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계하듯이 유남준을 한바탕 혼내고 나서야 박민정은 집을 나섰다.유남준은 그녀가 꾸짖어도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다만 그 유별나게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애꿎게 바라볼 뿐이었다.그의 눈이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흠칫하며 당황했다....병실 안.윤우는 형으로부터 저들의 쓰레기 아빠가 지금 엄마랑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 전 교통사고로 눈도 멀었고, 현재는 다른 사람이 그의 신분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그 사람은 그리 당해도 싸.”윤우가 분에 겨운 말투로 말하자 그와 전화를 하고 있는 예찬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맞아. 이런 게 인과응보라는 거지.”“그런데 우리 손으로 그렇게 만들지 못한 것이 좀 아쉽네.”윤우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문득 뭔가 생각나 예찬한테 얘기했다.“형, 오늘 지석 삼촌이랑 엄마가 함께 나를 보러 온다고 했어. 내가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은데 형 생각은 어때?”연지석이 박민정을 어떻게 대하는지 해외에서 그들 두 형제는 똑똑히 봐왔다.연지석은 그 쓰레기 아빠와는 달랐다. 갑자기 무슨 전 여자친구가 튀어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박민정과 소꿉친구이기까지도 하니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윤우는 은정숙도 연지석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다.그러나 전화기 저편의 박예찬은 말없이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가 그러길 원할까?”“엄마도 지석 삼촌 좋아할 거야. 그냥 부끄러워서 얘기 안 하는 것뿐이지. 걱정 마, 내가 오늘 두 사람 관계를 명확히 하게 해주려니까.”윤우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알았어.”전화를 끊고 나서 윤우는 침대에서 지루한 시간을 버텨내며 연지석과 박민정이 오기만을 기다렸다.점심 때가 되어 그들이 앞뒤로 병실을 걸어 들어오자 윤우는 득달같이 애교를 부렸다.“엄마, 윤우도 엄마랑 같이 집에 있으면 안 돼? 여기서 혼자 너무 외로워. 엄마도 보고 싶고, 형이랑 할머니도 보고 싶어..
하얀 눈을 밟으며 걸어가는 세 사람의 모습은 단란한 한 가족처럼 보였다.연지석한테 손을 잡힌 박민정은 손바닥에서 땀이 삐질삐질 났다.드디어 레스토랑에 도착해 밥 먹을 때가 되어서야 연지석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윤우는 두 사람한테 단둘이 지낼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웨이터에게 화장실로 데려가달라고 했다.윤우가 떠나자마자 박민정은 즉시 사과를 건넸다.“정말 미안해. 윤우가 한 번도 아빠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래.”결혼도 안 했는데 남한테 아빠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기분 나쁠 수가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연지석은 개의치 않았다.“난 윤우가 저러는 게 좋은데.”박민정은 그제야 안심했다. 윤우의 얘기가 일단락되자 연지석은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너랑 유남준이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말이 튀어나오고 나서 그는 금방 후회했다. 그는 이런 걸 물을 자격이 없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의 말을 깊게 생각 안 하고, 전에 이혼하기 위해 법정에서 바람났다고 하며 유남준을 위협했던 일과 고영란이 자기를 협박했다는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누구랑 바람 나?”연지석은 요점을 꼬집어 물었다.박민정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귀까지 빨개졌다.“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어. 유남준은 너랑 인 줄로 알 거야.”너무 긴장하여 저도 몰래 테이블에 놓인 손끝을 살짝 그러쥐었다. 연지석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눈가엔 감출 수 없는 빛이 반짝였다.“그거 잘됐네. 마침 그 핑계로 오늘 윤우 아빠 노릇 톡톡히 할 수 있겠어.”화제를 더 이어나가기 부끄러운 박민정은 벌떡 일어섰다.“윤우가 왜 아직도 안 돌아오지? 내가 한 번 가서 찾아봐야겠다.”윤우는 계속 문어귀에 숨어 있었다. 둘의 대화가 끝나가는 걸 보자 그는 화장실에 갔다 오는 척하며 걸어왔다.“아빠, 엄마. 나 돌아왔어.”아이가 있으니 분위기가 다시금 훈훈해졌다.식사를 마치자 윤우는 또 게임 센터에 가자고 졸랐다.게임 센터에는 젊은 커플들도 꽤 많고
윤우가 어리광이 많은 편이지만 이렇게 떼를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병에 걸려 몸이 아픈 데다가 어쩌다 갖고 싶은 인형이 하나 생겼는데 가지지 못하니 서러울 만했다.“울지 마, 윤우야. 엄마가 다른 방도를 생각해 볼게.”연지석이 때마침 입을 열었다.“윤우야, 나랑 엄마랑 지금 가서 인형 따내 줄게. 그럼 되지?”그 말에 윤우는 울음을 뚝 그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지석을 쳐다봤다.“응.”윤우는 또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엄마, 아빠랑 꼭 힘내서 인형 따내야 해.”박민정은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세 사람은 이벤트를 하는 코너에 가서 참여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열 팀의 커플이 신청하자 직원이 게임 룰에 대해 설명했다.게임은 아주 간단한 형식이었다. 