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엄마랑 싸웠다고 해도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야? 다시 쓰레기 아빠가 돌아온 건가?’유남준은 박윤우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내 아이?”그는 지금 모든 것이 너무 어처구니없었다. 잠을 자고 깨어났을 뿐인데 모든 게 변한 것 같았다.“네. 윤우 군을 살포시 내려놓으세요. 윤우 군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무리하면 안 돼요.”서다희는 유남준이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때문에 윤우가 다치게 된다면 기억이 돌아온 후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박윤우를 내려놓았다.“나와 누구의 아이야?”서다희는 멈칫했다.박윤우는 그제야 유남준이 다시 기억을 잃었다는 걸 깨닫고는 어이가 없었다.그리고 서다희보다 먼저 유남준에게 물었다.“제가 쓰레기 아빠와 누구의 아이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예요? 한번 맞춰볼래요?”그는 유남준이 어떤 여자의 이름을 댈지 흥미진진했다.서다희는 박윤우의 의도를 몰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 유씨 가문을 노린 그 여자 아니야? 맞춰볼 것도 있나? 그런데 그 여자 죽지 않았어?”유남준의 성격으로 그를 유혹하고 아이를 낳은 여자를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박윤우는 말문이 막혔다.‘어이가 없네. 아빠의 마음속을 떠보려 했는데 재미가 없어.’“쓰레기 아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저는 아빠와 엄마의 아들이잖아요.”“엄마가 누군데?”“박민정 씨입니다.”서다희가 덧붙였다.유남준은 잠시 침묵한 후 긴 다리를 크게 내디디며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박윤우와 서다희는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박윤우가 그를 따라갔다.“쓰레기 아빠, 왜 그러세요? 몸이 안 좋으세요? 왜 귀염둥이 윤우를 잊은 거예요?”유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서 비서, 이 아이 방에 데려가. 시끄러워 죽겠네.”서다희가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쓰레기 아빠, 쓰레기 아빠...”박윤우가 계속
예찬은 윤우의 직감을 믿었다.그들 두 형제에게는 박민정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예찬은 최고 해커였고 윤우는 더욱 신기한 능력을 가졌다. 그의 직감은 특히 정확했다.예를 들어 두 사람이 길을 걷다가 갑자기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면 윤우는 이를 미리 감지할 수 있었다.더 놀라운 것은 그의 능력이 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예찬은 그와 윤우가 두세 살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박민정과 두 형제는 로또 가게 옆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윤우는 박민정의 손을 잡고 가게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윤우에게 왜 그러는지 묻자 윤우는 가게 안에 들어가 무작위로 로또를 몇 장 뽑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중 한 장이 1억 원에 당첨되었다.물론 이런 행운은 매번 일어나지는 않았다.게다가 윤우의 이런 능력이 어른들에게 알려진다면 위험할 수 있었다.그래서 예찬은 윤우에게 평범한 아이처럼 행동하고 직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엄마는 돌아왔어?”예찬이가 물었다.“아직.”예찬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유남준은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 사람이야. 네가 무서우면 김훈 할아버지에게 너 김씨 가문으로 데리고 오라고 말해볼게.”“형, 농담하지 마. 나 안 무서워.”윤우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했다.“근데 신기하지 않아? 형은 안 그래? 와서 같이 놀려볼까?”윤우의 머릿속엔 온통 장난칠 꿍꿍이밖에 없었다.예찬은 별로 흥미가 없었다.“바보야, 나 지금 해외여행 중이야. 어떻게 가?”윤우는 그제야 그가 해외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실망했다.“나 책 읽어야 해. 그만 끊을게.”예찬은 자신이 돌아가도 도움 될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전화를 끊었다.윤우는 실망하며 말했다.“공부밖에 모르네.”윤우는 혼자 방에 있는 것이 너무 지루해서 서다희가 돌아오기 전에 또 방을 나와 조심스럽게 유남준을 찾아 나섰다.밤이 되어 날은 어두웠지만이 큰 별장에서 유남준의 서재만은 밝은 불빛으로 가득했다.박윤우는 쉽게 그를 찾아냈고는 조심스
