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귄 것은 옳지 않은 선택이었어요. 그 사람은 우리 가문의 모든 사람을 죽였어요. 저는 그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았고 줄곧 그 사람을 떠나고 싶었어요. 설인하가 말했다.진서연은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입을 크게 벌렸다.이건 그야말로 소설의 줄거리 같았다. 방성원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다른 가문의 온 가족을 죽일 수 있는 건지 생각했다. 설인하는 과거를 언급하기 꺼리는 듯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민정 씨, 이 정도밖에 말해줄 수 없어요. 미안해요. 오늘 수아 씨가 민정 씨 전남편이 유남준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난 민정 씨가 진작에 내가 방성원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이 시켜서 나를 감시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박민정은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 “우리가 잘 왔네요. 이 오해를 풀지 않았으면 제가 나쁜 사람이 될뻔했어요.” 그러자 설인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당신이 방성원과 같은 편이었어도 난 당신이 정말 고마운걸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와 은정이는 이미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설인하는 좀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했다. “난 다시는 박성원한테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도망간 거예요. 제가 능력이 있게 되면 아이를 데리고 가서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어요.”박민정은 이 말을 듣고 자신의 호의가 헛되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 조금 위안을 느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설인하는 잠시 침묵했다. “내일 일자리를 찾으러 나가려고요.”“산후조리도 잘 안 됐고 아이까지 데리고 있는데 어떻게 일자리를 구해요?”진서연이 물었다.설인하는 진지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설거지하든 바닥을 닦든 다 할 수 있어요. 아이도 이제 곧 백일이니까 아이를 업고 일할 수 있어요.”그녀의 말을 듣고 박민정과 진서연은 모두 방성원이 그녀한테 잘 못 대해준다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산후조리도 못 한 여자가 아이를 업고 힘든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나랑 같이 가요. 이제 좀 지나서 서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뭐해?]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박민정은 오늘 하루 정말 너무 바빴다.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자택에 돌아와 대충 씻고서 바로 잤다.휴대폰을 아예 보지 않아서 유남준이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도 몰랐다.유남준은 그녀의 답장을 기다리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이튿날 아침 일찍 모두가 일어났다. 남자가 여자 쪽으로 신부를 맞으러 가야 했다.고영란은 윤우보고 들러리를 하라고 했다. 박윤우는 정장을 차려입었는데 잘생기고 귀여운 외모를 뽐냈다.박예찬도 김훈을 따라왔는데 고영란은 큰손자를 보고 더욱 기뻐했다. “예찬아, 어서 할머니한테로 와. 우리 예찬이 좀 보자.”그녀도 김훈의 건강상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박예찬이 김씨 가문에 머무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박예찬은 고영란을 향해 걸어갔는데 더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할머니.”“아이고, 우리 예쁜 강아지.”고영란이 박예찬을 안으려 했는데 박예찬이 비켜섰다. 그는 할머니에게 안기는 것이 싫었다.그는 고영란보다 자신을 엄청나게 아끼는 김훈을 더 좋아한다.고영란의 손은 허공에 뻣뻣하게 굳어져 있다가 조금 서운한 듯 손을 내렸다.집사가 와서 전했다. “사모님, 신부가 곧 올 것 같아요.”“그래.”고영란은 먼저 결혼식을 준비하러 갈 수밖에 없다.김훈은 박예찬이 고영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 다가가서 물었다. “예찬아, 할머니한테 왜 그렇게 차가운 거야?”“증조할아버지, 저와 동생은 어릴 때부터 엄마 손에 자랐어요. 할머니랑 별로 안 친해요.”박예찬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렇구나.”김훈은 박예찬을 나무라지 않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나는 예외네.”박예찬은 김훈을 정말로 좋아했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면서 당당한 성격이고 나쁜 꿍꿍이가 없는 마음씨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예찬아.”