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님이 불편한 마음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박민정은 오늘 자기가 너무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도 안 보이는데 그렇게 혼자 내버려 뒀으니 미안할 법도 하다.박민정은 꽃에 물을 주고 있다가 거실로 들어갔다. 유남준은 소파에 앉아서 눈 붙이고 있었다. 그는 박민정한테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지 뾰로통해 있는 느낌이 들었다.박민정이 유남준 쪽으로 걸어가면서 무언가 말하려고 했을 때 유남준 앞에 놓여있는 문서들을 보았다. 전부 다 바움 그룹의 재정에 관한 것들이었다.박민정이 놀라서 넋 놓고 있을 때 유남준은 눈을 감은 채 숨죽이며 말했다.“민정아, 네가 달라고 했던 물건들 여기 다 있어. 빠진 부분이 있는지 한번 검사해 봐.”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문서들을 보면서 기사님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제야 유남준을 혼자 병원문 밖에서 반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해졌다.“저기… 남준 씨, 미안해요…”유남준은 박민정이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것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박민정은 생각지 못한 말을 했다.“남준 씨를 병원 문 앞에 혼자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앞으로 조심할게요. 미안해요.”유남준은 그 말을 묵묵히 듣고 나서 기분이 조금 풀렸다.“응, 괜찮아.”대표로 오랜 기간 일해서인지, 남의 사과를 받는 것조차도 직원들한테 임무를 나눠주는 상사 같은 태도였다. 박민정은 상위에 놓여있던 문서를 들고 말했다.“이 문서도 있네요, 고마워요.”그녀는 못 참겠다는 듯 이내 문서를 펼쳐보았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 줄 몰랐다. 유남준은 바움 그룹을 철저하게 조사했고 바움 그룹 내부에서 벌어진 재산 이동에 관한 증거들을 모조리 찾아냈다. 이 증거들은 박민정이 재판을 치를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박민정은 이 자료들을 사진 찍어서 장명철 변호사한테 보냈다. 먼저 보고 쓸모 있는 부분을 찾게 하기 위해서였다. 장명철은 효율이 높아서 한 시간 후 모든 유용한 증거들을 박민정한테 알
고영란은 처음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가 윤우의 말을 끝까지 듣고 정신이 들었다.“세 사람이라고?”박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 배에 동생 두 명이 있대요.”고영란은 너무 기뻤다.전부터 손자를 갖고 싶었는데 박민정이 먼저 쌍둥이 데리고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또 쌍둥이를 임신했다.배 속의 애가 태어나면 고영란은 손주를 네 명이나 보는 셈이 된다.고영란은 이 기쁜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당장 일어나 박민정을 보면서 얘기했다.“임신한 몸으로 오래 서 있으면 안 돼. 얼른 앉아.”박민정은 고영란이 그녀에게 유씨 가문 며느리가 되어달라고 할 때 빼고 이런 대우를 처음 받아본다.그리고 지금 고영란이 이러는 이유가 배 속의 아이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박민정은 걸어와서 고영란과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내일 영양사를 고용해올게. 전에 전문적으로 나를 케어하던 사람이야.”고영란이 말했다.“괜찮아요. 집에 셰프가 있어요.”박민정이 거절했다.고영란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말했다.“셰프랑 영양사는 완전히 달라.”말을 마친 고영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에게는 기회도 주지 않고 말했다.“됐어. 난 이만 간다. 내일 영양사가 올 거야.”고영란은 별장을 나가서 차에 탔다.박민정은 고영란이 말한 영양사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와도 변할 것은 없었다.하지만 이튿날 아침 여덟 시 반. 유남준과 박윤우가 떠난 후, 영양사가 박민정의 방에 들어와 그녀를 깨웠다.박민정은 아직 잠에서 덜 깬 채 단정하게 정장을 입은, 머리가 희끗한 50대의 여자가 서 있었다.“사모님, 이미 여덟 시 반입니다. 일제 일어나셔야죠. 너무 많이 자면 태아에 안 좋습니다.”태아에 안 좋다니...“영양사님이에요?”“네, 맞습니다. 고영란 사모님께서 직접 보내셨습니다.”잠에서 깬 박민정은 다시 잠에 들 수가 없어서 아예 일어나기로 했다. 박민정이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식탁에 놓인 음식이 모두 계란과 육류라는 것을 발견했다. 왜 고기