남녀가 마주 보고 서서 눈을 가리고 나면 직원이 줄에 매달린 어떠한 물건을 위로부터 서서히 내리고 커플은 몸으로 그 물건을 고정해 떨어뜨리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손을 쓰는 건 반칙이었다.연지석과 박민정은 무대 위로 올라갔고 다른 커플들도 다 준비를 마쳤다. 직원이 첫 번째 물건인 풍선을 꺼냈다.첫 번째 라운드라 그런지 난이도가 꽤 낮은 편이어서 몸을 조금만 앞으로 기울이면 떨어뜨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천으로 눈을 가린 후 사회자가 시작을 알렸다.모든 참가자들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끈에 매여있는 풍선은 손쉽게 몸으로 받을 수 있었다.윤우가 무대 아래에서 높은 소리로 그들을 응원했다.“엄마, 아빠, 화이팅!”박민정은 윤우의 인형을 원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떠올리며 꼭 상품을 따내리라 마음먹었다.연이어 여러 개의 부피가 조금 큰 물건들을 그들은 모두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신체 접촉이 있었다.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두 팀이 남았다.사회자가 마지막 물건을 꺼내 들었는데 그건 종이 한 장이었다.시작, 하는 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은 또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느낌으로 A4용지 같은 물건이 그녀의 볼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녀는 연
연지석이 이번에 돌아온 건 박민정 때문만이 아니라 과거 유남준한테 빼앗긴 그의 자산을 되찾기 위해서이기도 했다.지금 유앤케이의 대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어차피 유남준이 아니니 그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서다희는 연지석이 이 정도로 겁 없이 날뛸 줄 몰랐다.기억을 잃은 유남준에게 연지석이 방금 한 말을 전달하지는 않겠지만 속으로 유남준이현실을 빨리 깨닫기를 바랐다....유남준은 시각 장애인 용 컴퓨터를 사용하며 박민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예전 같았으면 벌써 돌아왔을 시간인데, 저녁 8시가 되어가도록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그때 곁에 놓인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유남준은 다급히 메시지를 확인하며 음성을 재생했다.“유 대표님, 전 연지석인데요. 미리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민정이가 오늘 저랑 줄곧 같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좀 늦게 돌아갈 거예요.”다 듣고 난 유남준은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더는 일할 정신이 없었다. 그는 바로 일어나 집을 나섰다.밖에는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유남준은 미간을 살짝 구긴 채 외로이 눈속에 서 있었다.그는 맹인용 휴대전화를 꺼내 박민정한테 전화를 걸었다.전화번호는 그녀가 알지 못한 새에 남몰래 저장해둔 것이다.다른 한 편.박민정은 운전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윤우랑 늦게까지 놀아주느라 아직도 집에 도착하지 못하였다.흩날리는 눈보라에 시선이 가려져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고 또 길이 미끄러워 아주 천천히 운전하는 중이었다.전화벨이 울렸다.그녀는 누군지 보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디야?”유남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으로부터 들려왔다.박민정은 이상한 낌새를 차리지 못하고 그저 묻는 말에 대답했다.“돌아가는 길이요.”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차가 갑자기 미끄러졌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탓에 차 머리가 엉뚱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펑!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차는 길가에 있는 가로수를 들이받고 에어백이 터져나왔다.박민정은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듯한 차디찬 손이 유남준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유남준은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차가워서가 아니라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는 느낌 때문이었다.박민정의 다른 한 손은 놓을 데가 마땅치 않아 갈 곳을 찾아 헤매다 그의 뺨에 실수로 닿게 되었는데 유남준의 얼굴은 지금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남준 씨 지금 열 나요.”그녀는 온몸의 기운이 전부 빠져 축 처진 채로 겨우 말을 꺼냈다. 이 추운 날에 얼굴이 불덩이 같으니 당연히 열이 났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붉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목울대는 아래위로 살짝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어젯밤 한 얘기는 늘 유효해.”박민정은 그의 입술이 벌렸다 닫혔다 하는 것을 보며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네네.”유남준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 은정숙이 나와서 둘을 보더니 얼른 수건을 갖다주며 물었다.“왜 인제야 돌아온 거야?”유남준은 그 수건을 건네받아 박민정의 몸에 있는 눈을 털어줬다.몸이 얼어붙어 목각처럼 굳었지만 박민정은 은정숙을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다.