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부드러운 입맞춤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또다시 박민정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내가 연지석 질투하는 거 알아 몰라?”그 말에 박민정은 멍하기만 했다.“네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이제야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 인제 그만 돌아와 주면 안 돼?”눈물 한 방울이 박민정의 어깨에 툭하고 떨어졌다.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 같았던 유남준이 눈물을 흘리다니... 박민정은 믿어지지 않았다.하지만 다시 천천히 손을 들어 그를 꼭 안아주면서 다독였다.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숨긴 채.유남준은 또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다시 병상에 누웠다.깊이 잠든 그를 바라보며 박민정은 그의 눈을 어루만졌는데, 여전히 축축했다.유남준이 우는 걸 처음 보는 박민정이다.그가 울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자기를 신경 쓰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박민정이다.왠지 모르게 목이 메어왔고 그렇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박민정 역시 천천히 잠에 들었다.다시 깨어나 보니 이미 병상에 누워있었고 고개를 살짝 돌리니 창문 앞에 서 있는 훤칠한 그가 보였다.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를 보아하니 좀 나아진 듯했다.“남준 씨.”박민정의 소리에 유남준은 고개를 돌렸는데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그럼에도 천천히 다가갔다.“깼어?”“네.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박민정은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요즘 그의 상황에 대해 말해주려고 할 때 유남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너 죽었잖아. 이번엔 지옥에서 돌아온 거야?”그 말에 박민정은 또다시 얼어붙었다.‘회복된 게 아니었구나.’“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건 남준 씨에요.”박민정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그럼, 아니야? 죽은 척 하는 게 재미있었어? 그냥 끝까지 죽은 척하지 그랬어? 왜 돌아온 거야?”어젯밤에 일어난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까지.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또다시 물었다.“말해
생각지 못한 박민정의 행동에 유남준은 그대로 굳어졌다.우남준의 온몸에 힘이 빠지는 틈을 타서 박민정은 바로 자기 손목을 빼냈다.얼마나 힘을 들였는지 자국이 생길 지경이었다.‘아파.’박민정이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유남준은 다시 그녀를 끌어당겨 침대로 눕혔다.“누구한테 배운 거야?”가라앉은 목소리에 살짝 거친 느낌도 들어 있었다.지금 그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는 박민정이다.“겨우 뽀뽀 하나 한 것뿐인데, 배울 필요가 있어요?”유남준은 그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지만, 귀가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귀를 박민정이 보게 되었다.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박민정은 갑자기 손을 들어 그의 귓불을 천천히 만졌다.바로 그때 유남준은 다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는데, 힘을 들이지는 않았다.“연지석한테서 배웠어?”“혼자서 터득하면 안 되는 거예요?”박민정은 약간 화가 나기 시작했다.무엇이든 연지석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유남준때문에.홧김인지 아닌지 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의 다른 볼에도 뽀뽀했다.“이제 믿겠어요? 스스로 터득한 거라고요.”유남준은 세상 차갑게 웃기 시작했다.“내가 실수했네. 그럼, 뭘 더 어떻게 터득했는지 한 번 봐봐.”이윽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박민정에게 다가갔다.그러나 하필이면 바로 이때 서다희가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다른 부하에게 부탁하려고 했으나 유남준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또 하필이면 문이 열려있어 바로 들어간 것이었는데,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서 비서님.”박민정은 바로 유남준의 입을 막고 그를 밀쳤다.“서 비서는 지금 해외 출장 중이야. 무서워서 피하는 거야?”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유남준, 그런 유남준이 내내 어이없는 박민정.“서 비서님, 한마디 좀 하시죠.”서다희는 나지막이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익숙한 소리가 들려오자 유남준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돌아보았다.“넌 해외로 출장
