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의 뜻을 이해한 연지석은 목이 메었다.박민정은 약간 미안해하며 말했다.“윤우와 예찬이는 아직 국내에 있어서 여기 오래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연지석의 얼굴색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전보다 다소 지쳐 보였다.“언제 떠나려고?”“모레.”연지석은 사실 박민정의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여기에 온 것도 친구로서 병문안하러 온 것이었다.박민정이 모레 떠난다는 말을 듣고 연지석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배불렀어?”“응.”“그럼 나가서 좀 걸을까?”“좋아.”두 사람은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옛날에 연지석은 종종 박민정을 찾아와 함께 산책하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지금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연지석과 함께 에스토니아 거리를 걸으며 두 사람은 지난 일을 얘기하면서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답장을 보내는 것을 깜박 잊었다.같은 시각, 그랜드 호텔 안.유남준은 계속 휴대폰을 들고 박민정의 답장을 기다렸다.서다희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대표님.”“무슨 일이야?”“사모님께서 연지석과 함께 외출하셨어요. 지금 시내에 계십니다.”서다희도 방금 부하에게서 전해 받은 소식이었다.그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박민정이 일찍 깼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요즘 사람들 중 휴대폰을 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유남준은 휴대폰을 한쪽에 던졌다.서다희는 그와 몇 미터 떨어졌는데도 그의 주변에서 방출된 냉기를 느낄 수 있어 등골이 오싹해졌다.“제 약혼녀에게도 남사친 한두 명쯤은 있습니다. 저는 보통 눈감아 주죠.”서다희가 그 말을 뱉은 후 방 안의 공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전에 박민정에게는 남사친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연지석에 유남준의 동생 유남우, 그리고 또 혼혈 스타까지, 신경 쓰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유남준은 일어나려다 상처가 다시 찢어졌다. 전해져 온 고통에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서다희는 즉시 다가왔다.“대표님, 괜찮으세요? 의사 부를까요?”“괜찮아.”유남준은 바로 거
박민정의 회사는 이미 상당한 규모로 성장했으며 직원 수는 500명이 넘었다.다만 진서연을 제외한 대부분의 직원들은 박민정이 회사의 실질적인 보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래서 박민정과 연지석이 회사 로비에 나타났을 때 프런트 직원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진 대표님을 찾으신다고요?”“네.”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일반적으로 프런트에서는 쉽게 대표 비서실에 연락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자와 그녀 옆에 있는 위엄이 넘치고 매혹적이라고 할 정도로 잘생긴 남자를 보자 그녀는 곧바로 대표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비서가 전화를 받고는 진서연에게 보고했다.“진 대표님, 누군가 찾으십니다.”진서연은 하던 일을 멈췄다.“나 바쁘다고 해.”말을 마치자마자 진서연은 박민정의 문자를 받았다.[서연 씨, 나 지금 회사 밑에 있어.]진서연은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비서를 다급하게 말렸다.“잠시만. 바로 내려가 볼게.”비서는 좀 의아했다.‘진 대표님 갑자기 왜 이러시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심한 태도를 보였는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걸까?’진서연은 거의 뛰다시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박민정을 보자마자 그녀는 하이힐을 신었는데도 불구하고 빠르게 달려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엉엉, 보스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이제 보스님이 일궈낸 이 왕국을 직접 운영하실 건가요?”진서연이 말할 때 그녀의 머리카락은 박민정의 뺨을 스치면서 간지럽혔다.박민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 왕국은 서연 씨가 운영하면 충분해. 나는 그냥 한가로운 황제가 되고 싶을 뿐이야.”박민정과 진서연이 함께 일한 지도 벌써 6년이 다 되어갔다.처음에는 둘이 작은 작업실을 운영하다가 서서히 이렇게 큰 PMJ로 성장하게 되었다.장난은 잠시 그만두고 진서연은 곧바로 박민정의 얼굴에 난 흉터를 발견했다.“보스님, 얼굴은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요?”회사가 커지고 일도 점점 많아지다 보니 진서연은 국내 소식을 확인