멀리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조하랑의 아버지였다. 그는 박예찬을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빨리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결혼해.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되잖아.”조하랑은 아이를 낳는다는 말에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아니야. 난 다른 사람의 아이를 놀리는 게 재밌는 거 같아.”그녀는 아이를 낳는 고통을 참을 수 없었고 아이를 돌볼 인내심도 없었다.“민정이 네가 몰라서 그래. 원래 남의 집 아이가 더 귀여운 법이야. 아이를 돌볼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야.”조하랑은 민수아를 비롯한 그녀들보다 아이를 돌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전에 해외에 있을 때, 조하랑은 방학하면 박민정을 도와 아이를 돌봤었다. 한두 살의 아이를 돌보는 것은 그야말로 힘들었다.그녀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뭐라 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박민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윤소현과 유남우의 결혼식은 꽤 성대하게 준비해서 많은 명문 귀족들이 참석했다.방성원도 박민정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형수님, 오랜만이에요.”박민정은 그의 점잖은 얼굴을 보고 자기 집에 있는 설인하가 생각났다.정말 사람이 겉모습만 봐서는 안 된가고 생각했다. 설인하가 말하는 방성원은 참 악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오랜만이네요. 도련님.”박민정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자기의 아내와 아이가 모두 박민정과 같이 있는 것을 아는 방성원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박민정한테 물은 것이지만 사실은 설인하와 방은정이 궁금한 것이었다.박민정은 그의 뜻을 알아챘다.“잘 지내고 있어요.”방성원이 또 무엇을 말하려 했는데 김인우가 걸어왔다. “성원아. 술 마시러 가자.”그는 또 조하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쪽은 왜 왔어요?”“왜요? 그쪽은 올 수 있는데 내가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정말 웃기네요.”조하랑이 쏘아붙였다.김인우는 그녀의 말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언짢은 표정으로 방성원과 부잣집 도련님들을 찾아 술을 마시러 갔다.그들이 떠나자 하객도 점점 많아졌다.조하랑
“뭐라고?”박민정은 방금 자기 아들을 해치겠다고 협박하는 여자에게 다가갔다.여자는 저도 모르게 박민정의 아우라에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는데 재수 없는 말투는 여전하였다. “내 말은 너보고 처신 똑바로 하고 다니라고.”박민정은 주먹을 움켜쥐었다.눈앞의 여자가 누군지 박민정은 안다. 유남준의 먼 친척인데 집에 작은 회사를 차리고 있다.유남준이 이렇게 됐다고 이런 사람도 감히 나와서 자신을 괴롭히고 자기 아들까지 위협할 줄은 정말 몰랐다.그녀가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주변 사람을 건드리는 것이다. “왜? 겁먹었어?”여자는 박민정이 자기를 빤히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박민정이 자기를 무서워하는 줄 알았다.박민정은 간신히 화를 참았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두었다.“방금 한 말을 후회하지 마.”“후회할 게 뭐 있어? 내가 겁먹을 거로 생각하지 마.”그러자 박민정 곁에 있던 조하랑이 그 여자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그래? 겁주는 게 아니라 너에게 한 가지 알려줄 것이 있어. 우리 민정이 두 아들 중 한 명을 김훈 어르신께서 증손자로 받아들였다. 방금 네가 한 말은 내가 어르신께 곧이곧대로 말할 거야.”김훈 어르신의 얘기를 듣고 여자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진주시에서 살아서 이 사실을 아는 다른 한 여자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런 일이 있긴 해. 어르신께서 그 아이를 되게 이뻐하셔.”여자는 속으로는 무서웠지만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증손자로 여기는 거지 친손자도 아니잖아.”“그럼 김씨 가문의 미래 며느리인 나도 안 무서워?”조하랑도 이 신분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여자들이 너무 심하게 괴롭혀서 하는 수가 없었다.여자는 유씨 가문에 별로 와본 적이 없고 조하랑이 누군지도 몰랐다. 이 말을 듣고 옆 사람을 쳐다보았는데 사실인 거로 확인되자 여자는 순간 풀이 죽었다.“됐어. 그만하자. 입만 열면
