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안에는 더러운 것들이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추경은은 하마터면 바로 토할 뻔했다.하지만 유남준과 결혼하여 그의 곁에 남고 싶어서 그 힘든 걸 참아내기 시작했다.샤워기를 손에 들고서 주위를 물로 씻어내고 나서 박윤우의 바지를 씻기 시작했다.박윤우는 문 앞에 서서 그런 추경은을 바라보고 있었다.당장이라도 노발대발할 것처럼 보이나 억지로 역겨움과 화를 꾹꾹 억누르며 바지를 씻고 있는 추경은의 모습을.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쾌해지는 순간이었다.“이모, 싫으시면 그만 나오세요. 아빠가 씻어줄 거예요.”멀리서 앉아 있던 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서 눈살을 찌푸렸다.엉덩이도 스스로 닦지 못하면서 바지에 묻히고 다니는 박윤우를 때리지 않은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한다면서.박민정이 아이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화가 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윤우, 이리로 와.”박윤우는 유남준이 자기를 부르는 것을 듣고 긴 샤워타월을 잡고서 짧은 다리로 빠르게 달려갔다.“아빠, 저 보고 싶어서 부리신 거죠?”박윤우는 말하면서 조금 더 가까이 가려고 했다.“거기 서.”하지만 유남준이 그를 그 자리에 바로 세우고 말았다.“거리를 좀 두는 게 좋겠어.”박예찬의 심한 결벽증은 바로 유남준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박윤우가 엉덩이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자 얼굴이 다 일그러졌다.“어린아이도 아니고 아직도 엉덩이 닦을 줄 모르는 거야?”유남준이 물었다.박윤우는 말 문이 막혔다.추경은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그러한 것인데, 자신이 이렇게 다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유남준이 자기를 무척이나 싫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그...”뭐라고 설명할 말도 딱히 없었다.유남준은 그가 인정한 셈을 쳤다.“오늘부터 잘 배워. 또다시 다른 사람한테 엉덩이 닦아달라고 부탁한다면 그땐 널 화장실로 버려버릴 거야.”“네.”박윤우는 입술을 삐쭉내밀고 계속 유남준을 떠보려고 했다.“아빠, 저 싫어요?”손을 내밀어 유남준을 다치자마자 바로 손목이 잡혀버
해운 별장.한참이나 바삐 돈 추경은은 마침내 박윤우의 작품을 깨끗하게 정리했다.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옷에 향수를 엄청나게 뿌렸다.왠지 모르게 모든 걸 끝내고 나니 온몸이 소름이 돋아났다.앞으로 이런 아이의 새엄마가 될 생각을 하게 돼서 그런 듯싶다.만약 유남준과 결혼하게 된다면 반드시 박윤우를 바로 잡고 누가 이 집의 왕인지 제대로 보여줄 셈이었다.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일단 이곳에 남는 게 가장 중요한 미션이다.“남준 오빠, 청소는 내가 다 했어. 아직 밥 안 먹었지? 내가 준비할게.”계속 화장실 청소를 하느라 추경은은 유남준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펼쳐보지도 못했다.유남준에게 접근하기 위해 추경은은 요리 학원까지 다녔었다.하지만 유남준이 말을 하기도 전에 박윤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경은 이모, 이제 막 화장실 청소하고 나오셔서 바로 밥해주려는 거예요?”“뭐?”추경은은 안색이 굳어지면서 설명하기 바빴다.“나 깨끗하고 씻었어.”“근데 왜 냄새가 나죠?”박윤우는 커다란 눈으로 세상 무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바지 말려달라고 했잖아요. 저 입을 바지 없어요.”자기보다 훨씬 큰 샤워타월을 감고 있으니 무척이나 불편했다.“바지는 건조기에 돌리는 중이야. 이제 곧 뽀송뽀송하게 마를 거야.”추경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준비하고 있을게. 너 과자 좋아해? 이모 맛있는 과자도 만들 줄 알아.”박윤우는 추경은이 이토록 뻔뻔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박윤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러 코를 막고서 계속 한쪽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싫어요. 몸에서 냄새난단 말이에요.”추경은은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냄새는 네가 더 나거든. 겨우 청소하고 나왔더니 감히 나한테 냄새가 난다고 지껄이는 거야?’‘절대 가만두지 않을 건데, 일단은 내가 참는다.’“윤우야...”추경은이 뭐라고 설명하려고 할 때 유남준이 말을 끊어버렸다.“음식 준비하지 마. 이따가 가지고 올 거야.”유남준은 안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
