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는 그 말을 듣고 간병인이 왜 그녀를 조롱했는지 금방 알게 되었다.“말은 가려서 해야죠.”한수민은 코웃음을 치고는 더 이상 아줌마를 신경 쓰지 않았다.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자신과 말을 섞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아줌마는 한수민이 자기 말에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흥미를 잃어 더 얘기하지 않았다.점심때 간병인이 다시 와서 한수민에게 밥을 주었다.집이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면 그녀는 절대 거듭 무례를 범한 한수민을 돌보지 않을 것이다.“밥 먹어요.”간병인은 음식을 각각 놓아주었다.한수민은 음식을 한 번 보더니 예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젓가락을 들었다.옆 침대 환자 아줌마는 아직 밥을 받지 못했다. 그걸 본 한수민은 비꼬듯이 말했다.“간병인도 없나 보네.”아줌마는 화도 내지 않고 그저 휴대폰을 들여다봤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렸다.“엄마, 늦어서 죄송해요. 오늘 야근해서 늦었어요.”스무 살 정도의 젊은 여자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아줌마의 옆으로 왔다.아줌마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엄마 배고프지 않아.”어린아이는 귀여운 목소리로 불렀다.“할머니.”“우리 손주. 오늘 엄마 말 잘 들었어?”“그럼요?”젊은 여자는 어린아이를 의자에 앉힌 후 아줌마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할머니, 빨리 나으세요.”“알겠어. 할머니 빨리 나아서 우리 착한 손주를 유치원 데려다줘야지.”“좋아요.”어린아이가 대답했다.그 광경을 보던 한수민은 다시 밥을 먹으려 했지만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졌다.아줌마의 딸은 직접 끓인 미역국을 가져왔다.일 때문에 온 가족이 이곳에서 함께 식사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오늘 금요일이라 아이의 유치원에서는 점심을 제공하지 않았다.젊은 여자는 빠르게 밥을 먹고 나서 어머니에게 마사지를 한 후 아이를 집에 데려가야 했다.떠날 때 여자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엄마, 잘 지내고 계세요. 저녁에 다시 올게요.”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천천히 운전하고
한수민은 휴대폰을 들어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박민정은 저녁을 먹고 한수민의 상태가 궁금해서 찾아가 보려고 했는데 한수민에게서 전화가 올 줄은 몰랐다.“무슨 일이에요?”박민정이 전화를 받았다.“돈 좀 보내줘. 지금 병원비가 없어서. 넌 내 딸이잖아. 내가 널 고소하는 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한수민은 박민정이 돈을 주지 않으면 그녀를 고소할 생각이었다.박민정도 고소하는 걸 즐기지 않는가?친모에게 고소당하는 기분은 결코 좋지 않을 것이다.한수민은 박민정이 가족에게 배신당하는 것을 가장 견디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박민정은 거절하지 않고 말했다.“이따가 여사님 보러 갈게요. 만약 여사님이 정말 치료비가 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여사님이 말한 대로 친딸로서 돈을 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한수민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전화를 끊었다.병원에서.간병인이 한수민에게 물었다.“뭐래요? 설마 그 아가씨도 돈 안 주겠대요?”그럼 너무 불쌍하잖아.옆자리 아줌마도 한수민을 비웃듯이 말했다.“돈이 많으면 뭐 해. 사람이 곧 죽는데 가족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그 말을 들은 한수민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간병인과 아줌마는 박민정이 돈을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한수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는 박민정이 다시 한번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복부의 통증이 시작되어 한수민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통증을 완화하려면 자거나 약을 먹는 방법밖에 없었다.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았다.눈만 감으면 박민정의 어린 시절 얌전히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정말 내가 잘못한 걸까? 아니야!’윤소현이 태어나자마자 윤석후가 데려가서 정수미와 함께 지냈지만 그래도 윤소현은 한수민의 친딸이었다.게다가 한수민은 몰래 윤소현을 찾아가 잘 대해 주었다. 다른 여자아이들이 가진 것은 윤소현도 무조건 가지게 해주었다.통증 때문에 시간이 더디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한 병
