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바로 거절해 버렸다.“어머님께 전해주세요.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다들 힘들어하고 있다고요.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다고 해주세요.”유남준 지금 상황으로 찾아가게 된다면 또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른다.“그래.”윤소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박민정의 말에 약간 말을 붙여서 고영란에게 알렸다.박민정이 아이를 두고 홀로 외국으로 떠난 것에 대해 본래 언짢아하고 있던 고영란은 그 소리를 듣고서 더더욱 불쾌해했다.“아주 그냥 눈에 뵈는 게 없구나!”윤소현이 옆에서 타일러 주었다.“어머님,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원래 그런 동생이었어요. 얼마 전에는 우리 새엄마랑 우리 윤씨 가문을 상대로 돈까지 요구했었어요. 돈 갚으라면서요.”“돈을 갚다니? 무슨 돈인데?”“동생 아버지 생전의 돈인데, 어디서 유언장을 위조해 왔지 뭐예요. 박씨 가문의 재산은 본래 자기 몫이라면서요.”그 말을 듣고서 고영란은 박민정이 더더욱 싫어졌다.하지만 윤소현 새엄마인 한수민 역시 반듯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너도 이제 우리 남우랑 약혼했으니, 앞으로 한수민 그 여자랑 자주 연락하지 마.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잖아.”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참, 남우 씨가 그러던데 아주버님 상태가 좀 이상했다고 그러셨어요. 해외에서 돌아오자마자 의사까지 집으로 들였다고 했었고요. 어머님이 부르시는 데도 동생이 거절한 걸 보면 혹시... 아주버님 보러 갈까요?”유남준은 줄곧 권씨 가문 둘째 도련님과 연락을 주고받았었다.하여 유남준이 이번에 해외로 떠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가 윤소현에게 일부러 소식을 흘린 것이고 윤소현의 손을 빌려 유남준의 상황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뭐?”고영란은 유남준에게 사고가 생겼다는 걸 듣고 바로 애간장이 타기 시작했다.“당장 가자.”“네.”저녁.박민정이 박윤우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고영란이 윤소현을 데리고 쳐들어왔다.고영란은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살피더니 유남준이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남준이는?”
“어머님, 일단 윤우부터 방으로 돌려보내시죠. 윤우가 들어서 좋을 것 없잖아요.”윤소현이 고영란에게 말했다.박윤우는 예쁘게 생겼지만 악독하기 그지없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눈을 치켜세웠다.“꺼져!”예상치 못한 소리에 윤소현은 으스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축 떨어진 손을 움켜쥐면서 박윤우를 당장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어른한테 그렇게 버릇없으면 안 돼.”“퉤!”박윤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윤소현을 향해 침을 뱉었다.“아줌마, 선생님께서 사람한테만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어요.”그 말에 윤소현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졌다.고영란만 지금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아마 이미 박윤우에게 손찌검을 했을 것이다.박민정 역시 박윤우에게 이런 더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허리를 숙이고 타일렀다.“윤우야, 먼저 방에 가 있어. 엄마 할머니랑 중요한 얘기 해야 해.”“걱정하지 마. 할머니 절대 엄마 괴롭히지 않을 거야.”이윽고 박민정은 고영란을 바라보며 확인했다.“어머님, 제 말이 맞죠?”어머님이라는 소리를 오랜만에 들은 고영란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럼.”지금 눈앞에 있는 어른들이 서로 인사치레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박윤우는 모를 리가 없다.하지만 힘이 약하니 박민정을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았다.차라리 쓰레기 아빠라도 옆에 있었으면 하는 심정이다.박윤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순순히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제 막 치료를 받고 나온 유남준은 두통이 좀 나아진 것 외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서다희는 이때 이름 모를 전화를 받게 되었다.“누구시죠?”“다희 삼촌, 저 윤우예요.”박윤우의 앳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려왔다.서다희는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도련님이셨군요. 무슨 일이시죠?”눈높이를 맞추며 서다희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다희 삼촌, 아빠한테 전화 좀 전해주시면 안 돼요?”“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대표님께서 지금 몸 상황이
