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에게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어 박민정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가 이지원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하지만 지금 자기 품에 기대고 있는 박민정이 싫지만은 않았다.“뭔가 달라.”다짜고짜 날아오는 말에 박민정은 그저 생뚱맞기만 했다.“뭐가 다르다는 건데요?”유남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바로 그녀를 놓아주었다.‘내가 박민정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심지어 아이까지 생겼다고?’주위 사람들이 말해주고 있는 그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그 아이는 몇 살이야?”유남준은 또다시 생뚱맞게 물었다.“4살 좀 넘어요.”갑작스러운 질문이 그저 이상하기만 했으나 박민정은 대답을 해주었다. ‘4살이라면 이혼하려고 했던 그때가 맞는 것 같은데.’“나한테 약을 탔었어?”유남준은 대충 짐작하면서 물었다.“기억 난 거예요?”박민정은 그가 말하고 있는 일이 그의 아이를 품기 위해 약을 탔었던 그때를 말하고 있는 줄 알았다.오해가 또 생기기 시작했는데.유남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삼엄한 빛을 드러냈다.“그럴 줄 알았어.”박민정과 이혼하기로 했었는데 왜 이혼을 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약을 타는 악랄한 수단으로 자기를 잡았다면서.“너 참 보통 여자가 아니었구나. 이런 일에 있어서는 참 솔직하게 대답하네?”비아냥거리며 유남준이 말했다.박민정은 지금 둘 사이에 오해가 생긴 줄도 모르고 설명하기 시작했다.“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거라고 후에 분명히 설명해 줬었어요. 윤우가 백혈병으로 앓고 있는데, 친형제 골수가 필요하다고 그랬단 말이에요.”그 말을 듣고서 유남준은 처음에는 알 수 없었으나 대화 속에서 포인트를 찾아냈다.“그럼, 첫 번째 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유남준의 물음에 박민정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그 일까지 잊고 있겠다고 미처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다.긴 세월이 지나갔음에도 박민정은 그때를 생각하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곤 한다.“이제 와서 왜 그렇게 묻는 거예요? 일단 병
은회색 승합차가 입구에 멈춰 섰다.얼마 지나지 않자 유남준을 부축하여 차에서 내리고 있는 박민정이 김인우의 시야로 들어왔다.두 사람 뒤에 서다희도 바짝 따라왔다.“남준아, 형수, 어떻게 된 거야?”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지만 ‘형수’라는 부름이 유남준에게 유난히 낯설었다.김인우는 박민정을 귀머거리로 불렀었는데 말이다.그리고 김인우만큼 박민정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데, 지금 박민정을 ‘형수’라고 부르고 있다.“말로 하자면 좀 길어요. 서 비서님이 알려줄 거예요.”김인우에 대한 박민정의 태도는 여전히 덤덤하기 그지없다.그러한 태도에 김인우는 신경 쓰지 않고 두 사람을 들여보내고 나서 서다희에게 물었다.서다희는 자초지종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하민재 그놈 죽으려고 환장한 거예요?”김인우는 욕설을 퍼부었다.“하씨 가문에 그런 놈도 있었던 거예요? 다들 하나 같이 쩔쩔맬 줄 알았는데, 감히 남준이한테 손을 대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게 맞는 것 같네요.”서다희 역시 미처 생각지 못했다.그동안 하씨 가문은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남준이 봐줄 의사는 찾아냈어요. 잠시 나갔다가 올게요.”서다희는 바로 그를 가로막았다.“대표님께서 회복되시고 나면 그때 다시 계획 세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김인우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하민재와 연지석은 저희 사모님 친구이기도 합니다.”그 말에 조금 전까지 노발대발하던 김인우는 갑자기 차분해졌다.“그럼, 회복하고 나서 다시 얘기하시죠.”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서다희는 순간 믿어지지 않았다.유남준의 말만 듣는 김씨 가문의 도령이 이토록 쉽게 설득되었으니 말이다.유남준은 검사받으러 들어갔고 박민정을 비롯한 일행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서다희로 부터 모든 상황을 알게 된 김인우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해외에 있는 신경 전문의한테서 비슷한 상황을 들은 바가 있는데, 그 사람은 기억이 딱 그대로 멈췄다고 했어.”“완쾌됐나요?”김인우는 고개를 저었다.“지금 기술로는