한수민은 박민정이 단지 6000만 원으로 자신을 해결하려 한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6000만 원은 도박 한 번 하거나, 가방 하나 사기도 부족했다.“장난해? 6000만 원으로 뭘 할 수 있다고?”박민정은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보통 가정에서는 6000만 원이면 집 한 채의 계약금을 낼 수 있어요. 한 달 사용하기에 충분하지 않나요? 더 많은 돈은 없어요.”떠날 때 박민정은 덧붙였다.“소송해 봤자 소용없어요. 변호사와 상담해 봤는데 제가 한 달에 6000만 원을 드리면 자녀로서의 의무를 다한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소송해도 소용없을 거예요.”“이 망할 년!!”한수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때리려 했다.간병인이 그녀를 다급하게 막으며 목소리를 낮췄다.“사모님, 진정하세요. 방금 윤소현 씨의 전화를 받았어요. 나를 해고하겠다고 하네요. 앞으로 월급도 주지 않겠다고 했고요.”한수민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그게 무슨 말이야?”간병인은 얼굴이 어두워졌다.“말 그대로예요. 윤소현 씨가 더 이상 사모님을 돌보지 않겠다는 뜻이죠.”한수민은 의식을 잃은 채로 침대에 쓰러졌다.복부의 통증이 심해져 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빨리... 빨리 의사 불러...”간병인은 그녀의 바지가 피로 물들어 가는 걸 보고 긴급 호출 버튼을 눌렀다.의사와 간호사들은 신속하게 도착했다.박민정은 아직 병원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히 자신이 나온 병실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뒤로 돌아보자 한수민이 병실에서 나오고 수술실로 옮겨지는 것을 발견했다.뒤따라 나오던 간병인은 박민정이 아직 병원에 있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말했다.“박민정 씨, 사모님이 출혈이 심해져서 쇼크 상태에 빠졌어요.”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손을 꼭 쥐었다.얼굴은 변하지 않았지만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그녀는 간병인에게 설명했다.“한 여사와 나는 남남이에요. 같은 피를 나눴을 뿐, 진정한 모녀 사이는 아니라고요.”간병인은 놀라면서
박민정이 돌아간 후, 한수민은 몇 시간의 응급 치료 끝에 다시 깨어났다.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곳에는 간병인만 있을 뿐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박민정조차 없었다.한수민은 갈라진 입술을 벌리며 말했다.“어디... 갔어?”간병인은 바로 다가와 물었다.“누구요?”“박민정.”간병인은 한수민이 아직도 박민정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한수민에게 설명했다.“아마 일이 있어서 갔을 거예요.”한수민이 비꼬려는 찰나 간병인은 박민정이 준 명함을 꺼내며 말했다.“이걸 보세요. 박민정 씨가 줬는데 이후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했어요. 박민정 씨가 책임질 거라고요.”한수민은 이번에 어쩌다가 비꼬지 않았다.간병인은 명함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제 친척 중에도 두 딸을 가진 여자가 있거든요. 편애를 했는데 작은딸만 좋아했죠. 그런데 나이가 들자 애지중지 키운 작은딸은 그 사람을 돌보지 않았고, 심지어 설날 밤에 집에서 내쫓았어요. 어렸을 때 싫어했던 큰딸이 오히려 그 사람을 집에 데려와 함께 살았어요. 이제 그 친척은 큰딸이 더 좋다고 말하더라고요.”한수민이 물었다.“두 딸이 모두 친딸이야?”“아니요. 큰딸은 양녀예요.”간병인이 대답했다.한수민은 믿기지 않은 듯 눈을 크게 떴다.“양녀인데 잘해줄 리가 없잖아.”“양녀가 어때서요? 양녀는 은혜를 갚으려고 친딸보다 더 잘해줄 수 있어요.”간병인이 말했다.한수민은 더 말을 하지 않자 간병인이 또 물었다.“왜 말이 없으세요? 사모님 두 딸도 아버지가 다르잖아요. 지금 남편을 좋아한다고 전 남편의 딸에게 모질게 굴 수는 없죠.”간병인은 박민정이 큰딸이고, 한수민이 박민정의 아버지와 이혼한 후 다른 사람과 재혼해 윤소현을 낳았다고 생각했다.“그만해.”한수민은 그녀의 말을 멈췄다.간병인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한수민은 동정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걸 까먹을 뻔했다.밤이 되자 간병인은 쉬러 갔다.한수민은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잠