순간 얼굴이 어두워진 유남준이다.“죽고 싶어 환장했어?”“흑... 아빠... 미워요...”박윤우는 바로 우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그의 울음소리에 유남준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났다.“거기 누가 없어?”유남준의 외침에 가정부가 곧바로 달려왔다.“왜 그러십니까?”“당장 이 자식 밖으로 버려.”“네?”생각지도 못한 말에 가정부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하지만 유남준이 박윤우에게 무슨 못된 짓을 할까 봐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일단 아이부터 안았다.눈물을 글썽이며 박윤우는 울먹인 채 물었다.“아빠,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저 버리시는 거예요?”그 질문에 유남준은 대답하지 않고 가정부에게 말했다.“내 말 들리지 않아? 당장 가서 버리라고!”가정부는 박윤우를 안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겠습니다.”밖으로 나가서 박민정에게 당장 알리려고 했다.지금으로서는 박민정만이 유남준을 컨트롤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가정부는 울고 있는 박윤우를 서재에서 안고 나왔다.서재에서 나오자마자 박윤우는 더는 울지 않았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입을 열었다“아줌마, 죄송한데 저 일단 바지부터 새로 입혀주면 안 될까요?”박윤우는 멈칫거리다가 덧붙였다.“새 바지로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버려주세요.”그 말에 가정부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했다.“윤우야, 그게 아니라 지금 윤우 아빠가 아파서 홧김에 그런 말을 하신 거야. 절대 널 버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엄마 오시고 나면 다 괜찮아지실 거니 일단 윤우 방으로 들어가 있어.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 알았지?”박윤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기억을 잃은 아빠를 놀릴 수가 없어서 무척이나 아쉬운 박윤우였다.서재 안에 홀로 남겨진 유남준은 주위에 성가시게 하는 것이 없어 좋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다희가 닥터 팀을 데리고 신체검사하러 왔다.저녁 내내 서재 안에는 온통 의사들로 북적거렸다.한편, 에스토니아는 어느새 오후 2시가 되었다.연지석과 함께 병원으
기억이 혼란스러워졌다는 게 무슨 뜻인지 박민정은 알 수 없었다.“뭐가 어떻게 혼란스러워진 건데요?”“어제 에스토니아에서 제가 사모님을 찾으러 갔을 때,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이 누구신지 기억하지 못하시고 계셨습니다. 근데 다시 돌아가서 대표님께 말씀드리니 그땐 또 사모님을 기억해 내셨습니다. 대표님과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대표님 기억은 6, 7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습니다.”서다희는 탄식 하며 덧붙였다.“지금 역시 그러하시고 아이들도 잊으신 듯합니다.”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알았어요. 우리 윤우 좀 부탁드릴게요. 이제 곧 탑승할 것 같으니 돌아가서 얘기해요.”“네, 사모님.”기억이 혼란스러워졌다는 유남준의 상황이 거짓일 것 같지 않았다.기억을 잃었던 적이 있고 서로 다시 시작하자며 마음마저 먹었었는데, 굳이 다시 기억을 잃은 척할 필요가 없다.박민정은 핸드폰 전원을 끄고서 비행기에 올랐다.두원 별장.유남준은 아주 힘겹게 새 옷으로 갈아입었고 의사들은 일사불란하게 검사를 해주었다.밤새 열심히 검사했지만, 의사들은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다.어떠한 이유로 기억이 혼란스러워진 것인지, 어떻게 치료하면 좋을지 그 무엇도 똑똑히 정하지 못했다.오늘날 의학은 부단히 발전하고 있으나 신경을 비롯한 사람의 기억 쪽으로는 아직도 노력이 필요하다.유남준은 머리가 아팠고 몸도 유난히 무겁고 힘들어 의사들을 쫒아냈고 서다희에게도 떠나라고 했다.“대표님, 저는 곁에서 지켜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기 바랍니다.”지금 이보다 상황이 더 악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남준은 그의 뜻을 거절하지 않았다.따라서 서다희는 아래층에 있는 객실에서 묶게 되었다.시차에 적응하는 중이라 유남준은 정신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들었으니 말이다.박민정이 도착했을 때 별장 안은 유난히 적막했다.가정부는 그녀가 오는 것을 알고 일찍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박민정을 보게 되는