박민정은 바로 거절해 버렸다.“어머님께 전해주세요.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다들 힘들어하고 있다고요.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다고 해주세요.”유남준 지금 상황으로 찾아가게 된다면 또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른다.“그래.”윤소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박민정의 말에 약간 말을 붙여서 고영란에게 알렸다.박민정이 아이를 두고 홀로 외국으로 떠난 것에 대해 본래 언짢아하고 있던 고영란은 그 소리를 듣고서 더더욱 불쾌해했다.“아주 그냥 눈에 뵈는 게 없구나!”윤소현이 옆에서 타일러 주었다.“어머님,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원래 그런 동생이었어요. 얼마 전에는 우리 새엄마랑 우리 윤씨 가문을 상대로 돈까지 요구했었어요. 돈 갚으라면서요.”“돈을 갚다니? 무슨 돈인데?”“동생 아버지 생전의 돈인데, 어디서 유언장을 위조해 왔지 뭐예요. 박씨 가문의 재산은 본래 자기 몫이라면서요.”그 말을 듣고서 고영란은 박민정이 더더욱 싫어졌다.하지만 윤소현 새엄마인 한수민 역시 반듯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너도 이제 우리 남우랑 약혼했으니, 앞으로 한수민 그 여자랑 자주 연락하지 마.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잖아.”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참, 남우 씨가 그러던데 아주버님 상태가 좀 이상했다고 그러셨어요. 해외에서 돌아오자마자 의사까지 집으로 들였다고 했었고요. 어머님이 부르시는 데도 동생이 거절한 걸 보면 혹시... 아주버님 보러 갈까요?”유남준은 줄곧 권씨 가문 둘째 도련님과 연락을 주고받았었다.하여 유남준이 이번에 해외로 떠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가 윤소현에게 일부러 소식을 흘린 것이고 윤소현의 손을 빌려 유남준의 상황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뭐?”고영란은 유남준에게 사고가 생겼다는 걸 듣고 바로 애간장이 타기 시작했다.“당장 가자.”“네.”저녁.박민정이 박윤우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고영란이 윤소현을 데리고 쳐들어왔다.고영란은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살피더니 유남준이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남준이는?”
“어머님, 일단 윤우부터 방으로 돌려보내시죠. 윤우가 들어서 좋을 것 없잖아요.”윤소현이 고영란에게 말했다.박윤우는 예쁘게 생겼지만 악독하기 그지없는 윤소현을 바라보며 눈을 치켜세웠다.“꺼져!”예상치 못한 소리에 윤소현은 으스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축 떨어진 손을 움켜쥐면서 박윤우를 당장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어른한테 그렇게 버릇없으면 안 돼.”“퉤!”박윤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윤소현을 향해 침을 뱉었다.“아줌마, 선생님께서 사람한테만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어요.”그 말에 윤소현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졌다.고영란만 지금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아마 이미 박윤우에게 손찌검을 했을 것이다.박민정 역시 박윤우에게 이런 더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허리를 숙이고 타일렀다.“윤우야, 먼저 방에 가 있어. 엄마 할머니랑 중요한 얘기 해야 해.”“걱정하지 마. 할머니 절대 엄마 괴롭히지 않을 거야.”이윽고 박민정은 고영란을 바라보며 확인했다.“어머님, 제 말이 맞죠?”어머님이라는 소리를 오랜만에 들은 고영란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럼.”지금 눈앞에 있는 어른들이 서로 인사치레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박윤우는 모를 리가 없다.하지만 힘이 약하니 박민정을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았다.차라리 쓰레기 아빠라도 옆에 있었으면 하는 심정이다.박윤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순순히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제 막 치료를 받고 나온 유남준은 두통이 좀 나아진 것 외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서다희는 이때 이름 모를 전화를 받게 되었다.“누구시죠?”“다희 삼촌, 저 윤우예요.”박윤우의 앳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려왔다.서다희는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도련님이셨군요. 무슨 일이시죠?”눈높이를 맞추며 서다희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다희 삼촌, 아빠한테 전화 좀 전해주시면 안 돼요?”“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대표님께서 지금 몸 상황이