한수민은 윤씨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참 기다려 겨우 택시를 잡았다.도착했을 때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저택은 오늘 유난히 조용했다. 경비원을 제외한 사용인들은 아직 깨지 않았다.한수민은 돌아온 후 지문을 사용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침실로 가서 윤석후를 찾으려 했지만 그 방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윤 대표님, 아침부터 뭐 하는 거예요? 정말 못 말려.”매혹적인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한수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윤 대표님, 사모님이 정말 암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하나요?”여자가 물었다.“그럼.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너를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겠어?”윤석후가 대답했다.한수민은 자신의 첫사랑인 윤석후가, 박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희생하면서까지 함께 했던 윤석후가 가장 힘든 시기에 자신을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문을 세게 밀치고 들어갔다.방 안의 두 사람은 이 시간에 누가 들어올 거라 생각하지 않아 문을 닫지 않았었다.쿵!그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어두운 조명 아래 한수민은 윤석후와 그의 비서가 침대에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의 눈은 금세 붉어졌다.“윤석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윤석후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다.“한수민! 왜 병원에 있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야?”한수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몸의 통증을 참으며 비서의 머리카락을 잡더니 그녀를 때리려고 했다.비서는 스무 살 넘은 젊은 여자라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이 할망구가, 빨리 놔!”윤석후도 비서를 도우려 했다.“여보, 이러지 말고 빨리 손 놔.”“이 여우 년 편을 들어? 잊었어? 지금 당신이 가진 모든 건 내가 준 거야. 내가 준 건 내 손으로 망칠 수도 있다고!”한수민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짝!윤석후는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다.한수민은 그 충격에 귀가 울렸다.비서도 그녀를 세게 밀쳤다.한수민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나 때렸어? 잊었나
보통 딸은 엄마의 편을 들곤 한다.하지만 윤소현은 윤석후가 바람피웠다는 말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았다.“엄마, 이 일로 저를 부른 거예요?”한수민은 전혀 놀라지 않는 딸의 반응을 보며 물었다.“설마 이미 알고 있었어?”윤소현은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다.“아빠 같은 사람이 밖에 여자가 있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죠. 잊었어요? 예전에 아빠가 정수미랑 있을 때도 엄마를 몰래 만났잖아요.”윤소현의 말은 한수민에게 큰 충격이었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내 딸 맞아?”한수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윤소현은 아직 그녀와 갈라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저 당연히 엄마 딸 맞죠. 그러니까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감히 이런 말 못 하죠.”한수민은 약간 진정하며 말했다.“그러면 네 아빠가 나를 배신하는 걸 그냥 이렇게 두고만 볼 거야?”“걱정 마세요. 아빠에게 조심하라고 말할게요.”말을 마친 후 윤소현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엄마, 지금은 병원에서 푹 쉬고 안정을 취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한수민은 미간을 구겼다.“나 VIP 병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잖아. 내가 어떻게 안정을 취할 수 있겠어?”“YN그룹이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그 위기를 해결하려고 모든 자산을 아빠에게 줬어요. VIP 병실로 옮길 돈, 정말 없거든요.”“그럼 내가 전에 준 돈은?”“그것도 아빠한테 빌려줬죠.”한수민은 상황을 믿기 힘들었지만 더 이상 반박할 힘이 없었다.“소현아, 네 아빠가 재산을 다 빼돌렸다고 했어. 넌 절대 속지 마.”“그럴 리가요?”윤소현은 믿지 않는 척하며 말했다.“지금 가서 잘 물어볼게요. 엄마는 먼저 병원으로 돌아가세요.”윤소현이 떠난 후.한수민은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다가 택시를 타고 서교에 있는 박민정 아버지의 묘지로 갔다....두원 별장에서.“지금 묘지로 갔다고요?”“네.”한수민을 감시하는 사람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주먹을
