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말하면 말한 대로 행동했다. 가정법원을 떠난 후, 그는 다시 박민정을 찾지 않았다.주변의 그 누구에게도 박민정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두원 별장은 한밤중에도 전등을 켜지 않았다.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집안의 유리 제품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그러자 바로 들어가려던 경호원이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꺼져!”유남준은 큰 소리로 차갑게 말했다.그러자 경호원은 어쩔 수 없이 바로 밖으로 나갔다.유남준은 식탁 뒤에 서 있었고 유리 조각에 베인 손에서는 피가 흘렀다.그는 마치 아픔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수도꼭지를 더듬어 열고 차가운 물에 상처가 난 손을 헹구고 있었다.요 며칠 그는 단지 물건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몇 번 넘어지기도 했다.다행히 그는 집 안의 모든 위치를 기억해서 더 이상 잘못된 곳을 찾지 않았다.그는 피가 멈출 때까지 손을 헹구다가 수도꼭지를 닫고 주방을 떠났다.그리고 혼자 거실로 와서 소파에 앉았다.그의 남은 기억 속에는 박민정이 이곳에 앉아서 그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었다.집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유남준은 또 경호원이 다시 온 줄 알고 짜증을 내며 말했다.“꺼지라고!”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경호원이 아닌 고영란이었다.고영란은 집안이 이렇게 어두운 것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왜 불을 켜지 않은 거야?”그녀는 거실에서 앉아 있는 유남준을 보고서야 자신이 말을 잘못한 것을 깨달았다.눈이 먼 사람으로서 불을 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히터를 켜지 않았기에 실내는 몹시 추웠다. 그래서 고영란은 걸어가서 히터를 켜고 유남준 앞으로 왔다.“남준아, 네 몸도 이젠 거의 나았어. 엄마가 최근에 몇몇 집안의 아가씨들을 보았는데. 다 예쁘기도 하고 조건도 괜찮아. 게다가 다들 널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 왔대. 내일 시간이 되면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고영란이 말한 여자들은 전부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다.모두 젊고 예뻤고 게다가 아이를 낳기에 신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영란은
기억상실에 실명까지 겹친 후 유남준은 더욱더 쩍하면 화를 냈다. 박민정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좋은 표정을 지어주지 않았다.고영란은 방금 유남준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니 마음이 초조해졌다.그녀는 서다희에게 물었다.“어떻게 하면 남준이가 다른 여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서다희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대표님은 전에 그저 이지원 씨와 사귄 적이 있고 박민정 씨와 결혼한 외에는 다른 여자분이 없었어요.”유남준은 항상 사업을 중시해 왔기에 연애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서다희가 이지원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고영란은 그녀를 잊었을 것이다.“참. 이지원은 지금 어디에 있어?”서다희는 목이 메어 잠시 후에야 대답했다.“진주 정신병원에 있어요.”...병원 원장 사무실.이지원은 환자복을 입고 머리가 헝클어진 채 멍하니 서 있었다.고영란이 온 것을 보고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고영란이 자신을 괴롭히려 온 줄 알고 그녀는 즉시 멍청한 척했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이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죄송해요...”고영란은 그런 이지원을 보고 조금 놀랐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이지원은 며칠 전에 김인우가 왔을 때 그녀를 혼냈기 때문에 고영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미친 척하지 않았다면 김인우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고영란은 한숨을 내쉬며 뒤에 있는 원장을 보고 말했다.“제가 헛걸음을 했네요. 이 사람은 정말 미쳤나 봐요.”그녀는 말을 마친 후 곧 떠나려고 했다.병원 간호사들이 이지원을 끌어가려고 하자 그녀는 정신병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갇히고 싶지 않아 즉시 고영란에게 달려갔다.“사모님,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고영란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그러자 이지원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뉴스를 다 봤어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남준 오빠를 돌봐 드릴게요.”“남준이가 널 여기에 가뒀는데, 원망하지 않아?”고영란이 묻자 이지원은 고개를 저었다.“오빠가
