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우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에서는 서다희가 내렸고 그 뒤로 경호원과 고용인들이 내렸다.강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타고 돌아갔다.은정숙은 밖의 소리를 듣고 힘겹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서다희 일행을 보더니 물었다.“이분들은 다 누구야?”박민정은 은정숙이 찬 바람을 쐬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아줌마, 먼저 들어가서 쉬어요. 이따가 얘기해 드릴게요.”“그래.”은정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허리를 굽힌 채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박민정은 대문을 굳게 닫은 후, 서다희 일행에게로 걸어갔다.서다희도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허름한 집을 보면서 유남준 대신 식은땀을 흘렸다.유남준은 태어나서부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왔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 리 없었다.박민정은 그들의 앞에 걸어갔다. 유남준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서다희에게 물었다.“서 비서님, 뭐 하는 거죠?”“고영란 사모님께서 유 대표님의 모든 옷을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서다희가 대답했다.강연우의 말이 맞았다. 고영란은 정말 박민정에게 유남준을 맡길 예정이다. 만약 박민정이 거절한다면 그녀를 고소할 생각이기도 했다.박민정은 차갑게 물었다.“남준 씨는요?”“유 대표님은 곧 도착하십니다.”말을 마친 서다희는 뒤에 있는 사람들더러 물건을 옮기라고 했다.“잠깐만요.”박민정은 얼른 그들을 막아 나섰다.“유남준은 여기서 살 수 없어요.”서다희는 약간 난감한 기색을 내비췄다.“고영란 사모님께서 얘기하시길, 유 대표님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두원으로 가서 유 대표님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거절한다면 강연우 변호사가 얘기한 대로 진행할 겁니다.”임신했을 때는 옥살이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 감옥에 간다.박민정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서다희도 이 제안이 박민정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박민정 씨, 아니, 이제는 사모님이라고 불러야겠죠. 사모님, 유 대표님
서다희 일행을 내보낸 박민정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박민정은 박윤우를 병원에 입원시켰고 박예찬은 아직 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박예찬에게 유남준이 와서 같이 산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박민정은 먼저 은정숙의 방에 가서 아까 일어난 모든 일을 설명해 주었다.은정숙은 끝까지 듣더니 박민정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혼자서 나와 두 아이까지 보살피고 있는데 어떻게 유남준까지 돌보겠어. 유씨 가문 사람들은 정말 너무하다니까.”은정숙은 유씨 가문 사람들이 부자들이니 일반인들보다 더 마음이 넓을 줄 알았다.하지만 돈이 많을수록 더 쪼잔하고 뒤끝이 길었다.“전 유남준 씨를 돌보지 않을 거예요. 여기 오면 다 직접 해야 할 겁니다.”말을 마친 박민정은 은정숙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예찬이와 윤우는 아직 상황을 잘 몰라요. 만약 유남준 씨가 온다고 하면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윤우는 전에 남준 씨를 본 적이 있고 또 지금은 병원에 있으니 괜찮지만 예찬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총명해서 수상한 점을 발견할까 봐 걱정이에요.”은정숙도 그 말을 듣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유씨 가문 사람들은 이득을 손에 꽉 잡고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다. 만약 박예찬과 박윤우가 유남준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 두 아이를 빼앗아가려고 아득바득 애를 쓸 것이다.마침 이때 조하랑이 전화를 걸어 물었다.“민정아, 나 예찬이 좀 빌릴 수 있을까?”“빌린다고?”박민정은 약간 의아해했다.“강연우가 돌아온 거 알잖아. 약혼녀도 같이 왔더라고. 둘이 결혼식을 올릴 거라는데 청첩장을 나한테까지 보냈어.”조하랑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어! 며칠 후면 예찬이를 데리고 결혼식에 가려고.”박예찬 같은 총명한 아이가 있으면 강연우의 콧대를 부숴줄 수 있다.박민정은 박예찬에게 유남준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라 바로 조하랑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유남준이 곧 온다는 얘기도 해주었다.“유씨 가문 사람들 정