두 사람은 오후 내내 일 얘기를 했고 저녁에는 진서연이 박민정과 연지석을 남아 함께 저녁을 먹도록 한참 설득했다.저녁을 먹고 화장실에 갔을 때 그녀는 박민정에게 사적으로 물었다.“보스님, 이제 결심을 하신 건가요?”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무슨 결심?”“연지석 씨에게로 돌아오는 거요.”진서연은 큰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봤다.“이번에 연지석 씨 때문에 돌아오신 거 아니에요?”박민정은 말문이 막혔다.그렇다고 말하기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나랑 지석이는 친구일 뿐이야. 다른 생각은 하지 마.”진서연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보스님과 연지석 씨가 함께라면 매일 눈 호강할 수 있는데요.”박민정은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진서연은 여전히 호기심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연지석 씨가 아니라면 혹시 유남준 씨인가요?”진서연은 유남준도 만난 적 있었는데 역시 군침을 흐르게 할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었다.박민정은 기가 막혔다.“가자. 시간도 늦었는데 씻고 자야지.”두 사람이 나란히 밖으로 나와 룸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박민정은 갑자기 멈칫했다.멀리서 훤칠한 키의 두 남자가 보였기 때문이다.연지석과 서다희는 룸 앞에 서 있었다.서다희는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키도 크고 잘생겼다. 물론 연지석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진서연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보스님 옆에 잘생긴 남자가 왜 이렇게 많아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알았어. 이제 그만하고 먼저 가서 쉬어.”“네.”진서연은 아쉬워하면서 레스토랑을 나섰다.그때, 룸 앞에 서 있던 서다희와 연지석은 겉으로는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보였지만 사실 분위기는 주변의 사람들이 멀리 피할 정도로 얼음장처럼 싸늘했다.박민정이 다가갔다.“서 비서님.”서다희는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모님 모시러 왔습니다.”“죄송한데 이미 남준 씨에 얘기했어요. 모레 돌아간다고요. 먼저 돌아가세요.”박민정이 말했다.이미 연지석과 약속한 일이니 이
박민정은 끊긴 전화를 보며 멍해졌다.유남준이 화가 났다고 생각해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엔 자동 응답 알림음 들려왔다.“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 퀵...”연결되지도 않았는데 알림음이 들리는 걸 보니 박민정은 자신이 차단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박민정은 기가 막혔다.그리고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편히 쉬기로 했다.다른 한편, 그랜드 호텔 안.유남준은 휴대폰을 한쪽에 던지며 두통 때문에 이마를 주물렀다. 그리고 실눈을 뜬 채 서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여기 왜 왔다고 했지?”서다희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바로 서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남준을 바라봤다.“사모님 때문이죠. 대표님, 정말 기억 안 나세요?”유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사모님이라니. 사모님이 어디 있다고.”“박민정 씨예요.”자기가 박민정을 위해 이렇게 외진 곳에 왔다고 들었을 때 유남준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농담인가? 내가 그 여자 때문에 여기까지 올 정도로 한가하다고?’“박민정이 지금 어디에 있는데?”유남준도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서다희는 그에게 지금이 2023년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기억은 6, 7년 전에 멈춰 있었다.서다희는 유남준의 휴대폰을 가리키며 말했다.“조금 전에 사모님... 박민정 씨에게서 전화가 온 것 같아요.”서다희도 지금 무척 당황했다.낮에 박민정을 찾아가기 전 유남준은 갑자기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서다희에게 누구냐고 물었었다.그가 레스토랑에서 돌아온 후에는 다시 서다희를 알아보고 기억도 돌아온 것처럼 보였지만 최근 몇 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대표님 지병이 재발한 것 같은데? 완전히 나은 게 아니었네?’유남준은 다시 휴대폰을 잡으려 했지만 눈앞이 깜깜해져 손을 한참 뻗었는데도 휴대폰을 찾을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눈앞의 테이블을 확 밀어 넘어뜨렸다.“쾅!”굉음이 울려 퍼졌다.유남준은 얼음장처럼 싸늘한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내 눈은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전화가 끊기고 유남준은 그저 휴대폰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한없이 차가웠다.서다희가 유남준에게 설명했다.“대표님, 박민정 씨는 지금 임신 중이어서 휴식이 필요한 게 맞습니다.”“임신?”유남준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그가 오해할까 봐 서다희가 또 말했다.“네, 대표님 아이예요.”유남준은 자신과 박민정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지금의 그는 당연히 박민정이 내일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그는 통증을 참으며 일어섰다.“진주로 돌아가자.”