“아줌마,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 제가 오늘 좀 늦게 돌아왔는데 오는 도중에 차가 고장이 났어요.”그녀는 귀가 안 들린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그래. 이따가 뜨끈한 물에 목욕 좀 하려무나.”은정숙은 쉬러 가지 않고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들어가 박민정한테 줄 생강차를 만들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을 방으로 데려와 소파에 앉히고 갈아입을 옷 몇 벌을 가져다 놓았다.“내가 욕조에 물 준비해 놓을게. 너 옷부터 벗고 이따 목욕 다 하고 나서 이걸로 갈아입어.”박민정은 그의 입 모양을 보고 그가 옷을 갈아입으러 가겠다는 줄 알았다.“네, 당신도 어서 갈아입으러 가요.”유남준은 약간 잠겨 허스키한 목소리로 응, 하며 대답했다.그는 옷을 갈아입지 않고 가운을 가지고 박민정의 방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박민정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가 제 방에서 씻고 있는 줄도 몰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채 분위기가 다소 굳어져 있었다.그러는 와중에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왜 안 들린다고 말을 안 했어?”박민정은 고개를 숙이고 약간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집에 돌아오면 나을 줄 알았어요.”유남준은 손을 들어 그녀를 만지려고 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갈 길을 잃은 손이 허공에 뻗어있었다.“민정아, 너 오늘 누구랑 같이 있었어?”박민정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또 날 미행했어요?”그가 기억을 잃기 전에 가장 자주 했던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유남준은 목이 메었다. 또라니?그가 언제 또 미행을 했었다고?무어라 해명을 하기도 전에 은정숙의 방문이 열리며 의사가 걸어 나왔다.의사는 환자가 과도하게 흥분하여 발생한 일시적 현상이니 앞으로 마음을 편히 가라앉히고 병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서다희도 방 안에서 나오며 박민정을 쳐다봤다.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로 인해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그러나 유남준이 있는 자리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표님, 그럼 저흰 먼저 돌아가겠습니다.”“어.”서다희는 의사를 데리고 떠나갔다. 이제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오늘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아줌마한테 의사를 찾아 준 것도.”박민정이 운을 뗐다. 어쨌든 미행과 이번 건은 서로 다른 일이니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우린 부부야. 고마워할 거 없어.”유남준이 말하며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그리고 나, 사람 붙여서 너 미행한 적 없어.”박민정은 믿지 않았다.“다음 달이면 설날인데, 내가 내일 데려다줄 테니 남준 씨는 두원 별장으로 가 있어요.”의사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저 그리 하라는 거였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꽉 붙잡았다.“그럼 넌?”“난 집에서 아줌마를 돌봐야 돼요.”유남준은 순간 가슴이 칼로 도려내는 듯이 아팠다.“민정아, 네가 나랑 결혼한 이유가 날 사랑해서였어?”그의 기억에 그
살길을 열어준다고?박민정의 입가에 냉소가 흘러나왔다. 이런 말이 친어머니란 사람이 할 소리가 맞는지...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았다.“그 돈은 내 능력으로 번 거니까 갖고 싶으면 어디 능력껏 해보세요. 그딴 말로 나를 겁 줄 생각이나 하지 마시고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장명철한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보아하니 이번 일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진주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았다.그녀는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서 은정숙의 방으로 갔다.은정숙은 깨어있었고 어젯밤의 일이 오해였다는 걸 알리자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유남준이 진짜 변한 거야?”“저도 모르겠어요. 아줌마는 푹 쉬어요, 다른 걱정 하지 마시고요.”“응, 그래.”은정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박민정은 은정숙에게 친구한테 일이 좀 생겨서 돌봐 주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그래, 어서 가봐.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챙겨.”그러나 은정숙과 유남준만 집에 남겨 두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내가 간병인 아주머니 한 분 모셔 올게요.”싫다고 하면 박민정이 시름을 놓지 못할 걸 알고 은정숙은 고개를 주억거렸다.“그래, 알았다.”박민정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주방 내 식탁에는 이미 아침이 놓여있었고 그 밑에 쪽지가 한 장 깔려있었다.쪽지에는 유남준의 멋진 손 글씨가 쓰여 있었다.“나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하지만 사실 유남준은 병원에 간 게 아니라 서다희의 차를 타고 두원 별장으로 간 것이었다.두원 별장 내에 일부 기밀문서들이 있다고 서다희가 얘기했다....다른 한편, 공관에는 한수민과 이지원이 거실에 앉아있었다.현재의 한수민은 더 이상 예전의 그 망한 재벌 집의 사모님이 아니었다.5년 전, 그녀는 아들 박민호를 데리고 해외로 도주한 후 무슨 수를 부렸는지 현지에 있는 한 교포 재벌과 결혼하게 되어, 지금은 진주시 부유층 사모님들이 친분을 쌓으려고 애를 쓰는 인물이