박민정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저녁 아홉 시 정도였다.그녀는 창고로 썼던 방에서 물건을 다 꺼냈다. 이 방은 아주 허름했지만 안에 화장실이 있어서 유남준이 박민정이나 은정숙의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었다.저녁 열 시.마이바흐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섰다.뒷좌석에 앉은 유남준은 허리를 곧게 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차에서 내린 기사가 밖에 서서 공손하게 얘기했다.“유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사모님을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유남준의 명령 때문에 운전기사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았다.유남준은 법원을 떠나면서 박민정에게 다시 보지 말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날 데리고 가.”유남준은 그렇게 얘기하고 차에서 내렸다.이렇게만 보면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네.”운전기사는 조심스레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유남준이 거절했다.“어떻게 가면 되는지만 알려줘.”유남준은 다른 사람이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길을 걷는 것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병신이 되고 싶지 않았다.“네.”운전기사의 말에 따라 유남준이 천천히 발을 옮겨 집 앞으로 왔다.운전기사는 박민정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어서 어쩔 수 없이 문을 두드려야 했다.박민정은 노크 소리를 듣고 그제야 문을 열었다.찬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녀는 옷깃을 꽉 여민 채 유남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얘기했다.“들어와요.”운전기사는 유남준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따라 들어갈 수 없어 굳은 채로 서 있었다.하지만 발을 옮기자마자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시선을 돌려보니 박민정은 유남준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그의 뒤에서 걸으면서 유남준이 소파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돌아가서 박민정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괜히 부부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차에 돌아온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 중얼거렸다.“앞으로 절대로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
“제가 가볼게요.”박민정은 얼른 내려갔다. 하지만 유남준 방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다른 이상한 점도 보이지 않았기에 박민정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유남준이 이 공간에서 버티지 못해 떠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이튿날.박민정은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당근이 들어간 죽을 준비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유남준은 당근을 좋아하지 않았다.박예찬은 그런 유남준을 닮아 당근이 들어있는 음식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은정숙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박민정은 죽을 일부분 남기고 유남준에게로 갔다.유남준은 마침 씻고 나와 있었다. 그는 홈웨어로 갈아입고 있었다. 박민정은 그런 유남준의 이마에 큰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제의 소리는 아마도 유남준이 이마를 부딪친 소리였던 것 같다.박민정은 일부러 못 본 체 하면서 입을 열었다.“아침을 먹어요.”“응.”유남준은 조심스레 걸어왔다.이곳은 크지 않았지만 가구가 많았다.그는 또 가구를 건드려 박민정이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빨리 떠났으면 했지만 유남준이 벽에 부딪히려는 것을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었다.“왼쪽으로 가요. 벽에 부딪히겠어요.”유남준은 그대로 굳었다. 귀는 아주 붉어져서 홍당무 같았다.그는 왼쪽으로 걸어가더니 빠르게 테이블 옆으로 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고마워. 이젠 기억했어.”그의 말투와 태도를 보면서 박민정은 그가 기억을 잃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이 이런 태도로 나오니 그를 괴롭히기도 어려웠다.박민정은 죽을 뜨고 계란 후라이 두 개를 올려주면서 말했다.“여기요.”“고마워. 앞으로는 내가 일찍 일어나서 도와줄게.”어젯밤, 그는 낯선 곳에서 잘 자지 못해서 늦게 일어났다.박민정은 멍해졌다.“됐어요.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 뭘 도와줄 수 있다는 거예요.”유남준은 목이 막혔다.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일하지 않아도 돼. 은정숙 씨와 함께 두원으로 와. 내가 먹여 살릴게.”먹여 살린다...
