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이는 울고불고 난리 치며 엄마에게 유치원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박예찬과 함께 유치원을 다니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다.지원 엄마는 박민정과 도한 엄마가 모두 앞에 있는 것을 보고서 더 이상 그 어떠한 체면도 차리지 않은 채 몸을 쪼그리고 앉아 지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이윽고 덩달아 울먹이며 말했다.“엄마가 분명히 말했었지! 너 퇴학당한 거야. 앞으로 유치원에 갈 수 없어.”“계속 이렇게 말 안 들으면 엄마 너 때릴 거야.”미치고 날뛰는 자기 엄마의 모습을 보고서 지원은 놀라움에 울음을 터뜨렸다.옆에서 보고 있던 박민정과 도한 엄마는 같은 엄마로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지원이가 퇴학당한 이유가 모두 지원 엄마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박민정에게 아부를 떨다가 최현아에게 꼬리를 흔들다 보니 양쪽에 모두 외면을 당하게 된 것이다.지원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자 지원 엄마는 아이를 때리려고 했다.이에 지원이는 전보다 더욱 세게 울기 시작했다.“울지 말라고! 왜 울고 난리야!”하지만 이 모든 게 보여주기식으로 느껴졌다.박민정과 도한 엄마는 더 이상 그 ‘쇼’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 없었다.도한 엄마가 먼저 나서서 말렸다.“지원 엄마,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만 화 좀 풀어요.”자기에게 이목이 쏠리자, 지원 엄마는 마침내 ‘다음 씬’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우리 지원이 유치원에서 엄청 착했는데 퇴학하고 난 뒤로 예찬이를 입에 달고 있었지 뭐예요. 보고 싶다면서 하루가 멀다고 울먹이며 애간장을 태워서 제가 아주 피 말라죽을 것 같아요.”지원이는 울면서 말했다.“예찬 오빠가 좋단 말이에요.”지원 엄마는 연기일지 모르겠지만 지원이는 진심이었다.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박민정은 그제야 소리를 냈다.“지원이는 왜 갑자기 퇴학당한 거죠?”지원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운을 떼기 시작했다.“최현아 씨 눈엣가시가 돼서 그래요. 최현아 씨 말 한마디에 바로 퇴학당하게 된 거예요.”최현아는 자기
도한 엄마와 함께 돌아가는 길에 도한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예찬 엄마, 조금 전에 엄청 잘하셨어요. 그렇게 앞뒤가 다른 사람은 동정할 가치조차 없거든요.”“단물만 쏙 빼 먹고 바로 버리는 사람을 친구로 둘 필요도 없고요.”박민정이 덧붙였다.도한 엄마는 그 말에 무척이나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집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씻고 나서 쉬려고 했다.침대에 눕자마자 지원 엄마로부터 메시지가 보내왔다.[예찬 엄마, 저한테 원생 엄마들에 관한 스캔들이 엄청 많아요. 그중에 최현아 씨 스캔들도 포함되어 있는데.]박민정은 순간 구미가 당겼지만, 믿어지지 않았다.[그런 게 있었다면 바로 최현아 씨한테 말하지 그랬어요? 그럼, 지원 엄마한테 어찌할 수도 없었을 거잖아요. 아니에요?]얼마 지나지 않자 지원 엄마의 답장이 도착했다.[우리 심씨 가문과 유씨 가문은 서로 적으로 상대하고 있는데, 만약 최현아 씨가 제 손에 약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저를 죽이려고 들 거예요.][그럼, 제 편을 들겠다는 거죠? 그렇다면 어느 정도 성의를 보여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박민정은 지원 엄마를 바로 믿기로 하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 엄마는 최현아에 관한 스캔들을 보내왔다.이를 열어본 박민정은 저절로 동공이 움츠러들고 말았다.[정말이에요?][그럼요. 최현아 씨 집으로 우연히 갔을 때 제가 몰래 본 거예요.]지원 엄마는 재벌 집 사모님들과 모임을 가질 때 손에 쥐고 있는 권력도 예쁜 외모도 없어 늘 공기 취급을 당하는 편이었다.바로 그러한 이유로 몰래 많은 비밀을 염탐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박민정은 마침내 지원 엄마는 아주 큰 쓸모가 있는 사람임을 확신하게 되었다.지원 엄마가 지난번에 준 학부모회 구성원이 적힌 자료에서 많은 재벌가 사모님을 발견하게 되었었다.