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저녁 아홉 시 정도였다.그녀는 창고로 썼던 방에서 물건을 다 꺼냈다. 이 방은 아주 허름했지만 안에 화장실이 있어서 유남준이 박민정이나 은정숙의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었다.저녁 열 시.마이바흐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섰다.뒷좌석에 앉은 유남준은 허리를 곧게 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차에서 내린 기사가 밖에 서서 공손하게 얘기했다.“유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사모님을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유남준의 명령 때문에 운전기사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았다.유남준은 법원을 떠나면서 박민정에게 다시 보지 말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날 데리고 가.”유남준은 그렇게 얘기하고 차에서 내렸다.이렇게만 보면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네.”운전기사는 조심스레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유남준이 거절했다.“어떻게 가면 되는지만 알려줘.”유남준은 다른 사람이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길을 걷는 것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병신이 되고 싶지 않았다.“네.”운전기사의 말에 따라 유남준이 천천히 발을 옮겨 집 앞으로 왔다.운전기사는 박민정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어서 어쩔 수 없이 문을 두드려야 했다.박민정은 노크 소리를 듣고 그제야 문을 열었다.찬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녀는 옷깃을 꽉 여민 채 유남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얘기했다.“들어와요.”운전기사는 유남준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따라 들어갈 수 없어 굳은 채로 서 있었다.하지만 발을 옮기자마자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시선을 돌려보니 박민정은 유남준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그의 뒤에서 걸으면서 유남준이 소파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돌아가서 박민정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괜히 부부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차에 돌아온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 중얼거렸다.“앞으로 절대로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
“제가 가볼게요.”박민정은 얼른 내려갔다. 하지만 유남준 방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다른 이상한 점도 보이지 않았기에 박민정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유남준이 이 공간에서 버티지 못해 떠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이튿날.박민정은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당근이 들어간 죽을 준비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유남준은 당근을 좋아하지 않았다.박예찬은 그런 유남준을 닮아 당근이 들어있는 음식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은정숙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박민정은 죽을 일부분 남기고 유남준에게로 갔다.유남준은 마침 씻고 나와 있었다. 그는 홈웨어로 갈아입고 있었다. 박민정은 그런 유남준의 이마에 큰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제의 소리는 아마도 유남준이 이마를 부딪친 소리였던 것 같다.박민정은 일부러 못 본 체 하면서 입을 열었다.“아침을 먹어요.”“응.”유남준은 조심스레 걸어왔다.이곳은 크지 않았지만 가구가 많았다.그는 또 가구를 건드려 박민정이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빨리 떠났으면 했지만 유남준이 벽에 부딪히려는 것을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었다.“왼쪽으로 가요. 벽에 부딪히겠어요.”유남준은 그대로 굳었다. 귀는 아주 붉어져서 홍당무 같았다.그는 왼쪽으로 걸어가더니 빠르게 테이블 옆으로 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고마워. 이젠 기억했어.”그의 말투와 태도를 보면서 박민정은 그가 기억을 잃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이 이런 태도로 나오니 그를 괴롭히기도 어려웠다.박민정은 죽을 뜨고 계란 후라이 두 개를 올려주면서 말했다.“여기요.”“고마워. 앞으로는 내가 일찍 일어나서 도와줄게.”어젯밤, 그는 낯선 곳에서 잘 자지 못해서 늦게 일어났다.박민정은 멍해졌다.“됐어요.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 뭘 도와줄 수 있다는 거예요.”유남준은 목이 막혔다.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일하지 않아도 돼. 은정숙 씨와 함께 두원으로 와. 내가 먹여 살릴게.”먹여 살린다...
