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찬은 오늘 유지훈을 따라 유씨 가문에 와서 고영란이 찾았다는 아빠를 만나려고 했다.사실 그는 유남준을 대체한 남자가 누구인지 보고 싶었다.그래서 일부러 유지훈더러 자기를 데리고 유남준의 집에 가달라고 했다.“예찬아, 오늘에는 안 왔나 봐. 못 만나겠네.”유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는 박예찬과 함께 처자식을 버린 남자를 혼내주려고 했다.박예찬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말로는 아주 속상한 척했다.“나중에 만나면 꼭 나한테 연락해.”“응.”유지훈은 자기 가슴을 두드리면서 말했다.“나중에 내가 유앤케이 그룹의 대표가 되면 꼭 혼내줄게.”유지훈은 나중에 성인이 되면 폭군이 될 게 분명했다.누구한테서 배운 건지.박예찬은 계속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키 큰 남자를 쳐다보았다.덩치가 큰 유남우는 검은 코트를 입고 눈을 맞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그의 얼굴은 유남준과 똑같았지만 박예찬은 단번에 그가 유남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첫째로 유남준은 지금 신림현에 있다. 둘째, 쌍둥이인 박예찬은 다른 사람들보다 감각이 더욱 예민했다. 그래서 그의 아우라를 보고 유남준이 아니라고 판정했다.유남우는 박예찬을 보고 약간 멍해졌다.박예찬은 유남준의 어린 시절과 꽤 닮았다.유남우는 쌓인 눈을 밟고 걸어갔다. 유지훈은 그가 자기의 말을 듣고 화가 났을까 봐 겁이 나서 얼른 차렷자세로 서 있었다.“삼촌.”“응.”유남우는 차갑게 대답하고 박예찬을 쳐다보았다.“넌 누구야?”“아저씨, 안녕하세요. 전 박예찬이라고 해요.”박예찬이 부드럽게 얘기했다.박예찬은 눈에 조각처럼 잘생긴 유남우의 얼굴을 담으면서 한치의 떨림도 없이 얘기했다.아무리 유남우가 유남준 행세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박예찬은 딱 봐도 눈앞의 사람이 유남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박예찬...박씨?유남우의 동공이 약간 흔들렸다.유남우는 더 묻지 않았다. 박예찬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아저씨, 우리 어디
유지훈은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당당하게 뱉은 말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다.결국 유지훈은 몰래 박예찬을 데리고 으슥한 길로 가서 유남우가 사는 곳 옆문으로 들어갔다.이곳까지 온 유지훈은 심장이 쫄깃쫄깃해졌다.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려있었다.“봤지? 이게 바로 삼촌의 집이야.”박예찬은 동쪽에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그 방은 아주 기둥이 금색 테로 되어있을 정도로 인테리어가 화려했다. 박예찬은 갑자기 배를 그러안고 말했다.“아이고, 배가 아프네. 안 되겠어. 나 화장실 좀 갈게.”말을 마친 박예찬은 유지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동쪽으로 달려갔다.유지훈은 조급해졌다.“그쪽으로 가면 안 돼. 거긴 삼촌이 있는 곳이야!”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한 여자 고용인이 나왔다.그녀는 유지훈을 보더니 바로 꾸짖었다.“유지훈 도련님,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유 대표님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으니 얼른 가세요. 그렇지 않으면 유 대표님께 연락할 거예요.”유지훈은 이미 박예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이 정말 유남준을 불러올까 봐 걱정된 유지훈은 얼른 꽁무니를 뺐다.그러면서 고용인에게 메롱 하고 도망갔다.“기다려. 감히 날 교육하려고 들다니, 나중에 내가 크면 널 해고할 거야!”여자 고용인은 그저 피식 웃었다.이제 4, 5살밖에 안 되는 유지훈이 다 크면 그녀는 진작 퇴직했을 것이다.고용인은 돌아가서 계속 집안일을 했다. 이미 누군가가 유남준의 침실에 잠입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유남준이 사는 곳은 어두운 색조의 인테리어였는데 유남준 본인처럼 차갑고 딱딱했다.박예찬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뒤적였다. 이곳에서 유남준이나 유남준 대역의 약점을 찾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나가려고 할 때, 아래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박예찬은 얼른 책상 뒤에 숨었다.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박예찬은 한 남자가 슬리퍼를 신고 들어오는 것을 쳐다보았다.박예찬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돌아
