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오후 내내 일 얘기를 했고 저녁에는 진서연이 박민정과 연지석을 남아 함께 저녁을 먹도록 한참 설득했다.저녁을 먹고 화장실에 갔을 때 그녀는 박민정에게 사적으로 물었다.“보스님, 이제 결심을 하신 건가요?”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무슨 결심?”“연지석 씨에게로 돌아오는 거요.”진서연은 큰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봤다.“이번에 연지석 씨 때문에 돌아오신 거 아니에요?”박민정은 말문이 막혔다.그렇다고 말하기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나랑 지석이는 친구일 뿐이야. 다른 생각은 하지 마.”진서연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보스님과 연지석 씨가 함께라면 매일 눈 호강할 수 있는데요.”박민정은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진서연은 여전히 호기심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연지석 씨가 아니라면 혹시 유남준 씨인가요?”진서연은 유남준도 만난 적 있었는데 역시 군침을 흐르게 할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었다.박민정은 기가 막혔다.“가자. 시간도 늦었는데 씻고 자야지.”두 사람이 나란히 밖으로 나와 룸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박민정은 갑자기 멈칫했다.멀리서 훤칠한 키의 두 남자가 보였기 때문이다.연지석과 서다희는 룸 앞에 서 있었다.서다희는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키도 크고 잘생겼다. 물론 연지석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진서연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보스님 옆에 잘생긴 남자가 왜 이렇게 많아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알았어. 이제 그만하고 먼저 가서 쉬어.”“네.”진서연은 아쉬워하면서 레스토랑을 나섰다.그때, 룸 앞에 서 있던 서다희와 연지석은 겉으로는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보였지만 사실 분위기는 주변의 사람들이 멀리 피할 정도로 얼음장처럼 싸늘했다.박민정이 다가갔다.“서 비서님.”서다희는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모님 모시러 왔습니다.”“죄송한데 이미 남준 씨에 얘기했어요. 모레 돌아간다고요. 먼저 돌아가세요.”박민정이 말했다.이미 연지석과 약속한 일이니 이
박민정은 끊긴 전화를 보며 멍해졌다.유남준이 화가 났다고 생각해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엔 자동 응답 알림음 들려왔다.“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 퀵...”연결되지도 않았는데 알림음이 들리는 걸 보니 박민정은 자신이 차단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박민정은 기가 막혔다.그리고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편히 쉬기로 했다.다른 한편, 그랜드 호텔 안.유남준은 휴대폰을 한쪽에 던지며 두통 때문에 이마를 주물렀다. 그리고 실눈을 뜬 채 서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여기 왜 왔다고 했지?”서다희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바로 서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남준을 바라봤다.“사모님 때문이죠. 대표님, 정말 기억 안 나세요?”유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사모님이라니. 사모님이 어디 있다고.”“박민정 씨예요.”자기가 박민정을 위해 이렇게 외진 곳에 왔다고 들었을 때 유남준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농담인가? 내가 그 여자 때문에 여기까지 올 정도로 한가하다고?’“박민정이 지금 어디에 있는데?”유남준도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서다희는 그에게 지금이 2023년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기억은 6, 7년 전에 멈춰 있었다.서다희는 유남준의 휴대폰을 가리키며 말했다.“조금 전에 사모님... 박민정 씨에게서 전화가 온 것 같아요.”서다희도 지금 무척 당황했다.낮에 박민정을 찾아가기 전 유남준은 갑자기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서다희에게 누구냐고 물었었다.그가 레스토랑에서 돌아온 후에는 다시 서다희를 알아보고 기억도 돌아온 것처럼 보였지만 최근 몇 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대표님 지병이 재발한 것 같은데? 완전히 나은 게 아니었네?’유남준은 다시 휴대폰을 잡으려 했지만 눈앞이 깜깜해져 손을 한참 뻗었는데도 휴대폰을 찾을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눈앞의 테이블을 확 밀어 넘어뜨렸다.“쾅!”굉음이 울려 퍼졌다.