은정숙은 깜짝 놀랐다. 흐릿한 그녀의 시야 속에 유남준의 실루엣이 보였다.그는 소매를 걷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싱크대 안에는 세정제의 거품이 가득했다.은정숙이 마지막으로 유남준과 연락한 것은 5년 전이었다.그 전화에서 은정숙은 유남준에게 박민정을 잘 부탁한다고 했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아주 냉정했다. 그때 유남준이 한 말을 은정숙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박민정이 어떻게 살든지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겠죠.”은정숙은 예전의 일을 떠올리면 유남준이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유남준이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은정숙은 폐에서 그림자가 발견되어서 요즘 몸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했다. 그녀는 자기한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그저 마지막까지 박민정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그녀는 겨우 발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가서 차갑게 얘기했다.“유 대표님,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돌아가요. 이런 집에서 적응하지 못할 겁니다.”유남준은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바로 박민정이 말한 은정숙이라는 걸 알았다. 즉 유남준의 장모님이다.“민정이가 사는 곳이니 나도 살 수 있습니다.”은정숙은 약간 흠칫했다.이건 예전의 유남준과 아예 달랐다.그녀는 유남준이 눈이 멀어서 연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유남준을 신경 쓰지 않았다.박민정은 유남준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서다희는 유남준이 걱정되어 아침 일찍 운전해서 그를 보러 왔다.창문을 통해서 유남준이 박민정의 말을 따라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본 서다희는 놀라서 굳어버렸다.은정숙이 휴식하고 박민정이 곡을 쓰고 있을 사이에, 서다희는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갔다.“대표님, 왜 이런 일을 하고 계십니까.”서다희는 유남준 손의 그릇과 수저를 빼앗아 유남준 대신 설거지를 했다.유남준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대표님이 걱정되어서 왔습니다.”서다희는 유남준의
점심 열한 시.호산 그룹 회의실에는 유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모였다. 그리고 주주들과 임원들, 기자들까지 와 있었다.모든 사람들은 호산 그룹을 이어받을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주주총회에는 유명훈뿐만이 아니라 유성혁 부부와 유씨 가문의 방계 친척들까지 왔다.모든 사람들은 이번 주주총회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챙기려고 하고 있다.유씨 가문에는 젊은 청년들이 많았다. 다만 유남준보다 사업을 잘하는 사람은 없었다.이번에 유남준한테 사고가 난 후, 그들은 서로를 경쟁 상대로 보고 있었다.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다만 주주총회에 고영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영란이 유남준이 파면되는 일 때문에 참석하지 않으려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회의가 시작된 지 10여 분이 지난 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영란이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유남준이 들어왔다. 맞춤 제작된 어두운색의 정장과 주름 하나 없는 정장 바지, 190센치의 키는 마치 런웨이에서 내려온 모델 같았다.모든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놀라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유성혁 부부는 그를 보자마자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았다. 유남준은 나타나서 한마디만 했다.“회의는 여기서 끝입니다.”사람들은 반기를 들 수도 없었다.호기롭게 연 주주총회는 어쩔 수 없이 끝났다.야망을 품고 왔던 청년들은 재빨리 꼬리를 빼고 도망갔다.매체 기자들이 얼른 기사를 보도했다.[유남준이 주주총회에 나타났다! 그의 눈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호산 그룹 주주총회가 해산되었다!]기사를 본 사람들은 얼른 댓글을 달았다.[역시 호산 그룹 대표이사답네. 너무 잘생긴 거 아니야?][저런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하마터면 인성 쓰레기라는 걸 잊을 뻔했네. 역시 얼굴이 다야.]박민정은 그 뉴스를 보면서 동공이 약간 떨렸다.유남준이라니?그럴 리가?그녀는 옆을 쳐다보았다. 유남준은 점자를 배우는 데 집중하느라 TV의 뉴스는