은정숙은 깜짝 놀랐다. 흐릿한 그녀의 시야 속에 유남준의 실루엣이 보였다.그는 소매를 걷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싱크대 안에는 세정제의 거품이 가득했다.은정숙이 마지막으로 유남준과 연락한 것은 5년 전이었다.그 전화에서 은정숙은 유남준에게 박민정을 잘 부탁한다고 했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아주 냉정했다. 그때 유남준이 한 말을 은정숙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박민정이 어떻게 살든지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겠죠.”은정숙은 예전의 일을 떠올리면 유남준이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유남준이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은정숙은 폐에서 그림자가 발견되어서 요즘 몸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했다. 그녀는 자기한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그저 마지막까지 박민정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그녀는 겨우 발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가서 차갑게 얘기했다.“유 대표님,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돌아가요. 이런 집에서 적응하지 못할 겁니다.”유남준은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바로 박민정이 말한 은정숙이라는 걸 알았다. 즉 유남준의 장모님이다.“민정이가 사는 곳이니 나도 살 수 있습니다.”은정숙은 약간 흠칫했다.이건 예전의 유남준과 아예 달랐다.그녀는 유남준이 눈이 멀어서 연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유남준을 신경 쓰지 않았다.박민정은 유남준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서다희는 유남준이 걱정되어 아침 일찍 운전해서 그를 보러 왔다.창문을 통해서 유남준이 박민정의 말을 따라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본 서다희는 놀라서 굳어버렸다.은정숙이 휴식하고 박민정이 곡을 쓰고 있을 사이에, 서다희는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갔다.“대표님, 왜 이런 일을 하고 계십니까.”서다희는 유남준 손의 그릇과 수저를 빼앗아 유남준 대신 설거지를 했다.유남준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대표님이 걱정되어서 왔습니다.”서다희는 유남준의
점심 열한 시.호산 그룹 회의실에는 유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모였다. 그리고 주주들과 임원들, 기자들까지 와 있었다.모든 사람들은 호산 그룹을 이어받을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주주총회에는 유명훈뿐만이 아니라 유성혁 부부와 유씨 가문의 방계 친척들까지 왔다.모든 사람들은 이번 주주총회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챙기려고 하고 있다.유씨 가문에는 젊은 청년들이 많았다. 다만 유남준보다 사업을 잘하는 사람은 없었다.이번에 유남준한테 사고가 난 후, 그들은 서로를 경쟁 상대로 보고 있었다.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다만 주주총회에 고영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영란이 유남준이 파면되는 일 때문에 참석하지 않으려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회의가 시작된 지 10여 분이 지난 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영란이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유남준이 들어왔다. 맞춤 제작된 어두운색의 정장과 주름 하나 없는 정장 바지, 190센치의 키는 마치 런웨이에서 내려온 모델 같았다.모든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놀라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유성혁 부부는 그를 보자마자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았다. 유남준은 나타나서 한마디만 했다.“회의는 여기서 끝입니다.”사람들은 반기를 들 수도 없었다.호기롭게 연 주주총회는 어쩔 수 없이 끝났다.야망을 품고 왔던 청년들은 재빨리 꼬리를 빼고 도망갔다.매체 기자들이 얼른 기사를 보도했다.[유남준이 주주총회에 나타났다! 그의 눈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호산 그룹 주주총회가 해산되었다!]기사를 본 사람들은 얼른 댓글을 달았다.[역시 호산 그룹 대표이사답네. 너무 잘생긴 거 아니야?][저런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하마터면 인성 쓰레기라는 걸 잊을 뻔했네. 역시 얼굴이 다야.]박민정은 그 뉴스를 보면서 동공이 약간 떨렸다.유남준이라니?그럴 리가?그녀는 옆을 쳐다보았다. 유남준은 점자를 배우는 데 집중하느라 TV의 뉴스는
조하랑은 몇 마디 더 나누고 싶었지만 박예찬이 오는 것을 보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예찬아, 왜 벌써 왔어? 오늘 일찍 끝났어?”조하랑은 박예찬을 다시 유치원에 데려다주려고 했다.박예찬은 진작 문앞에 와서 모든 대화 내용을 다 들었다. ‘쓰레기 아빠가 기억을 잃고 눈까지 멀어서 엄마랑 같이 살고 있는 거구나. 어쩐지 나를 빨리 이모 집에 두고 가려고 했지.’“응. 선생님이 날씨가 추워서 금요일에 일찍 오래. 이모, 선생님이 단톡방에서 얘기했잖아.”조하랑은 머리를 탁 쳤다.“미안해, 단톡방 메시지를 확인 못 했어.”운전 기사도 없었기에 박예찬은 혼자 걸어왔다.조하랑은 죄책감에 그를 꼬옥 안았다.“이리 와. 이모가 사죄의 의미로 뽀뽀해줄게.”박예찬은 얼굴을 구기면서 피했다.“싫어.”“알았어.”조하랑은 저도 모르게 실망했다.그 모습을 본 박예찬이 말했다.“이모, 죄책감이 들면 나를 데리고 신림현에 가줘. 엄마랑 같이 주말을 보내고 싶어.”그는 유남준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 싶었다.“안돼.”조하랑이 바로 거절했다. 조하랑은 박민정에게 박예찬이 유남준과 만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었다.하지만 박예찬이 입을 열었다.“며칠 전에 뉴스를 봤는데 다섯 살짜리 애가 혼자 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교통사고가 났대. 여섯 살짜리 애는 혼자 집에 가다가 납치당했고...”“...”이건 일부러 조하랑이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앞으로 널 데리러 가는 걸 잊지 않을게.”“그럼 주말에 친구 집에 가서 놀래.”“그래.”조하랑이 바로 대답했다.그녀는 박예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박예찬은 원래 처음부터 주말에 친구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조하랑이 동의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그래서 먼저 신림현에 가겠다고 한 후 조하랑이 동의하지 않으니 친구 집에 가겠다고 말을 꺼냈다.원래 사람들은 10만 원을 달라고 했다가 5만 원을 달라고 하면 그러려니 하고 주는 편이다. 오늘 박예찬이 유치원에 가자 아이들