만약 그 사모님들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된다면 아마 앞으로 바움 그룹을 다시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흥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박민정은 살짝 멋쩍어했다.“예찬이랑 윤우 아빠야.”그 소리에 에리는 더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하지만 더는 말하지도 묻지도 않고 밀크티를 손에 쥐고 하염없이 마셨다.남자 연예인으로 몸매 유지를 해야 하나 박민정이 건네준 밀크티였기에 주저 없이 마셨다.두 사람은 간단하게 밥을 먹고 나서 바로 녹음실로 향했다.박민정은 프로다운 모습으로 에리 신곡 녹음을 지도해 주었다.일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은 유난히 빨리 지나갔다.모든 걸 마치고 나오자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파파라치에게 찍혀 에리에게 폐를 주고 싶지 않아 박민정은 운전기사에게 마중을 오라고 했다.에리는 그녀가 떠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매니저가 오고 나서 그에게 물었다.“오늘 녹음 엄청 잘했더라?”에리는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그럼, 민정이가 옆에서 도와줬잖아.”매니저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아쉬울 따름이야. 듣는 쪽이 아니라 부른 쪽이라면 너보다 훨씬 유명해졌을 건데 말이야.”에리는 웃으며 말했다.“만약 가수로 데뷔한다면 나, 민정이 일호 팬으로 영원히 남을 거야.”“하도 겸손해서 말이지. 지금 잘나가고 있는 곡들도 모두 민정이가 만든 건데.”에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음 곡에 조금만 더 힘을 실으면 안 돼? 한 곡 더 터지면 그때 박민정 씨에 관해 언급해도 되는 거잖아.”매니저의 제안에 에리는 고개를 저었다.“지금껏 나랑 다니면서 민정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 겸손하고 조용하게 사는 게 민정이잖아.”“하긴.”매니저는 그렇게 뛰어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 왜 배후에만 머물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민정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박윤우부터 챙기고 바로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애어른인 박예찬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시름이 놓이는 편이다.이번에 해외에서도 선생님이 해내지 못한 것도 기특하게 해냈으니 말이다.하지만 박민정에게 있어서 박에찬은 어린아이일 뿐이다.“엄마, 나 잘 지내고 있어. 모레면 귀국할 건데 엄
“아빠, 저 지금 몰래 전화하고 있는 거예요.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박윤우는 말을 하고서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고 수화기 너머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유심했다.다행히 다른 여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유남준은 박민정이 뒤에서 시켜서 전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실망했다.예전과 같았다면 박민정은 겨우 3일 정도 버티고 바로 전화를 걸어왔었다.하지만 지금은 3일이 코 앞임에도 불과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무슨 일이야?”박윤우에게 말하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부하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보고 싶어서 전화한 거예요. 내일 아빠 만나러 가면 안 돼요?”박윤우는 직접 쓰레기 아빠가 있는 곳으로 확인하러 가고 싶었다.어떠한 여우가 틈을 공략하고 들어왔을 수도 있다면서.“안 돼.”유남준은 더없이 차갑게 거절해 버렸다.순간 박윤우는 말 문이 막혔지만 바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아빠, 예쁜 윤우 이젠...”하지만 애교를 채 부리기도 전에 전화가 끊겨 버렸다.박윤우는 어안이 벙벙해졌고 유남준의 무정함에 한 방 맞은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유남준에게 비밀이 있다는 의심이 커졌다.오지 말라고 하는 걸 봐서는 더더욱.박윤우는 내일 금요일에 홀로 유남준을 찾아가 보겠다고 다짐했다.유남준의 거처를 모르고 있으나 전화로 서다희에게 물을 수 있다.이튿날 아침, 박윤우는 화장실을 본다는 명의로 서다희에게 몰래 전화하여 유남준의 거처를 알아냈다.서다희는 겉으로 보기에 세상 딱딱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어린아이에게 그 어떠한 항마력도 없는 사람이다.특히 박윤우의 애교를 마주하게 되면 사르르 녹아버리고 만다.서다희는 바로 유남준의 현재 거처를 술술 알려주었다.박민정은 박윤우의 계획을 모르고 있었고 오늘 두 시간 늦게 하교한다는 소식만 듣게 되었다.“알았어. 그럼, 정민 아저씨보고 좀 늦게 데리러 가라고 할게.”“좋아.”박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두 시간이면 유남