차갑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고영란이 말했다.“우리 유씨 가문은 결코 보잘것없는 집안이 아니야. 지금 당장 무릎 꿇어!”생각지 못한 말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박민정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가 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거죠?”“아이까지 내팽개치고 해외로 남자를 만나러 간 네가 잘못한 게 없다고?”윤소현이 옆에서 계속 부채질했다.어처구니가 없는 박민정은 두 눈을 부릅뜨고 윤소현을 노려보며 물었다.“열녀문이 내려진 것도 아니고 곁에 남성 친구조차 두면 안 된다는 소리예요?”“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 따위는 없어. 있을 것 같아?”윤소현은 계속 비아냥거렸다.흔들림 없이 공격하는 윤소현의 모습에 박민정은 더 이상 그 어떠한 체면도 봐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제가 알기로는 윤소현 씨 남자 파트너 자주 바꾸기로 소문이 자자한 것 같은데... 여러 스킨십까지 자주 하고 말이에요. 저보다는 윤소현 씨가 더 더러운 게 아닌가요?”“내가 하는 건 일이고 네가 하는 건 사랑이잖아.”“순수한 우정 따위가 없다면 순수한 일 따위도 없는 거 아니에요?”박민정은 계속 맞받아쳤다.이렇게 날카롭고 예리하게 대응할 줄은 몰랐던 윤소현은 당황하면서도 짜증이 났다.다행히도 고영란이 자기편을 들어주면서 기분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무릎 꿇어!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박민정은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고영란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들어와.”무릎을 꿇으라고 명령을 내리게 되면 상대가 누구든지 반드시 꿇어야 한다는 게 고영란의 ‘신념’이다.시어머니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해도 좋다.얼마 지나지 않아 제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우르르 들어와 박민정에게 말했다.“사모님, 큰 사모님 말씀대로 하시기 바랍니다.”윤소현은 옆에서 좋은 구경이라도 난듯한 얼굴이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 채 덤덤하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고영란을 바라보며 말했다.“무릎 꿇지 않을 겁니다.”경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문 앞에 서 있는 유남준과 서다희가 보였다.유남준의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그가 돌아올 것으로 생각지도 못한 박민정은 다소 의외였다.“무슨 일이야?”그리고 생각할 것도 없이 고영란의 편을 들 것이라고 여겼다.하지만 전혀 다른 말을 뱉어버리고 만다.“아무나 집으로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아무나?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윤소현보다 고영란은 거의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남준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아무라니! 난 네 엄마야!”조용히 듣고 있던 유남준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어머니, 저와 민정이 사이의 일은 사적인 일이니 앞으로 상관하지 마세요.”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유남준이 기억을 되찾은 줄 알았다.아들에게 한바탕 쓴소리를 듣고 난 고영란은 목이 메었다.“알았어. 앞으로 싸우든 말든 어떻게 지내든 절대 상관하지 않을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이윽고 유남준을 자세히 훑어보았는데, 크게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윤소현에게 말했다.“가자.”윤소현 역시 유남준을 살펴보았는데, 유남우가 말한 것처럼 엄중해 보이지 않았다. “네.”윤소현은 고영란 따라 밖으로 나왔다.고영란은 박민정에게 미처 풀지 못한 화를 윤소현에게 풀 작정이었다.“남준이 크게 다쳤다면서! 멀쩡하잖아!”“저도 남우 씨한테 들은 말이라 속사정은 잘 몰라요.”윤소현의 설명에 고영란은 콧방귀를 뀌었다.“우리 남우한테 뒤집어씌울 생각하지 마.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예고 없이 돌아온 쓴소리에 윤소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유남우와 약혼하고 나서 고영란은 줄곤 자상하게 예를 지키며 윤소현과 소통했었다.이런 적은 거의 처음이라고 볼 수 있다.하지만 집안 배경을 버팀목으로 하고 있는 윤소현은 이지원과 달라 바로바로 대꾸할 수 있었다.“어머님, 저한테 생각이 없다고 쳐요. 그럼, 어머님께도 생각이 없는 건가요? 제가 어머님을 이곳까지 억지로 끌고 왔어요?”밖에 도착하자 윤소현은 바로 자기
갑자기 유남준이 그녀의 손을 잡고는 말했다.“얘기해 봐, 왜 돌아왔어?”지금의 유남준에게 있어서 그는 박민정이 왜 돌아왔는지, 그리고 자기가 기억을 잃은 사실마저 모두 잊었다.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돌아온 이유를 유남준에게 다시 말했다.“그러니까 내 아이를 데리고 5년 사라졌다는 거야?”똑같은 말이라 박민정은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전에 이미 얘기했던 문제잖아요.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유남준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박민정.”박민정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이거 놔요.”유남준은 놓아주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더니 들어 올렸다.“뭐 하는 거예요? 나 내려줘요.”