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정숙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즉시 주방에서 걸어 나갔다.쿵!나가면서 팔이 찬장에 부딪혀 큰 소리가 났고 위에 가득 진열되어 있던 양념통들이 거의 전부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그중 하나는 유남준의 손등 위로 떨어져 매끈하고 새하얀 손에 퍼런 멍이 들었다. 유남준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었다. 요 며칠 그는 집안의 물건 위치를 전부 머릿속에 기억했으나 가끔 물품 위치가 변하기도 했다.그리하여 집밖에 나가기 전까지 그는 또 의자와 테이블 등 몇 군데에 부딪히고 말았다.서다희한테 전화를 걸어 당장 운전하여 오라고 했다.그를 기다리는 동안 유남준은 정상인과 눈먼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알게 되었다.만약 눈이 보였다면 그는 진작에 차를 몰고 박민정을 찾아갔겠지만 지금은 서다희가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사는 곳이 여기랑 가까워 5, 6분 정도 되자 서다희가 도착했다.서다희는 멀리서부터 유남준이 눈이 덮인 길목에 서있는 걸 보았다. 박민정한테 쫓겨난 줄로 알고 우산을 가질 새도 없이 급히 유남준한테로 뛰어갔다.“대표님, 왜 이러고 계세요?”유남준은 전화로 다른 얘기는 없고 빨리 오라고만 했다.“차 몰고 서산에 있는 한 만둣집으로 가.”“네.”신림현 서산에는 만둣집이 하나밖에 없는데 장사가 너무 잘 되다 보니 줄을 한참을 서야 살 수 있었다.만둣집에 도착한 후 박민정은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손님한테 마련한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긴 코트를 입은 사람이 그녀 앞에 섰다.“민정아.”고개를 드니 연지석의 연예인 뺨치는 준수한 외모가 눈 안에 들어왔다.“지석아, 너 왜 여기 있어?”“네가 아주머니더러 나한테 전화해서 여기 만두가 맛있다고 얘기하라 한 게 아니었어?”연지석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목구멍이 턱 막혔다.은정숙이 만두가 먹고 싶어 그녀를 심부름 보낸 게 아니라 연지석과 이어주려고 그랬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그러나 또 연지석이 난감해할까 봐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는 말을 차마 꺼내
만둣집 앞.박민정은 연지석이 그의 얼굴로 가져간 손을 급히 거둬들이며 말했다.“그건 다 어려서 철없을때 얘기지.”고작 몇 살밖에 안 됐을 때인데 남녀유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그리고 그때 연지석은 그녀보다도 더 키가 작은 똥똥이였다. 자연스레 그를 동생으로 생각해 은정숙이 맛있는 것을 할 때마다 그한테 갖다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훌쩍 커서 한참은 올려다봐야 하는 키에 재탄생한 것과 다름없는 준수한 외모,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온몸에서 서늘하고 도도한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한테 누가 감히 찬 손을 얼굴에 갖다 대며 장난을 치겠는가.그녀의 정중하고도 서먹서먹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연지석의 깊은 눈동자에 낙담과 쓸쓸함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내 앞에서 넌 철 들 필요 없는데.”어릴 적 겨울날에 그가 추위에 덜덜 떨고 있을 때, 그녀가 남몰래 옷과 이불과 먹을 것을 그한테 가져다주기도 하고 개구쟁이 장난을 치며 웃게 만들었던 기억이 그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누구한테 죽임을 당했거나 아사, 동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이때 박민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우린 철 드는 걸 배워야 해. 너무 천진하고 철 없으면 남한테 미움받을 수도 있어.”예전에 성숙하지 못하고 철이 없었던 탓에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시집을 가서 괜한 미움을 받게 되었다.연지석은 갑자기 너무 후회스러웠다. 신림현을 떠날 때 그녀를 데리고 같이 가거나, 그녀가 결혼 전에 다시 찾아왔더라면...조금 더 일찍 만나 유남준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를 찾아 데리고 떠났더라면 그녀가 지금처럼 조심스러워하고 전전긍긍하지 않았을 텐데.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가까이 다가서며 불현듯 마음속에 늘 감춰뒀던 그 한마디를 꺼냈다.“민정아, 우리...”앞으로 같이 있자...뒤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익숙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여보!”소리를 따라가 보니 유남준과 서다희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서다희는 잡아먹을 듯한
