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엄마한테서 지옥으로 가라는 저주를 받는 건 무슨 기분일까. 아마도 칼로 심장을 찔리고 짓밟히는 기분이 아닐까.박민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가슴이 약간 아팠다. 아니, 심하게 아팠다. 이런 고통은 그녀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박민정은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한수민 씨. 지금은 어떻게 감옥에서 남은 생을 보낼지나 생각해요. 그리고 내가 아빠의 유산을 돌려받은 후, 당신과 당신의 딸인 윤소현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나는 윤씨 가문의 모든 것을 알아요. 대부분 바움 그룹의 돈으로 기초를 닦았더군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화를 내는 한수민을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일으켜 떠났다. 박민정이 몇걸음 떼자 뒤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니 한수민이 의자에서 쓰러져 눈을 뒤집으며 아랫배를 꽉 누르고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박민정은 멍하니 한수민을 보면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고 했다.또 아픈 척하는 건가?얼마 있다가 의사가 달려와 한수민을 병원으로 이송했다.박민정은 걸어 나오면서 기분이 복잡해졌다.장명철은 바로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한수민 씨가 너랑 뭐라고 한 거야?”“얼마를 주면 소송을 취하할 건지 물어보던데요.”“은정숙 씨를 죽이고 박 대표님의 모든 유산을 몰래 빼돌렸으면서 소송을 취하하라고? 웃기는 소리네.”장명철은 쭉 한수민을 좋아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형식은 한수민을 사랑했다. 그러다가 죽기 직전에야 정신을 차리고 유산을 박민정에게 물려준 것이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장명철에게 한수민이 아까 발작하면서 쓰러졌다고 했다.“또 아픈 척하는 거야?”장명철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박민정도 몰라서 고개를 저었다.“걱정하지 마. 어떻게 해도 감옥살이는 피할 수 없을 테니까.”장명철은 박민정이 한수민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요즘 조사한 것에 대해 알려주었다.“예전부터 한수민에 대해 조사했었는데 항상 박 대표님의 죽음이
박민정은 장명철에게 앞으로 한수민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보라고 했다. 만약 정말 암 말기라면 박민정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돌아간 후.박민정은 정민기에게 아버지의 교통사고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했다. 장명철은 오른 시간이 지나 많은 증거들이 사라졌다고 했지만 박민정은 진실을 알고 싶었고 정확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모든 일을 마친 후, 박민정은 소파에 쓰러졌다. 아주 힘들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고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어린 시절이 기억났다. 아버지는 자상한 얼굴로 박민정에게 어머니에 관해서 얘기했다. 어머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말이다.박민정은 입안이 씁쓸해졌다. 그녀는 베개를 꼭 그러안았다.그리고 소파에 누운 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잠에 들었다.가정부는 그녀가 자는 것을 보고 담요를 덮어주었다.오늘 박윤우는 돌아오지 않는다. 학교에서 1박2일을 보내는 체험 때문이다.유남준은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고 돌아왔다. 가정부가 낮은 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대표님, 오늘 사모님께서 오후에 돌아오신 후부터 소파에 쭉 누워있다가 이제야 잠에 들었어요. 깨우지 못하겠어요. 하지만 여기서 자면 감기에 걸릴 수 있어요.”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알겠으니 들어가서 쉬어요.”“네.”가정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유남준은 바로 소파 옆으로 걸어가 한번에 박민정을 담요에 감싸 품에 안았다. 그리고 박민정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눕힌 후 샤워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박민정이 갑자기 그의 손을 확 잡았다.“가지 마...”유남준은 약간 놀라서 멍해졌다.‘깬 건가?’그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박민정이 중얼거렸다.“아빠... 나 버리지 마...”유남준은 그제야 박민정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박민정의 목소리는 우는 사람 같았다. 유남준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뺨 위에 눈물 자국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목이 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 옆에