박윤우는 그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렸는데, 낯설지만 청순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보였다.여자는 츄레이닝복에 포니테일을 하고서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박윤우는 다시 고개를 돌려 번지수를 확인했는데, 틀림없었다.‘뭐지? 쓰레기 아빠 찾아온 여우인가?’“아줌마, 혹시 여기 집주인이세요?”박윤우는 떠보면서 물었다.추경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여긴 우리 사촌 오빠 집이야. 오빠 찾으러 온 거야.”말을 마치고 추경은은 박윤우를 자세히 훑어보았다.“너 설마 우리 남준 오빠 아들 아니지?”먼 친척임을 확인하고 박윤우는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딩동댕이에요.”“와, 이렇게 다 만나는구나. 난 또 잘못 찾아온 줄 알았잖아. 난 추경은이라고 하고 앞으로 경은 이모라고 부르면 돼.”추경은?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었다.박윤우는 추경은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를 맡고서 약간 어지러웠다.“경은 이모, 저 좀 내려주세요.”하지만 추경은은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았다.“이모 좀만 더 안고 있자.”추경은이 그러면 그럴수록 박윤우는 혐오감이 들어 발버둥을 치기까지 했다.하는 수 없이 추경은은 그를 내려놓아 주고서 벨을 눌렀다.“누구시죠?”“남준 오빠, 나 경은이야. 오빠 보려고 온 거야.”추경은은 유남준이 혹시나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봐 한마디 덧붙였다.“여기 윤우도 있어.”박윤우는 마냥 의아하기만 했다.“경은 이모,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너랑 네 형에 대해서 할아버지께서 가족 단톡방에 이미 올리셨어. 지난 명절 때도 찾아갔었고. 그대 너랑 네 형 모두 본 적 있어.”박윤우는 그제야 익숙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하지만 박예찬처럼 뛰어난 기억력이 없어 단번에 알아볼 수 없었다.두 사람은 입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이때 경비원이 다가와 말했다.“죄송합니다만 대표님께서 두 분 모두 뵙고 싶지 않다고 전해달라고 하십니다.”추경은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갖은 곡절을 겪
추경은은 순간 난처하기 그지없었다.유남준이 자기를 잊고 있으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난처함도 잠시 추경은은 설명하기 시작했다.“남준 오빠, 나 추경은이야. 어릴 적부터 함께 놀면서 우리 엄청 친하게 지냈었잖아. 오빠 결혼하던 그해에 만나기도 했었는데.”한편에 서 있던 박윤우는 추경은의 대답에 계속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추경은이 누군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괴로웠다.‘형 있었더라면 좋았을걸.’그러더니 갑자기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조급한 모습을 드러냈다.“아빠, 저 쉬 마려워요.”박윤우가 화장실에 가려고 하자, 유남준은 눈살을 찌푸렸다.“혼자서 가.”“네.”“박윤우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화장실에 도착한 그는 물을 최대한으로 가장 크게 틀고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시차로 박예찬이 있는 쪽은 새벽이다.한참 잘 자고 있었는데 동생 박윤우의 전화에 바로 깨어난 것이다.“박윤우! 여기 지금 몇 시인지 알아?”박예찬은 뭐나 다 좋지만 자고 있을 때 건드리면 성질이 좀 사나워진다.“형, 일단 진정하고 추경은이 누군지 알려줘.”직감이 말해주고 있는데, 추경은은 좋은 캐릭터가 아닌 것 같았다.박예찬은 바로 침착하고 기억을 더듬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걸 기억해 냈다.