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을 밟으며 걸어가는 세 사람의 모습은 단란한 한 가족처럼 보였다.연지석한테 손을 잡힌 박민정은 손바닥에서 땀이 삐질삐질 났다.드디어 레스토랑에 도착해 밥 먹을 때가 되어서야 연지석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윤우는 두 사람한테 단둘이 지낼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웨이터에게 화장실로 데려가달라고 했다.윤우가 떠나자마자 박민정은 즉시 사과를 건넸다.“정말 미안해. 윤우가 한 번도 아빠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래.”결혼도 안 했는데 남한테 아빠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기분 나쁠 수가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연지석은 개의치 않았다.“난 윤우가 저러는 게 좋은데.”박민정은 그제야 안심했다. 윤우의 얘기가 일단락되자 연지석은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너랑 유남준이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말이 튀어나오고 나서 그는 금방 후회했다. 그는 이런 걸 물을 자격이 없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의 말을 깊게 생각 안 하고, 전에 이혼하기 위해 법정에서 바람났다고 하며 유남준을 위협했던 일과 고영란이 자기를 협박했다는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누구랑 바람 나?”연지석은 요점을 꼬집어 물었다.박민정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귀까지 빨개졌다.“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어. 유남준은 너랑 인 줄로 알 거야.”너무 긴장하여 저도 몰래 테이블에 놓인 손끝을 살짝 그러쥐었다. 연지석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눈가엔 감출 수 없는 빛이 반짝였다.“그거 잘됐네. 마침 그 핑계로 오늘 윤우 아빠 노릇 톡톡히 할 수 있겠어.”화제를 더 이어나가기 부끄러운 박민정은 벌떡 일어섰다.“윤우가 왜 아직도 안 돌아오지? 내가 한 번 가서 찾아봐야겠다.”윤우는 계속 문어귀에 숨어 있었다. 둘의 대화가 끝나가는 걸 보자 그는 화장실에 갔다 오는 척하며 걸어왔다.“아빠, 엄마. 나 돌아왔어.”아이가 있으니 분위기가 다시금 훈훈해졌다.식사를 마치자 윤우는 또 게임 센터에 가자고 졸랐다.게임 센터에는 젊은 커플들도 꽤 많고
윤우가 어리광이 많은 편이지만 이렇게 떼를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병에 걸려 몸이 아픈 데다가 어쩌다 갖고 싶은 인형이 하나 생겼는데 가지지 못하니 서러울 만했다.“울지 마, 윤우야. 엄마가 다른 방도를 생각해 볼게.”연지석이 때마침 입을 열었다.“윤우야, 나랑 엄마랑 지금 가서 인형 따내 줄게. 그럼 되지?”그 말에 윤우는 울음을 뚝 그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지석을 쳐다봤다.“응.”윤우는 또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엄마, 아빠랑 꼭 힘내서 인형 따내야 해.”박민정은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세 사람은 이벤트를 하는 코너에 가서 참여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열 팀의 커플이 신청하자 직원이 게임 룰에 대해 설명했다.게임은 아주 간단한 형식이었다. 남녀가 마주 보고 서서 눈을 가리고 나면 직원이 줄에 매달린 어떠한 물건을 위로부터 서서히 내리고 커플은 몸으로 그 물건을 고정해 떨어뜨리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손을 쓰는 건 반칙이었다.연지석과 박민정은 무대 위로 올라갔고 다른 커플들도 다 준비를 마쳤다. 직원이 첫 번째 물건인 풍선을 꺼냈다.첫 번째 라운드라 그런지 난이도가 꽤 낮은 편이어서 몸을 조금만 앞으로 기울이면 떨어뜨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천으로 눈을 가린 후 사회자가 시작을 알렸다.모든 참가자들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끈에 매여있는 풍선은 손쉽게 몸으로 받을 수 있었다.윤우가 무대 아래에서 높은 소리로 그들을 응원했다.“엄마, 아빠, 화이팅!”박민정은 윤우의 인형을 원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떠올리며 꼭 상품을 따내리라 마음먹었다.연이어 여러 개의 부피가 조금 큰 물건들을 그들은 모두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신체 접촉이 있었다.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두 팀이 남았다.사회자가 마지막 물건을 꺼내 들었는데 그건 종이 한 장이었다.시작, 하는 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은 또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느낌으로 A4용지 같은 물건이 그녀의 볼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녀는 연
연지석이 이번에 돌아온 건 박민정 때문만이 아니라 과거 유남준한테 빼앗긴 그의 자산을 되찾기 위해서이기도 했다.지금 유앤케이의 대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어차피 유남준이 아니니 그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서다희는 연지석이 이 정도로 겁 없이 날뛸 줄 몰랐다.기억을 잃은 유남준에게 연지석이 방금 한 말을 전달하지는 않겠지만 속으로 유남준이현실을 빨리 깨닫기를 바랐다....유남준은 시각 장애인 용 컴퓨터를 사용하며 박민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예전 같았으면 벌써 돌아왔을 시간인데, 저녁 8시가 되어가도록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그때 곁에 놓인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유남준은 다급히 메시지를 확인하며 음성을 재생했다.“유 대표님, 전 연지석인데요. 미리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민정이가 오늘 저랑 줄곧 같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좀 늦게 돌아갈 거예요.”