유남준은 얼음장처럼 싸늘한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내 눈은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전화가 끊기고 유남준은 그저 휴대폰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한없이 차가웠다.서다희가 유남준에게 설명했다.“대표님, 박민정 씨는 지금 임신 중이어서 휴식이 필요한 게 맞습니다.”“임신?”유남준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그가 오해할까 봐 서다희가 또 말했다.“네, 대표님 아이예요.”유남준은 자신과 박민정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지금의 그는 당연히 박민정이 내일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그는 통증을 참으며 일어섰다.“진주로 돌아가자.”그는 진주로 돌아가면 더 큰 서프라이즈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서다희는 지금 유남준의 몸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만약 평소 유남준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들이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면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그래서 서다희와 유남준은 새벽에 개인 비행기를 타고 국내로 돌아왔다.서다희의 예상이 적중했다.유남준이 떠나기 전, 그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던 권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인 권해신이 정보를 얻었다.에스토니아에서 유남준을 신속히 제거하려 했으나 그때 유남준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권해신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음험한 눈빛을 보였다.“운이 좋군.”바로 옆 소파에 앉아 있던 동생 권진하는 약혼녀인 하예솔, 즉 이지원의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하예솔은 지금 권진하의 품에 안긴 사람이 바로 이지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형, 유남준은 눈이 보이지도 않잖아. 그렇게 두려워할 것 없다고. 유남준이 돌아오면 다시 기회를 잡으면 되지.”권진하가 말했다.모든 걸 하찮게 여기는 동생의 이런 성격을 권해신은 가장 싫어했다.얼마 전에도 클럽에서 만난 이지원을 집에 데려왔다.이지원이란 여자는 유남준과 김인우를 동시에 농락했던 여자라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넌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야. 좀 자제해.”권해신도 그저 간단히 경고만 했다.권진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뭐야? 엄마랑 싸웠다고 해도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야? 다시 쓰레기 아빠가 돌아온 건가?’유남준은 박윤우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내 아이?”그는 지금 모든 것이 너무 어처구니없었다. 잠을 자고 깨어났을 뿐인데 모든 게 변한 것 같았다.“네. 윤우 군을 살포시 내려놓으세요. 윤우 군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무리하면 안 돼요.”서다희는 유남준이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때문에 윤우가 다치게 된다면 기억이 돌아온 후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박윤우를 내려놓았다.“나와 누구의 아이야?”서다희는 멈칫했다.박윤우는 그제야 유남준이 다시 기억을 잃었다는 걸 깨닫고는 어이가 없었다.그리고 서다희보다 먼저 유남준에게 물었다.“제가 쓰레기 아빠와 누구의 아이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예요? 한번 맞춰볼래요?”그는 유남준이 어떤 여자의 이름을 댈지 흥미진진했다.서다희는 박윤우의 의도를 몰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 유씨 가문을 노린 그 여자 아니야? 맞춰볼 것도 있나? 그런데 그 여자 죽지 않았어?”유남준의 성격으로 그를 유혹하고 아이를 낳은 여자를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박윤우는 말문이 막혔다.‘어이가 없네. 아빠의 마음속을 떠보려 했는데 재미가 없어.’“쓰레기 아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저는 아빠와 엄마의 아들이잖아요.”“엄마가 누군데?”“박민정 씨입니다.”서다희가 덧붙였다.유남준은 잠시 침묵한 후 긴 다리를 크게 내디디며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박윤우와 서다희는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박윤우가 그를 따라갔다.“쓰레기 아빠, 왜 그러세요? 몸이 안 좋으세요? 왜 귀염둥이 윤우를 잊은 거예요?”유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서 비서, 이 아이 방에 데려가. 시끄러워 죽겠네.”서다희가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쓰레기 아빠, 쓰레기 아빠...”박윤우가 계속