차갑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고영란이 말했다.“우리 유씨 가문은 결코 보잘것없는 집안이 아니야. 지금 당장 무릎 꿇어!”생각지 못한 말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박민정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가 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거죠?”“아이까지 내팽개치고 해외로 남자를 만나러 간 네가 잘못한 게 없다고?”윤소현이 옆에서 계속 부채질했다.어처구니가 없는 박민정은 두 눈을 부릅뜨고 윤소현을 노려보며 물었다.“열녀문이 내려진 것도 아니고 곁에 남성 친구조차 두면 안 된다는 소리예요?”“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 따위는 없어. 있을 것 같아?”윤소현은 계속 비아냥거렸다.흔들림 없이 공격하는 윤소현의 모습에 박민정은 더 이상 그 어떠한 체면도 봐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제가 알기로는 윤소현 씨 남자 파트너 자주 바꾸기로 소문이 자자한 것 같은데... 여러 스킨십까지 자주 하고 말이에요. 저보다는 윤소현 씨가 더 더러운 게 아닌가요?”“내가 하는 건 일이고 네가 하는 건 사랑이잖아.”“순수한 우정 따위가 없다면 순수한 일 따위도 없는 거 아니에요?”박민정은 계속 맞받아쳤다.이렇게 날카롭고 예리하게 대응할 줄은 몰랐던 윤소현은 당황하면서도 짜증이 났다.다행히도 고영란이 자기편을 들어주면서 기분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무릎 꿇어!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박민정은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고영란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들어와.”무릎을 꿇으라고 명령을 내리게 되면 상대가 누구든지 반드시 꿇어야 한다는 게 고영란의 ‘신념’이다.시어머니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해도 좋다.얼마 지나지 않아 제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우르르 들어와 박민정에게 말했다.“사모님, 큰 사모님 말씀대로 하시기 바랍니다.”윤소현은 옆에서 좋은 구경이라도 난듯한 얼굴이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 채 덤덤하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고영란을 바라보며 말했다.“무릎 꿇지 않을 겁니다.”경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문 앞에 서 있는 유남준과 서다희가 보였다.유남준의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그가 돌아올 것으로 생각지도 못한 박민정은 다소 의외였다.“무슨 일이야?”그리고 생각할 것도 없이 고영란의 편을 들 것이라고 여겼다.하지만 전혀 다른 말을 뱉어버리고 만다.“아무나 집으로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아무나?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윤소현보다 고영란은 거의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남준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아무라니! 난 네 엄마야!”조용히 듣고 있던 유남준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어머니, 저와 민정이 사이의 일은 사적인 일이니 앞으로 상관하지 마세요.”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유남준이 기억을 되찾은 줄 알았다.아들에게 한바탕 쓴소리를 듣고 난 고영란은 목이 메었다.“알았어. 앞으로 싸우든 말든 어떻게 지내든 절대 상관하지 않을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이윽고 유남준을 자세히 훑어보았는데, 크게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윤소현에게 말했다.“가자.”윤소현 역시 유남준을 살펴보았는데, 유남우가 말한 것처럼 엄중해 보이지 않았다. “네.”윤소현은 고영란 따라 밖으로 나왔다.고영란은 박민정에게 미처 풀지 못한 화를 윤소현에게 풀 작정이었다.“남준이 크게 다쳤다면서! 멀쩡하잖아!”“저도 남우 씨한테 들은 말이라 속사정은 잘 몰라요.”윤소현의 설명에 고영란은 콧방귀를 뀌었다.“우리 남우한테 뒤집어씌울 생각하지 마.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예고 없이 돌아온 쓴소리에 윤소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유남우와 약혼하고 나서 고영란은 줄곤 자상하게 예를 지키며 윤소현과 소통했었다.이런 적은 거의 처음이라고 볼 수 있다.하지만 집안 배경을 버팀목으로 하고 있는 윤소현은 이지원과 달라 바로바로 대꾸할 수 있었다.“어머님, 저한테 생각이 없다고 쳐요. 그럼, 어머님께도 생각이 없는 건가요? 제가 어머님을 이곳까지 억지로 끌고 왔어요?”밖에 도착하자 윤소현은 바로 자기
갑자기 유남준이 그녀의 손을 잡고는 말했다.“얘기해 봐, 왜 돌아왔어?”지금의 유남준에게 있어서 그는 박민정이 왜 돌아왔는지, 그리고 자기가 기억을 잃은 사실마저 모두 잊었다.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돌아온 이유를 유남준에게 다시 말했다.“그러니까 내 아이를 데리고 5년 사라졌다는 거야?”똑같은 말이라 박민정은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전에 이미 얘기했던 문제잖아요.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유남준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박민정.”박민정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이거 놔요.”유남준은 놓아주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더니 들어 올렸다.“뭐 하는 거예요? 나 내려줘요.”그녀는 무서운 듯 유남준의 팔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조심히 걸어요. 앞에 테이블이 있으니 부딪치지 말고요.”유남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침실로 가려고 하는데 왼쪽으로 가? 아니면 오른쪽으로 가?”‘침실로 간다고?’박민정은 바로 어젯밤 유남준이 한 행동을 떠올리며 그의 어깨를 꽉 눌렀다.“나 내려놔요!”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유남준은 그녀를 놓지 않고 기억을 더듬으며 계단을 올랐다.“조심해요, 기둥 있어요.”기억이 완전히 정확한 건 아니었다. 