그녀는 무서운 듯 유남준의 팔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조심히 걸어요. 앞에 테이블이 있으니 부딪치지 말고요.”유남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침실로 가려고 하는데 왼쪽으로 가? 아니면 오른쪽으로 가?”‘침실로 간다고?’박민정은 바로 어젯밤 유남준이 한 행동을 떠올리며 그의 어깨를 꽉 눌렀다.“나 내려놔요!”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유남준은 그녀를 놓지 않고 기억을 더듬으며 계단을 올랐다.“조심해요, 기둥 있어요.”기억이 완전히 정확한 건 아니었다. 박민정이 귀띔했기 때문에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방에 도착하자 유남준은 박민정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그녀를 안은 손은 놓지 않고 꽉 잡았다.“왜 이 꿈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까?”“왜 또 꿈이라고 하는 거예요? 꿈 아니라고 했잖아요.”박민정은 어이가 없었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박민정, 나 머리 너무 아파. 자고 싶어.”박민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지금 바로 의사 부를게요.”그녀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유남준이 그녀를 꽉 안아서 움직일 수 없었다.“가면 다시 안 올 거지?”박민정은 그에게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어 품에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
유남준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박민정은 별장 사용인과 가정부들에게 유남준을 찾아보라고 했다.10분 후, 한 사용인이 마침내 유남준을 발견하고 곧바로 박민정에게 전화했다.“사모님, 유 대표님 정원 옆의 연못가에 계십니다.”“알겠어요, 지금 갈게요.”박민정은 전화를 끊은 후 급히 달려갔더니 연못가의 큰 나무 아래 서 있는 유남준을 발견했다.그녀는 한숨을 돌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말했다.“남준 씨.”유남준의 기억이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확신이 없어 그녀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남자의 눈빛은 초점이 없었지만 여전히 맑아 보였다.“무슨 일이야?”“나... 나 누군지는 기억하죠?”“걱정 마. 어제랑 똑같으니까.”그 말에 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럼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여기에 있어요?”“그냥. 좀 조용히 있으려고.”유남준이 말하고는 박민정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서 비서는?”박민정은 시간을 체크하며 말했다.“지금 오고 있을 거예요.”서다희는 오늘 아침 8시에 오겠다고 말했었다.“가서 쉬어. 나 신경 쓰지 말고.”유남준은 서다희에게서 박민정이 지금 임신 중이라 힘들게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었다.말을 마친 후 그는 거실로 걸어갔다.박민정은 그를 따라갔다.유남준이 거실에 도착하고 옆에 서다희도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박민정은 윤우를 깨우 세수하고 아침을 먹게 했다.윤우는 침대에서 겨우 일어났다.아빠가 또 변했다는 걸 알고 세수를 마친 후 바로 유남준을 만나러 갔다.“쓰레기 아빠.”귀여운 아이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듣기 좋았지만 유남준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그는 서다희에게서 박민정이 진주를 떠난 후 쌍둥이를 낳았다는 말을 들었었다.“응.”윤우는 달려가 그의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유남준의 다리가 갑자기 저렸다.“아빠, 윤우 기억났어요?”윤우는 다시 호칭을 바꿔 물었다.“기억이 나.”지금의 유남준은 윤우가 상처받을까 봐 거짓말을 했다.윤우는 그의 거짓말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일부러
유남준은 놀란 듯 물었다.“내가 네 선생님을 본 적 없어?”윤우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엄마랑 아빠는 항상 일 때문에 바빴잖아요. 전에 계속 정 아저씨가 저를 학교에 데려다줬어요.”정 아저씨?유남준은 단지 일부 기억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서다희가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 줘도 빠뜨린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정민기가 바로 그 빠뜨린 부분이었다.“왜 정 아저씨가 널 데려다줘?”유남준이 물었다.윤우는 일이 더 커지는 걸 전혀 두렵지 않은 듯했다.“정 아저씨가 정말 멋진 사람이라서요. 엄마도 정 아저씨만이 저를 보호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정 아저씨는 우리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인기가 정말 많아요. 그래서 아빠가 가면 친구나 선생님들이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상처받지 말아요.”윤우는 일부러 유남준을 자극했다.유남준은 실눈을 뜨더니 휴대폰을 들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서다희는 뒤따르던 차 안에서 무슨 일인지 몰라 바로 전화를 받았다.“대표님.”“정민기가 누구야?”유남준이 목소리를 낮췄다.“보디가드요. 사모님의 개인 보디가드입니다.”