서다희는 바로 위층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대표님께서 깨어나신 거 같습니다.”“제가 가볼게요.”흑백으로 인테리어한 방안에서 유남준의 모습이 보였다.바닥에 넘어진 채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박민정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괜찮아요?”“꺼져!”박민정의 소리를 듣고서 유남준은 그녀를 확 뿌리쳐버렸다.“실컷 놀다 왔어?”그의 힘에 박민정은 몸이 뒤로 휘어청거리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밤새 달려온 그녀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프면 치료받으면 그만이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나 지금 임신 중이라고요! 아이한테 문제가 생기면 나 그때 진짜...”단 한 번도 못 된 소리를 해보지 못했던 박민정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유남준은 침묵을 유지한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이때 박민정은 다시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다가가 부축하려고 했다.다행이도 유남준은 그녀를 밀쳐내지 않았다.침대로 부축을 받고 난 뒤 유남준은 그녀의 팔목을 확 잡아당겼다.“나한테 소리까지 치고 너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지?”박민정은 더 이상 매사에 조심하고 두려워하던 옛날의 그녀가 아니었다.그 말을 듣게 되는 그녀 역시 자기도 모르게 차갑게 웃었다.“남준 씨는 소리쳐도 되도 나는 소리쳐도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거예요?”말문이 막힌 유남준이다.자기 팔목을 꼭 잡고 있는 유남준의 손을 떼고서 박민정은 조금 전 그가 넘어지면서 같이 바닥으로 떨어진 물건을 줍고 의자를 세웠다.“이따가 병원에 한번 가 봐요.”유남준은 차가운 얼굴을 한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안 가.”“병원으로 가봐야 알 거 아니에요.”두원 별장에는 본가처럼 의료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지 않다.그 말인즉슨, 가장 기초적인 검사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유남준은 천천히 두 눈을 떴는데, 깊은 동굴처럼 어둡기만 했다.“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야.”“이런다고 네 죄가 용서될 거 같아? 너 같은 거짓말쟁이는 평생 홀로 고독하게 생을
유남준은 입술을 사리물었다.박민정과 더 이상 말다툼을 하려 하지 않고 침대에서 다시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그 모습에 박민정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생각 다 한 거예요? 병원에 가기로?”유남준은 그녀의 말에 상대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앞을 향해 걸었다.걷는 내내 방 안에 있는 장식품이나 다른 물품들을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더 가면 벽이에요!”유남준이 벽에 부딪히려고 할 때 박민정이 그를 불러 세웠다.순간 유남준은 걸음을 멈추게 되었고 방향을 돌려 문 쪽으로 더듬으면서 가려고 했다.박민정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예전의 유남준이라면 아마 싫증을 내며 뿌리쳤을 것인데, 그러한 모습이 전혀 없었다.박민정의 손끝이 팔에 닿자 그대로 굳어버리는 듯했다.유남준은 이러한 기분과 상황이 왜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그를 억지로 끌어당기며 박민정은 방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일단 밥부터 먹어요. 밥 먹고 병원에 가봐요.”김인우가 있으므로 유남준은 병원에 가서도 비밀리에 모든 검사를 받을 수 있다.유남준은 더 이상 거절도 승낙도 하지 않은 채 박민정에게 이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서 지켜보고 있던 서다희는 유남준이 회복이라도 한 줄 알았다.“대표님.”“꺼져.”‘그래, 아직 회복은 이르시지.’“아침은 준비됐어요?”박민정이 서다희에게 물었다.“네. 준비해 놓았습니다.”“저희랑 같이 먹지 않을래요?”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저는 따로 챙겨 먹으면 됩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서다희가 떠나고 나서 박민정은 유남준을 끌어 아침 먹으러 식탁으로 향했다.하도 급히 온 바람에 아직 물 한 잔도 마시지 못한 박민정이다.물론 유남준도 아직 빈속이다.식탁에는 음식이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었다.유남준을 자리에 앉히고 나서 박민정이 말했다.“수저는 앞에 있어요. 먹기 불편하면 다른 사람한테 먹여주라고 부탁이라도 해볼까요?”먹여줘?