조하랑은 몇 마디 더 나누고 싶었지만 박예찬이 오는 것을 보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예찬아, 왜 벌써 왔어? 오늘 일찍 끝났어?”조하랑은 박예찬을 다시 유치원에 데려다주려고 했다.박예찬은 진작 문앞에 와서 모든 대화 내용을 다 들었다. ‘쓰레기 아빠가 기억을 잃고 눈까지 멀어서 엄마랑 같이 살고 있는 거구나. 어쩐지 나를 빨리 이모 집에 두고 가려고 했지.’“응. 선생님이 날씨가 추워서 금요일에 일찍 오래. 이모, 선생님이 단톡방에서 얘기했잖아.”조하랑은 머리를 탁 쳤다.“미안해, 단톡방 메시지를 확인 못 했어.”운전 기사도 없었기에 박예찬은 혼자 걸어왔다.조하랑은 죄책감에 그를 꼬옥 안았다.“이리 와. 이모가 사죄의 의미로 뽀뽀해줄게.”박예찬은 얼굴을 구기면서 피했다.“싫어.”“알았어.”조하랑은 저도 모르게 실망했다.그 모습을 본 박예찬이 말했다.“이모, 죄책감이 들면 나를 데리고 신림현에 가줘. 엄마랑 같이 주말을 보내고 싶어.”그는 유남준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 싶었다.“안돼.”조하랑이 바로 거절했다. 조하랑은 박민정에게 박예찬이 유남준과 만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었다.하지만 박예찬이 입을 열었다.“며칠 전에 뉴스를 봤는데 다섯 살짜리 애가 혼자 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교통사고가 났대. 여섯 살짜리 애는 혼자 집에 가다가 납치당했고...”“...”이건 일부러 조하랑이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앞으로 널 데리러 가는 걸 잊지 않을게.”“그럼 주말에 친구 집에 가서 놀래.”“그래.”조하랑이 바로 대답했다.그녀는 박예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박예찬은 원래 처음부터 주말에 친구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조하랑이 동의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그래서 먼저 신림현에 가겠다고 한 후 조하랑이 동의하지 않으니 친구 집에 가겠다고 말을 꺼냈다.원래 사람들은 10만 원을 달라고 했다가 5만 원을 달라고 하면 그러려니 하고 주는 편이다. 오늘 박예찬이 유치원에 가자 아이들
신림현.박민정은 전화를 끊은 후 점자를 배우고 있는 유남준을 보면서 물었다.“뉴스 내용 들었어요?”“응.”유남준은 머리도 들지 않고 얘기했다.“나인척하는 사람이 있네.”“신경 쓰지 않아요?”박민정이 또 물었다.“민정아, 난 그저 너랑 잘 살고 싶어. 점자를 배워서 앞으로 너와 네 배 속의 아이를 잘 지키고 싶어.”유남준이 대답했다.아이...박민정의 손이 저도 모르게 배로 향했다.“무슨 아이를 말하는 거예요?”“어머님이 이미 알려주셨어. 네가 임신했다고.”유남준은 고개를 들어 박민정이 있는 방향을 보면서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눈이 멀었다고 해도 너와 아이는 꼭 지킬 거니까.”박민정은 고영란이 이 일까지 그에게 알려줬을 줄 생각도 못 했다. 어차피 유남준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 않는가.박민정은 차갑게 얘기했다.“배 속의 아이는 당신 아이가 아니에요.”유남준은 흠칫 굳었다.박민정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지만 예상과는 달랐다.유남준은 손에 쥔 책을 더욱 꽉 쥐고 물었다.“누구 아이야?”“어차피 당신 아이는 아니에요.”박민정은 연지석을 방패로 삼고 싶지 않았다. 얼른 자리를 떠나 떨리는 심정을 감추려고 했다.하지만 유남준이 그녀의 손을 확 잡았다.“누구 아이인지 모르겠다면 그럼 내 아이야. 내가 잘 보살필게.”박민정은 멍해졌다.유남준의 아이가 아니라고 했을 뿐이지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다고 한 적은 없다.박민정이 변명하려고 할 때, 유남준이 진지하게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큰 그룹을 관리했던 사람이야. 아무리 지금은 눈이 멀었다고 해도 너와 아이를 굶기지는 않을 거야.”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변명하는 것도 귀찮게 느껴졌다.“됐어요. 당신만 잘 챙겨요.”박민정은 얼른 위층으로 올라가 계속 곡을 썼다.지금 그녀에게는 많은 돈이 있었지만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전에 박씨 가문의 재산도 몇십조에 다다랐지만 결국 파산하지 않았는가.박민정이 고개를
“걱정하지 마요. 다시는 괴롭힘 당하지 않을 거니까.”박민정은 장명철과 대화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해외 회사에 연락해 은행 송금 기록을 보내오게 했다. 그리고 바로 장명철에게 넘겼다.장명철은 강연우처럼 대단한 변호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바움 그룹의 법무였기에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일을 다 처리한 박민정은 심란해서 진정할 수가 없었다.5년 전. 그녀는 목숨으로 한수민과 사이를 끊었다.하지만 한수민은 또 돌아왔다.“민정아.”닫히지 않은 방문 틈 사이로 언제 왔는지 모를 은정숙이 박민정을 쳐다보고 있었다.그 소리를 들은 박민정이 고개를 돌렸다. 거의 하얘진 머리의 은정숙이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박민정을 쳐다보고 있었다.“아줌마, 왜 일어나셨어요?”“너무 오래 자서 더는 잘 수가 없어.”은정숙이 온화하게 웃었다.박민정이 얼른 일어나 그녀 앞에 가서 그녀를 부축했다.