전 여자 친구?유남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지원이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갔다.“오빠, 기사 봤어요. 민정 씨랑 이혼한다면서요? 처음부터 이기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아요.”유남준은 이지원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이지원이 박민정의 얘기를 꺼내는 것을 듣고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박민정에 대해서 잘 알아?”“당연하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다 같은 학교에 다녔어요. 어릴 때는 민정 씨 집에 자주 놀러 갔어요.”이지원은 박씨 가문의 후원을 받았다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그녀는 유남준 앞에 앉아 유남준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유리에 베인 상처가 남아있었다.이지원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상처를 만지려고 했다.유남준은 미리 예지한 듯 뒤로 물러났다.이지원은 그대로 굳은 채 얘기했다.“오빠, 내가 오빠랑 함께할게요. 네? 난 민정 씨랑은 달라요. 오빠가 어떤 모습이든지 영원히 사랑할게요.”이지원은 정말 유남준을 좋아했다. 또 유남준의 재력을 좋아하기도 했다.유남준이 장님이라고 해도 다른 남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런 이지원을 뿌리쳤다.“꺼져.”이지원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결국 그녀는 유남준한테 쫓겨났다.입구에 서 있던 고영란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얘기했다.“쓸모없을 줄 알았다니까.”이지원은 고영란을 찾으러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유남준은 이지원을 정신 병원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이지원이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벌어둔 돈은 그대로다.이지원은 바로 비서한테 전화해 데리러 오라고 했다.차에 앉으면서 이지원은 맹세했다.“박민정, 두고 봐. 깜짝 놀랄만한 걸 들고 갈 테니까.”꼭 박민정을 가만두지 않겠다고....신림현.박민정은 은정숙의 집을 새로 인테리어한 후 두 아이를 데리고 신림현으로 왔다.주변의 이웃들은 거의 다 이사갔기에 주변은 꽤 처량해 보였다.요즘 은정숙은 자는 시간이 더욱 많았다. 하지만 깨어나기만 하면 일을
고영란은 유남우가 바로 자기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차에 앉아서 두원에 있는 유남준을 보면서 강연우에게 물었다.“강 변호사, 당신이 남준이를 도와 이혼 소송을 한 사람이죠?”유남준은 고영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른 집안과의 혼인도 거절했고 이지원도 거절했다.고영란은 유남준이 혼자 두원에 있다가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래서 이혼 소송을 도와주었던 강연우를 찾아 상황을 알아보았다.“네.”강연우가 대답했다.“물어볼 게 있어요. 남준이 아내는 아직 박민정이니까 남준이를 챙겨줘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죠?”고영란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강연우는 그녀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당연하죠.”그는 흠칫하더니 말을 이었다.“필요하다면 유남준 씨를 위해 소송장을 미리 써드릴 수 있습니다. 박민정 씨의 의무를 다하게 말입니다.”고영란은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좋아요. 오늘 안에 박민정이 소송장을 받게 해요. 알겠어요?”“네.”고영란은 강연우의 영리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자기 명함을 건네주었다.“강연우 변호사. 호산으로 와요.”강연우는 명함을 받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고영란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차에서 내린 고영란은 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유남준은 서재에 앉아 예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하지만 서류의 내용을 볼 수 없었고 핸드폰으로 음성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영란은 남부럽지 않았던 아들이 이런 모습이 되자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남준아, 할 말이 있어.”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서류를 내려놓았다.“무슨 일이죠?”“내가 잊은 일이 있는데, 민정이 임신한 지 2개월이 됐어.”유남준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너희는 부부잖아. 아무리 싸워도 침대에서 풀리는 게 부부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 둘은 같이 살아야 해.”고영란은