박민정이 귀띔했기 때문에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방에 도착하자 유남준은 박민정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그녀를 안은 손은 놓지 않고 꽉 잡았다.“왜 이 꿈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까?”“왜 또 꿈이라고 하는 거예요? 꿈 아니라고 했잖아요.”박민정은 어이가 없었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박민정, 나 머리 너무 아파. 자고 싶어.”박민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지금 바로 의사 부를게요.”그녀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유남준이 그녀를 꽉 안아서 움직일 수 없었다.“가면 다시 안 올 거지?”박민정은 그에게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어 품에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
유남준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박민정은 별장 사용인과 가정부들에게 유남준을 찾아보라고 했다.10분 후, 한 사용인이 마침내 유남준을 발견하고 곧바로 박민정에게 전화했다.“사모님, 유 대표님 정원 옆의 연못가에 계십니다.”“알겠어요, 지금 갈게요.”박민정은 전화를 끊은 후 급히 달려갔더니 연못가의 큰 나무 아래 서 있는 유남준을 발견했다.그녀는 한숨을 돌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말했다.“남준 씨.”유남준의 기억이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확신이 없어 그녀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남자의 눈빛은 초점이 없었지만 여전히 맑아 보였다.“무슨 일이야?”“나... 나 누군지는 기억하죠?”“걱정 마. 어제랑 똑같으니까.”그 말에 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럼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여기에 있어요?”“그냥. 좀 조용히 있으려고.”유남준이 말하고는 박민정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서 비서는?”박민정은 시간을 체크하며 말했다.“지금 오고 있을 거예요.”서다희는 오늘 아침 8시에 오겠다고 말했었다.“가서 쉬어. 나 신경 쓰지 말고.”유남준은 서다희에게서 박민정이 지금 임신 중이라 힘들게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었다.말을 마친 후 그는 거실로 걸어갔다.박민정은 그를 따라갔다.유남준이 거실에 도착하고 옆에 서다희도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박민정은 윤우를 깨우 세수하고 아침을 먹게 했다.윤우는 침대에서 겨우 일어났다.아빠가 또 변했다는 걸 알고 세수를 마친 후 바로 유남준을 만나러 갔다.“쓰레기 아빠.”귀여운 아이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듣기 좋았지만 유남준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그는 서다희에게서 박민정이 진주를 떠난 후 쌍둥이를 낳았다는 말을 들었었다.“응.”윤우는 달려가 그의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유남준의 다리가 갑자기 저렸다.“아빠, 윤우 기억났어요?”윤우는 다시 호칭을 바꿔 물었다.“기억이 나.”지금의 유남준은 윤우가 상처받을까 봐 거짓말을 했다.윤우는 그의 거짓말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일부러
유남준은 잠든 아들이 꿈속에서조차 자신을 두려워하며 박민정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박윤우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뒤 다시 서재로 향했다.여전히 찾아내지 못한 박민정의 행방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없이 다른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피곤함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워도 그의 눈은 감기지 않았다.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그녀를 찾을 수 없던 걸까?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정말 죽었단 말인가?‘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는 단호히 부정했다.‘아니야. 민정이는 절대 죽지 않았어. 만약 민정이가 정말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그렇게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이고 아침이 되자 전화벨 소리가 그의 짧은 잠을 깨웠다.전화를 보니 서다희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민정이에 대한 소식이라도 있어?”서다희는 상사의 질문에 솔직히 답했다.“아직 없습니다.”“그럼 무슨 일이야?”“제임스 씨 기억하시죠? 다음 주 해외에서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네요. 해외 무역 관련해서 논의하고 싶답니다.”“좋아. 일정 잡아.”전화를 끊기 전 유남준은 다시 물었다.“아직 조사하지 않은 곳은 얼마나 남았지?”세상은 참 크다고 하면 작다고 하면 작았다.서다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전 고민했다. 모든 곳을 다 찾으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몰랐다.“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미 확인했지만 이번에 제임스 씨 고향은 아직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겸사겸사 그쪽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좋아. 그리고 다른 지역도 인력을 더 투입해.”“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던 그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바로 움직였다.그의 얼굴은 한 해 동안 한층 늙어 보였고 깔끔하게 정리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박윤우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그는 보모에게 아이를 잘 돌봐달라고 당부한 뒤 집을 나섰다.그가 향한 곳은 IM이 아닌 박민