조하랑은 멈칫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이목구비가 뚜렷한 유남준을 바라보았다.유남준은 더 이상 잠꼬대를 하지 않았고 조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민정아, 혹시 저런 사람은 우리랑 뇌 구조가 다른 거 아니야?”그 말에 박민정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가 봤던 건 절대 잊지 않았던 사람인데, 기억을 잃었다니... 그게 말이 돼?”두 사람은 유남준의 병상 바로 옆에서 그를 한동안 깍아내렸다.아주 덤덤한 모습으로.어느새 밥 먹을 시간이 다가왔고 유남준은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서다희는 박민정에게 먹고 싶은 게 있냐면서 부하에게 물어보라고 했다.그때 조하랑이 전혀 사양하지 않고 메뉴를 읽기 시작했다.“샤브샤브, 마라탕, 마라샹궈 먹고 싶어요.”산모인 박민정은 그동안 줄곧 음식을 싱겁게 먹어왔다.이렇게 자극적인 음식은 정말로 듣는 것마저도 오랜만이었다.“제 친구가 말한 대로 준비해 주세요. 샤브샤브는 두 개로 준비해 주시고 제가 먹어왔던 영양식도 그대로 준비해 주세요.”박민정은 서다희가 보내온 사람에게 부탁했다.배 속의 아이를 위해 생각해야 하니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다.“어머, 내 기억 좀 봐! 너 임신한 거 까먹고 있었어.”“괜찮아. 나도 오랜만이라 좀 당겨. 이번 기회에 좀 먹지 뭐.”“그래.”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들이 줄줄이 들어왔다.유남준이 지내고 있는 VIP 병실에는 거실 뿐만 아니라 부엌까지 준비되어 있다.그러나 그럼에도 음식 향기는 그의 병상까지 전해졌다.유남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다희를 불러와 한바탕 야단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사무실에 왜 이렇게 음식 냄새가 진동하냐면서.조하랑이 옆에 있어서 그러한지 박민정은 시간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는 것 같았다.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그때 조하랑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는데, 박예찬이었다.“이모, 왜 인제야 전화 받는 거야! 내가 집에 없어서 몰래 쉬려는 건 아니지?”조하랑이 박민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음에도 조하랑은 박예찬 덕분에 취업 방향을 정할 수 있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돈이 없는 건 아니나 자기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어 안도감이 들었다.전 남자 친구였던 강연우가 늘 조하랑을 이처럼 풍자했었다.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라고.그리고 지금의 수입을 보면 아마 변호사인 강연우보다 몇십 배는 더 벌 수 있을 것이다.“참, 하랑아, 김씨 가문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어? 강연우가 또 찾아오지 않았어?”지난번에 강연우와 김인우는 크게 싸운 적도 있다.조하랑은 오늘따라 유난히 소탈해 보였다.“김씨 가문에서 잘 지내고 있고 강연우한테서 전화는 몇 번 왔었어.”그러고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덧붙였다.“민정아, 강연우 참 이상하지 않아? 나한테 김씨 가문이랑 엮이지 말라고 절대 김인우한테 시집가지 말라고 인우 씨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수없이 타이르고 말해줬어.”이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조하랑은 어처구니가 없다.강연우에 대해서.“자기는 결혼까지 했으면서 네가 누구한테 시집을 가든말든 무슨 상관이지? 이상하긴 하네.”박민정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하랑아, 김씨 가문 어른들은 다들 좋으신데, 결혼하는 건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절대 후회하는 일 없이 신중하게 고려해 봐.”정서 변화가 심한 김인우 인지라 그가 싫어하는 사람은 사경으로 몰아넣을 때까지 괴롭히는 면도 있다.지금 자기한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박민정은 그럼에도 김인우란 사람이 걱정되었다.“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께도 말씀드렸어. 적어도 1년 정도는 만나보고 결정해야 한다고.”“인우 씨랑도 이미 얘기했어. 1년 지나고 나서 할아버지께 말씀드리자고. 서로서로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 그만 포기하시라고.”조하랑의 말을 듣고 난 박민정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그래.”“그럼, 나 먼저 간다. 내일 또 올게. 올 때 노트북도 가지고 와야겠어. 예찬이가 수시로 검문 들어올까