강연우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에서는 서다희가 내렸고 그 뒤로 경호원과 고용인들이 내렸다.강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타고 돌아갔다.은정숙은 밖의 소리를 듣고 힘겹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서다희 일행을 보더니 물었다.“이분들은 다 누구야?”박민정은 은정숙이 찬 바람을 쐬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아줌마, 먼저 들어가서 쉬어요. 이따가 얘기해 드릴게요.”“그래.”은정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허리를 굽힌 채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박민정은 대문을 굳게 닫은 후, 서다희 일행에게로 걸어갔다.서다희도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허름한 집을 보면서 유남준 대신 식은땀을 흘렸다.유남준은 태어나서부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왔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 리 없었다.박민정은 그들의 앞에 걸어갔다. 유남준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서다희에게 물었다.“서 비서님, 뭐 하는 거죠?”“고영란 사모님께서 유 대표님의 모든 옷을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서다희가 대답했다.강연우의 말이 맞았다. 고영란은 정말 박민정에게 유남준을 맡길 예정이다. 만약 박민정이 거절한다면 그녀를 고소할 생각이기도 했다.박민정은 차갑게 물었다.“남준 씨는요?”“유 대표님은 곧 도착하십니다.”말을 마친 서다희는 뒤에 있는 사람들더러 물건을 옮기라고 했다.“잠깐만요.”박민정은 얼른 그들을 막아 나섰다.“유남준은 여기서 살 수 없어요.”서다희는 약간 난감한 기색을 내비췄다.“고영란 사모님께서 얘기하시길, 유 대표님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두원으로 가서 유 대표님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거절한다면 강연우 변호사가 얘기한 대로 진행할 겁니다.”임신했을 때는 옥살이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 감옥에 간다.박민정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서다희도 이 제안이 박민정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박민정 씨, 아니, 이제는 사모님이라고 불러야겠죠. 사모님, 유 대표님
서다희 일행을 내보낸 박민정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박윤우를 병원에 입원시켰고 박예찬은 아직 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박예찬에게 유남준이 와서 같이 산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박민정은 먼저 은정숙의 방에 가서 아까 일어난 모든 일을 설명해 주었다.은정숙은 끝까지 듣더니 박민정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혼자서 나와 두 아이까지 보살피고 있는데 어떻게 유남준까지 돌보겠어. 유씨 가문 사람들은 정말 너무하다니까.”은정숙은 유씨 가문 사람들이 부자들이니 일반인들보다 더 마음이 넓을 줄 알았다.하지만 돈이 많을수록 더 쪼잔하고 뒤끝이 길었다.“전 유남준 씨를 돌보지 않을 거예요. 여기 오면 다 직접 해야 할 겁니다.”말을 마친 박민정은 은정숙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예찬이와 윤우는 아직 상황을 잘 몰라요. 만약 유남준 씨가 온다고 하면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윤우는 전에 남준 씨를 본 적이 있고 또 지금은 병원에 있으니 괜찮지만 예찬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총명해서 수상한 점을 발견할까 봐 걱정이에요.”은정숙도 그 말을 듣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유씨 가문 사람들은 이득을 손에 꽉 잡고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다. 만약 박예찬과 박윤우가 유남준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 두 아이를 빼앗아가려고 아득바득 애를 쓸 것이다.마침 이때 조하랑이 전화를 걸어 물었다.“민정아, 나 예찬이 좀 빌릴 수 있을까?”“빌린다고?”박민정은 약간 의아해했다.“강연우가 돌아온 거 알잖아. 약혼녀도 같이 왔더라고. 둘이 결혼식을 올릴 거라는데 청첩장을 나한테까지 보냈어.”조하랑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어! 며칠 후면 예찬이를 데리고 결혼식에 가려고.”박예찬 같은 총명한 아이가 있으면 강연우의 콧대를 부숴줄 수 있다.박민정은 박예찬에게 유남준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라 바로 조하랑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유남준이 곧 온다는 얘기도 해주었다.“유씨 가문 사람들 정