고영란은 그 말을 듣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이미 두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윤우까지 맡으라니! 너야말로 아이들의 아빠잖아!”유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윤우는 여기 두고 가세요.”어차피 집에는 가정부와 집사가 있었기에 그가 굳이 박윤우를 직접 돌볼 필요는 없었다.“그래야지. 윤우는 너한테 맡길게. 난 이제 가보마.”고영란은 단호하게 말했다.거실에 앉아 있던 박윤우는 이 모든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떨궜다. 사실 그는 집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엄마를 아직 찾지 못한 지금, 유남준과 단둘이 있는 시간은 그에게 끔찍한 고역이었다.하루 종일 숙제나 문제 풀이를 강요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고영란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본 박윤우는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할머니, 이제 가시는 거예요?”그는 속으로 외쳤다. ‘할머니,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하지만 고영란은 그의 진심을 알아채지 못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 난 이제 가야 해. 너는 아빠랑 잘 지내도록 해. 네 아빠는 지금 온몸에 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잖니.”고영란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박윤우는 할머니의 상황을 이해했기에 마지못해 그녀를 현관까지 배웅했다.고영란이 떠난 뒤 그는 방으로 들어가 게임이라도 하려는 찰나였다.그때 위층에서 유남준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윤우.”그는 순간 긴장하며 움찔했다. 그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2층 복도에 서 있는 아빠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위로 올라와.”박윤우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아빠, 또 뭔데요?”그는 투덜거리며 물었다.“숙제 검사.” 유남준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본가에 가기 전에 준 두 장의 문제지 어디 있지?”박윤우는 땅속으로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그게... 깜빡하고 안 가져왔어요.”그는 더듬거리며 변명했다.하지만 유남준은 화내지 않고 무표정하게 말했다.“그
박민정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유남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직장은 어때?]그녀는 짧게 답했다.[괜찮아요.]하지만 유남우는 그녀의 대답에 묘한 걱정이 들었다.그는 박민정이 직장에서 오래 일하며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다 보면 혹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까 두려웠다.[만약 힘들거나 맞지 않는다면 그만둬도 돼.]그는 다정하게 말했다.[네, 알겠어요.]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오히려 지금 직장은 그녀에게 도전 의식을 심어주고 있었다.무엇보다 그녀는 집에만 갇혀 있던 지난 1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며 지루함에 지쳐 있었다.이제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머리도 한층 더 빠릿빠릿해진 기분이었다.유남우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향했다.비록 유남우가 그녀를 위해 가사 도우미를 고용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일하는 게 더 편했다.별다른 일이 없을 때는 직접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진주시 유씨 집안의 오래된 저택에서.유남우는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지만 한동안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윤소현이 위층으로 올라왔다.유남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일부러 휴대폰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욕실로 들어갔다.역시나 그가 자리를 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소현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의 휴대폰을 들여다봤다.마침 그때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발신자는 어제 본 것과 동일한 프로필 사진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평범했다.“정말 감사해요. 당신 덕분에 이 직장을 구할 수 있었어요.”윤소현은 의아해하며 메시지를 유심히 읽었다.그때 욕실에서 유남우가 조용히 걸어나왔다.“뭘 보고 있어?”그의 목소리에 윤소현은 깜짝 놀라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아까 누가 메시지를 보낸 걸 봤어요. 당신이 직장을 구해줬다면서 감사하다고 하던데요.”유남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아, 별거 아니야. 예전에 한 고객의 딸이 해외에서 공부를