박민정은 손가락을 매만지다가 차가운 시선으로 장연정을 쳐다보았다.“유씨 가문의 아이라뇨? 내 배 속에 있으니 내 아이예요. 아이한테 좋은지 나쁜지는 내가 잘 알아요. 난 아이들의 엄마로서 그 누구보다 아이들을 관심하고 사랑해요. 난 아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내 얼굴은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어요. 내가 성형을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당신이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에요.”장연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장연정은 유씨 가문의 며느리가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들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소문과는 달라보였다.박민정은 몸을 일으키고 장연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핸드폰 돌려줘요.”장연정은 박민정을 길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연정은 손을 높게 들었다.박민정이 장연정이 핸드폰을 돌려주려는 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장연정이 손에 힘을 탁 풀었다. 핸드폰이 그대로 떨어져 바닥에 쿵 떨어졌다. 보지 않아도 액정이 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어머, 죄송합니다, 사모님. 제가 나이가 들어서 손이 미끄러졌네요.”박민정은 화를 내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화를 내지 않고 허리를 굽혀 핸드폰을 주우려고 했다.그리고 박민정은 핸드폰을 주우면서 차갑게 얘기했다.“나이가 들었으면 양로원에 가세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나갔다.장연정이 따라가면서 물었다.“사모님, 어디 가세요?”박민정은 그런 장연정을 무시하고 정민기더러 운전해서 데려다 달라고 했다.박민정은 오늘 그 아이 엄마와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핸드폰이 고장 났으니 먼저 핸드폰을 고쳐야 한다. 그리고 밖에서 아침을 먹을 생각이었다.장연정은 일을 크게 벌이는 사람이니 어떻게든 보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복잡해진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장연정 때문에 혈압이 올라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이한테 좋지 않을 것이다.박민정이 떠나자마자 장연정은 얼른 고영란에게 고자질했다.장연정은 박민정의 행동을 과장해서 얘기하면
최현아는 윤소현이 올 때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최현아는 윤소현의 웃어른으로서 이런 거만한 태도로 윤소현을 대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윤소현이 저번에 한 말도 까맣게 잊어버렸다.윤소현은 그녀의 태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형수님, 그냥 지훈이 보러 온 거예요. 지금은 괜찮죠?”아들을 떠올린 최현아는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다. 최현아는 자리에 앉아 얘기했다.“오늘 유치원에 갔어. 의사가 말하기를 이렇게 다친 건 앞으로 꼭 주의해야 한대.”최현아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지훈이 하나밖에 없어. 지훈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떡해?”“박민정 씨는 도대체 아들을 어떻게 가르친 건지. 어떻게 지훈이를 속여서 산에 가서 밤을 지새울 수 있어요? 어린 나이에 이렇게 독한 마음을 품다니.”윤소현은 그렇게 얘기하고 또 입을 열었다.“그런 사람이 이번에 또 쌍둥이를 임신했다잖아요.”마지막 말이 중점이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유지훈이 그룹을 물려받기 더욱 어려워진다.최현아는 박민정이 쌍둥이를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말을 듣자마자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최현아는 병원에서 시험관으로 겨우 임신해서 유지훈을 낳았는데, 박민정은 이렇게 쉽게 또 쌍둥이를 임신하다니.윤소현은 이만하면 된 것 같다고 생각한 후 아무 핑계나 대고 자리를 떴다....다른 한편. 박민정은 핸드폰을 수리한 후 아침을 먹고 애 엄마들의 모임으로 갔다.호화로운 룸 안에서, 애 엄마들이 함께 쉬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예찬이 엄마는 정말 손이 커요. 현아 씨보다 많이 나아요.”한 사람이 얘기했다.“그러게요. 현아 씨는 항상 집으로 부르는데 매번 자랑만 하거든요.”다른 사람이 얘기했다.“하지만 예찬이 엄마가 우리를 불러서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냥 물건을 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다들 입을 모아 얘기했다. 오직 지원이 엄마만이 박민정이 하려는 일을 눈치챘다.지원이 엄마는 박민정에게 다음 주 월
바로 도한이 엄마였다. 그녀는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얘기했다.“예찬이 엄마, 난 지지합니다! 꼭 예찬 엄마를 투표할게요!”도한 엄마가 앞장서서 얘기하자 다른 학부모들도 다들 동의했다.그들은 최현아처럼 강압적이고 오만한 사람을 회장으로 선거하고 싶지 않았다.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집에 돌아갈 때, 박민정은 이상함을 느꼈다.하지만 집에 가서 어떻게 장연정을 마주할지가 문제였다. 그래서 학부모의 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어떻게 쫓아내지?”박민정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아침 여덟 시 반에 일어났더니 점심에 되니 피곤해졌다.정민기는 운전하다가 그 말을 듣고 물었다.“누구를 쫓아내시게요?”“장연정이라고 시어머니가 보내준 영양사가 있어요.”