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그녀의 친엄마가 오늘 신림현에 왔다는 것을 전혀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그녀가 허름한 집에서 사는 것까지 들켰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한수민도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오늘 그녀를 찾아온 건 장명철 손의 1600억 때문이다.며칠 전 한수민은 해외에서 이지원의 전화를 받았다. 박민정이 죽지 않고 진주로 돌아와 호산과 사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래서 한수민은 귀국했다. 그녀는 박민정 예전과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유남준과 이혼 소송이나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허름한 집에 살면서 가정부랑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본 그녀는 운전 기사더러 다시 진주로 가라고 했다.진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박민호에게 연락했다.“오늘 박민정을 봤는데 1600억은 박민정의 돈이 아닌 게 확실해.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그 돈을 손에 넣어야 해.”만약 박민정에게 1600억이 있다면 왜 이렇게 허름한 곳에서 살겠는가.“걱정하지 마요. 어머니.”말을 마친 박민호가 이어서 얘기했다.“어머니, 박민정이 뭐라고 안 해요? 누나와 아버지 일은 알고 있대요?”박민호가 말하는 누나는 박민정이 아니었다.“당연히 모르고 있지. 소현이한테 이런 쓸모없는 동생이 있다는 걸 알리지 않을 생각이야.”...박민정은 회사 대표까지는 아니었지만 한수민의 생각처럼 가난한 것도 아니었다.요즘 그녀는 곡을 써서 돈을 꽤 벌었다.어릴 때 은정숙과 같이 살면서 돈 없는 나날을 보내왔고 보청기를 사지 못했던 나날들을 떠올린 그녀는 이런 장애가 평범한 가정에게는 큰 압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박민정은 해마다 돈을 일부분 꺼내 자기와 같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치료비로 썼다.이곳에 살기로 한 것도 은정숙의 집이자 어릴 때 박민정의 집이기 때문이었다.물론 한수민은 모를 것이다.저녁.박민정은 은정숙을 휴식하게 한 후 자기와 유남준의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전부 그가 싫어하는 음식이었고 그가 싫어하는 당근도 가득했다.유남준은 홀로 음식을
박민정과 유남준이 결혼했을 때, 유남준은 서다희를 통해 그녀에게 카드를 줬었다. 액수도 마침 2억 4천만이었다.그때 서다희가 얘기했다.“여기에는 2억 4천만이 들어있습니다. 유 대표님이 주시는 생활비죠. 유 대표님이 말씀하길 땅 파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물건을 사면 얼마를 썼는지 장부를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유남준과 같이 살겠다고 고영란과 얘기했을 때 박민정은 결심했었다. 전에 유씨 가문에서 겪었던 수모를 다 갚겠다고 말이다.이러면서 기억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남자에게 있어서 여자의 돈을 쓰면서 장부를 기록하는 건 자존심이 꺾이는 일이다.게다가 상대는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남준이다.하지만 유남준은 그 카드를 건네받고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얘기했다.“민정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줘. 같이 사게.”박민정은 약간 흠칫했다.“필요 없어요.”언제까지 연기할 수 있는지 지켜보자고.박민정은 자기 방에 돌아가 쉬었다.그녀가 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다희가 들어와 집안일을 했다.서다희도 주주총회의 일을 알고 깜짝 놀랐다.어쩐지 며칠 전 고영란이 그를 해고하면서 앞으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고영란은 참 독한 사람이었다. 유남준도 그녀의 친아들인데 말이다.서다희는 청소를 마치고 설거지도 끝냈다.유남준은 그를 데리고 밖의 차에 앉더니 카드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대표님, 이건...”유남준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말했다.“민정이가 나한테 돈을 줬어. 로봇청소기와 식기세척기를 사래.”서다희는 약간 의아해했지만 약간 기뻐 보이는 유남준의 말을 계속 듣기만 했다.“내가 돈이 없을까 봐 걱정하는 거야. 전에 골드 카드를 준 적 있는데 싫다고 했어.”오늘 점심, 유남준의 신분을 빼앗은 사람이 나타났을 때 박민정은 그를 관심해주었다.그리고 저녁에는 카드도 주었다.아마도 신분을 빼앗겨서 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서다희는 유남준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오해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대표님, 사모