그는 진주로 돌아가면 더 큰 서프라이즈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서다희는 지금 유남준의 몸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만약 평소 유남준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들이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면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그래서 서다희와 유남준은 새벽에 개인 비행기를 타고 국내로 돌아왔다.서다희의 예상이 적중했다.유남준이 떠나기 전, 그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던 권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인 권해신이 정보를 얻었다.에스토니아에서 유남준을 신속히 제거하려 했으나 그때 유남준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권해신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음험한 눈빛을 보였다.“운이 좋군.”바로 옆 소파에 앉아 있던 동생 권진하는 약혼녀인 하예솔, 즉 이지원의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하예솔은 지금 권진하의 품에 안긴 사람이 바로 이지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형, 유남준은 눈이 보이지도 않잖아. 그렇게 두려워할 것 없다고. 유남준이 돌아오면 다시 기회를 잡으면 되지.”권진하가 말했다.모든 걸 하찮게 여기는 동생의 이런 성격을 권해신은 가장 싫어했다.얼마 전에도 클럽에서 만난 이지원을 집에 데려왔다.이지원이란 여자는 유남준과 김인우를 동시에 농락했던 여자라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넌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야. 좀 자제해.”권해신도 그저 간단히 경고만 했다.권진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뭐야? 엄마랑 싸웠다고 해도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야? 다시 쓰레기 아빠가 돌아온 건가?’유남준은 박윤우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내 아이?”그는 지금 모든 것이 너무 어처구니없었다. 잠을 자고 깨어났을 뿐인데 모든 게 변한 것 같았다.“네. 윤우 군을 살포시 내려놓으세요. 윤우 군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무리하면 안 돼요.”서다희는 유남준이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때문에 윤우가 다치게 된다면 기억이 돌아온 후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박윤우를 내려놓았다.“나와 누구의 아이야?”서다희는 멈칫했다.박윤우는 그제야 유남준이 다시 기억을 잃었다는 걸 깨닫고는 어이가 없었다.그리고 서다희보다 먼저 유남준에게 물었다.“제가 쓰레기 아빠와 누구의 아이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예요? 한번 맞춰볼래요?”그는 유남준이 어떤 여자의 이름을 댈지 흥미진진했다.서다희는 박윤우의 의도를 몰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 유씨 가문을 노린 그 여자 아니야? 맞춰볼 것도 있나? 그런데 그 여자 죽지 않았어?”유남준의 성격으로 그를 유혹하고 아이를 낳은 여자를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박윤우는 말문이 막혔다.‘어이가 없네. 아빠의 마음속을 떠보려 했는데 재미가 없어.’“쓰레기 아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저는 아빠와 엄마의 아들이잖아요.”“엄마가 누군데?”“박민정 씨입니다.”서다희가 덧붙였다.유남준은 잠시 침묵한 후 긴 다리를 크게 내디디며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박윤우와 서다희는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박윤우가 그를 따라갔다.“쓰레기 아빠, 왜 그러세요? 몸이 안 좋으세요? 왜 귀염둥이 윤우를 잊은 거예요?”유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서 비서, 이 아이 방에 데려가. 시끄러워 죽겠네.”서다희가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쓰레기 아빠, 쓰레기 아빠...”박윤우가 계속
예찬은 윤우의 직감을 믿었다.그들 두 형제에게는 박민정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예찬은 최고 해커였고 윤우는 더욱 신기한 능력을 가졌다. 그의 직감은 특히 정확했다.예를 들어 두 사람이 길을 걷다가 갑자기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면 윤우는 이를 미리 감지할 수 있었다.더 놀라운 것은 그의 능력이 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예찬은 그와 윤우가 두세 살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박민정과 두 형제는 로또 가게 옆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윤우는 박민정의 손을 잡고 가게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윤우에게 왜 그러는지 묻자 윤우는 가게 안에 들어가 무작위로 로또를 몇 장 뽑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중 한 장이 1억 원에 당첨되었다.물론 이런 행운은 매번 일어나지는 않았다.게다가 윤우의 이런 능력이 어른들에게 알려진다면 위험할 수 있었다.그래서 예찬은 윤우에게 평범한 아이처럼 행동하고 직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엄마는 돌아왔어?”예찬이가 물었다.“아직.”예찬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유남준은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 사람이야. 