“우리 아빠 할아버지께서 전에 후씨 가문의 한 어르신을 구해주셨는데, 추경은은 바로 그 어르신의 손녀야. 두 어르신은 그 일을 계기로 서로 형제 사이를 맺게 된 것이고. 증조 할아버지께서 젊으셨을 때 두 가문의 관계는 엄청 좋았는데, 지금으로서는 양 가문의 차이가 너무 커서 그리 자주 연락하고 계시지 않아. 유씨 가문은 점점 더 강대해지고 있으나 추씨 가문은 점점 바닥을 치고 있으니 말이야.”박예찬은 자기가 유남준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유씨 가문에 대해 샅샅이 알아보았다.박예찬의 말을 듣고서 박윤우는 작은 손을 불끈 쥐었다.“그럼, 사촌 동생도 아니었네.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사촌 동생 이라니? 우리 아빠랑 그 어떠한 혈연관계
박윤우는 바로 머릿속으로 재산 쟁탈 전쟁을 벌이는 막장 드라마를 상상해 냈다.정신을 차리고 나서 박윤우는 바로 추경은 앞으로 달려갔다.“경은 이모, 얼른 일어나세요. 우리 아빠 돈 엄청 많아요. 소는 얼마든지 살 수 있어요.”그 말에 추경은은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윤우, 이모가 소처럼 일할 수 있다고 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들으면 안 돼.”박윤우는 알 듯 모를 듯했다.“그럼, 무슨 뜻인데요?”말문이 턱 막힌 추경은은 순간 어떻게 박윤우에게 설명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이곳에 남고 싶은 마음은 굴뚝과 같으나 유남준이 거절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추경은은 바로 박윤우를 붙잡았다.이곳에 남을 수 있는 가장 관건이 되는 인물이 박윤우라고 느끼면서.“그냥 예를 든 것뿐이야. 윤우야, 넌 이모가 이곳에 남았으면 좋겠어? 이모 매일 다양하게 맛있는 것도 만들어줄 수 있고 우리 윤우 학교까지 바래다 주고 주말에는 같이 게임도 할 수 있는데.”유남준 앞에서 그의 아들을 유인하는 건 아마 추경은만이 할 수 있는 짓일 것이다.추씨 가문 어르신의 체면을 감안하여 유남준은 바로 화를 내지 않았다.“그럼, 이모 저 엉덩이도 닦아줄 수 있어요?”박윤우가 대뜸 물었다.순간 추경은은 안색이 확 달라지고 말았다.‘엉덩이를 내가 왜?’지금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도 추경은은 추씨 가문의 천금이다.“당연하지.”하지만 입으로는 생각과 반대되는 말을 했다.“그럼, 지금 닦아주세요. 제가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잊어먹고 그냥 나왔거든요.”말을 마치고 박윤우는 바로 몸을 돌려 엉덩이를 추경은에게 보였다.“이모, 손으로 닦으셔야 해요. 티슈로는 안 되거든요. 엄마가 티슈로 닦으면 저의 여린 피부에 상처가 생긴다고 했었어요.”그 말에 추경은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손으로 닦아? 누가 그래?’놀라기는 했지만 이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윤우야, 엉덩이도 제대로 안 닦고 바로 나온 거야?”“가자, 일단 화장실로 가. 이모가 새 옷이랑
화장실 안에는 더러운 것들이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추경은은 하마터면 바로 토할 뻔했다.하지만 유남준과 결혼하여 그의 곁에 남고 싶어서 그 힘든 걸 참아내기 시작했다.샤워기를 손에 들고서 주위를 물로 씻어내고 나서 박윤우의 바지를 씻기 시작했다.박윤우는 문 앞에 서서 그런 추경은을 바라보고 있었다.당장이라도 노발대발할 것처럼 보이나 억지로 역겨움과 화를 꾹꾹 억누르며 바지를 씻고 있는 추경은의 모습을.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쾌해지는 순간이었다.“이모, 싫으시면 그만 나오세요. 아빠가 씻어줄 거예요.”멀리서 앉아 있던 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서 눈살을 찌푸렸다.엉덩이도 스스로 닦지 못하면서 바지에 묻히고 다니는 박윤우를 때리지 않은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한다면서.박민정이 아이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화가 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윤우, 이리로 와.”박윤우는 유남준이 자기를 부르는 것을 듣고 긴 샤워타월을 잡고서 짧은 다리로 빠르게 달려갔다.“아빠, 저 보고 싶어서 부리신 거죠?”박윤우는 말하면서 조금 더 가까이 가려고 했다.“거기 서.”하지만 유남준이 그를 그 자리에 바로 세우고 말았다.“거리를 좀 두는 게 좋겠어.”박예찬의 심한 결벽증은 바로 유남준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박윤우가 엉덩이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자 얼굴이 다 일그러졌다.