“그럼 저랑 나가서 같이 걸을까요?”“그래.”은정숙은 문앞에서 박민정의 통화내용을 들었다. 누군가가 돌아왔기에 박민정더러 조심하라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았지만 은정숙은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그녀는 박민정이 이미 다 컸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따라다니며 엄마라도 부르던 아이가 아니었다.박민정은 두꺼운 외투를 은정숙에게 입혀준 후 유남준에게 말해놓고 나갔다.길에는 사람이 적었다.눈이 금방 그쳐서 길에는 눈이 높게 쌓여있었다.“민정아, 너 어릴 때는 눈 오는 걸 엄청 좋아했었는데.”은정숙이 작게 얘기했다.박민정은 그녀의 팔짱을 낀 채 얘기했다.“네. 눈이 오면 곧 명절이잖아요. 명절 때마다 새 옷도 있고 맛있는 것도 있었어요.”은정숙은 명절을 싫어한다고 박민정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한번은 박민정이 박씨 가문으로 돌아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흐릿한 두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면서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민정아, 내가 가기 전에 네 곁에서 널 지켜줄 사람을 보고 싶어.”박민정은 약간 흠칫하고 은정숙을 안으면서 눈시울을 붉
박민정은 그녀의 친엄마가 오늘 신림현에 왔다는 것을 전혀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그녀가 허름한 집에서 사는 것까지 들켰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한수민도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오늘 그녀를 찾아온 건 장명철 손의 1600억 때문이다.며칠 전 한수민은 해외에서 이지원의 전화를 받았다. 박민정이 죽지 않고 진주로 돌아와 호산과 사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래서 한수민은 귀국했다. 그녀는 박민정 예전과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유남준과 이혼 소송이나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허름한 집에 살면서 가정부랑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본 그녀는 운전 기사더러 다시 진주로 가라고 했다.진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박민호에게 연락했다.“오늘 박민정을 봤는데 1600억은 박민정의 돈이 아닌 게 확실해.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그 돈을 손에 넣어야 해.”만약 박민정에게 1600억이 있다면 왜 이렇게 허름한 곳에서 살겠는가.“걱정하지 마요. 어머니.”말을 마친 박민호가 이어서 얘기했다.“어머니, 박민정이 뭐라고 안 해요? 누나와 아버지 일은 알고 있대요?”박민호가 말하는 누나는 박민정이 아니었다.“당연히 모르고 있지. 소현이한테 이런 쓸모없는 동생이 있다는 걸 알리지 않을 생각이야.”...박민정은 회사 대표까지는 아니었지만 한수민의 생각처럼 가난한 것도 아니었다.요즘 그녀는 곡을 써서 돈을 꽤 벌었다.어릴 때 은정숙과 같이 살면서 돈 없는 나날을 보내왔고 보청기를 사지 못했던 나날들을 떠올린 그녀는 이런 장애가 평범한 가정에게는 큰 압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박민정은 해마다 돈을 일부분 꺼내 자기와 같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치료비로 썼다.이곳에 살기로 한 것도 은정숙의 집이자 어릴 때 박민정의 집이기 때문이었다.물론 한수민은 모를 것이다.저녁.박민정은 은정숙을 휴식하게 한 후 자기와 유남준의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전부 그가 싫어하는 음식이었고 그가 싫어하는 당근도 가득했다.유남준은 홀로 음식을
두 여자는 하나같이 악독했다.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박민정을 찾아가기로 했다.“아이들 잘 지켜봐요.”“걱정 마세요.” 이지원이 대답했다.윤소현은 그제야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유남준이 볼일 보러 나간 후에야 박민정의 병실로 들어갔다.“형수님, 들었어요. 쌍둥이 아들을 낳으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윤소현은 들어오자마자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박민정은 윤소현의 지금까지의 행적을 떠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나가주세요. 여기서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환영하지 않는다고요? 어제 친자 검사 때문인가요?” 윤소현이 일부러 그녀를 자극했다. “박민정, 사실 난 진작 알고 있었어. 네가 정수미의 친딸이라는 걸.”“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정수미가 널 인정하나? 오늘 누가 날 보내왔는지 알아?”박민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윤소현은 의도적으로 모든 죄를 정수미에게 뒤집어씌웠다. “바로 정수미야. 그 여자가 특별히 날 보내서 너한테 확실히 말하라고 했어.”“정수미 말로는 장애가 있는 딸은 있을 수 없대. 