박민정은 멍하니 있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유남준은 그녀가 손을 놓았을 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앞으로 소파에서 자지 마. 침대까지 걷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유남준은 애써 목소리에서 감정을 덜어내려고 했다. 두 사람은 아직 싸우고 있는 단계다. 박민정은 아직 그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자기를 걱정해 준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마워요. 얼른 돌아가 쉬어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유남준은 쉬지 않고 밖에 나와 서다희한데 박민정이 오늘 뭘 했는지, 왜 상태가 좋지 않은지 물었다. 그리고 다시 씻으러 갔다.서다희는 머리가 세게 아팠다. 마침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는데 유남준이 또 일을 시키다니. 나중에 월급을 올려달라고 할 생각이었다.서다희는 직접 조사하지 않고 부하에게 CCTV를 돌려보라고 했다. 그제야 박민정이 한수민을 찾아갔다는 것을 알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았다.유남준은 씻고 나와 침대에 누운 채로 서다희의 대답을 들었다.“대표님, 사모님께서는 오늘 한수민 씨를 만나러 갔다가 싸우고 오셨습니다. 한수민 씨는 화가 나서 발작하여 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모님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눴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한수민 씨에 관한 내용일 가능성이 큽니다.”서다희는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유남준이 입을 열려는데 서다희 옆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그 대표님 너무... 변태 같아. 12시가 됐는데 계속 일을 시켜? 관심이 부족한 거 아니야? 이런 시간에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사랑하는 일을 해야지...’이윽고 유남준은 “쉿”하는 소리를 들었다.유남준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비서의 연애 현장에 이런 식으로 참여하게 될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그날 밤 잠에 들지 못했다. 그는 박민정을 품에 꽉 안고 놓아주지 않고 싶었다.하지만 오늘 박민정이 잠에 들고 악몽을 꾸고 눈물까지 흘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약해졌다.
박민정은 학부모들과 학부모 위원회의 얘기를 꺼낸 다음부터 그들의 움직임을 쭉 관찰했다.분명 그날 밤에는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이튿날에는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인스타그램을 언팔로우하기도 했다.심상치 않은 행동에 박민정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내일이면 월요일이다. 곧 새로운 학부모 위원회 회장을 선거할 텐데, 학부모들이 갑자기 말을 바꾸지는 않을까?박민정은 시험 삼아 한 학부모에게 문자를 보내 가방이 어떠냐고 물었다.한참 있다가 그 학부모가 대답했다.[어머나, 죄송해요. 이 가방은 나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한 번만 들고 나갔는데 이제는 안 들고 나갈 것 같네요.]박민정은 다른 학부모한테도 문자를 했다. 그들은 물건이 별로라고 하거나 혹은 아직 안 써봤다고 둘러댔다.박민정은 내일 이 사람들이 분명 말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마도 누군가가 최현아한테 이 사실을 알린 것이 틀림없다.박민정은 미간을 짓눌렀다. 이번은 확실히 그녀가 실수했다.이 사람들이 처음 보는 박민정 때문에 최현아를 배신할 거라고 생각한 게 문제였다.유남준은 간밤 자지 못해 아주 늦게 깨어났다.박민정은 유남준을 보면서 물었다.“이제야 깼어요?”유남준은 보통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늦어도 일곱 시에는 일어나던 그가 오늘은 아홉 시 반에 일어났다.“아침에 할 일이 없어서.”어젯밤 찬물로 샤워했기 때문인지 지금 감기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그는 박민정의 옆에 가서 앉았다.“밥은 먹었어?”“네. 먹었어요. 당신도 얼른 먹어요.”“입맛이 없어. 나가서 좀 걷자.”유남준이 얘기했다.아침을 먹은 지 얼마 안 되는 박민정은 산책을 하자는 유남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나름 어제저녁 옆에 있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랄까.“그래요.”잠시 학부모의 일은 접어두고 유남준과 함께 나가 걷기로 했다.밖에서는 시원한 바람에 꽃향기가 섞여서 불어왔다. 곧 봄이 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박민정은 옷을 여몄다.“올해는