유남준에게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어 박민정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가 이지원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하지만 지금 자기 품에 기대고 있는 박민정이 싫지만은 않았다.“뭔가 달라.”다짜고짜 날아오는 말에 박민정은 그저 생뚱맞기만 했다.“뭐가 다르다는 건데요?”유남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바로 그녀를 놓아주었다.‘내가 박민정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심지어 아이까지 생겼다고?’주위 사람들이 말해주고 있는 그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그 아이는 몇 살이야?”유남준은 또다시 생뚱맞게 물었다.“4살 좀 넘어요.”갑작스러운 질문이 그저 이상하기만 했으나 박민정은 대답을 해주었다. ‘4살이라면 이혼하려고 했던 그때가 맞는 것 같은데.’“나한테 약을 탔었어?”유남준은 대충 짐작하면서 물었다.“기억 난 거예요?”박민정은 그가 말하고 있는 일이 그의 아이를 품기 위해 약을 탔었던 그때를 말하고 있는 줄 알았다.오해가 또 생기기 시작했는데.유남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삼엄한 빛을 드러냈다.“그럴 줄 알았어.”박민정과 이혼하기로 했었는데 왜 이혼을 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약을 타는 악랄한 수단으로 자기를 잡았다면서.“너 참 보통 여자가 아니었구나. 이런 일에 있어서는 참 솔직하게 대답하네?”비아냥거리며 유남준이 말했다.박민정은 지금 둘 사이에 오해가 생긴 줄도 모르고 설명하기 시작했다.“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거라고 후에 분명히 설명해 줬었어요. 윤우가 백혈병으로 앓고 있는데, 친형제 골수가 필요하다고 그랬단 말이에요.”그 말을 듣고서 유남준은 처음에는 알 수 없었으나 대화 속에서 포인트를 찾아냈다.“그럼, 첫 번째 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유남준의 물음에 박민정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그 일까지 잊고 있겠다고 미처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다.긴 세월이 지나갔음에도 박민정은 그때를 생각하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곤 한다.“이제 와서 왜 그렇게 묻는 거예요? 일단 병
은회색 승합차가 입구에 멈춰 섰다.얼마 지나지 않자 유남준을 부축하여 차에서 내리고 있는 박민정이 김인우의 시야로 들어왔다.두 사람 뒤에 서다희도 바짝 따라왔다.“남준아, 형수, 어떻게 된 거야?”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지만 ‘형수’라는 부름이 유남준에게 유난히 낯설었다.김인우는 박민정을 귀머거리로 불렀었는데 말이다.그리고 김인우만큼 박민정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데, 지금 박민정을 ‘형수’라고 부르고 있다.“말로 하자면 좀 길어요. 서 비서님이 알려줄 거예요.”김인우에 대한 박민정의 태도는 여전히 덤덤하기 그지없다.그러한 태도에 김인우는 신경 쓰지 않고 두 사람을 들여보내고 나서 서다희에게 물었다.서다희는 자초지종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하민재 그놈 죽으려고 환장한 거예요?”김인우는 욕설을 퍼부었다.“하씨 가문에 그런 놈도 있었던 거예요? 다들 하나 같이 쩔쩔맬 줄 알았는데, 감히 남준이한테 손을 대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게 맞는 것 같네요.”서다희 역시 미처 생각지 못했다.그동안 하씨 가문은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남준이 봐줄 의사는 찾아냈어요. 잠시 나갔다가 올게요.”서다희는 바로 그를 가로막았다.“대표님께서 회복되시고 나면 그때 다시 계획 세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김인우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하민재와 연지석은 저희 사모님 친구이기도 합니다.”그 말에 조금 전까지 노발대발하던 김인우는 갑자기 차분해졌다.“그럼, 회복하고 나서 다시 얘기하시죠.”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서다희는 순간 믿어지지 않았다.유남준의 말만 듣는 김씨 가문의 도령이 이토록 쉽게 설득되었으니 말이다.유남준은 검사받으러 들어갔고 박민정을 비롯한 일행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서다희로 부터 모든 상황을 알게 된 김인우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해외에 있는 신경 전문의한테서 비슷한 상황을 들은 바가 있는데, 그 사람은 기억이 딱 그대로 멈췄다고 했어.”“완쾌됐나요?”김인우는 고개를 저었다.“지금 기술로는
그리고 침대에 던져지고 나서야 박민정은 이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재빨리 이불을 몸에 둘렀다.“오지 말아요!”그러나 유남준의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민정아, 나도 남자야.”시간도 많이 흘렀고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매일 그냥 잠만 자려고 하자니 그도 나름 괴로웠다.그리고 이 상태로 두 사람이 계속 지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병들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유남준은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그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하여 다 포기한 채 가만히 누워 온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엄마.”