박민정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저녁 아홉 시 정도였다.그녀는 창고로 썼던 방에서 물건을 다 꺼냈다. 이 방은 아주 허름했지만 안에 화장실이 있어서 유남준이 박민정이나 은정숙의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었다.저녁 열 시.마이바흐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섰다.뒷좌석에 앉은 유남준은 허리를 곧게 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차에서 내린 기사가 밖에 서서 공손하게 얘기했다.“유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사모님을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유남준의 명령 때문에 운전기사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았다.유남준은 법원을 떠나면서 박민정에게 다시 보지 말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날 데리고 가.”유남준은 그렇게 얘기하고 차에서 내렸다.이렇게만 보면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네.”운전기사는 조심스레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유남준이 거절했다.“어떻게 가면 되는지만 알려줘.”유남준은 다른 사람이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길을 걷는 것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병신이 되고 싶지 않았다.“네.”운전기사의 말에 따라 유남준이 천천히 발을 옮겨 집 앞으로 왔다.운전기사는 박민정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어서 어쩔 수 없이 문을 두드려야 했다.박민정은 노크 소리를 듣고 그제야 문을 열었다.찬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녀는 옷깃을 꽉 여민 채 유남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얘기했다.“들어와요.”운전기사는 유남준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따라 들어갈 수 없어 굳은 채로 서 있었다.하지만 발을 옮기자마자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시선을 돌려보니 박민정은 유남준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그의 뒤에서 걸으면서 유남준이 소파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돌아가서 박민정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괜히 부부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차에 돌아온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 중얼거렸다.“앞으로 절대로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
“제가 가볼게요.”박민정은 얼른 내려갔다. 하지만 유남준 방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다른 이상한 점도 보이지 않았기에 박민정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유남준이 이 공간에서 버티지 못해 떠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이튿날.박민정은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당근이 들어간 죽을 준비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유남준은 당근을 좋아하지 않았다.박예찬은 그런 유남준을 닮아 당근이 들어있는 음식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은정숙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박민정은 죽을 일부분 남기고 유남준에게로 갔다.유남준은 마침 씻고 나와 있었다. 그는 홈웨어로 갈아입고 있었다. 박민정은 그런 유남준의 이마에 큰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제의 소리는 아마도 유남준이 이마를 부딪친 소리였던 것 같다.박민정은 일부러 못 본 체 하면서 입을 열었다.“아침을 먹어요.”“응.”유남준은 조심스레 걸어왔다.이곳은 크지 않았지만 가구가 많았다.그는 또 가구를 건드려 박민정이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빨리 떠났으면 했지만 유남준이 벽에 부딪히려는 것을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었다.“왼쪽으로 가요. 벽에 부딪히겠어요.”유남준은 그대로 굳었다. 귀는 아주 붉어져서 홍당무 같았다.그는 왼쪽으로 걸어가더니 빠르게 테이블 옆으로 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고마워. 이젠 기억했어.”그의 말투와 태도를 보면서 박민정은 그가 기억을 잃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이 이런 태도로 나오니 그를 괴롭히기도 어려웠다.박민정은 죽을 뜨고 계란 후라이 두 개를 올려주면서 말했다.“여기요.”“고마워. 앞으로는 내가 일찍 일어나서 도와줄게.”어젯밤, 그는 낯선 곳에서 잘 자지 못해서 늦게 일어났다.박민정은 멍해졌다.“됐어요.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 뭘 도와줄 수 있다는 거예요.”유남준은 목이 막혔다.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일하지 않아도 돼. 은정숙 씨와 함께 두원으로 와. 내가 먹여 살릴게.”먹여 살린다...