장연정을 떠올린 박민정은 정민기더러 차를 세우라고 하고 밖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들어갔다.밥을 먹을 때, 박민정은 참지 못하고 정민기에게 장연정의 얘기를 했다.정민기는 고민하다가 얘기했다.“해결 방법은 간단해요.”“뭔데요?”“유 대표님이 나서게 하는 겁니다.”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 유남준에게 부탁하기가 약간 꺼려졌다. 두 사람은 아직 어색한 사이다. 그러니 부탁을 하기는 약간 어려웠다.하지만 정민기가 얘기해주는 덕분에 박민정은 묘책이 떠올랐다.“유남준 씨한테 부탁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어요.”정민기는 박민정을 보면서 더 묻지 않았다.그는 항상 듣는 입장이었다. 상대방이 얘기하지 않으면 먼저 묻는 법이 없었다.집에 돌아간 박민정은 장연정이 셰프에게 이것저것 시키는 것을 발견했다.박민정은 주방으로 가서 얘기했다.“장연정 씨.”장연정은 박민정이 돌아온 것을 보고 바로 기선제압을 하려고 했다.“사모님, 이게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돌아와요? 지금 온 걸 보니까, 설마 밖에서 점심을 먹은 거예요?”장연정을 보면서, 박민정은 이한석 집사가 떠올랐다.“저녁은 장연정 씨 말대로 먹을게요.”박민정이 얘기했다.장연정은 자기가 고영란한테 고자질한 게 통한 줄 알고 의기양양해
장연정이 바로 달려 나왔다.“도련님, 사모님은 주방에서 식사 중입니다. 명령하실 게 있으면 알려주세요.”“주방?”유남준은 약간 의아해했다.“왜 주방에서 먹는 거죠? 오라고 해요.”당근을 먹기 싫어서 혼자 주방에서 먹는 건가?“도련님, 이건 우리의 규칙입니다. 여자는 집안의 남자와 겸상할 수 없어요.”장연정이 대답했다.유남준은 멍해졌다.박윤우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 무슨 시대인데.장연정은 유남준을 위해 음식을 내오면서 말했다.“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께 많은 음식을 준비해 드렸으니까 말이에요.”“그럼 이건...”유남준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장연정이 입을 열었다.“다 제가 준비한 겁니다.”그 순간, 유남준의 표정이 더 굳었다.하지만 그는 반백 살이 된 사람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얘기했다.“박민정을 불러와요. 여기서 먹으라고 해요.”솔직히, 유남준은 박민정이 장연정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건...”장연정은 박민정을 부르러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박윤우는 장연정을 쉽게 무시하고 걸상에서 내려가 주방에 왔다.박민정은 주방의 조그마한 의자에서 쌀밥을 먹고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흰 고기가 가득했다.볶은 게 아니라 다 삶아낸 것이었다. 소금을 제외하면 그 어떤 조미료도 들어가지 않았다.장연정은 삶은 고기가 임산부의 몸에 더 좋고 영양이 더 많다고 했다.간단하게 쌀밥을 몇 입 먹은 박민정은 더 먹지 않았다.박윤우는 눈앞의 광경을 보면서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엄마.”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박윤우를 쳐다보았다.“윤우야, 여긴 왜 왔어. 얼른 가서 밥 먹어.”박윤우는 고개를 젓고 박민정의 앞에 왔다.“엄마, 우리 나가서 먹자.”“안 돼. 영양사 할머니가 여기서 먹으라고 했어. 둘이서 먹어.’박민정은 박윤우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박윤우는 바로 알아듣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엄마, 이건 개도 안 먹을 거야! 엄마가 왜 이런 걸 먹어!”박민정은 박윤우가 이렇게 연기를 잘
박민정이 빠르게 얘기했다.“장연정 씨, 내가 말했잖아요. 움직이면 안 된다고. 남준 씨는 앞이 안 보인다고요! 가구를 다 움직였으니 결국 넘어지잖아요!”장연정은 순간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얼른 반박했다.“사모님이...”하지만 박민정이 장연정의 말을 끊었다. “나는 매번 조심히 한단 말이에요. 의자를 사용하고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는데. 왜 내 말을 안 듣고 위치를 옮기냔 말이에요. 아무리 시어머니 말씀만 듣는 사람이라고 해도 남준 씨도 생각해 주셔야죠.”박윤우가 바로 옆에서 거들었다.“아빠가 넘어지면 책임질 거예요?”장연정은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두 사람의 말에 장연정은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유남준은 두 사람이 연기 중이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까밝히지 않고 박민정이 원하는 대로 얘기했다.“장연정 씨. 돌아가세요. 다시는 오지 마세요.”장연정은 뭐라고 해명하고 싶었으나 1분도 되지 않아 경호원이 와서 장연정을 끌고 나갔다.박민정과 박윤우는 몰래 손뼉을 쳤다.유남준은 기뻐하는 두 사람의 인기척을 눈치채고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그는 입구에 기대에 서서 물었다.“내가 먹을 거, 따로 만들어 줄 수 있어?”모두 당근이 들어간 음식이라서 유남준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내 거 먹을래요?”박민정이 장난을 치며 얘기했다.유남준은 약간 실망했다. 이용할 대로 다 이용하고 이제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건가.유남준은 바로 몸을 돌렸다.그러자 박민정이 그를 불러세웠다.“됐어요, 장난이에요. 셰프한테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놓으라고 했어요.”유남준은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테이블에 다시 앉았다.박민정이 음식을 내와서 그에게 짚어주었다.“됐어요. 많이 먹어요.”거실로 가려고 할 때, 유남준이 입을 열었다.“앞으로 부탁할 게 있으면 바로 얘기해.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 없어.”박민정은 멍하니 있다가 약간 쑥스러워져서 대답했다.“고마워요.”감사 인사를 한 후 그녀는 거실로 가서 테이블과 의자를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본