박예찬과 박윤우가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박민정을 불렀다.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진서연이랑 설인아, 그리고 민수아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두 아이도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있는 힘껏 유남준을 밀쳐냈다.하여 오늘에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멈춰야 했다.박민정이 황급히 방에서 나오니 두 아이가 마침 문 앞에 서 있었다.“엄마, 자고 있었어? 왜 얼굴이 빨개?”박윤우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게...”겨우 설명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유남준이 갑자기 방 안에서 나오더니 한껏 어두운 얼굴로 두 아이에게 물었다.“왜 벌써 왔어?”“추석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어요.”박예찬은 뭔가 눈치챈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러나 박윤우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엄마, 저 쓰레기 아빠랑 같이 잔 거야?”“아니.”박민정은 단번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저 찾을 물건이 있어서.”“무슨 물건인데?”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질문 공세에 박민정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가 겨우 답했다.“책.”“무슨 책? 나도 같이 찾아볼게.”“아니야
박민호가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레 물었다.“누나, 괜찮아?”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가자.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박민호는 돈을 뜯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해 그녀를 부축해 줬다.“그럴 필요 없어.”박민정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한수민의 묘를 몇 번 더 바라보다가 애써 어지러움을 참고 자리를 떴다.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이를 본 박민호는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누나!”그리고 단번에 들어 올리더니 빠르게 차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빨리 병원에 가요.”그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난 뒤였고 박민정은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리고 조각난 기억들이 어렴풋이 맞춰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느낌은 그녀를 매우 괴롭게 만들었다.이때, 누군가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는데 박민정은 그제야 비로소 맨 앞에 서 있는 유남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좀 어때? 괜찮아?”그는 다정하게 물었다.뒤따라온 사람은 박민호였는데 그도 다급히 물었다.“누나, 나 진짜 깜짝 놀랐어. 앞으로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면 병원부터 가봐. 알겠지?”박민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제 괜찮아. 아마 저혈당 때문에 쓰러졌을 거야.”검사 결과에서도 별다른 증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남준은 그래도 그녀가 걱정되었다.“앞으로 어디 갈 때는 꼭 사람 한 명이라도 데리고 가.”“그럴게요.”박민정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박민호는 자기 누나를 걱정하는 유남준을 보고 살짝 안심했다.그러다가 문득 이제부터 유남준을 따라가기만 하면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다.“배고파? 내가 밥 좀 가져다 달라고 할게.”“다 나은 것 같은데 우리 그냥 집에 가서 먹어요.”박민정은 병원에 있는 게 싫었다.유남준은 원래 안 된다고 말하려 했지만 박민정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에는 집에 가기로 했고 박민호는 두 사람을 집까
깊은 밤, 어느 술집 룸.최현아는 주성민의 품에 안겨 자신의 서러움을 토로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그러자 남자는 한껏 다정하게 그녀를 위했다.“조금만 참아. 유씨 가문의 재산만 손에 넣으면 우리도 이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으니까.”“어디 그게 말처럼 쉬워? 남준 씨는 우리가 영원히 넘지 못하는 산처럼 버티고 있잖아. 지금 호산그룹도 손에 쥐고 있고 또 네 명의 아들까지 옆에 끼고 있으니 얼마나 득의양양해 있겠어.”최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지훈이만 앞으로 힘들게 살아갈 것 같아.”순간 주성민의 눈빛이 살벌해지더니 그녀에게 물었다.“그 사람들을 한방에 제거할 방법이 없을까?”최현아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무슨 소리야?”“현아야, 옛말에 모질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있잖아. 네가 하기 힘들면 네 남편 시키면 되지.”