회사 직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박민정이 어떻게 그들의 업무를 제쳐두고 사장에게 이런 상황을 고발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사장은 박민정의 말을 듣고 문서들을 다시 살펴보았다.그 양은 분명 인턴 한 명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그는 고개를 들어 주영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주 비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왜 주 비서랑 다른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를 인턴에게 맡기는 거지?”“만약 이런 식이라면 내가 아예 새로운 직원을 뽑는 게 낫지 않나?”“아니면 당신들이 직접 이 인턴에게 급여를 주고 있는 건가?”주영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장님,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저는 단지 동료들에게 일이 너무 많으면 우선 민정 씨에게 맡기라고 말했을 뿐입니다.”그러나 사장은 더욱 화가 난 듯 말했다.“우리 회사의 업무는 이미 적절히 분배되어 있어. 이 인턴이 오전 동안 두 건의 번역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하다면, 왜 당신들은 자신의 업무조차 제시간에 끝내지 못하는 건가? 이건 당신들의 업무 능력을 재검토해야 할 문제로 보이네.”사장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려 하자 주영리는 억울한 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사장님, 민정 씨가 번역을 그렇게 빨리 끝낸 건 분명 번역 소프트웨어를 사용했기 때문일 겁니다.”평소 이런 전문 문서는 번역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며 보통 오전 동안 한 건을 완성하기도 어려웠다.사장은 그녀의 말을 듣고 박민정이 제출한번역 문서를 들어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잠시 후, 그는 문서를 주영리에게 건넸다.“직접 확인해 봐.”주영리는 서둘러 문서를 받아 살펴보았다.문법은 물론 표현까지 완벽하게 번역되어 있었고 소프트웨어로 번역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믿기지 않아 다른 문서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사장은 이제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 말했다.“주 비서는 회사에서 2년 동안 일했지만 번역된 문서들에서 종종 실수가 발견되곤 했어. 그런데 민정 씨는 아직 인턴이야. 민정 씨가 뒷문으로
박민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배운 적이 있어요.”“역시! 내가 어쩐지 민정 씨 기본기가 너무 좋다 했지. 정말 귀한 인재를 만났네!” 무용 선생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매년 직원들에게 춤을 연습시키며 몇몇 주요 인사들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몸이 굳어 안무를 익히는 데 애를 먹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빠르게 연습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가 퇴근 준비를 하러 갔다.하지만 사무실에 도착하자 모든 동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 시선들에는 구경거리 보듯 즐기는 눈빛도, 적대적인 눈빛도, 안쓰러운 눈빛도 섞여 있었다.박민정은 의아한 마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막 앉으려는 순간 주영리가 사장실에서 나오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민정 씨, 아까 작업을 다 끝냈다고 했죠? 서랍을 열어서 그 문서들 좀 가져와요. 사장님께 보여 드리게.”박민정은 주저하지 않고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열고 문서들을 꺼냈다.주영리는 그것들을 받아 펼쳐 보더니 눈에 띄게 동공이 흔들렸다.잠시 후, 주영리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 이렇게 많은 문서 중에서 민정 씨가 번역한 건 고작 몇 장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빈칸이잖아? 이래놓고 일을 다 끝냈다고?”“내가 말했잖아요. 뒷문으로 들어온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고. 무능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네!”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비난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주영리는 계속 몰아붙였다.“좋아요, 사장님 만나러 가요. 민정 씨가 얼마나 일을 대충 했는지 직접 보여 드리자고!”그녀는 박민정의 팔을 붙잡고 사장실로 향했다. 이미 사장에게 상황을 미리 고발해 둔 터라, 문도 두드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사장은 외국인이었다.