밤새 큰 눈이 내려 두원 별장 안팎에는 눈을 쓸고 있는 사용인들로 가득했다. 유남준이 앉은 차는 별장밖에 세워져 있었다. 한참 뒤, 서다희는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별장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그는 유남우였다.서다희는 즉시 그 사실을 유남준한테 알리며 물었다.“지금 들어갈까요?”별장밖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유남준이 이때 들어가면 유남우의 신분은 단번에 들통날 것이다.며칠 전부터 유남우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잠시 유씨 가문 옛 저택에 머물렀었는데 이렇게 금방 두원 별장으로 들어와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유남준의 신분을 대체하고 회사를 차지하더니 이젠 별장까지. 다음엔 가족과 와이프까지 뺏을 셈인가.“급할 거 없어.”유남준의 차분한 목소리가 서다희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그는 차를 우선 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유남준의 곁에 오래 있었지만 그도 동생이 있단 얘기를 듣기만 했지, 직접 두 눈으로 실물을 보게 되는 건 처음이었다.유남우는 정말로 유남준과 똑같이 생겼다. 옷차림마저 똑같다면 아마 누가 누군지 아무도 못 알아볼 것이다.하지만 유남우는 필경 유남준의 친동생이고, 그가 회사를 맡는 것이 그 무능한 사촌 형 유성혁이 맡는 것보다 열 배는 나았다.기다리고 있는 동안, 승합차 한 대가 앞을 지나갔다.그 안에 앉은 사람이 이지원이라는 걸 서다희는 보지 못했다....두원 별장 안에서 유남우는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박민정이 쓰던 방에 들어와서 침대맡에 덮어 놓은 사진 액자를 발견했다. 가늘고 긴 손으로 그 액자를 돌려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이건 박민정과 유남준이 같이 찍은 사진인데 하얀 드레스를 입은 박민정이 정장 차림의 유남준의 곁에서 조심스러운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이 사진은 두 사람이 약혼식을 올릴 때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둘은 웨딩사진을 찍은 적이 없어 박민정은 줄곧 이 사진을 웨딩사진처럼 고이 간직해왔다.그러다 이혼을 결정하고 나서 이 사진을 여기에 남겨둔 것이다.유남우
오늘 저녁은 학교에서 준비해 줬다.사실 물고기를 잡아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다들 많이 잡지 못한 바람에 식사가 조금 부실했다.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오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탓에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었다.유지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박예찬을 신경 썼다.그리고 내심 박예찬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부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붙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한편, 최현아는 오늘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되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 가족이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피어올랐다.저녁 식사가 다 끝난 뒤 각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최현아가 어느새 유남준의 곁에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남준 씨,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요? 제가 음식을 따로 싸 왔는데 괜찮으시면 좀 드실래요?”그러나 유남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괜찮습니다.”어제랑 다르게 차가운 그의 태도 때문에 최현아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어제 자신이 땀을 닦아줘도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나 싶었다.“그래도 제가 남준 씨 형수인데 너무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최현아는 유남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음식 가지러 달려갔다.그저 유남준이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오해할까 봐 철벽친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박예찬과 무료함을 달래려 잡초를 뽑고 있다가 무심결에 최현아와 유남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박예찬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박예찬은 박민정이 풀 뽑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같이 뽑다가 문득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유남준이 또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엄마,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하나는 유남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괜히 박예찬이 가서 물어보면 마치 그