한편, 박민정은 이미 해운 별장으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유남준이 박윤우를 빼앗아 가려는 줄 알고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박윤우의 기분은 박민정 못지않게 나빴다.그 역시 조급한 모습으로 유남준 곁에 서 있다.‘아들인 내가 있는데 그러고 싶으실까?’“아빠, 경은 이모한테 이렇게 일찍 씻으라고 하신 거예요? 이따가 같이 자려는 건 아니죠?”그 말에 유남준은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고 말았다.하지만 대답하지 않고 도려 물었다.“대체 그런 건 어디에서 배운 거야?”어린 나이에 좋은 건 배우지 않고 일찍 어른들 세계에 눈을 떴으니 말이다.박윤우는 텔레비전에서 본 것만 알고 화면이 어두워지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잘 모른다.“배울 필요 없어요. 형이 그랬는데, 이 나이가 되면 다 알게 된다고 했었어요.유남준은 안색이 더더욱 어두워졌다.‘박민정은 대체 집에서 애들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서다희 입에서 알다시피 큰아들 박예찬은 선생님 따라 해외로 여행을 가서 당장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다.박예찬은 돌아오고 나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김씨 가문에서 보내고 김훈은 이미 박예찬을 증손자로 맞이했다고 했다.“어린아이들이 알 건 아니야. 밥 먹고 집으로 돌아가.”유남준이 차갑게 말했다.박윤우는 가만히 듣기는 했지만 달갑지 않았다.“그래서 같이 자냐고요.”텔레비전에서는 일단 아이를 속여서 밖으로 보내고 나서 나쁜 일을 했었기 때문이다.유남준이 대답하려고 할 때 추경은이 샤워 가운을 입고 나왔다.“남준 오빠, 욕실에 샴푸가 없던데 오빠 샴푸 써도 돼?”박윤우는 바로 추경은을 바라보았는데,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가운만 걸치고 나온 그 몸매는 무척이나 이기적이었다.흔히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악녀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유남준의 얼굴에 한기가 가득했다.“없으면 쓰지 마.”‘하여간 여자들이란 귀찮아.’추씨 가문 어르신 추재훈만 아니었더라면 유남준은 이미 추경은을 내쫓아 버렸을 것이다.추경은은 본래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와 유남
대략 8년 전, 박민정과 유남준이 결혼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였다.고영란이 추경은을 데리고 두원 별장으로 왔었는데, 그때의 추경은은 흠 하나 없이 맑았고 말솜씨도 제법 뛰어난 소녀였다.모든 것에 낯설어하고 있는 박민정을 보고서 추경은은 먼저 선뜻 다가가 이야기도 하고 했었다.박민정은 지금껏 추경은이 했었던 그 역겨운 말을 기억하고 있다.두 사람만 있을 때 했었던 말을.“새언니, 전에 남준 오빠가 만났던 그 새언니가 훨씬 더 예쁜 것 같아요.”“우리 남준 오빠가 그 새언니한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모르죠? 새언니네 조건이 좀 그러해서 두 사람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결혼했을지도 몰라요.”“전에 커플 프로필 사진까지 찍고 그랬었는데...”추경은은 쉴 새 없이 중얼거렸고 17, 18살 되는 소녀가 아니라 아직 철이 들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박민정은 그때 유남준을 끔찍이 사랑하여 추경은 입에서 유남준과 이진원의 좋았던 순간들 그리고 자꾸 자기와 이지원을 비교하는 말에 마음이 언짢았다.하지만 결국 끝까지 참을 수밖에 없었다.가기 전까지 추경은은 계속 성숙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했었다.“새언니, 제가 조금 전에 한 말들은 우리 남준 오빠한테 알려주지 마세요. 남준 오빠 엄청 화 낼 거예요. 지원 언니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 남준 오빠가 싫어하거든요.”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추악하기 그지없는 추경은이었다.박민정은 평생 그녀와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내왔는데, 또 이렇게 나타나게 되어 순간 짜증이 났다.하지만 지금의 박민정 역시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추경은은 자기가 이곳에서 샤워한 것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박민정의 모습을 보고서 바로 쪼르르 달려가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새언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박민정은 바로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가식적인 그 모습을 받아주지 않았다.아예 무시해 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유남준에게 물었다.“윤우는 왜 데리고 온 거예요?”유남준이 지금 추경은이랑 어떤 사이인지 전