“어린아이도 아니고 아직도 엉덩이 닦을 줄 모르는 거야?”유남준이 물었다.박윤우는 말 문이 막혔다.추경은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그러한 것인데, 자신이 이렇게 다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유남준이 자기를 무척이나 싫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그...”뭐라고 설명할 말도 딱히 없었다.유남준은 그가 인정한 셈을 쳤다.“오늘부터 잘 배워. 또다시 다른 사람한테 엉덩이 닦아달라고 부탁한다면 그땐 널 화장실로 버려버릴 거야.”“네.”박윤우는 입술을 삐쭉내밀고 계속 유남준을 떠보려고 했다.“아빠, 저 싫어요?”손을 내밀어 유남준을 다치자마자 바로 손목이 잡혀버
방 안에서는 이미 유성혁이 상의를 벗은 채 박민정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그때, 최현아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여보!”“뭐야?” 유성혁은 갑작스러운 방해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유남준이 돌아왔어요.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까 얼른 옷부터 입어요!” 최현아가 다급하게 외쳤다.유성혁은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어떡하지? 어떡하지? 유남준이 내가 박민정과 함께 있는 걸 알게 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에요. 얼른 옷 다 입고 숨어요. 여기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최현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유성혁은 허겁지겁 옷을 걸쳐 입으며 당부했다.“꼭 나랑 관련 없는 일처럼 해줘. 아직 아무것도 못 했다고!”“알았어.” 최현아는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를 방에서 밀어내고 나서야 최현아는 박민정 쪽으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동서.” 그녀는 살며시 불렀다.박민정은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최현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유남준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기를.그녀는 박민정의 몸을 가볍게 감싸 이불을 덮어준 후,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잠시 후, 약효가 다소 풀렸는지 박민정은 흐릿한 눈빛으로 천천히 눈을 떴는데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웠다.그때였다.쿵!문이 거칠게 열리며 유남준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민정이는 어디 있어요?”최현아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을 막아섰다.“남준 씨! 갑자기 웬일이에요? 마침 남준 씨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요.”유남준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민정이는요?”“아마 술을 잘 못 마셔서 그런가 봐요. 지금 쉬고 있어요. 원래 남준 씨 방으로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전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최현아가 태연한 척 대답했다.분명 박민정은 오늘 칵테일을 한 모금 정도 마셨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냥 음료나
박민정은 홀로 홀 대각에 앉아 있다가 어딘가 불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이 감각... 낯설지 않았다.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현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동서, 벌써 가려고?”“네.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가볼게요.”최현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내가 바래다줄까? 어차피 나도 딱히 할 일 없는데.”“아니에요, 괜찮아요.”박민정이 정중히 거절하자 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물었다.“그런데 남준 씨는? 어디 갔어?”