장연정은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다.윤소현은 장연정을 따로 불러서 얘기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장연정은 빠르게 승낙했다.이튿날.장연정이 없으니 박민정은 기분 좋게 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리고 곡을 쓰고 휴식을 취하며 책도 봤다.지금은 크게 할 일이 없었다. 그저 한수민과의 소송 결과와 다음 주 월요일에 있을 학부모 위원회를 기다릴 뿐이었다. 오후가 되었을 때, 전화 한 통이 박민정의 여유로운 시간을 방해했다.구치소에서 온 전화였는데 한수민이 박민정을 만나고 싶다고 했단다.“알겠어요.”박민정은 전화를 끊고 한 시간 만에 구치소에 도착했다.한수민이 잘 못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보니 옷이 바뀐 것 빼고는 변화가 크게 없었다. 심지어 헤어스타일마저 바뀌었다.“왜 날 찾은 거예요?”박민정이 차갑게 물었다.한수민은 박민정 얼굴의 상처를 보면서 감정 변화 하나 없이 입을 열었다.“얼마면 소송을 취하할 거야?”“당연히 아빠의 유산 전부를 받아야죠.”“장난해? 네 아빠의 유산 절반은 무조건 나한테 줘야 해. 우리는 부부야. 넌 많아봤자 남은 절반을 민호와 나눠 가지는 수밖에 없어.”한수민이 못을 박으며 얘기했다.박민정은 부부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부부? 잊으셨나 본데 바움 그룹은 결혼 전의 재산이에요. 절반을 가져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요. 결혼 후 바움 그룹의 수익 정도만 가져갈 수 있을 거예요.”한수민은 목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꼭 나랑 네 동생을 궁지로 밀어붙여야만 속이 편하니? 난 네 친엄마야! 민호는 네 친동생이고!”박민정을 말로 이기지 못하자 한수민은 감성팔이를 시작했다.“만약 내가 죽으면, 네 가족이 몇 명이나 있을 것 같니. 게다가 네 아빠가 나랑 민호를 그렇게 예뻐했는데, 하늘에서 네 모습을 보면 좋아할 것 같아?”박민정은 무표정으로 한수민의 말을 듣다가 한수민이 다 말했을 때 입을 열었다.“알아요. 윤소현은 당신의 친딸이죠. 저보다 한 살 크죠. 아버지가 얘기했을 때, 두 사람은 결
그러자 비서가 달려와 그녀를 말렸다.“큰 아가씨, 정 대표님께서 먼저 둘째 아가씨한테 직접 요리해 주고 싶다고 했어요. 둘째 아가씨만 탓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그럼 누구를 탓해야 하는데? 거절할 줄도 몰라? 엄마는 원래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았잖아!”윤소현은 일부러 더 크게 화를 냈다.“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우리 엄마한테 저런 일을 시켜본 적이 없어.”비서도 그녀가 정수미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더는 말릴 수 없었다.박민정은 그제야 자신이 맞은 이유를 알고 윤소현의 손을 놨다.“저도 말렸는데 정 대표님께서 계속 오셨어요. 그리고 방금 제가 맞은 건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번에는 참지 않을 겁니다.”윤소현은 날카로운 그녀의 눈빛에 살짝 겁을 먹었다.하여 더 때리는 건 무리인 것 같아 수술실 문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엄마, 제발 일어나요. 이대로 가면 저는 어떡해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정수미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다.그리고 며칠 전에 윤소현은 이미 유언장에도 손을 댔기에 정수미가 죽고 장 변호사까지 처리하기만 하면 장씨 가문의 모든 재산은 다 그녀의 것으로 된다.그러나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한 시간 뒤, 수술실의 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걸어 나오자 윤소현이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는 괜찮나요?”의사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고 윤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간신히 참았다.그러다가 의사가 겨우 입을 뗐다.“지금은 맥박이 돌아왔지만 환자분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혹시 예전에 큰 병을 앓았었나요?”의사의 말에 윤소현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다행히 모두가 지금 정수미한테에 집중되어 있어 그녀의 표정 변화는 보지 못했다.박민정은 정수미가 살았다는 소식에 그제야 마음이 살짝 놓이는 것 같았다.비서는 의사에게 정수미가 지금까지 앓던 병을 모두 알려줬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수미는 수술실에서 밀려 나왔는데 문 어구에서 두