설령 친딸이라 해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 헛수고 하지 말라고.”친딸인데도 인정하지 않는다고?박민정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굉장히 아팠다.“그래요? 친딸에게 빚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보상하겠다고도 했는데...”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박민정의 모습에 윤소현이 냉소를 지었다. “그건 남들 보라고 한 거지. 생각해 봐. 정수미가 어떤 사람이고 넌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정이 있겠어? 그저 친딸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장애...장애!박민정은 기분이 매우 얹짢았지만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그런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요? 정수미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난 알아요. 그분이 진심으로 친딸을 찾고 싶어 한다는 걸요.”박민정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고 윤소현의 말 몇 마디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
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파도가 일렁였지만 겉으로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어서 가서 찾아. 두 아이를 찾지 못하면 진주시에 있을 자격도 없어.”“네, 네, 네.” 경호원들이 즉시 수색에 나섰고 유남준은 휴대폰을 들어 다른 전화를 걸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누가 아이들을 데려갔는지 반드시 찾아내.”소인배들이 그를 만만하게 본 걸 보니, 예전에는 지나치게 너그러웠나보다.“그리고 진주시의 원수들을 하나하나 다 처리해.”“네.”유남준은 모든 지시를 내리고 박민정의 병실로 향하던 중 그만 비틀거리며 한 발짝 휘청거렸다.박민정은 막 깨어난 참이라 아이들이 사라진 사실을 몰랐다.그녀는 유남준을 보자마자 물었다. “남준 씨, 우리 아이들은 어디 있어요? 보고 싶어요.”유남준은 다가가서 거짓말을 했다. “두 아이 모두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어. 황달이 조금 있거든”“그래요? 그럼 내가 일어나서 보러 갈게요.” 아이들이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안 돼. 넌 지금 몸이 약해. 의사 말로는 이틀은 더 누워 있어야 한대. 서두르지 말고 몸이 좋아지면 보러 가자.” 유남준이 부드럽게 달래자 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그러고는 팔을 뻗었다. “안아줘요.”최근 이틀은 몸도 마음도 지쳤고 정말 힘들었다. 유남준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녀를 살며시 안았다.박윤우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을 때 바로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 “엄마, 아빠...”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긴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여전히 보였고 시선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박민정은 서둘러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윤우야, 이리 와봐. 엄마가 좀 볼까?”간호사도 다가왔다.“축하드립니다. 제대혈 교차검사를 했는데 적합하네요. 윤우가 곧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이 소식에 박민정은 무척 기뻤다.“정말요?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별 말씀을요. 당연한 일입니다.” 간호사는 이
“지금 회사가 정상 운영이 안 되고 밖에서 시위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언론인들도 데리고 왔는데 쫓아내기도 곤란하고요.” 진서연은 해외에서 박민정의 작은 회사나 관리했지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지만 유남준은 오히려 침착했고 차근차근 지시를 내렸다.연지석도 왔는데 도우려다가 유남준이 있는 걸 보고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이때 설인하가 창백한 얼굴로 사과했다. “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지난번에 주신 프로젝트를 또... 망했어요.”그녀는 지금 자신의 능력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고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연지석은 그녀를 탓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이건 설인하 씨 잘못 아닙니다. 내가 인하 씨 같은 평직원이었고 뭘 하든 막으려는 재벌 회장까지 있다면 나도 성공 못 했을 겁니다.”설인하가 놀랐다.“무슨 뜻이세요?”