박민정은 유남준이 이렇게 빨리 물건을 사고 아침까지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테이블에는 죽도 있고 빵도 있고 우유도 있었고 또 과일까지 가득해 테이블을 다 채웠다.유남준은 그녀의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그리고 이건 영수증이야.”박민정은 그가 건네주는 영수증을 보면서 유남준이 정말 자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고 생각했다.“눈이 안 보인다면서 어떻게 산 거예요?”유남준은 우유를 그녀 앞에 가져다주면서 말했다.“핸드폰으로 음성을 보낼 수 있지.”박민정은 크게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우유를 마셨다.데웠던 우유라서 아직 따뜻했다.박민정은 빵을 먹더니 또 일부러 트집을 잡았다.“밖에서 사 온 아침은 못 먹겠어요.”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약간 멍해졌다.“하지만 난 밥을 차릴 수가 없어.”그는 아침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기억을 잃은 후, 서다희가 서류를 보여주면 그는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하지만 요리는 정말 할 줄 몰랐다.“예전에는 어떻게 했는데요?”박민정이 물었다.그녀는 이지원이 그녀에게 보냈던 사진을 기억하고 있었다.유남준은 이지원과 있을 때마다 요리를 해주었다.유남준은 약간 말문이 막혔다가 대답했다.“잊어버린 것 같아.”박민정은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얘기했다.“나도 전에는 요리할 줄 몰랐어요. 당신이 밖의 음식은 깨끗하지 않다고 해서 배운 거죠.”“배울게.”유남준이 바로 대답했다.“그럼 열심히 배워요.”박민정은 음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모든 아침을 다 먹었다. 그리고 떠나가면서 얘기했다.“요리할 때 손 데지 말아요.”그녀는 그저 대충 얘기했을 뿐이지만 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그는 점자를 배우고 예전의 서류를 보고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은정숙과 박민정은 주방에 있으면서 핸드폰으로 요리를 배우는 유남준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다른 한 편.유씨 가문.돌아온 유남우는 유남준이 살던 곳에서 살고 있었다.유남준이
박예찬은 오늘 유지훈을 따라 유씨 가문에 와서 고영란이 찾았다는 아빠를 만나려고 했다.사실 그는 유남준을 대체한 남자가 누구인지 보고 싶었다.그래서 일부러 유지훈더러 자기를 데리고 유남준의 집에 가달라고 했다.“예찬아, 오늘에는 안 왔나 봐. 못 만나겠네.”유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는 박예찬과 함께 처자식을 버린 남자를 혼내주려고 했다.박예찬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말로는 아주 속상한 척했다.“나중에 만나면 꼭 나한테 연락해.”“응.”유지훈은 자기 가슴을 두드리면서 말했다.“나중에 내가 유앤케이 그룹의 대표가 되면 꼭 혼내줄게.”유지훈은 나중에 성인이 되면 폭군이 될 게 분명했다.누구한테서 배운 건지.박예찬은 계속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키 큰 남자를 쳐다보았다.덩치가 큰 유남우는 검은 코트를 입고 눈을 맞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그의 얼굴은 유남준과 똑같았지만 박예찬은 단번에 그가 유남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첫째로 유남준은 지금 신림현에 있다. 둘째, 쌍둥이인 박예찬은 다른 사람들보다 감각이 더욱 예민했다. 그래서 그의 아우라를 보고 유남준이 아니라고 판정했다.유남우는 박예찬을 보고 약간 멍해졌다.박예찬은 유남준의 어린 시절과 꽤 닮았다.유남우는 쌓인 눈을 밟고 걸어갔다. 유지훈은 그가 자기의 말을 듣고 화가 났을까 봐 겁이 나서 얼른 차렷자세로 서 있었다.“삼촌.”“응.”유남우는 차갑게 대답하고 박예찬을 쳐다보았다.“넌 누구야?”“아저씨, 안녕하세요. 전 박예찬이라고 해요.”박예찬이 부드럽게 얘기했다.박예찬은 눈에 조각처럼 잘생긴 유남우의 얼굴을 담으면서 한치의 떨림도 없이 얘기했다.아무리 유남우가 유남준 행세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박예찬은 딱 봐도 눈앞의 사람이 유남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박예찬...박씨?유남우의 동공이 약간 흔들렸다.유남우는 더 묻지 않았다. 박예찬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아저씨, 우리 어디