다만 정수미는 최근에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오전 10시가 넘으니 그녀는 더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소파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혹시 저희한테 매일 음식을 가져다주랴, 회사도 관리하랴, 그러면서 몸이 힘들어진 게 아닐까요?”진서연이 걱정스레 물었다.박민정도 마침 걱정되었던 일이라 정수미가 깨나자마자 그녀에게 말했다.“정 대표님, 이제 매일 오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끼리 밥 먹을 수 있잖아요.”그녀의 말에 정수미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졌다.“민정아, 혹시 내가 뭘 잘못했어?”그러자 박민정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단지...”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망설이던 찰나에 진서연이 먼저 말했다.“어떤 마음으로 저희한테 매일 음식을 가져다주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마음만 받을게요. 정 대표님께서 하루가 다르게 안색이 안 좋아지는 걸 보면 분명 많이 피곤할 텐데 돌아가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거든요.”진서연의 말에 정수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전 괜찮아요. 몸은 안 힘든데 아마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봐요.”“안 돼요.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그러자 정수미는 한껏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민정아...”“그만 돌아가서 쉬어요.”아무리 정수미가 자기 친어머니가 아니더라도 노인이 쉬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해서 매일 배달해 주는 모습을 더는 원치 않았다.정수미는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도 자신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래. 그러면 오늘에는 일단 돌아가서 쉬겠는데 괜찮아지면 꼭 다시 올 거야.”말을 마친 뒤 가려고 일어섰는데 몇 걸음 못 가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면서 앞으로 몸이 쏠리게 되었다.깜짝 놀란 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달려갔고 정수미는 다행히 박민정의 몸 위로 떨어지면서 두 사람이 같이 바닥에 쓰러지게 되었다.진서연이 빠르게
정수미는 자신에게 직접 가져다준 우유 한 잔을 보더니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우리 딸, 고마워.”말을 마친 뒤 그녀는 단번에 우유를 다 마셔버렸다.윤소현은 그 모습을 차가운 얼굴로 지켜보다가 컵을 건네받고는 깨끗이 씻어놓았다.“엄마, 제가 재료 손질하는 거라도 도와줄까요?”마침 혼자 하기에는 양이 많다고 생각했던 정수미는 선뜻 그러라고 했다.“그래 주면 고맙지.”말을 마친 뒤 그녀는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아 소파에 앉아 쉬게 되었다.이상하게 최근부터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고 시도 때도 없이 졸렸다.윤소현은 그녀가 주방에서 나가자마자 대충 정리해 주는 척하다가 결국에는 도우미에게 맡겼다.한밤중이 되어서야 정수미는 갑자기 잠에서 깼는데 무심결에 자기 코가 축축해져 있는 걸 발견했다.이때 도우미가 급히 다가오더니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소리쳤다.“사모님, 코피 나요!”정수미는 티슈 한 장을 뽑아 닦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괜찮아.”그러다가 살짝 피곤한 얼굴로 주방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재료들은 다 정리되었어?”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큰 아가씨가 아주 깔끔하게 정리하셨어요.”이 말은 윤소현이 시켰다.그러나 정수미는 도우미의 말에 깊이 감동했다.“내가 민정이한테 진 빚을 소현이한테 떠넘기면 안 되는데.”그리고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이대로는 절대로 잘 수 없을 것 같아 아예 일어나서 아침밥을 만들기 시작했다.그리고 오늘에는 특별히 윤소현에게 전복죽을 끓여줬으나 그녀는 깨나자마자 죽을 보고 차갑게 한마디 했다.“식어서 안 먹을래.”그리고 도우미더러 몽땅 버리라고 했다....정수미는 오늘 아침밥을 많이 해뒀기에 두 어린이에게도 도시락을 하나씩 가져다줬다.“고맙습니다. 그런데 전 필요 없어요.”박예찬은 공손하게 인사라도 했지만 박윤우는 한껏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런 쓰레기 같은 음식은 안 먹을래요.”정수미는 너무 속상했지만 그래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