네가 무서우면 김훈 할아버지에게 너 김씨 가문으로 데리고 오라고 말해볼게.”“형, 농담하지 마. 나 안 무서워.”윤우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했다.“근데 신기하지 않아? 형은 안 그래? 와서 같이 놀려볼까?”윤우의 머릿속엔 온통 장난칠 꿍꿍이밖에 없었다.예찬은 별로 흥미가 없었다.“바보야, 나 지금 해외여행 중이야. 어떻게 가?”윤우는 그제야 그가 해외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실망했다.“나 책 읽어야 해. 그만 끊을게.”예찬은 자신이 돌아가도 도움 될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전화를 끊었다.윤우는 실망하며 말했다.“공부밖에 모르네.”윤우는 혼자 방에 있는 것이 너무 지루해서 서다희가 돌아오기 전에 또 방을 나와 조심스럽게 유남준을 찾아 나섰다.밤이 되어 날은 어두웠지만이 큰 별장에서 유남준의 서재만은 밝은 불빛으로 가득했다.박윤우는 쉽게 그를 찾아냈고는 조심스
순간 얼굴이 어두워진 유남준이다.“죽고 싶어 환장했어?”“흑... 아빠... 미워요...”박윤우는 바로 우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그의 울음소리에 유남준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났다.“거기 누가 없어?”유남준의 외침에 가정부가 곧바로 달려왔다.“왜 그러십니까?”“당장 이 자식 밖으로 버려.”“네?”생각지도 못한 말에 가정부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하지만 유남준이 박윤우에게 무슨 못된 짓을 할까 봐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일단 아이부터 안았다.눈물을 글썽이며 박윤우는 울먹인 채 물었다.“아빠,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저 버리시는 거예요?”그 질문에 유남준은 대답하지 않고 가정부에게 말했다.“내 말 들리지 않아? 당장 가서 버리라고!”가정부는 박윤우를 안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겠습니다.”밖으로 나가서 박민정에게 당장 알리려고 했다.지금으로서는 박민정만이 유남준을 컨트롤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가정부는 울고 있는 박윤우를 서재에서 안고 나왔다.서재에서 나오자마자 박윤우는 더는 울지 않았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입을 열었다“아줌마, 죄송한데 저 일단 바지부터 새로 입혀주면 안 될까요?”박윤우는 멈칫거리다가 덧붙였다.“새 바지로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버려주세요.”그 말에 가정부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했다.“윤우야, 그게 아니라 지금 윤우 아빠가 아파서 홧김에 그런 말을 하신 거야. 절대 널 버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엄마 오시고 나면 다 괜찮아지실 거니 일단 윤우 방으로 들어가 있어.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 알았지?”박윤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기억을 잃은 아빠를 놀릴 수가 없어서 무척이나 아쉬운 박윤우였다.서재 안에 홀로 남겨진 유남준은 주위에 성가시게 하는 것이 없어 좋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다희가 닥터 팀을 데리고 신체검사하러 왔다.저녁 내내 서재 안에는 온통 의사들로 북적거렸다.한편, 에스토니아는 어느새 오후 2시가 되었다.연지석과 함께 병원으
유남준은 잠든 아들이 꿈속에서조차 자신을 두려워하며 박민정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박윤우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뒤 다시 서재로 향했다.여전히 찾아내지 못한 박민정의 행방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없이 다른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피곤함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워도 그의 눈은 감기지 않았다.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그녀를 찾을 수 없던 걸까?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정말 죽었단 말인가?‘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는 단호히 부정했다.‘아니야. 민정이는 절대 죽지 않았어. 만약 민정이가 정말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그렇게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이고 아침이 되자 전화벨 소리가 그의 짧은 잠을 깨웠다.전화를 보니 서다희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민정이에 대한 소식이라도 있어?”서다희는 상사의 질문에 솔직히 답했다.“아직 없습니다.”“그럼 무슨 일이야?”“제임스 씨 기억하시죠? 다음 주 해외에서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네요. 해외 무역 관련해서 논의하고 싶답니다.”“좋아. 일정 잡아.”전화를 끊기 전 유남준은 다시 물었다.“아직 조사하지 않은 곳은 얼마나 남았지?”세상은 참 크다고 하면 작다고 하면 작았다.서다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전 고민했다. 모든 곳을 다 찾으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몰랐다.“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미 확인했지만 이번에 제임스 씨 고향은 아직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겸사겸사 그쪽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좋아. 그리고 다른 지역도 인력을 더 투입해.”“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던 그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바로 움직였다.그의 얼굴은 한 해 동안 한층 늙어 보였고 깔끔하게 정리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박윤우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그는 보모에게 아이를 잘 돌봐달라고 당부한 뒤 집을 나섰다.그가 향한 곳은 IM이 아닌 박민