“새언니, 둘째 사촌 오빠 곧 결혼한다고 들어서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어요. 새언니한테 감사 인사도 드릴 겸으로요.”추경은이 웃으며 말했다.“감사 인사요?”박민정은 그녀가 무슨 꿍꿍이인지 몰랐다.“맞아요, 고마워요. 새언니가 나에게 오빠를 양보하지 않은 덕분에 셋째 도련님을 만났으니까요.”추경은은 말하면서 손을 내밀어 박민정과 조하랑에게 자기의 비둘기 알보다 큰 보석 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셋째 도련님께서 주신 건에요. 예쁘죠?”박민정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옆에 있던 조하랑은 더욱 어이없어했다. 추경은을 미친 사람으로 보았다. 물건 양보하는 건 들어봤는데 남편 양보하는 건 난생처음 듣는다. 정말 생각하는 게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예쁘네요. 축하해요.”박민정은 그녀가 자랑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축하해줬다.박민정은 고영란이 자신의 친조카를 불구덩이에 밀어 넣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지난번 고영란이 말했다시피 셋째 도련님은 절대 치정 남이 아니다.추경은은 박민정이 자기를 조금도 자신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재미없어했다.그녀는 박민정이 자기가 더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것을 보고 화가 날 거라고 생각했다. “새언니, 사실 너그러운 척할 필요 없어요. 다 여자끼리. 저는 지금 남준 오빠가 바보로 되고 눈도 안 보이게 돼서 언니가 얼마나 힘들지 알아요.”박민정은 어이기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추경은은 말문이 막혔다.“저는 그냥 새언니가 무슨 일이든 마음속에 숨겨두지 말고 털어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임신 중인데 남준 오빠가 그렇게 됐으니 힘들겠죠. 그걸 털어놓아야지 참으면 병이 생길 것 같아요.”그녀는 겉으로 박민정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박민정이 화나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만족시키고 싶었다. 박민정은 당연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려 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요. 힘든 거 없어요. 매일 잘 먹고 잘살고 있으니까. 참, 우리 시어
조하랑이 한 말을 듣고 박민정은 깨달았다. 전에 고영란이 왜 추경은이 고씨 가문으로 가는 것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행운을 빌어야겠네.”박민정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추경은은 셋째 도련님을 찾지 못하고 여자들 사이에서 자랑하고 있었다.그 여자 중 셋째 도련님의 인품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몰래 그녀를 비웃었는데 모르는 사람은 정말 그녀를 부러워했다.그중에는 추경은이 자랑하는 꼴을 못 봐주겠어서 셋째 도련님은 누구나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추경은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그 여자들과 같은 줄 알아? 나는 그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젊고 예뻐.”박민정은 이 말을 듣고서야 추경은도 셋째 도련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무시하는 쪽을 선택했다. 심지어 자신이 셋째 도련님의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여자들보다 낫다고 느꼈다.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참하게 죽는다.이렇게 보면 앞으로 추경은이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하는 수 없다. 모두 그녀가 자초한 일이니까.그녀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유씨 가문의 룰에 따르면 먼저 술을 따르고 그다음에 결혼식을 한다.윤소현과 유남우는 어른들에게 술을 올리기 시작했다.이때 유씨 가문에서 누군가가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 “남준 형은 왜 안 왔어요? 형이 안 왔는데 술을 올리는 것은 격식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유씨 가문의 남자들은 누구든지 다 그룹 안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한다. 예전에는 유남준을 상대로 어떻게 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그가 바보로 되고 눈도 멀었으니 한바탕 망신을 주고 싶었다. 그가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것임을 알아들은 유남우는 집사에게 말했다. “가서 형 모셔와.”집사는 어리둥절해졌다.옆에 있던 고영란도 표정이 안 좋았다. “남준이는 아직 아파서 나오기 불편할 거야.”“뭐가 불편해요? 남준이는 바보가 되었지만 유씨 가문 사람이고 남우의 사