주성민의 말에 최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예전에 남준 씨한테 한번 당한 뒤로는 겁을 먹고 찍소리도 못하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네가 자극해야지.”남자는 낮은 소리로 최현아에게 방법을 알려줬다.최현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마디 했다.“그 뜻은 성혁 씨랑 동서를...”“만약 유성혁이 박민정을 진짜로 건드리면 유남준의 성격에 무슨 짓을 못 할까?”남자의 말에 최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렇게 되면 박민정 그 고약한 여자도 한 방에 처리되겠네!”“며칠 뒤면 추석이라 아마 다들 돌아올 거야.”“그러면 일단 그날로 정하자.”둘은 말을 마친 뒤 다시 꼭 끌어안았다....추석 당일.박민정은 미리 박형식과 은정숙에게 제사를 올렸다.또한 한수민의 묘에도 가보았는데 마침 박민호와 윤소현도 그 자리에 있었다.윤소현은 원래 오기 싫었지만 최근에 너무 안 좋은 일만 벌어지는 것 같아 액운이라도 떨쳐내려고 온 것이다.“네가 여기까지 제사 지내러 올 줄은 또 몰랐네.”박민호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하자 윤
이미 집 안까지 들어온 사람을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박민정은 애써 웃으며 답했다.“앉으세요.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최현아가 자리에 앉자 유지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별건 아니고 우리 지훈이가 예찬이랑 윤우랑 놀고 싶다고 해서.”도우미는 빠르게 마실 차를 내왔다.유지훈은 집안을 둘러보다가 박예찬의 방에 들어와 같이 놀자고 했다.그러나 박윤우는 한껏 불편한 티를 내며 물었다.“유지훈, 우리 집엔 왜 왔어?” 유지훈도 사실 내키지 않았지만 최현아와 할아버지가 당부했던 일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그들에게 말했다.“윤우야, 예찬아, 우리 같이 놀자. 집에서 혼자 놀다가 너무 심심해서 왔어.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옛 저택에도 안 오잖아. 현진이랑 현우가 보고 싶지 않아?”유지훈의 입에 발린 말에 박윤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가 어디에 있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냥 네 집으로 빨리 꺼져.”그의 말에도 유지훈은 애써 화를 참고 다시 박예찬에게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예찬아, 너도 내가 꺼지길 바라는 건 아니지? 몰라, 난 그냥 여기서 놀 거야.”여태껏 안하무인, 기고만장이던 유지훈이 갑자기 이리도 얌전하고 모든 걸 참아내는 모습에도 박예찬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그래. 그러면 여기서 우리랑 같이 놀자.”“좋아!”그러나 박윤우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박예찬에게 다가가 슬쩍 물었다.“형, 제 정신이야? 왜 갑자기 저 애랑 놀겠다는 거야?”그러자 박예찬이 은밀하게 눈빛을 보낸 뒤 다시 말했다.“윤우야, 지훈이는 우리 친척인데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박윤우는 단번에 그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어. 유지훈, 그러면 여기서 얌전히 놀아. 일부러 사고 칠 생각하지 말고.”방안은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한편, 거실에서 최현아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동서, 오늘 남준 씨는 집에 없어?”“네, 요즘 회사 일이 바쁜지 계속
아직 어린아이인데 일찍 철이 든 박예찬을 보고 박민정은 고마우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바보야. 넌 아직 어려서 엄마 아빠가 지켜주면 돼.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먼저 우리한테 말해줘야 해, 알겠지?”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박민정은 그에게 몇 가지 더 당부해 주고 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이때, 박윤우가 방안에 들어오면서 박예찬에게 다가왔다.“형은 대체 어떻게 그 나쁜 놈을 잡은 거야?”박윤우가 궁금증을 못 참고 그에게 묻자 박예찬은 간단하게 설명해 줬다.“대박!”박윤우는 손뼉까지 치며 그를 칭찬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런데 엄마와 저 쓰레기 아빠는 이제 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거래?”“몰라. 그런데...”박예찬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내 생각에는 그 범인이 이제 나를 해칠 마음이 없는 것 같아.”오늘 다시 만난 정호철의 눈빛은 예전처럼 살기가 돋쳐있지 않았고 오히려 정수미가 자신을 바라보던 것처럼 따듯함이 느껴졌다.“만약 그 사람이 정수미, 그 늙은 여우 쪽의 사람이라면 아마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만약 윤소현 쪽의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박윤우가 세밀하게 분석했다.“네 말이 맞아. 그러니까 우리도 경계심을 높이고 조심해야 해.”“알겠어.”말하다가 박윤우는 문득 박예찬의 컴퓨터를 보며 물었다.“형, 지금 뭐 해?”박예찬은 그제야 막고 있던 손을 걷으며 말했다.“별거 아니야. 그저 지엔 그룹의 지도를 보고 있었어.”박윤우는 컴퓨터 화면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자료를 본 순간 머리가 아파졌다.“보고 있으니 벌써 눈이 침침하네. 난 그만 노래나 들으면서 그림이나 그려야겠다.”박윤우는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 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다.박예찬도 별말 없이 계속 자기 일을 해 나가고 있는데 유지훈이 갑자기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박예찬이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화면에는 그의 작은 얼굴이 나타났다.“예찬아, 집에서 뭐 하고 있어?”“무슨 일이야?”박예