고영란은 그 말을 듣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이미 두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윤우까지 맡으라니! 너야말로 아이들의 아빠잖아!”유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윤우는 여기 두고 가세요.”어차피 집에는 가정부와 집사가 있었기에 그가 굳이 박윤우를 직접 돌볼 필요는 없었다.“그래야지. 윤우는 너한테 맡길게. 난 이제 가보마.”고영란은 단호하게 말했다.거실에 앉아 있던 박윤우는 이 모든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떨궜다. 사실 그는 집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엄마를 아직 찾지 못한 지금, 유남준과 단둘이 있는 시간은 그에게 끔찍한 고역이었다.하루 종일 숙제나 문제 풀이를 강요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고영란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본 박윤우는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할머니, 이제 가시는 거예요?”그는 속으로 외쳤다. ‘할머니,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하지만 고영란은 그의 진심을 알아채지 못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 난 이제 가야 해. 너는 아빠랑 잘 지내도록 해. 네 아빠는 지금 온몸에 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잖니.”고영란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박윤우는 할머니의 상황을 이해했기에 마지못해 그녀를 현관까지 배웅했다.고영란이 떠난 뒤 그는 방으로 들어가 게임이라도 하려는 찰나였다.그때 위층에서 유남준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윤우.”그는 순간 긴장하며 움찔했다. 그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2층 복도에 서 있는 아빠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위로 올라와.”박윤우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아빠, 또 뭔데요?”그는 투덜거리며 물었다.“숙제 검사.” 유남준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본가에 가기 전에 준 두 장의 문제지 어디 있지?”박윤우는 땅속으로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그게... 깜빡하고 안 가져왔어요.”그는 더듬거리며 변명했다.하지만 유남준은 화내지 않고 무표정하게 말했다.“그
박민정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유남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직장은 어때?]그녀는 짧게 답했다.[괜찮아요.]하지만 유남우는 그녀의 대답에 묘한 걱정이 들었다.그는 박민정이 직장에서 오래 일하며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다 보면 혹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까 두려웠다.[만약 힘들거나 맞지 않는다면 그만둬도 돼.]그는 다정하게 말했다.[네, 알겠어요.]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오히려 지금 직장은 그녀에게 도전 의식을 심어주고 있었다.무엇보다 그녀는 집에만 갇혀 있던 지난 1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며 지루함에 지쳐 있었다.이제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머리도 한층 더 빠릿빠릿해진 기분이었다.유남우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향했다.비록 유남우가 그녀를 위해 가사 도우미를 고용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일하는 게 더 편했다.별다른 일이 없을 때는 직접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진주시 유씨 집안의 오래된 저택에서.유남우는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지만 한동안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윤소현이 위층으로 올라왔다.유남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일부러 휴대폰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욕실로 들어갔다.역시나 그가 자리를 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소현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의 휴대폰을 들여다봤다.마침 그때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발신자는 어제 본 것과 동일한 프로필 사진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평범했다.“정말 감사해요. 당신 덕분에 이 직장을 구할 수 있었어요.”윤소현은 의아해하며 메시지를 유심히 읽었다.그때 욕실에서 유남우가 조용히 걸어나왔다.“뭘 보고 있어?”그의 목소리에 윤소현은 깜짝 놀라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아까 누가 메시지를 보낸 걸 봤어요. 당신이 직장을 구해줬다면서 감사하다고 하던데요.”유남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아, 별거 아니야. 예전에 한 고객의 딸이 해외에서 공부를