오후가 되니 날씨가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박민정네는 산언덕에 앉아 바람도 쐬고 구운 생선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박예찬은 특별히 물고기 한 마리를 남기더니 조동민에게 주며 말했다.“아마 오래 살지는 못할 거야.”그의 말에 조동민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예찬아, 고마워. 넌 참 착한 아이야.”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자기 아들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라 앞으로도 친구 사귀는 건 문제없겠다고 생각되었다.“고작 고기 한 마리 가지고 뭘.”박예찬은 아직 칭찬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쑥스러워했다.조동민은 고맙기는 한데 오늘 발생했던 일 때문에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민정 이모, 혹시 오늘 일은 진짜로 제가 잘못한 걸까요?”어린아이의 세계는 그저 흑과 백으로 단조롭게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하여 당연히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자기더러 사과하라던 아버지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다.박민정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이모는 동민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넌 단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 유지훈이 먼저 잘못한 거지.”그녀의 말에 조동민은 더욱 억울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런데 저희 아빠는 왜 저더러 사과하라고 했을까요?”“그건 어른들의 세계에는 옳고 그름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 이건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이해가 될 거야.”조동민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그녀에게 답했다.“저도 알 건 알아요. 저희 아빠는 지훈이네 엄마가 무서웠던 거예요. 저희 부모님은 항상 저에게 유지훈에게 잘 보여야 우리 집안 사업도 잘되고 나중에 돈도 많이 벌 거라고 습관처럼 말하셨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이렇게 어린아이가 그런 말 때문에 얼마나 부담감을 느꼈을까?’그녀는 어떻게 조동민을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그러나 조동민은 고개를 들고 박민정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이모, 저 오늘부로
한가영은 한껏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박민정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리고 박민정이 한마디 하자마자 장연수도 빠르게 거들었다.“최 회장님, 다 아이들 일이고 누구도 피해 본 사람이 없는데 이쯤 하시죠.”몇몇 학부모들도 최현아를 말리기 시작했다.“아이가 이 정도로 우는 걸 보면 분명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맞아요.”최현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두운 얼굴로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았는데 보는 눈이 이리도 많은데 계속 아이를 혼내기도 뭐한 것 같았다.“그럼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겠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조민혁은 심장이 다 타들어 갔다가 겨우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역시나 최 회장님은 아량이 깊으십니다.”한가영은 일이 이대로 마무리되자 단번에 조민혁을 옆으로 밀쳤다.“어떻게 여동생보다도 간이 작아요? 이런 사람이랑 결혼한 제가 멍청이네요.”부모님이 자기 앞에서 다투기 시작하자 조동민은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자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박민정 덕분에 사건이 종료된 뒤 조동민은 박예찬과 놀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박민정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박민정은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어 조동민과 잠깐 통화하게 했다.조동민은 화면 속의 조하랑을 보자마자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터졌고 조하랑은 겨우 그를 달래서 울음이 그쳤다.“민정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아직 아이라 표현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조하랑은 자기 조카가 뭔가 억울함을 당했다고는 느꼈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하여 박민정은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조하랑에게 알려줬고 그녀는 듣자마자 불같은 화를 냈다.“최현아라는 사람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어린아이더러 동급생 아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시켰다고? 제정신으로 한 말인가 싶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여자 가면을 벗겨버리는 건데!”조하랑은 씩씩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오빠는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라니까.