다 듣고 난 유남준은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더는 일할 정신이 없었다. 그는 바로 일어나 집을 나섰다.밖에는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유남준은 미간을 살짝 구긴 채 외로이 눈속에 서 있었다.그는 맹인용 휴대전화를 꺼내 박민정한테 전화를 걸었다.전화번호는 그녀가 알지 못한 새에 남몰래 저장해둔 것이다.다른 한 편.박민정은 운전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윤우랑 늦게까지 놀아주느라 아직도 집에 도착하지 못하였다.흩날리는 눈보라에 시선이 가려져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고 또 길이 미끄러워 아주 천천히 운전하는 중이었다.전화벨이 울렸다.그녀는 누군지 보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디야?”유남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으로부터 들려왔다.박민정은 이상한 낌새를 차리지 못하고 그저 묻는 말에 대답했다.“돌아가는 길이요.”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차가 갑자기 미끄러졌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탓에 차 머리가 엉뚱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펑!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차는 길가에 있는 가로수를 들이받고 에어백이 터져나왔다.박민정은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듯한 차디찬 손이 유남준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유남준은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차가워서가 아니라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는 느낌 때문이었다.박민정의 다른 한 손은 놓을 데가 마땅치 않아 갈 곳을 찾아 헤매다 그의 뺨에 실수로 닿게 되었는데 유남준의 얼굴은 지금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남준 씨 지금 열 나요.”그녀는 온몸의 기운이 전부 빠져 축 처진 채로 겨우 말을 꺼냈다. 이 추운 날에 얼굴이 불덩이 같으니 당연히 열이 났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붉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목울대는 아래위로 살짝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어젯밤 한 얘기는 늘 유효해.”박민정은 그의 입술이 벌렸다 닫혔다 하는 것을 보며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네네.”유남준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 은정숙이 나와서 둘을 보더니 얼른 수건을 갖다주며 물었다.“왜 인제야 돌아온 거야?”유남준은 그 수건을 건네받아 박민정의 몸에 있는 눈을 털어줬다.몸이 얼어붙어 목각처럼 굳었지만 박민정은 은정숙을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다.“아줌마,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 제가 오늘 좀 늦게 돌아왔는데 오는 도중에 차가 고장이 났어요.”그녀는 귀가 안 들린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그래. 이따가 뜨끈한 물에 목욕 좀 하려무나.”은정숙은 쉬러 가지 않고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들어가 박민정한테 줄 생강차를 만들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을 방으로 데려와 소파에 앉히고 갈아입을 옷 몇 벌을 가져다 놓았다.“내가 욕조에 물 준비해 놓을게. 너 옷부터 벗고 이따 목욕 다 하고 나서 이걸로 갈아입어.”박민정은 그의 입 모양을 보고 그가 옷을 갈아입으러 가겠다는 줄 알았다.“네, 당신도 어서 갈아입으러 가요.”유남준은 약간 잠겨 허스키한 목소리로 응, 하며 대답했다.그는 옷을 갈아입지 않고 가운을 가지고 박민정의 방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박민정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가 제 방에서 씻고 있는 줄도 몰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채 분위기가 다소 굳어져 있었다.그러는 와중에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왜 안 들린다고 말을 안 했어?”박민정은 고개를 숙이고 약간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집에 돌아오면 나을 줄 알았어요.”유남준은 손을 들어 그녀를 만지려고 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갈 길을 잃은 손이 허공에 뻗어있었다.“민정아, 너 오늘 누구랑 같이 있었어?”박민정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또 날 미행했어요?”그가 기억을 잃기 전에 가장 자주 했던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유남준은 목이 메었다. 또라니?그가 언제 또 미행을 했었다고?무어라 해명을 하기도 전에 은정숙의 방문이 열리며 의사가 걸어 나왔다.의사는 환자가 과도하게 흥분하여 발생한 일시적 현상이니 앞으로 마음을 편히 가라앉히고 병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서다희도 방 안에서 나오며 박민정을 쳐다봤다.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로 인해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그러나 유남준이 있는 자리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표님, 그럼 저흰 먼저 돌아가겠습니다.”“어.”서다희는 의사를 데리고 떠나갔다. 이제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오늘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아줌마한테 의사를 찾아 준 것도.”박민정이 운을 뗐다. 어쨌든 미행과 이번 건은 서로 다른 일이니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우린 부부야. 고마워할 거 없어.”유남준이 말하며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그리고 나, 사람 붙여서 너 미행한 적 없어.”박민정은 믿지 않았다.“다음 달이면 설날인데, 내가 내일 데려다줄 테니 남준 씨는 두원 별장으로 가 있어요.”의사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저 그리 하라는 거였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꽉 붙잡았다.“그럼 넌?”“난 집에서 아줌마를 돌봐야 돼요.”유남준은 순간 가슴이 칼로 도려내는 듯이 아팠다.“민정아, 네가 나랑 결혼한 이유가 날 사랑해서였어?”그의 기억에 그