서다희가 대답했다.보디가드라는 말을 듣고 유남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알겠어.”유남준은 전화를 끊었다.보디가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유치원에 도착한 후.유치원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입구에 나와 있었다. 그녀들은 오늘도 정민기를 보고 싶어 했다.정민기는 잘생긴 데다가 얼마 전에 아이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범인을 바로 제압했었다.그 이후로 유치원 모든 사람들은 정민기를 우상으로 삼았다.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윤우를 태운 벤틀리가 몇 대의 고급 차로 바뀌었다.차 문이 열리자 정민기가 아닌 차가운 얼굴, 완벽한 이목구비에 훤칠한 키의 남자가 내렸다.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유치원 선생님들은 눈을 반짝이며 유남준을 뚫어지게 바라봤다.“윤우야, 누구셔?”윤우의 담임 선생님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윤우에게 달려왔다.“우리 아빠
“민정아, 법원에서 한수민의 모든 재산을 동결했지만 계좌에 20억도 없대.”아침 식사를 마치고 박민정은 변호사 장명철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사실 이 소식은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박민정은 한수민을 계속 감시해 왔기 때문에 그녀가 돈을 모두 윤소현에게 보낸 것을 알고 있었다.“이상한 건 YN그룹 계좌에도 돈이 별로 없대. 400억밖에 찾지 못했다는데?”장명철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YN그룹 같은 큰 회사에 유동 자금이 그렇게 적다니.“미리 빼돌린 건 아닐까요?”박민정이 물었다.“그건 아닐 거야. 우리가 계속 감시해 왔고, YN그룹 내부에도 우리 사람이 있잖아.”장명철이 말했다.“그럼 YN그룹에 문제가 있는 거겠죠.”박민정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요. 얼마가 있든 모두 받아야죠.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요.”“그렇지.”장명철이 전화를 끊었다.박민정은 한 주 가까이 한수민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상황이 어떤지 궁금했다.병원에서.오늘 한수민은 VIP 병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그녀는 화가 잔뜩 난 채 간병인에게 말했다.“누가 내 병실을 바꾸라고 했어? 이렇게 좁고 낡은 곳에서 어떻게 지내라고?”간병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사모님, 병실을 옮긴 건 제 결정이 아니라 가족분들의 지시입니다.”한수민은 머리가 띵해졌다.“말도 안 돼. 우리 윤씨 가문이 돈 없는 것도 아니고 왜 나를 일반 병실로 옮겼겠어?”“그럼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시면 되잖아요.”간병인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거만한 한수민에게서 호감이 떨어졌다.한수민은 휴대폰을 들어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거는 동안에도 간병인을 계속 꾸짖었다.“말하는 태도가 그게 뭐야? 소현이에게 널 해고하라고 할 거야.”간병인은 그녀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전화가 연결되었다.이어서 윤소현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무슨 일이세요?”한수민은 윤소현의 목소리를 듣고 안심하며 말했다.“소현아, 간병인이 나를 일반 병실
박민정은 유남준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마치 새롭게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남준 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앞으로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하지 마.”둘은 부부였으나 박민정은 늘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이 말에 박민정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깜빡했어요.”“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마.” 유남준이 덧붙이자 박민정은 말문이 막혔고 무슨 말을 해도 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알겠어요.”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그 모습을 본 유남준은 다시금 마음이 아려왔다. “가자, 좀 쉬어야지.”“네.”박민정은 그의 뒤를 따라 두 사람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그곳에 도착하자 유남준은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고 집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이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던 박민정은 소파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맞다, 아이들은요?”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아이들은 본가에서 안전해. 게다가 오늘 가문의 여러 친척들도 모일 건데 아이들이 그 사람들과 친해지면 나중에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리를 비우는 게 실례가 되진 않을까요?”“아니.”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어.”그의 말에는 어떠한 허세도 섞여 있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의 능력을 믿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어젯밤 잠을 설친 탓인지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은 가끔씩 시선을 들어 그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예전에는 일할 때 누구도 그의 집중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박민정이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이었다.그가 얼마나 그녀를 바라보고