“지훈아, 우리 동민이가 먼저 때린 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리는 건 아니라고 봐.”조동민의 아버지 조민혁이 말했다.그리고 어머니 한가영도 다시 최현아에게 애원했다.“최 회장님, 작은 오해로 아이에게 무릎 꿇고 사과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최현아는 고작 조 씨 가문 따위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너무 기분이 언짢았다.또한 두 사람은 박민정의 친구이자 조하랑의 친척이라는 사실에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만약 사과할 수 없다면 법원에 고소해야겠네요.”말이 고소지, 분명 다른 방법으로 조씨 가문을 괴롭힐 게 뻔했다.그래도 한가영은 자기 아들이 이런 수모를 겪게 내버려둘 수 없어 재빨리 조동민을 품에 안았다.이 시각, 조동민은 아주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분명 잘못한 사람은 유지훈인데 왜 자신이 무릎을 당연하게 꿇어야 하는지, 왜 어른끼리 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엄마, 저는 잘못하게 없어요.”순간 목이 메어왔다.한가영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민혁만 바라보았다.그러나 조민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씨 가문의 세력으로는 최씨 가문이나 유씨 가문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동민아, 미안하다!”괜히 아이 하나 때문에 큰 집안을 말아먹을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아들을 무릎 꿇리게 해야 했다.한가영은 순간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자기 남편이 아무리 무능력하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데도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 씨, 제발 저희를 좀 도와줘요. 민정 씨는 하랑 씨 친구잖아요. 하랑이는 동민이 고모예요.”조동민은 어렸을 적부터 조하랑을 이모라고 불렀는데 그러면 여태껏 잘못 부른 것이다.느닷없는 부탁에 박민정은 순간 눈앞의 아이가 조하랑의 조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조동민도 어느새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때 최현아의 떨떠름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을 확인해 보니 시아버지인 유석진이었고 재빨리 구석 쪽으로 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오늘 저녁에 호우주의보가 떴던데 남준이랑 민정이 모두 거기에 있어?”“네.”“그러면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주 자연스럽겠지?”유석진이 묻는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최현아는 다급히 그에게 설명했다.“여기에는 다른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도 계세요.”“난 그저 유남준이랑 박민정만 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어.”유석진의 말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최현아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더니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에게로 향했다.“알겠어요. 그럼 준비되면 알려주세요.”“그래. 너랑 지훈이는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네.”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릿속에서는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이 사고 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지 온갖 잡생각으로 뒤엉켜있었다.박민정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지만 몰래 마음을 두고 있는 유남준이 이대로 죽는 건 아쉬웠다.두통이 몰려오던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싸우고 있는 듯했다.이때 여교사 한 명이 최현아에게 다급히 달려왔다.“지훈이 어머님, 빨리 가보셔야겠어요. 지훈이가 다른 아이랑 지금 싸움 났거든요.”이건 선생님들이 관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워낙 유지훈의 부모님이 극성이라는 소문이 있어 감히 먼저 말리지 못했다.또한 유씨 가문의 세력만 봐도 선생님들 쪽에서 밉보이는 행동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누가 감히 내 아들을 때려?”최현아가 빠르게 싸움 현장에 달려와 보니 유지훈과 조하랑의 조카인 조동민이 한창 주먹다짐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훈은 조동민보다 덩치가 한참 작았기에 전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내 물고기 당장 물어내! 우리 아빠가 직접 잡은 물고기인데 물어내라고!”