살길을 열어준다고?박민정의 입가에 냉소가 흘러나왔다. 이런 말이 친어머니란 사람이 할 소리가 맞는지...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았다.“그 돈은 내 능력으로 번 거니까 갖고 싶으면 어디 능력껏 해보세요. 그딴 말로 나를 겁 줄 생각이나 하지 마시고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장명철한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보아하니 이번 일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진주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았다.그녀는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서 은정숙의 방으로 갔다.은정숙은 깨어있었고 어젯밤의 일이 오해였다는 걸 알리자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유남준이 진짜 변한 거야?”“저도 모르겠어요. 아줌마는 푹 쉬어요, 다른 걱정 하지 마시고요.”“응, 그래.”은정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박민정은 은정숙에게 친구한테 일이 좀 생겨서 돌봐 주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그래, 어서 가봐.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챙겨.”그러나 은정숙과 유남준만 집에 남겨 두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내가 간병인 아주머니 한 분 모셔 올게요.”싫다고 하면 박민정이 시름을 놓지 못할 걸 알고 은정숙은 고개를 주억거렸다.“그래, 알았다.”박민정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주방 내 식탁에는 이미 아침이 놓여있었고 그 밑에 쪽지가 한 장 깔려있었다.쪽지에는 유남준의 멋진 손 글씨가 쓰여 있었다.“나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하지만 사실 유남준은 병원에 간 게 아니라 서다희의 차를 타고 두원 별장으로 간 것이었다.두원 별장 내에 일부 기밀문서들이 있다고 서다희가 얘기했다....다른 한편, 공관에는 한수민과 이지원이 거실에 앉아있었다.현재의 한수민은 더 이상 예전의 그 망한 재벌 집의 사모님이 아니었다.5년 전, 그녀는 아들 박민호를 데리고 해외로 도주한 후 무슨 수를 부렸는지 현지에 있는 한 교포 재벌과 결혼하게 되어, 지금은 진주시 부유층 사모님들이 친분을 쌓으려고 애를 쓰는 인물이
밤새 큰 눈이 내려 두원 별장 안팎에는 눈을 쓸고 있는 사용인들로 가득했다. 유남준이 앉은 차는 별장밖에 세워져 있었다. 한참 뒤, 서다희는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별장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그는 유남우였다.서다희는 즉시 그 사실을 유남준한테 알리며 물었다.“지금 들어갈까요?”별장밖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유남준이 이때 들어가면 유남우의 신분은 단번에 들통날 것이다.며칠 전부터 유남우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잠시 유씨 가문 옛 저택에 머물렀었는데 이렇게 금방 두원 별장으로 들어와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유남준의 신분을 대체하고 회사를 차지하더니 이젠 별장까지. 다음엔 가족과 와이프까지 뺏을 셈인가.“급할 거 없어.”유남준의 차분한 목소리가 서다희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그는 차를 우선 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유남준의 곁에 오래 있었지만 그도 동생이 있단 얘기를 듣기만 했지, 직접 두 눈으로 실물을 보게 되는 건 처음이었다.유남우는 정말로 유남준과 똑같이 생겼다. 옷차림마저 똑같다면 아마 누가 누군지 아무도 못 알아볼 것이다.하지만 유남우는 필경 유남준의 친동생이고, 그가 회사를 맡는 것이 그 무능한 사촌 형 유성혁이 맡는 것보다 열 배는 나았다.기다리고 있는 동안, 승합차 한 대가 앞을 지나갔다.그 안에 앉은 사람이 이지원이라는 걸 서다희는 보지 못했다....두원 별장 안에서 유남우는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박민정이 쓰던 방에 들어와서 침대맡에 덮어 놓은 사진 액자를 발견했다. 가늘고 긴 손으로 그 액자를 돌려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이건 박민정과 유남준이 같이 찍은 사진인데 하얀 드레스를 입은 박민정이 정장 차림의 유남준의 곁에서 조심스러운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이 사진은 두 사람이 약혼식을 올릴 때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둘은 웨딩사진을 찍은 적이 없어 박민정은 줄곧 이 사진을 웨딩사진처럼 고이 간직해왔다.그러다 이혼을 결정하고 나서 이 사진을 여기에 남겨둔 것이다.유남우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이지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눈앞의 남자를 쳐다봤다. 두 손은 꼭 그러쥔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박민정이 임수호와 같이 라이브 영상을 발표하여 그녀의 명예를 완전 바닥으로 끌어내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녀가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그런데 도리어 박민정한테 찾아가서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내키지 않았지만 유남준의 가차 없는 수단을 생각하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가서 사과할게요.”