박민정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입을 벌려 유남준의 팔을 물어버렸다.유남준은 팔에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들이켰다. “박민정!”박민정이 입을 약간 열며 말했다.“얼른 나가요! 안 나가면 저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한 유남준은 서서히 두 손을 놓았다.“몸이 괜찮아지면 인터넷에서 찾아봐. 나는 절대 널 속이지 않았어.”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그가 떠난 후 박민정은 즉시 발코니의 유리문을 닫았다.머리가 그리 아프지 않게 된 그녀는 폰을 꺼내 유남준의 이름을 검색했다.곧바로 유남준에 대한 정보가 나타났다. 예전 호산 그룹의 대표였다는 것과 한 번 결혼을 했다는 내용뿐이었고 그 외의 정보는 거의 없었다.그가 유남우의 형이라는 건 사실이었다.박민정은 다시 자신과 유남준을 검색해 보았고 결국 두 사람에 관한 몇 가지 뉴스 기사를 발견했다.뉴스에 나온 내용은 유남준이 말한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녀는 유남준과 정말로 결혼한 적이 있었다.이 사실은 박민정에게 마치 번개처럼 강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믿었던 유남우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왜?”그녀는 혼잣말을 했다.박민정은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았고 과거의 자신이 작곡가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랬구나, 그래서 그 곡들이 그렇게 익숙할 수밖에 없었어...”하지만 왜 이 모든 것을 지금은 기억해낼 수 없는 걸까?그날 밤, 박민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하루 종일 자신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며 결국 그녀는 한 아이의 방송을 발견했다. 바로 유남준이 그날 영상 통화를 하자고 했던 그 아이였다.“엄마, 지금 어디 있어요? 너무 보고 싶어요. 언제 돌아와요?”“여기 계신 아저씨, 아줌마들! 제 엄마 보시면 꼭 알려주세요.”박윤우는 카메라 앞에서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끝으로 박민정의 사진이 나왔다.이 영상은 올해 초에 공개된 것이었다.만약 유남준이 아이를 시켜 연극을 하게 한
박민정의 마음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빨리 나가요!”유남준은 그녀가 너무 흥분할까 봐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네가 봐야 할 사진도 있고 여러 가지 보여줄 것도 많아.”박민정은 무서워해야 마땅했지만 이상하게도 유남준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유남준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고 자신의 폰을 건넸다.“지금 진주시에 없으니 내가 사람을 시켜서 보내온 사진이야. 우리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도 있어.”박민정이 무심코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화면을 열어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했다.사진 속에는 그녀, 또 두 명의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 그리고 유남준이 있었다.또한 그녀가 조하랑, 그리고 다른 몇 명의 여성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유남준은 그녀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조하랑 기억나? 네 가장 친한 친구야. 그리고 이 사람들, 네 친구들인데 이름은 설인하, 진서연, 그리고 민수아야.”박민정이 그 말을 들으면서 믿을 수가 없었다. 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을까?“진짜예요?”그녀는 사진을 자세히 보았지만 편집된 것 같지 않았다.“당연히 진짜야.” 유남준은 대답했다. “내가 널 속일 리가 없잖아. 널 속인 사람은 유남우야.”박민정은 계속해서 다음 사진들을 넘겨보았는데 이번에는 아직 포대기에 싸여 있는 쌍둥이 아기들의 사진이 나왔다. “이건 작년에 네가 막 낳은 아이들이야. 여긴 박현우, 박현진. 우리 아이들은 네 성을 따랐어. 나는 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고.” 유남준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박민정은 아기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속에서 묘한 감정이 피어났다.그녀는 폰을 꽉 쥐며 말했다.“말도 안 돼요.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고요.”그녀는 기억해내기 위해 애썼지만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유남준은 그런 박민정을 보며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안았다.“괜찮아?”“약... 약 가져다줘요. 서랍에 있어요.”
