장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려 하자 주영리는 억울한 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사장님, 민정 씨가 번역을 그렇게 빨리 끝낸 건 분명 번역 소프트웨어를 사용했기 때문일 겁니다.”평소 이런 전문 문서는 번역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며 보통 오전 동안 한 건을 완성하기도 어려웠다.사장은 그녀의 말을 듣고 박민정이 제출한번역 문서를 들어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잠시 후, 그는 문서를 주영리에게 건넸다.“직접 확인해 봐.”주영리는 서둘러 문서를 받아 살펴보았다.문법은 물론 표현까지 완벽하게 번역되어 있었고 소프트웨어로 번역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믿기지 않아 다른 문서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사장은 이제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 말했다.“주 비서는 회사에서 2년 동안 일했지만 번역된 문서들에서 종종 실수가 발견되곤 했어. 그런데 민정 씨는 아직 인턴이야. 민정 씨가 뒷문으로
박민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배운 적이 있어요.”“역시! 내가 어쩐지 민정 씨 기본기가 너무 좋다 했지. 정말 귀한 인재를 만났네!” 무용 선생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매년 직원들에게 춤을 연습시키며 몇몇 주요 인사들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몸이 굳어 안무를 익히는 데 애를 먹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빠르게 연습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가 퇴근 준비를 하러 갔다.하지만 사무실에 도착하자 모든 동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 시선들에는 구경거리 보듯 즐기는 눈빛도, 적대적인 눈빛도, 안쓰러운 눈빛도 섞여 있었다.박민정은 의아한 마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막 앉으려는 순간 주영리가 사장실에서 나오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민정 씨, 아까 작업을 다 끝냈다고 했죠? 서랍을 열어서 그 문서들 좀 가져와요. 사장님께 보여 드리게.”박민정은 주저하지 않고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열고 문서들을 꺼냈다.주영리는 그것들을 받아 펼쳐 보더니 눈에 띄게 동공이 흔들렸다.잠시 후, 주영리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 이렇게 많은 문서 중에서 민정 씨가 번역한 건 고작 몇 장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빈칸이잖아? 이래놓고 일을 다 끝냈다고?”“내가 말했잖아요. 뒷문으로 들어온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고. 무능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네!”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비난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주영리는 계속 몰아붙였다.“좋아요, 사장님 만나러 가요. 민정 씨가 얼마나 일을 대충 했는지 직접 보여 드리자고!”그녀는 박민정의 팔을 붙잡고 사장실로 향했다. 이미 사장에게 상황을 미리 고발해 둔 터라, 문도 두드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사장은 외국인이었다.그는 일하기 싫어하는 태도나 무책임한 행동을 싫어했다.박민정과 주영리가 들어오는 것을 본 사장은 의자에 기대앉아 외국어로 물었다.“영리 씨, 민정 씨가 정말 일을 다 안 끝냈나?”그는 원래 이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