이지원은 두원 별장에서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얼이 빠져서 떠나갔다.그녀가 떠나자 홍주영은 의문을 내비쳤다.“도련님, 왜 저 여자한테 사과를 강요하셨어요? 큰 도련님과는 서로 사이가 안 좋으신거 아닌가요? 왜 그의 아내를 감싸는 거죠?”말을 끝내자마자 홍주영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항상 온화한 얼굴만 보이던 유남우가 그녀를 조금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주영아, 네가 모르는 게 있어.”홍주영은 유남우와 박민정의 과거에 대해 모른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더 캐물으면 안 될 거 같은 육감이 들었다.“그럼 제가 사람을 붙여 이지원이 박민정 씨한테 사과하는 걸 감시하도록 할게요.”“응.”두 사람은 두원 별장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그들이 떠나자 유남준과 서다희는 비밀통로를 거쳐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유남준이 만들라고 한 이 비밀통로가 이럴 때 쓰일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기억을 잃었지만 두원 별장에 들어오고 나서 마치 사라졌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처럼 기밀문서를 숨겨둔 장소를 대번에 생각해 냈다. 그리하여 금세 문서를 찾게 되었다.돌아가는 길에 그는 그것을 서다희한테 넘겨주었다.서다희는 깜짝 놀라하며 말했다.“이건 대표님이 직접 열어보시는 게 좋겠어요.”“난 네가 날 배신 안 할 거라 믿어.”“네.”서다희는 그제야 서류를 열어보았다.몇 페이지 대충 봤을 뿐인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실제로 갖고 있는 유남준의 개인 자산은 겉에 드러난 것보다 비교할 수 없게 많았고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오준수의 엄마, 차현영이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울먹거리며 물었다.“준수야, 대체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왜 업체들이 갑자기 우리더러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데?”오준수는 하룻밤 사이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상태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엄마, 우리 이제 끝난 것 같아요.”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이천애도 마음이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아무리 눈치 없다고 해도 오씨 집안이 진짜 큰일 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차현영이 아침 댓바람부터 이렇게 찾아와 울부짖지도 않았을 것이다.집에는 오직 오성훈만 아무 걱정도 없이 쿨쿨 자고 있었다.차현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떻게 된 건지 빨리 말해. 누구한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야?”오준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에 대해 차현영에게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대뜸 오준수를 꾸짖기 시작했다.“이 멍청한 놈, 그때 그렇게 이혼하지 말라고 뜯어말렸는데도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내더니. 손씨 가문 딸이면 우리 가문에도 얼마나 득이 되고 좋아? 하필이면 아무 쓸모도 없는 모델을 데려와서는.”“이천애는 그냥 우리 집안이랑 안 맞는 여자야.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회사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는 것 좀 봐, 이제 어떡하면 좋지?”“지금 당장 연서한테 가서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사과해!”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보니 이천애가 구석에서 몰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여우 같은 계집애, 우리 집에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꺼지지 못해?”이천애는 오랜만에 집에 온 거라 이대로 순순히 돌아가기 싫었다.“어머님, 아무리 그래도 제가 성훈이 친엄마인데 아이 앞에서 굳이 이런 식으로 저를 대해야겠어요?”“그나마 성훈이가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진작에 널 밖으로 끌어냈어.”그러다가 차현영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오준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따 사과하러 갈 때 천애도 같이 데려가. 어
오준수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설마요? 혹시 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한 게 맞아요? 전 오현웅 씨의 아들, 오준수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정 대표님과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저를 젊은 사람이 능력까지 갖췄다고 칭찬도 했었다고요.”순간 경호원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욱 살벌해졌다.“계속 여기서 소란 피우면 어쩔 수 없이 저희가 손을 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그러나 오준수는 이대로 가기 싫었다. 막무가내로 병실 안을 향해 달려던 이때, 그와 그의 비서는 몇 명의 경호원에 의해 보기 좋게 쫓겨났다.