예찬은 윤우의 직감을 믿었다.그들 두 형제에게는 박민정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예찬은 최고 해커였고 윤우는 더욱 신기한 능력을 가졌다. 그의 직감은 특히 정확했다.예를 들어 두 사람이 길을 걷다가 갑자기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면 윤우는 이를 미리 감지할 수 있었다.더 놀라운 것은 그의 능력이 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예찬은 그와 윤우가 두세 살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박민정과 두 형제는 로또 가게 옆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윤우는 박민정의 손을 잡고 가게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윤우에게 왜 그러는지 묻자 윤우는 가게 안에 들어가 무작위로 로또를 몇 장 뽑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중 한 장이 1억 원에 당첨되었다.물론 이런 행운은 매번 일어나지는 않았다.게다가 윤우의 이런 능력이 어른들에게 알려진다면 위험할 수 있었다.그래서 예찬은 윤우에게 평범한 아이처럼 행동하고 직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엄마는 돌아왔어?”예찬이가 물었다.“아직.”예찬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유남준은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 사람이야. 네가 무서우면 김훈 할아버지에게 너 김씨 가문으로 데리고 오라고 말해볼게.”“형, 농담하지 마. 나 안 무서워.”윤우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했다.“근데 신기하지 않아? 형은 안 그래? 와서 같이 놀려볼까?”윤우의 머릿속엔 온통 장난칠 꿍꿍이밖에 없었다.예찬은 별로 흥미가 없었다.“바보야, 나 지금 해외여행 중이야. 어떻게 가?”윤우는 그제야 그가 해외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실망했다.“나 책 읽어야 해. 그만 끊을게.”예찬은 자신이 돌아가도 도움 될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전화를 끊었다.윤우는 실망하며 말했다.“공부밖에 모르네.”윤우는 혼자 방에 있는 것이 너무 지루해서 서다희가 돌아오기 전에 또 방을 나와 조심스럽게 유남준을 찾아 나섰다.밤이 되어 날은 어두웠지만이 큰 별장에서 유남준의 서재만은 밝은 불빛으로 가득했다.박윤우는 쉽게 그를 찾아냈고는 조심스
순간 얼굴이 어두워진 유남준이다.“죽고 싶어 환장했어?”“흑... 아빠... 미워요...”박윤우는 바로 우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그의 울음소리에 유남준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났다.“거기 누가 없어?”유남준의 외침에 가정부가 곧바로 달려왔다.“왜 그러십니까?”“당장 이 자식 밖으로 버려.”“네?”생각지도 못한 말에 가정부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하지만 유남준이 박윤우에게 무슨 못된 짓을 할까 봐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일단 아이부터 안았다.눈물을 글썽이며 박윤우는 울먹인 채 물었다.“아빠,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저 버리시는 거예요?”그 질문에 유남준은 대답하지 않고 가정부에게 말했다.“내 말 들리지 않아? 당장 가서 버리라고!”가정부는 박윤우를 안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겠습니다.”밖으로 나가서 박민정에게 당장 알리려고 했다.지금으로서는 박민정만이 유남준을 컨트롤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가정부는 울고 있는 박윤우를 서재에서 안고 나왔다.서재에서 나오자마자 박윤우는 더는 울지 않았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입을 열었다“아줌마, 죄송한데 저 일단 바지부터 새로 입혀주면 안 될까요?”박윤우는 멈칫거리다가 덧붙였다.“새 바지로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버려주세요.”그 말에 가정부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했다.“윤우야, 그게 아니라 지금 윤우 아빠가 아파서 홧김에 그런 말을 하신 거야. 절대 널 버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엄마 오시고 나면 다 괜찮아지실 거니 일단 윤우 방으로 들어가 있어.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 알았지?”박윤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기억을 잃은 아빠를 놀릴 수가 없어서 무척이나 아쉬운 박윤우였다.서재 안에 홀로 남겨진 유남준은 주위에 성가시게 하는 것이 없어 좋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다희가 닥터 팀을 데리고 신체검사하러 왔다.저녁 내내 서재 안에는 온통 의사들로 북적거렸다.한편, 에스토니아는 어느새 오후 2시가 되었다.연지석과 함께 병원으