“인하 씨랑 방성원 씨의 부부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조사해 보니 내가 인하 씨한테 줬던 프로젝트들은 다 방씨 가문에서 가로챘더군요.”설인하는 가슴이 철렁했고 곧이어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그랬군요!”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사장님,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제 개인사 때문에 사장님 프로젝트에 피해를 끼쳤네요.”연지석은 두 손을 책상 위에 모았다.“괜찮아요. 민정 씨 친구니까 내 친구기도 해요. 이 정도 프로젝트는 별거 아니에요.”“감사합니다.” 설인하는 다시 허리 굽혀 인사하고 연지석 사무실을 나와 방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왜 이런 비열한 짓을 한 거야!”아직 새벽 4시였다. 방성원은 설인하가 혼자 자다가 잠이 안 와서 자기를 생각하며 전화한 줄 알았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이른 아침부터 날 욕하려고 깨운 거야?” 방성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욕은 무슨, 때리고 싶을 정도야! 왜 내 프로젝트를 가로채? 그게 너한테 무슨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 방씨 가문이랑 우리 PMJ는 업종도 다르고 경쟁사도 아니잖아!” 설인하는 분노가 치밀어 목소리가 떨렸
박민호는 그 말을 듣고 아첨하는 웃음을 지었다. “형,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걱정 마세요, 꼭 도와드릴게요.”차가 출발하자 박민호는 이미 자신이 진주시의 유력 인사가 되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병원 밖에는 그들 외에도 윤소현과 이지원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평범한 차 안에 앉아 각자 생각에 잠겼다.“아들 둘을 또 낳았대요!” 윤소현은 질투심을 숨기지 못했다.유남준에게 아들이 넷이나 있으니 앞으로 자기 아이와 재산을 두고 경쟁할 인물이 생긴 것이다.이지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소현 씨, 우리 계획대로라면 곧 박민정의 경사가 상사로 바뀔 거예요.”윤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 소식을 최현아에게도 전했다.최현아는 최근 시아버지 유석진과 함께 호산 그룹에 있으면서 유남우의 권력을 빼앗으려 했던 터라 갑자기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짜야?”“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요? 조금만 알아보면 알 수 있죠.” 윤소현이 한숨을 쉬었다. “박민정의 아들 둘도 똑똑한데 이제 둘이 더 생겼으니 지훈이나 제 미래의 아이는 스트레스가 심하겠네요.”최현아는 옆에서 게임하는 유지훈을 보자 화가 났다. “얼른 숙제나 해!”“엄마, 유치원에 무슨 숙제가 있어요.” 유지훈이 불평하며 제 할 일을 계속했다.최현아는 어쩔 수 없었다. 윤소현이 일부러 자신을 부추기는 걸 알았기에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다.“요즘 경쟁이 치열하지. 박민정이 출산했으니 나도 가봐야겠네. 알려줘서 고마워.”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여기서 최현아가 소식을 들었다면 고영란도 당연히 알았을 터. 그녀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귀여운 사내아이 둘을 보자 그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민정아, 남준아, 예찬이랑 윤우는 어렸을 때 내가 제대로 키우지 못했잖아. 이번엔 꼭 이 두 아이만큼은 내가 곁에서 돌보면서 키우고 싶어.”박민정이 따뜻하게 웃었다. “좋아요.”유남준은 그녀가 동의하는 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
마침내 분만실 문이 열리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간호사가 두 아기를 데리고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유남준은 아기를 보지 않고 바로 분만실로 들어갔는데 분만실에는 박민정이 기력이 없이 누워있었다.“민정아.”박민정은 힘겹게 웃었다. “괜찮아요.”유남준은 그런 그녀가 더욱 안쓰러웠다.“이제 그만 낳자.”“네, 좋아요.”박민정이 대답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아기들은요?”“밖에 있어, 건강해.” 유남준의 이 말에 박민정은 안심되면서도 궁금했다. “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유남준이 멈칫했다.“잠깐만, 내가 보고 올게.”그는 박민정 생각에만 빠져서 아기를 보는 걸 잊고 말았다.밖으로 나오니 박윤우와 박예찬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기들은요?”조하랑이 혀를 찼다. “이제 아기 생각나요? 신생아실로 갔어요.”“깜빡했네요.”유남준이 물었다.“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멋진 사내아이 둘이에요.”조하랑의 말에 유남준도 박예찬, 박윤우처럼 실망했다. 그는 박민정을 닮은 딸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깊은 잠에 빠졌다.