유남우는 예전처럼 그만두지 않았고 계속해서 다가갔다.박민정은 자신이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불편했다.“그만...!”박민정이 손을 들어 유남우의 접근을 막았다.“오빠, 지금은 정말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유남우가 잠시 멈추더니 목젖을 살짝 움직였다.하지만 이번엔 그는 신사답게 멈추는 대신 박민정의 옷을 풀기 시작했다.“민정아, 우리 진주시로 돌아가자. 가서 결혼해. 응?”박민정은 그의 손을 막으며 말했다.“저... 결혼은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그녀는 유남우에게서 몸을 빼내려 했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유남우는 박민정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오빠, 이러지 말아요. 나 무서워...”그 순간, 박민정은 몸과 마음이 유남우와의 접촉을 거부하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분명 이전에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왜 이렇게 거부감이 들까?그 이유를 그녀 본인도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확실히 원하지 않았다.유남우는 그런 박민정의 반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왜 박민정이 기억을 잃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을 거부하는 걸까.그는 멈추지 않았다.박민정은 자신이 그를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연인 관계였고 지난 1년간은 그녀의 병 때문에 각방을 써왔었다.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박민정은 자신이 유남우를 선택했다는 것을 기억했다.기억을 잃기 전이라면 분명 그를 좋아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이미 자신의 첫 잠자리를 다른 사람과 가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유남우가 이렇게 오래 참아왔는데 그녀가 계속 거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고 유남우는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그러나 그가 더 나아가려던 순간, 손끝이 차가운 감촉에 닿았다.고개를 들어보니 박민정이 눈을 꼭 감은 채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서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이 순간, 그의 가슴은 깊고 날카로운 고통으로 가득 찼다.유남우는 곧바로 옆에 있던 담요
“무슨 일이야?”유남우가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도련님, 큰일입니다. 회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많은 주주들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매도하면서 주가가 폭락했어요. 게다가 유석진이 다시 주주총회를 소집하려 하고 있습니다.” 홍주영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유남우는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일단 상황을 최대한 안정시켜. 곧 돌아갈게.”“도련님, 저 혼자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요. 고 사모님도 이미 도착했는데 유석진이 회의에서 그분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습니다!” 홍주영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그녀는 유남우가 해외에서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회사를 방치하고 떠날 일이 있는지 의문이었다.유남우는 핸드폰을 쥔 채 눈앞의 박민정을 바라보며 한순간 갈등에 빠졌다.유남준은 그의 통화 내용을 알아채고는 비웃듯 말했다.“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민정이를 책임지겠다는 거지?”말을 마친 유남준은 핸드폰을 꺼내 박민정의 눈앞에 내밀었다.“민정아, 이걸 봐. 이건 우리 결혼 증명서야.”박민정이 핸드폰 화면에 비친 결혼 증명서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사진 속에서 자신은 하얀 셔츠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고 옆에는 유남준이 앉아 있었다.그리고 증명서에는 두 사람 선명히 적혀 있었다.유남우는 더 이상 전화를 이어가지 않고 홍주영과의 통화를 끊어버렸다.“민정아, 이런 증명서는 원하는 만큼 만들어낼 수 있어. 전혀 믿을 가치가 없어.”그러자 유남준이 도전적으로 물었다.“그렇다면 민정이가 나와 함께 진주시로 돌아가는 걸 허락할 수 있겠어?”유남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민정이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돌아가는 건 무리야.”“어디가 아픈 건데?” 유남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자 유남우는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민정이 몸 상태조차 모르는 주제에 남편이라니. 우습지 않아?”그는 유남준을 무시한 채 대놓고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가자, 민정아. 방으로 들어가자.