햇빛 아래서 그의 덩치는 유난히 우람해 보였는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박민정은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웬만한 부잣집 도련님들은 보통 이런건 모르지 않나? 그런데 왜 유남준은 개울에서 물고기 잡을 줄도 아는 거지?’이때, 마침 유남준도 그들을 보고 있었고 물고기를 받으라고 손짓했다.그 모습에 박예찬은 한껏 흥분한 상태로 그를 향해 외쳤다.“여기로 던져주세요.”유남준은 그의 말대로 손바닥보다 더 큰 물고기를 박예찬에게 던져줬다. 필경 아직 어린아이라 물고기를 만져보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첫 번째로 잡은 물고기는 구덩이 하나를 파서 물을 채운 뒤 안에 넣었다.그 모습에 많은 어린이들이 구경하러 오게 되었다.“와! 예찬아, 이게 너희 아빠가 잡은 물고기야?”박예찬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어떤 여자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너희 아빠 참 대단하다. 우리 아빠는 아직 아무것도 못 잡았는데.”다른 아이들도 유남준을 칭찬하며 박예찬을 한껏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은 또 다른 물고기를 잡아 그에게 던져줬다.최현아 따라 땔감을 주우러 가려던 유지훈도 여느 사람들과 같이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엄마, 저도 가서 볼래요.”그의 말에 최현아도 말리지 않았다.“그래.”최현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지훈은 재빨리 아이들이 몰린 쪽으로 달려가더니 자기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밀쳐내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나도 물고기 좀 보게 다들 비켜봐.”아이들은 이런 유지훈의 행동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내키지 않지만 저마다 자리를 비켜줬다.유지훈이 맨 앞에 다가가 두 마리의 물고기를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또 얼마나 대단한 물고기를 잡았다고. 저건 작아도 너무 작잖아? 우리 아빠가 돈 주고 산 물고기가 훨씬 크고 이뻐!”아이들이라 그런지 한창 비교하기 좋아하는 나이다.특히 유지훈은 모든 아이가 박예찬을 둘러싸고 칭찬하는 모습에 질투심을 느꼈다.그러나 아쉽
유남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어젯밤에 네가 계속 춥다고 잠꼬대해서 내가 안고 같이 잤어.”“네?”박민정은 그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날씨도 이젠 어느 정도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더구나 어젯밤도 전혀 춥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때, 옆에 누워있던 박예찬이 침낭에서 일어나더니 박민정에게 말했다.“엄마, 나도 봤어. 어젯밤에 분명 엄마가 계속 춥다면서 안아달라고 했어.”박예찬의 진지한 말투가 전혀 거짓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자 순간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내가 그런 잠꼬대를 했다고? 나이 먹으면서 외로워졌나?’이때, 박예찬이 박민정 앞에 다가와 다시 말을 이었다.“엄마,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예전에도 두 사람이 자주 그렇게 잤으니까.”박민정은 그의 말에 더욱 부끄러워 어딘가 숨고 싶어졌다.“알았어.”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돌려 유남준에게 말했다.“그럼 어젯밤은 고마웠어요. 혹시 저 때문에 못 잔 건 아니죠?”유남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야. 내가 이따가 이불을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오늘 밤에는 우리 이불 덮고 자자.”“그럴 필요 없...”박민정이 단번에 거절하려는 순간 텐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서, 남준 씨, 깼어?”최현아였다.그녀의 물음에 박민정이 재빨리 답했다.“네. 무슨 일이에요?”“우리 지금 땔감 주어서 아이들한테 야외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는데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여기까지 직접 와서 물어보니 박민정은 거절하기 힘들었다.“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박민정이 침낭에서 나오자 유남준이 갑자기 그녀의 팔목을 잡으면서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이때,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최현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남준 씨, 동서가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이따 남자분들은 개울에서 낚시해야 해요.”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말없이 얼굴을 찡그렸다.박민정은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텐트 밖으로 나왔는데 최현아는 자