박민정은 자기 그릇에 가지런히 담긴 하트 모양의 계란 후라이를 보고 마치 바늘로 심장을 찌르듯 아파져 왔다.자신도 예전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음식을 차려줬던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한수민이었다.그러나 매번 돌아온 건 차가운 말들뿐이었다.“겨우 계란 하나로 참 별짓도 많이 하네. 그리고 넌 박씨 가문의 큰딸이지 도우미가 아니야. 창피해 죽겠네.”그 후로부터 박민정은 자신의 노력을 몰라주는 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하여 자신과 비슷한 행동을 하는 정수미를 보고 있자니 또다시 그때의 일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심란해졌다.“민정아, 왜 안 먹어? 맛없어? 네가 먹고 싶은 음식을 나한테 알려주면 내가 배워볼게.”정수미는 한껏 다정하게 말했다.그 모습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먹을게요.”거액의 자산과 정수미가 직접 한 음식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그녀는 당연히 덜 부담스러운 음식을 선택할 것이다. 또한 처음으로 엄마의 사랑이 뭔지 느낄 수 있었다.박민정이 말없이 자신이 한 요리를 먹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정수미는 그제야 젓가락을 들고 같이 먹기 시작했다.그렇게 박민정은 자기 밥을 깨끗이 비웠다.“더 먹지 않을래? 여기 더 있어.”정수미는 그릇에 남은 음식을 그녀 쪽으로 밀어주며 말했다.박민정은 이미 배불렀지만 성의를 봐서 몇 젓가락 더 먹은 뒤 답했다.“배불러요.”오늘 정수미는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분도 좋은 것 같았다.하여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물었다.“내일에는 뭐 해줄까요? 메뉴를 말해주면 제가 배워볼게요.”진서연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빠르게 답했다. “전 닭강정이랑 탕수육 먹고 싶어요!”민수아도 뒤질세라 그녀에게 말했다.“저는 게 요리 먹고 싶어요. 어떻게 해주셔도 다 좋아요.”매일 먹는 배달 음식은 진작에 질려버렸다.정수미의 요리 실력은 거의 호텔 셰프급이였는데 맛있는 건 물론이고 건강하게 느껴졌다.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정수미는 신나
박민정이 사라졌을 무렵 유남준은 정수미와의 모든 협력을 거절했는데 이는 오로지 박민정에게 자신이 화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하여 처음에 박민정이 찾아와서 자신이 친딸이란 사실을 확인해 줬을 때까지도 정수미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엄마의 사랑을 돌려주려고 하니 유남준이 분명 기회를 줄 것 같지 않았다.그런데도 정수미는 갖은 방법을 이용해서 PMJ 그룹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상업적 위험을 제거해 주려 했다.오늘 유남준이 없으니 진서연은 어쩔 수 없이 박민정더러 가보라고 했다.회의실 안.정수미는 떨리는 마음으로 박민정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민정아.”“정 대표님, 안녕하세요.”자신보다 한껏 덤덤한 얼굴의 박민정을 보고 정수미는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의자를 당겨주며 앉으라고 했다.“민정아, 나 PMJ 그룹에 투자하고 싶어.”박민정은 아직 회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되자 이따 저녁에 유남준의 견해는 어떤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그러자 정수미가 재빨리 필기하고 있는 그녀를 말렸다.“적을 필요 없어.”“무슨 뜻이에요?”박민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묻자 정수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손에 지금 적지 않은 자금이 있는데 다 너한테 줄게.”그녀의 말에 박민정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답했다.“괜찮습니다.”“그리 급하게 거절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정수미는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고 또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을 화나게 할까 봐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나도 지금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고 지난번에는 내가 말실수했어. 나도 네가 내 돈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아.”이 사실을 진작에 알아야 했다. 만약 박민정이 진짜 돈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박씨 가문의 재산을 전부 남동생 박민호에게 넘겨주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박민정은 다시 단호