유남준 역시 벽에 찰싹 붙어 있는 박민정에게 다가갔다.벽과 팔을 사이에 두고 박민정을 그 속에 꽉 갇혔다.박민정은 다짜고짜 들려온 그의 질문이 생뚱맞기만 했다.“무슨 뜻이에요?”유남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졌는데, 손바닥에 온기가 느껴지는 순간 놀라웠다.‘정말이었어?’“너 죽었잖아.”한껏 가라앉은 소리로 유남준이 말했다.그 말에 더더욱 어리둥절해진 박민정이다.“아무리 싫어도 죽은 사람 취급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요?”“내가 널 2년 동안 찾아다녔어. 알아? 2년 동안 꿈에 나타나지도 않더니 오늘 어쩌다가 나타난 거야? 설마 정말 죽기라도 한 거야?”유남준은 이 모든 게 꿈인 줄 안다.“죽어서 꿈에 나타난다더니 정말로 죽은 거야?”“얼굴 좀 보여줘 봐. 왜 못 보게 하는 거야?”아무런 조명도 없어 그는 아직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인지 못 하고 있다.박민정은 그의 말속에서 서서히 눈치를 차리게 되었다.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는 것.자기가 실종 되고 나서 2년이 흐른 그 시점으로 돌아갔다는 것.“남준 씨, 그게 실은... 남준 씨 기억을...”하지만 말을 채 끊내기도 전에 유남준은 갑자기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꽉 잡고서거칠게 키스를 해왔다.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유남준은 어느새 옷까지 벗기고 있었다.“남준...”빈틈을 포착하여 박민정은 그를 미친 듯이 때리며 멈추게 하려고 했다.일단 자초지종부터 들어보라고.하지만 유남준은 그 어떠한 기회도 주려 하지 않았다.오늘 피해 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조명이 밝아졌다.그보다도 더욱 화끈거리게 한 것은 김인우가 의사 가운을 입은 채 문 앞에서 두 사람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놀라기는 김인우도 매한가지였다.그는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해주었다.“미안. 일부러 방해하려는 건 아니었어.”‘남준이 기억 잃었다면서?’‘근데 왜 저래?’김인우는 나가면서 친절하게 문까지 닫아주었다.유남준
유난히 부드러운 입맞춤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또다시 박민정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내가 연지석 질투하는 거 알아 몰라?”그 말에 박민정은 멍하기만 했다.“네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이제야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 인제 그만 돌아와 주면 안 돼?”눈물 한 방울이 박민정의 어깨에 툭하고 떨어졌다.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 같았던 유남준이 눈물을 흘리다니... 박민정은 믿어지지 않았다.하지만 다시 천천히 손을 들어 그를 꼭 안아주면서 다독였다.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숨긴 채.유남준은 또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다시 병상에 누웠다.깊이 잠든 그를 바라보며 박민정은 그의 눈을 어루만졌는데, 여전히 축축했다.유남준이 우는 걸 처음 보는 박민정이다.그가 울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자기를 신경 쓰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박민정이다.왠지 모르게 목이 메어왔고 그렇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박민정 역시 천천히 잠에 들었다.다시 깨어나 보니 이미 병상에 누워있었고 고개를 살짝 돌리니 창문 앞에 서 있는 훤칠한 그가 보였다.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를 보아하니 좀 나아진 듯했다.“남준 씨.”박민정의 소리에 유남준은 고개를 돌렸는데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그럼에도 천천히 다가갔다.“깼어?”“네.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박민정은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요즘 그의 상황에 대해 말해주려고 할 때 유남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너 죽었잖아. 이번엔 지옥에서 돌아온 거야?”그 말에 박민정은 또다시 얼어붙었다.‘회복된 게 아니었구나.’“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건 남준 씨에요.”박민정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그럼, 아니야? 죽은 척 하는 게 재미있었어? 그냥 끝까지 죽은 척하지 그랬어? 왜 돌아온 거야?”어젯밤에 일어난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까지.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또다시 물었다.“말해