그렇게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그의 얼굴에 울긋불긋 멍이 든 모습을 본 이천애가 깜짝 놀라 물었다.“오빠, 얼굴이 왜 이래? 누구한테 맞았어? 누가 감히 오빠를 때렸는데?”이천애의 쏟아지는 물음에 오준수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꺼져!”그러자 이천애도 슬슬 기분 나빠지기 시작했다.“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예전 같았으면 금방에라도 달려가 그녀를 달래줬을 텐데 지금 이천애를 보면 자꾸 손연서만 생각났다.“나한테 도움도 안 되는 게, 왜 쓸데없이 연서한테 시비 걸었어? 안 그랬으면 내가 이혼할 일도 없었잖아!”이혼하지만 않았으면 지금 정씨 가문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의 말에 이천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손연서랑 이혼하길 잘했다고 말했던 사람인데 말이다.“오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그녀가 다시 차분하게 되묻자 오준수는 애써 화를 억누르고 오늘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모조리 말해줬다.이천애는 그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연서 씨가 어떻게 지엔 그룹의 대표랑 친구 사이일 수가 있죠? 그리고 그 박 대표라는 사람은 고작 친구 하나 때문에 회사의 이익도 고려하지 않는대요? 우리가 어떤 가문인지 아직 잘 모르는 게 분명해요.”그러나 오준수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지엔 그룹과 같은 대기업은 오씨 가문과 계약해도 그만, 안 해도 아무 손해가 없었기 때문이
그러자 손연서가 느긋하게 하품하며 답했다.“응, 그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오준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다시 설득했다.“연서야, 만약 네가 박민정 씨한테 우리랑 재계약할 수 있도록 한 마디만 말해주면 내가 당장 너랑 재혼해 줄게.”그 말에 손연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자 오준수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왜 웃어?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손연서는 한참 웃다가 겨우 멈추고는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저기요, 오준수 씨? 설마 지금 내가 그쪽이랑 재혼하고 싶어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분명히 말하는데 난 당신을 사랑한 적도 없고 재혼도 하기 싫어. 난 그저 당신이 처참하게 당하는 꼴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기대해 봐. 이제부터 시작이니까.”말을 마치자마자 손연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오준수는 또다시 일방적으로 대화가 단절되자 화도 나는 한편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러면서 예전에 엄마 말을 듣지 않고 기어코 손연서와 이혼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누가 손연서한테 이런 황금 동아줄과 같은 친구가 있을 줄 알았단 말인가.“오 대표님, 사모님께서 뭐라고 하나요?”비서가 조심스레 묻자 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모님은 무슨, 이혼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사모님이야.”“내가 고작 이런 여자한테 당할 줄 알아? 지금 당장 박민정 씨가 어디 있는지 알아봐. 내가 직접 만나러 가야겠어.”“네.”말을 마치자마자 비서는 사무실을 나갔다.그리고 손쉽게 박민정은 지금 정수미와 같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그렇게 오준수는 여러 가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선물을 준비한 뒤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안.박민정은 마침 손연서와 통화 중이었다.“민정 씨, 너무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 제대로 그 사람 골탕 먹였거든요. 그리고 뻔뻔스럽게 저랑 재혼하자는 거 있죠?”그러자 박민정이 눈살을 찌푸리고 답했다.“그래도 아주 멍청한 사람은 아니
오준수는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지엔 그룹 부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부사장님, 여태껏 저희랑 잘 지내왔으면서 이번 건은 왜 갑자기 취소한다는 걸까요?”이때 수화기 너머에서 한껏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굴 건드렸는지 아직도 몰라요?”오준수는 당연히 몰랐다.“저는 건드린 적이 없는데요?”한껏 주눅이 든 목소리는 전혀 오준수답지 않았다.부사장도 이처럼 멍청한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이제는 측은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지엔 그룹의 새 대표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나요?”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느라 회사 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한때, 그의 아버지 오현웅은 모든 일을 빈틈없이 깔끔하게 처리했던 사람이라 오준수가 이런 자잘한 일까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작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부담이 오준수 한 사람에게 떠넘겨지게 되었다.오준수가 다급히 비서에게 묻자 비서는 현재 신임 대표는 정수미의 딸인 박민정이라고 알려줬다.“박민정...”오준수는 왠지 귀에 익은 듯한 이름을 계속 곱씹어 봤지만 정확하게 그녀가 누구였던지 기억나지 않았다.이때, 옆에 있던 비서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손연서 씨 친구입니다.”순간 오준수는 온몸이 굳어졌다.애써 정신을 차리고 수화기에 대고 대답하려고 보니 상대방 쪽에서는 이미 전화를 끊어버린 상태였다.지엔 그룹 부사장은 지금 오준수와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오준수는 끊어진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왜 그걸 잊어버렸지?”그러면서 머리를 몇 번 세게 두드렸다.“연서가 지엔 그룹의 대표랑 친구 사이라고? 어쩐지 우리랑 갑자기 계약을 취소하더니 외부에도 우리랑 계약하지 말라고 했네.”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오 대표님, 사모님한테 빨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아까까지 손연서라고 이름을 부르던 비서도 눈치껏 사모님이라고 불렀다.그 의미를 눈치챈 오준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손연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신호음만 들릴 뿐이었다.“