추경은의 예쁜 얼굴은 순간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윤우야, 함부로 말하지 마. 이모 조금 전에 깨끗하게 씻었어.”“우리 형이 더러운 것 만지고 나면 아무리 씻어도 손에 남아 있어서 고온으로 소독하고 살균해야 한다고 했어요.”추경은은 그 말에 의아하기만 했다.“고온으로 어떻게 소독하고 살균한다는 말이야?”“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기름통에 손을 넣고 한번 튀겨야 하지 않겠어요?”“...”박민정은 늘 추경은이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겨왔었다.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윤우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박윤우는 조금 전에 추경은이 화장실에서 청소한 일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듣자마자 박민정은 자기 아들이 일부러 추경은을 놀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박윤우는 2살이 거의 되었을 때부터 스스로 엉덩이를 닦았고 위생에도 엄청 신경 썼다.바지에 묻히고 다니는 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그렇게 행동한 박윤우의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아들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기로 했다.“그랬구나.”“경은 씨, 좀 더 씻어야 할 거예요.”추경은은 조금 전 욕실에서 샤워할 때 손에 껍질이 일어날 정도로 씻었다.지금 그녀는 멋쩍고 화가 난 상황이다.“네, 알아요. 수도 없이 씻었어요.”더 이상 유남준에게 밥을 덜어주기도 민망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실은 그녀가 직접 나서서 할 필요도 없었고 부하들이 음식을 가져올 때 책임지는 아주머니께서 먹기 좋게 모두 세팅하여 보내오곤 한다.즉, 추경은의 조금 전 모든 행동은 부질없었다는 것이다.“엄마, 아빠 밥 드시는 거 좀 도와줘. 혼자 드시기에 좀 힘드실 거야.”박윤우는 추경은이 나서서 또 ‘공로’를 가로챌까 봐 박민정을 재촉하기 시작했다.유남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박민정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다.하지만 박민정은 여전히 그러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윤우야, 아빠 지금 앞이 안 보이시는 것뿐이지
과일을 먹으면서 박윤우와 책을 보고 있던 박민정은 추경은이 갑자기 화제를 자기 쪽으로 돌리자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남준 씨한테 내가 뭘 말했다고?’그 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간 건 말할 것도 없고 추경은이 했었던 그 말들을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유남준에게 말한다고 한들 절대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쓴다며 쓴소리를 들을 게 그때는 분명했으니 말이다.“무슨 말을 했었다는 거죠?”박민정은 금시초문인 것처럼 덤덤하게 물었다.생각지도 못한 박민정의 반응에 추경은은 목이 메고 만다.“그...”유남준 앞에서 그때 했었던 그 말들을 하려고 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이때 박민정은 하품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참 이상하네요. 경은 씨도 자기가 했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저한테 남준 씨한테 말한 거 아니냐고 따지는 거 참 웃기지 않아요?”“적어도 어느 방면에 관한 내용인지 힌트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 제가 말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기억할 거 아니에요.”추경은은 순간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양쪽에 늘어진 손을 꼭 움켜잡고서 다시 입을 열기는 했지만.“새언니, 저 그냥 여기 있게 해주세요. 언니도 오빠도 제가 옆에서 잘 챙겨 드릴게요.”“참, 윤우까지 제가 알아서 다들 엄청 잘 챙겨 드릴게요. 절대 그 어느 하인보다 뒤떨어지지 않게 잘할게요.”박민정은 하인이 되고 싶다며 하인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며 자기 자신을 선전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이 일에 관해서는 남준 씨한테 물어보시죠. 저도 우리 윤우도 하인 필요 없거든요.”박윤우도 바로 말을 가로채버렸다.“맞아요. 경은 이모, 저 필요 없어요.”추경은은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는데, 박민정이 다시 문제를 유남준에게 돌릴 줄은 몰랐다.박민정에게 부탁하면 자기 뜻을 받아줄 줄 알았는데 말이다.“남준 오빠, 나 여기 있게 할 거지?”추경은은 울먹이며 덧붙였다.“나, 이대로 돌아가면 할아버지한테