“이모, 왜 노크 안해?”박예찬은 삐진 얼굴로 얘기했다.“아, 미안해. 까먹었어.”조하랑이 앞으로 다가왔다.“예찬아, 나랑 했던 약속 기억나?”박예찬은 한숨을 내쉬었다.“당연하지. 이모 아들인 척 하고 전남친한데 복수하는 거잖아. 복수는 내가 제일 잘하는 거야. 필요하면 이모 남편까지 찾아줄 수 있어.”조하랑은 눈을 크게 뜨고 얘기했다.“정말?”박예찬은 조하랑이 정말 믿을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을 위해 가슴을 두드리면서 얘기했다.“당연하지. 그 사람은 당연히 이모 전 남자 친구보다 훨씬 나은 사람일 거야.”“돈은 얼마나 드는데?”조하랑이 진지하게 물었다.강연우보다 잘생긴 사람이라면 섭외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어린 박예찬이 이렇게 많은 일을 알고 있다니, 조하랑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그건 상관할 필요 없어. 잘 거야. 잘자.”박예찬은 침대에 누워 이불로 머리를 덮었다.조하랑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모의 희망은 다 너한테 걸려있어. 다음 주면 결혼한댔으니까.”그녀는 중얼거리면서 떠났다.조하랑이 떠난 후, 박예찬은 약간 난감해했다. 조하랑의 말을 들었을 때, 강연우는 아주 잘생긴 사람이라고 한다. 얼마나 잘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조하랑의 안목을 보면 외모가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따로 시간을 빼서 사람을 찾아봐야겠어.’...신림현.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은정숙의 몸 상태도 점점 나빠졌다. 박민정이 할 수 있는 건 그런 은정숙의 곁을 지키는 것뿐이다.은정숙은 박민정이 걱정되어 갑자기 얘기했다.“민정아, 서산의 물만두가 먹고 싶네.”“네, 지금 당장 배달시킬게요.”박민정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은정숙은 그런 그녀를 말리면서 얘기했다.“배달을 시키면 다 식잖아. 가서 사 와주면 안돼?”은정숙은 박민정에게 부탁하는 일이 드물었다.박민정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금 당장 갈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남준 씨한테 얘기해요.”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얘기했다.“응, 알았어.”박민정을 보낸 후 은정숙의
은정숙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즉시 주방에서 걸어 나갔다.쿵!나가면서 팔이 찬장에 부딪혀 큰 소리가 났고 위에 가득 진열되어 있던 양념통들이 거의 전부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그중 하나는 유남준의 손등 위로 떨어져 매끈하고 새하얀 손에 퍼런 멍이 들었다. 유남준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었다. 요 며칠 그는 집안의 물건 위치를 전부 머릿속에 기억했으나 가끔 물품 위치가 변하기도 했다.그리하여 집밖에 나가기 전까지 그는 또 의자와 테이블 등 몇 군데에 부딪히고 말았다.서다희한테 전화를 걸어 당장 운전하여 오라고 했다.그를 기다리는 동안 유남준은 정상인과 눈먼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알게 되었다.만약 눈이 보였다면 그는 진작에 차를 몰고 박민정을 찾아갔겠지만 지금은 서다희가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사는 곳이 여기랑 가까워 5, 6분 정도 되자 서다희가 도착했다.서다희는 멀리서부터 유남준이 눈이 덮인 길목에 서있는 걸 보았다. 박민정한테 쫓겨난 줄로 알고 우산을 가질 새도 없이 급히 유남준한테로 뛰어갔다.“대표님, 왜 이러고 계세요?”유남준은 전화로 다른 얘기는 없고 빨리 오라고만 했다.“차 몰고 서산에 있는 한 만둣집으로 가.”“네.”신림현 서산에는 만둣집이 하나밖에 없는데 장사가 너무 잘 되다 보니 줄을 한참을 서야 살 수 있었다.만둣집에 도착한 후 박민정은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손님한테 마련한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긴 코트를 입은 사람이 그녀 앞에 섰다.“민정아.”고개를 드니 연지석의 연예인 뺨치는 준수한 외모가 눈 안에 들어왔다.“지석아, 너 왜 여기 있어?”“네가 아주머니더러 나한테 전화해서 여기 만두가 맛있다고 얘기하라 한 게 아니었어?”연지석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목구멍이 턱 막혔다.은정숙이 만두가 먹고 싶어 그녀를 심부름 보낸 게 아니라 연지석과 이어주려고 그랬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그러나 또 연지석이 난감해할까 봐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는 말을 차마 꺼내