윤소현의 마음속에는 전에 없던 불안감이 차올랐다.“어떻게 이런 일이... 박민정이 아직 살아 있다니!”그녀는 천천히 몸을 웅크리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박민정이 살아 있다면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 갈 것이고 진주시에 돌아가면 정씨 가문 외동딸의 위치마저 위협받게 될 것이다.온몸이 떨리던 윤소현은 머리가 복잡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결국 한 사람을 떠올렸다.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지원은 과거 사건 때 교묘하게 불참 증거를 만들어냈던 장본인이다. 덕분에 박민정의 실종 사건은 모두 윤소현의 책임으로 돌아갔고 이지원은 다시 스크린 위로 화려하게 복귀해 일약 인기 스타가 되었다.이때 촬영장에 있던 이지원은 걸려 온 전화를 보고 처음엔 끊으려 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한 끝에 받기로 결심했다. 윤소현이 무슨 일로 연락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오랜만이네요, 윤소현 씨. 1년 넘게 연락도 없더니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혹시 또 내가 박민정을 해쳤다고 말하려고?”그녀는 비꼬듯 말했다.윤소현은 그녀의 조롱에 신경 쓰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지원 씨, 박민정은 죽지 않았어요.”순간 이지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그녀가 놀란 것은 박민정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윤소현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농담하는 거죠? 박민정은 이미 죽었다고 했잖아요. 설마 직접 봤어요?”이지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민정은 유남우가 데려갔고 지금껏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유남우가 윤소현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철저히 했을 텐데, 도대체 그녀가 어떻게 알게 된 걸까?윤소현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박민정은 지금 해외에 있어요. 그리고...”그러나 박민정이 유남우와 함께 있다는 말은 결국 내뱉지 못했다.이지원은 드디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아마 착각한 거겠죠.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리 없잖아요. 게다가 만약 박민정이 정말 해외에 있다면 왜 진주
박민정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했다.심각한 정신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외 대기업들과 협력할 수 있지?그녀는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지는 기분이었다.“민정아, 무슨 생각해?”유남우가 차에 올라탄 그녀를 보고 조용히 묻자 박민정이 고개를 저었다.“별거 아니에요.”유남우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박민정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며 물었다.“혹시 저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없어요?”이 말에 유남우의 목젖이 떨렸다.“민정아, 날 믿어줘. 내가 너를 해칠 리 없잖아.”박민정도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그가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요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려고 했는데 정말 기억이 흐릿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죠? 그런데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질 않아요. 그리고 정숙 아줌마에 대해서도...”유남우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기억이 안 나면 그냥 잊어버려. 굳이 떠올리려고 하지 마.”그는 다시 박민정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박민정은 이번에도 피했다.유남우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지난 1년 넘게 쌓아온 노력이 허물어질까 봐 두려웠다.‘여기서 모든 걸 망칠 순 없어.’“전에 네가 꽃밭을 보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 그래서 내가 비행기 표를 준비했어. 게다가 꽃으로 가득한 저택도 한 채 샀는데 정말 아름다워.”그는 비행기 표를 꺼내 박민정에게 내밀었다.박민정이 표를 들여다보니 출발 시간은 오늘 새벽이었다.“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난다고요?”유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여기 환경이 네 회복에 좋지 않은 것 같아. 의사도 그랬잖아. 치료를 조금만 더 받으면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그때는 더 이상 과거를 물어볼 필요도 없을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부여잡았다.“어쩌다가 교통사고로 기억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자, 피곤할 텐데 이제 좀 쉬어.”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또 부부라니?박민정의 눈에 의심이 가득했다.‘혹시 이 남자, 머리가 좀 이상한 거 아니야?’“저기요, 혹시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닌가요? 제가 어떻게 당신의 아내일 수 있어요?”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깊이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엔 떠날 기색이 없었다.“우린 단순히 결혼한 사이가 아니야. 아이만 네 명이나 있잖아. 이 모든 걸 잊어버린 거야?”‘결혼에, 아이가 넷이라니!’박민정의 얼굴에 더욱 큰 충격이 스쳤다.“유남준 씨, 농담하지 마세요. 저한테 애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유남준은 그녀의 이런 반응에 마음이 저려왔다.“유남우가 대체 너한테 뭘 한 거야?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데?”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휴대폰을 들어 증거를 보여주겠다는 듯 전화를 걸었다.“지금 바로 윤우와 예찬이에게 전화해 볼게. 직접 보고 나서도 믿기 어려우면 그때 말해.”영상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화면 속 아이가 소리쳤다.“나쁜 아빠, 왜 전화했어요?”유남준이 먼저 전화를 걸어온 건 처음이라 여덟 살의 박윤우는 놀라움과 의아함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보이는 박민정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엄마! 