“일이 있어서 나갔어요.”그 말을 듣자 최현아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그래? 그럼 다행이네. 내가 데려다줄게, 길을 잃으면 곤란하잖아.”“괜찮아요. 길은 기억하고 있어요.”설령 잊는다 해도 하인들에게 물으면 될 일이었다.박민정은 가볍게 웃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걸음을 옮길수록 몸이 이상했는데 발이 휘청이고 머리가 묘하게 어지러웠다.최현아는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다가왔다. 이대로 그녀를 그냥 보낼 리 없었으니까.“괜히 사양하지 마.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최현아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지금은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하지만 점점 시야가 흐릿해졌다.혹시 몸에 다시 문제가 생긴 걸까? 머릿속이 어지럽고 다리가 힘없이 풀렸다.마지막 남은 의식으로 박민정은 힘겹게 입을 뗐다.“...구급... 구급차를 불러줘요...”그러나 그녀가 완전히 쓰러지기 직전, 최현아가 그녀를 붙잡았는데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구급차? 정말 순진하기도 하지.”최현아는 비웃듯 말하며 박민정을 외딴 곳으로 끌고 갔다. 곧 어둠 속에서 몇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최현아가 지시한 대로 움직였다.박민정은 서쪽에 있는 빈집으로 실려 갔다.최현아는 남자들을 향해 싸늘하게 경고했다.“오늘 일
박민정이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기색이 어린 최현아의 시선과 마주쳤다.“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저쪽에서 사촌 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같이 갈래?”최현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요, 전 혼자가 좋아서요.”박민정은 조용히 거절했다.최현아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었지만 그 눈빛은 싸늘했다.“그래? 알겠어.”박민정은 그녀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최현아는 곁에 앉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최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나도 시끄러운 분위기는 별로야. 어차피 동서도 혼자고, 나도 혼잔데, 같이 있어도 괜찮잖아?”이렇게 나오니 박민정은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게다가 여기는 유씨 가문 안이었기에 자신이 뭐라고 그녀를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박민정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유씨 가문의 젊은 친척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 사이, 최현아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슬쩍 박민정의 잔을 힐끔거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교활한 빛이 스쳤고 이내 일부러 놀란 척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동서, 이것 좀 봐.”그녀가 화면을 내밀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화면에는 에릭에 대한 연예 뉴스가 떠 있었다.박민정이 그 기사를 읽는 사이, 최현아는 잽싸게 손을 뻗어 박민정의 잔을 건드렸다. 긴장한 듯한 그녀의 손길이 빠르게 움직였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에릭 씨, 동서네 회사 직원 맞지? 설마 남자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가십 뉴스잖아요. 아마 거짓일걸요.”박민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에릭이 그런 취향이라면 연지석과 그렇게 티격태격할 리가 없었다. 연지석처럼 잘생긴 남자가 앞에 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건 정말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였다.“그렇지? 요즘 매체들은 자극적인 소문을 너무 많이 퍼뜨려.”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문득 박민정에게 물었다.“오늘 밤엔 안 돌아가겠네?”