유지훈은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당당하게 뱉은 말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다.결국 유지훈은 몰래 박예찬을 데리고 으슥한 길로 가서 유남우가 사는 곳 옆문으로 들어갔다.이곳까지 온 유지훈은 심장이 쫄깃쫄깃해졌다.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려있었다.“봤지? 이게 바로 삼촌의 집이야.”박예찬은 동쪽에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그 방은 아주 기둥이 금색 테로 되어있을 정도로 인테리어가 화려했다. 박예찬은 갑자기 배를 그러안고 말했다.“아이고, 배가 아프네. 안 되겠어. 나 화장실 좀 갈게.”말을 마친 박예찬은 유지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동쪽으로 달려갔다.유지훈은 조급해졌다.“그쪽으로 가면 안 돼. 거긴 삼촌이 있는 곳이야!”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한 여자 고용인이 나왔다.그녀는 유지훈을 보더니 바로 꾸짖었다.“유지훈 도련님,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유 대표님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으니 얼른 가세요. 그렇지 않으면 유 대표님께 연락할 거예요.”유지훈은 이미 박예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이 정말 유남준을 불러올까 봐 걱정된 유지훈은 얼른 꽁무니를 뺐다.그러면서 고용인에게 메롱 하고 도망갔다.“기다려. 감히 날 교육하려고 들다니, 나중에 내가 크면 널 해고할 거야!”여자 고용인은 그저 피식 웃었다.이제 4, 5살밖에 안 되는 유지훈이 다 크면 그녀는 진작 퇴직했을 것이다.고용인은 돌아가서 계속 집안일을 했다. 이미 누군가가 유남준의 침실에 잠입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유남준이 사는 곳은 어두운 색조의 인테리어였는데 유남준 본인처럼 차갑고 딱딱했다.박예찬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뒤적였다. 이곳에서 유남준이나 유남준 대역의 약점을 찾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나가려고 할 때, 아래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박예찬은 얼른 책상 뒤에 숨었다.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박예찬은 한 남자가 슬리퍼를 신고 들어오는 것을 쳐다보았다.박예찬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돌아
“이모, 왜 노크 안해?”박예찬은 삐진 얼굴로 얘기했다.“아, 미안해. 까먹었어.”조하랑이 앞으로 다가왔다.“예찬아, 나랑 했던 약속 기억나?”박예찬은 한숨을 내쉬었다.“당연하지. 이모 아들인 척 하고 전남친한데 복수하는 거잖아. 복수는 내가 제일 잘하는 거야. 필요하면 이모 남편까지 찾아줄 수 있어.”조하랑은 눈을 크게 뜨고 얘기했다.“정말?”박예찬은 조하랑이 정말 믿을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을 위해 가슴을 두드리면서 얘기했다.“당연하지. 그 사람은 당연히 이모 전 남자 친구보다 훨씬 나은 사람일 거야.”“돈은 얼마나 드는데?”조하랑이 진지하게 물었다.강연우보다 잘생긴 사람이라면 섭외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어린 박예찬이 이렇게 많은 일을 알고 있다니, 조하랑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그건 상관할 필요 없어. 잘 거야. 잘자.”박예찬은 침대에 누워 이불로 머리를 덮었다.조하랑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모의 희망은 다 너한테 걸려있어. 다음 주면 결혼한댔으니까.”그녀는 중얼거리면서 떠났다.조하랑이 떠난 후, 박예찬은 약간 난감해했다. 조하랑의 말을 들었을 때, 강연우는 아주 잘생긴 사람이라고 한다. 얼마나 잘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조하랑의 안목을 보면 외모가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따로 시간을 빼서 사람을 찾아봐야겠어.’...신림현.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은정숙의 몸 상태도 점점 나빠졌다. 박민정이 할 수 있는 건 그런 은정숙의 곁을 지키는 것뿐이다.은정숙은 박민정이 걱정되어 갑자기 얘기했다.“민정아, 서산의 물만두가 먹고 싶네.”“네, 지금 당장 배달시킬게요.”박민정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은정숙은 그런 그녀를 말리면서 얘기했다.“배달을 시키면 다 식잖아. 가서 사 와주면 안돼?”은정숙은 박민정에게 부탁하는 일이 드물었다.박민정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금 당장 갈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남준 씨한테 얘기해요.”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얘기했다.“응, 알았어.”박민정을 보낸 후 은정숙의