엄마! 엄마, 진짜 엄마에요? 나 꿈꾸고 있는 거 아니죠? 정말 엄마 맞아요?”아이가 흥분해서 소리치자 박민정의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웠다.“네가... 내 아들이라고?”박윤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엄마, 무슨 말이에요? 전 당연히 엄마 아들이죠. 설마 절 잊은 건 아니죠? 아니면 장난치는 거예요?”박민정의 눈앞에 나타난 이 귀여운 소년은 그녀의 상상을 넘어섰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듯 유남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분명 당신이 꾸민 일이죠, 그렇죠?”그러나 화면 속 박윤우는 계속 울먹였다.“엄마, 왜 그래요? 아픈 거예요? 나쁜 아빠, 엄마 얼른 데려와요. 저랑 형, 동생들도 엄마 너무 보고 싶어요.”유남준은 다급한 박윤우를 진정시키며 말했다.“알겠으니까
“월급 정산하고 당장 꺼져요!” 제임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네...”그 직원은 이렇게 쉽게 직장을 잃을 줄은 몰랐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며 고개를 숙였다.주영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서 있었고 잠시 후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 변명했다.“사장님, 정말로 박민정이 먼저 손을 댔습니다!”제임스는 더욱 분노하며 소리쳤다.“주 비서가 여기 버젓이 서 있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지금 당장 사모님께 사과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를 적으로 돌리는 셈입니다.”주영리는 눈가가 붉어졌지만 제임스를 적으로 돌릴 자신은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박민정에게 사과하는 일이 너무 억울하고 치욕스러웠다.박민정도 유남준이 이렇게까지 영향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의 가벼운 한마디가 사장까지 움직이게 하다니,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주영리는 어쩔 수 없이 박민정을 향해 다가가 말했다.“죄송합니다, 유 사모님. 다 제 잘못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박민정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에는 병원에서 보내온 검사 결과가 떠 있었는데 물컵 안에서 약물의 잔여물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박민정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로 다 해결된다면 경찰은 왜 필요하겠어요?”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주영리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휴대폰을 들어 신고 전화를 걸었다.제임스는 조금 의아했다. 이런 싸움 문제는 경찰을 부르는 것보다 내부에서 해결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박민정이 그쪽을 향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이 놀라 입을 다물었다.“어제 밤 회사 동료가 제게 약을 탄 음료를 건네고 저를 어떤 남자의 방으로 보냈어요. 여기에 관련 CCTV 영상과 병원의 감정서가 있습니다.”이 말을 들은 직원들은 웅성거리며 속닥이기 시작했다.“세상에... 어제 밤 민정 씨가 자발적으로 최 사장을 따라간 줄 알았는데, 사실이 아니었다니?”“주 비서가 이런 짓까지 하다니
“지금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 주 비서, 왜 먼저 손을 댄 겁니까?” 제임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질책하자 주영리는 억울한 표정으로 먼저 변명했다.“사장님, 먼저 손을 댄 건 박민정이에요. 저는 단지 방어를 했을 뿐입니다.”제임스는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어서 손부터 놔요!”주영리는 마지못해 박민정을 풀어주면서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위협했다.“오늘은 운이 좋았네. 두고 봐, 회사에 계속 있는 한 내 손에서 벗어나진 못할 거야.”박민정은 주영리와 다른 여자가 잡아당겨 흐트러진 옷을 정리한 뒤, 자리에 앉았다.‘병원에서 감정 결과만 나오면 누가 회사를 떠날지 뻔히 알겠지.’방금 두 여자를 상대한 탓에 박민정의 손과 얼굴에는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상처를 처리하며 사장과 유남준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한편, 주영리는 키 크고 잘생긴 유남준을 보고 자연스레 다가갔다.“사장님, 이분은 누구신가요?”제임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은 주영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박민정에게 걸어갔다.박민정의 얼굴과 손에 난 상처를 보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그 여자 말고 또 누가 너한테 손댔어?”박민정은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 빠져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박민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 사이 주영리가 다가왔다.“아, 유 대표님이시군요! 방금은 오해였어요. 근데 박민정 씨 그렇게 무고하지 않아요. 방금 제 뺨을 두 대나 때렸어요.”주영리는 유남준을 보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이렇게 잘생기고 돈도 많은 남자라니. 좀 더 얘기 나눠봐야겠어.’그러나 유남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내 아내가 누구를 때리든 무슨 문제가 됩니까?”아내?주영리는 멍해졌다.박민정도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내가 언제 이 사람 아내가 됐지? 난 남우 오빠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