생각지 못한 박민정의 행동에 유남준은 그대로 굳어졌다.우남준의 온몸에 힘이 빠지는 틈을 타서 박민정은 바로 자기 손목을 빼냈다.얼마나 힘을 들였는지 자국이 생길 지경이었다.‘아파.’박민정이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유남준은 다시 그녀를 끌어당겨 침대로 눕혔다.“누구한테 배운 거야?”가라앉은 목소리에 살짝 거친 느낌도 들어 있었다.지금 그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는 박민정이다.“겨우 뽀뽀 하나 한 것뿐인데, 배울 필요가 있어요?”유남준은 그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지만, 귀가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귀를 박민정이 보게 되었다.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박민정은 갑자기 손을 들어 그의 귓불을 천천히 만졌다.바로 그때 유남준은 다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는데, 힘을 들이지는 않았다.“연지석한테서 배웠어?”“혼자서 터득하면 안 되는 거예요?”박민정은 약간 화가 나기 시작했다.무엇이든 연지석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유남준때문에.홧김인지 아닌지 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의 다른 볼에도 뽀뽀했다.“이제 믿겠어요? 스스로 터득한 거라고요.”유남준은 세상 차갑게 웃기 시작했다.“내가 실수했네. 그럼, 뭘 더 어떻게 터득했는지 한 번 봐봐.”이윽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박민정에게 다가갔다.그러나 하필이면 바로 이때 서다희가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다른 부하에게 부탁하려고 했으나 유남준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또 하필이면 문이 열려있어 바로 들어간 것이었는데,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서 비서님.”박민정은 바로 유남준의 입을 막고 그를 밀쳤다.“서 비서는 지금 해외 출장 중이야. 무서워서 피하는 거야?”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유남준, 그런 유남준이 내내 어이없는 박민정.“서 비서님, 한마디 좀 하시죠.”서다희는 나지막이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익숙한 소리가 들려오자 유남준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돌아보았다.“넌 해외로 출장
박민정은 바로 거절해 버렸다.“어머님께 전해주세요.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다들 힘들어하고 있다고요.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다고 해주세요.”유남준 지금 상황으로 찾아가게 된다면 또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른다.“그래.”윤소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박민정의 말에 약간 말을 붙여서 고영란에게 알렸다.박민정이 아이를 두고 홀로 외국으로 떠난 것에 대해 본래 언짢아하고 있던 고영란은 그 소리를 듣고서 더더욱 불쾌해했다.“아주 그냥 눈에 뵈는 게 없구나!”윤소현이 옆에서 타일러 주었다.“어머님,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원래 그런 동생이었어요. 얼마 전에는 우리 새엄마랑 우리 윤씨 가문을 상대로 돈까지 요구했었어요. 돈 갚으라면서요.”“돈을 갚다니? 무슨 돈인데?”“동생 아버지 생전의 돈인데, 어디서 유언장을 위조해 왔지 뭐예요. 박씨 가문의 재산은 본래 자기 몫이라면서요.”그 말을 듣고서 고영란은 박민정이 더더욱 싫어졌다.하지만 윤소현 새엄마인 한수민 역시 반듯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너도 이제 우리 남우랑 약혼했으니, 앞으로 한수민 그 여자랑 자주 연락하지 마.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잖아.”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참, 남우 씨가 그러던데 아주버님 상태가 좀 이상했다고 그러셨어요. 해외에서 돌아오자마자 의사까지 집으로 들였다고 했었고요. 어머님이 부르시는 데도 동생이 거절한 걸 보면 혹시... 아주버님 보러 갈까요?”유남준은 줄곧 권씨 가문 둘째 도련님과 연락을 주고받았었다.하여 유남준이 이번에 해외로 떠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가 윤소현에게 일부러 소식을 흘린 것이고 윤소현의 손을 빌려 유남준의 상황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뭐?”고영란은 유남준에게 사고가 생겼다는 걸 듣고 바로 애간장이 타기 시작했다.“당장 가자.”“네.”저녁.박민정이 박윤우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고영란이 윤소현을 데리고 쳐들어왔다.고영란은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살피더니 유남준이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남준이는?”