“아버지, 드세요. 이건 제가 직접 정성 들여 고운 탕이에요. 백세를 넘긴 한의학자의 비법을 배워 만든 거라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꽤 걸렸어요. 드시면 장수하실 거예요.”유석진이 아부하듯 말하자 유명훈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이냐?”“그럼요. 제가 아버지를 속이겠습니까? 제가 해외에서 돌아온 이유도 아버지를 잘 모시고 장수하시게 하려는 거죠.”유석진은 유남준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버지와 달리, 유명훈의 환심을 사는 데 능숙했다.그래서인지 유명훈은 늘 그쪽을 편애했다.“석진아, 우리 집에서는 네가 가장 효심이 깊구나.” 유명훈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물론 이 나이가 되면 누구나 늙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하지만 유명훈은 늙고 싶지 않았고 죽음은 더더욱 두려웠다. 그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에서 수혈을 받기까지 했다.“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동생과 아이들도 다 효심이 깊어요.” 유석진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유남준에게 보냈다. “그렇지, 남준아?”유남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말로 유명훈도 그의 성격을 아는 터라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다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히 있어라.”그렇게 말했지만 모인 이들은 각자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유명훈은 문득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민정아.”“네, 할아버지.” 박민정이 공손하게 대답하자 유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불렀다.이제 모두의 시선이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아, 넌 이제 우리 유씨 가문의 중요한 일원이야. 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냐?”“많이 나아졌어요.” 박민정은 조용히 대답했다.“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완전히 회복되면 가정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회사 일은 남준이에게 맡기고 말이다.”유명훈은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그가 유남준과 박민정의 결혼을 허락한 것도 당시 박민정의 가문이 유씨
박민정은 그에게 안긴 채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고 가슴 한편이 알 수 없는 먹먹함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어 유남준의 등을 두드렸다. “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자요.” 유남준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박민정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품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풀어냈다.이제는 그녀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발코니로 나가 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새벽 여섯 시가 되자 유남준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에게 덮여 있는 담요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있었다.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가 돌아왔을 때 박민정이 곁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간 걸까?혹시 꿈을 꾼 걸까 싶어 그는 2층 방으로 올라가 욕실에서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잠을 청했다.박민정은 그의 움직임을 들었지만 상태가 괜찮아 보이자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아침 여덟 시, 유남준은 평소처럼 정시에 일어났고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아한 태도로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는데 박민정은 그의 맞은편에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다가 놀라고 말았다.어젯밤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오늘은 마치 전혀 취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였다.