회사 직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박민정이 어떻게 그들의 업무를 제쳐두고 사장에게 이런 상황을 고발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사장은 박민정의 말을 듣고 문서들을 다시 살펴보았다.그 양은 분명 인턴 한 명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그는 고개를 들어 주영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주 비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왜 주 비서랑 다른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를 인턴에게 맡기는 거지?”“만약 이런 식이라면 내가 아예 새로운 직원을 뽑는 게 낫지 않나?”“아니면 당신들이 직접 이 인턴에게 급여를 주고 있는 건가?”주영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장님,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저는 단지 동료들에게 일이 너무 많으면 우선 민정 씨에게 맡기라고 말했을 뿐입니다.”그러나 사장은 더욱 화가 난 듯 말했다.“우리 회사의 업무는 이미 적절히 분배되어 있어. 이 인턴이 오전 동안 두 건의 번역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하다면, 왜 당신들은 자신의 업무조차 제시간에 끝내지 못하는 건가? 이건 당신들의 업무 능력을 재검토해야 할 문제로 보이네.”사장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려 하자 주영리는 억울한 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사장님, 민정 씨가 번역을 그렇게 빨리 끝낸 건 분명 번역 소프트웨어를 사용했기 때문일 겁니다.”평소 이런 전문 문서는 번역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며 보통 오전 동안 한 건을 완성하기도 어려웠다.사장은 그녀의 말을 듣고 박민정이 제출한번역 문서를 들어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잠시 후, 그는 문서를 주영리에게 건넸다.“직접 확인해 봐.”주영리는 서둘러 문서를 받아 살펴보았다.문법은 물론 표현까지 완벽하게 번역되어 있었고 소프트웨어로 번역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믿기지 않아 다른 문서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사장은 이제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 말했다.“주 비서는 회사에서 2년 동안 일했지만 번역된 문서들에서 종종 실수가 발견되곤 했어. 그런데 민정 씨는 아직 인턴이야. 민정 씨가 뒷문으로
박민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배운 적이 있어요.”“역시! 내가 어쩐지 민정 씨 기본기가 너무 좋다 했지. 정말 귀한 인재를 만났네!” 무용 선생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매년 직원들에게 춤을 연습시키며 몇몇 주요 인사들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몸이 굳어 안무를 익히는 데 애를 먹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빠르게 연습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가 퇴근 준비를 하러 갔다.하지만 사무실에 도착하자 모든 동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 시선들에는 구경거리 보듯 즐기는 눈빛도, 적대적인 눈빛도, 안쓰러운 눈빛도 섞여 있었다.박민정은 의아한 마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막 앉으려는 순간 주영리가 사장실에서 나오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민정 씨, 아까 작업을 다 끝냈다고 했죠? 서랍을 열어서 그 문서들 좀 가져와요. 사장님께 보여 드리게.”박민정은 주저하지 않고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열고 문서들을 꺼냈다.주영리는 그것들을 받아 펼쳐 보더니 눈에 띄게 동공이 흔들렸다.잠시 후, 주영리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 이렇게 많은 문서 중에서 민정 씨가 번역한 건 고작 몇 장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빈칸이잖아? 이래놓고 일을 다 끝냈다고?”“내가 말했잖아요. 뒷문으로 들어온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고. 무능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네!”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비난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주영리는 계속 몰아붙였다.“좋아요, 사장님 만나러 가요. 민정 씨가 얼마나 일을 대충 했는지 직접 보여 드리자고!”그녀는 박민정의 팔을 붙잡고 사장실로 향했다. 이미 사장에게 상황을 미리 고발해 둔 터라, 문도 두드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사장은 외국인이었다.