신림현.박민정은 전화를 끊은 후 점자를 배우고 있는 유남준을 보면서 물었다.“뉴스 내용 들었어요?”“응.”유남준은 머리도 들지 않고 얘기했다.“나인척하는 사람이 있네.”“신경 쓰지 않아요?”박민정이 또 물었다.“민정아, 난 그저 너랑 잘 살고 싶어. 점자를 배워서 앞으로 너와 네 배 속의 아이를 잘 지키고 싶어.”유남준이 대답했다.아이...박민정의 손이 저도 모르게 배로 향했다.“무슨 아이를 말하는 거예요?”“어머님이 이미 알려주셨어. 네가 임신했다고.”유남준은 고개를 들어 박민정이 있는 방향을 보면서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눈이 멀었다고 해도 너와 아이는 꼭 지킬 거니까.”박민정은 고영란이 이 일까지 그에게 알려줬을 줄 생각도 못 했다. 어차피 유남준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 않는가.박민정은 차갑게 얘기했다.“배 속의 아이는 당신 아이가 아니에요.”유남준은 흠칫 굳었다.박민정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지만 예상과는 달랐다.유남준은 손에 쥔 책을 더욱 꽉 쥐고 물었다.“누구 아이야?”“어차피 당신 아이는 아니에요.”박민정은 연지석을 방패로 삼고 싶지 않았다. 얼른 자리를 떠나 떨리는 심정을 감추려고 했다.하지만 유남준이 그녀의 손을 확 잡았다.“누구 아이인지 모르겠다면 그럼 내 아이야. 내가 잘 보살필게.”박민정은 멍해졌다.유남준의 아이가 아니라고 했을 뿐이지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다고 한 적은 없다.박민정이 변명하려고 할 때, 유남준이 진지하게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큰 그룹을 관리했던 사람이야. 아무리 지금은 눈이 멀었다고 해도 너와 아이를 굶기지는 않을 거야.”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변명하는 것도 귀찮게 느껴졌다.“됐어요. 당신만 잘 챙겨요.”박민정은 얼른 위층으로 올라가 계속 곡을 썼다.지금 그녀에게는 많은 돈이 있었지만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전에 박씨 가문의 재산도 몇십조에 다다랐지만 결국 파산하지 않았는가.박민정이 고개를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오준수의 엄마, 차현영이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울먹거리며 물었다.“준수야, 대체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왜 업체들이 갑자기 우리더러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데?”오준수는 하룻밤 사이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상태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엄마, 우리 이제 끝난 것 같아요.”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이천애도 마음이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아무리 눈치 없다고 해도 오씨 집안이 진짜 큰일 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차현영이 아침 댓바람부터 이렇게 찾아와 울부짖지도 않았을 것이다.집에는 오직 오성훈만 아무 걱정도 없이 쿨쿨 자고 있었다.차현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떻게 된 건지 빨리 말해. 누구한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야?”오준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에 대해 차현영에게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대뜸 오준수를 꾸짖기 시작했다.“이 멍청한 놈, 그때 그렇게 이혼하지 말라고 뜯어말렸는데도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내더니. 손씨 가문 딸이면 우리 가문에도 얼마나 득이 되고 좋아? 하필이면 아무 쓸모도 없는 모델을 데려와서는.”“이천애는 그냥 우리 집안이랑 안 맞는 여자야.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회사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는 것 좀 봐, 이제 어떡하면 좋지?”“지금 당장 연서한테 가서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사과해!”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보니 이천애가 구석에서 몰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여우 같은 계집애, 우리 집에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꺼지지 못해?”이천애는 오랜만에 집에 온 거라 이대로 순순히 돌아가기 싫었다.“어머님, 아무리 그래도 제가 성훈이 친엄마인데 아이 앞에서 굳이 이런 식으로 저를 대해야겠어요?”“그나마 성훈이가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진작에 널 밖으로 끌어냈어.”그러다가 차현영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오준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따 사과하러 갈 때 천애도 같이 데려가. 어