같은 여자로서 윤소현은 홍주영이 유남준에 대한 감정이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윤소현이 그녀를 까발리지 않은 것은 그녀는 생긴 것도 별로고 꾸밀 줄도 모른다. 여성스러운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빽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여자는 자기의 상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유남우가 그녀를 좋아할 리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했다.이 말을 들은 홍주영은 윤소현에게 말했다. “업무상의 일입니다.”“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제가 더 알아야 하겠죠. 우리 정씨 가문은 호산 그룹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라는 거, 아시죠?”윤소현은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그녀는 말할 때, 계속 정수미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정수미가 와서 자신의 결혼식을 망치게 하려는 이 못된 사람을 혼내 주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말이다. 홍주영은 윤소현이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유남우를 쳐다보았다.“도련님.”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 사람들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유남우는 홍주영이 공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분명히 남이 들으면 안 되는 무슨 일이 생긴 거로 생각했다. “소현아, 금방 다녀올게.”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유남우가 가려 하자 윤소현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의 팔을 덥석 껴안았다.“안 돼요. 아무 데도 못 가요. 우린 곧 어른들께 술을 올려야 해요. 남우 씨가 가면 나 혼자 어떻게 하라고요?”윤소현은 아직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냥 지금 유남우와 홍주영이 가버리면 자신의 체면이 깎일 것으로 생각했다.정수미도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고 걸어왔다.“무슨 일이야?”그러자 윤소현이 바로 일렀다. “남우 씨 비서라는 사람이 어떻게 된 건지 남우 씨와 따로 나가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저한테는 말을 하지 않고요. 이미 시간이 늦었고 이따가 어른들께 술을 대접해야 하는데 때를 놓치면 안 좋을 거로 생각했어요.”정수미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
결혼식이 시작되었다.보디가드 한 명이 유석진의 곁으로 가서 목소리를 낮추어 무슨 말을 했다. 그러자 유석진은 흥분해서 물었다.“정말?”“확실합니다.”보디가드가 말했다.주름이 가득한 유석진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쯧쯧. 유남우가 유남준과 같은 독한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의외네.”“지금 어르신께 말씀드릴까요?”보디가드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유석진은 손사래를 쳤다. “급할 것 없어. 오늘은 유남우의 결혼식 날이잖아. 그래도 내가 엄연히 큰아버지인데 그렇게까지 나쁘게 굴 수는 없지. 하하하.”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유남우를 어떻게 처리할지 속으로 생각했다.방금 보디가드가 알려준 건 IM 그룹이 유남우와 윤소현이 결혼하는 틈을 타 호산 그룹의 핵심 프로젝트를 많이 인수했다는 소식이었다.게다가 호산 그룹의 오래된 고객들도 파갔다. 그 고객들과 프로젝트들은 호산 그룹 주주들의 수익과 엄밀히 관련되어 있다. 유남우가 지금 정수미의 빽이 있더라 해도 호산 그룹에서의 자리를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유석진은 호산 그룹을 인수한 후 큰아들을 돌아오게 할 생각이었다.그때가 되면 호산 그룹은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생각은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유남준이 한 짓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결혼식 현장에서는 지금 윤소현과 유남우가 서로를 알고 사랑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틀었다.그런데 갑자기 스크린에 양도된 프로젝트와 빼앗기는 계약서의 사진으로 변했다. 그리고 호산 그룹의 급락한 주식을 캡처한 사진도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보지만 호산 그룹의 주주는 한눈에 알아보았다.“이건 우리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 아니야? 어떻게 된 일이야?”“장난해? 지금 우리 프로젝트 다 뺏긴 거야?”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박민정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그녀의 휴대폰에 지금 메시지가 한가득 와있었다. 열어보니 회사 단톡방이었다.[우리 허산 그룹 망하는 거 아니야? 왜 갑자기 많은 협력업체가 투자를 철회한 거야?][몰라요. 오늘이 대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