유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하고는 눈을 들어 그녀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왜?”“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박민정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식사를 이어갔다.두 아이도 식탁 위의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결국 참지 못한 박윤우가 작은 목소리로 여름 박예찬에게 물었다. “형, 나 왜 집이 이상한 것 같지?”“조용히 하고 만두나 먹어.”“아, 응.”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가족들은 청명을 맞아 조상을 기리기 위해 본가로 향했다.차가 본가 대문 앞에 멈추자마자 고영란이 반갑게 달려 나왔다. “윤우야, 예찬아, 어서 할머니한테 오렴.”유남우도 그녀 옆에 서서 서슴없이 박민정을
유남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택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했는데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박민정은 다가가기가 너무 부끄러워 멀리서 그 여자 형체랑 똑같이 제작된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마음에 들어요? 저는 상관없긴 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이런 기괴한 물건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민정아,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아?”그의 말에 박민정은 깜짝 놀랐다.“왜요?”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구매한 물건이었다.“오해하지 말아요. 사람마다 생리적 욕구가 있기 마련이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희는 부부잖아요. 그렇죠?”유남준은 그녀가 자기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역시나 박민정은 그가 왜 화 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라가며 다시 설명했다.“원래는 다른 여자를 찾아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저희는 현재 부부잖아요. 또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서로 사랑했다고 해서 그렇게 처리하는 건 아닌 것 같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머리가 아파서 소파에 털썩하고 앉았다.“알겠으니까 그만 말해.”‘날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지?’‘그저 성욕을 못 참아서 안달 난 짐승으로 생각하나?’박민정은 그제야 입을 꾹 닫았는데 순간 거실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진 것 같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박민정이 그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자러 갈게요. 내일 옛 저택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그러나 유남준은 여전히 토라진 말투로 답했다.“응. 마음대로 해.”그러나 박민정은 그가 화 났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기쁜 마음으로 돌아섰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멍한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그냥 이대로 가는 거야?”그리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그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제우스 클럽.방성원과 유남준은 술을 마시며
그리고 침대에 던져지고 나서야 박민정은 이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재빨리 이불을 몸에 둘렀다.“오지 말아요!”그러나 유남준의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민정아, 나도 남자야.”시간도 많이 흘렀고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매일 그냥 잠만 자려고 하자니 그도 나름 괴로웠다.그리고 이 상태로 두 사람이 계속 지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병들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유남준은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그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하여 다 포기한 채 가만히 누워 온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엄마.”박예찬과 박윤우가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박민정을 불렀다.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진서연이랑 설인아, 그리고 민수아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두 아이도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있는 힘껏 유남준을 밀쳐냈다.하여 오늘에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멈춰야 했다.