그는 일하기 싫어하는 태도나 무책임한 행동을 싫어했다.박민정과 주영리가 들어오는 것을 본 사장은 의자에 기대앉아 외국어로 물었다.“영리 씨, 민정 씨가 정말 일을 다 안 끝냈나?”그는 원래 이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주영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편하게 지시하세요.”주영리를 본 순간 박민정은 이번 직장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이 일을 꼭 지켜내리라 마음먹었다.일자리가 생기면 유남우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주영리는 박민정의 태도에 더욱 거만해져서 온갖 잡다한 일을 지시하기 시작했다.일을 지시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것은 그저 허드렛일이었다.이 직원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저 직원의 서류를 출력하는 일 따위였다.심지어 주영리는 동료들에게 은밀히 말했다.“앞으로 일이 많아서 힘들면 여기에 다 넘겨. 여유롭게 써먹으면 되잖아.”이는 명백히 박민정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동료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일을 대신해 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앞다투어 일을 떠넘겼다.“듣자 하니 번역이 전공이라던데, 이 문서들 좀 번역해 줘요. 절대 실수하면 안 돼요.”“제 것도 부탁드려요. 오늘까지 해야 해요.”“...”모두들 자신들의 일을 박민정에게 맡기며 떠넘기기에 바빴다.그녀에게 쏟아진 업무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게다가 오후에는 고객 응대를 위한 댄스 연습도 예정되어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모든 일을 다 받아들이며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다.동료들은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일을 받아주는 모습을 보고 은근히 비웃었다.“원래부터 이렇게 만만한 사람이었나 봐. 앞으로 일 다 넘겨도 되겠네.”“그러게. 공짜 노동력을 안 써먹으면 바보지.”주영리도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일하는 박민정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춤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애야. 내가 장담하는데, 여기 오래 못 버틸걸.”다들 한마디씩 던지며 박민정을 험담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퇴근 시간이 되자 박민정은 모든 서류를 정리해 들고 곧장 댄스 스튜디오로 향했다.주영리는 그녀가 자리를 뜨려 하자 재빨리 가로막았다.“민정 씨, 일 다 끝냈나
홍주영은 여전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저는 정말로 누군지 모릅니다.”“좋아요, 아주 좋아요.” 윤소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홍 비서가 무슨 내막을 알고도 숨기고 있다면 정말 끝장인 줄 알아요.”매서운 경고를 남긴 채 그녀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홍주영은 자리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오늘 있었던 일을 유남우에게 문자로 알렸다.유남우는 그녀의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간발의 차로 윤소현에게 들킬 뻔했지만 다행히 아직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주영아, 고마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줘.”그가 답장을 보냈다.홍주영은 그의 메시지를 보며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정말로 둘째 도련님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았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밖에는 어느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홍주영은 그 눈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쓸쓸한 뒷모습을 남겼다.며칠 전, 그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었다.“너도 이제 나이가 얼마인데, 변변한 직장도 없으면서 결혼도 안 하고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니? 설마 남자를 안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이번엔 꼭 집에 와서 소개팅 나가야 해. 결혼하지 않으면 내가 죽은 네 아빠에게 뭐라 설명하겠니?”“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엄마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나중에 네가 혼자가 늙을 모습은 보고 싶지도 않아.”홍주영은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둘째 도련님.”“무슨 일이야?”“어머니가 저를 부르셔서 잠시 고향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휴가를 내도 될까요?”유남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래, 다녀와.”전화를 끊기 전 그는 물었다.“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홍주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별일은 없고요. 그냥 어머니가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홍주영은 유남우를 모신 이후로 집에 잘 내려가지 못했다.올해 설에도