박윤우는 어리둥절한 채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유남준은 손 세정제를 이리저리 흩뿌려 놓으면서 손을 씻고 있었다.박민정은 엉망이 된 세면대를 닦으며 불평을 쏟아냈다.“서 비서님에게 먼저 물건들을 어떻게 쓰는지, 어디에 두는지 설명해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박민정은 유남준이 중요한 일이 있어 자기를 부른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자존심을 세우느라 서다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달라고 하지 않은 것이었다.그래서 그는 지금 손 세정제나 클렌징폼, 그리고 다른 물품들이 어디 있는지 모른 채 혼자 더듬거리고 있었다.유남준은 어젯밤에 세면대의 물건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모자라 지금은 뻔뻔하게 박민정을 불러 수습하게 만들었다.“왜 경은 씨보고 대신 정리해 달라고 하지 않아요?”박민정의 불평이 유남준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과거에는 시키는 대로 얌전히 일하던 박민정이 이제는 자기를 나무라기 시작했으니 유남준은 믿기지 않았다.“박민정, 그동안 내가 너무 잘해줬지?”“어떻게 생각해요?”박민정은 마지막 물건을 정리하고 유남준의 손을 잡았다.유남준은 본능적으로 손을 뺐고 눈에는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민정은 더욱 화가 났다.“남준 씨가 손 내밀어 만져봐야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알 거 아니에요?”유남준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그의 마지못한 태도에 박민정은 그를 골탕 먹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박민정은 유남준의 손을 잡는 대신 방금 씻고 아직 마르지 않은 손을 그의 얼굴에 철썩 내리쳤다.유남준은 즉시 화를 냈다.“뭐 하는 거야?”“별거 아니에요. 남준 씨 얼굴이 건조해 보여서 수분을 좀 보충해 주려고요.”말을 마친 후 박민정은 다른 손을 내밀어 유남준의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이상하게도 유남준은 평소 얼굴 관리를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의 얼굴은 매우 희고 피부도 부드러웠다.모공도 거의 보이지 않아 가까이서 보면 마치 그림 속의 캐릭터 같았다.그래서인지 어떤
박민정은 유남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윤우를 내 곁에서 데려가려고 하는 거예요?”조금 전까지 묻지 않았다고 해서 그 생각이 잊혀진 건 아니었다.유남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딜 봐서 내가 윤우를 데려가려 한다고 생각한 거야?”박민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내가 오해한 건가?’“그럼 내일 윤우를 데리고 돌아갈게요.”“맘대로 해.”유남준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런 그의 태도를 보고 박민정은 그가 윤우를 뺏으려 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다.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아래층으로 가서 윤우를 데려와 객실에서 함께 자려고 했다.그때 유남준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앞으로 애한테 엉뚱한 걸 가르치지 마.”“내가 엉뚱한 걸 가르쳤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박민정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유남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윤우와 예찬이는 너무 조숙해. 어린애들이 가지지 않아도 될 생각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이상한 생각들보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걸 가르치는 게 더 중요해.”엉덩이를 닦는 것도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니.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분명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유남준은 가능한 한 말을 돌려서 표현했기 때문에 박민정은 어리둥절했다.지금 박민정은 피곤해 자고 싶어졌기에 대충 대답했다.“알았어요.”그리고 박민정은 윤우를 찾으러 갔다.윤우는 혼자 거실에서 기다리다가 엄마와 아빠가 계속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박민정은 곤히 잠든 윤우를 보고 조심스럽게 그를 안아 침실로 데려갔다.박윤우는 원래 깔끔한 걸 좋아해서 추경은을 괴롭히기 전에 이미 몸을 깨끗이 씻어두었다.그래서 박민정은 그를 씻겨줄 필요가 없었다.박민정은 간단히 씻은 후 그를 안고 곧바로 잠들었다.다음 날.알람 소리에 박민정 모자가 깨어났다.박윤우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엄마...”아직 잠이 덜 깬 상태였다.“엄마가 왜 나랑 같이 자고 있어?”이 말을 하자마자,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