이렇게 보면 학부모들이 박민정을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박민정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이때 서다희가 또 얘기했다.“하지만 투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다 날리게 되어있어요. 며칠 못 버틸 겁니다. 사모님, 혹시 유치원에 친한 학부모가 있으면 절대 투자하지 말라고 말려야 합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그래요? 확실해요?”서다희가 대답하기 전에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유성혁이 하려는 공동구매는 주요하게 채소나 육류야. 하지만 이런 건 신선하게 저장하기도 힘들고 운비도 많이 들지. 지금 많은 회사들이 유성혁과 경쟁하고 있어. 말이 경쟁이지, 사실은 돈을 써서 소비자들에게 낮은 가격을 제공해 시장을 빨리 점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다른 회사들의 시장까지 먹어치울 수 있거든.”그는 흠칫하다가 결국 그의 회사도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을 얘기하지 않았다.채소와 육류는 사람들의 생활과 연관이 된다. 이렇게 큰 시장에서 누가 먼저 우세를 점한다면, 다른 회사들은 거의 희망이 없었다.박민정도 요새 배달을 시킬 때 채소와 육류의 공동구매가 아주 가격이 낮다는 것을 발견했다.“요새 공동구매가 핫한 모양인데, 신선도를 유지해야하는 이런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아요.”박민정은 자기의 생각을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약간 놀랐다. 그는 박민정이 그것까지 알 줄은 몰랐다.“그래. 오래 못가지.”서다희는 깜짝 놀랐다.유남준이 박민정의 말에 동의하다니. 그렇다면 왜 굳이 밑지면서까지 유성혁과 경쟁하는 거지?이 프로젝트에 적지 않은 돈을 썼다. 만약 돈을 벌지 못한다면 그냥 돈을 바닥에 던지는 것과 같다.“예찬이 유치원에서 내일 학부모 위원회의 회장을 선거해요. 나도 참가할 거예요. 서다희 씨, 이 업계에 관한 자료를 분석해서 나한테 줄 수 있어요?”박민정은 아까 서다희가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이미 자료 분석을 끝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 자료를 들고 다른 학부모들에게 최현아의 사업
지원 엄마는 약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박민정이 걸어오자 약간 허를 찔린 것처럼 안절부절 못했다.“예찬 엄마, 이렇게 일찍 왔어요?”“네. 오늘 학부모 위원회 회장 선거잖아요. 당연히 일찍 와야죠. 날 투표해준다고 했잖아요.”“당연하죠.”지원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폈다.어차피 투표는 무기명이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학교 회의실에 도착한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러다 박민정이 들어오자 다들 갑자기 박민정의 시선을 피하면서 박민정을 못 본 것처럼 했다.박민정은 신경 쓰지 않았다.조금만 기다리면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니까.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도한 엄마가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예찬 엄마, 왔어요?”“네.”박민정이 웃어보였다.도한 엄마도 지원 엄마와 같은 사람인지, 박민정을 알 수 없었다.도한 엄마는 그녀를 끌고 가서 낮은 소리로 얘기했다.“예찬 엄마, 오늘 그냥 선거에 참가하지 마요.”박민정은 도한 엄마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왜요?”도한 엄마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제가 일찍 와서 들었는데 다들 최현아 씨한테 투표할 거라고 했어요... 아마도 약속한 것 같아요. 만약 경선에 참가한다면...”도한 엄마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박민정이 물었다.“나를 선거하는 사람이 적어서 내가 창피당할까 봐 그래요?”도한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은 그제야 도한 엄마가 진심으로 그녀를 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걱정하지 마요. 창피한 건 괜찮아요. 하지만 경선을 포기하면 그거야 말로 가장 창피한 일이겠죠. 내 아들을 위해서 한번 노력해 볼 거예요.”박민정은 어젯밤 예찬이한테 친구들과 선생님이 여전히 그를 무시하냐고 물었다.예찬이는 선생님이 바뀐 이후로 많이 나아졌지만 친구들은 여전히 그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자기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박민정은 박예찬이 그렇게 말하는게 박민정이 걱정할까 봐서라는 것을 알았다.그렇게 어린 아이가 어떻게 친구들의 무시를 견