유남준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들어와.”서다희가 걸어 들어오며 물었다.“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지금 거의 다섯 시가 되었어요. 윤우 도련님을 학교에서 데려오기로 하셨잖아요.”“윤우?”유남준은 의아해했다.“그게 누군데?”서다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대표님 또 윤우를 잊으신 거야?’“대표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지금이 몇 년도죠?”유남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서 비서, 요즘 너무 한가했지? 두바이행 비행기 표는 준비됐어? 초급 칩셋 프로젝트에 대해 협상하러 가야 하잖아.”그는 눈을 뜨고 일어나려 했지만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왜 아무것도 안 보이지?”‘초급 칩셋이라... 대표님과 사모님이 결혼한 지 1년째 되던 해에 있었던 일인데? 이걸 어떻게 하지? 그때면 유앤케이가 제일 힘들 때이기도 하고, 대표님이 온갖 비웃음을 받던 시기인데.’“대표님, 할 얘기가 있어요.”“말해.”서다희는 녹음기를 꺼냈다.이 녹음기에는 그가 매번 해명할 때마다 하는 말들이 꼼꼼하게 녹음되어 있었다.약 한 시간 후.유남준은 두원 별장으로 돌아왔다.윤우는 그의 다리에 매달리며 말했다.“아빠, 오늘 학교에서 저 데려오기로 했잖아요. 왜 약속 안 지키셨어요?”유남준은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윤우를 들어 옆으로 던졌다.“다른 데 가서 놀아.”윤우는 의아해하며 서다희를 쳐다봤다.서다희가 눈짓을 하자 윤우는 바로 상황을 깨달았다.윤우는 유남준의 병이 이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다.거의 이틀마다 한 번씩 바뀌었으니 말이다.그는 위층으로 올라가 박민정에게 알렸다.“엄마, 우리 이 기회에 떠날까?”박민정은 이해하지 못했다.윤우는 유남준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매일 ‘아빠’와 ‘쓰레기 아빠’를 번갈아 부르면서 말이다.“왜 가려고 해?”“지금 아빠는 상태가 안 좋아서 그래. 우리 새로운 아빠 찾자.”박민정은 황당했다.“아빠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거니?”그리고 허리 숙여 아이에게 설명했다
방금은 그가 너무 충동적이었다.엄마가 아픈 아빠를 두고 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런 제안을 했다.“미안해, 엄마. 잘못했어.”“그래, 잘못을 알면 됐어.”박민정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윤우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는 박민정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있어서 박민정은 유남준보다 백 배는 더 중요했다.“엄마, 밥 먹으러 가자.”“그래.”식탁에서 유남준은 꼿꼿하게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박민정과 윤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몇 숟가락 대충 뜨고는 일어섰다.“나 일이 있어서 오늘 밤엔 안 돌아올 거야.”박민정은 잠시 멈칫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알겠어요.”같은 대답이었다.유남준은 자신이 진짜로 기억을 잃은 건지 믿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다희에게 제호 클럽에 가자고 했고 김인우와 방성원도 불러냈다.유남준이 자리에 앉았고 김인우와 방성원이 차례로 도착했다.김인우는 유남준 옆에 앉으며 말했다.“남준아,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니? 네가 우리를 술 마시자고 부르다니. 몸은 괜찮아?”6년 전 박민정이 실종된 후 유남준은 점점 그들과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박민정이 진주에 돌아온 이후로는 그들과 거의 약속을 잡지 않았었다.“농담하지 말고, 나 물어볼 게 있어.”김인우는 즉시 진지해졌다.“뭐 물어보려고 하는데?”“나 정말 박민정 좋아해?”김인우는 물론, 머릿속에 온통 임신한 아내 생각뿐인 방성원도 옆에서 그 말을 듣고는 웃음을 터뜨렸다.“남준아, 너 우리 놀리는 거야?”방성원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김인우도 어이가 없는 듯이 말했다.“난 또 무슨 심각한 문제라고. 이걸 물어볼 줄은 몰랐네. 박민정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유남준은 이마를 주무르며 말했다.“나 또 기억을 잃었어.”김인우는 멈칫했다.“그럼 우리는 기억해?”“그냥 몇 년간의 기억만 없어.”유남준이 대답했다.김인우는 곧바로 진지하게 말했다.“남준아, 너 계속 이러면 안 되잖아. 얼른 병원에 가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