조하랑은 집을 깔끔히 정리한 뒤 너무 힘들어서 침대에 털썩하고 누웠다.이때 도우미가 각종 재료가 듬뿍 들어간 국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사모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어르신도 말씀하셨는데 젊은 사람들은 평소에도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기에 이런 음식으로 많이 보충해야 아이가 빨리 들어선다고 했거든요.”조하랑은 지금 국물만 봐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아니요.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으니까 가져가세요.”“네? 벌써 입덧하나?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닐 텐데요.”도우미의 말에 순간 조하랑은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가 숨고 싶었다.그렇게 도우미를 방에서 내보낸 뒤 그녀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정아.”박민정은 회사에서 한창 업무 내용에 대해 숙지하고 있다가 조하랑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하랑아, 무슨 일이야?”“말하자면 길어.”조하랑은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전부 그녀에게 말해줬다.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할아버지가 그런 수를 썼다고?”“그렇다니까? 나 지금 결혼한 게 너무 후회돼.”조하랑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이상한 일이 한 가지 더 있는데...”“무슨 일?”조하랑은 또다시 자신이 결혼 전날 납치되었던 일에 대해서도 박민정에게 말해줬다.그러자 박민정이 대뜸 그녀에게 되물었다.“그날 저녁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너무 찜찜한게 그날 내가 정신을 잃으면서 분명 그 남자들을 봤는데...”뒷말은 결국 하지 못했다.“이 일은 무조건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어.”박민정은 분명 이 일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걸 느꼈고 또 혹시나 그 남자들이 진짜 다른 나쁜 일을 했으면 어떡하나 싶었다.조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인우 씨도 이미 사람을 보내서 조사하고 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결과가 없는 걸 보면 분명 간단한 일은 아닐 것 같아.”“그래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지. 내가 민기 씨더러 한번 알
조하랑은 힘껏 그를 밀쳐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세 살짜리 애로 보여요?”김인우는 워낙 조건이 뛰어난 사람이니 지금까지 잠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을 리가 없었다.조하랑이 믿지 않자 김인우는 마지못해 진실을 털어놓았다. “몇 년 전에 어떤 일을 겪은 후로 여자에게 더 이상 관심이 생기지 않았어요.”조하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그 뒤로는요?”“그 뒤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정상 남자로 보이기 위해 적지 않은 여자를 만났죠.”조하랑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무슨 일이었는데요?”김인우는 말하기 싫어했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신지 알아요?”조하랑은 김씨 집안에 온 이후 김인우의 부모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 뿐 구체적인 사연은 몰랐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출산 중 양수 색전증으로 돌아가셨어요.”처음엔 가벼운 표정이었던 조하랑은 점점 김인우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김인우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땐 끔찍한 광경만이 남아 있었어요.”조하랑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그럴 줄 알았으면 묻지 않았을 거예요.”김인우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미 오래전 일이니까.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사실 어젯밤이 되어서야 그는 자신이 정상임을 깨달았다.조하랑은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김인우는 그녀가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 못마땅했던지 화제를 돌렸다. “그러니까, 이제 하랑 씨가 나한테 책임져야 돼요.”“네?” 조하랑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책임이요?”“남자의 첫 경험도 책임져야죠. 남자의 청춘은 청춘이 아니에요? 서로 책임지기로 해요. 그게 공평하잖아요.”김인우가 뻔뻔하게 말하자 조하랑은 황당해하며 대꾸했다. “그럴 거면 우리 서로 퉁치죠. 아무도 손해 본 게 없잖아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김인우가 그녀를 붙잡았다.“놔요!”“안 놔요. 하랑 씨가 내 요구를 들어줄 때