“뭐?”유성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고 곧이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비웃었다.“그 여자, 가식 떨기는 끝내주더니. 진짜 정절을 지키는 여자인 줄 알았잖아. 그리고 유남준, 그렇게 대단하다면서? 어째서 자기 동생 하나 제대로 손보지도 못하는 거야?”유성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최현아는 그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는데 그가 무슨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와서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여보, 당신이 예전부터 그 여자를 원했던 거, 난 다 알고 있어요. 내가 도와줄게요.”유성혁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당신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당신밖에 없어.”최현아는 그가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모습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당신이 날 사랑하는 건 알지만 동시에 여전히 민정 씨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난 다른 여자들처럼 질투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긴 듯했다.유성혁은 원래부터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순간적으로 그의 흥미가 자극되었다.“당신 정말 최고야. 하지만 박민정은 너무 고고한 척하는 년이잖아. 절대 동의하지 않을걸? 그리고 유남준이 알면 난 팔다리가 부러질 거라고.”최현아는 그가 결국 겁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여보, 당신은 참 어리석어요. 민정 씨가 거절하는 건 당신이 어디 가서 이 사실을 떠벌릴까 봐 그런 거죠. 내가 잘 설득하면 오늘 밤엔 당신 것이 될 거예요.”“정말이야?” 유성혁의 눈빛이 반짝였다.“당연하죠. 그러니까 깨끗하게 씻고 기다리고 있어요.” 최현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유성혁은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좋아! 약속한 거다!”그는 들뜬 표정으로 손을 비비며 자리를 떠났다.최현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박민정은 유남준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마치 새롭게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남준 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앞으로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하지 마.”둘은 부부였으나 박민정은 늘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이 말에 박민정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깜빡했어요.”“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마.” 유남준이 덧붙이자 박민정은 말문이 막혔고 무슨 말을 해도 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알겠어요.”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그 모습을 본 유남준은 다시금 마음이 아려왔다. “가자, 좀 쉬어야지.”“네.”박민정은 그의 뒤를 따라 두 사람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그곳에 도착하자 유남준은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고 집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이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던 박민정은 소파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맞다, 아이들은요?”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아이들은 본가에서 안전해. 게다가 오늘 가문의 여러 친척들도 모일 건데 아이들이 그 사람들과 친해지면 나중에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리를 비우는 게 실례가 되진 않을까요?”“아니.”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어.”그의 말에는 어떠한 허세도 섞여 있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의 능력을 믿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어젯밤 잠을 설친 탓인지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은 가끔씩 시선을 들어 그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예전에는 일할 때 누구도 그의 집중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박민정이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이었다.그가 얼마나 그녀를 바라보고
“아버지, 드세요. 이건 제가 직접 정성 들여 고운 탕이에요. 백세를 넘긴 한의학자의 비법을 배워 만든 거라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꽤 걸렸어요. 드시면 장수하실 거예요.”유석진이 아부하듯 말하자 유명훈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이냐?”“그럼요. 제가 아버지를 속이겠습니까? 제가 해외에서 돌아온 이유도 아버지를 잘 모시고 장수하시게 하려는 거죠.”유석진은 유남준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버지와 달리, 유명훈의 환심을 사는 데 능숙했다.그래서인지 유명훈은 늘 그쪽을 편애했다.“석진아, 우리 집에서는 네가 가장 효심이 깊구나.” 유명훈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물론 이 나이가 되면 누구나 늙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하지만 유명훈은 늙고 싶지 않았고 죽음은 더더욱 두려웠다. 그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에서 수혈을 받기까지 했다.“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동생과 아이들도 다 효심이 깊어요.” 유석진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유남준에게 보냈다. “그렇지, 남준아?”유남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말로 유명훈도 그의 성격을 아는 터라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다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히 있어라.”그렇게 말했지만 모인 이들은 각자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유명훈은 문득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민정아.”“네, 할아버지.” 박민정이 공손하게 대답하자 유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불렀다.이제 모두의 시선이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아, 넌 이제 우리 유씨 가문의 중요한 일원이야. 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냐?”“많이 나아졌어요.” 박민정은 조용히 대답했다.“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완전히 회복되면 가정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회사 일은 남준이에게 맡기고 말이다.”유명훈은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그가 유남준과 박민정의 결혼을 허락한 것도 당시 박민정의 가문이 유씨