이 유치원에서 학부모 위원회의 회장은 전체 학년을 포함한 회장이라 다른 반의 학부모 위원회 멤버도 참석한다.지난번 박민정은 몇몇 사람을 알게 되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그들 중에서 집에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최현아에게 비밀리에 협력 제안을 받았었다.이는 도한 엄마가 다른 학부모들이 배신한 것을 전혀 몰랐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야 우연히 듣게 되었다.그녀 집안은 파산 직전이었기 때문에 최현아가 그녀를 찾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최현아는 돈 없는 집안의 투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신임 회장 선출이 시작되기 전 최현아는 박민정 앞으로 다가가고는 공개적으로 도발했다.“동서, 장애인이 학부모 위원회 회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아?”그녀는 박민정이 착용한 보청기를 가리키며 말했다.“만약 다른 사람이 발언할 때 보청기가 고장 나면 어쩔 건데? 설마 우리더러 새 보청기를 바꿀 때까지 기다리게 할 건 아니지?”박민정은 그녀의 도발에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반면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했다.“장애인보다 심보가 고약한 사람이 학부모 위원회 회장이 되는 게 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 학부모 위원회는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데 심보가 고약한 사람은 아이를 해치려고만 할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무슨 소리야? 분명 네 아들이 먼저 우리 지훈이를 해쳤잖아!”최현아는 벌컥 역정을 냈다.박민정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도대체 누가 누굴 해치려고 했는지 형님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유지훈이 친구를 데리고 윤우 집에 찾아가서 복수를 시도했는데 최현아는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더 부추겼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최현아는 박민정과 더 논쟁하려 했지만 선생님과 원장이 다가와 그녀를 말려 일단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원장이 도착한 후 현장에 있는 학부모 위원회 멤버들에게 작년 아이들의 성장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학부모 위원회 회장을 선출하는 투표를
박민정은 스테이지 위에서 다른 학부모들의 무례한 태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저는 예찬이 엄마, 박민정입니다. 원장님께서 이미 소개해 주셨으니 다시 자기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학부모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박민정을 무시했다.도한 엄마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 해서든 박민정을 막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지금 박민정은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니 말이다.박민정은 이런 상황에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USB를 꺼냈다.“원장님, 혹시 이걸 스크린에 띄워주실 수 있을까요?”원장은 그 말을 들은 후 바로 그녀를 도와 내용을 스크린에 띄우려 했다.거기에 바로 관심이 쏠린 일부 학부모들은 박민정을 비웃기 시작했다.“준비는 철저하게 했네. PPT라도 보여줄 건가 봐?”“준비를 그렇게 철저하게 하면 뭐해? 회장이 되려면 PPT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걸로는 부족할 텐데.”“나도 저렇게 돈이 많았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았지. 아들을 아예 다른 학교로 보냈을 거야.”최현아는 주변 학부모들이 박민정을 비웃는 걸 보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박민정도 참 멍청하네. 일반 학교라면 학부모 위원회 회장은 도움이 되기 위해 다양한 능력을 갖추어야 하겠지만 여기는 일반 학교가 아니라고. 내가 회장이 되면 이런 일을 하나 똑똑히 봐. 난 회장의 권력만 누릴 거라고.’다들 박민정이 어떻게 망신을 당할지 기대하고 있을 때 스크린에 USB 내용이 떴다. PPT가 아닌 재무제표였다.“이게 뭐야?”누군가 재무제표에 적힌 법인이 유성혁인 걸 발견했다.“유성혁 씨 회사 재무제표인 것 같은데요?”누군가가 말했다.최현아는 순간 당황했다.박민정은 천천히 재무제표를 확대했는데 특별히 손실 부분을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해 유성혁의 회사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모든 사람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했다.“박민정, 지금 뭐 하는 거야?”최현아가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물었다.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들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