그는 일하기 싫어하는 태도나 무책임한 행동을 싫어했다.박민정과 주영리가 들어오는 것을 본 사장은 의자에 기대앉아 외국어로 물었다.“영리 씨, 민정 씨가 정말 일을 다 안 끝냈나?”그는 원래 이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주영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편하게 지시하세요.”주영리를 본 순간 박민정은 이번 직장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이 일을 꼭 지켜내리라 마음먹었다.일자리가 생기면 유남우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주영리는 박민정의 태도에 더욱 거만해져서 온갖 잡다한 일을 지시하기 시작했다.일을 지시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것은 그저 허드렛일이었다.이 직원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저 직원의 서류를 출력하는 일 따위였다.심지어 주영리는 동료들에게 은밀히 말했다.“앞으로 일이 많아서 힘들면 여기에 다 넘겨. 여유롭게 써먹으면 되잖아.”이는 명백히 박민정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동료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일을 대신해 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앞다투어 일을 떠넘겼다.“듣자 하니 번역이 전공이라던데, 이 문서들 좀 번역해 줘요. 절대 실수하면 안 돼요.”“제 것도 부탁드려요. 오늘까지 해야 해요.”“...”모두들 자신들의 일을 박민정에게 맡기며 떠넘기기에 바빴다.그녀에게 쏟아진 업무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게다가 오후에는 고객 응대를 위한 댄스 연습도 예정되어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모든 일을 다 받아들이며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다.동료들은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일을 받아주는 모습을 보고 은근히 비웃었다.“원래부터 이렇게 만만한 사람이었나 봐. 앞으로 일 다 넘겨도 되겠네.”“그러게. 공짜 노동력을 안 써먹으면 바보지.”주영리도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일하는 박민정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춤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애야. 내가 장담하는데, 여기 오래 못 버틸걸.”다들 한마디씩 던지며 박민정을 험담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퇴근 시간이 되자 박민정은 모든 서류를 정리해 들고 곧장 댄스 스튜디오로 향했다.주영리는 그녀가 자리를 뜨려 하자 재빨리 가로막았다.“민정 씨, 일 다 끝냈나
홍주영은 여전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저는 정말로 누군지 모릅니다.”“좋아요, 아주 좋아요.” 윤소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홍 비서가 무슨 내막을 알고도 숨기고 있다면 정말 끝장인 줄 알아요.”매서운 경고를 남긴 채 그녀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홍주영은 자리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오늘 있었던 일을 유남우에게 문자로 알렸다.유남우는 그녀의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간발의 차로 윤소현에게 들킬 뻔했지만 다행히 아직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주영아, 고마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줘.”그가 답장을 보냈다.홍주영은 그의 메시지를 보며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정말로 둘째 도련님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았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밖에는 어느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홍주영은 그 눈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쓸쓸한 뒷모습을 남겼다.며칠 전, 그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었다.“너도 이제 나이가 얼마인데, 변변한 직장도 없으면서 결혼도 안 하고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니? 설마 남자를 안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이번엔 꼭 집에 와서 소개팅 나가야 해. 결혼하지 않으면 내가 죽은 네 아빠에게 뭐라 설명하겠니?”“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엄마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나중에 네가 혼자가 늙을 모습은 보고 싶지도 않아.”홍주영은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둘째 도련님.”“무슨 일이야?”“어머니가 저를 부르셔서 잠시 고향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휴가를 내도 될까요?”유남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래, 다녀와.”전화를 끊기 전 그는 물었다.“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홍주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별일은 없고요. 그냥 어머니가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홍주영은 유남우를 모신 이후로 집에 잘 내려가지 못했다.올해 설에도