기억이 혼란스러워졌다는 게 무슨 뜻인지 박민정은 알 수 없었다.“뭐가 어떻게 혼란스러워진 건데요?”“어제 에스토니아에서 제가 사모님을 찾으러 갔을 때,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이 누구신지 기억하지 못하시고 계셨습니다. 근데 다시 돌아가서 대표님께 말씀드리니 그땐 또 사모님을 기억해 내셨습니다. 대표님과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대표님 기억은 6, 7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습니다.”서다희는 탄식 하며 덧붙였다.“지금 역시 그러하시고 아이들도 잊으신 듯합니다.”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알았어요. 우리 윤우 좀 부탁드릴게요. 이제 곧 탑승할 것 같으니 돌아가서 얘기해요.”“네, 사모님.”기억이 혼란스러워졌다는 유남준의 상황이 거짓일 것 같지 않았다.기억을 잃었던 적이 있고 서로 다시 시작하자며 마음마저 먹었었는데, 굳이 다시 기억을 잃은 척할 필요가 없다.박민정은 핸드폰 전원을 끄고서 비행기에 올랐다.두원 별장.유남준은 아주 힘겹게 새 옷으로 갈아입었고 의사들은 일사불란하게 검사를 해주었다.밤새 열심히 검사했지만, 의사들은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다.어떠한 이유로 기억이 혼란스러워진 것인지, 어떻게 치료하면 좋을지 그 무엇도 똑똑히 정하지 못했다.오늘날 의학은 부단히 발전하고 있으나 신경을 비롯한 사람의 기억 쪽으로는 아직도 노력이 필요하다.유남준은 머리가 아팠고 몸도 유난히 무겁고 힘들어 의사들을 쫒아냈고 서다희에게도 떠나라고 했다.“대표님, 저는 곁에서 지켜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기 바랍니다.”지금 이보다 상황이 더 악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남준은 그의 뜻을 거절하지 않았다.따라서 서다희는 아래층에 있는 객실에서 묶게 되었다.시차에 적응하는 중이라 유남준은 정신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들었으니 말이다.박민정이 도착했을 때 별장 안은 유난히 적막했다.가정부는 그녀가 오는 것을 알고 일찍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박민정을 보게 되는
서다희는 바로 위층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대표님께서 깨어나신 거 같습니다.”“제가 가볼게요.”흑백으로 인테리어한 방안에서 유남준의 모습이 보였다.바닥에 넘어진 채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박민정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괜찮아요?”“꺼져!”박민정의 소리를 듣고서 유남준은 그녀를 확 뿌리쳐버렸다.“실컷 놀다 왔어?”그의 힘에 박민정은 몸이 뒤로 휘어청거리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밤새 달려온 그녀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프면 치료받으면 그만이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나 지금 임신 중이라고요! 아이한테 문제가 생기면 나 그때 진짜...”단 한 번도 못 된 소리를 해보지 못했던 박민정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유남준은 침묵을 유지한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이때 박민정은 다시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다가가 부축하려고 했다.다행이도 유남준은 그녀를 밀쳐내지 않았다.침대로 부축을 받고 난 뒤 유남준은 그녀의 팔목을 확 잡아당겼다.“나한테 소리까지 치고 너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지?”박민정은 더 이상 매사에 조심하고 두려워하던 옛날의 그녀가 아니었다.그 말을 듣게 되는 그녀 역시 자기도 모르게 차갑게 웃었다.“남준 씨는 소리쳐도 되도 나는 소리쳐도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거예요?”말문이 막힌 유남준이다.자기 팔목을 꼭 잡고 있는 유남준의 손을 떼고서 박민정은 조금 전 그가 넘어지면서 같이 바닥으로 떨어진 물건을 줍고 의자를 세웠다.“이따가 병원에 한번 가 봐요.”유남준은 차가운 얼굴을 한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안 가.”“병원으로 가봐야 알 거 아니에요.”두원 별장에는 본가처럼 의료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지 않다.그 말인즉슨, 가장 기초적인 검사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유남준은 천천히 두 눈을 떴는데, 깊은 동굴처럼 어둡기만 했다.“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야.”“이런다고 네 죄가 용서될 거 같아? 너 같은 거짓말쟁이는 평생 홀로 고독하게 생을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