박민정은 더 세게 유남준의 허리를 꼬집었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입 좀 다물어요. 말 안 해도 당신 벙어리라 생각 안 하니까.”하지만 유남준은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얘기했다.“연지석 씨, 미안한데 저녁에 저랑 제 와이프가 부부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해서, 집에 식사 초대는 못 하겠네요.”부부가... 해야 할 일?연지석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유남준이 일부러 화를 돋구려고 하는 얘기인지는 알겠지만 그도 불끈불끈 솟아나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조금 떨어져 서있던 서다희는 처음에 눈도 안 보이는 유남준이 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속으로 안도하였다.주변에 줄을 서있던 사람들은 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듯이 이쪽을 힐끔거렸다.초반에는 박민정과 연지석이 커플인 줄 알았는데, 이제야 그게 아니고 유남준이 남편이라는 걸 알게 됐다.차례가 되어 만두를 살 때까지 주변의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박민정은 약속했던 대로 연지석한테 만두 1인분을 사주고는 말했다.“난 먼저 돌아갈게.”“그래, 다음에 봐.”연지석은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서다희는 자신의 차에 타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그녀가 몰고 온 차에 함께 탔다.갓 사 온 만두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차내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박민정은 서둘러 운전하지 않고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유남준의 손부터 거칠게 뿌리쳤다.“뭐예요, 대체?”그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손이 내쳐진 채로 유남준은 말없이 앉아있었다.그 모습을 보니 박민정은 더 괘씸하고 화가 났다.“갑자기 왜 찾아왔어요? 부부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건 또 뭐예요? 누가 당신이랑 그런 일 한댔어요?”유남준은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지만 뭔가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말해 봐요, 어서! 아까는 말하지 말래도 잘만 하더니만!”박민정은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그때 강력한 힘이 그녀를 품
짙은 어둠이 깔렸다.박민정은 은정숙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 등 뒤로부터 한 손이 뻗어와 그녀를 감싸안았다.“민정아.”유남준이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한 손으로 그녀를 꼭 끌어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뭐 하는 거예요, 남준 씨?!”아무리 기억을 상실했다 해도 남몰래 방에 들어오는 개 버릇은 어디 가지 않나 보다.유남준도 원래 임신한 여자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임신초기라 더 조심해야 할 때였다.하지만 오늘 그녀가 연지석을 따로 만난 것과 서다희가 해준 말을 생각만 하면...그의 얇은 입술이 그녀 귓불에 닿았다. 귓속을 파고드는 뜨거운 입김에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감히 하기만 해봐요!”박민정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큰 소리가 나왔다. 이윽고 그녀는 옆방에서 자고 있는 은정숙이 듣게 될까 봐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유남준은 옷도 입고 오지 않았다.방안에는 조명을 켜지 않았지만 달빛이 눈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방안을 비추었다. 그 빛을 빌어 유남준의 탄탄하고도 건장한 상체를 볼 수 있었다.“당장... 꺼져요, 여기서.”박민정은 너무 놀라서 목소리마저 미세하게 떨렸다.그러자 유남준이 윗몸을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하고 싶을 땐 조용히 나한테 말해. 다른 남자 찾지 말고.”“나가요, 어서!”박민정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폭 덮어쓰고 이불속에서 몸을 웅크렸다.그가 방에서 나가기 전, 그녀는 그의 허리에 있는 자신이 꼬집어서 남긴 시퍼런 멍을 발견했다.전에 박민정은 유남준이 기억을 잃은 데다가 시력까지 잃었으니 충분히 자신이 원하는대로 그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는 기억을 잃기 전보다 더 다루기 힘들었다.기억을 상실하기 전의 그는 항상 오만불손한 자세로 높은 위치에서 남에게 은덕을 베푸는 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지금의 그는 아무리 내쳐도 들러붙는 뻔뻔한 거머리와도 같았다.유남준이 다시 돌아