은정숙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즉시 주방에서 걸어 나갔다.쿵!나가면서 팔이 찬장에 부딪혀 큰 소리가 났고 위에 가득 진열되어 있던 양념통들이 거의 전부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그중 하나는 유남준의 손등 위로 떨어져 매끈하고 새하얀 손에 퍼런 멍이 들었다. 유남준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었다. 요 며칠 그는 집안의 물건 위치를 전부 머릿속에 기억했으나 가끔 물품 위치가 변하기도 했다.그리하여 집밖에 나가기 전까지 그는 또 의자와 테이블 등 몇 군데에 부딪히고 말았다.서다희한테 전화를 걸어 당장 운전하여 오라고 했다.그를 기다리는 동안 유남준은 정상인과 눈먼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알게 되었다.만약 눈이 보였다면 그는 진작에 차를 몰고 박민정을 찾아갔겠지만 지금은 서다희가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사는 곳이 여기랑 가까워 5, 6분 정도 되자 서다희가 도착했다.서다희는 멀리서부터 유남준이 눈이 덮인 길목에 서있는 걸 보았다. 박민정한테 쫓겨난 줄로 알고 우산을 가질 새도 없이 급히 유남준한테로 뛰어갔다.“대표님, 왜 이러고 계세요?”유남준은 전화로 다른 얘기는 없고 빨리 오라고만 했다.“차 몰고 서산에 있는 한 만둣집으로 가.”“네.”신림현 서산에는 만둣집이 하나밖에 없는데 장사가 너무 잘 되다 보니 줄을 한참을 서야 살 수 있었다.만둣집에 도착한 후 박민정은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손님한테 마련한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긴 코트를 입은 사람이 그녀 앞에 섰다.“민정아.”고개를 드니 연지석의 연예인 뺨치는 준수한 외모가 눈 안에 들어왔다.“지석아, 너 왜 여기 있어?”“네가 아주머니더러 나한테 전화해서 여기 만두가 맛있다고 얘기하라 한 게 아니었어?”연지석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목구멍이 턱 막혔다.은정숙이 만두가 먹고 싶어 그녀를 심부름 보낸 게 아니라 연지석과 이어주려고 그랬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그러나 또 연지석이 난감해할까 봐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는 말을 차마 꺼내
만둣집 앞.박민정은 연지석이 그의 얼굴로 가져간 손을 급히 거둬들이며 말했다.“그건 다 어려서 철없을때 얘기지.”고작 몇 살밖에 안 됐을 때인데 남녀유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그리고 그때 연지석은 그녀보다도 더 키가 작은 똥똥이였다. 자연스레 그를 동생으로 생각해 은정숙이 맛있는 것을 할 때마다 그한테 갖다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훌쩍 커서 한참은 올려다봐야 하는 키에 재탄생한 것과 다름없는 준수한 외모,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온몸에서 서늘하고 도도한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한테 누가 감히 찬 손을 얼굴에 갖다 대며 장난을 치겠는가.그녀의 정중하고도 서먹서먹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연지석의 깊은 눈동자에 낙담과 쓸쓸함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내 앞에서 넌 철 들 필요 없는데.”어릴 적 겨울날에 그가 추위에 덜덜 떨고 있을 때, 그녀가 남몰래 옷과 이불과 먹을 것을 그한테 가져다주기도 하고 개구쟁이 장난을 치며 웃게 만들었던 기억이 그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누구한테 죽임을 당했거나 아사, 동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이때 박민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우린 철 드는 걸 배워야 해. 너무 천진하고 철 없으면 남한테 미움받을 수도 있어.”예전에 성숙하지 못하고 철이 없었던 탓에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시집을 가서 괜한 미움을 받게 되었다.연지석은 갑자기 너무 후회스러웠다. 신림현을 떠날 때 그녀를 데리고 같이 가거나, 그녀가 결혼 전에 다시 찾아왔더라면...조금 더 일찍 만나 유남준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를 찾아 데리고 떠났더라면 그녀가 지금처럼 조심스러워하고 전전긍긍하지 않았을 텐데.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가까이 다가서며 불현듯 마음속에 늘 감춰뒀던 그 한마디를 꺼냈다.“민정아, 우리...”앞으로 같이 있자...뒤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익숙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여보!”소리를 따라가 보니 유남준과 서다희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서다희는 잡아먹을 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