박민정은 그에게 안긴 채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고 가슴 한편이 알 수 없는 먹먹함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어 유남준의 등을 두드렸다. “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자요.” 유남준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박민정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품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풀어냈다.이제는 그녀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발코니로 나가 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새벽 여섯 시가 되자 유남준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에게 덮여 있는 담요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있었다.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가 돌아왔을 때 박민정이 곁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간 걸까?혹시 꿈을 꾼 걸까 싶어 그는 2층 방으로 올라가 욕실에서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잠을 청했다.박민정은 그의 움직임을 들었지만 상태가 괜찮아 보이자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아침 여덟 시, 유남준은 평소처럼 정시에 일어났고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아한 태도로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는데 박민정은 그의 맞은편에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다가 놀라고 말았다.어젯밤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오늘은 마치 전혀 취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였다.유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하고는 눈을 들어 그녀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왜?”“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박민정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식사를 이어갔다.두 아이도 식탁 위의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결국 참지 못한 박윤우가 작은 목소리로 여름 박예찬에게 물었다. “형, 나 왜 집이 이상한 것 같지?”“조용히 하고 만두나 먹어.”“아, 응.”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가족들은 청명을 맞아 조상을 기리기 위해 본가로 향했다.차가 본가 대문 앞에 멈추자마자 고영란이 반갑게 달려 나왔다. “윤우야, 예찬아, 어서 할머니한테 오렴.”유남우도 그녀 옆에 서서 서슴없이 박민정을
유남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택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했는데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박민정은 다가가기가 너무 부끄러워 멀리서 그 여자 형체랑 똑같이 제작된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마음에 들어요? 저는 상관없긴 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이런 기괴한 물건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민정아,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아?”그의 말에 박민정은 깜짝 놀랐다.“왜요?”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구매한 물건이었다.“오해하지 말아요. 사람마다 생리적 욕구가 있기 마련이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희는 부부잖아요. 그렇죠?”유남준은 그녀가 자기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역시나 박민정은 그가 왜 화 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라가며 다시 설명했다.“원래는 다른 여자를 찾아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저희는 현재 부부잖아요. 또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서로 사랑했다고 해서 그렇게 처리하는 건 아닌 것 같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머리가 아파서 소파에 털썩하고 앉았다.“알겠으니까 그만 말해.”‘날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지?’‘그저 성욕을 못 참아서 안달 난 짐승으로 생각하나?’박민정은 그제야 입을 꾹 닫았는데 순간 거실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진 것 같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박민정이 그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자러 갈게요. 내일 옛 저택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그러나 유남준은 여전히 토라진 말투로 답했다.“응. 마음대로 해.”그러나 박민정은 그가 화 났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기쁜 마음으로 돌아섰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멍한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그냥 이대로 가는 거야?”그리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그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제우스 클럽.방성원과 유남준은 술을 마시며
그리고 침대에 던져지고 나서야 박민정은 이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재빨리 이불을 몸에 둘렀다.“오지 말아요!”그러나 유남준의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민정아, 나도 남자야.”시간도 많이 흘렀고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매일 그냥 잠만 자려고 하자니 그도 나름 괴로웠다.그리고 이 상태로 두 사람이 계속 지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병들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유남준은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그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하여 다 포기한 채 가만히 누워 온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엄마.”박예찬과 박윤우가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박민정을 불렀다.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진서연이랑 설인아, 그리고 민수아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두 아이도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있는 힘껏 유남준을 밀쳐냈다.하여 오늘에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멈춰야 했다.박민정이 황급히 방에서 나오니 두 아이가 마침 문 앞에 서 있었다.“엄마, 자고 있었어? 왜 얼굴이 빨개?”박윤우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게...”겨우 설명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유남준이 갑자기 방 안에서 나오더니 한껏 어두운 얼굴로 두 아이에게 물었다.“왜 벌써 왔어?”“추석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어요.”박예찬은 뭔가 눈치챈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러나 박윤우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엄마, 저 쓰레기 아빠랑 같이 잔 거야?”“아니.”박민정은 단번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저 찾을 물건이 있어서.”“무슨 물건인데?”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질문 공세에 박민정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가 겨우 답했다.“책.”“무슨 책? 나도 같이 찾아볼게.”“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