유남준은 잠든 아들이 꿈속에서조차 자신을 두려워하며 박민정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박윤우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뒤 다시 서재로 향했다.여전히 찾아내지 못한 박민정의 행방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없이 다른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피곤함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워도 그의 눈은 감기지 않았다.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그녀를 찾을 수 없던 걸까?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정말 죽었단 말인가?‘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는 단호히 부정했다.‘아니야. 민정이는 절대 죽지 않았어. 만약 민정이가 정말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그렇게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이고 아침이 되자 전화벨 소리가 그의 짧은 잠을 깨웠다.전화를 보니 서다희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민정이에 대한 소식이라도 있어?”서다희는 상사의 질문에 솔직히 답했다.“아직 없습니다.”“그럼 무슨 일이야?”“제임스 씨 기억하시죠? 다음 주 해외에서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네요. 해외 무역 관련해서 논의하고 싶답니다.”“좋아. 일정 잡아.”전화를 끊기 전 유남준은 다시 물었다.“아직 조사하지 않은 곳은 얼마나 남았지?”세상은 참 크다고 하면 작다고 하면 작았다.서다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전 고민했다. 모든 곳을 다 찾으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몰랐다.“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미 확인했지만 이번에 제임스 씨 고향은 아직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겸사겸사 그쪽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좋아. 그리고 다른 지역도 인력을 더 투입해.”“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던 그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바로 움직였다.그의 얼굴은 한 해 동안 한층 늙어 보였고 깔끔하게 정리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박윤우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그는 보모에게 아이를 잘 돌봐달라고 당부한 뒤 집을 나섰다.그가 향한 곳은 IM이 아닌 박민
고영란은 그 말을 듣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이미 두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윤우까지 맡으라니! 너야말로 아이들의 아빠잖아!”유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윤우는 여기 두고 가세요.”어차피 집에는 가정부와 집사가 있었기에 그가 굳이 박윤우를 직접 돌볼 필요는 없었다.“그래야지. 윤우는 너한테 맡길게. 난 이제 가보마.”고영란은 단호하게 말했다.거실에 앉아 있던 박윤우는 이 모든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떨궜다. 사실 그는 집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엄마를 아직 찾지 못한 지금, 유남준과 단둘이 있는 시간은 그에게 끔찍한 고역이었다.하루 종일 숙제나 문제 풀이를 강요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고영란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본 박윤우는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할머니, 이제 가시는 거예요?”그는 속으로 외쳤다. ‘할머니,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하지만 고영란은 그의 진심을 알아채지 못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 난 이제 가야 해. 너는 아빠랑 잘 지내도록 해. 네 아빠는 지금 온몸에 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잖니.”고영란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박윤우는 할머니의 상황을 이해했기에 마지못해 그녀를 현관까지 배웅했다.고영란이 떠난 뒤 그는 방으로 들어가 게임이라도 하려는 찰나였다.그때 위층에서 유남준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윤우.”그는 순간 긴장하며 움찔했다. 그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2층 복도에 서 있는 아빠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위로 올라와.”박윤우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아빠, 또 뭔데요?”그는 투덜거리며 물었다.“숙제 검사.” 유남준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본가에 가기 전에 준 두 장의 문제지 어디 있지?”박윤우는 땅속으로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그게... 깜빡하고 안 가져왔어요.”그는 더듬거리며 변명했다.하지만 유남준은 화내지 않고 무표정하게 말했다.“그