만둣집 앞.박민정은 연지석이 그의 얼굴로 가져간 손을 급히 거둬들이며 말했다.“그건 다 어려서 철없을때 얘기지.”고작 몇 살밖에 안 됐을 때인데 남녀유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그리고 그때 연지석은 그녀보다도 더 키가 작은 똥똥이였다. 자연스레 그를 동생으로 생각해 은정숙이 맛있는 것을 할 때마다 그한테 갖다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훌쩍 커서 한참은 올려다봐야 하는 키에 재탄생한 것과 다름없는 준수한 외모,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온몸에서 서늘하고 도도한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한테 누가 감히 찬 손을 얼굴에 갖다 대며 장난을 치겠는가.그녀의 정중하고도 서먹서먹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연지석의 깊은 눈동자에 낙담과 쓸쓸함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내 앞에서 넌 철 들 필요 없는데.”어릴 적 겨울날에 그가 추위에 덜덜 떨고 있을 때, 그녀가 남몰래 옷과 이불과 먹을 것을 그한테 가져다주기도 하고 개구쟁이 장난을 치며 웃게 만들었던 기억이 그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누구한테 죽임을 당했거나 아사, 동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이때 박민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우린 철 드는 걸 배워야 해. 너무 천진하고 철 없으면 남한테 미움받을 수도 있어.”예전에 성숙하지 못하고 철이 없었던 탓에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시집을 가서 괜한 미움을 받게 되었다.연지석은 갑자기 너무 후회스러웠다. 신림현을 떠날 때 그녀를 데리고 같이 가거나, 그녀가 결혼 전에 다시 찾아왔더라면...조금 더 일찍 만나 유남준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를 찾아 데리고 떠났더라면 그녀가 지금처럼 조심스러워하고 전전긍긍하지 않았을 텐데.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가까이 다가서며 불현듯 마음속에 늘 감춰뒀던 그 한마디를 꺼냈다.“민정아, 우리...”앞으로 같이 있자...뒤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익숙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여보!”소리를 따라가 보니 유남준과 서다희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서다희는 잡아먹을 듯한
박민정은 더 세게 유남준의 허리를 꼬집었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입 좀 다물어요. 말 안 해도 당신 벙어리라 생각 안 하니까.”하지만 유남준은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얘기했다.“연지석 씨, 미안한데 저녁에 저랑 제 와이프가 부부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해서, 집에 식사 초대는 못 하겠네요.”부부가... 해야 할 일?연지석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유남준이 일부러 화를 돋구려고 하는 얘기인지는 알겠지만 그도 불끈불끈 솟아나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조금 떨어져 서있던 서다희는 처음에 눈도 안 보이는 유남준이 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속으로 안도하였다.주변에 줄을 서있던 사람들은 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듯이 이쪽을 힐끔거렸다.초반에는 박민정과 연지석이 커플인 줄 알았는데, 이제야 그게 아니고 유남준이 남편이라는 걸 알게 됐다.차례가 되어 만두를 살 때까지 주변의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박민정은 약속했던 대로 연지석한테 만두 1인분을 사주고는 말했다.“난 먼저 돌아갈게.”“그래, 다음에 봐.”연지석은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서다희는 자신의 차에 타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그녀가 몰고 온 차에 함께 탔다.갓 사 온 만두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차내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박민정은 서둘러 운전하지 않고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유남준의 손부터 거칠게 뿌리쳤다.“뭐예요, 대체?”그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손이 내쳐진 채로 유남준은 말없이 앉아있었다.그 모습을 보니 박민정은 더 괘씸하고 화가 났다.“갑자기 왜 찾아왔어요? 부부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건 또 뭐예요? 누가 당신이랑 그런 일 한댔어요?”유남준은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지만 뭔가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말해 봐요, 어서! 아까는 말하지 말래도 잘만 하더니만!”박민정은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그때 강력한 힘이 그녀를 품