“착한 사람이라뇨...” 조하랑은 그 말을 중얼거리며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김인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랑 씨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요.”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몸을 조하랑 쪽으로 더 가까이 움직였다. 조하랑도 어찌된 영문인지 피하지 않았고 그렇게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김인우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붙잡고 조하랑을 안아 올려 어느 노인네의 눈을 피해 은밀한 곳으로 옮겼다. 그 노인네도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거실에 CCTV를 설치하지 않았다.하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김훈은 하인에게 문 너머의 상황을 엿보게 시켰다. 잠시 후, 하인은 기쁜 표정으로 달려왔다. “어르신, 성공했습니다.”“정말인가?” 김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 틀림없어요.” 하인이 확신하자 노인은 마음속 무거운 짐을 덜어낸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편히 잘 수 있겠구나. 자, 우리도 잠이나 자자.”“네, 알겠습니다.”...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조하랑이 눈을 떴을 때 온몸이 쑤셨다. 전날 밤의 모든 기억이 선명했고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어떻게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한 걸까?옆에 누운 김인우는 아직 잠들어 있었고 무의식중에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자요.” 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조하랑은 갑작스러운 친밀함에 익숙하지 않아 김인우를 흔들어 깨웠다. “이거 놔요. 이제 일어나야죠.”김인우는 졸린 눈을 간신히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때리는 거예요?”어젯밤의 일은 분명 그녀도 동의했던 일이었다.조하랑은 얼굴이 붉어졌다. “어젯밤 일은 그냥 사고였어요.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잖아요. 걱정 마요, 책임지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도 예전처럼 지내요.”그녀는 관계를 명확히 하려 애썼지만 김인우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책임질 필요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자는 건가?김인우는 문득 깨달았다. “설마... 처음이
김인우는 이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 이성과 충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조하랑 역시 불편했다. 수년간 솔로로 지낸 그녀도 결코 무감정한 사람이 아니었다.“인우 씨... 지금... ”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머뭇리자 김인우는 뭔가를 깨닫고는 얼른 그녀를 놓았다.“다른 방 좀 살펴보고 올게요.”“그래요.”조하랑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김인우와 거리를 두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조하랑은 점점 더 참기 힘들어졌다.김인우 역시 괴로웠다. 다른 방들을 확인해 보았지만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지친 발걸음으로 다시 거실로 돌아온 김인우는 조하랑과 마주 앉았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말을 건네는 것조차 어려워했다.“구조 요청이라도 할까요?” 조하랑이 드물게 기지를 발휘하자 김인우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요. 아까 확인했는데 핸드폰들이 다 사라졌어요.”“뭐라고요?” 조하랑은 더 깊은 절망에 빠졌다.몸의 열기는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고 김인우를 바라볼 때마다 그의 모든 것이 탐나기 시작했다.김인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상황을 잊기 위해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그럼, 우리 뭐라도 얘기할까요?”“좋아요. 무슨 얘기할까요?”김인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하랑 씨, 강연우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강연우의 이름이 나오자 조하랑의 마음은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금 진정됐다.“학교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 그 사람이 참 잘생겼고 법학과였거든요. 연애 경험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먼저 쫒아다녔어요.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사귀게 됐지 뭐예요.”과거를 떠올리는 조하랑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부드러워졌다.이를 본 김인우는 괜히 질투가 일었다. “그리고 나서는요?”“그냥 연애했죠.” 조하랑은 짧게 답한 뒤 김인우를 바라봤다. “인우 씨는요? 뉴스에서 여자들이랑 많이 엮였던데, 혹시 첫사랑한테 상처라도 받았어요?”김인우는 비웃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요. 내가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