훈계하듯이 유남준을 한바탕 혼내고 나서야 박민정은 집을 나섰다.유남준은 그녀가 꾸짖어도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다만 그 유별나게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애꿎게 바라볼 뿐이었다.그의 눈이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흠칫하며 당황했다....병실 안.윤우는 형으로부터 저들의 쓰레기 아빠가 지금 엄마랑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 전 교통사고로 눈도 멀었고, 현재는 다른 사람이 그의 신분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그 사람은 그리 당해도 싸.”윤우가 분에 겨운 말투로 말하자 그와 전화를 하고 있는 예찬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맞아. 이런 게 인과응보라는 거지.”“그런데 우리 손으로 그렇게 만들지 못한 것이 좀 아쉽네.”윤우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문득 뭔가 생각나 예찬한테 얘기했다.“형, 오늘 지석 삼촌이랑 엄마가 함께 나를 보러 온다고 했어. 내가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은데 형 생각은 어때?”연지석이 박민정을 어떻게 대하는지 해외에서 그들 두 형제는 똑똑히 봐왔다.연지석은 그 쓰레기 아빠와는 달랐다. 갑자기 무슨 전 여자친구가 튀어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박민정과 소꿉친구이기까지도 하니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윤우는 은정숙도 연지석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다.그러나 전화기 저편의 박예찬은 말없이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가 그러길 원할까?”“엄마도 지석 삼촌 좋아할 거야. 그냥 부끄러워서 얘기 안 하는 것뿐이지. 걱정 마, 내가 오늘 두 사람 관계를 명확히 하게 해주려니까.”윤우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알았어.”전화를 끊고 나서 윤우는 침대에서 지루한 시간을 버텨내며 연지석과 박민정이 오기만을 기다렸다.점심 때가 되어 그들이 앞뒤로 병실을 걸어 들어오자 윤우는 득달같이 애교를 부렸다.“엄마, 윤우도 엄마랑 같이 집에 있으면 안 돼? 여기서 혼자 너무 외로워. 엄마도 보고 싶고, 형이랑 할머니도 보고 싶어..
하얀 눈을 밟으며 걸어가는 세 사람의 모습은 단란한 한 가족처럼 보였다.연지석한테 손을 잡힌 박민정은 손바닥에서 땀이 삐질삐질 났다.드디어 레스토랑에 도착해 밥 먹을 때가 되어서야 연지석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윤우는 두 사람한테 단둘이 지낼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웨이터에게 화장실로 데려가달라고 했다.윤우가 떠나자마자 박민정은 즉시 사과를 건넸다.“정말 미안해. 윤우가 한 번도 아빠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래.”결혼도 안 했는데 남한테 아빠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기분 나쁠 수가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연지석은 개의치 않았다.“난 윤우가 저러는 게 좋은데.”박민정은 그제야 안심했다. 윤우의 얘기가 일단락되자 연지석은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너랑 유남준이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말이 튀어나오고 나서 그는 금방 후회했다. 그는 이런 걸 물을 자격이 없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의 말을 깊게 생각 안 하고, 전에 이혼하기 위해 법정에서 바람났다고 하며 유남준을 위협했던 일과 고영란이 자기를 협박했다는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누구랑 바람 나?”연지석은 요점을 꼬집어 물었다.박민정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귀까지 빨개졌다.“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어. 유남준은 너랑 인 줄로 알 거야.”너무 긴장하여 저도 몰래 테이블에 놓인 손끝을 살짝 그러쥐었다. 연지석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눈가엔 감출 수 없는 빛이 반짝였다.“그거 잘됐네. 마침 그 핑계로 오늘 윤우 아빠 노릇 톡톡히 할 수 있겠어.”화제를 더 이어나가기 부끄러운 박민정은 벌떡 일어섰다.“윤우가 왜 아직도 안 돌아오지? 내가 한 번 가서 찾아봐야겠다.”윤우는 계속 문어귀에 숨어 있었다. 둘의 대화가 끝나가는 걸 보자 그는 화장실에 갔다 오는 척하며 걸어왔다.“아빠, 엄마. 나 돌아왔어.”아이가 있으니 분위기가 다시금 훈훈해졌다.식사를 마치자 윤우는 또 게임 센터에 가자고 졸랐다.게임 센터에는 젊은 커플들도 꽤 많고