박민정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유남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직장은 어때?]그녀는 짧게 답했다.[괜찮아요.]하지만 유남우는 그녀의 대답에 묘한 걱정이 들었다.그는 박민정이 직장에서 오래 일하며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다 보면 혹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까 두려웠다.[만약 힘들거나 맞지 않는다면 그만둬도 돼.]그는 다정하게 말했다.[네, 알겠어요.]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오히려 지금 직장은 그녀에게 도전 의식을 심어주고 있었다.무엇보다 그녀는 집에만 갇혀 있던 지난 1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며 지루함에 지쳐 있었다.이제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머리도 한층 더 빠릿빠릿해진 기분이었다.유남우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향했다.비록 유남우가 그녀를 위해 가사 도우미를 고용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일하는 게 더 편했다.별다른 일이 없을 때는 직접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진주시 유씨 집안의 오래된 저택에서.유남우는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지만 한동안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윤소현이 위층으로 올라왔다.유남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일부러 휴대폰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욕실로 들어갔다.역시나 그가 자리를 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소현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의 휴대폰을 들여다봤다.마침 그때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발신자는 어제 본 것과 동일한 프로필 사진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평범했다.“정말 감사해요. 당신 덕분에 이 직장을 구할 수 있었어요.”윤소현은 의아해하며 메시지를 유심히 읽었다.그때 욕실에서 유남우가 조용히 걸어나왔다.“뭘 보고 있어?”그의 목소리에 윤소현은 깜짝 놀라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아까 누가 메시지를 보낸 걸 봤어요. 당신이 직장을 구해줬다면서 감사하다고 하던데요.”유남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아, 별거 아니야. 예전에 한 고객의 딸이 해외에서 공부를
회사 직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박민정이 어떻게 그들의 업무를 제쳐두고 사장에게 이런 상황을 고발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사장은 박민정의 말을 듣고 문서들을 다시 살펴보았다.그 양은 분명 인턴 한 명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그는 고개를 들어 주영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주 비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왜 주 비서랑 다른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를 인턴에게 맡기는 거지?”“만약 이런 식이라면 내가 아예 새로운 직원을 뽑는 게 낫지 않나?”“아니면 당신들이 직접 이 인턴에게 급여를 주고 있는 건가?”주영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장님,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저는 단지 동료들에게 일이 너무 많으면 우선 민정 씨에게 맡기라고 말했을 뿐입니다.”그러나 사장은 더욱 화가 난 듯 말했다.“우리 회사의 업무는 이미 적절히 분배되어 있어. 이 인턴이 오전 동안 두 건의 번역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하다면, 왜 당신들은 자신의 업무조차 제시간에 끝내지 못하는 건가? 이건 당신들의 업무 능력을 재검토해야 할 문제로 보이네.”사장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려 하자 주영리는 억울한 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사장님, 민정 씨가 번역을 그렇게 빨리 끝낸 건 분명 번역 소프트웨어를 사용했기 때문일 겁니다.”평소 이런 전문 문서는 번역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며 보통 오전 동안 한 건을 완성하기도 어려웠다.사장은 그녀의 말을 듣고 박민정이 제출한번역 문서를 들어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잠시 후, 그는 문서를 주영리에게 건넸다.“직접 확인해 봐.”주영리는 서둘러 문서를 받아 살펴보았다.문법은 물론 표현까지 완벽하게 번역되어 있었고 소프트웨어로 번역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믿기지 않아 다른 문서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사장은 이제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 말했다.“주 비서는 회사에서 2년 동안 일했지만 번역된 문서들에서 종종 실수가 발견되곤 했어. 그런데 민정 씨는 아직 인턴이야. 민정 씨가 뒷문으로
박민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배운 적이 있어요.”“역시! 내가 어쩐지 민정 씨 기본기가 너무 좋다 했지. 정말 귀한 인재를 만났네!” 무용 선생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매년 직원들에게 춤을 연습시키며 몇몇 주요 인사들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몸이 굳어 안무를 익히는 데 애를 먹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빠르게 연습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가 퇴근 준비를 하러 갔다.하지만 사무실에 도착하자 모든 동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 시선들에는 구경거리 보듯 즐기는 눈빛도, 적대적인 눈빛도, 안쓰러운 눈빛도 섞여 있었다.박민정은 의아한 마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막 앉으려는 순간 주영리가 사장실에서 나오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민정 씨, 아까 작업을 다 끝냈다고 했죠? 서랍을 열어서 그 문서들 좀 가져와요. 사장님께 보여 드리게.”박민정은 주저하지 않고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열고 문서들을 꺼냈다.