박민정이 황급히 방에서 나오니 두 아이가 마침 문 앞에 서 있었다.“엄마, 자고 있었어? 왜 얼굴이 빨개?”박윤우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게...”겨우 설명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유남준이 갑자기 방 안에서 나오더니 한껏 어두운 얼굴로 두 아이에게 물었다.“왜 벌써 왔어?”“추석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어요.”박예찬은 뭔가 눈치챈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러나 박윤우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엄마, 저 쓰레기 아빠랑 같이 잔 거야?”“아니.”박민정은 단번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저 찾을 물건이 있어서.”“무슨 물건인데?”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질문 공세에 박민정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가 겨우 답했다.“책.”“무슨 책? 나도 같이 찾아볼게.”“아니야
박민호가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레 물었다.“누나, 괜찮아?”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가자.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박민호는 돈을 뜯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해 그녀를 부축해 줬다.“그럴 필요 없어.”박민정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한수민의 묘를 몇 번 더 바라보다가 애써 어지러움을 참고 자리를 떴다.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이를 본 박민호는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누나!”그리고 단번에 들어 올리더니 빠르게 차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빨리 병원에 가요.”그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난 뒤였고 박민정은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리고 조각난 기억들이 어렴풋이 맞춰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느낌은 그녀를 매우 괴롭게 만들었다.이때, 누군가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는데 박민정은 그제야 비로소 맨 앞에 서 있는 유남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좀 어때? 괜찮아?”그는 다정하게 물었다.뒤따라온 사람은 박민호였는데 그도 다급히 물었다.“누나, 나 진짜 깜짝 놀랐어. 앞으로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면 병원부터 가봐. 알겠지?”박민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제 괜찮아. 아마 저혈당 때문에 쓰러졌을 거야.”검사 결과에서도 별다른 증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남준은 그래도 그녀가 걱정되었다.“앞으로 어디 갈 때는 꼭 사람 한 명이라도 데리고 가.”“그럴게요.”박민정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박민호는 자기 누나를 걱정하는 유남준을 보고 살짝 안심했다.그러다가 문득 이제부터 유남준을 따라가기만 하면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다.“배고파? 내가 밥 좀 가져다 달라고 할게.”“다 나은 것 같은데 우리 그냥 집에 가서 먹어요.”박민정은 병원에 있는 게 싫었다.유남준은 원래 안 된다고 말하려 했지만 박민정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에는 집에 가기로 했고 박민호는 두 사람을 집까
깊은 밤, 어느 술집 룸.최현아는 주성민의 품에 안겨 자신의 서러움을 토로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그러자 남자는 한껏 다정하게 그녀를 위했다.“조금만 참아. 유씨 가문의 재산만 손에 넣으면 우리도 이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으니까.”“어디 그게 말처럼 쉬워? 남준 씨는 우리가 영원히 넘지 못하는 산처럼 버티고 있잖아. 지금 호산그룹도 손에 쥐고 있고 또 네 명의 아들까지 옆에 끼고 있으니 얼마나 득의양양해 있겠어.”최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지훈이만 앞으로 힘들게 살아갈 것 같아.”순간 주성민의 눈빛이 살벌해지더니 그녀에게 물었다.“그 사람들을 한방에 제거할 방법이 없을까?”최현아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무슨 소리야?”“현아야, 옛말에 모질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있잖아. 네가 하기 힘들면 네 남편 시키면 되지.”주성민의 말에 최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예전에 남준 씨한테 한번 당한 뒤로는 겁을 먹고 찍소리도 못하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네가 자극해야지.”남자는 낮은 소리로 최현아에게 방법을 알려줬다.최현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마디 했다.“그 뜻은 성혁 씨랑 동서를...”“만약 유성혁이 박민정을 진짜로 건드리면 유남준의 성격에 무슨 짓을 못 할까?”남자의 말에 최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렇게 되면 박민정 그 고약한 여자도 한 방에 처리되겠네!”“며칠 뒤면 추석이라 아마 다들 돌아올 거야.”“그러면 일단 그날로 정하자.”둘은 말을 마친 뒤 다시 꼭 끌어안았다....추석 당일.박민정은 미리 박형식과 은정숙에게 제사를 올렸다.또한 한수민의 묘에도 가보았는데 마침 박민호와 윤소현도 그 자리에 있었다.윤소현은 원래 오기 싫었지만 최근에 너무 안 좋은 일만 벌어지는 것 같아 액운이라도 떨쳐내려고 온 것이다.“네가 여기까지 제사 지내러 올 줄은 또 몰랐네.”박민호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하자 윤