옆에 있던 애인이 맞장구쳤다.“손연서 같은 여자, 설령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낳긴 힘들었을걸?”그러곤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오빠,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오씨 가문의 대를 이었으니까.”그들이 낳은 아들, 성훈이는 이미 포동포동 살이 올라 커다란 덩치가 되어 있었다.손연서가 아이를 돌볼 때는 건강한 식습관을 신경 써서 관리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였다.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오냐오냐 자랐다. 오성훈은 기름진 음식을 입안 가득 우겨넣으며 거칠게 내뱉었다.“손연서 그 여자, 진짜 재수 없어요. 더러운 년이에요.”이런 말투는 모두 엄마를 따라 배운 것이었다.하지만 오준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다시 들었다.온 가족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했으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하인이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오준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는데 비서였다.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뭔데?”“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엔 그룹에서 저희 그룹과의 모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수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뭐? 무슨 헛소리야? 지엔 그룹과의 계약은 최소 5~6년은 남았어! 갑자기 취소될 리가 없잖아!”그동안 그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엔 그룹과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든다고?비서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또...”그러나 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오준수는 불길한 예감에 다급하게 다그쳤다.“또 뭐가 있는데?”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지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씨 가문과 협력하는 기업은 곧 정씨 가문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요.”이 말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오준수의 머릿속
손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민정 씨,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연서 씨도 도와줬잖아요.”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과거 그녀가 윤소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손연서가 나서서 힘을 써준 적이 있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연서는 여전히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손연서가 떠난 후, 박민정은 정수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정수미는 오씨 가문의 남자들을 가장 혐오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정부를 만들어 원래의 배우자를 해치다니. 이런 남자들과 도덕 없는 애인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민정아, 그 여자의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민정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오준수예요.”오준수.정수미가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떠올렸다.“오현웅 회장의 아들입니다.”“아, 그 사람이구나.”정수미의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그 오준수, 몇 번 본 적 있어. 나한테도 몇 번 찾아온 적 있고. 근데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그냥 허세뿐인 한량이지.”문득 떠오른 듯, 정수미가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그 사람 아버지 체면을 봐서 오씨 가문과 거래를 한 적이 있거든. 네 친구를 돕고 싶다면 계약을 취소하면 돼.”박민정은 정수미가 오준수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줄이야.“그거 참 잘됐네요. 마침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별것도 아닌 일에 머리 쓸 필요 없어.”정수미는 오씨 가문 따위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씨 가문이 정씨 가문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 정도의 차이였다.“김 원장이 그러잖아. 너 요즘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둬.”정수미가 덧붙였다. 그때 옆에 있던 정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언니, 내가 해줄게요.”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먼저 찬