오준수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설마요? 혹시 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한 게 맞아요? 전 오현웅 씨의 아들, 오준수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정 대표님과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저를 젊은 사람이 능력까지 갖췄다고 칭찬도 했었다고요.”순간 경호원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욱 살벌해졌다.“계속 여기서 소란 피우면 어쩔 수 없이 저희가 손을 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그러나 오준수는 이대로 가기 싫었다. 막무가내로 병실 안을 향해 달려던 이때, 그와 그의 비서는 몇 명의 경호원에 의해 보기 좋게 쫓겨났다.그렇게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그의 얼굴에 울긋불긋 멍이 든 모습을 본 이천애가 깜짝 놀라 물었다.“오빠, 얼굴이 왜 이래? 누구한테 맞았어? 누가 감히 오빠를 때렸는데?”이천애의 쏟아지는 물음에 오준수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꺼져!”그러자 이천애도 슬슬 기분 나빠지기 시작했다.“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예전 같았으면 금방에라도 달려가 그녀를 달래줬을 텐데 지금 이천애를 보면 자꾸 손연서만 생각났다.“나한테 도움도 안 되는 게, 왜 쓸데없이 연서한테 시비 걸었어? 안 그랬으면 내가 이혼할 일도 없었잖아!”이혼하지만 않았으면 지금 정씨 가문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의 말에 이천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손연서랑 이혼하길 잘했다고 말했던 사람인데 말이다.“오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그녀가 다시 차분하게 되묻자 오준수는 애써 화를 억누르고 오늘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모조리 말해줬다.이천애는 그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연서 씨가 어떻게 지엔 그룹의 대표랑 친구 사이일 수가 있죠? 그리고 그 박 대표라는 사람은 고작 친구 하나 때문에 회사의 이익도 고려하지 않는대요? 우리가 어떤 가문인지 아직 잘 모르는 게 분명해요.”그러나 오준수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지엔 그룹과 같은 대기업은 오씨 가문과 계약해도 그만, 안 해도 아무 손해가 없었기 때문이
그러자 손연서가 느긋하게 하품하며 답했다.“응, 그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오준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다시 설득했다.“연서야, 만약 네가 박민정 씨한테 우리랑 재계약할 수 있도록 한 마디만 말해주면 내가 당장 너랑 재혼해 줄게.”그 말에 손연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자 오준수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왜 웃어?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손연서는 한참 웃다가 겨우 멈추고는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저기요, 오준수 씨? 설마 지금 내가 그쪽이랑 재혼하고 싶어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분명히 말하는데 난 당신을 사랑한 적도 없고 재혼도 하기 싫어. 난 그저 당신이 처참하게 당하는 꼴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기대해 봐. 이제부터 시작이니까.”말을 마치자마자 손연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오준수는 또다시 일방적으로 대화가 단절되자 화도 나는 한편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러면서 예전에 엄마 말을 듣지 않고 기어코 손연서와 이혼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누가 손연서한테 이런 황금 동아줄과 같은 친구가 있을 줄 알았단 말인가.“오 대표님, 사모님께서 뭐라고 하나요?”비서가 조심스레 묻자 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모님은 무슨, 이혼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사모님이야.”“내가 고작 이런 여자한테 당할 줄 알아? 지금 당장 박민정 씨가 어디 있는지 알아봐. 내가 직접 만나러 가야겠어.”“네.”말을 마치자마자 비서는 사무실을 나갔다.그리고 손쉽게 박민정은 지금 정수미와 같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그렇게 오준수는 여러 가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선물을 준비한 뒤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안.박민정은 마침 손연서와 통화 중이었다.“민정 씨, 너무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 제대로 그 사람 골탕 먹였거든요. 그리고 뻔뻔스럽게 저랑 재혼하자는 거 있죠?”그러자 박민정이 눈살을 찌푸리고 답했다.“그래도 아주 멍청한 사람은 아니
오준수는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지엔 그룹 부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부사장님, 여태껏 저희랑 잘 지내왔으면서 이번 건은 왜 갑자기 취소한다는 걸까요?”이때 수화기 너머에서 한껏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굴 건드렸는지 아직도 몰라요?”오준수는 당연히 몰랐다.“저는 건드린 적이 없는데요?”한껏 주눅이 든 목소리는 전혀 오준수답지 않았다.부사장도 이처럼 멍청한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이제는 측은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지엔 그룹의 새 대표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나요?”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느라 회사 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한때, 그의 아버지 오현웅은 모든 일을 빈틈없이 깔끔하게 처리했던 사람이라 오준수가 이런 자잘한 일까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작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부담이 오준수 한 사람에게 떠넘겨지게 되었다.오준수가 다급히 비서에게 묻자 비서는 현재 신임 대표는 정수미의 딸인 박민정이라고 알려줬다.“박민정...”