홍주영은 유남우가 너무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누구와 대화 중인지 궁금해졌다.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을 자제했으나 살짝 보니 그는 한 여자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홍주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더는 보지 않으려 했다.마음속에서 믿기 어려운 생각이 들었다.자신이 알던 유남우는 항상 곧고 올곧은 사람이었는데 설마 바람을 피우는 걸까?그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윤소현일 리 없다는 건 분명했다.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구일까?홍주영은 유남우가 여전히 박민정만을 마음에 두고 사는, 깊은 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겼었다.그런 그가 다른 여자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그녀는 실망감에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저녁 퇴근길에서 홍주영은 한 차량이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을 발견했다.차 창문이 내려오자 나타난 건 고고하게 웃고 있는 윤소현의 얼굴이었다.홍주영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고 윤소현은 그런 그녀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홍 비서, 걱정 마세요. 난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다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홍주영은 감정을 숨기며 무표정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차에 올라타서 이야기하죠,” 홍주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대답했다.“무슨 일이든 여기서 말씀하시죠.”그녀는 윤소현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특히 오늘 유남우가 그녀에게 사과를 강요한 일로 인해 윤소현이 자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란 걸 직감했다.하지만 홍주영은 틀렸다.윤소현은 그녀가 차에 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고 어쩐지 재미있어하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내가 그리 속 좁은 사람은 아니에요. 복수하려는 것도 아니고요.”그녀는 홍주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제야 홍주영은 그녀가 정말로 문제를 일으키려는 건 아닌 듯 보였고 근처의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윤소현은 직접 메뉴를 가져와 홍주영에게 건네며 말했다.“먹고 싶은
윤소현은 유남우가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섰고 마침 비서 홍주영이 유남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자의 직감으로 홍주영이 자신의 남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던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유남우 앞에서 홍주영의 뺨을 후려쳤다.“아직 설 연휴인데 홍 비서는 왜 남우 씨를 직접 나서게 해요? 일을 그 정도로 못 하나?”홍주영의 뺨은 화끈거렸고 그녀는 한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해 있었다.그제야 유남우가 사태를 파악하고 급히 다가와 윤소현의 팔을 붙잡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의 날 선 질문에 윤소현은 한순간 당황했지만 곧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남우 씨, 그냥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요. 명절에 당신이 나랑 다혜를 두고 가버리다니...”그러나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며 차갑게 말했다.“그게 네가 무고한 사람을 때린 이유야?”그의 싸늘한 눈빛은 평소의 온화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 눈빛에 겁먹은 윤소현은 몸을 떨었고 손목이 점점 아파왔다.“남우 씨, 아파요...”하지만 유남우는 전혀 풀어줄 기색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홍 비서에게 사과해.”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나더러 부하 직원한테 사과를 하라고요?”“홍 비서는 단순한 부하 직원이 아니야. 내 친구이기도 해. 그러니까 얼른 사과해.” 유남우는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윤소현은 마지못해 홍주영을 향해 말했다.“미안해요, 홍 비서.”홍주영은 얼얼한 뺨의 통증을 참으며 유남우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됐죠?” 윤소현은 다시 유남우를 바라봤다.그제야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손목이 풀리자마자 윤소현은 아픈 손목을 문지르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손목이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세게 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