정수미는 자신이 여기 있으면 대화가 불편할 거란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밖에 가 햇볕을 쬐겠다고 했다.그녀가 나가자 세 사람은 한결 편해졌다.지원 엄마는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예찬 엄마, 다음 학기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잖아요. 예찬이는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에요?”박예찬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박민정은 도한 엄마에게도 초청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아직 한 장 더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학교는 이미 정했어요. 혹시 지원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같이 다니게 할까요?”“좋아요!”지원 엄마는 학교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이라면 분명 좋은 학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럼 제가 시간 될 때 초청장을 드릴게요.”“고마워요, 예찬 엄마.”지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손연서는 아이가 없어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그녀는 엄마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자신이 왜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택했던지 후회스러웠다. 만약 전 남편의 본모습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자신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잠시 후, 지원 엄마와 도한 엄마는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손연서는 계속 남아 박민정에게 과일을 깎아 주었다.박민정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기억을 잃은 후로 손연서의 소식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손연서는 사과를 깎아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편해요. 예전보다 훨씬 나아요.”그러다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다만, 이제 와서 좀 후회가 돼요.”“후회요?”“네, 민정 씨가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요.”손연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전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왜 그런 말을 해요?”박민정은 손연서가 아직 젊은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이
유남준은 떠나지 않고 혼자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남준아.”김인우가 먼저 다가왔다.“술 한잔하러 갈까?”유남준은 그를 흘겨보았다.“하랑 씨 임신했다며? 무슨 술이야.”“오늘 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낼 테니까, 우리도 재미 좀 찾아야지.”김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다희, 정민기, 방성원을 바라보았다.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우리 애가 싫어할 거예요.”방성원도 거들었다.“우리 딸이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하거든.”정민기는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전 술 안 마셔요.”김인우는 입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자신만 아직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좋은 남자친구, 좋은 남편이 되어 있었다.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 너도 철들 때가 됐어.”“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지...”서다희가 말했다.“우리 애가 그러더라고요. 심심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굳이 술 마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대표님?”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술은 몸에 안 좋아.”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있었다.“그럼 뭐 할 건데? 밤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잖아.”“그건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쉬는 게 좋겠어. 난 그래도 딸 보러 먼저 가볼 생각이야.”방성원이 말했다.“알겠어.”김인우는 바로 옆방을 준비하도록 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은 모여서 카드나 한 판 하며 시간을 보냈다.옆방에서는 김인우의 예상대로 모두가 박민정을 위해 오늘 밤만큼은 함께 있기로 했다.다만, 고영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박윤우와 박예찬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유남준을 찾아왔다.유남준이 그들에게 말했다.“너희, 이제 세 살짜리 아기 아니잖아. 알아서 잘 곳 찾아가.”결국 두 아이는 방 한쪽에서 나란히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감탄했다.“남준아, 유전자 진짜 대단하다. 윤우랑 예찬이, 완전 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