이미 집 안까지 들어온 사람을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박민정은 애써 웃으며 답했다.“앉으세요.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최현아가 자리에 앉자 유지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별건 아니고 우리 지훈이가 예찬이랑 윤우랑 놀고 싶다고 해서.”도우미는 빠르게 마실 차를 내왔다.유지훈은 집안을 둘러보다가 박예찬의 방에 들어와 같이 놀자고 했다.그러나 박윤우는 한껏 불편한 티를 내며 물었다.“유지훈, 우리 집엔 왜 왔어?” 유지훈도 사실 내키지 않았지만 최현아와 할아버지가 당부했던 일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그들에게 말했다.“윤우야, 예찬아, 우리 같이 놀자. 집에서 혼자 놀다가 너무 심심해서 왔어.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옛 저택에도 안 오잖아. 현진이랑 현우가 보고 싶지 않아?”유지훈의 입에 발린 말에 박윤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가 어디에 있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냥 네 집으로 빨리 꺼져.”그의 말에도 유지훈은 애써 화를 참고 다시 박예찬에게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예찬아, 너도 내가 꺼지길 바라는 건 아니지? 몰라, 난 그냥 여기서 놀 거야.”여태껏 안하무인, 기고만장이던 유지훈이 갑자기 이리도 얌전하고 모든 걸 참아내는 모습에도 박예찬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그래. 그러면 여기서 우리랑 같이 놀자.”“좋아!”그러나 박윤우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박예찬에게 다가가 슬쩍 물었다.“형, 제 정신이야? 왜 갑자기 저 애랑 놀겠다는 거야?”그러자 박예찬이 은밀하게 눈빛을 보낸 뒤 다시 말했다.“윤우야, 지훈이는 우리 친척인데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박윤우는 단번에 그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어. 유지훈, 그러면 여기서 얌전히 놀아. 일부러 사고 칠 생각하지 말고.”방안은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한편, 거실에서 최현아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동서, 오늘 남준 씨는 집에 없어?”“네, 요즘 회사 일이 바쁜지 계속
아직 어린아이인데 일찍 철이 든 박예찬을 보고 박민정은 고마우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바보야. 넌 아직 어려서 엄마 아빠가 지켜주면 돼.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먼저 우리한테 말해줘야 해, 알겠지?”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박민정은 그에게 몇 가지 더 당부해 주고 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이때, 박윤우가 방안에 들어오면서 박예찬에게 다가왔다.“형은 대체 어떻게 그 나쁜 놈을 잡은 거야?”박윤우가 궁금증을 못 참고 그에게 묻자 박예찬은 간단하게 설명해 줬다.“대박!”박윤우는 손뼉까지 치며 그를 칭찬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런데 엄마와 저 쓰레기 아빠는 이제 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거래?”“몰라. 그런데...”박예찬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내 생각에는 그 범인이 이제 나를 해칠 마음이 없는 것 같아.”오늘 다시 만난 정호철의 눈빛은 예전처럼 살기가 돋쳐있지 않았고 오히려 정수미가 자신을 바라보던 것처럼 따듯함이 느껴졌다.“만약 그 사람이 정수미, 그 늙은 여우 쪽의 사람이라면 아마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만약 윤소현 쪽의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박윤우가 세밀하게 분석했다.“네 말이 맞아. 그러니까 우리도 경계심을 높이고 조심해야 해.”“알겠어.”말하다가 박윤우는 문득 박예찬의 컴퓨터를 보며 물었다.“형, 지금 뭐 해?”박예찬은 그제야 막고 있던 손을 걷으며 말했다.“별거 아니야. 그저 지엔 그룹의 지도를 보고 있었어.”박윤우는 컴퓨터 화면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자료를 본 순간 머리가 아파졌다.“보고 있으니 벌써 눈이 침침하네. 난 그만 노래나 들으면서 그림이나 그려야겠다.”박윤우는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 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다.박예찬도 별말 없이 계속 자기 일을 해 나가고 있는데 유지훈이 갑자기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박예찬이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화면에는 그의 작은 얼굴이 나타났다.“예찬아, 집에서 뭐 하고 있어?”“무슨 일이야?”박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