짙은 어둠이 깔렸다.박민정은 은정숙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 등 뒤로부터 한 손이 뻗어와 그녀를 감싸안았다.“민정아.”유남준이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한 손으로 그녀를 꼭 끌어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뭐 하는 거예요, 남준 씨?!”아무리 기억을 상실했다 해도 남몰래 방에 들어오는 개 버릇은 어디 가지 않나 보다.유남준도 원래 임신한 여자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임신초기라 더 조심해야 할 때였다.하지만 오늘 그녀가 연지석을 따로 만난 것과 서다희가 해준 말을 생각만 하면...그의 얇은 입술이 그녀 귓불에 닿았다. 귓속을 파고드는 뜨거운 입김에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감히 하기만 해봐요!”박민정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큰 소리가 나왔다. 이윽고 그녀는 옆방에서 자고 있는 은정숙이 듣게 될까 봐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유남준은 옷도 입고 오지 않았다.방안에는 조명을 켜지 않았지만 달빛이 눈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방안을 비추었다. 그 빛을 빌어 유남준의 탄탄하고도 건장한 상체를 볼 수 있었다.“당장... 꺼져요, 여기서.”박민정은 너무 놀라서 목소리마저 미세하게 떨렸다.그러자 유남준이 윗몸을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하고 싶을 땐 조용히 나한테 말해. 다른 남자 찾지 말고.”“나가요, 어서!”박민정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폭 덮어쓰고 이불속에서 몸을 웅크렸다.그가 방에서 나가기 전, 그녀는 그의 허리에 있는 자신이 꼬집어서 남긴 시퍼런 멍을 발견했다.전에 박민정은 유남준이 기억을 잃은 데다가 시력까지 잃었으니 충분히 자신이 원하는대로 그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는 기억을 잃기 전보다 더 다루기 힘들었다.기억을 상실하기 전의 그는 항상 오만불손한 자세로 높은 위치에서 남에게 은덕을 베푸는 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지금의 그는 아무리 내쳐도 들러붙는 뻔뻔한 거머리와도 같았다.유남준이 다시 돌아
훈계하듯이 유남준을 한바탕 혼내고 나서야 박민정은 집을 나섰다.유남준은 그녀가 꾸짖어도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다만 그 유별나게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애꿎게 바라볼 뿐이었다.그의 눈이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흠칫하며 당황했다....병실 안.윤우는 형으로부터 저들의 쓰레기 아빠가 지금 엄마랑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 전 교통사고로 눈도 멀었고, 현재는 다른 사람이 그의 신분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그 사람은 그리 당해도 싸.”윤우가 분에 겨운 말투로 말하자 그와 전화를 하고 있는 예찬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맞아. 이런 게 인과응보라는 거지.”“그런데 우리 손으로 그렇게 만들지 못한 것이 좀 아쉽네.”윤우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문득 뭔가 생각나 예찬한테 얘기했다.“형, 오늘 지석 삼촌이랑 엄마가 함께 나를 보러 온다고 했어. 내가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은데 형 생각은 어때?”연지석이 박민정을 어떻게 대하는지 해외에서 그들 두 형제는 똑똑히 봐왔다.연지석은 그 쓰레기 아빠와는 달랐다. 갑자기 무슨 전 여자친구가 튀어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박민정과 소꿉친구이기까지도 하니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윤우는 은정숙도 연지석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다.그러나 전화기 저편의 박예찬은 말없이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가 그러길 원할까?”“엄마도 지석 삼촌 좋아할 거야. 그냥 부끄러워서 얘기 안 하는 것뿐이지. 걱정 마, 내가 오늘 두 사람 관계를 명확히 하게 해주려니까.”윤우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알았어.”전화를 끊고 나서 윤우는 침대에서 지루한 시간을 버텨내며 연지석과 박민정이 오기만을 기다렸다.점심 때가 되어 그들이 앞뒤로 병실을 걸어 들어오자 윤우는 득달같이 애교를 부렸다.“엄마, 윤우도 엄마랑 같이 집에 있으면 안 돼? 여기서 혼자 너무 외로워. 엄마도 보고 싶고, 형이랑 할머니도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