주영리는 그것들을 받아 펼쳐 보더니 눈에 띄게 동공이 흔들렸다.잠시 후, 주영리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 이렇게 많은 문서 중에서 민정 씨가 번역한 건 고작 몇 장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빈칸이잖아? 이래놓고 일을 다 끝냈다고?”“내가 말했잖아요. 뒷문으로 들어온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고. 무능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네!”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비난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주영리는 계속 몰아붙였다.“좋아요, 사장님 만나러 가요. 민정 씨가 얼마나 일을 대충 했는지 직접 보여 드리자고!”그녀는 박민정의 팔을 붙잡고 사장실로 향했다. 이미 사장에게 상황을 미리 고발해 둔 터라, 문도 두드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사장은 외국인이었다.그는 일하기 싫어하는 태도나 무책임한 행동을 싫어했다.박민정과 주영리가 들어오는 것을 본 사장은 의자에 기대앉아 외국어로 물었다.“영리 씨, 민정 씨가 정말 일을 다 안 끝냈나?”그는 원래 이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주영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편하게 지시하세요.”주영리를 본 순간 박민정은 이번 직장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이 일을 꼭 지켜내리라 마음먹었다.일자리가 생기면 유남우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주영리는 박민정의 태도에 더욱 거만해져서 온갖 잡다한 일을 지시하기 시작했다.일을 지시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것은 그저 허드렛일이었다.이 직원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저 직원의 서류를 출력하는 일 따위였다.심지어 주영리는 동료들에게 은밀히 말했다.“앞으로 일이 많아서 힘들면 여기에 다 넘겨. 여유롭게 써먹으면 되잖아.”이는 명백히 박민정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동료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일을 대신해 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앞다투어 일을 떠넘겼다.“듣자 하니 번역이 전공이라던데, 이 문서들 좀 번역해 줘요. 절대 실수하면 안 돼요.”“제 것도 부탁드려요. 오늘까지 해야 해요.”“...”모두들 자신들의 일을 박민정에게 맡기며 떠넘기기에 바빴다.그녀에게 쏟아진 업무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게다가 오후에는 고객 응대를 위한 댄스 연습도 예정되어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모든 일을 다 받아들이며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다.동료들은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일을 받아주는 모습을 보고 은근히 비웃었다.“원래부터 이렇게 만만한 사람이었나 봐. 앞으로 일 다 넘겨도 되겠네.”“그러게. 공짜 노동력을 안 써먹으면 바보지.”주영리도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일하는 박민정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춤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애야. 내가 장담하는데, 여기 오래 못 버틸걸.”다들 한마디씩 던지며 박민정을 험담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퇴근 시간이 되자 박민정은 모든 서류를 정리해 들고 곧장 댄스 스튜디오로 향했다.주영리는 그녀가 자리를 뜨려 하자 재빨리 가로막았다.“민정 씨, 일 다 끝냈나
홍주영은 여전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저는 정말로 누군지 모릅니다.”“좋아요, 아주 좋아요.” 윤소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홍 비서가 무슨 내막을 알고도 숨기고 있다면 정말 끝장인 줄 알아요.”매서운 경고를 남긴 채 그녀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홍주영은 자리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오늘 있었던 일을 유남우에게 문자로 알렸다.유남우는 그녀의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간발의 차로 윤소현에게 들킬 뻔했지만 다행히 아직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주영아, 고마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줘.”그가 답장을 보냈다.홍주영은 그의 메시지를 보며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정말로 둘째 도련님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았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밖에는 어느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홍주영은 그 눈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쓸쓸한 뒷모습을 남겼다.며칠 전, 그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었다.“너도 이제 나이가 얼마인데, 변변한 직장도 없으면서 결혼도 안 하고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니? 설마 남자를 안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이번엔 꼭 집에 와서 소개팅 나가야 해. 결혼하지 않으면 내가 죽은 네 아빠에게 뭐라 설명하겠니?”“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엄마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나중에 네가 혼자가 늙을 모습은 보고 싶지도 않아.”홍주영은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둘째 도련님.”“무슨 일이야?”“어머니가 저를 부르셔서 잠시 고향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휴가를 내도 될까요?”유남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래, 다녀와.”전화를 끊기 전 그는 물었다.“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홍주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별일은 없고요. 그냥 어머니가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홍주영은 유남우를 모신 이후로 집에 잘 내려가지 못했다.올해 설에도