그녀가 쉬는 동안 조하랑과 진서연네는 아기들을 달래고 있었고 의사는 박윤우의 수술을 위한 검사로 바빴다.“너무 작고 귀여워.”진서연은 모성애가 한껏 피어올라 연신 귀엽다고 했으나 박예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동생이 하나라도 있었으면...”“남동생 둘도 좋아, 실망하지 마.”조하랑의 위로에 박예찬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랑 이모, 언제 아기 낳으실 거예요? 저랑 윤우한테 여동생 둘 낳아주세요.”“맞아요, 한 명씩이요.” 박윤우마저 한마디 하자 조하랑은 말문이 막혔다.“꿈도 꾸지 마. 내가 낳은 딸을 왜 너희한테 하나씩 줘? 게다가 성별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조하랑이 부글부글 말하고 있을 때 김인우도 다가왔다. “맞아, 우리 딸
정수미는 돌아간 뒤 박민정이 조산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윤소현이 계속 세뇌를 시도했다. “엄마, 박민정이 회사 일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벌인 것 같아요.”“지원이가 엄마 딸이잖아요. 박민정도 엄마 딸이라면 쌍둥이라도 낳으셨단 말이에요?”정수미는 귓가가 윙윙거렸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만약 박민정이 정말 딸이라면 그동안 자신이 박민정에게 했던 모든 일들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엄마, 왜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절대 믿으시면 안 돼요. 그럼 지원이는 어떻게 해요?” 이 말에 정수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좀 조용히 있어 줄래?”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고 몰래 이지원에게 박민정이 모든 걸 알았다고 문자를 보냈다. 이지원도 소름이 돋았다. [정수미가 믿었어요?][아직은요. 하지만 엄마 성격상 분명 조사할 거예요.]이 메시지에 이지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소식 들었는데 박민정이 너무 흥분해서 지금 출산한대요. 소현 씨, 우리는 한 배를 탔어요. 도와주셔야 해요.]혼자서는 박민정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정씨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윤소현은 이지원을 찾아갔고 정수미는 모든 걸 지켜보며 사람을 시켜 그들의 대화를 도청하게 했다.이지원은 방에서 계획을 세우다가 윤소현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적으로는 언니라고 부르지 마요. 무슨 일이겠어요, 박민정 일로 의논하려고 왔죠.”이지원은 윤소현이 악랄하면서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를 찾아오다니, 정수미가 뭐라고 생각할까?“아...”이지원이 목소리를 낮춰 이해관계를 설명한 후에야 윤소현은 깨달았다. “내가 너무 급했네요.”“괜찮아요, 언니. 진실은 밝혀질 테니 일단 쉬세요.”이지원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지만 다른 방에서 대화
박민정은 정수미가 검사 결과를 보고 기뻐할 줄 알았다. 이지원이 가짜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정수미가 제일 먼저 위조 얘기를 꺼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박민정은 목구멍이 바늘에 찔린 듯했다.“이건 진짜예요. 위조된 게 아니에요. 믿지 못 하시다면 직접 확인해보세요.” 윤소현이 비웃듯 말했다.“사기꾼 말 믿고 우리 엄마가 세상 모든 여자랑 친자 검사라도 해야 하나?”그녀는 정수미 손에서 검사서를 뺏어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엄마, 가요. 이런 사기꾼이랑 말할 가치도 없어요.”정수미는 일어서지 못한 채 박민정을 바라보았다. “내 친딸 얘기로 장난치지 말라고 했죠. 평생의 아픔이에요!”박민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절대 용서 못 해요. 다시는 연락하지 마요!” 정수미의 마지막 말이었다.그들이 떠난 후, 박민정은 찢어진 검사서를 바라보았고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바보같아.”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식당을 나섰다. 밖에 나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가슴 한켠을 누르는 거대한 바위같은 무게감이 사라지지 않았다.전화벨이 울리자 박민정은 정수미가 마음을 돌려 자신과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자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아보니 유남준이 건 전화였다.“남준 씨.”“일어났어?”남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박민정은 눈물이 났다. “진작 일어났어요.”“그럼 전화하지 그랬어? 지금 갈게.” 유남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말에 박민정은 휴대폰을 꼭 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일하는데 방해될까 봐... 나 정수미 씨 만나고 왔어요.” 유남준은 걸으며 통화를 이어갔다.“그래서?”“그 사람이 내가 보여준 유전자 검사를 믿지 않았어요. 나더러 사기꾼이래요. 다시는 연락하지 말래요.”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어디야? 내가 갈게. 울지 마.” 유남준이 차에 타며 말했고 박민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병원 근처