홍주영은 유남우가 너무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누구와 대화 중인지 궁금해졌다.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을 자제했으나 살짝 보니 그는 한 여자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홍주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더는 보지 않으려 했다.마음속에서 믿기 어려운 생각이 들었다.자신이 알던 유남우는 항상 곧고 올곧은 사람이었는데 설마 바람을 피우는 걸까?그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윤소현일 리 없다는 건 분명했다.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구일까?홍주영은 유남우가 여전히 박민정만을 마음에 두고 사는, 깊은 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겼었다.그런 그가 다른 여자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그녀는 실망감에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저녁 퇴근길에서 홍주영은 한 차량이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을 발견했다.차 창문이 내려오자 나타난 건 고고하게 웃고 있는 윤소현의 얼굴이었다.홍주영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고 윤소현은 그런 그녀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홍 비서, 걱정 마세요. 난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다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홍주영은 감정을 숨기며 무표정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차에 올라타서 이야기하죠,” 홍주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대답했다.“무슨 일이든 여기서 말씀하시죠.”그녀는 윤소현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특히 오늘 유남우가 그녀에게 사과를 강요한 일로 인해 윤소현이 자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란 걸 직감했다.하지만 홍주영은 틀렸다.윤소현은 그녀가 차에 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고 어쩐지 재미있어하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내가 그리 속 좁은 사람은 아니에요. 복수하려는 것도 아니고요.”그녀는 홍주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제야 홍주영은 그녀가 정말로 문제를 일으키려는 건 아닌 듯 보였고 근처의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윤소현은 직접 메뉴를 가져와 홍주영에게 건네며 말했다.“먹고 싶은
윤소현은 유남우가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섰고 마침 비서 홍주영이 유남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자의 직감으로 홍주영이 자신의 남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던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유남우 앞에서 홍주영의 뺨을 후려쳤다.“아직 설 연휴인데 홍 비서는 왜 남우 씨를 직접 나서게 해요? 일을 그 정도로 못 하나?”홍주영의 뺨은 화끈거렸고 그녀는 한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해 있었다.그제야 유남우가 사태를 파악하고 급히 다가와 윤소현의 팔을 붙잡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의 날 선 질문에 윤소현은 한순간 당황했지만 곧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남우 씨, 그냥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요. 명절에 당신이 나랑 다혜를 두고 가버리다니...”그러나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며 차갑게 말했다.“그게 네가 무고한 사람을 때린 이유야?”그의 싸늘한 눈빛은 평소의 온화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 눈빛에 겁먹은 윤소현은 몸을 떨었고 손목이 점점 아파왔다.“남우 씨, 아파요...”하지만 유남우는 전혀 풀어줄 기색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홍 비서에게 사과해.”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나더러 부하 직원한테 사과를 하라고요?”“홍 비서는 단순한 부하 직원이 아니야. 내 친구이기도 해. 그러니까 얼른 사과해.” 유남우는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윤소현은 마지못해 홍주영을 향해 말했다.“미안해요, 홍 비서.”홍주영은 얼얼한 뺨의 통증을 참으며 유남우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됐죠?” 윤소현은 다시 유남우를 바라봤다.그제야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손목이 풀리자마자 윤소현은 아픈 손목을 문지르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손목이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세게 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