박예찬은 최근에 계속 박씨 가문 옛 저택에서 지냈다.그는 경계심도 높고 눈치도 빨랐는데 요즘 따라 누군가가 계속 자신을 미행하는 것 같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하여 이날 박예찬은 돌아오는 길에 정민기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일부러 구석으로 들어갔다가 뒤따라오는 범인을 잡을 속셈이었다.박예찬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뒤 어느 구석에 숨었다.이때, 그의 뒤를 따르던 정호철은 앞에 길도 없고 박예찬도 보이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어디로 갔지?”이때 눈앞에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다.박예찬도 쓰레기통 뒤에 숨었다가 그제야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당신이었군요.”그때 자신을 납치했던 사람이다.정호철은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아챘다.정민기는 재빨리 그를 제압했고 다시 박예찬에게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예찬아, 괜찮아?”박예찬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 아저씨, 감사합니다.”말을 마친 뒤 손가락으로 정호철을 가리켰다.“저 사람이 그때 저를 납치했던 범인이에요.”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알겠어. 바로 민정 씨랑 대표님한테 보고할게.”“네.”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정호철에게 다가가 물었다.“왜 저를 계속 미행했나요? 또 납치하려고요?”정호철은 자기 다리 길이보다도 작은 아이가 뿜어내는 카리스마에 그만 기가 눌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난 그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는 정수미의 건강 상태가 날로 악화하고 있고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동시에 박예찬이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몰래 뒤에서 보호해 주고 있었다.그의 말에 박예찬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사과요?”“그래.”정호철은 솔직하게 말했지만 박예찬은 쉽게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그렇게 정민기와 몇 명의 보디가드는 그를 차에 태우고 저택으로 향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은 집에
“전 괜찮아요.”“정말 다행이다.”정수미는 수화기에 대고 말하다가 문득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큰 문제가 없대. 그저 저혈당으로 쓰러진 거래.”박민정은 이 말을 왜 지금 자신에게 하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답해줬다.“네, 그러면 다행이네요.”“내일부터 다시 내가 아침밥 가져다줄게.”“그럴 필요 없어요.”박민정은 단번에 거절했다.또다시 자신 때문에 정수미가 쓰러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고 괜히 윤소현의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뺨 맞는 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정수미는 그녀의 단호함에 가슴이 답답했지만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전화 끊을게요.”“잠깐만.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너 보러 가도 돼?”정수미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아니요.”박민정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정수미는 한참이나 이미 끊긴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나에 대해 생각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비서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오늘 윤소현이 박민정의 뺨을 때린 일을 그녀에게 말해줬다.“뭐?”정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되물었다.“그런데 왜 안 말렸어?”“말릴 새도 없이 큰 아가씨가 먼저 손을 댔습니다.”비서는 한껏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정수미는 이대로 병원에 누워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는 그대로 별장에 돌아갔다.윤소현은 한창 친구들을 불러 수다를 떨고 있었고 정수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그녀만 밖으로 불러냈다.“엄마, 왜 벌써 퇴원하셨어요?”윤소현이 걱정하는 척 묻자 정수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누가 너한테 민정이를 때려도 된다고 했어?”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는데 분명 박민정이 그새 고자질했다고 생각했다.