윤소현은 정수미가 박민정과 만난다는 걸 알자마자 전화를 걸었고 진짜 그렇다는 걸 확인하고는 순간 급해졌다.“엄마, 제가 같이 갈게요. 박민정이 엄마를 만나자고 한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닐 거예요. 지난번에 칼을 들고 엄마를 협박했던 일을 잊으셨어요?”정수미는 그 말을 듣고 경계심이 들었다. “네가 말하니 기억나네. 걱정 마, 이번엔 경호원을 데리고 갈 거야. 그러면 못할 거야.”“엄마, 무서워요. 제가 꼭 같이 가야겠어요.” 윤소현은 이미 차에 탄 상태였다. “엄마, 주소 보내주세요. 엄마는 제 전부예요. 엄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요.”정수미는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알았어.”주소를 보내고 나서 정수미는 윤소현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비서도 대화를 대충 들었다. “소현 아가씨가 냉철해도 대표님을 많이 생각하시네요.”정수미는 미소 지었다. “그 애는 내가 너무 잘해줘서 그래. 난 정말 걱정이야. 내가 먼저 가버리면 어떡하나...”“대표님, 분명 오래 사실 거예요.” 비서가 아부했다.정수미는 한숨을 쉬었다. “내 몸은 내가 알지. 젊을 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육칠십까지만 살아도 만족해.”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박민정과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윤소현이 오기 전에 정수미는 비서 겸 경호원과 함께 올라갔다.룸의 고급 방에서 박민정은 조용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긴장된 마음을 달랬다.마침내 발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자 정장 차림의 정수미가 비서와 함께 들어왔다.“민정 씨, 무슨 얘기하실 건가요?”정수미는 들어오자마자 앉지도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함미현 일 때문 아닌가요? 박민정 씨가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네요.”예전 같았으면 박민정은 바로 받아쳤을 테지만 지금은 정수미의 얼굴을 보며 잠시 멍해졌다.정수미가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면 대가를 치르게 되죠.”박민정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아무 반응 없이
병실에서 퇴원할 생각 없이 늦게까지 떠나지 않는 진서연 일행. 남자인 유남준은 당연히 그들과 할 얘기가 없어 다른 방에서 계속 일했고 그들이 떠나자마자 그는 밖으로 나왔다. 박윤우는 이미 피곤함에 지쳐 잠들어 있었고 그걸 본 유남준이 박민정 곁으로 다가왔다. “피곤하지 않아? 좀 누워있을래?” 박민정은 매번 누울 때마다 그가 이것저것 장난치는 걸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안 피곤해요, 좀 더 앉아있고 싶어요.”“출산이 얼마 안 남았는데 가서 좀 누워있자. 응?” 유남준이 다정하게 달랬고 결국 박민정은 그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함께 누웠다.불을 끄자 밖의 희미한 불빛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함미현네는 괜찮아요?” 박민정이 물었다. 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걱정 마, 내가 몰래 사람을 붙여뒀어.” “네...”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정수미는 왜 저렇게 잔인한 걸까요?” 박민정은 자신과 박예찬이 그녀 손에 죽을 뻔했던 걸 떠올렸다. 또 함미현네 일을 생각하니 그 사람이 무서워졌다. 함미현의 일은 자업자득이지만, 자신은? 그저 윤소현의 미움을 샀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친어머니라니!“여자가 그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어느 정도 수단은 필요하지.” 유남준이 대답했다. 박민정도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고민이에요. 그분을 엄마로 받아들여야 할지...”“사실 진실을 말해도 좋을 것 같아. 그 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면 되고.” 유남준이 말했다.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결심이 선 듯했다. “좋아요, 내일 가서 얘기해 볼게요.” 어차피 이 문제는 언젠가는 해결해야 했다.“응.” 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박민정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준 씨!” 유남준은 또 ‘응’하고 대답했는데 목소리가 쉰 듯했다.좋아하는 여자가 곁에 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