오준수는 왠지 귀에 익은 듯한 이름을 계속 곱씹어 봤지만 정확하게 그녀가 누구였던지 기억나지 않았다.이때, 옆에 있던 비서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손연서 씨 친구입니다.”순간 오준수는 온몸이 굳어졌다.애써 정신을 차리고 수화기에 대고 대답하려고 보니 상대방 쪽에서는 이미 전화를 끊어버린 상태였다.지엔 그룹 부사장은 지금 오준수와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오준수는 끊어진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왜 그걸 잊어버렸지?”그러면서 머리를 몇 번 세게 두드렸다.“연서가 지엔 그룹의 대표랑 친구 사이라고? 어쩐지 우리랑 갑자기 계약을 취소하더니 외부에도 우리랑 계약하지 말라고 했네.”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오 대표님, 사모님한테 빨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아까까지 손연서라고 이름을 부르던 비서도 눈치껏 사모님이라고 불렀다.그 의미를 눈치챈 오준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손연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신호음만 들릴 뿐이었다.“
옆에 있던 애인이 맞장구쳤다.“손연서 같은 여자, 설령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낳긴 힘들었을걸?”그러곤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오빠,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오씨 가문의 대를 이었으니까.”그들이 낳은 아들, 성훈이는 이미 포동포동 살이 올라 커다란 덩치가 되어 있었다.손연서가 아이를 돌볼 때는 건강한 식습관을 신경 써서 관리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였다.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오냐오냐 자랐다. 오성훈은 기름진 음식을 입안 가득 우겨넣으며 거칠게 내뱉었다.“손연서 그 여자, 진짜 재수 없어요. 더러운 년이에요.”이런 말투는 모두 엄마를 따라 배운 것이었다.하지만 오준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다시 들었다.온 가족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했으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하인이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오준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는데 비서였다.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뭔데?”“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엔 그룹에서 저희 그룹과의 모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수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뭐? 무슨 헛소리야? 지엔 그룹과의 계약은 최소 5~6년은 남았어! 갑자기 취소될 리가 없잖아!”그동안 그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엔 그룹과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든다고?비서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또...”그러나 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오준수는 불길한 예감에 다급하게 다그쳤다.“또 뭐가 있는데?”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지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씨 가문과 협력하는 기업은 곧 정씨 가문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요.”이 말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오준수의 머릿속
손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민정 씨,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연서 씨도 도와줬잖아요.”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과거 그녀가 윤소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손연서가 나서서 힘을 써준 적이 있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연서는 여전히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손연서가 떠난 후, 박민정은 정수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정수미는 오씨 가문의 남자들을 가장 혐오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정부를 만들어 원래의 배우자를 해치다니. 이런 남자들과 도덕 없는 애인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민정아, 그 여자의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민정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오준수예요.”오준수.정수미가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떠올렸다.“오현웅 회장의 아들입니다.”“아, 그 사람이구나.”정수미의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그 오준수, 몇 번 본 적 있어. 나한테도 몇 번 찾아온 적 있고. 근데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그냥 허세뿐인 한량이지.”문득 떠오른 듯, 정수미가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그 사람 아버지 체면을 봐서 오씨 가문과 거래를 한 적이 있거든. 네 친구를 돕고 싶다면 계약을 취소하면 돼.”박민정은 정수미가 오준수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줄이야.“그거 참 잘됐네요. 마침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별것도 아닌 일에 머리 쓸 필요 없어.”정수미는 오씨 가문 따위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씨 가문이 정씨 가문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 정도의 차이였다.“김 원장이 그러잖아. 너 요즘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둬.”정수미가 덧붙였다. 그때 옆에 있던 정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언니, 내가 해줄게요.”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먼저 찬