“엄마, 저는 단지 엄마가 너무 걱정돼서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간 거예요. 혹시 민정이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걱정되는 것보다 자기가 맞은 게 더 억울했나 보네요.”윤소현의 말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박민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정수미는 윤소현더러 그녀를 잡으라고 했지만 윤소현은 그러기 싫었다.“엄마, 너무 편애가 심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몸도 안 좋은 사람이 매일 일찍 일어나 민정이네 회사 사람한테도 아침밥 해서 가져다주니까 쓰러지죠. 전 싫어요.”“소현아, 넌 모르겠지만 방금 민정이가 아니었으면 난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을 꺼야.”정수미는 정신을 잃기 전까지 자기 몸 아래에 박민정이 깔려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또한 그녀가 기꺼이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도 알고 있다.하여 이 일을 윤소현에게 말해줬지만 그녀는 이 말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친딸인데 당연히 그랬어야죠. 만약 똑같은 상황이었으면 저도 엄마한테 달려갔을 거예요.”정수미는 윤소현의 단호한 말에도 이상하게 믿고 싶지 않았다.“너도 그만 가봐. 혼자 좀 쉬어야겠다.”윤소현도 마침 병원에 있기 싫었던 참에 그녀는 냉큼 답했다.“네, 그럼 이만 가볼게요.”비서는 윤소현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정수미는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신신당부했다.“사람 보내서 민정이는 괜찮은지 알아봐. 몸도 성치 않은데 괜히 나 때문에 더 나빠지면 안 되니까.”“네.”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참아왔던 말을 토해냈다.“정 대표님, 전 그래도 둘째 아가씨가 좋아요. 큰 아가씨는 그저 빈말만 하시는 것 같거든요.”박민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져 정수미를 구해줬지만 윤소현은 그저 말만 하다가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갔다.정수미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한껏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나도 알아. 민정이는 모든 면에서 소현이보다 뛰어나지만 소현이는 어렸을 때부터 내 손에서 자랐잖아. 그 애가 지금 이렇게 변한 건 내 책임도 커.”...박민정은 병실에서 나온 뒤 의사를 찾아가 간단하게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진서연은 그녀를 보자 마자 냉큼 달려와 물었다.“보스, 괜찮아요?”그녀는 박민정의 몸을 이
그러자 비서가 달려와 그녀를 말렸다.“큰 아가씨, 정 대표님께서 먼저 둘째 아가씨한테 직접 요리해 주고 싶다고 했어요. 둘째 아가씨만 탓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그럼 누구를 탓해야 하는데? 거절할 줄도 몰라? 엄마는 원래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았잖아!”윤소현은 일부러 더 크게 화를 냈다.“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우리 엄마한테 저런 일을 시켜본 적이 없어.”비서도 그녀가 정수미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더는 말릴 수 없었다.박민정은 그제야 자신이 맞은 이유를 알고 윤소현의 손을 놨다.“저도 말렸는데 정 대표님께서 계속 오셨어요. 그리고 방금 제가 맞은 건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번에는 참지 않을 겁니다.”윤소현은 날카로운 그녀의 눈빛에 살짝 겁을 먹었다.하여 더 때리는 건 무리인 것 같아 수술실 문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엄마, 제발 일어나요. 이대로 가면 저는 어떡해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정수미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다.그리고 며칠 전에 윤소현은 이미 유언장에도 손을 댔기에 정수미가 죽고 장 변호사까지 처리하기만 하면 장씨 가문의 모든 재산은 다 그녀의 것으로 된다.그러나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한 시간 뒤, 수술실의 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걸어 나오자 윤소현이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는 괜찮나요?”의사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고 윤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간신히 참았다.그러다가 의사가 겨우 입을 뗐다.“지금은 맥박이 돌아왔지만 환자분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혹시 예전에 큰 병을 앓았었나요?”의사의 말에 윤소현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다행히 모두가 지금 정수미한테에 집중되어 있어 그녀의 표정 변화는 보지 못했다.박민정은 정수미가 살았다는 소식에 그제야 마음이 살짝 놓이는 것 같았다.비서는 의사에게 정수미가 지금까지 앓던 병을 모두 알려줬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수미는 수술실에서 밀려 나왔는데 문 어구에서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