홍주영은 유남우가 너무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누구와 대화 중인지 궁금해졌다.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을 자제했으나 살짝 보니 그는 한 여자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홍주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더는 보지 않으려 했다.마음속에서 믿기 어려운 생각이 들었다.자신이 알던 유남우는 항상 곧고 올곧은 사람이었는데 설마 바람을 피우는 걸까?그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윤소현일 리 없다는 건 분명했다.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구일까?홍주영은 유남우가 여전히 박민정만을 마음에 두고 사는, 깊은 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겼었다.그런 그가 다른 여자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그녀는 실망감에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저녁 퇴근길에서 홍주영은 한 차량이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을 발견했다.차 창문이 내려오자 나타난 건 고고하게 웃고 있는 윤소현의 얼굴이었다.홍주영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고 윤소현은 그런 그녀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홍 비서, 걱정 마세요. 난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다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홍주영은 감정을 숨기며 무표정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차에 올라타서 이야기하죠,” 홍주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대답했다.“무슨 일이든 여기서 말씀하시죠.”그녀는 윤소현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특히 오늘 유남우가 그녀에게 사과를 강요한 일로 인해 윤소현이 자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란 걸 직감했다.하지만 홍주영은 틀렸다.윤소현은 그녀가 차에 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고 어쩐지 재미있어하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내가 그리 속 좁은 사람은 아니에요. 복수하려는 것도 아니고요.”그녀는 홍주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제야 홍주영은 그녀가 정말로 문제를 일으키려는 건 아닌 듯 보였고 근처의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윤소현은 직접 메뉴를 가져와 홍주영에게 건네며 말했다.“먹고 싶은
윤소현은 유남우가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섰고 마침 비서 홍주영이 유남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자의 직감으로 홍주영이 자신의 남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던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유남우 앞에서 홍주영의 뺨을 후려쳤다.“아직 설 연휴인데 홍 비서는 왜 남우 씨를 직접 나서게 해요? 일을 그 정도로 못 하나?”홍주영의 뺨은 화끈거렸고 그녀는 한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해 있었다.그제야 유남우가 사태를 파악하고 급히 다가와 윤소현의 팔을 붙잡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의 날 선 질문에 윤소현은 한순간 당황했지만 곧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남우 씨, 그냥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요. 명절에 당신이 나랑 다혜를 두고 가버리다니...”그러나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며 차갑게 말했다.“그게 네가 무고한 사람을 때린 이유야?”그의 싸늘한 눈빛은 평소의 온화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 눈빛에 겁먹은 윤소현은 몸을 떨었고 손목이 점점 아파왔다.“남우 씨, 아파요...”하지만 유남우는 전혀 풀어줄 기색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홍 비서에게 사과해.”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나더러 부하 직원한테 사과를 하라고요?”“홍 비서는 단순한 부하 직원이 아니야. 내 친구이기도 해. 그러니까 얼른 사과해.” 유남우는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윤소현은 마지못해 홍주영을 향해 말했다.“미안해요, 홍 비서.”홍주영은 얼얼한 뺨의 통증을 참으며 유남우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됐죠?” 윤소현은 다시 유남우를 바라봤다.그제야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손목이 풀리자마자 윤소현은 아픈 손목을 문지르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손목이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세게 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