유남준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알겠어.”빠르게 저녁 시간이 돌아왔고 산기슭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유난히 별들이 잘 보였다.박민정과 박예찬은 같이 앉아 쉬고 있었고 유남준은 그들과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바비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기 굽는 냄새가 순식간에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해 자기도 모르게 시선들이 이쪽으로 쏠리게 되었다.박민정은 살짝 난감한 듯 박예찬에게 말했다.“예찬아, 네가 다른 친구들이랑 학부모님들, 그리고 선생님들도 데리고 와서 같이 먹자고 해.”전날 밤, 그냥 가벼운 말로 야외에서 캠핑하면 바비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걸 유남준이 기억하고 준비해 줬다.“네.”박예찬이 엉덩이를 툭툭 털면서 일어서더니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그렇게 잠깐 박민정과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녀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틈에 유남준은 어느새 다 구운 고기를 접시에 담아 박민정에게 건넸다.“먹어.”“먼저 먹어요. 저는 제가 구워서 먹을게요.”박민정은 방금 그와 다퉜는데 그가 구워준 고기를 덥석 받아먹는 게 왠지 미안했다.하여 스스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유남준은 여전히 자신을 거절하는 그녀 때문에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난 고기를 원래 안 좋아해. 네가 안 먹으면 이건 그냥 버릴게.”살짝 화가 난 목소리였다.그의 말에 박민정은 어이없다는 듯이 재빨리 그의 접시를 받아서 들었다.“아깝게 왜 버려요. 고기 안 좋아하면 더 이상 굽지 말아요.”생각했던 대로 말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순간 질투가 많은 여느 여고생처럼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이제 자신이 구워주는 고기도 마다한다고 생각하니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러나 박민정은 이 상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즐겁게 고기를 먹고 있다가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이 몰려오자 그들과 같이 식사 자리를 즐기기 시작했고 금세 유남준이라는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었다.그런 유남준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웃고
그러다가 최현아는 무심결에 유남준의 튼실한 팔뚝과 또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애초에 남준 씨랑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러다가 그에게 다가가 휴지를 꺼내며 물었다.“땀 흘렸네요. 제가 닦아 드릴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최현아는그의 땀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막 거절하려던 순간 박민정과 박예찬이 들꽃을 꺾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괘씸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가만히 서 있었다.순간 최현아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유남준때문에 심장이 또다시 나대기 시작했다.‘들은 소문에 의하면 유남준에게 첫사랑인 이지원을 제외하면 여자라고는 박민정뿐이라고 했는데?’‘역시나 남자들은 다 똑같네!’순간 최현아는 진작에 유남준에게 접근하지 않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아니면 진작에 IM 대표의 사모님 자리를 꿰찼을 텐데.마음속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손은 점점 바빠졌다.박민정과 박예찬은 마침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의 애틋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그러다가 박민정은 문득 머릿속에 기억 한 장면이 떠올랐는데 장소는 비슷했지만 유남준의 맞은편에는 최현아가 아닌 이지원이 서 있었다.순간 박민정은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유남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박예찬도 화가 난 나머지 잡고 있던 박민정의 손을 놓고 재빨리 달려가 두 사람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물었다.“현아 이모, 지훈이가 급한 일이 있다고 이모 찾던데요?”그의 말에 최현아가 재빨리 되물었다.“무슨 급한 일?”“가서 직접 물어보세요.”박예찬의 말에 최현아는 두말없이 유지훈 쪽으로 향해 달려갔다.박민정은 어느새 유남준에게 다가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보통 이런 식으로 바람피웠나 보네요?”유남준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무덤덤해 보이는 박민정에게 다가가 되물었다.“화 안나?”“그저 유치해 보이는데요?”박민정의 입에서 들리는 유치하다는 말이 단번에 유남준의 가슴에 꽂혀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