윤우가 어리광이 많은 편이지만 이렇게 떼를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병에 걸려 몸이 아픈 데다가 어쩌다 갖고 싶은 인형이 하나 생겼는데 가지지 못하니 서러울 만했다.“울지 마, 윤우야. 엄마가 다른 방도를 생각해 볼게.”연지석이 때마침 입을 열었다.“윤우야, 나랑 엄마랑 지금 가서 인형 따내 줄게. 그럼 되지?”그 말에 윤우는 울음을 뚝 그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지석을 쳐다봤다.“응.”윤우는 또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엄마, 아빠랑 꼭 힘내서 인형 따내야 해.”박민정은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세 사람은 이벤트를 하는 코너에 가서 참여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열 팀의 커플이 신청하자 직원이 게임 룰에 대해 설명했다.게임은 아주 간단한 형식이었다. 남녀가 마주 보고 서서 눈을 가리고 나면 직원이 줄에 매달린 어떠한 물건을 위로부터 서서히 내리고 커플은 몸으로 그 물건을 고정해 떨어뜨리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손을 쓰는 건 반칙이었다.연지석과 박민정은 무대 위로 올라갔고 다른 커플들도 다 준비를 마쳤다. 직원이 첫 번째 물건인 풍선을 꺼냈다.첫 번째 라운드라 그런지 난이도가 꽤 낮은 편이어서 몸을 조금만 앞으로 기울이면 떨어뜨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천으로 눈을 가린 후 사회자가 시작을 알렸다.모든 참가자들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끈에 매여있는 풍선은 손쉽게 몸으로 받을 수 있었다.윤우가 무대 아래에서 높은 소리로 그들을 응원했다.“엄마, 아빠, 화이팅!”박민정은 윤우의 인형을 원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떠올리며 꼭 상품을 따내리라 마음먹었다.연이어 여러 개의 부피가 조금 큰 물건들을 그들은 모두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신체 접촉이 있었다.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두 팀이 남았다.사회자가 마지막 물건을 꺼내 들었는데 그건 종이 한 장이었다.시작, 하는 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은 또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느낌으로 A4용지 같은 물건이 그녀의 볼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녀는 연
연지석이 이번에 돌아온 건 박민정 때문만이 아니라 과거 유남준한테 빼앗긴 그의 자산을 되찾기 위해서이기도 했다.지금 유앤케이의 대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어차피 유남준이 아니니 그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서다희는 연지석이 이 정도로 겁 없이 날뛸 줄 몰랐다.기억을 잃은 유남준에게 연지석이 방금 한 말을 전달하지는 않겠지만 속으로 유남준이현실을 빨리 깨닫기를 바랐다....유남준은 시각 장애인 용 컴퓨터를 사용하며 박민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예전 같았으면 벌써 돌아왔을 시간인데, 저녁 8시가 되어가도록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그때 곁에 놓인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유남준은 다급히 메시지를 확인하며 음성을 재생했다.“유 대표님, 전 연지석인데요. 미리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민정이가 오늘 저랑 줄곧 같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좀 늦게 돌아갈 거예요.”다 듣고 난 유남준은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더는 일할 정신이 없었다. 그는 바로 일어나 집을 나섰다.밖에는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유남준은 미간을 살짝 구긴 채 외로이 눈속에 서 있었다.그는 맹인용 휴대전화를 꺼내 박민정한테 전화를 걸었다.전화번호는 그녀가 알지 못한 새에 남몰래 저장해둔 것이다.다른 한 편.박민정은 운전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윤우랑 늦게까지 놀아주느라 아직도 집에 도착하지 못하였다.흩날리는 눈보라에 시선이 가려져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고 또 길이 미끄러워 아주 천천히 운전하는 중이었다.전화벨이 울렸다.그녀는 누군지 보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디야?”유남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으로부터 들려왔다.박민정은 이상한 낌새를 차리지 못하고 그저 묻는 말에 대답했다.“돌아가는 길이요.”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차가 갑자기 미끄러졌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탓에 차 머리가 엉뚱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펑!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차는 길가에 있는 가로수를 들이받고 에어백이 터져나왔다.박민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