정수미는 자신이 여기 있으면 대화가 불편할 거란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밖에 가 햇볕을 쬐겠다고 했다.그녀가 나가자 세 사람은 한결 편해졌다.지원 엄마는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예찬 엄마, 다음 학기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잖아요. 예찬이는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에요?”박예찬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박민정은 도한 엄마에게도 초청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아직 한 장 더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학교는 이미 정했어요. 혹시 지원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같이 다니게 할까요?”“좋아요!”지원 엄마는 학교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이라면 분명 좋은 학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럼 제가 시간 될 때 초청장을 드릴게요.”“고마워요, 예찬 엄마.”지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손연서는 아이가 없어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그녀는 엄마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자신이 왜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택했던지 후회스러웠다. 만약 전 남편의 본모습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자신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잠시 후, 지원 엄마와 도한 엄마는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손연서는 계속 남아 박민정에게 과일을 깎아 주었다.박민정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기억을 잃은 후로 손연서의 소식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손연서는 사과를 깎아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편해요. 예전보다 훨씬 나아요.”그러다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다만, 이제 와서 좀 후회가 돼요.”“후회요?”“네, 민정 씨가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요.”손연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전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왜 그런 말을 해요?”박민정은 손연서가 아직 젊은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이
유남준은 떠나지 않고 혼자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남준아.”김인우가 먼저 다가왔다.“술 한잔하러 갈까?”유남준은 그를 흘겨보았다.“하랑 씨 임신했다며? 무슨 술이야.”“오늘 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낼 테니까, 우리도 재미 좀 찾아야지.”김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다희, 정민기, 방성원을 바라보았다.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우리 애가 싫어할 거예요.”방성원도 거들었다.“우리 딸이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하거든.”정민기는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전 술 안 마셔요.”김인우는 입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자신만 아직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좋은 남자친구, 좋은 남편이 되어 있었다.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 너도 철들 때가 됐어.”“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지...”서다희가 말했다.“우리 애가 그러더라고요. 심심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굳이 술 마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대표님?”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술은 몸에 안 좋아.”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있었다.“그럼 뭐 할 건데? 밤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잖아.”“그건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쉬는 게 좋겠어. 난 그래도 딸 보러 먼저 가볼 생각이야.”방성원이 말했다.“알겠어.”김인우는 바로 옆방을 준비하도록 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은 모여서 카드나 한 판 하며 시간을 보냈다.옆방에서는 김인우의 예상대로 모두가 박민정을 위해 오늘 밤만큼은 함께 있기로 했다.다만, 고영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박윤우와 박예찬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유남준을 찾아왔다.유남준이 그들에게 말했다.“너희, 이제 세 살짜리 아기 아니잖아. 알아서 잘 곳 찾아가.”결국 두 아이는 방 한쪽에서 나란히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감탄했다.“남준아, 유전자 진짜 대단하다. 윤우랑 예찬이, 완전 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